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신앙 - “내 상처를 보고 만져라.”
토마시 할리크 지음, 오민환 옮김 / 분도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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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었던 상처를 통한 묵상. 그분의 상처와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이 많은 위로가 된다.

나의 신앙과 나에게 신앙으로 제시된 것은 ‘마르티노 성인의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피흘린 적도, 상처 자국도, 흉터도 없는, 상처 입지 않은신, 이 세상에서 내내 춤만 추는 신들관 종교들을 믿지 않는다. 그것들은 시장에서 그들의 휘황찬란한 매력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나의 신앙은 가파른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지나 하느님께 나아갈 때, 가난한 자들의 문, 상처 입은자들의 문을 지날 때 의심의 짐을 내려놓고 내적 확신과 고향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부자, 배부른 자,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자, 아는 자보는 자‘, ‘건강한 자‘, ‘경건한 자‘, 지혜롭고 신중한 자‘는 그 문을 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참조).
- P16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이 외침에서 토마스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어떤 형이상학적 정의도 제공하지 않는다. 어쩌면 요한복음서에서 묘사된 이 기쁨의 외침은, 그리스 고전 희곡이 ‘신‘이라는 단어를 다루는 방식과 비슷하다. "사랑하는 이를 안다면, 그것은 신을 아는 것이다!" 친구를 만날 때, 거기에 신이 있다! 신은 발생한다!

그렇다. 성경에서, 바로 그에게서 하느님이 발생한다. 하느님은 그렇게 발생하는 하느님이다. 토마스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에서 하느님이 발생하는 것을 경험한다. 하느님은 여기 있고, 그분을 만질 수 있다. 유일한 중개자(1 티모 2,5)와 하느님의 관계는 직접적이며 둘 사이에는 간극이 없다.
- P32

온 세상이 ‘신의 죽음‘이라는 그림자 아래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살아 있는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가 하나 있다. 그리스도 안, 나자렛 예수 안이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았고 그분에 대해 말했던 모든 것은 죽을 수 있고, 죽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외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안다. 예수가 오래전 이 세상에서 거니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의미가있다. 본회퍼는 바오로와 루터를 떠올린다. 바오로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나에게는 쓰레기, 오물처럼 보인다‘라고 했으며, 십자가에 처형된 그 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기로 작정했다(참조: 필리 3,8; 1 코린 2,2).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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