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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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독 이와이 슌지의 첫 아트 미스터리 소설 <제로의 늦여름>. 다양한 색채의 아름다운 청춘, 로맨스 영화를 만들어 냈던 그가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을 쓰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사실화를 소재로 마치 도시전설 같은 수수께끼에 적절한 로맨스 요소를 섞어 스릴 넘치면서도 어쩐지 청량한 느낌의 작품이 탄생했다. 찾아보니 표지 역시 사실화를 사용해 디자인했다고…… 정말 놀랐다.


'나유타'라는 가명을 쓰며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사실화 화가가 있다. 주로 인물화를 그리며 결과물은 흡사 사진을 방불케 한다. 현실을 그대로 복제하는 사진 기술이 발달한 요즘, 사실화가 가지는 예술적 가치는 여러모로 퇴색되고 있지만 나유타의 그림은 무언가 다르다. 그런 그에게 언젠가부터 사신이라는 별명이 뒤따른다. 나유타가 그린 인물은 무조건 죽는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이야기는 한때 재능 넘치는 화가를 꿈꿨던 카논이 나유타의 그림에 매혹되고 그를 취재하기 위해 여기저기 발품을 팔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흐름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하기도 하며 딱히 새로울 것도 없지만, 나유타에 대한 알쏭달쏭한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 두꺼운 분량의 페이지는 순식간에 휙휙 넘어가 버리고 만다.


영상화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저자의 개성이 그저 고스란히 담긴 것인지 문장 속에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색채가 듬뿍 담겨 신선했다. '죽음'이라는 불행한 키워드가 작품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 장의 매혹적인 그림이 만들어 낸 각 인물들의 교차점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얽혀, 부드럽게 정리되는 마무리는 정말 좋았다.


화가의 마음 속 어둠과 예술 작품.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술이란 창작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줄까? 가장 많은 수를 뜻하는 '나유타'와, 아무 수도 없는 0을 뜻하는 '제로'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예술, 사랑, 인연과 재능, 신뢰와 배신 그리고 생명과 죽음, 다양한 요소를 조화롭게 담은 완성도 높은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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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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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문학은 <돈키호테> 이래로 별로 접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내게는 조금 낯선 문화권이다. 그래서 그런지 <토끼들의 섬>은 내게 연신 독특한 느낌을 자아냈다. '환상과 악몽을 오가는 매혹적인 세계'라는 말처럼, 금방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날 듯하면서도 마지막 한 발걸음은 문 너머로 옮기지 않는 기묘하고도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표제작 <토끼들의 섬>에선 내가 전혀 상상치 못했던 전개가 펼쳐졌다. 섬을 망가트리는 흰 새 무리를 쫓아내기 위해 풀어 둔 토끼 몇 마리가 어떤 재앙을 몰고 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조금은 잔인하고, 출구 없는 미로처럼 느껴지는 절망적인 세계가 괴기스럽게 펼쳐진다.


이어 한쪽 귀와 발에 이상을 느끼고 그것을 숨기려는 여자, 집착이 심한 애인과 헤어지고자 하는 여자, 공중에 떠있는 할머니와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는 거리를 걷는 이야기, 마약과 정신병, 알 수 없는 소음에 시달리는 주인공, 페이스북에 얽힌 한 부부의 스토리와 가짜 결혼식, 점술과 메시지에 얽힌 이야기 등 초현실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쓰인 이 얽히고설킨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 나가며 독자는 무수한 환상을 맛본다.


태풍의 눈처럼 잔잔한 듯하면서도 금세 휘몰아치고 마는 엘비라 나바로의 세계관은 기묘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어딘가 비틀린 이 이야기들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수수께끼스러운 면모가 바로 이 단편집의 주목할 만한 아닐까 한다.


많은 추천사와 독보적인 수상 이력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므로, 현대 스페인 문학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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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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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세운상가를 무대로, 청년 예술가들의 현실을 그린 소설 <노란 밤의 달리기>. 방황하는 2030 세대들의 불안정함이 적나라하게 느껴지고 전반적으로 어쩐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풍이 떠오르더라니 무심코 읽은 책 소개에서도 비슷한 언급을 봤다. 소외, 상실, 고독, 사랑 등의 키워드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너무나도 만족스럽게 읽을 책.


"낮과 밤이 다 있는 사람이 좋아."


꿈을 좇는 청춘이 있다. 돈 안 되는 예술로 삶을 꾸려나가고자 하는 청년이 있다. 사랑과 예술이 전부였던 시간은 어느새 저편으로 멀어지고, 애인은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현실로 떠나 버린다. 항상 축제같은 나날을 보내라고 지어진 '휴일'이란 이름이 아이러니하게도 반백수의 삶으로 이끌었다는 블랙 유머가 소소하게 웃기다.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라는 말처럼, 겉으로는 안정적이어 보이지만 날 잡으면 속얘기로 하룻밤 꼬박 새울 불안정한 청년들의 이야기는 도무지 버릴 부분이 없다.


사진을 그만두고 공무원의 길을 선택한 친구도, 매일매일 새로운 애인을 찾아 결핍을 메우는 친구도, 국가 지원금을 받기 위해 다른 종류의 일거리를 찾은 친구도. 늘 재개발과 공사가 이루어지는 세운상가처럼 이 예술가 청년들의 그림자도 출렁출렁. 이들은 마음껏 흔들리고 마음껏 달린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라고 한탄하면서도, 꿋꿋하게 시간을 이어 붙이는 모습에서 말마따나 을지로 거리를 오랜 시간 지키고 있는 옛 건물들을 연상해 본다.


과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농밀한 이야기에서 모든 종류의 불안과 애정과 시간의 흐름을 맛봤다. 누군가는 유턴을 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직진만을 고집하는 인생에 과연 정답이 있을까. 내 20대가 생각나는 소설이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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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집 3
아야노 교 지음, 김예진 옮김, 우케쓰 원작 / 리드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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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가 이쁘고 내용이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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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버트 영매탐정 조즈카 2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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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매탐정 조즈카>로 일본 미스터리계를 뒤흔든 아이자와 사코 작가가 돌아왔다. 영매탐정 두 번째 시리즈 <인버트>는 범인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는 '도서 미스터리'의 특징을 따르고 있으며, 해당 특성을 상당히 본격적이고 전문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영매'를 이용하는 미소녀 탐정 조즈카 히스이가, 진범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각 에피소드에서 프로그래머와 초등학교 교사, 형사가 범인으로 등장하고 이들은 분명 완벽한 계획 살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예리하게 허를 찌르는 조즈카에게 고전한다.


일단 독자는 범인이 누구인지 초반부터 알고 시작하기 때문에 어쩐지 범인에게 이입해 더욱 두근두근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 조즈카가 사건의 진상을 좁혀낼수록 범인과 독자는 긴장하게 된다. 이게 매력이라면 매력이고, 작가가 의도한 심리 장치일것이다.


조즈카의 덜렁대는 캐릭터성도 귀엽고 지켜보는 맛이 있지만, 내용적으로도 완성도가 높고 적당히 반전도 숨어 있기 때문에 남녀노소 모두 호불호 없이 읽을 수 있는 일본 미스터리인 듯하다.


대작이라는 1편을 아직 읽지 않았기에 궁금하다.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읽어 보지 않을까……. '도서 미스터리'에 친숙하지는 않지만, 단순히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데서 느낄 수 있는 쾌감과 흥미본위적인 성격을 떠나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기 때문에 꽤나 심오한 기분으로 즐길 수 있었던 연작 단편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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