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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변명 - 기독교와 유대교, 메시아를 둘러싼 왜곡의 역사 ㅣ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18년 11월
평점 :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공감하는 대목이 원죄론이다. 초등학교 때 첫영성체 교리 첫 시간에 가톨릭 교리의 구원 여정을 설명할 때도 원죄 교리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원죄론이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있지 않고, 아우구스티누스 때부터라는 이야기는 훗날 신학을 전공한 지인에게서 들었다. 원죄론을 비교적 충실하게 받아들였던 시절에 의문이 하나 있었다. 만약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을 대속의 희생양으로 삼아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켰다면, 유다야말로 배신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부름꾼 아닌가.
책을 쭉 읽어가다 저자가 아리우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사실 지금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는 아타나시우스의 승리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수많은 그리스도교의 지류가 자잘한 교리적 차이가 있음에도, <니케아 신경>은 공유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아리우스의 입장에 더욱 공감이 간다. 하느님 보기에 너무도 사랑스러웠던 한 인간, 그가 결국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 오히려 그렇게 이해할 때 예수가 우리에게 더욱 가깝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예수를 신으로 고백할 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데, 아리우스의 입장에 선다면 그럴 여지가 생긴다. 심정적 아리우스주의랄까.
저자는 구약, 철 지난 약속이 아니라 영원한 약속이라 한다. 그래서 굳이 구약이 아니라 히브리 성경이라는 표현을 쓴다. 히브리 성경이 구약으로 재구성됨으써, 유대교에서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소멸되어버린다. 에덴 동산 이야기가 갖고 있는 인간 성장의 메시지, 유대교의 현세 중심성, 사탄보다 훨씬 위대한 인간, 나약하지 않고 스스로 책이질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 등. 사실 이러한 대목은 그리스도교가 쇄신되면서 제기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굳건한 신앙이 반드시 도그마에 대한 충실함일 필요는 없다. 조금만 서양사를 들여다봐도 12월 25일이 예수가 탄생한 날이 아니라, 조로아스터의 분파인 미트라교의 축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축자적 믿음이 지구 나이 6,000년이라는 코메디를 낳는다. 도그마의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 결핍은 성경에 대한 축자적 믿음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도그마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천의무봉의 편집 과정을 거쳐 고도로 숙성된다.
저자의 기본적 논지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스며 있다. 이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어쩌면 재편집과 재숙성의 과정에 직면했는지 모른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그렇게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