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기의 정석 -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
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 / 프로파간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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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을 읽다 보면 '이 작가와 직접 마주 앉아 얘길 나누면 진짜 재밌겠다. 지루할 틈이 없겠어.' 라고 여겨지는, 소위 글빨의 신공이 신의 경지에 이른 자를 만날 수 있다. 이번 책 <연필 깎기의 정석>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가 말하자면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언뜻 제목만 보면 연필깎기 기술에 대한 재미없는 이론서라고 치부해도 좋을, 이 시대착오적 제목의 조그마한 책은 첫 장을 펼치는 순간 그러한 생각을 일순간 날려버리게 만든다. '연필깎기'라는 작업을 위대하고 숭고하게 대하는 이 진지한 작자의 얘기를 이제부터 나 또한 최대한 웃음을 참고 정색을 유지하며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연필깎기. 이것은 지금의 30대 이후의 청년과 중장년층들에겐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다. 지금은 샤프펜슬이나 색색의 펜으로 가득찬 아이들의 필통 속에 아날로그의 대표격인 연필 따위가 자리할 공간은 일찌감치 없어졌지만 한 때는 이 연필도 귀한 것이어서 기차모양의 자동연필깎기는 내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었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니 옛날 중학교 국어 시간에 배우던 '방망이 깎는 노인'이 생각난다. 소박하고 보잘것 없는 것에 공을 들이고 그 직업에 자부심을 갖는 것. 저자가 말하는 연필깎기의 개념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비록 유머와 과장된 억지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은 분명, 자본주의가 낳은 대량생산방식의 산물들 속에서 장인정신으로 손수 깎아 만든 연필이 수제화, 수제초콜릿, 뜨개옷, 맞춤양복등과 같이 주인이 정해져 있는 어떤 물건의 생산과정과 그 물건이 가지는 고유한 가치와 애정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시사하는 것이다. 비단 연필깎기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어떤 일에 심취하면 그게 단순한 행위든 아니든 집중하고 몰입하게 되는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사주셨던 90대 중반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기차모양의 이중날 회전식 연필깎기의 작동원리를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고 깎는 기계의 종류도 외날, 이중날, 회전식, 전동식의 다양한 것들이 있다는 것 또한 새로운 지식의 일부가 되었다. 화가, 문필가, 목수, 예술가, 건축가등 직종에 따라 알맞는 기계와 깎기법, 잘못된 예 그리고 각각의 장단점도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나와 있다. 극단적인 완벽주의자일 것같은 그는 나의 짐작대로 연필의 상태만 봐도 어떤 기계를 사용했는지를 단박에 알았고 그 치유법도 친절히 설명해 준다. 이런 그가 가장 증오하는 건 샤프 펜슬과 전동 연필깎기다. 투철한 직업정신이 아닐 수 없다. 깎고 버리는 연필밥 또한 엄연히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그의 철학과 그것의 사용처를 불쏘시개나 퇴비, 무니코틴 담배의 대용품으로 권한다는 다소 엉뚱한 발상은 글쓰기와 창작을 추구하는 이로써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그에게 매번 연필깎기대행을 맡기는 고객들의 편지를 보면 날카롭고 뾰족한 그래서 예술적 가치까지 무시할 수 없는 그것들을 액자 속에 고이 담아 장식해두려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 연필을 깎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오감(향나무의 향을 맡고 연필을 만지고 깎여나가는 모습을 보고 사각사각 하는 소리를 듣고 일감으로 받은 페이로 맛있는 걸 사 먹는^^)을 자극하는 행위인 동시에 미학적, 형이상학적, 예술적, 인식론적으로 다양한 접근이 가능한 심오한 작업임을 이제 모두가 알아채야 할 것이다.


군대에서의 총, 주방에서의 칼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어떤 도구의 상태를 최적의 조건으로 유지하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일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연필이라는 사소한 물건을 통해 전해지는 저자의 코믹퍼레이드가 웃기지만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데이비드 리스씨가 깎은 아름다운 연필을 보고 쓰고 만지는 그의 고객들은 그것을 사용할 때마다 그와 그의 연필에 대한 찬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친구의 결혼선물이나 애인의 조공용으로 예쁜 연필을 선물하고 싶은 분은 그의 고객이 되기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덧붙여 지인들에게 썰렁한 유머나 홈쇼핑에 자주 등장하는 외국인 호스트의 말빠른 재치를 배우고 싶은 분들에게도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닳아서 뭉툭해진 연필촉을 깎는 것은 그 만의 독특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보석을 닦아서 더 반질반질 윤이 나고 원래의 완벽한 형태가 더 잘 드러나도록 하는 일과 비슷하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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