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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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대학교수인 52세의 이혼남 데이비드 루리는 본인의 수업을 듣는 멜라니라는 여학생과 가졌던 반강제적인 관계가 들통나 교직에서 파면되고 도망치듯 딸 루시의 농장으로 떠나와 그녀와 함께 생활한다. 어느 날, 부녀는 집으로 들이닥친 3인조 흑인 갱들에게 집단 린치와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범인들은 전리품을 챙겨 빼앗은 차를 몰아 달아난다. 루시는 그들 중의 한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그녀는 이를 신고하지 않고 아이 또한 낳아 기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땅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지참금으로 하여 이웃의 흑인 페트루스의 셋째 부인이 되어 그 곳에서 계속 살아가길 원한다.

번듯한 외모에 여성편력 끝판왕. 고고한 학자(인 척하는)인 데이비드의 가슴엔 학문에 대한 열의 대신 욕정만이 가득하다. 나이 어린 제자를 건드려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뒤에도 형식적인 유죄 인정뿐 진심으로 사과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은 없다. 그러나 딸 루시가 강도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무력하게 그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을 때 비로소 그는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범죄를 자신이 저지른 불명예스런 행동과 결부지어 생각하게 된다.

수 백년간 백인들 위주로 흘러갔던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의 모든 정책들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적폐는 뿌리 뽑혀진다. 그 과정은 결코 조용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루시는 분노를 싸지르듯 자신의 육체에 몸을 부린 그들의 행위를, 유구한 세월동안 겪어야 했던 흑인의 수난을 되돌려 받는 의식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런 무법천지에서 범죄를 피할 길은 단 한가지. 원주민에게 종속됨으로써 그 집단의 보스에게 보호를 받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제자를 유린했고 그의 오랜 기질과 살아온 방식은 그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곧이어 돌아온, 백인이란 이유로 흑인들을 멋대로 부린 것에 대한 보복성 짙은 폭행. 18세기의 프랑스에 혁명의 구름이 몰려들 즈음, 파리 시내를 가로지르는 귀족의 마차가 습격을 당하고 폭동의 불씨가 된 것처럼 그것의 성격은 원한으로 똘똘 뭉쳐 있다.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위계가 허물어지고 모든 것이 혼란에 휩싸인 시대. 작가 존 쿳시는 90년대 만델라 정권 초기의 남아공이라는 특정한 시기와 공간 위에 사건을 펼쳐놓고, 권력의 수직관계가 낳은 오랜 정치적 이념이 전복되는 시점에서 한 가족과 개인의 삶 전체가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며 그 의미를 깊이 통찰한다.

특정 집단에게만 당연한 듯 쏠리던 혜택을 고루 재분배하는 일. 그것은 동물복지나 여성인권문제로까지 확장된다. 가망 없는 개를 안락사시키는 이웃의 일을 돕는 데이비드는 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녀석들의 모습에 투영된 자신을 본다. 저항없이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는 개들. 루시는 저들처럼 되려는가. 자신 또한 그래야만 하나. 원치 않는 생명과 함께 이질적 집단에 묻혀 살아가는 것. 그러한 극단적 방법은 나로썬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것이지만 그녀에겐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일이자 패배는 아닌, 일종의 타협인가 싶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최근의 월드컵 개최국이란 것만 빼면 내겐 너무도 낯선 나라다. 인종 차별 정책. 그것은 경험이 아닌 내 머릿속에 학습으로만 자리한 관습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가깝게 느끼려면 관련 문학을 읽어야 한다. 쿳시의 다른 책을 찾아 보니 제국주의나 식민주의를 다룬 비슷한 성향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대개의 소재가 읽기 불편하고 심각한 반면, 문장은 아름답고 단순명료하며 덤덤하다. 근래에 읽은 소설들 모두가 '윤리'라는 큰 틀에서 해석된 것에 비교해 보면 이 책의 내용 역시 같은 카테고리로 묶여져 고통스럽지만 마주해야 할 것들 중 하나로 자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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