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36
로베르트 미헬스 지음, 김학이 옮김 / 한길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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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 1876~1936)정당론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에 걸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민주적 정당의 과두화 과정을 다룬 연구서다. 그는 정당이 인민주권의 원칙을 추구하지만, 모든 정당은 관료화하고 결국 과두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1907년 이탈리아 사회당과 독일 사민당에서 탈당한 까닭은 바로 이것이며, 사회주의 정당이 1차대전 직전 본래의 국제적·혁명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조직 유지를 위한 기관(Organ)으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미헬스는 역사학을 전공하여 이탈리아 토리노대학에서 연구하였고 생디칼리슴에 경도되어 이탈리아 사회당, 밀라노 노동회의소, 독일 사민당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의 정당은 인민주권의 원칙’, 곧 절차로서의 민주정뿐만이 아니라 대중의 직접적 지배와 모든 개인이 동등한 자로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통로였다. 사회주의 운동도 사회주의 협동촌건설과 같이 실험적인 방식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변혁하고자 했던 기존의 방식에서 변화하여 정당을 조직하고 인민주권의 원칙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미헬스가 활동하였던 이탈리아 사회당은 생디칼리슴 경향이 강하였고, 독일 사민당은 페르디난트 라살이 조직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정당으로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헬스는 정당에 가입한 지 얼마 안 있어 독일 사민당과 이탈리아 사회당에서 탈당하는데, 그가 정당의 과두화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민주적 정당에서 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를 지배하는과두정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본래 당원의 위임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는 자신의 카리스마와 연설 능력을 활용하여 자신을 선출한 당원을 지도·지배하고, 자신의 권한을 활용하여 정치적 경쟁자 및 반대자들을 억압한다. 한편, 당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다수의 당원들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서 관습적으로 지도자를 숭배하게 되니, 한 번 만들어진 지도자의 권력은 쉽게 방해받지 않는다. 게다가 정당의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정당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이는 정당의 관료화·전문화를 초래함으로써 마치 보나파르트주의와 유사하게 대중 의지의 집행 기관에 지나지 않았던 지도부가 대중으로부터 해방되어 독립된 지위를 확보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르니 곧 민주적 정당의 과두화이다.


미헬스는 자신이 활동했던 사회주의 정당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사회주의 정당에서 과두정은 어떻게 나타나는지, 왜 사회주의 정당이 본래의 혁명적 성격을 잃게 되었는지, 1차대전 직전 사회주의 정당이 국제주의를 포기하고 국가에 동조하였던 것인지 설명한다. 정당이 확대되며 출현한 직업적 지도부는 다수 당원에 대해 지적인 우월성을 지니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어, 정당 내에 이들 직업적 지도부와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적인 당원들 사이의 계급 격차가 발생하게 된다. 더욱이 정당이 점차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고 확대됨으로써 사회주의 정당은 계급 정당에서 대중 정당으로 이행, 기존의 투쟁적 성격을 잃게 되고 국가 안의 기관(Organ)으로서 정당의 관습적 유지에 힘쓰게 된다. 결국 과두적인 직업적 지도부의 출현, 대중 정당으로의 성격 변화로 사회주의 정당은 고전적인 국제주의와 대비되는 작은 문고판 사회주의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민주적 정당은 조직의 확대에 따른 관료화, 지도자의 지배욕구, 대중의 무관심으로 인해 과두정으로 이행한다. 미헬스의 분석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으나, 나는 미헬스의 논지를 따라가며 민주주의 이념이 얼마나 현실에 실현시키기 어려운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존 던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를 출발점으로 민주주의에 대해서 되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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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배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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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루이스 윌켄은 전작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에서 외부의 시선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탐구한 이후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에서 그리스·로마의 비평가들에 대한 그리스도교 내부의 반응과 그리스도교의 사유방식을 보여준다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당대의 철학을 활용하여 비평가들의 물음에 응답하면서도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반하여 독립적인 사상을 전개하였다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은 바로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로부터 시작하여 성경과 교회라는 또 다른 원천에 기반하여 그리스도교를 형성하였고나아가 헬레니즘을 기독교화하였다.


그리스·로마의 비평가들은 주로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 등 그리스도교가 피할 수 없는 물음들을 적절히 제시하였다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비평가들의 물음에 대응할 때 그리스·로마 철학을 활용하면서도동시에 그것과는 다른 토대 위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전개하였다두 사상의 토대가 서로 달랐음은 켈수스의 비평과 이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응답에서 두드러진다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익숙해 있던 켈수스에게 하나님은 육신에서 눈을 돌려 영혼을 올려보는 정신의 고양으로 볼 수 있지만오리게네스에게 하나님은 역사적 인물 속에서 내려오신 사건으로 알 수 있는 존재였다그리스·로마 철학이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점차 올라가 신을 인식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인간들을 향해 내려온 신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이 사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그리스·로마 철학자들에게는 의심의 대상이자 조롱거리였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증인들에 대한 신뢰로 이루어진 명백한 사실이었다.


에티엔 질송이 우리 자신과 그리스인들 사이에 기독교 계시가 끼어들었으며 이성의 작동을 위한 상황들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이야기하였듯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의 핵심이었다이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또 다른 원천인 성경에 기반하여 사상을 전개하였다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가 된 하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하였다특히 오리게네스는 알레고리라는 방법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였다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을 지상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또 다른 중심이었다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성경 해석과 저술은 교회를 염두에 두고 행해졌으며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예배에서 역사 속에서 계시된 사건들을 되풀이하며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축하하였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로마 비평가들의 물음에 응답하면서도 그리스·로마 사상 밖에서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그리스·로마 철학과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성경과 교회로 전개된 그리스도교는 그 목적에서도 당대의 철학과 구분되었다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에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가 묘사한 하나님의 도성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즐기는” 곳이다. ‘지상의 도성에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인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거룩한 욕망을 품도록 격려하는 행위들교회가 그리스도교에 부여한 사회적 차원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핵심이었으며 헬레니즘을 기독교화하는 데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성경교회를 원천으로 형성되었고 헬레니즘을 기독교화하였다곧 그리스도교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목적으로 초월적 사건그것에 대한 사유와 교회라는 현실적 제도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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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의 형성 - 신경은 어떻게 신경이 되었는가? 비아 시선들
프랜시스 영 지음, 강성윤.민경찬 옮김 / 비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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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교회 안팎의 도전에 맞서며 신경을 형성하였다. 이 과정은 그리스·로마의 다신교와 유일신 신앙을 물려준 유대교 사이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명료화하는 과정이었다. 신경을 둘러싼 논쟁이 정통이단을 가르고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였음에도 불 구하고 계속되었던 이유는 그것이 교회와 신자들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프랜시스 영의 신경의 형성(The making of the Creeds, 1991)은 앨런 리처드슨의 신경의 형성(Creeds in the Making, 1935)의 속편으로 50여 년 사이에 이 주제에 관해 변화된 관점을 반영한 입문서이다. 앨런 리처드슨과 달리 프랜시스 영은 그리스도인들의 경험과 분리된 사실을 찾고자 하지 않으며, 신경을 신앙에 관한 이차적설명으로 간주하지도 않는 다. 신경의 형성은 삼위 하느님에 대한 송영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예수, 부활을 이해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더 나아가 영지주의, 그리스·로마 종교와 같은 외부의 도전과 내부 이단에 맞서는 정치적 쟁투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는 공동체 내 권위자, 진리를 판단할 근거가 필요하다는 실재적 요구에 의해 정통의 시금석으로서의 신경을 형성해야 하였다.


교회가 처음 마주한 도전은 창조에 관한 것이었다. 물질세계를 격하시키며 성육신을 부정하는 영지주의, 물질세계가 2 원리질료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로마 철학에 비추어 그리스도교는 창조 교리를 가다듬어야 했다. ‘한 분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라는 신경의 첫 조항은 영지주의를 배격하고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고안함으로써 전능한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선한 세계를 변호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마주한 또 다른 도전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모두에게 예배하는 것”, 즉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였다. 그리스도교는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개념을 활용하였다. 유스티누스의 로고스 신학을 이어받아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중재자라고 변론하였고,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변을 거쳐 최종적으로 니케아 신경에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로마의 다신교,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명료화하였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명료화되기까지의 과정, 그 중심에는 구원의 문제가 있었다. 당시 교회생활의 중심에는 구원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교회는 이 구원을 감지하고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어떻게 다자가 궁극적인 일자와 연결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한 분 하느님과 한 분 주님을 섬길 수 있는가’,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는가,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오는가’, 나아가 교회 밖에도 구원은 있는가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신경은 이 세계를 거부하지 않고 하느님이 이 지상의 통치자가 되시며 그분의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는그리스도교의 구원론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신경의 첫 조항은 하느님께서 -창조혹은 회복시키실 이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었으며,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반박하였던 까닭은 로고스가 본질상 하느님의 아들이어야만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은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창조로서의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전수해온 삼위 하느님에 대한 송영또는 고백은 그리스·로마의 종교와 이단과의 논쟁 속에서 정통의 시금석인 신경이 되었다. 프랜시스 영은 교회 안과 밖, 교회 내부 정통이단사이의 논쟁을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이 과정 전반에 신자들의 구원, ‘이 세계의 회복이 놓여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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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 - 로마 세계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 비아 제안들 시리즈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양세규 옮김 / 비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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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다신교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것이 로마 제국 체제를 위협하는 미신이라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교가 학파로 인식되면서 비로소 시작된 그리스·로마 지식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진지한 논쟁은 그리스도교가 로마 세계에 어떻게 비춰졌는지,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사상적·종교적 충돌 지점은 어디였는지 보여준다.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은 이들의 비판에 대응하며 논변을 마련하고 교리를 가다듬으며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형성해나갔다.


초창기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기록을 남긴 플리니우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는 공통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미신으로 이해하였다. ‘미신은 로마 세계 바깥에서 로마 세계 안으로 들어온 관행과 신앙으로서 로마 제국의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로 여겨졌다. 로마 제국에서 종교는 항상 시민종교로서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황제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체제 유지 기능과 연결되어 있었다. ‘팔레스티나에서 막 일어난 새 종교는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공공의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민종교의 원칙에 어긋났던 것이다. ‘경건한로마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시민들로부터 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종교 생활에서 등을 돌리게끔 하여 무신론으로 이끄는, 그 결과 로마 제국 체제를 위협하는 미신이었다.


2세기의 과학자갈레노스는 그리스도교를 미신이라는 틀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철학 학파로 이해한 인물이었다. 갈레노스를 시작으로 켈소스, 포르퓌르오스, 율리아누스와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의 논쟁이 이루어졌다. 핵심 쟁점은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였다.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은 그리스·로마의 사유방식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로마 전통에서의 최고 존재에 대한 숭배를 저해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교 역시 경건과 정의와 인류애를 고취한다고 변론해왔다. “가장 박식한 철학자포르퓌리오스는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것이 유일한 최고 존재에 대한 숭배를 위협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켈소스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것이 곧 최고 존재에 대한 대항 신을 설정하는 행위이며, 이것은 또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충돌은 정치적문제이기도 하였던 것이었다.


옛 신들에게 돌아선” ‘개종자율리아누스 황제가 시행한 조치들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조치였다. 그는 칙서를 발행하여 그리스·로마의 전통 종교를 가르치게 하였고 파괴된 유대교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인에게 유대교 성전의 파괴는 그리스도교의 예언이 성취되었으며 유대교가 종결되었다는 증거였다. 비록 실패하였으나,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시기에 로마 제국의 체제 이념으로 확립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그리스·로마의 전통 종교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로마의 지식인들과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의 논쟁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 예수의 위치,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 성서의 역사적 신뢰성과 같이 이후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핵심적인 주제가 될 문제들을 두드러지게 하였다. 논쟁을 계기로 새로운 교리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니, 갈레노스의 비판에 응대하면서 만들어진 무로부터의 창조교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스·로마 종교가 제기하는 비판에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이 필사적으로 대응한 과정은 그리스·로마의 사유방식이 그리스도교에 스며드는 모습,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그리스도교만의 역사로 볼 수 없는 이유이다. 후속 도서로는 로버트 루이스 윌켄과 유사한 관점에서 교리의 형성에 주목한 프랜시스 영의 <신경의 형성>이 적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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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윤대석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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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은 관동군의 전략거점으로 시작되었으나그 발상은 민족협화왕도낙토라는 이념으로 다양한 행위자들을 불러모아 이상국가를 건국하려는 운동의 장으로 포장되었다머리는 관동군몸통은 천황제꼬리는 근대 중국으로 구성된 키메라’ 만주국에서 민족협화와 왕도낙토 따위의 이념은 분식에 불과하였을 뿐 만주국은 관동군 중앙독재의 국방국가였다변형을 거듭하여 완성된 모조(模造)천황제 만주국의 천황을 위한 전력투구는 만주국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준다.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집착은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선반도를 확보해야한다는, 주권선과 이익선에 관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연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0년에 제기된 아먀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은 더욱 확장되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국권회수운동과 국민당의 북벌에 직면해서는 전쟁으로 전쟁을 유지하는” 총력전을 위해서나아가 세계최종전으로서의 일미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전략거점으로서 만주를 영유해야한다는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의 만몽영유론으로 발전되어 나타난다만몽영유론은 육군 중앙부의 반대로 독립국가 건설로 전환되기는 하였으나 이후 관동군 주도의 건국 공작은 육군 중앙부와 외무성의 통제 밖에 있었다.하지만 갑작스레 만주에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어야 하는 이유에 관동군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여기에 덧붙여진 정당화가 현지 세력을 동원한 건국 공작과 왕도국가론이다.


관동군은 장쉐량에 반대하여 만주 지역의 독립성을 주장하던 세력들과 청조 복벽을 꿈꿔온 선통제파를 중심으로 하여 자발적 분리에 따른 독립국 건설이라는 방식을 취한 후 선통제 푸이를 집정으로 내세웠다동시에 만주국은 재만 중국인들의 자발적 운동으로 성립된 독립국이어야 했기 때문에 관동군은 '자발적인건국운동 단체로서 자치지도부를 발족시켰다자치지도부는 장쉐량과 군벌국민정부를 모두 패도정치로 규정하고 민중자치의 왕도국가 건설····몽의 공존공영이라는 민족협화안거낙업순천안민의 낙토를 실현한다는 일념으로 건국운동을 주도하였다하지만 자치지도부의 건국운동은 메이지 천황의 위대한 뜻을 받들어진정 일본이 짊어질 대사명의 제일보를 이 인연 깊은 만몽의 땅에 내리려는 데 있다.”라고 하는 <지방자치 지도원 복무심득>에서 알 수 있듯이 천황제 국가 일본의 '자민족 중심주의'가 짙게 밴 것이었고 이것이 만주국의 본질이었음은 만주국의 통치체제에서 드러난다.


관동군의 만주국 통치 기본방침은 만주국의 국방을 일본에 맡기고 일본의 말을 듣게끔 하여 "일만일체의 국방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때문에 자치지도부와 같은 건국운동 단체들은 퇴조될 수밖에 없었고 관동군과 총무청 중심의 중앙독재주의에 가까운 통치체제가 성립되었다이후 만주국은 두 가지 변화를 통해 일만일체를 이뤄가는데 하나는 1934년 제제만주국으로의 이행이고다른 하나는 행정테크노그라트 관료의 진출이다. ‘2키 3스케로 대표되어 전후 일본에서도 영향력을 미칠 행정테크노그라트 관료들은 일본 각 성에서 파견되어 일·만 행정의 일체화를 꾀하였고 1937년에 이르러서는 기시 노부스케를 중심으로 통제경제를 주도하였다이렇게 일만일체를 이룩한 모조(模造)천황제 혹은 상사형(相似形)’천황제 만주국은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의 식량 창고로서 기능하였거니와 당초의 왕도국가민족협화로부터 멀어진 일본의 국방국가병영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왕도국가민족협화를 위해 만주국에 뛰어든 몇몇 자들의 순수한 신념까지 비난할 마음은 없다그러나 만주국을 만들어내고 변형시켰던 것은 일본 민족이 정치의식이 미약한 중국을 지도해야 하고 일본 민족이 아시아의 부흥을 주도해야 한다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극도의 자민족 중심주의였다그리고 이것은 바로 야마무로 신이치가 규정하듯이 키메라 만주국의 몸통이자 근대 일본의 본질인 천황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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