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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신학 입문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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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시절, 사역자로서의 전환점이 되었던 수업이 있다. 갓 입학해 처음 들었던 수업인 “목회 실습.”교수님께서는 피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과제로 내 주셨고,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필요에 의한 피임의 정당성을 입증하며 제출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납득하기 힘든 ‘C' 라는 점수를 받았다. 나름 만족하며 제출했던 과제의 결과에 충격을 받았고, 낮은 점수를 받은 이유를 묻기 위해 정중히 교수님께 보낸 메일. 그에 대한 답신은 더 큰 충격을 주었다.“글의 논리적 구조는 좋지만 성경적 기초가 없습니다.”

당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신학을 시작했던 나. 철학적인 사유의 힘과 논리적 사고가 신학의 기초라고 생각했던 나. 화려한 문장과 뛰어난 글의 구조가 신학의 생명이라고 생각했던 나. 이렇게 교만했던 내게 교수님이 주셨던 적잖은 충격은, 다음 글을 통해 좀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신학은 말씀과 함께 서고 넘어진다. 그것은 신학 자체의 말보다 앞서는 말씀이며, 이 말씀을 통해 신학은 창조되고 깨워지고 도전을 받는다. 만일 신학의 인간적 사고와 진술이 바로 그 말씀에 대답하는 행동이 아닌 다소 다른 어떤 것이라면, 그런 사고와 진술은 공허하고 무의하며 헛된 것이다.”(22)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평가되어지는 ‘칼 바르트’가 백조의 노래로 별명 붙여진 “개신교신학 입문”에서 한 말이다.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질 만큼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던 그가 생각한 신학. 독일 지성인들이 전쟁을 지지하고 찬성하는, 신학 자체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 앞에서 그가 발견한 새로운 길은 과연 무엇일까?

“신학은 자신을 길게 설명하거나 변명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을 법칙대로 행하고 걸을 때, 외부를 향해 자기를 가장 확실하게 주장하는 셈이 된다.”(21)

바르트는 자질구레한 설명은 시간 낭비라 생각했다. 변명을 하기 위해 쏟는 에너지가 너무 아까웠다. 묵묵히 그 길을 가기로 선택했다. 마땅히 걸어가야 할 그 길을 무소의 뿔처럼 걸어갔다. 만일을 대비해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나름대로의 기준과 법칙을 세워놓았다. 외롭지만 그렇게 홀로 걷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자기를 보여주는 길이라 믿었다.

그렇게 그가 오롯이 걸어갔던 길엔 발자국이 생겼다. 그 발자국을 따라 뒤 사람들이 뒤따르기 시작했고 좋은 길이란 소문이 났다. 증인들도 잇따랐다. 그의 발자국은 뒷사람을 위한 이정표가 되었다.

대신학자의 일평생의 신학이 담겨 있는 법칙서, 그의 마지막 강의를 엮은 마지막 이정표와 같은 책, “개신교신학 입문.”그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법칙을 알려준다. 이정표가 되어 길을 제시해준다. 독자는 책을 한 장씩 넘기며 그저 그가 걸었던 길만 걸으면 된다.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새 내가 걸어간 길은 뒷사람을 위한 또 다른 이정표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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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 -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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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안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참석했던 장례식. 그것은 지독한 아픔이고 처절한 고통이며 절망적 비극이었다.  계획되지 않았기에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었고, 예견되지 않았기에 아무런 대비도 할 수 없었다. 일상 속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 앞에서 유가족은 한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경험하며 죽음의 고통과 씨름해야했다. 사랑스런 세 자녀의 남편이자 소중한 아내의 남편이었던 성도님은 그렇게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 어떤 위로도, 격려도 할 수 없었다. 예배 가운데 들려지는 말씀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 같았다.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의 눈동자를 마주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5살 막내딸이 내던진 "아빠 언제와, 아빠 보고싶어"라는 말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휘저어놓았다. 왜?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이 있었기에?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그의 사랑에 대한 회의를 가져왔다.

"어느 특정한 순간, 유럽에서 일어난 지진은 신앙의 기초를 뒤흔들었으며 선한 창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었다.(28)"

우리는 악과 마주하며 살고 있다. 악에서 파생된 고통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짓누른다. 삶에 임한 고통에는 분명 그 분의 선한 의도가 담겨 있을거라는 교과서적인 대답도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르는게 좋았을거란 후회도 든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사회로부터, 가장 독실한 신자조차도 신앙이 인간의 다양한 기능성들 중 하나에 불과한 사회로 이동했다. ....(중략)...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다른 대안들이 존재하는 것이다."(36)

기독교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위해 긴 시간을 “고통과 씨름”해 왔다. 선하신 하나님과 악의 공존이라는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은 창조하셨지만 직접 관여하시지 않는 설계자라고 거리감을 두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시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그래도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고 계시다고 이해도 해 보았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고통을 허락하시지 않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표현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를 거라고 양보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논리와 이성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말았다.(188) 신정론이라 일컬어지는 하나님과 악의 문제가 “논리적 해답이라기보다는 의미를 향한 순례에 가깝다”는 중요한 교훈을 놓치고 있었다.(182)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나는 얼마나 쉽게 생각했던가?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분명한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자신감에 ‘기도가 해결해줄 거라고, 하나님만 바라보면 이겨낼 수 있다’고 어설픈 조언을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깊은 비통에 빠진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은 어느 때든 누구에게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뿐 아니라, 특정한 진리를 말하기에 적절한 때를 찾기 위한 목회적 지혜도 필요”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한없이 높아졌던 우월감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을거란 열등감이 나를 감싼다. 병든 자존감에서 파생된 고통과 씨름하는 나. 사통오달의 상황에 갇힌 내게 ‘토마스 롱’은 희망의 소식을 알려준다. “고통과 씨름하다.” 그는 고통을 해결하지 말고, 이해하지도  말고 그냥 고통 그 자체와 씨름하라고한다 . 그래서 “신정론의 임무는 철학 안에서 논리적인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지만 위험에 처해 있는 세계관을 보수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직면한 위험은 무신론과 위험한 장난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강화될 수 없는 것을 떠받칠 수단을 찾는 것”이다.(98)

떠받칠 수단이 무엇일까? “Solvitur Ambulando. 걸으면 해결된다.”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걸으면 해결된다. 때론, 하나님을 향해 항의도 하고 반항도 하면서 그 분과 함께 걸으면 해결된다. 비록 나는 용납할 수 없지만, 다른식으로 반응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더불어 함께 걸으면 해결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신앙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거기에 즐겁게 이끌려 들어가는 것이다.”(185)

그런데 함께 걸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모든 문제가 풀릴까? 솔직히 두렵다. 불안하다. 염려가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더불어 함께 할 길동무가 생겼다는 것이다. 더불어 함께 걷기에 가는 길이 외롭지 않다. 더불어 함께 하기에 마음이 한결 가볍다. 비록 악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았고, 여전히 고통과 씨름해야 하지만 더불어 함께 할 길동무가 있기에 위로가 된다. 아니 힘이 생긴다. 더불어 함께 하는 그 분은 “이 세상에서 원수와 싸우시는 데 칼의 힘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연약한 능력을 사용”(224)하셔서 “사랑의 비폭력성으로 악에게 폭력을 행사”하신 “우주적 악에 대한 신작 용사, 평화의 왕”이기시 때문이다. 

지금도 고통과 씨름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다. 두려워말고 고통과 씨름하라. 그분과 더불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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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 산다는 것
크리스틴 폴 지음, 권영주.박지은 옮김 / 죠이선교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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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신학자 '크리스틴 폴'이 쓴 "공동체로 산다는 것"을 통해 공동체 회복에 대한 원리를 찾고교회에 적용시킬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대안을 발견한다특별히라브리라르쉬카톨릭 워커등과 같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체험한 현장의 생생한 경험과 기독교 사회 윤리학을 공부하고 가르친 학문적 바탕은 책의 내용을 풍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흘러넘치는 생수와 같이 만든다.

 

공동체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 저자가 강조하는 덕목은 감사와 약속진실과 손대접, 4가지이다우리가 일상 속에서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기본적 가치하지만 이 덕목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에 건강한 유익을 끼치는지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무릎을 딱치는 새로운 깨달음과 동시에 우리의 무지를 알게 된다.


저자가 강조했던 지극히 평범한 4가지 덕목은 내가 속한 공동체뿐만 아니라 교회를 진단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또한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도 된다어쩌면 4가지 덕목에 비추어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내가 사랑하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고민을 안겨주는 공동체가 된다는 역설적인 사실 앞에 독자는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실재다.”라는 저자가 인용한 신학자 로버트 웨버의 말은 다시금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교회가 아니고서는 그 분의 임재도그분의 일하심도 나타날 수 없기에 우리는 교회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여전히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 땅의 대안이며 최후의 보루이다그리고 생명력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성실한 노력이 만날 때 빚어진다.” 다시 말해공동체로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안겨주는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며고민과 숙제를 안겨주는 고통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는 역설그 역설의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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