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의 인간 수업 - 300년 경제학 역사에서 찾은 인간에 대한 대답 36
홍훈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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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인가?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이 책, '들어가는 글'에 저자가 쓴 문장이다. 정치와 문화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경제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문장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 왜 그럴까?

경제라는 단어에서 먼저 읽히는 것은 '직장', '돈', '경쟁', '피로' 그리고 '탈진'이다. '돈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문장 보다 '돈을 벌기 위해 인간이 소진되고 있다'는 문장이 더 체감된다. 우리나라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 개인들이 마주하는 현실이 후자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를 하나의 사례로 짚어보자. 이유가 무엇이었든 나 또한 직장의 업무가 괴로운 노동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일찍 은퇴를 하고 싶었다. 이른 은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재테크 서적을 뒤졌다. '먼저 연봉을 높여라.' 이것이 재테크 서적의 결론이었다.

'괴로운 노동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괴로운 노동을 실행하라.' 이 문장은 모순이었지만 나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 문장을 따라 있는 힘껏 자신을 소진했다. 수입은 늘었지만 은퇴는 여전히 요원했다. 나는 점점 탈진하다 이내 건강을 잃고 쓰러졌다.

내가 더 빠르게 나를 소진해야 했던 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강력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내 돈벌이를 다만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 뛰어야만 했다. 앞서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레일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불안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나는 자신을 한계까지 사용해야 했다. 이것은 나뿐 아니라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보편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이다. 현 시대가 우리들에게 부여한 질병인 셈이다.

불안에서 탈진으로 이어지는 이 질병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이 화두는 나에게 중요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둔 뒤 심리학을 뒤지고, 명상을 흉내내고, 돈에 대한 관념을 임시 인지 치료한 다음 주식 투자에 입문하는 것으로 그 처방을 마련했다. 그러면서 '나'의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너무 개인적이어서 보편적인 처방으로서는 거의 의미가 없다. 우리 시대 동년배들에게 널리 적용 가능한 다른 대안은 없을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경제학자'의 대답이다.


읽을 만한가?  ★★ (특히 독서 토론 모임 책으로 권한다)

나의 대답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대답으로 그들을 설득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서평을 적는다.

내게는 언젠가 대학원에 진학해서 '행동경제학'을 수학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구체적인 바람은 아니었다. 그냥 왠지 즐거울 것 같은 기분 좋은 하나의 상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그 상상을 조금 더 구체적인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하게 되면 즐겁겠지' 가 아니라 '한번 해보고 싶다'로 마음이 바뀌었다.

대학 시절 금속재료공학과에서 철학과로 전과했던 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내게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질문이었고, 그 질문에 대답할 힘을 기르기 위해서 나는 이적했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 십 년을 생활하니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어떤 경제 인생을 살 것인가?' 이 질문은 삼십대 이후 은퇴 전까지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나는 전혀 대비를 못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적은 이유는, 직장인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경제 활동에 쏟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활동에서 본인만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그건 철학도인 나로서는 도저히 즐거울 수 없는 삶의 방식이다. (이 표현은 중요하다.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도와 공학도가 다르고, 철학도와 예술가도 다르고, 철학도와 경영학도도 다르다. 성취지향형 인간과 관계지향형 인간이 다르고, 돈이 수단인 자와 돈이 목적인 자도 다르다. 경쟁의 승리가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인 자와 경쟁에서의 승리 그 자체가 목적인 자 또한 다르다)

이 책은, 경제 철학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우리 사회의 경제 주체(=개인)가 겪고 있는 시대적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꺼이 먼 길을 탐험한다. 경제학의 주류 사상이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변모되어 왔고, 그 가운데 인간에 대한 경제학적 관점이 어떻게 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경제학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논의가 중점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그러한 가운데 동양에서 서양의 주류 경제 사상을 가장 기적적으로 단기간에 흡수하여 성장해 온 우리나라의 경제 현실이 어떤 상태인지 진단한다.

시장경제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면 물건의 값을 지불해야 하므로 경제인은 재화의 가격, 임금, 이윤 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경제인이 가격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윤리 · 도덕이나 법에 둔감함을 의미한다. 경제인에게 가격은 일차적인 동기이며 윤리나 법은 부차적인 제약조건에 불과하다.
심지어 경제인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부도덕해질 수 있고, 법망을 피해 보려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주류경제사상은 놀랍게도 이 경우 경제인이 아니라 경제인을 부도덕하게 만들거나 죄인으로 만드는 도덕이나 법을 문제로 삼는다. 정치인이나 문화인도 부도덕해지거나 법을 위반할 수 있고 또 사회적인 지탄도 받지만, 경제학은 경제인의 도덕이나 법을 특별히 문제삼지 않는다. (30p)

경제인은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 경제인은 행위 자체나 의도와 과정, 절차 보다 결과를 중시하는데 이것은 시장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금전적 유인을 위시한 '외적인 동기'가 경제인을 움직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대비되는 몰입이나 헌신과 같은 '내적인 동기'에 경제인은 무관심하다. (35p)

이렇게 보면 신고전학파의 합리적인 경제인은 시장에 부합되도록 고안된 인간이다. (35p)

부를 추구하는 인간은 무한한 부의 축적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서 부는 생존, 생계, 생활에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는 물자와 화폐의 축적을 의미한다. 
(...) 부는 물질적인 가치이므로 부에 대한 추구는 덕성이나 현명함 등 정신적인 가치나 미적인 가치 혹은 넓은 의미의 좋음,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구분된다. (36p)

경제이론은 세속적인 경제현실에 대한 설명이지만 이를 넘어서 경제에 대한 이상이나 이념을 담고 있다. 쉽게 말해 경제가 실제로 '어떤지'와 더불어 '어떠해야 하는지'까지 말하고 있다. (39p)

노동자와 자본가, 생산자와 소비자뿐만 아니라 시민, 정치인, 공무원, 판검사, 언론인, 예술가, 의사, 학자나 교수, 목사 등도 점점 더 자신의 이익과 돈을 삶의 일차적인 가치로 삼으며 이를 위해 보다 꼼꼼하게 계산하고 있다. (41p)

세인들은 돈이나 권력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을 좋게 보면 순진하고, 나쁘게 보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 이에 따라 현대 경제사상에서는 경제주체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주체에게 이기심과 합리성을 적용해 '경제인'이라고 상정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전에는 제한된 영역(시장경제)을 대표하던 경제인이 이제 거의 인간 자체를 대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인간에게서 경제인이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인에 비추어 인간상을 도출하기도 한다. 이제 경제학자와 세인들은 기존의 시장 경제를 이끄는 주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서 경제인을 찾아낸다. (42p)

체감할 수 있는 우리의 일상을 통해 위의 얘기를 이해해보자.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소비자가 있다. 기존 경제이론의 관점에서는 값싼 커피숍의 커피로 대체될 수 있는 스타벅스 커피를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다. 돈을 더 지불하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건 경제적으로 어리석은 행위다. 그러나 소비자는 커피라는 음료뿐만 아니라, 스타벅스 커피라는 '개념'을 함께 소비한다. 그는 돈을 더 지불하지만 더 만족한다. 경제적으로 불리한 행위지만 만족은 더 늘어나고, 기존 경제이론이 이러한 행위를 비판한다고 해도, 소비자는 그 이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자기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를 바라보는 제3자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현대 경제학 이론인 행동경제학은 개인의 이러한 행동을 이론적으로 설명한다.

이번에는 소비 측면이 아니라 생산 측면을 보자. 대기업 직장인은 근로를 통해 업무 결과물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돈을 번다. 그는 다른 기업의 직장인 대비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대가를 받는다. 그러나 업무강도, 경쟁 강도, 그리고 주 업무 활동의 자기만족도 측면에서 대기업 활동이 심리적으로 대단히 불만족스러울 경우 그는 이직을 고려한다. 그러나 기존 경제이론은 이러한 이직을 경제적 불이익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판단한다. 그로 인해 연봉을 낮추더라도 더 나은 심리적 만족을 추구하는 이직을 선택하는 데 개인은 어려움을 겪는다.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스트레스가 있어야 한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가족, 제3자도 이직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은 개인의 이직 행동 또한 이론적으로 설명한다)

위처럼 기존 경제이론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소비'와 '생산'에 있어서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타인의 평가'가 중요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남들의 평균적인 의견이 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느냐 아니면 부정적으로 평가하느냐가 개인의 결정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만약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의견이 기존 경제이론에 입각한 것이라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모든 생산 활동은 어리석은 짓으로 치부된다. 그러면 개인은 돈을 벌기 위해 쓰러질 때까지 자신을 소진할 뿐, 자신의 만족을 위해 수입을 줄이는 행위를 선택할 수 없게 된다. 선택이 자유롭지 않은 근로자에게 더 잔인한 노동 환경이 주어지는 건 흔한 일이다. 업무 강도가 높은 직장에서는 지원한 이의 사는 곳부터 물어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 아니던가.

졸업 후 취업이라는 자신의 문제와 어머니의 병환에 대한 걱정이 뇌신경계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미국인과 중국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그러자 양자에게서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미국인은 자신의 취직을 걱정할 때와 어머니의 병환을 걱정할 때 자극을 받는 뇌의 부위가 달랐다. 반면 중국인의 경우 양자가 동일했다.
이것은 미국인이 자신과 어머니를 독립적으로 여기는 데 비해 중국인은 자신과 어머니를 상호의존적으로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서양인이 독립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면 동양인은 상호의존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400p)

동양인의 특성이 위와 같기 때문에, 동양에서 개인이 만족스러운 경제적 활동을 추구하려면, 개인과 관계를 맺는 타인, 가족, 직장 동료, 친구, 사회 일반의 인식이 무엇보다 개선되어야 한다. 서양보다 동양에서 일반 인식의 개선이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크다. 그러므로 기존 경제이론이 아니라, 행동경제학과 같은 현대 경제학 이론을 일반에게 널리 퍼트리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대니얼 카너먼 - 다중적인 존재
조지 애커로프 -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조지 에인슬리 - 내면적으로 갈등을 겪는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여성주의 경제학 - 다양한 정체성으로 네트워크와 연결된다
아마르티아 센 - 역량을 바탕으로 자유를 실현한다
제임스 헤크먼 - 성격도 생산성에 영향을 미친다
필리프 판 파레이스 - 노동보다 자아실현이 중요하다

그래서 경제사상의 변천사에 따라 인간을 탐구하는 이 책의 후반부에는, 위와 같은 현대경제학 이론이 소개된다. 책의 후반부까지 오면, 이 책의 제목이 왜 "경제학자의 인간 수업"인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것인지 분명해진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롭다. 혼자 읽어야 했던 게 안타깝다. 만약 토론 모임에서 읽었다면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번뜩이는 해석과 나의 해석을 공유하며 아주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다만 한 가지. 경제학 비전공자인 나로서는 책의 후반부까지 다다르는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배경지식이 충분하지 않다보니 이 책을 읽어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서평이 다소 늦어진 이유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읽는다면, 그리고 토론 모임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읽고 토론을 한다면, 정말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질 훌륭한 책이다.
책의 표지에 생각하는 로뎅의 조각상이 빨간색 시계와 넥타이를 차고 있는데, 경제적 이득을 위하여 시간을 촉박하게 사용해야 하고, 경제적 이득을 위하여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현대인의 벌거벗은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다가 생각이 많아져서 십 분간 산책을 하고, 돌아와 책을 한 페이지쯤 읽다가 다시 산책을 하러 나가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독자에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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