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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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세상에서건 나처럼 생활력이 약하고 결함 있는 풀은, 사상이나 무엇도 없이 그저 스스로 소별해 갈 뿐인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도 조금은 할 말이 있습니다. 도저히 내가 살아가기 힘든 사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똑같다.'

이것이 도대체, 사상일까요? 나는 이 신기한 말을 발명한 사람은 종교인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의 주점에서 솟아난 말입니다. 구더기가 끓듯이 어느 틈엔가, 누가 먼저 말했다 할 것도 없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전 세계를 뒤덮고 세계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_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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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우리에게 죄가 있는 걸까요? 귀족으로 태어난 것은 우리의 죄일까요? 오직 그런 집안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영원히, 이를테면 유다의 인척들처럼 굽실거리며 사죄하고 부끄러워하며 살아야 하다니. _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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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박해지고 싶었습니다. 강인하게, 아니 난폭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민중의 벗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술 정도로는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늘 어찔어찔 현기증을 느끼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자면 마약 외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집을 잊어야 한다. 아버지의 피에 반항해야 한다. 어머니의 상냥함을 거부해야 한다. 누나에게 차갑게 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중의 방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_p.147

기우는 해. 사양.

지금은 '인간은 모두 다 똑같다',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말이 무척 익숙하지만, 과거 계급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에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귀족, 황족 계급의 몰락은 필연적이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 후 급격하게 사회가 변하면서 귀족들은 자신의 신분을 부둥켜 안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평민으로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출간 후 많은 화제를 낳았고, 몰락해가는 상류층을 칭하는 '사양족'이라는 말이 유행을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판 『벚꽃 동산』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사양』에는 다자이 오사무만의 특별한 지점이 있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사양』의 소개 문구에 등장하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논란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떤 분은 '반페미니즘'이라고 느끼기도 했다고 하여,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어떻게 느끼게 될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일본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정형화되어 있는 것 같다. 각종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 볼 때 여성의 모습이 여전히 얌전하고 순종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일본인의 성향과 더해져 내게는 이 작품 속 '최후의 귀부인'인 어머니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런 문화를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1947년에 출간된 이 작품 속 '가즈코'의 모습은 시대적으로 앞서간 주체적이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이라고 나는 느꼈다.

가즈코는 애정없는 결혼을 통해 한 번 아픔을 체험했고, 지금은 몰락해가는 집안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평생을 살아온 집을 팔아 지방 산 속의 별장에서 기거하며 해본 적 없는 밭일을 하고, 가진 옷들을 팔아 먹을 것과 바꾸어 살아간다. '최후의 귀부인'인 어머니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어머니지만, 경제력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전혀 무방비이며 전쟁에 참여했던 동생 나오지는 마약과 술에 기대어 살 뿐이다.

'귀족'이라는 계급만으로 살아갈 수 있던 시절이 지나 이제는 고귀한 척하는 '귀족'이라고 수근대는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들은 사회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사람은 모두 똑같다'고 하는 민중의 말에 자괴감을 느낄 뿐이다. 그렇게 가장 먼저 정신적으로 몰락해 간다. 해소되지 않는 정신적 갈등으로 마약과 방탄한 생활을 이어가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섬세한 감수성은 오히려 더 절망에 이르게 한다. 그렇게 어머니는 귀족으로서 생을 마감하고, 동생 나오지는 현실을 견디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나 가즈오는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 '가슴에 걸린 무지개'로 표현한 가즈오의 사랑은 사실 '사생아와 그 어머니'로 불리는 상황이지만 가즈오는 사랑을 이루는데에 낡은 도덕은 뛰어넘어야 할 벽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에하라에게 기대어 남은 생을 살아가기 보다는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기로 마음먹 는다. 어머니의 죽음과 동생 나오지의 자살로 삶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가즈오가 가지는 삶을 향한 욕망과 생명력은 단연 돋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체호프의 『벚꽃 동산』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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