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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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을 길게 늘여지게 주절거리는 것은 쉽다. 진정 어려운 일은 언어를 극도로 정화하여 함박눈과 같이 군더더기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만 남기는 것이 아닐까.
막상스 페르민 이라는 작가는 그 일을 기어코 해 냈다.
요즈음의 나는 책을 닥치는 대로 사놓고 보지는 않는, 좋게 표현하면 장서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읽지 않는 이유는 그럴만한 여유도 열정도 없어서임을 알고 있다. 최근 몇 달간 나는 쫓기는 것 같으나 절대 뛰지 않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더이상 달아날 힘도, 맞서 싸울 힘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책의 몇 페이지를 읽고 사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되었다. 오랜만에 손꼽아 택배가 오기를 기다렸으며 포장을 뜯자 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고, 쉼 없이 읽어내려갔다.
아쉬움이 혀 끝에서 아리게 느껴질 만큼 이야기가 순식간에 줄어나갔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은 반대로 내가 읽음으로써 얻는 모든것을 가장 완벽한 언어로 간결히 재단해 내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오랫동안 사투를 벌였을까 하는 것이었다.
두 개의 실로 엮어 나가는 극도로 단순한 이야기를 극도로 섬세한 방법으로 보여주면서 나는 그 어느때 보다도 풍부함을 느꼈다.
어렸을 때는 길고 긴, 수많은 색이 터져나오는 이야기가 좋았다. 그 다채로움과 뜨거움에 매료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시는 너무 단순해서 그 함축된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그러한 색채에 질려가고 있었다. 내가 침잠해서 그런걸 수도 있고, 그냥 단순히 취향이 바뀌어 가는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변화하고 있으니까. 나는 간결함의 아름다움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직 충분히 간결하지 못해서, 아니면 지나치게 잘라내어서, 거의 넘치거나 부족했다. 까마득한 공중에서 외줄에 몸을 맡기듯 그 아슬아슬한 완벽함을 찾지 못했었다.
내 생일에 온 이 선물 같은 책은 아마 내가 지금까지 찾던 그러한 문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무언가 일 것 같다.

책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에도 이 책은 여전히 색이 없었다. 아니면 반대로 모든 빛이 있었다. 색에서 흰 색은 아무것도 없는 색이지만 빛에서의 흰 빛은 모든 빛이 합쳐진 것이니까 말이다. 어떻게 바라보던 이 책은 시작에서 끝까지 같은 새하얀 함박눈의 색이었다.
시작은 함박눈 한 송이가 내 이마에 살포시 내려온 듯한 순간의 작은 차가움으로 시작한다. 그 눈송이는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극도의 차가움은 극도의 뜨거움과 구분할 수 없듯이 나에게 어릿한 뜨거움을 남기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 여운은 나의 몸 구석구석에 퍼져나가 내 심장마저 울린다.

2 나는 요즘 언어에 관심이 많다. 어쩔 수 없이 제2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배우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세계가 열렸다. 각 언어는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가진다. 번역은 존재를 낯선 세계로 끌어내 변형하는 것 같다. 아직 무엇이라 완벽히 정의하지 못했다. 이 책의 역자는 창작자이자 번역가이다. 역자가 수없이 직역(번역)과 의역(창조)에서 줄타기하며 이뤄낸 결실이다. 이 존재는 다른 세계로 끌려나와 변형되었지만 놀랍게도 아직 그 자체로 충분하고 아름답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밤 새도록 원서를 찾아보았다. 아직 배우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덮은 후 배우기로 결정한 프랑스어 원서, 지금 배우고 있는 이탈리아어 판, 어느 정도 자신있는 스페인어와 영어 판. 모두 하나씩 찬찬히 읽어봐야 겠다. 나에게 전율과 울림을 전달한 이 작품은 아직 나의 세계에서만 본 것이다. 이 작품이 원래 탄생한 세계에서, 그리고 다시 변형되는 새로운 세계에서 볼 수 있다면 이 작품이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알아내는데 한발 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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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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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시리게 따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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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라틴어
허창덕 지음 / 가톨릭대학교출판부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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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들 리뷰 참고해서 라틴어 가볍게 공부해 보려고 구매했습니다.
사실 구매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책에 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잘 쓰여있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아요.
하지만 문제는 책의 가독성 입니다. 제가 구매한 판이 4판 10쇄 2017년 이후에 인쇄된 책 인데요, 책은 놀랍게도 1900년대 말에 인쇄된 책 같습니다. 실제로 집에 잇는 1970-1980년대의 책처럼 인쇄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에 첫 출간 한 책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의 책을 전혀 컴퓨터로 작업해서 다시 인쇄한 것이 아니라 스캔해서 계속 인쇄하시는 듯 합니다. 글씨나 편집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요... 이런 책은 처음 사봐서 놀라고 갑니다... 혹시나 다음 판은 꼭 재편집해서 제대로 인쇄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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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의미와 남들의 기대와 소망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 - < 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 필로소피 미디엄 지음 / 박주은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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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불행의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인간은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중략••• 차라리 이 모든 일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살아 있는 자를 겨우 숨쉬게 할 수 있다면?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신이 발명되고야 마는 역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인간이 오히려 신 앞에 무릎 꿇기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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