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의 소상(12)



민기의 시선은 노송숲을 떠나 여인에게로 향했고 배롱나무에 주고 있던 여인의 시선도 민기에게로 뻗어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인은 맑고 고운 때깔을 지닌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맑은 물감으로 칠해져 있는 수채화 같으면서도 그 속에 해저의 어둠과 같은 암울한 빛이 짙게 깔려 있었다.

 

다른 표현이라구요?

그럼 어떤 표현이 있을까요?”

 

여인은 한손으로 긴머리를 쓰다듬듯 뒤로 넘겼다.

 

실핏줄이 엽맥처럼 번져있는 손이다.

 

이런 표현은 어떨까요.

신비스러운 전설이 숨어 있는 적막이라는 표현말입니다.”

 

어머, 멋진 표현이예요.

정말 멋진 표현이예요.

신비스러운 전설이라는 그 표현은 너무나 멋져요.

어제 새벽에 잠에서 깨어 산책을 하려 밖으로 나섰는데 섬 전체가 안개로 덮여있었어요.

상록수 숲 쪽으로 걸었는데 안개에 가려져 있던 것들, 길가의 풀이며 야생화며, 이슬에 젖은 작은 돌멩이며 고엽이며, 그런 것들이 앞으로 걸어가면 안개를 뚫고 나타났다 발걸음이 지나가면 다시 안개에 숨기를 반복했는데 그 상황이 참으로 신비로웠어요.

왜 그런 것 있잖아요.

밝은 햇빛 밑에서 볼 때는 평범했던 그런 것들이 안개 속에서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그런 것 말이예요.

그 순간이 마치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본 것만 같아 신비롭다는 느낌을 받았었거든요.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어제의 새벽도 적막했는데. 그러니 적막 속에 신비한 전설이 숨어 있다는 표현은 너무나 적절하고 멋진 표현인 것 같네요.

혹시 시인 아니세요?”

 

여인은 어려운 시험문제를 풀다 정답을 알게 된 아이처럼 환히 웃으며 말했다.

 

시인이라구요?

제 주제에 어떻게 시를 쓰겠어요.

그저 느낀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민기도 한때는 시인처럼 맑은 가슴으로 살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런 관념은 뜯기고 허물어져 있었다.

 

배신의 아픔은 민기를 맑은 가슴으로 살아가길 용납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관념에서 철저히 이탈하길 강요했다.

 

결국 그는 알콜중독자처럼 술을 찾았고 술에 취해 현란하게 빛나는 네온사인에 묻혀 시간을 좀 먹었다.

 

그러나 술도 네온사인 빛도 민기의 슬픔을 감추어주지 못했다.

 

술이 깨고 네온사인 빛이 꺼지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때는 한층 추레한 모습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더욱 깊은 방황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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