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투자자』는 초보자를 위한 책. 그렇다면 이 책은?
그레이엄은 (...) 초보자를 위해 수차례 개정판을 거친 또 다른 베스트셀러 《현명한 투자자》를 출간했다 (322p)
『현명한 투자자』가 초보자를 위한 책이라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거 실화냐?
독서 모임에서 읽은 첫 책이자, 위대한 투자의 고전이자, 생각보단 읽기가 까다롭지 않았던 책. 그래서 생초보 시절 『현명한 투자자』를 읽어낸 게 나에게는 큰 자랑거리였다. 주식 투자와 내 궁합이 나쁘지는 않나 보다. 이렇게 생각해왔는데 『현명한 투자자』가 초보자를 위한 책이었다니.
『현명한 투자자』에 비해 이 책은 상당히 난해하다. (무려 11년 만에 2쇄를 인쇄하게 된 게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레이엄이 각 시기별로 작성한 투고와 경제전문가로 참석한 미국 국회에서의 증언, 모임 등에서의 강의, 인터뷰 등을 모아서 엮은 것인데, 많은 부분 초보 투자자나 대중을 위해서 말을 쉽게 풀어쓰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 당시의 주식 시장 상황, 그레이엄의 이전 생각과 현재 생각의 변화 등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은 난해한 철학책과 역사책, 그리고 증권분석 책을 동시에 읽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벤저민 그레이엄 : 학자, 투자자, 그리고 증권분석과 가치투자의 아버지
투자 분야에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명료하게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공포와 탐욕이 판단을 흐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벤은 돈을 버는 데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이러한 감정들에 영향을 덜 받았다. (17p)
의장 당신은 투자자본을 늘리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레이엄 의원님, 근본적인 이유는 아주 큰 자본으로 적당한 규모의 자본만큼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을 자신이 없어서입니다.
의장 왜 그렇습니까?
그레이엄 특수한 상황에서나 저평가 증권들을 취급할 경우에는 대부분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시장가격에 영향을 주지 않고 무제한의 규모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지금보다 10배의 자본을 가졌다면 우리가 그것을 현재 자본과 같은 방식으로 투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165p)
벤은 모든 것을 단순하게 보려고 했다. 그는 모든 증권분석가들이 투자결정을 위해 많은 수학과 심지어 약간의 대수를 사용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교양 있고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던 벤은 이 분야의 다른 사람들처럼 투자에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기를 좋아했다. (19p)
나이 서른다섯에 백만장자가 된 그레이엄은 얼마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은퇴했다. 최근 그는 거의 반세기 동안 성공적이었던 자신의 주식 선택 방법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칙들로 요약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335p, <메디컬 이코노믹스> 특별 보고서, 1976년 9월 20일자, 그레이엄 82세)
최소한의 작업으로 주식투자에서 좋은 성과를 얻는, 현실적으로 간단명료한 방법이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믿기 힘들 만큼 좋을 것입니다. (352p, <파이낸셜 애널리스트 저널> 1976년 11/12월호, 그레이엄 82세)
벤이 자신의 생애에 이룩한 모든 것들 중에서 《증권분석》은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벤 그레이엄은 증권분석가들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해준 지도자였으며, 우리는 그를 알았다는 것을 커다란 은총으로 생각한다. (20p, 월터 슐로스)
아마도 이 책을 고른 이들은 대부분 그레이엄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남긴 귀기울일 만한 생각들은 무엇일지 궁금해 할 것이다. 먼저 그레이엄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그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건전한 투자방법을 바꿔야 한다면 더 많은 돈을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여러 분야에 두루 관심이 있었기에 다른 전문 투자가들처럼 투자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워런 버핏이나 피터 린치와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하다) 그가 말년에 자신의 투자 방법을 퀀트식 투자로 요약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듯하다. 최소한의 작업으로 투자를 마치고, 나머지 시간에는 원하는 것을 하라는 뜻이었으리라.
이런 특성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질문을 비교해보는 게 도움이 된다.
1) 투자자는 어떻게 현명해질 수 있는가?
2) 현명한 사람은 어떻게 투자자가 될 수 있는가?
두 질문은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는 바로 돈에 대한 태도다. 첫 번째 투자자는 돈에 대한 태도에 있어 일반 투자자들과 다르지 않다. 법을 지키는 범위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지식은 그에게 더 좋은 지식이다. 반면 두 번째 투자자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지식이라 해도 자신의 현명함을 지킬 수 없는 지식은 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 지식을 탐구하지 않는다.
아마도 벤저민 그레이엄에게는 <뛰어난 투자자>가 되는 것보다 <현명한 투자자>가 되는 게 더 의미있는 일이었을 듯하다. 이는 그가 자신을 기업가가 아니라 학자로 생각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바탕 위에서 그레이엄은 처음으로 증권분석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연구했고, 증권분석가가 전문 직업이 될 수 있도록 이론적 배경과 사회적 제도(CFA)를 정비했으며, 제자들의 뛰어난 성과를 통해서 가치투자를 널리 전파했다.
가치투자란 무엇인가 : 부자 → 건전한 투자 → 가치투자
가치투자자가 아닌데도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작년에 네이버 가치투자연구소 카페의 신입 죽돌이가 되었다. 연말에 국일증권경제연구소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 이벤트를 진행했고, 서평단원으로 선정되어 나는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선물 받았다. 나는 주린이에서 초보 가치투자자로 진화하고 싶은 투자자다. 그러나 내게 모자란 것은 지식과 경험과 수익일 뿐, 결코 가치투자자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은 아니다. 나는 진지하게 가치투자에 대한 나만의 첫 정의를 가지고 싶다. 가치투자란 무엇인가?
이 대답을 얻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은 사고과정을 거쳤다.
먼저 부자에 대한 정의
1) 일반적인 투자의 목적이 부의 획득이고, 투자의 1단계 종착점이 부자라면, 나는 부자에 대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2) 나는 부자가 부의 관점이 아니라 인생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자는 원하는 활동에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외의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건전한 투자에 대한 정의
'가치투자는 건전한 투자다.'
이 문장이 가치투자를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이라면, 나는 '건전한 투자'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가지고 싶다. 내 생각은 이렇다.
만약 당신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하고 싶은 활동이 좋아하는 이와 수다를 떠는 일이라면, 좋아하는 이와 수다를 떨듯 투자하라. 바꿔 말하면 이것은 어떤 활동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활동의 세세한 특성은 다루지 않는다. '건전한 투자'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방법론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다루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생각에 따라 건전한 투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활동을 할 때의 마음으로 하는 투자'
가치투자에 대한 정의
한 문장으로 축약할 수 없어 여러 문장으로 이야기 해본다.
1. 가치투자는 평정심과 평상심이 가까운 투자다. (투자에 집중하는 마음과 평상시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은 투자다)
2. 가치투자는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하여 활동할 수 있는 투자다. (예를 들어 투자자로서의 나와 부모로서의 나를 통합한다면, 가치투자는 자녀들에게 권유할 수 있는 방식의 투자여야 한다)
3. 가치투자는 공부와 연구에 의해 그 방법론이 개선될 수 있고 다양화 될 수 있는 투자자 성장형 투자방식이다.
4. 가치투자는 기업가와 투자가가 동행하는 형태의 투자다.
그레이엄을 배우는 방식
버핏은 "그레이엄에게서 배웠으며, 그 가르침 중 일부는 버렸고, 나머지는 확대했고, 거기에 내 생각을 첨가했다"고 고백한 최초의 사람이다. 버핏은 '가치투자'는 벤저민 그레이엄에서 출발했다고 계속 주장해왔다. (7p, 서문)
그런데 수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몰두했던 증권분석의 세부사항들에 대해 내가 가졌던 대부분의 흥미를 지금은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그러한 것들이 전체 업계의 발전을 방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나는 우리가 약간의 기법과 단순한 원칙들로 투자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핵심은 올바른 일반원칙과 그것을 고수하는 품성입니다. (351p, <파이낸셜 애널리스트 저널> 1976년 11/12월호. 그레이엄 나이 82세)
얼마 전 처음으로 하한가의 쓴맛을 알려 준 상장 기업의 주주총회에 참석했다. 나의 첫 주주총회였다. 상당히 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참석했는데, 개인 주주들의 발언은 주로 주가관리 실패와 주가 부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주주 친화적인 경영인과 그렇지 않은 경영인이 있다면, 기업 친화적인 개인 주주와 그렇지 않은 주주도 있지 않을까? 건전한 관계가 당사자 일방이 아니라 양방의 노력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라면, 개인 주주는 어떤 자세로 기업과의 동행에 임하는 게 좋을까?
이 부분에서 나는 그레이엄의 가르침을 벗어날 것 같다. 초보가 벌써부터 그래도 되나 싶지만 워런 버핏도 그레이엄 가르침의 일부는 버렸다는 글을 서문에서 읽고 용기를 얻었다. (퀀트 방식으로 투자를 운용하는 분에게서 이 방식에 의하면 투자 기업이 뭘 하는 기업인지 몰라도 투자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적어도 당분간은 퀀트를 배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이유와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투자 방식은 기업의 소유권을 취득하여, 기업의 실적 성장에 따른 과실을 공유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동업할 기업을 고르는 거다. 이 방식을 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연을 맺은 대상을 깊게 이해하고 싶고, 기업 성장에 대한 시나리오를 투자자인 내가 스스로 작성하여, 이를 기업이 실제 추구하고 달성하는 성장 시나리오와 비교 분석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의 투자 대상 선정은 (1)적절한 수익성 그리고 (2)시간과 정성을 들여 깊게 이해할 만한 기업인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예를 들면 기업의 CEO가 남다른 철학이나 이력을 지녔는가(한스바이오메드), 사업보고서에 특별한 매력이 있는가(파크시스템스), 기업이 미래를 선도하는 업종 내에서 특별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는가(케이아이엔엑스) 등이다.
더 논의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마지막으로 '기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기본을 거점으로 이해한다. 거점을 만든 자는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올 수 있고, 거점을 튼튼히 만든 자는 더 먼 거리의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가치투자라는 기본을 튼실히 하면, 시험해보고 싶은 많은 다양한 투자(테마주, IPO, SPAC 등)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테스트해 볼 수 있다. 즉, 기본은 다양성의 근본이 될 수 있다. 지적 호기심이 많은 투자자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선물이다.
벤저민 그레이엄의 『투자강의』
'이런 태도에서 학자와 기업가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학자는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도록 자신의 연구 결과를 공개함으로써 보람을 느낀다. (...) 반면 기업가는 큰돈이 될 수 있는 독점적인 비밀을 잘 유지해야 한다.'
- 『돈 비 이블』, 라나 포루하, 109p
기업가이면서 동시에 학자였던 벤저민 그레이엄은 학자로서의 정체성에 더 많은 열정을 쏟았다. 그가 1934년에 쓴 『증권분석』은 증권 투자계의 가장 훌륭한 사상이 되어 약 90년의 세월과 태평양을 건너 2020년에 대한민국의 마흔 살 청년에게까지 이어졌다. 벤저민 그레이엄의 『투자강의』와 그 전에 읽은 다양한 투자 철학 서적들의 도움에 힘입어, 나는 어떤 투자를 하고 싶은지 정리할 수 있었다. 자신이 뭘 하려는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주린이가 아니다. 나는 주린이에서 초보 투자자로 진화했다. 그 변화가 이 책을 읽으며 얻게 된 가장 큰 소득이다. 나처럼 가치투자자가 되고 싶지만 가치투자가 무엇인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 책은 초보자 이상의 실력자를 위한 책이다. 나는 책의 거의 절반 정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