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여름날의 소상(9)
민기는 여름바람도 겨울바람 만큼이나 매섭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연못 위로는 굵은 물결이 주름 잡히었고 세연정 뒤의 대나무 숲은 무너질 듯 크게 흔들렸다.
바람의 기세에 흠칫하던 민기는 세연정에 누군가 있는 느낌을 받고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살폈다.
세연정 앞기둥 뒤에 누군가 사람이 앉아 있어 어깨 윗부분만 보였는데 바람이 가는 방향으로 긴 머리카락이 날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여자인 것 같았다.
사람이 없는 줄로만 여기고 있었기에 갑자기 나타난 타인의 존재는 흥미와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존재였으나 민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민기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이 어떤 새로운 인연을 고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곧바로 반전이 되었다.
세연정에 거의 가까이 다가섰을 때 인기척을 느꼈는지 기둥에 기대여 앉아 있는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사람은 여인이었는데 그 여인은 민기에게 있어 전혀 생소한 여인이 아니었다.
민기는 보길도에서 그 여인을 몇 번 보았다.
아침이 너무 일러 바다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방파제 끝에서, 작열하는 태양에 달구어진 자갈 해변에서, 달빛이 숲을 애무하고 있는 상록수방풍림 숲에서 마치 정물화 속의 여인의 모습으로 그녀는 서 있었다.
여인은 때로는 묶지 않은 긴 머리카락으로 어깨를 덮은 채로 바닷가로 나섰던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그 긴 머리카락을 모듬어 뒤로 뭉쳐 큰 머리핀을 꽂아 이마를 훤히 드러내 놓았는데 그런 여인의 모습은 깊은 산 계곡에 피어있는 산꽃 같기도 하였고 물빛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는 하얀 수국 같기도 하였다.
“유명한 곳치고는 너무 적막하네요.”
몇 번 마주쳤으나 여인은 불어오는 바람같이 지나쳤고 민기도 지나가는 바람처럼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