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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
리차드 미들톤 지음, 이용중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7월
평점 :
누림과 기다림이라는 선물
대전에서 전도사로 파트 사역을 할 때의 일이다. 부흥사이셨던 담임목사님은 매달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셨다. 작정 새벽기도와 매일 철야 기도는 부흥회 세트로 함께 진행되었다. 때문에 성도들은 주말뿐만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매일매일 교회에 출석도장을 찍어야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부흥회를 하고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회를 하는데 성도들은 지쳐갔다.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은 쉴 시간 없이 출석도장을 찍느라 힘들었고, 참석하지 못한 성도들은 자리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했다. 예수님을 믿는데, 신앙생활을 하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힘들었고 지쳐갔다.
담임목사님은 이런 목회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이 땅에서 성도들은 힘들어야한다. 고통스러워야한다. 그래야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을 사모하게 된다. 천국을 기다리게 된다." 성과 속, 선과 악이라는 철저히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고 계셨기에, 이 땅에 소망을 가지는 것은 금기였고, 행복을 느끼는 것은 죄였다.
이것이 비단 내가 사역했던 교회만의 모습일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시각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다. 인간 문화의 전 범위가 믿음의 방정식 속에 전혀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36) '리처드 미들턴'이 그의 저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한 말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원론적 사고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상실한 것일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 가치라는 것이다. "우리는 길을 잃어버림으로 하나님의 원래 목적에서 벗어났다는 실존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성경 이야기의 내적 논리를 종종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개념적 의미에서도 줄거리를 놓쳐버렸다."(58)
구원을 개인적 죄의 문제의 해결, 천국을 이 땅이 아닌 언젠가 가야할 미래적 시, 공간적 의미로 이해하는 전통적 신앙과 성경해석은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구원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 이르는 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뜻이자 성도를 향한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지상의 환경을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복잡한 사회 문화적 세계로 변화시키기 위해 능력을 발휘하는 고귀한 사명은 거룩한 사명, 신성한 부르심이며, 그 속에서 인류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주에 대한 창조자의 주권과 비슷한 것을 드러낸다."(66)
그에 의하면 구원에 대한 총체적 이해는 신, 구약 전반에 걸쳐있는 구원의 참된 의미를 끌어낸다. 신약의 메타포이자 전체적 그림이 되는 구약에는 구원의 전이해가 이야기형식으로 숨어있다. 구원을 예표 하는 출애굽 사건과 함께 지혜서와 율법서에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구원의 이야기가 녹아내려 있다. 이러한 구원의 이야기는 신약을 통해 완성되고 확장되는데, 구원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 회복과 모든 만물이 그에게 구속됨을 의미한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며(구원은 죄가 망쳐놓은 것을 고친다.), 창조된 실재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총체적이다.(234) 다시 말해, 구원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왜곡된 창조 질서를 올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신학자들이 "이미와 아직. (already, not yet)"으로 종말론을 표현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담고 있는 정수라 할 수 있다. 구원은 시, 공간의 개념이 아닌 통치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비록 정세와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고 있는 이 땅이지만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already) 임한 하나님 나라가 된다. 더불어, 성도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명을 이행하며 지금 거한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될 것을 소망한다. 그래서 아직(not yet)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
종말론에 대한 성경적 이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컬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현재의 삶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누릴 때 그 분의 통치와 함께 우리는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더불어,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릴 때 성도는 하늘 소망과 함께 이 땅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이미와 아직의 긴장은 성도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것은 누림과 기다림의 행복한 선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