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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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진정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을 주제 사라마구는 사백 여 페이지에 걸친 이 상상력의 결과물에 나타내고 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그것 보다 훨씬 이전에, 사람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답다는 것이 과연 규정지을만한 것인가.

  눈이 머는 전염병이 세상을 뒤덮는다. 그리고 그 중 단 한 사람만이 시력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으로 작가는 두 가지 극단의 상황을 만든다. 눈을 잃은 사람들의 상황과 그 불쌍한 사람들 사이에 혼자 눈을 뜨고 있는 여자의 상황.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도 분명 눈 먼 자들은 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의 눈 먼 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현실의 눈 먼 자들은 그들의 얼굴에 맑고 튼튼한 두 눈알을 가지고 있지 않을 지라도, 사실은 간접적인 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옳다. 눈이 멀지 않은 사람들의 눈 먼 사람들에 대한 보호는 곧 시력의 공유이다. 눈 먼 사람이 지나갈 때 눈멀지 않은 사람들은 그를 비켜갈 것이며 눈 먼 자가 위험한 처지에 있다면 굳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해도 눈멀지 않은 사람들은 그에게 외칠 것이다. 조심해요! 길을 잃거나 방향감각을 잃었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 있다. 택시나 버스를 타고 다닐 수도 있으며 누군가 읽어주는 책을 들을 수도 있다. 사실, 우리 곁의 눈 먼 사람들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긍휼을 베풀어야 마땅할 안타까운 사람들이지만, 소설 속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주위에는 모두 나처럼 눈 먼 사람들뿐이다. 길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나는 일 분도 되지 않아 방향을 잃는다. 집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도 모른다. 주춤주춤 거리며 앞으로 가다가 앞에서 다가오던 다른 눈 먼 사람과 부딪혀 넘어진다. 일어나 이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장애물에 부딪히거나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더 안전한 자세를 취한다. 두 발과 왼쪽 팔로 땅을 짚고 오른 팔을 앞으로 휘휘 저으며 엉금엉금 기어간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소용없다. 그들은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인지를 모르며 나처럼 세 발로 정처 없이 기어가고 있을 뿐이다. 사거리에서 어디로 가야 나의 집이 있는 동네가 나오는지는 그들도 똑같이 모른다. 나는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가. 누군가와 무리를 지어 다닐 수 있다면 그것은 다행이다. 내 몸을 해치려는 무리(개나 고양이나 사람과 같은)를 만난다면 하나 보다 둘이 세니까. 목숨을 부지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면, 먹을 것과 잘 곳과 입을 것만이 눈 먼 내가 당장 구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거침없이 묘사한다. 너무나도 발가벗겼기 때문에 감추는 데 익숙한, 그리고 감춘 것을 보는 데 익숙한 우리들에게 거북하기까지 하다. 눈 먼 사람들 속에 사는 눈 먼 사람은 더 이상 타자를 생각할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 타자를 생각하는 것은 여유로운 자들의 사치에 지난다는 것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질서가 질서가 되어가는 모습은, 카오스가 일상이 되어가는 모습은, 그러니까 사회(질서와 조직이 없는 무리도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면)가 혼돈에 익숙해져 가는 모습은, 우리가 생각해왔던 사람다움의 범주를 벗어난다.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앞서 달리다 넘어진 사람들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 밟혀 죽는 사람들은 그들을 밟아 죽인 사람을 욕할 수도 없다. 둘은 똑같이 눈 먼 사람들이니까. 밟혀 죽은 사람도 이미 여러 명을 밟아 죽인 살인자일 수 있으니까.

  읽는 사람의 눈살을 잔뜩 찌푸리게 만들 만한 장면도 역겨우리만치 묘사해낸다. 도시 전체가 똥과 오줌과 쓰레기와 죽은 동물들(개나 고양이나 사람과 같은)로 뒤덮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깔끔하게 뒤를 닦는 일은 불가능하다. 첫째로 그동안 볼일을 보던 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둘째로 더러운 것을 보이지 않게 치워줄 상수도가, 이제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눈이 멀었기에, 더 이상은 없으며, 셋째로 이미 다른 사람들이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싸놓은 똥오줌이 손과 발과 온 몸에 묻어 있어 더 이상의 불결함을 느낄만한 감각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다운 식생활도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사람다움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썩어서 딱딱해진 빵조각이나 시뻘건 생 닭과 생 토끼는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새나 개나 고양이들이 반쯤 뜯어먹다 버려둔 굶어죽은 시체들이 길에 돌부리처럼 차이는 이 도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식량이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 지하 창고로 내려가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밟혀서 죽은 수십 수백 명의 목숨과도 같은.

  눈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의사의 아내(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이름은 사람의 옷차림이나 얼굴 생김새 따위의 겉모습과 같은 거니까. 눈이 없는 도시에서 겉모습은 무의미하다)뿐이다. 아직 눈 먼 사람이 눈 멀지 않은 사람보다 적은 숫자일 때 안과의사인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 눈이 먼 척을 해 수용소로 함께 들어온 이 여자는 선(善)의 화신이 된다. 끝까지 일행의 눈이 되어주는 그녀의 희생은 어쩌면 소설이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 현실이라면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룩하다(그래서 이 캐릭터는 소설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어느 정도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살인하는, 그리고 악의 살인에 조차 죄책감을 가지는 그녀는 무질서한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정의로 그려진다.

  존엄한 수치심의 마지막 끝자락이나마 부여잡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은 작가가 폭로하는 인간의 본성에 결코 반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분명 가진 것을 모두 잃었을 때 진정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말을 하고 있다. 즉 의사의 아내를 통해 주제 사라마구는 그녀의 모습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의 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휴머니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녀가 정의감을 잃지 않은 것은 그녀가 잃지 않은 두 눈에서 기인한다. 그녀가 눈이 멀었다면 분명, 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정의로운 살인자가 아니라, 썩은 빵 한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 넘어진 사람들을 밟아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강철 같은 의지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눈 먼 자들이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불행인 동시에 행운이다. 그들이 다행스럽게도 보지 못한 것들을 의사의 아내는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아야만 했다. 페스트가 휩쓴 중세 유럽보다 처절하고 나치스가 지나간 전쟁터보다 끔찍하고 진창으로 뒤덮힌 돼지우리보다 불결한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사실 모두가 눈 먼 세상에서 눈이 먼 것과 모두가 눈이 먼 세상에서 눈이 안 먼 것 중 어느 상황에 처하는 것이 더 불행한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 지금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선(善)이 진실로 나의 것인가. 진실로, 내가 선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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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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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랭 드 보통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연애소설. Essays in love라는 원제를 가졌는데, 나는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번역된 제목이 확실히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아주 정확하다. 얼핏 보기에 별다른 특징도 없고 재미도 없는 문장이지만, 소설의 목적을 아주 정확히 말하고 있다.

  그의 원래 직업은 철학 강사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철학적이다(물론 이 논리구조가 가질 수 있는 설득력은 굉장히 궁색하다. 안톤 체홉의 단편들이 의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소설에서 철학이라는 알맹이를 쏙 빼고 읽어도 그의 문장은 대단히 재미있다. 그만큼 그는 타고난 글쟁이이기도 하다.

  그가 유희한 모든 철학적 분석이 일반론이 될 수는 없다(주장도 아니고, 설득도 아니고, 유희라고 말한 것은, 그의 넘치는 재치와 장난기에 대한 예의이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무르팍을 치게 만든다는 거다. 드 보통의 농담기 흥건한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구나 맞아 맞아, 나도 그랬어, 내가 느꼈던 게 그거였구나, 라는 말을 중얼중얼 거리게 된다(개인적으로 나는 책을 읽으면서 감탄사를 자주 내뱉는 취미가 있는데, 특히나 드 보통의 책을 읽으면서 저 색히 또 저 지롤하네 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보통의 책은 연애라는 아주 대중적인 소재를 취하면서,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비범하고 비일상적인 글로 풀어나간다. 보통의 책을 한 권만 읽어보면, 아니 댓 장만 읽어보면 이러한 그의 특이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플롯이 없다. 사건과 사건의 아귀가 기막히게 들어맞아 돌아가는 다른 훌륭한 소설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플롯이 없다면 스토리는 어떠한가. 이것 참 당황스럽지만 스토리도 뻔하다. 독자의 기대를 배신하기는커녕 너무나 단조롭다. 하지만 이점이, 이 플롯의 무재와 스토리의 단순함이라는 다른 소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특징 아닌 특징이, 그의 빛나는 통찰력과 철학적 사유, 극도의 논리력과 함께, 독자를 감탄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스토리가 소설적이지 않기에, 너무나도 우리의 일상 연애와 다르지 않기에, 독자는 드 보통의 책에서 감정이입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된다. 남자주인공에게서, 클로이에게서 ‘이거 완전 나랑 똑같잖아!’라는 감탄을 발견하게 된다. 또, 이 소설 속의 주인공 중 하나에게서 나와 함께 있던 지난 사랑을 찾아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보여주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소설이 아니다. 읽기 좋게, 필름처럼 차라라락 펼쳐지지 않는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보지 않고 발견한다. 어떤 인터넷 서점에서 본 알랭 드 보통의 카피가 “일상의 별명가”였다. 발명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행위를 말한다는 점에서 그리 적절한 표현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지만, 어휘선택의 부적절함을 물고 늘어지지 않고 그냥 카피라이터의 의도를 파악해본다면, 일상의 발명가는 꽤나 작가에게 어울리는 별명이다(일상의 발견가가 훨씬 적절하겠지만, 발견가라는 단어가 좀 어색한 게 사실이다. discoverer와 everyday affairs 정도의 영어로 쓰면 오히려 쓰면 자연스럽겠지만).

  누구나 비슷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연애의 장면들이 있다. 연애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겪게 될 법한 장면. 첫 만남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헤프지 않다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던가, 고대하던 첫 섹스 후 상대에 대한 신비감을 다소 잃은 상태에서 아침을 같이 먹는다던가, 먼 곳으로 단 둘이 여행을 갔는데 샤워시설이 형편없어 짜증을 낸다거나(혹은 짜증내는 그/그녀를 본다던가), 꽤나 떨어져 있는 애인을 만나고 싶은 욕구와 그까지 이동하는 데 감수해야할 귀찮음을 저울질 한다던가, 그 귀찮음을 내가 떠맡을 것인가 애인에게 떠맡길 것인가를 줄다리기 한다던가 하는 가지가지의 연애 scene. 드 보통은 수많은 상황을 펼쳐놓고, 그 상황을 여러 그림과 그래프, 도표 등을 도모해 하나하나씩 분석한다. 그의 분석을 듣고 있노라면, 아주 훌륭한 참모에게서 상황보고를 듣는 장군이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독자에게 친절하다.

  그의 분석은 전천후다. 어떤 상황도 그 앞에서는 발가벗고, 결국에는 그 깊숙이 숨겨놓았던 논리를 드러낸다. 그가 사랑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는 시공을 초월한다. 통시적인 동시에 공시적인 스팩트럼을 뿜어낸다. 예술, 철학, 사유, 논리, 과학, 종교 등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고풍적이면서도 최첨단을 달린다.

  물론 독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자기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굉장한 논리를 가진 알랭 드 보통의 혀 때문에, 아, 그게 그런 거였구나, 라고 설득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이란, 특히나 사랑을 하는 사람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백 원짜리 팅팅볼 보다도 변화무쌍하다. 아무리 그의 통찰력이 극강의 센서를 장착했다 해도, 개념 미 탑재 이등병보다도 더 개성 넘치는 세상의 수십억 개 사랑을 일반론으로 포괄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이 작가의 책들은 세상의 모든 사랑을 재단하고 포괄해 기성복을 입히려는 것이 아니다. 드 보통의 의견에 굉장한 공감을 느껴서, 일상의 무시무시한 무게에 짓눌려 잃었던 사랑에 대한 감각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이 놀랍게 여겨지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사랑이 왜 태어나고 어떻게 성장한 건지 몰랐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드 보통의 논리에 설득당하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놀라움으로 다가가고, 나의 사랑은 이렇지 않은데 왜 이 작가는 이렇게 분석해놓았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에게조차도 이 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만한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최소한, 나는 다르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거야, 라는 정도의 회유는 얻게 될 테니.

  알랭 드 보통, 보통이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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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타 1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박형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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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아직 미하일 불가코프라는 이름에 낯설다. 가장 뛰어난 20세기 러시아 작가로 평가받는 불가코프를 알게 된 건 대학교 2학년 봄(그러니까 군대 오기 직전의 학기) 노어노문학과 전공탐색 과목을 들으면서였다(안타깝게도 국어국문과 진입에 학점제한이 없었기에 이미 국문과 학생이 된 후였지만). 러시아 문학에 나름대로의 애정을 가지고 있는 나라서, 1학년 때도 러시아 문학 관련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2학년 때 다시 비슷한 교과과정을 가진 수업을 신청한 건, 러시아 문학을 향한 나의 애정에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고, 조금이라도 밑천이 있는 수업을 들어서 땅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나의 학점을 미미하게나마 끌어올려보려는 심산이 가득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2학년 때 듣게 된 수업은 생각보다 새로운 걸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학년 때 들었던 교양 수업에서는 푸슈킨부터 시작해 솔제니친에서 끝이 났지만, 전공탐색 수업에서는 키예프 러시아 문학(이고르 원정기 등의 서사시)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리얼리즘 작가들을 지나 예브게니 자먀찐에 이르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배웠다. 그렇게 솔제니친을 넘어선 소비에트 문학에 입장할 수 있었던 나는 드디어, 미하일 불가꼬프라는 생소한 이름을 듣게 된 것이다.

 스탈린 시절에 문단을 지배했던 소비에트 문학은 스탈린과 국가를 위한 찬양가였다. 마치 플라톤이 영웅을 위한 서사시만이 존재의 이유가 있는 문학이라고 말한 걸 신앙이라도 하듯, 스탈린의 통치와 국가의 체계를 긍정하고 이데올로기 강화의 기능만을 하는 시와 소설이 책으로 출판될 수 있었다. 이런 문학들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역시 국가가 배후에 있었던 비편단으로부터 거침없는 찬사를 받았다. 미하일 불가코프는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 국가의 압력에 저항하던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으로서, 1940년 죽는 순간까지 그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은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겠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그의 작품 활동 초기에서도 수술로 인간이 된 개에 스탈린을 비유하는 등(의사였던 그의 의학적 지식이 다분히 영향을 끼쳤던 작품인 "개의 심장")의 적나라하면서도 기발한 풍자를 한껏 선보였지만, 누가 뭐래도 미하일 불가코프 최고의 걸작은 거장과 마르가리타이다. 이건 비단 나의 생각일 뿐만 아닌데, 권위에 잠깐 호소하자면, 세계의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불가코프를 찬사하게 된 게 그가 죽은 지 20여년이 지나 잡지에 이 소설이 발표되면서 부터라는 데서도 이견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소설이 20여년이 지나서라도 러시아 문학지에 발표될 수 있었던 건 스탈린의 죽음, 흐루시초프와 페레스트로이카, 그리고 원고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그의 아내 등의 덕분이다.

  1930년대 모스크바가 소설의 배경이 된다. 작품은 크게 세 가지 축을 가지고 진행되는데, 볼란드라는 악마가 도시를 발칵 뒤집으며 일으키는 소동 이야기, 예수를 선의 화신으로 그린 소설을 써 비평가들에게 혹독한 독설을 듣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거장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와 빌라도가 등장하는 거장의 소설 속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축은 서로 물고 물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플롯을 형성하며 진행된다.

  볼란드의 광기어린 모스크바 침략은 정말 환상적이다. 극장에서 수천 명의 관중을 상대로 한 그의 검은 마술 공연은 소설 속 관중들의,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넋을 잃게 만든다. 무대 위에서 사라의 머리가 잘려나가고, 잘린 머리를 다시 붙이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위조지폐가 극장을 가득 메우고, 볼란드가 나누어주는 화려한 옷가지로 옷을 갈아입었던 여자들은 극장에서 나가자마자 벌거숭이가 된다(이 볼란드의 검은 마술 공연은 아주 희극적인데, 미하일 불가코프가 연극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으며 그만큼 많은 희곡을 썼다는 것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볼란드와 그의 일당은 인물의 죽음을 예언하고, 도시의 곳곳에 불을 내며 모스크바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그로 인해 도시는 흉흉해지고 모두 서로를 의심하며, 볼란드의 부하 중 하나가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음으로 인해 고양이들 수백 마리가 경찰서로 끌려가는 등의 사태가 벌어진다. 이런 모스크바의 모습은 당시의 사회를 지극히 반영한다고 봐야 옳다. 공포 정치에 휘둘려 사람으로서의 본성을 하나씩 잃어가던 러시아 국민들의 모습이 소설 속에서 악마의 패거리에 의해 조롱당하는 인물들에 투영된다.

  이러한 사회 풍자는 거장의 이야기에서도 계속 된다. 거장이 자신의 온 영혼을 다해 완성한 작품 속에서 예수는 진리로, 세상을 구워하는 자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당시의 국가와는 극도의 괴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을 찬 비평가들은 이런 소설을 쓴 거장을 비난한다. 수많은 비평가들의 독설을 온 몸으로 받아내다가 거장은 결국 자신의 소설을 불태워 버린다. 그리고는 불멸의 연인 마르가리타를 떠나 도시를 미치광이처럼 떠돌다가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만다.

  이 거장의 이야기가 드러내느 메시지는 아주 노골적이다. 스탈린의 엉덩이에 키스를 하는 비평가들에게 매서운 비판을 던지는 불가?는 심판의 역할을 마르가리타에게 넘겨준다. 거장과 헤어진 마르가리타는 자신의 연인을 찾기 위해서 악마들과 협상을 하고, 결국 마녀가 된다. 그녀는 악마가 넘겨준 진주 크림을 온 몸에 바르고 발가벗은 채로 빗자루를 탄다. 이제 그녀의 비행이 시작된다. 모스크바의 밤하늘을 날아간다. 소설의 백미다. 하늘을 가르는 알몸의 마르가리타를 보는 독자들은 그 어떤 영화를 볼 때보다도 환상적인 야경을 경험할 것이다. 함께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장면이 러시아 문학사상 가장 환상적이고 시니컬한 장면이라는 평이 있다. 마르가리타는 이제 거장의 소설을 비난한 비평가를 찾아간다. 그의 빈 집으로 들어가 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데, 그녀의 분노는 미하일 불가코프의 분노이며, 동시에 진실을 추구하는 자들의 분노가 된다.

  작가는 비평가들을 향해있던 비판의 뱃머리를 이제 입을 다문 작가들에게 돌리는데, 소설의 세 번째 축이 되는 거장의 소설 속 이야기가 그 역할을 한다. 빌라도는 예수의 결백을 알고 있다. 예수는 폭동을 주도한 바라바나, 다른 살인범, 강도와는 결코 다르다는 것을 빌라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석방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결국 주위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예수를 사형시킨다. 그는 예수와 친구가 되기를 원했고 그와 함께 대화를 하고 싶었다.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말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형 집행 후 보름달이 뜨는 밤이 되면 언제나 자신을 책망하며 자신의 비겁함을 부끄러워한다. 불가코프는 빌라도의 이런 자책과 후회를 아주 인간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용서받지 못할 비겁함이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자는 비겁하다. 불가코프는 자신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작가들에게 입을 열라고 이야기한다. 진실을 말하라고.

  사회를 풍자적으로 비판하는 미하일 불가코프의 재능은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다. 그 어떤 다른 소설보다 재치 있으면서도 환상적이고, 그러면서도 강력하다. 하지만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탁월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를 반영하는 것만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소설이 아니다. 그렇기에 감히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소설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볼란드가 소설을 불태웠다는 거장에게 말한다. "원고는 불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원고는 불타지 않았다. 거장이 불태웠다던 원고는 결코 불타 사라지지 않았다.

  미하일 불가꼬프는 원래 "악마에 대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이 소설의 초고를 썼다. 그 초고를 몇 번이나 계속해서 수정했는데, 이미 다른 희곡과 소설들로 국가의 압력을 받던 그는 원고 수정 도중에 실제로 원고를 태워버린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걸작을 완성시켰다. 초월적인 극기의 결과로 원고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그의 생전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소설 완성 직후 죽었다. 하지만,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가 죽은 후 20여년이 지나 세상에 발표되었으며, 글국 지금 나의 손에까지 와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영원성과 불멸성은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사랑에서도 드러난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악마의 힘을 빌어 현실 세계에서 사망한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다시 깨어나 영원 불멸의, 시공간을 초월한 곳으로 떠난다.

  육체의 죽음이 영혼의 죽음이 아니듯, 예수의 죽음이 진리의 죽음이 아니듯, 작가의 죽음이 작품의 죽음은 아니다. 사랑과 진리와 예술은 영원하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오로지 그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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