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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철학 - 고양이와 삶의 의미
존 그레이 지음, 김희연 옮김 / 이학사 / 2021년 5월
평점 :
도서관에서 고양이 그림책을 찾다가 이 책과 마주쳤다. 그리고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학문적인 태도를 취하자면, 이 책은 그다지 좋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애묘인이자 철학쪽에 몸담은 사람으로써 이 책은 아주 재미있었다. 그래서 나는 번역자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구매했다.
고양이에 대한 부분을 완전히 제거한다고 해도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온전하게 남을 것이다.
왜 인간은 철학을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진단과, 일종의 반철학(anti-philosophy)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자의 처방은, 저자가 고양이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다고 말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설명이 없이도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간략한 요약같은 것은 여기에다가 적지 않겠다. 어차피 누구 읽으라고 쓰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또는 철학함)에 대한 저자의 진단과 처방은 모두 편협하다. 그는 엄밀히 말하면 서양철학의 특정 조류, 죽음에 대한 공포로 대표되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영원하고 보편적인 원리를 찾고 그에 따르는 삶을 살려는 시도로서의 합리주의적 철학을 비판한다. 대부분의 명민하면서도 회의론적 태도를 취하는 식자들이 그러하듯, 저자는 비판을 할 때는 날카롭지만 대안으로 나아갈 때는 일부러 그러는 것 마냥 굉장히 단순무식한 태도를 취한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복합적인 개념들의 지저분한 잡종처럼 불명료하고, 도가의 무위자연적 삶의 태도는 동양 철학에 익순한 식자들에게는 매우 식상하기 그지없다. (이 두 가지가 저자의 철학 치료제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처럼, 동양적 지혜가 뭔가 서양적 철학병을 치료할 것처럼 구는 것은 동아시아의 독자 입장에서는 참으로 지루하다. 스피노자로 현학떠는 학자들과 도가 철학으로 현대의 서양철학병을 치료하고 삶을 되돌려 줄 것처럼 과대광고하는 학자들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 내 입장에서는 정신이 구토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재미있다. (과음을 해도 구토를 하겠지만, 그전까지는 기분이 좋지 않은가?) 분명 저자는 진지하다. 전문 철학자가 철학에 대해서 느끼는 실존적 회의의 짙은 향기와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사실 내가 이 책을 구입한 가장 큰 이유는 이 책 덕분에 철학자로서의 몽테뉴를 발견한 기쁨에 보답하기 위해서이다. 몽테뉴에 대한 책이나, 그의 <에세>(<수상록>으로 많이 알려진 책이다)에 입문하게 되어서 나는 기쁘다. 16세기의 지옥이라는 용광로에서 스토아적 현자를 동경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의 긍정법을 발견한 몽테뉴는 정말 매력적이다. 그리고 새뮤얼 존슨 박사의 소설 역시 너무도 즐거운 만남이다.
존 그레이라는 저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서도 여러분은 반-이론철학의 영웅들이나 침묵주의(quietism)의 영웅들(예를 들자면, 비트겐슈타인이나 존 맥다월 같은 사람들)의 책에 빠져서 나름의 교훈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보다 실용적으로 마음챙김(mindfulness) 명상을 통해서 자기 기만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매우 거칠게 말하자면, 전자는 아주 머리가 아픈 길이고, 후자는 머리가 아픈걸 완화하는 길이다. "어느 길이든 어떠랴. 그것이 너의 본성이라면 깊이 빠져 들어서 무시무시한 자기의식에서 벗어나라." 사실 이딴 무책임한 말 한마디 하는 것 이상으로 존 그레이가 딱히 더 해주는 말은 없다.
번역어에 대해서 한 마디 하자면 "diversion"을 "기분전환"으로 번역하는 것은 저자의 의도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diversion"은 주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터, 답 없는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낳는 불행으로부터, 무자비하게 회귀하는 자기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주의/생각 돌리기에 해당한다. "주의돌리기"가 더 낫지 않을까? "기분전환"이라고 하면, 일하다가 지루해져서 잠시 산책나가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물론 이런 의미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diversion"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추구행위이다. 이것은 단순한 일시적 도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을 살아가는 주된 방식으로 제안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점에서, "그러면 뭐든 다 괜찮아요? 음주나 마약은요? 비디오 게임은요?" 이런 질문이 나오게 마련이긴 한데, 여기서 자기보존이니 본성이니 그런 말 해봤자, 별 쓸만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보편적인 원리의 추구가 철학적 허구라며? 그렇다면 뭘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쓸데없는 소리를 좀 덧붙이자면,
몽테뉴는 멋지다. 새뮤얼 존슨은 버클리의 관념론에 짜증을 내며 돌멩이를 찼을 때보다 쓸데없이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느라 시간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할 때 더 멋졌다. 그리고 고양이는 이 둘을 초월해서 훨씬 더 멋지다. 고양이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