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1
구범진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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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청이 만··몽의 세계제국으로 성장하고 안정된 체제를 유지한 것은 팔기제도 덕분이었다. 청은 팔기제도를 근간으로 본속주의와 격리주의에 따라 제국을 통치하였는데 이 특성은 외국과 맺은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한화하여 ·한 연합 정권으로 변모한 청은 곧 신해혁명으로 무너졌으나 그 영향은 오늘날 중국에까지 미치고 있다.


청은 누르하치가 요동에서 아이신 구룬을 선포한 1616년에 시작하여 홍타이지의 다이칭 구룬선포, 입관 이후 강건성세를 거치며 만··몽의 세계제국을 이루었다. 다양한 민족이 혼합한 키메라의 제국청은 팔기제도를 통하여 체제를 유지하였다. 누르하치가 조직한 팔기는 민정과 군정을 아우르는 여진족의 사회집단인 8개의 구사를 의미하였다. 팔기제도는 본래의 팔기만주에 청이 팽창해나가며 팔기몽고와 팔기한군이 더해졌고 이 세 팔기에 소속된 이들은 기인이라고 불리며 한인과 분리되어 황제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동시에 청은 본속주의에 의거하여 각 민족의 풍습에 따라 중국에서는 수명천자를, 몽골에서는 대칸을, 티베트에서는 전륜성왕을, 위구르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를, 기인에게는 누르하치의 계승자인 한을 자임하며 통치하였다.


청이 외국과 맺은 관계에서도 팔기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체제의 특성이 돋보인다. 청은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 체제라고 하는 호혜 평등의 관계를 맺었는데 두 조약 모두 라틴어로 정식 조약문을 기록하고 만주어와 러시아어로 쓰인 조약문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체결되었다. 그러나 ‘만한일가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한인은 이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조약문도 한문으로는 작성되지 않았다. 조선과의 책봉·조공체제에서도 한인·한문의 배제현상이 돋보이는데 베트남·유구에는 한인 칙사가 파견되었던 것과 달리 조선에는 기인 출신 관료만 칙사로서 파견되었다. 이는 입관 전 책봉·조공체제를 맺은 조선은 베트남·유구와 달리 대청의 질서에 속했다고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은 한인의 대명과 구분되는 대청’, 다이칭 구룬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유지시켜준 것이 팔기제도였다.


19세기에 접어들며 내·외적으로 위기에 시달리게 된 청은 한화함으로써 체제를 유지시키고자 하였다. 태평천국 반란, 야쿱 벡의 이슬람 정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미 약해진 팔기 군대를 대신하여 반란을 진압한 것은 상군과 회군으로 대표되는 한인 의용군이었다. 열강이 만국공법질서를 들이밀 때에도 청은 격리주의와 본속주의를 포기하고 직성의 통치 제도를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대처하였는데 그 결과 한인은 만주와 몽골로 진출하였고 한인 관료들이 기인을 대신하여 총독·순무에 오르는 일이 빈번해졌다. 외교에서도 한인·한문의 배제현상이 사라져 러시아와의 외교는 오히려 한인 관료가 주도하게 되었으며 교섭 언어도 만주어에서 한어로 대체되었다.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서도 이제는 한인 관료가 칙사로서 파견되었고 군대와 상인들까지 조선에 진입하게 되었다. ‘·한 연합 정권으로 바뀐 청은 한인 주도의 신해혁명으로 붕괴하였으나 청의 유산을 상속하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만주 땅의 작은 집단에서시작한 청은 팔기제도를 근간으로 하여 격리정책과 본속주의를 통해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저자가 목표로 한 청나라가 어떤 구조 속에서 어떤 원리에 입각하여 제국을 통치하였는지는 팔기제도로 해명되었으나, “청 제국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았다. 이 점에 관하여는 커크W.라슨의전통, 조약, 장사을 통하여 쇠망기에도 조선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제국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해명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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