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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첫 장을 열고 복잡한 이론들로 대부분 가득차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만 해도 난 몰랐었다. 설마 철학서를 보고 눈물을 훔치게 될 줄은. 저자 마크 롤렌즈는 확실히 괴짜였다. 젊은 시절, 철학자이면서도 방탕하기 짝이 없는 여자 관계와 파티문화, 오랜 시간 술에 기대어 지낸 생활, 그러면서도 몸짱이며 핸섬한 만능스포츠맨인 그가 어느 날 새 식구로 맞아들이게 된 늑대 '브레닌'은 그의 삶과 의식에서 조용하면서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보통 일반인들이 개나 고양이같은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게 되는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정과 깨달음을, 철학자이기에 아니 어쩌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왠지 모를 비관적 시선을 지니고 있던 그였기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모든 이론과 주장, 그리고 체험을 통해 습득한 인생관은 우리에게 어렵지만 공감과 반성, 감동까지 느끼게 한다.
철저한 계약으로 맺어진 '영장류'과인 인간과 늑대와의 동거는 예상대로 순탄치 않았다. 늑대를 '늑대답지 못하게' 키운다는 주변의 시선을 타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호기심 많은 야생의 습성 덕에 온 집안을 어지럽혀 놓는 일 등, 웃지 못할 온갖 좌충우돌 에피소드는 저자 특유의 시크한 유머와 재치있는 글솜씨로 잘 그려져 있다. 보너스로 은연중에 슬쩍 슬쩍 내비치는 스펙과 꿀릴 것 없는 자기 과시는 좀 참아주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의 '형제' 브레닌과 함께 했던 시간을 회고록 비슷하게 엮어낸 이 이야기는 사실 부록에 불과하다. 책의 절반 지점이 지나고 브레닌과 작별하는 순간 이 후에는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며 느꼈던 '인간의 의미'와 삶의 목적'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우월함에 빠져 사는 존재인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는데에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 언젠가 보았던 '윤리적 행위 및 이타주의는 어느 선(종)까지 이루어져야 하는가?' 라는 주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험실에 이용된 개와 근친상간의 사례는 악행이 허락되는 상황과 동기라는, 되도 않는 근거를 들이대고 무력한 존재에 대해 한없이 사악한 인간의 단면을 보며 악의 본질이 무엇인지 과연 도덕성 운운하며 완벽함을 자부하는 인간이, 늑대라는 본능에 충실한 야생동물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적어도 '밀란 쿤데라의 시험'에 양호한 성적을 보인 브레닌은 인간의 도덕성에 비해 꿀릴 건 없는 것 같았다. 거짓말과 속임수, 계략에 능한 사회적 동물로 진화한 인간의 입장에서, 늑대는 악의 없고 뒤끝도 없는 비계산적인 순수한 존재일 뿐이었다. 브레닌과 함께 하는 동안 그는 오랜 기간 채식주의자의 길을 걸었고 그의 '형제' 역시 페스카테리언이 되는 것으로 '동물권 윤리계'와의 협의를 봤다. 또한, 문명세계에 속한 늑대개의 운명을 알기에 번식본능도 참아내게 한 마크의 선택이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애처로운 브레닌의 운명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와 늑대'의 동거는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들판과 숲, 강의실을 거쳐 미국, 아일랜드, 영국, 남프랑스를 거쳐 한 시도 떨어질 새가 없었던 둘의 동반여행은 오히려 훗날 브레닌의 슬픈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서글프게도 보였다. 이 또한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밖에 없는 감정일 것이다.
너무 행복하면 그 행복이 깨어질까 두려워하는 인간과 달리 늑대 브레닌은 순간의 행복을 즐겼고, 고통스럽지만 병의 치유과정에서도 자연히 초연해하는 익숙함을 보였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삶과 죽음 중 어느 쪽이 더 숭고한지에 대해 속단할 수 없을 것이다. 순간을 살다간 브레닌에겐 후회도 아쉬움도 억울함도 없었고 삶의 목적과 의미 또한 인간보다 더 나은 철학관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가진것이 많고 앞 길이 구 만리 같은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세월의 흐름과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없다.
브레닌이 죽고 난 후, 마크의 비통한 심정을 묘사한 부분과, 죽은 그의 형제에게 보내는 짤막한 편지를 읽은 나는 결국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인간 대 인간이 아닌 인간과 동물의 유대와 삶의 여정을 그린 여타 작품이 주는 감흥들처럼, 이 책 역시 나에게 많은 교훈과 깨달음을 주었다. 서두에서 마크 롤렌즈는 자신이 집필한 이 책이 철학서가 아니라고 했지만 철학적인 메시지는 물론, 에세이, 자기계발서의 성격까지 지니고 있고 심지어 한편의 소설과 영화로 제작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동물은 때론 그 존재만으로도 오만함으로 가득찬 인간에게 본보기가 된다. 일상의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늑대 브레닌에게 순간 순간은 그 자체가 행복이고 보람이었다. 과거에 얽매이고 미래를 지향하며 현재를 즐기고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에 비해, 비록 짧은 생이지만 많은 행복의 순간을 맛보고 후회없이 떠난 늑대의 삶은 인간의 그것보다 가치있는 게 아니었을까 하고 감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