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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은 한 소녀의 끔찍한 출산 장면에서 돌연 시작한다. 버스터미널은 시끄러웠고 온갖 난잡한 상인들과 가던 여정을 재촉하는 행인들의 발길들로 붐벼 한 생명의 비극적 탄생에 그닥 집중하지 않는 듯 했다. 축복받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진 생명. 제이의 탄생은 그의 앞길에 놓인 험난한 길을 예비하듯 그렇게 바닥 아래 생의 치열함과의 싸움에서 이긴 그 무엇이었다. 제이는 곧 돼지엄마의 양아들로 입양되었고 집주인 아들 '나' 동규와 친구가 되어 룸살롱의 퇴폐적인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미게 된다. 제이에게는 기계와 소통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빙의와는 또다른 의미인 그것은 함구증을 겪었던 어린 동규의 '욕망'을 통역해주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자유를 얻지 못한 채 몸부림치는 개사육장의 도사견과 정신장애아 '한나', 그리고 훗날 만나는 목란이 클럽의 큐빅 속에서 탈출하는 것을 돕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 동아줄을 내려 착취자들을 구해내는 과정 속에 뜻밖에도 희생자가 동아줄을 잡을 의사도 없이 길들여져 버린 상황에 좌절하기도 한다. pc방에서 우연히 만난 후드티 일행과 깻잎머리 여자애들이 반지하방에서 벌이는 무분별한 폭력과 난교행위, 그리고 친근함과 대화의 수단이 모두 욕지거리인 십대 아이들의 풍경은 다소 이질적이고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놀라운 가독성은 그만큼 소설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리얼리티해서 느껴지는 양가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 후 폭주족 대열에 합류한 제이는 예전의 동규가 알던 그가 아닌 수많은 '오폭' 추종자를 거느린 비뚤어진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들만의 질서정연하고 서열화된 집단에서 리더인 제이는 곧 법이었고 동규와 목란은 그의 관심 밖에서 이미 벗어난 지 오래다. 정치적, 영적으로 남다르게 우뚝 서고 싶었던 제이는 8.15 광란의 대폭주의 밤, 한강 다리 위에서 사라지고 만다.
우리 주위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걸 알면서도 소설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듯이, 내가 보고 싶지 않다고, 알고 싶지 않다고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힘겨운 취재를 바탕으로 한 르포 형식을 취하고 있고 에필로그로 보아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개인적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뉴스를 보고 신문의 사건 사고란을 매일 읽으면서도 자신들 발 밑의 '무한의 벌판'과 마주하기를 짐짓 꺼려했던 건 아닐까. 스트레스가 아닌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일방적 취조나 물음이 아닌 '대화'를 시도해 보려 했던 적은 있었던가. 우리는 길 잃은 고양이나 강아지를 집으로 들이는 일보다 길가 낯선 청소년의 비루하고 초췌한 모습에 더 관심 가지기를 인색해한다. 그것은 인간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의 한계와 방관자 효과가 합쳐진 결과. 즉, 어쩔 수 없다는 이유일 것이다.
- 그것은 화려한 인간들이 무대에서 먹고 즐기는 것 이면에 대한 배설의 현장을 공공연히 입밖에 내지 않는 것과 같았다.
입에 올리는 순간 불편해지고 역겨워지는 것이므로.
언제나 그렇듯, 비극적 결말은 한숨과 함께 모든걸 원점으로 돌리는 헛헛함마저 느끼게 한다. tv에서 모자이크로 간신히 가려진 보호소의 문제 아이들이 제각기 비슷하게 변조된 음성으로 담담히 생활을 고백할 땐 느낄 수 없었던 기분. 이것이 소설의 힘인가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과연 윤리적인 입장에서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결코 쉽지 않은 물음이 내 안으로 파고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