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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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의 책은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어줍잖게 속독으로 해치우려 한다면 첫 장부터 대략난감일 테다. 속된 말로 문체와 그 표현이 지린다. 소설도 아닌 산문집만 두 권째인데 그의 글에서 또 다시 얕은 내 지식과 어휘력을 통감하며 갈 길이 멀다고 느낀다. 1948년생. 문득,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비슷한 연배라는 생각을 한다. 인생을 저만큼 살게 되면 다들 비슷하게 느끼는 감정인지 작가이기에 더욱 예민하게 다가오는 일상의 편린인지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그는 양쪽 모두에 속해있고 거침없는 손은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 언어와 문장들로 벼려 그저 그런 일상과 자연, 흘러가는 시간을 나로 하여금 되돌아보게 했다.

밥, 돈, 몸, 길, 글. 각 장을 나눈 짧은 한 음절 안에 묵직한 우리네 삶이 스며있다. 역사와 전쟁을 헤집었던 서늘한 시선은 익숙하고 친밀한 것들로 고개를 돌려 새삼 그 의미를 부여하고 담담히 자신을 얘기하는데, 불현듯 달려드는 서글픔은 읽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생로병사.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이 보편적 현상은 우리를 전체로 뭉뚱그리지만 작가는 개별적 존재의 가치를 성찰한다. 어느 소방관의 죽음, 늙은 광부의 밭은기침, 세월호의 아픔, 시대에 몸을 갈았던 당신 아버지의 삶.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숙명이라 안도하면서도 그 희로애락 속에 오늘도 어김없이 밥을 먹어야 한다. 라면은 쫓기듯 살아가는 삶의 의지이며 애환이다.

옛스럽지만 단단한 그의 글은 시대를 역행하는 아날로그 방식의 소산이다. 연장과 악기의 움직임을 해부하고 거룩한 노동의 현장에서 몸에 밴 기자정신을 발휘할 때 마침표를 찍는 역할은 늘 연필의 몫이다. '글 잘 쓰는 법' 같은 거창한 제목을 단 책을 백날 뒤적이느니 내겐 이런 책 한 권이 더 낫다. 아쉬운 점이라면 조금만 친절했으면 좋겠다는 것. 천자문도 못 뗀 삼척동자가 만자문?을 앞에 두고 쩔쩔매는 격이니 국어사전이 없다면 엄두도 못 낼 판이다. 그러고도 못다한 앎의 부끄러움을 말하니 참으로 면구스러울 수 밖에. 부패한 정치와 돈에 대한 단상은 박완서 작가의 <두부>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 말들을 소화해야 하는 험난함은 너무도 컸다.

현대인의 생활 방식은 갈수록 디지털화되고 그 속도 역시 빨라지고 있다. 주변의 풍경과 내 옆의 누군가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모든 신경이 경제활동과 그것에 엮인 인간관계에만 쏠려있다. 먹는 것에도 그런 바람이 불어 간편음식이 대세다. 먹을 것이 없던 보릿고개 시절엔 부족해서 끼니를 걸렀다지만 풍요로운 이 시대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논쟁도 아니고 결국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애처롭기 짝이 없다. 한 때 새벽일을 나가던 남동생이 매번 눈이 떠지지 않아 아침밥보다 10분의 잠을 더 원하는데 차마 억지로 밥을 먹일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아프고 피곤하고 힘들고 슬플 때 먹는 밥은 언제나 눈물나도록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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