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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권리 : 폴 라파르그 글모음 - 필맥 휴대책
폴 라파르그 지음, 차영준 옮김 / 필맥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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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통한 끝없는 인간의 소외! 쉼과 비움을 통한 인간의 가치를 찾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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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전쟁 화폐전쟁 1
쑹훙빙 지음, 차혜정 옮김, 박한진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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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적인 숫자의 돈, 도대체 감도 안온다. 그걸로 맛있는 짜장면을 얼마나 먹을 수 있다는 거지. 

좀 쎄게 나가서 우리집 전세값하고 비교해서 얼마나 많다는 거지.... 

전쟁이 돈먹는 하마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 하마가 적과 동지도 없고 적군도 아군도 없는 

오로지 돈의 흡혈귀인 은행가와 금융자본가라는 것에 다시한번 치를 떨게 된다. 

로스차일드가문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부를 쌓아서 어쩌자는 거지. 정치권력위에 경제력과 금권이 

좌지우지하다는 논리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금융독점자본주의, 군산복합체로서 지구의 생명과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그냥 아는 것과 

특정인물과 기업, 금융계의 음모가 드러나고 국가경제시스템이라고 믿었던 정책생산과 정치활동 

모두가 은행가들의 거액의 금권로비와 치밀한 전략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니..정말...입맛떨어진다  

사회정의, 민주주의, 경제적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무모하고 코끼리앞에 선  

개미꼴이라니...그동안 뭘하고 싶었던건지....이런자들의 음모와 계략에 놀아나서 살아가는 꼴이  

사회적 약자, 소시민, 서민들의 현실이라는 데 화가 난다. 

끝없는 탐욕과 한없는 권력욕의 금융자본가들의 계략과 음모를 단호히 거부한다면...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우리안에 탐욕과 이기심이 함께 만들어 내는 합작품이 아니겠는가 

악마들의 근거지는 늘 유혹에 흔들리고 넘어올 수있는 인간의 약한 이기심이다. 

사기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탐욕이 눈맞아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사람의 욕심을 

살짝 건드려주면 스스로 알아서 돈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이라고.... 

휴.....왜 이럴때 나는 <자발적 가난>이 더 그립고 소로우의 <월든>이 생각나는 걸까 

금융자본가의 탐욕과 계략에 맞서 싸워 권리를 쟁취하자는 불타는 정의감이 일어나기 보다는 

더욱더 안으로 숨으려는 소극적인 모양일지언정....진짜 외면하고 거부하고 싶어진다... 

끝을 모르고 돈을 빨아들이는 거대금융자본가의 탐욕에 치가 떨린다..... 

인간의 추악한 양면성.....그것도 우리들의 모습일진데...

반성하고 기도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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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와 다문화주의 - 시앙스포 총서 8
마르코 마르티니엘로 지음, 윤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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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백만시대를 넘어서면서 주위 가까이에 익숙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다문화><다문화사회><다문화주의>가 마치도 유행어처럼 퍼지면서 

우리에게 <단일민족, 단일문화>이야기는 흘러간 옛노래마냥, 조금 뒤떨어진 패션인양 

잠시 접어두고 있는 듯하다. 5천년역사를 자랑하는 단군의 자손들은 잠시 그 핏줄과 근본을  

깜박 잊어버린듯하다. 조금 촌스럽고 덜떨어져보이는 듯한 단군과 한민족유일문화가  

언제 유령처럼 월드컵광장을 메울지도 모르지만...잠시 잠깐 우리민족의 신화는 살짝 접어두고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다문화>를 최고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주민의 인구구성비율과 진입상태에 따라 이민화사회, 이민국가를 나누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그런 분류와 구분을 접어두고 이제 다문화가 대세라고 한다. 

처음들었을 때는 다문화라고 해서 다도, 다례, 다방처럼 무슨 녹차마시는 문화인줄 알았다. 

그렇게 다가온 다문화가 과연 우리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책에서 부제로 나온 '다르게, 평등하게 살기'처럼 다문화사회는 서로 다른 민족과 인종, 성,  

구성원이 문화적 다양성을 가지고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없이 존중받고 대우받으며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현대사회와 다문화주의에서 <다르게, 평등하게 살아가기>라는 부제처럼 우리가 서로 다름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으며 동등한 인격체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국적 취향, 타민족의 정서에 대해 감상적으로 피상적으로 문화적으로 접근하면서  

실제의 이면에는 차별과 배제의 논리, 타자에 대한 소외로 사회적, 정치경제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작가는 서로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각 국가의 인종차별주의, 국수주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해 

상당히 우려한다. 맑스의 공산당선언에서 나오는 유럽을 떠돌고 있는 하나의 유령이 있다라고  

하던데 실제로 앤더슨이 이야기하는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주의가 전세계의 곳곳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을 세계의 곳곳에서 시기적으로 다른 가면과 치장을 하고 나타나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다문화주의>는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 일뿐이다. 

시민적 권리와 민주주의가 동반되지 않는 다문화주의는 기만이고 위선이다.  

국가주도의 다문화주의는 실제로 국가, 정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성을 실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또한 다문화주의는 각 개인의 민주주의적 신념과 실천의 리트머스용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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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하인들 - 여성, 이주, 가사노동 여이연이론 17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지음, 문현아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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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고령화사회, 열악한 농촌현실을 두고 인구부양책이라는 명분을 세우며 

<농촌총각 국제결혼 비용지원조례>가 농산어촌 지자체마다 서로 앞을 다투어 만들어냈다 

아무도 농촌으로 시집올 사람이 없으니 지자체에서 국제결혼하는 농촌총각한테  

오백만원씩 지원해주겠다는 것이다. 대상의 자격도 저소득층기준이며 월보험료 1만원안되거나 

기초생계비수급자이어야한다고 한다. 이정도에서 한국의 여자들은 아무도 시집오러 올 생각이 

없으니 외국에가서 여자들을 수입해오자는 것이다. 지자체의 예산을 써가면서 농촌가구를 살리고 

인구를 늘리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집온 아시아의 여성들이 이미 20만을 헤아리고 있으며 이제는 여성결혼이민자를  

지원하는데서 한걸음 나아가 <다문화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100여개 지원센터를 만들어  

연간 1개소당 운영비로 5천만원 이상을 지원하며 기타 방문교육, 아동양육, 아동돌보미 

등등의 사업비로 2억이상의 국고지원을 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다문화가족지원일까? 

한국여성의 결혼기피, 사회참여로 인한 결혼의 지연, 저출산과 비혼의 문제에 대한 대안로  

등장한  듯한 아시아 여성결혼이민자들. 

현상적으로 보면 한국여성이 가족재생산의무를 제대로 다하지 않기 때문에 아시아 여성을 데려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가족 재생산을 유지, 연장할 수 있을 듯하다. 과연 그러한가 

한국 여성이 결혼을 기피하고 지연하며 외면하는 진정한 이유와 원인을 외면한 채 현상적으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고 새로운 대안인양 어쩔 수 없는 현실인듯 바라보는 데서 결코 

우리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해마다 치명적인 가정폭력사건의 주요피해자로 등장하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에 증가하고 있는 국제결혼의 이혼율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주위에서 이젠 아주 가까이 이웃으로 친척의 일원으로 함께하기 시작한 여성결혼 

이민자들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면 '본국의 남성들이 여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게 싫어서 왔다' 

'본국의 남자들이 술먹고 일도 안하고 손찌검하는게 너무 싫다''우리는 행복하게 살려고 왔다'  

다들 코리아드림을 꿈꾸며 한국사회에 들어왔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족'재생산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한국여성도, 이주여성도 '가족'을 거부하지않는다. 결혼을 반대하지도 않는다 

단, 일방의 희생과 의무를 강조하는 가족과 결혼을 반대하는 것이다. 

한국여성들이 일방적으로 짊어지기 싫어하는 '가족재생산노동' 이라 일컬어지는  

자녀의 출산, 양육, 요리와 집안 살림을 하는 것을 돌봄, 보살핌, 감정노동이라고 하는 것.

이에 대한 동등한 참여와 동등한 의무와 권리가 함께 하지 않으면 여전히 다른 누구가에게 

떠넘기고야 말 것들이다. 그것이 한국여성이 아시아여성에게 떠넘긴다고 할 수 있는가. 

실제로, 여성의 자매애적 연대와 아시아여성의 위계화가 서로 모순처럼 보인 듯 

마치 원인이 모두 여성에게 있는 듯하다. 해결도 여성들이 알아서 해야하는 듯하다. 

1세계여성이 3세계여성에게 가사와 육아를 떠넘기면서 경제적 사회참여와 자아실현을 하고  

3세계여성은 또다시 떠나온 본국의 빈곤여성에게 자신의 짐을 맡겨놓고 나간 것 처럼... 

과연 그런가. 작가는 연구의 키워드를 세계화, 여성, 이주, 가사노동으로 설정하면서 

실제로 뿌리깊은 가부장제를 파헤치고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실천이 무엇인가를 시도한다. 

이주한 3세계여성이 나가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아이들과 가족을 걱정하고 그 죄책감에  

시달리고 본국에 남겨진 아이들은 지겨울 정도로 엄마를 찾고 엄마의 부재에 대해 끝없는 원망과 

비난을 해댄다. 아니, 가족은 엄마와 아이들만 있는 것인가. 아빠는 무엇을 하는가.  

생계부양자로 엄마가 나서면 아동양육자로 아빠가 나서면 안되는가.  

무서우리만치 뿌리깊게 파고드는 가부장제의 '엄마''모성애'의 신화. 

돌봄, 보살핌, 감정노동의 역할과 의무를 국가와 사회, 가족은 가부장제에 고착되어 지겹도록 

여성을 괴롭히고 있다. 세계의 어느 여성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드는 '가부장제' 

세계화의 이면에는 추악한 '자본주의'와 끈질기게 달라붙어 괴롭히는 '가부장제'가 있다.  

작가는 연구자로서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문제점을 치밀하게 파헤치면서도  

'여성주의 글쓰기'라는 필치로 섬세하리만큼 이주여성이 겪고 느끼는 삶의 애환을 잘 잡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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