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릴리언트 블루 (Brilliant Blue)
함지성 지음 / 잔(도서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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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로맨스와 여름은 한참 멀리에 있는 것. 여름이면 더위에 지쳐 자주 혼자가 되는 것. 고양이와 가만히 누워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보내는 계절.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는데. 이 로맨스 소설의 작자는. 아니 이 책 속 수키는 멀리에 있다.

솔직하게, 조금 배알이 꼴렸다. 라고 일기에 썼다. 그냥 질투가 났나. 수키는 유창한 외국어를 (물론 그는 이주민이지만) 하고, 뉴욕에 살며, 남프랑스에 멋진 친구들이 있고, 그곳으로 긴 기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간과, 돈과, 여력과, 모든 것이 있으므로. 왜냐하면 이 책을 읽는 나는 출근버스 안에 있고, 내 옆에는 사람이 앉아 아주 팔뚝을 몸통에 딱 붙인 채 책장을 넘기고 있었으니까. 당장 휴가를 가는 것도 겨우 며칠을 쪼개야 하고. 차츰 오르는 기온에 버스에서는 에어컨이 나오는데, 내 머리 위의 에어컨이 곧바로 머리통으로 떨어지는 것은 싫어서 에어컨 덮개를 닫게 되니까. 이런 회사 인간의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 .

주인공이 난처해할 만큼 질투를 느껴버린 것은 회사 인간의 서러움도 있겠으나 이 책이 퍽 완벽한 일기장 같았기 때문이다. 로맨스 소설을 너무 오랜만에 읽어서인지 여행지에서 만나는 인물들과의 자연스러운 낭만, 사랑, 자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빛나는 세상에 사는 주인공이 무척 낯설었다. 나와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의 솔직한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이 안의 인물들이, 아니 적어도 주인공만큼은 분명 살아 숨 쉬는 사람이 틀림없다는 점에서. 그러니 그에 자신을 폭 투영해버릴 수 있는 꿈 꾸는 사람이라면. 한 여름 이 책 안에서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이 책엔 그 순간에만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 여행을 떠나 마주하는 낯선 풍경과 뜨거운 태양 아래 피어오르는 감각 같은 것들. 음악에 맞추어 흔드는 몸과 서로의 눈빛에 잔뜩 취해버릴 수 있는 시간. 단 한 번뿐인 완벽한 폴링 인 러브 타이밍에 관한 묘사들이 너무 세밀해서 내가 그 공간에 있다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다. 사실 그 모든 묘사와 복기는, 낭만과 낙원이었던 시간 속 자신의 사랑을 비워내기 위한 수키의 부단한 노력이기도 했다.
⠀⠀⠀⠀⠀ㅡ 시간은 흘렀고, 나는 간신히 탈출했다. 사랑에서.
⠀⠀⠀⠀⠀p.236.

수키는 우리에게 자신의 기억을 부단히 복기하여 보여줌으로써 모두 쏟아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여전히 잊을 수 없는 리버를 보내주려 했다. 하지만 수키의 이야기를 듣는 엄마처럼 (이런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다니. 수키는 엄마마저 완벽하다!)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리버를 잊지 못했으며,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인간의 어떤 방어기제가 그렇듯 수키는 결정적 순간에서도 잊어버리기를 선택하는데, 동시에 인간의 운명이 그렇듯.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지. 그러니까 수키, 사랑에 너무 많은 이유를 갖지 말아. 달려가버려! 라고 말하게 되어버라는 이상한 책이다.
⠀⠀⠀⠀⠀ㅡ 사랑하는 데 이토록 많은 이유가 필요한 걸까.
⠀⠀⠀⠀⠀p.214.


사랑하는 데 많은 이유가 필요할까. 수키를 잔뜩 질투한 것은 그가 내가 갖지 못한 혹은 시도한 적 없는 아름다움을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온통 햇살로 가득한 사랑을. 누구에게나 각자의, 한 번뿐인 빛나는 사랑이 있다. 영화같은 이 책 속에서 당신은 마음껏 상상할 수 있을지도. 혹은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내게도 딱 하나뿐인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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