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가고 싶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집이라는 껍데기 안에서 뒹굴뒹굴...ㅋㅋ
집이라는 껍데기는 보호막이면서 감옥이다. 그것은 바깥에서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친숙함과 연속성으로 이뤄진 외피다. 거리를 걷는 것은 사회에 관여하는 행위일 수 있으며, 봉기나 시위나 혁명에서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걸을 때는 정치적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걷기는 몽상과 주관성과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런 걷기는 바깥 세상의 자극과 방해가 내면에서 흐르는 이미지와 욕망(그리고 두려움(과 함께 연주하는 이중주이다. 생각은 때로 야외활동, 육체적인 활동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그 승리의 순간이 언제 어떻게 올지 알지 못하더라도. 미래의 기억이 없는 한 희망은 우리의 것이므로.
내게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세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꽤 자주 벌어진다는 것. 비공식적 사계사가 이미 보여주었듯이, 헌신하는 개인들과 대중운들이 역사를 만들 수 있으며 만들고 있다는 것. 우리가 언제 어떻게 이길지, 얼마나 걸릴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절망은 확실성의 한 형태다. 미래가 현재와 거의 같거나 현재보다 쇠락하리라고 믿는 확실성이다. 곤잘러스의 공감되는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절망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기억이다. 마찬가지로 낙관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확신한다. 절망과 낙관은 둘 다 행동하지 않을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현실이 반드시 우리 계획과 일치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희망일 수 있다. 창조력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낭만파 시인 존 키츠가 말했던 이른바 소극적 능력에서 생겨날 수 있다.
넘나 잠들기 전 내 모습이다ㅠㅠ 파김치가 되어 잠들지만 한 건 없는 거 같고. 그렇다고 뭔갈 하기엔 넘 힘들고. 고민만 하다 잠들기…
하루 종일 해놓은 게 없어. 자면 안 돼. 자기 전에 뭔갈 해야 해. 시낙하기 힘들어. 어쩌지… 쿨.
늘 가해자는 잊으라 한다. 난 아직 아픈데…
예전 일 좀 꺼내지마! 그때 일은 그때로 끝내!끝내길 원하는 사람이 누군데? 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쌓여서 만들어졌어요. 그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구요.
미러링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미 유효성을 증명해버린 듯.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드넓은 대학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아니면 아예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일렀다. 건물 안에 있어라.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붙였다. 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를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논리적인 해법이었지만, 남자들은 겨우 한 남자의 폭력 때문에 모든 남자더러 사라지라는, 이동과 참여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데 대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더러운 전쟁’의 실종들을 범죄로 명명하기는 쉽다. 하지만 지난 수천년 동안 여자들이 공적 영역에서, 계보도에서, 법적 신분에서, 목소리에서, 삶에서 사라진 것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