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극심한 한계상황에 다다르게 되면 과연 어느 정도까지 포악해지고 야만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 정의와 도덕성 따윈 기대할 수 없는 사회. 그것은 과연 천재지변으로 법과 질서가 무너지거나 혹은 문명을 따라온 인간이란 존재가, 처음부터 법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이 백지상태였던 구석기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일까.


1930년대 초 우크라이나 대기근 중, 한 마을에서 두 형제가 마침 눈에 띈 고양이를 좇아 사냥을 나선다. 형 파벨의 실종을 부른 그 일을 뒤로 시간은 20년을 점프한다. 왠지 모르게 책을 쓴 톰 롭 스미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레오는 전쟁영웅이자 촉망받는 국가의 기대주 MGB요원이다. 구소련 체제의 스탈린 정부와 그에 대한 절대복종이 당연시되던 그의 임무, 그리고 확고했던 신념을 흔들게 한 계기는 부관 표도르의 아들 아카디의 의문사고였다. 또 서방 스파이의 누명을 쓴 채 끝내 처형을 면치 못한 아나톨리 브로츠키의 초연하고 인간적인 면면은 그에게 왠지 모를 죄책감과 직업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대개의 주인공들이 그렇듯이, 레오 역시 사건의 미스터리함에 이끌려 연쇄살인의 의심을 품고 집중수사를 시도해 보지만 진술확보는 커녕 아내 라이사의 반역 혐의와 그녈 감쌌다는 이유로 모스크바를 떠나 지역 민병대 말단직으로 좌천되고 만다. 전화위복일까. 차라리 시선의 집중이 덜한 그 곳에서 레오의 사건수사는 활기를 띠고 마침내 상관 네스테로브도 그의 일에 적극 협력하여 가족과 동료 모두를 건, 국가에 대항하는 비밀수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범인의 발자국을 쫓는 순간에도 쉼없이 희생자는 늘어나고 거기엔 마치 유명했던 화성연쇄살인을 연상케 하는 범인의 난자와 물욕따위의 목적이 아닌 듯한 공통된 표시들이 있었다. 


급기야 수사상황이 노출되어 도망자 신세로 쫓기는 신세가 된 레오와 아내는 요원 시절 발휘했던 비상함을 그들의 목숨을 건 탈출과 도주에 써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이야기는 숨가쁘고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절정으로 치닿는다. 기찻간에서, 그리고 농가의 마을에서 그들을 도왔던 죄수와 농민들이 마음을 열고 그들 내외를 적극 돕는 장면을 마주할 때 위험한 상황에서도 뼛속까지 그릇된 이념으로 물들진 않았음을 확인했던 이들의 진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어 깊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입장에서 '좋은 사람'이란 대의에 봉사하고 충직하며 명령에 순응하는 효율성 있는 젊은 남자들이었다. 출산, 결혼, 교육, 취업등 어느 것에서도 당시 이념과 떼어 생각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보다 나은 미래, 재산, 신임, 안전을 위해 예의 모든 것을 국가의 원칙에 따라 배우고 순응하는 인생. 그것은 개인의 행복은 일절 배제되고 국가 대 개인의 관계만을 허락하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반역죄의 연결고리는 즉시 처단되는 악명높은 사회였다.


그들의 도덕적인 나침반은 너무나 오랫동안쓰지 않아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면 답이 없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이런 불안한 시기에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행동 방침은 가능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 p.200 - 201


소설은 MGB요원이던 레오가 도리어 반역죄로 붙잡혀 고문과 협박을 당하면서 과거 자신이 '대의'란 명분으로 저질렀던 숱한 행적들을 돌이켜 반추해 보는 과정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으로 사는 것이며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대기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오물을 뒤지거나 흙과 나무를 갉아먹는 행위가 그저 순수한 야만이라면, 권력을 이용해 국민을 조종하고 공포정치로 모두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던 당시의 맹목적 이념추종은 문명에 눈 뜬 인간의 이성 잃은 야만이 불러온 참극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발달된 시대와 환경이 낳는 각종 범죄도 어찌보면 구소련 체제의 불운이 원인이었던 범인의 애처로움을 조금은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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