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이 책을 2024년 한국에서, 한국어 번역본을 만났다는 게 여전히 믿기질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릴리언트 블루 (Brilliant Blue)
함지성 지음 / 잔(도서출판)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 로맨스와 여름은 한참 멀리에 있는 것. 여름이면 더위에 지쳐 자주 혼자가 되는 것. 고양이와 가만히 누워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보내는 계절.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는데. 이 로맨스 소설의 작자는. 아니 이 책 속 수키는 멀리에 있다.

솔직하게, 조금 배알이 꼴렸다. 라고 일기에 썼다. 그냥 질투가 났나. 수키는 유창한 외국어를 (물론 그는 이주민이지만) 하고, 뉴욕에 살며, 남프랑스에 멋진 친구들이 있고, 그곳으로 긴 기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간과, 돈과, 여력과, 모든 것이 있으므로. 왜냐하면 이 책을 읽는 나는 출근버스 안에 있고, 내 옆에는 사람이 앉아 아주 팔뚝을 몸통에 딱 붙인 채 책장을 넘기고 있었으니까. 당장 휴가를 가는 것도 겨우 며칠을 쪼개야 하고. 차츰 오르는 기온에 버스에서는 에어컨이 나오는데, 내 머리 위의 에어컨이 곧바로 머리통으로 떨어지는 것은 싫어서 에어컨 덮개를 닫게 되니까. 이런 회사 인간의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 .

주인공이 난처해할 만큼 질투를 느껴버린 것은 회사 인간의 서러움도 있겠으나 이 책이 퍽 완벽한 일기장 같았기 때문이다. 로맨스 소설을 너무 오랜만에 읽어서인지 여행지에서 만나는 인물들과의 자연스러운 낭만, 사랑, 자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빛나는 세상에 사는 주인공이 무척 낯설었다. 나와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의 솔직한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이 안의 인물들이, 아니 적어도 주인공만큼은 분명 살아 숨 쉬는 사람이 틀림없다는 점에서. 그러니 그에 자신을 폭 투영해버릴 수 있는 꿈 꾸는 사람이라면. 한 여름 이 책 안에서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이 책엔 그 순간에만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 여행을 떠나 마주하는 낯선 풍경과 뜨거운 태양 아래 피어오르는 감각 같은 것들. 음악에 맞추어 흔드는 몸과 서로의 눈빛에 잔뜩 취해버릴 수 있는 시간. 단 한 번뿐인 완벽한 폴링 인 러브 타이밍에 관한 묘사들이 너무 세밀해서 내가 그 공간에 있다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다. 사실 그 모든 묘사와 복기는, 낭만과 낙원이었던 시간 속 자신의 사랑을 비워내기 위한 수키의 부단한 노력이기도 했다.
⠀⠀⠀⠀⠀ㅡ 시간은 흘렀고, 나는 간신히 탈출했다. 사랑에서.
⠀⠀⠀⠀⠀p.236.

수키는 우리에게 자신의 기억을 부단히 복기하여 보여줌으로써 모두 쏟아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여전히 잊을 수 없는 리버를 보내주려 했다. 하지만 수키의 이야기를 듣는 엄마처럼 (이런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다니. 수키는 엄마마저 완벽하다!)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리버를 잊지 못했으며,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인간의 어떤 방어기제가 그렇듯 수키는 결정적 순간에서도 잊어버리기를 선택하는데, 동시에 인간의 운명이 그렇듯.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지. 그러니까 수키, 사랑에 너무 많은 이유를 갖지 말아. 달려가버려! 라고 말하게 되어버라는 이상한 책이다.
⠀⠀⠀⠀⠀ㅡ 사랑하는 데 이토록 많은 이유가 필요한 걸까.
⠀⠀⠀⠀⠀p.214.


사랑하는 데 많은 이유가 필요할까. 수키를 잔뜩 질투한 것은 그가 내가 갖지 못한 혹은 시도한 적 없는 아름다움을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온통 햇살로 가득한 사랑을. 누구에게나 각자의, 한 번뿐인 빛나는 사랑이 있다. 영화같은 이 책 속에서 당신은 마음껏 상상할 수 있을지도. 혹은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내게도 딱 하나뿐인 사랑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 포스터 그리고 사람들 - 영화의 첫인상을 만드는 스튜디오 이야기
이원희 지음 / 지콜론북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영화, 포스터 그리고 사람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영화를 어떻게 고르는지 궁금하다. 책이 잔뜩 쌓인 서점에서 오늘 밤 잠들기 전 읽을 책을 고르거나 하다못해 마실 것을 고르러 편의점에 가더라도. 우리는 늘 처음 보는 것들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것이 무엇이든, 만나기 전에 그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가장 처음 시각적으로 마주한 이미지에, 가끔은 손으로 툭툭 그것의 외곽을 만져 본 후의 촉감에 기대어 선택을 할 수 밖엔 없다. 이미지와 촉감들은 첫 만남을 결정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존재의 이유일 테다.

<영화, 포스터 그리고 사람들>은 영화와 대중의 가장 처음의 만남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수많은 영화 사이에서 영화를 고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늘 포스터였다. 그래서 포스터와 영화의 첫인상은 동의어가 아닐까, 라고 감히 생각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이미지에 반해서 영화를 클릭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포스터는 그렇게 선택하게 된 영화를 보기 이전의 어떤 감정을 미리 형성해주기도 하고, 본 이후의 여운을 남겨 오래 가지고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내게 영화의 포스터는 단순히 첫인상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감정까지도 자주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여러 의미에서 굉장히 소중하다. 그래서 이 책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 찰나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니. 약간의 감수성과 기대에 부풀어서 첫 장을 넘긴 것도 사실이다.

 

01 피그말리온의 피그말리온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이 죄다 등장해서 조금 흥분했다. <케빈에 대하여>,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아이 킬드 마이 마더>, <몽상가들>, <이터널 선샤인>, <랍스터>, <립반윙클의 신부>, <마미>까지. 피그말리온은 말한다. ‘대상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대상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들은 최대한 덜어내는 방식을 통해서 대중에게 영화를 보여준다. 사랑스럽고 예쁜 영화들의 포스터 속에는 피그말리온이 말하고자 했던 아주 간단하고 강렬한 언어가 담겨있다. 그들이 대상을 대하는 방식이다. 나는 피그말리온의 포스터를 먼저 사랑했지만, 이렇게 피그말리온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02 프로파간다의 공기

읽는 내내 아, 사랑하는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사실 이 책에 소개되는 사람들은 모두 영화의 포스터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다. 그리고 디자이너로써 예술을 사랑하는 동시에 영화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뱉어둔 인터뷰에는 애정이 가득하다. 특히나 프로파간다에 속한 사람들의 인터뷰에서는 그 애정이 진하게 묻어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떼어왔던 영화 자체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자신이 만든 포스터가 광고배너에 붙어있는 모습을 보며 짜릿함을 느끼는 사람. 영화와 영화에 속한 것, 함께 일하는 사람 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까지도 미리 사랑해버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직종에서든 자신의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빛이 난다. 일과 일을 하는 사람 서로가 빛을 주고받으며 만들어낸 것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프로파간다의 작업이 타인에게 더 아름답게 각인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03 100편의 영화, 100장의 포스터, 100개의 시도

‘100편의 영화, 100장의 포스터라는 전시를 기획한 공동 기획자 김광철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영화 포스터라는 매체의 특성이 뭐라고 생각 하나요라는 질문에 영화 포스터의 매혹은 영화 전체의 기억을 소환하는 입구이자, 종종 기억 그 자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점이었다. 이 문장을 열 번 읽었고, 열 번 모두 동의했다. 앞서 말했듯 영화 포스터는 영화의 첫인상을 결정한다. 그리고 동시에 영화를 보기 전과 후의 시간들을 포스터가 압축시켜 우리에게 선사한다. 어떤 노래를 들을 때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 포스터를 바라봤을 때 우리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는 기억들을 선물하는 것. ‘기억을 소환하는 입구이자 그 자체라는 단어의 배열은 포스터를 완벽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100편의 영화, 100장의 포스터라는 전시는 단순히 영화와 포스터를 사랑하는 대중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 기획의 저의에는 대중보다는 영화와 포스터를 디자인 하는 것을 사랑하는 자신과 같은 디자이너들을 위한 마음이 담겨있다. 김광철은 이 전시가 영화 예술과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만남의 장이 되는, 하나의 이벤트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전시장에서 보았을 때 가장 만족을 느낀다는 말도 덧붙였다. 맞아 이 책은 영화의 포스터를 줄줄이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그 책을 만들어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었지. 김광철은 그들을 위한 전시를 기획했다. , 음식 그 어느 것이든 물건을 구매할 때 우리는 보통 만드는 사람 보다 그 물건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나중에, 그 순간을 돌아볼 수 있는 시점이 되어서야 만들어지는 물건이 그 물건을 만드는 사람보다 앞서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일까. 읽는 내내 나는 그의 말들이 사려 깊은 문장들로 여겨졌다.

 

04 영화 포스터를 산업으로 바라볼 때 빛나는 것들

빛나는에서 함께 활동하는 세 명의 디자이너들의 인터뷰. ‘산업이라는 조금 어색한 말이 제목에 들어있다고 생각했지만 읽고 나니 모든 게 설명되었다. 몇 개의 회사가 독점적으로 포스터를 만드는 형태, 다양하지 못한 장르와 내용의 영화 등은 영화 산업 자체에 정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다양성이 요구될 때 더 다양한 디자이너, 다양한 영화들을 대중은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다양성은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산업이 건강해야한다고 말한다. 다양성의 존중에 관한 문제는 어디에서나 존재하고, 언제나 타당한 말이다. 그리고 내가 영화를 바라볼 때 잊고 있던 가장 큰 부분이기도 하다. 읽던 책을 잠시 내려놓고, 포스트-잇을 꺼내어 붙였다. 저자는 말한다. ‘바깥에서 직업적으로 안정적일 것으로 보이는 세 사람은 여전히 영화 산업, 영화 포스터 디자인에 대해 무언가를 찾고 있다.’ 라고. ‘최근 대두되는 다양성 영화 포스터의 흐름은 어떤가?’, ‘잘 만든 영화 포스터의 기준은 무엇인가?’, ‘디자인 스튜디오 세 곳이 뭉쳐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가?’ 등은 세 명의 디자이너가 저자에게 물은 질문들이다. 이 질문은 영화 포스터를 산업으로 바라봤을 때, 그리고 자신의 직업에 대한 직업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그들은 정말 멋있게 자신의 직업을 해내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와 함께 07 이성적인 직업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취미가 직업이 되었을 때 혹은 일에 모든 삶의 초점이 맞추어졌을 때 직업과 나를 얼마만큼 분리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지점이다. 김이내 디자이너도 같은 지점을 고민했고, 그 시기를 지나왔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도 돌봐야한다는 정답 같은 해결책 찾아가는 과정은 그녀도 다르지 않았다.

김이내는 감정에 빠져들지 않지만, 영화 속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모색한다.’고 말한다. 아주 슬픈 영화 속에서도 디자이너가 붙잡아야하는 이성적인 부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디자이너가 갖는 임금 등의 고충에 있어서도 얼마나 이성적으로 대해야하는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누가 대신해주지 않으니까요.’

 

05 창작보다는 번역에 가까운 직업입니다

오시마 이데아의 작업들엔 일본만의 분위기가 독특하고 뚜렷하게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일이 창작보다는 번역에 가깝다고 말한다. 간단하고 명료하지만, 자신이 영화 포스터를 대하는 자세를 완벽히 설명한다. 이 책의 중간 중간 나오는 말이 있다. ‘포스터는 결국 선전이다.’ 결국 선전이고 광고이며, 이 포스터를 통해 많은 관객들이 영화에 관심을 갖고, 영화를 보러 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색채를 강하게 넣는 것 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더 좋은 포스터를 만들도록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06 영화의 배경을 재배열하다

어떤 것을 소위 덕후처럼 사랑하게 되면, 예를 들어 어떤 배우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 배우가 출연한 영화, 드라마들을 섭렵하고 그(그녀)의 신상정보와 SNS등을 알아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찾아보게 된다. 더 사소한 것들을 알아낼수록 행복해진다. 특히 같은 배우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대화에서는 그 사소한 것들을 공유할 때 함께 희열을 느낀다! 나는 조던 볼턴의 오브젝트 시리즈작업이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새로운 영화 덕질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영화의 전체적 색감에 매료되는 디자이너다. 그 색감을 바탕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그리고 주인공이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을 찍어두고 선별한 후 포스터 안에서 재배열한다. 물건과 색의 재배열을 통한 영화의 재해석.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소품들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힘든 일이지 않을까. 해리포터에서 주인공들이 입는 망토나, 사용하는 마법 지팡이 같은 것들을 파는 가게에서 내가 느꼈던 황홀함 같은 것을 조던 볼트의 포스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캐롤>에서 정말 아름다웠던. 그 주인공 자체를 설명하는 장갑이나 향수 같은 아름다운 오브제들의 나열은 그것들이 등장하는 매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하는 조던 볼트의 작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 말했던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처럼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고, 영화는 이미 세상이 되었다.’ 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범람하는 영화의 세상 속에서, 각자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마음은 정말 간절하고 아름다워서, 아마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모두 전해 받았으리라. 언젠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영화를 좋아해. 영화 포스터도 좋아해. 그리고 영화 포스터를 만드는 사람들도 좋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담담한 하지만 뾰족한 -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과의 그림 같은 대화
박재규 지음, 수명 그림 / 지콜론북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담담한 하지만 뾰족한

 

 

박재규 작가님의 책을 읽고, 강연에도 다녀왔다. 작가님은 그 강연을 이런 자리라고 하셨다. 자신이 쓴 책을 설명하시면서, 이 책들 덕분에 이런 자리가 생겼다고.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인상 깊은 말들이 많았다. 작가님이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셨을 때를 설명하시면서 그 때의 나는 요원을 만나면 끊임없이 피하기만 하는 네오 같았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귀에 마음에 콕콕 박혔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의 리스트에 매트릭스가 있어서 더 마음에 남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그렇다. 사실 나는 어쩌면 아직 요원을 만나기도 전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아직 학교에 다니면서, 내 능력을 끊임없이 시험받기 전의 안일한 상태이니까. 그냥 그 상태에서 자꾸만 사회가 만들어둔 거대한 불안을 느끼는 거다. 미래의 내가 걱정이 되어서.

 

처음에 이 책을 보고는 자꾸만 그림에 마음이 갔다. ‘수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분의 일러스트는 어쩐지 조르주 쇠라의 그림이 생각났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뾰족한 마음들을 어르고 달래어 따뜻한 이불위에 나를 눕혔다. 그림도 글자도, 제목처럼 담담해서 나를 눕히기에 충분했다. 감리를 한 후에 1도 인쇄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편집자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종종 나를 때리는 문장과 그림에 플라스틱 색종이를 붙였다.

 

p116, ‘무언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건 모든 인간의 바람이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보고는 무수한 소설들이 생각났다. 한국의 어떤, 가족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이야기들. 우리가 얼마나 연연하며 살 수 밖에 없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들. 심지어 나조차도.

 

한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태 안에서 탯줄을 통해 들어오는 영양분에 연연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태어나서는 어떤가요? 부모 혹은 누군가의 보살핌에 연연하지 않고서는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지요. 성인으로 성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를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며, 시시각각 배설에 연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매 순간 무엇인가에 연연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다. 우리가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남이 곧 무언가에 연연함과 동어가 된다는 것은 외롭지 않게 어떤 것에 부대끼도록 허락된 일 같으면서도 동시에 참 외롭고 쓸쓸한 일이다. 하지만 그 걸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고. 그 걸 우리가 인정하고, 인식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무언가를 해나가야 한다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전, 삶은 왜 의미 있는가라는 책을 아주 조금 읽었다. 이 책은 부제도 함께 적혀있었는데,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이 그 부제다. ‘속물이라는 단어가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속물이 되고 싶지 않은, 정확히는 속물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속물근성이 내가 그 책을 읽도록 만들었다. 책 전부를 읽지는 못했지만 작가는, 사람들이 허무주의에 빠지고 온갖 상실감에 잠식당하는 것은 잘못된 명제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해오던 수많은 고정관념, 그러니까 독단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우리는 자주 어쩌면 매 순간 독단에 빠지는데, 아주 흔한 예로는 다음과 같다. 말로써 하는 의사소통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 그 일을 잘 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여기에는 의사소통을 잘하는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논제가 존재한다. 혹은 반대로 타인의 처지에 비교하면서 자신을 아주 쓸모없는 혹은 쓸모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대부분 독단에 빠지고야 만다.

 

그렇게 우리는 실의에 빠진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또 한껏 슬퍼지고. 내가 하지 못하는 것, 검증되지 않은 논제가 내 삶을 정의하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다시 박재규 작가의 강연으로 돌아가자. 담담한 하지만 뾰족한은 작가가 만났던 사람과의 대화에서 작가가 들은 답변 혹은 생각한 것을 중심으로 쓰여 있다. 그리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작은 정답 아닌 정답을 건넨다. 작가가 조언을 구한 사람들, 그러니까 어쩌면 특정한 기준에서 성공한 사람들. 작가는 그들의 공통점을 말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한 결 같이 현재의 귀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미래에 대한 걱정과 기우로 현재를 오염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글에서도 반짝이며 드러나지만, 작가님은 자신의 경험들을 통해 배우고 느낀 것들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 순간과 찰나에서 펜을 들 줄 아는. 작가님의 말대로 짧은 말의 문장이 쌓여서 언젠가 나를 바꿀 것이라 믿으며 나도 자꾸만 글을 끄적여 왔는데. 그리고 작가님이 소설이라는 장편에 도전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달았다는 그 말 까지도 내게 닿아있었다. 작가님의 말과 문장들은 내가 시도한 것 혹은 시도하지 않았던 것 사이를 넘나들며 과거의 나를 꺼내셨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았다. 그림을 보면서 캄캄한 혹은 덜 캄캄한 색의 경계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빠지는 시간까지도 소중했다.

 

p037 ‘완벽하지 못했다고 자신을 자책할 필요도 타인을 폄하할 필요도 없습니다. 완벽이란 애초에 신의 영역에 속한 단어니까요. 그러니 그 시간에 신이 당신에게 선물로 준 이 지구의 자연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마음껏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가장 최근의 나에게 필요한 책이었다. 작은 담요 같았고, 어쩌면 따뜻한 코코아 같기도 한. 가장 추운 온도의 겨울밤, 우리에게 필요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쟁점 한국사 : 현대편 쟁점 한국사
박태균 외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아야 하는 것들을 알지 못했던 자리를 되짚는 책이다. 읽는 내내 아팠고. 내게 이 책이 의미있었던 것은 지금의 시대적 상황이 맞물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알아야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더 나은길로 나아가야만 한다. 부모님께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