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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평점 :

나는 말의 가장 물리적인 측면을 좋아한다. 마음속에서 들리든 귀로 목소리를 듣든 들리는 소리가 좋다. 그리고 소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의미의 춤사위가 좋다. 말이 서로 관계를 맺는 의미, 가상의 세계 속 문장이나 텍스트 안에서 서로 관계를 이루며 무한의 변주를 다양하게 만들고 공유하는 말들의 춤이 좋다. 글쓰기는 말의 이러한 두 가지 양상을 통해 무궁무진한 연주로 나를 사로잡는다. 그것이 내 필생의 업이다. _p.85
우리는 우리들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어야 한다. 물론 자력으로 깨달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통찰력을 이용하는 방식은 아주 미미한 본능적 지식의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앞에서 말했듯이 세상을 인식하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는 기초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_p.288
BOOK.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어슐러 K. 르 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최근에 읽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읽으면서였다. 이 소설은 유토피아로 설정되는 '오멜라스'라는 공간이 전적으로 한 아이의 지독하리만치 비참한 희생에 의하여 성립하고 있다는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짧은 단편 소설인 이 작품은 가상의 조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이기심과 딜레마를 다루고 있어, 작품을 읽고난 후 오랜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딛고 서있는 이 행복은 누구의 희생에서 비롯되었을까. 나는 무엇을 외면하고, 잊었을까.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을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나는 옛말에는 틀린 것이 없고, 지혜는 경험에서 나온다고 믿는 사람이라 한 평생을 판타지 소설을 써온 어슐러 K. 르 귄은 어떤 인물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괴짜스럽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든을 넘긴 노년의 삶과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문학 산업, 그리고 젠더 갈등과 정치적 이슈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마지막 반려묘 파드와의 만남까지 다양한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깊이있는 사색을 공유한다. 작가가 말했듯 우리는 '노년'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노년기의 사람들은 행동이 고리타분하고 생각은 보수적이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 평생 살아오며 겪고 느껴온 것들이 정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윌 듀런트의 마지막 에세이에서도 자신만의 신념을 강하게 내세우고 여전히 가부장적인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쉬웠는데, 르 귄의 생각은 여든에도 유연하다.
르 귄의 생각과 글이 흥미롭고 유연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가진 '판타지 소설'에 대한 생각때문이 아닐까. 판타지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은 '꼭 그래야 할 필요 없다', '모든 일이 늘 하던 식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기본으로 쓰이기 때문에, 이러한 불확실성을 즐기는 작가로 한 평생을 살아왔기에 사고는 유연하되 지혜로운 통찰력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에세이'라고 하면 순간의 위로가 되어주는 짧은 글들이 떠오르지만, 나는 '에세이'라는 장르는 그 누군가의 통찰과 지혜가 녹아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여든이 되어 돌아본 삶이라는 시간의 흐름과 나를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그녀의 삶이 이 한 권에 담겨있다.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