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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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전, 누군가가 열심히 읽었던 손 때 묻은 책이 지난한 여정을 거쳐 내 손에 들어온 건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책의 임자는, 내지에 읽었던 날짜를 서두로 짧은 글귀 하나를 적어 두었더랬다. '가만히 책을 덮고 善과 惡을 생각하노라'고.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 옳고 그르며 좋고 나쁜지에 대해 십수년, 혹은 그 이상을 갈고 닦으면서도 우린 그 정석대로 살기가 쉽지 않은 걸 하루가 다르게 느낀다.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내가 살아보는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어.(...)." - p.160


요즘, 태어나 보니 누구누구의 딸이더라, 혹은 아버지가 유명한 누구더라 하는 부러움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곤 한다. 또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상상도 못할 부를 누리거나 성공을 쟁취한 이들을 보면 흔히 느끼게 되는 자괴감. 그것은 가까운 친척이나 남매간에는 후광효과를(같은 남매나 지인이란 이유로) 낳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똑같은 얼굴을 한 엄마와 이모의 같은 날 결혼. 아슬아슬하게 운명이 비껴간 안진진의 인생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화려하고 풍족해보이는 이모네 부부와 사촌들. 그에 반해 콩가루 집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바람 잘 날 없고 궁핍한 그녀의 집안. 거기다 그녀의 마음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저울질 하게 만드는 장우와 영규가 그 심란함에 한 몫한다. 헌데 얄궂게도 낭만적이며 감상에 곧잘 젖는 장우는 그녀의 아버지를, 한치의 어긋남과 실패도 허락치 않는 인생의 계획표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영규는 이모부를 연상케 하는 캐릭터다.


자연히, 앞이 뻔하고 도무지 '돌발변수'나 이벤트하곤 거리가 멀어야 했던 삶을 강요받아온 이모는 행복하지 않았고 놀랍게도 그녀의 어머니를 시종 부러워했다고 훗날 고백한다. 그 시기 결혼 적령기의 진진이 고민한 것은 단순히 결혼상대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서, 완전 대조적일 것으로 짐작되는 인생의 두 갈림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알콜 중독의 아버지에게서 오랜 불행을 겪어야 했던 어머니를 지켜본 그녀에게, 안정되고 보장된 인생의 상징인 영규는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왔으나 이미 사랑의 감정은 장우를 향하고 있는 진진이었다.


치밀하리만치 밀당의 선수로도 보이는 그녀의 행동과 말투는 때로 얄밉게도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시대의 '사람 만나면 사람만 보지 않는' 계산적인 연애과정과는 다른 '고뇌'의 다른 표현이기에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폭풍은 커녕, 한 점의 바람조차 없는 심심한 바다와도 같은 인생을 산 이모와 가난하지만 불행을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 생각했던 그녀 어머니의 인생과의 비교를.


때론 이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고 도통 어울리지 않는 남녀 한 쌍이 굳이 한 평생을 맹세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끌리게끔 태어난 것이 인간이란 존재요, 그런 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 삶의 모순을,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라는 형태를 빌려 구체적으로 보여준 이 소설은 차라리 인생지침서라고 해야 할만큼 무겁고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특별하고 한적한 오솔길을 찾는 대신 많은 인생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택하기로 했다. 삶의 비밀은 그 보편적인 길에 더 많이 묻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므로.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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