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어폰어타임인 실리콘밸리 - 해커, 창업가, 괴짜들이 만든 무삭제판 성공 스토리
애덤 피셔 지음, 김소희 외 옮김 / 워터베어프레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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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되는 뜨거운 이야기

뜨거운 이야기다. 주로 저녁에 책을 읽었는데 몇 번이나 밤을 샐 뻔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흥분시켰을까. 먼저 실리콘밸리의 스토리가 다른 성공 스토리와 다른 점부터 살펴보자.

1. 주인공이 젊다. (대부분 스무살 전후다)
2. 주인공은 너드다. (뛰어난 프로그래머라는 점을 제외하면 사회부적응자에 가깝다)
3. 주인공은 기술에 미쳐 있었다. (기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4. 지구의 거의 모든 경제인들은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구글을 검색하며, SNS를 사용한다. (그들은 지구인들의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우리는 바로 그 지구인 중 하나다)
5. 이 모든 변화는 길게는 오십 년 짧게는 십오 년만에 이루어졌다. (맙소사!)

책은 더글러스 엥겔바트가 최초로 네트워크 컴퓨터를 시연했던 1968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다. 아마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 시험을 준비할 때였다. 대략 십년 전의 일인데 당시엔 이렇게 멋진 이야기인 줄 몰랐다. 아마 교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을 거다. "더글러스 엥겔바트는 1968년에 최초의 컴퓨터를 개발했다." 그리고 나는 더글러스 엥겔바트를 외우고 1968년을 외우고 최초 컴퓨터를 외운 다음, 시험을 치르고 나서 그 내용을 잊어버렸을 거다.

이 책은 실리콘밸리의 역사를 가슴 뜨거운 이야기로 풀어냈다. 저자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리콘밸리에서 활약한 수십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각 등장인물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자는 성공 신화 주인공들의 대담을 들으며 기술 산업의 역사를 배우게 된다.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정도로 뜨겁게.

더글러스 엥겔바트: 세상이 처음으로 마우스와 아웃라인 프로세싱과 하이퍼텍스트를 접하고, 글과 그래픽이 합성된 것을 보고, 실시간 비디오 회의를 경험한 순간이었어요.
앨런 케이: 우리는 누군가의 아이디어가 하나의 방식으로 구성되었다가 또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인간과 새로운 기술 사이의 교류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
밥 테일러: 그곳에는 1,00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모여 있었죠. 거의 정신이 나간 듯 보였어요.
앤디 밴 댐: 그렇게 풍부함과 복잡성으로 무장한 시스템을 보자 어안이 벙벙했죠. 완전 새로운 세상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실제라고 믿기도 어려웠죠.
밥 테일러: 컴퓨터를 그렇게 사용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죠. 그야말로 놀라웠어요. 데모가 끝나자 어마어마한 기립 박수를 받았죠.
앨런 케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 규모였습니다. 엥겔바트는 정말 대단했어요.
버틀러 램슨: 정말 볼만했죠.
스튜어트 브랜드: 저는 그 이후에도 MIT 미디어랩 등의 많은 데모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찔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찬 데모는 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단 한 번도 완벽한 리허설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부분적으로만 진행했었죠. 그날 청중이 본 것은 실시간 즉흥쇼였어요.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정말 즉흥으로 이루어졌죠. 대단한 퀄리티의 쇼였어요. 더글러스는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휘했고, 자신이 완벽하게 상호 연결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주체가 되어 그 무대 위에 있었어요. 그는 흔들림이 없었어요. 빌이 그의 귀에 "몇 분만 기다려줘. 무언가가 잘 안 되고 있어."하고 속삭이면 더글러스는 하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이제 준비됐어. 진행하자"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다른 대화를 해 나갔습니다. 신은 우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하루의 모든 것이 잘 진행되었어요.
(...)
스티브 잡스: 우리에게 내재된 능력 훨씬 너머로 데려다 줄 수 있는 무언가였어요.
빌 팩스톤: 그날 관중으로 온 많은 사람이 깊은 감명을 받고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런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65-67p)


4 년의 집필 기간 : '실리콘밸리'의 열정적인 문화

더글러스 엥겔바트로부터, 게임 <퐁>을 히트시켜 처음으로 티셔츠를 입은 재벌의 모습을 보여 준 놀란 부쉬넬,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와이어드, 이베이, 넷스케이프, 아이폰, 페이스북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잡스가 얼마나 불량배였는지, 놀란 부쉬넬이 얼마나 날라리였는지, 이베이 같은 대형 기업이 한 순간의 실수로 무너질 뻔 했던 아찔한 사연, 넷스케이프가 어떻게 기술 회사 IPO의 가장 환상적인 모범이 되었는지, 애플에서 쫓겨 난 잡스가 다시 애플로 돌아와 아이팟과 아이폰을 만들 때 내부적으로 얼마나 정돈되지 않은 미친 상태로 일이 추진되었는지 상세히 적혀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어마어마한 분량(약 700페이지)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읽힌다는 점이다. 저자인 애덤 피셔는 지금과 같은 구성으로 책을 출간하기 위해 무려 4년 동안이나 책을 집필했다.

앤디 허츠펠드: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왜 하고 있죠? 당신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결국엔 당신이 그 일을 왜 하는지가 제품과 서비스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프로젝트에 핵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아키텍처가 돼요. 그게 왜 존재할까요?
실리콘밸리에는 두 가지의 공통적인 가치 체계가 있습니다. 우선 제가 재무적 가치라고 부르는 것이 있죠. 그 핵심은 많은 돈을 버는 일이에요. 비록 중요한 가치이긴 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좋은 정신적인 바탕은 아니죠. 그다음엔 기술적 가치가 있어요. 최고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 이는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지배적인 가치입니다. 때론 기술적 가치를 능력이나 성과로 치환하기도 하지만, 사실 정말로 모든 것을 기술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해요.
그리고 공통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세 번째 가치가 있습니다. 예술적 가치예요. 세계 최초로 무언가를 만들 때 이 가치가 필요해요. 예술에 기여하고 싶다면, 기술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독창성이에요. 감정적인 가치죠. (48p)

에반 윌리엄스: 엄청나게 많은 사업이 돈을 벌기 위해 '거래'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어요. 월스트리트에 앉아서 거래만 하며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실리콘밸리가 그들과 다른 점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50p)

저자는 <와이어드>에서 편집자로 일하다가 10여 년이 지난 후 고향인 실리콘밸리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이상함을 느꼈는데 뉴욕의 뉴스미디어들이 쏟아내던 실리콘밸리에 관한 이야기가, 실제로 실리콘밸리에서 겪는 이야기와 너무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차이가 관점의 문제였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주류 매체들은 실리콘밸리를 모두 사업과 돈에 관한 이야기로 보았지만, 실제로 실리콘밸리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돈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저항, 영웅적인 활약, 투쟁, 속임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의 모험 이야기였다는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돈이 몰리는 산업에서 재무적 가치가 아니라 기술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가 아직도 주류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 바로 그 점이 실리콘밸리의 매력이고 실리콘밸리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위기의 시기에 과학과 기술에 집요한 세대보다 누가 지구를 더 잘 후대에 물려줄 수' 있겠냐며.

에필로그의 AI 이야기도 무척 인상적이다.

티파니 슈라인: 인공지능이 세계를 장악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역량인 공감력, 창의력,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역량, 교차적인 사고 등은 기계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능력입니다. 미래에는 이런 능력들이 가장 중요해질 겁니다. (625p)

케빈 켈리 : 우리가 인공지능의 진보를 만들어낸 방식 그대로, 우리는 자연에서는 만들어지지 않을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만들어 갈 겁니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유사한 것이 아니죠. 인간과는 다른 지능이며, 그런 점이 인공지능의 가장 주요한 장점이 됩니다. AI로 차를 운전하게 하는 이유는 인간처럼 운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626p)


실리콘밸리를 바라보는 내부의 시선

실리콘밸리에서 태동하는 기술 산업과 그 근간이 되는 문화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반가운 선물이다. 반면 효율적인 투자로 수익을 내는 데 집중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너무 풍성한 이야기로 느껴질 듯하다. 최근 읽은 <돈 비 이블>과 <폴터>는 실리콘밸리의 전례없는 영향력을 우려하는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돈 비 이블>의 저자 라나 포루하는 빅테크 기업을 '영웅답지 않은 주인공'이라 서술했다. 이 책, <원스어폰어타임인 실리콘밸리>는 그와 정반대의 관점에서 실리콘밸리를 바라보고 있다. 라나 포루하가 외부에서 실리콘밸리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선이라면, 이 책은 내부에서 실리콘밸리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선이다.

내부에서 뜨거운 이야기가 흘러 나온다면 자정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럴 때 외부의 힘은 직접적인 간섭보다 내부의 자정작용을 돕는 데 쓰이는 게 바람직하다. 책에 담긴 이야기도, 저자가 책을 쓴 태도도, 그리고 이 책을 공동으로 번역한 번역가들과 번역서를 출간한 출판사 워터베어프레스도 모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선물받았다. 서평 기한이 2주였는데, 3주 만에 서평을 쓰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추천사를 적은 인물과 그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듯, 기업가와 창업가에게 이 책은 다양한 역할을 한다. 상담할 수 있는 멘토, 의지할 수 있는 동료, 험난한 기업가의 길을 끝까지 헤쳐나갈 수 있는 동기부여가의 역할 말이다. 같은 이유에서 기업가의 세세한 스토리를 알고 싶어하는 투자가에게 이 책은 반가운 선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가장 거대한 성공 스토리를 가슴 뜨겁게 읽고 싶은 일반 독자에게도 이 책은 흥미롭게 읽힐 것이다. 분량의 압박을 넘어서면 실리콘밸리의 매력적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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