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철학의 왕국 - 호락논쟁 이야기
이경구 지음 / 푸른역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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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한 사회의 사상을 알지 못하고 그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성리학은 학문을 넘어선 삶의 태도이자 지표였으며, 회복되어야 할 이상세계의 기준이기까지 했다. 조선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사상이었던 유학 특히 성리학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조선, 철학의 왕국-호락논쟁 이야기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3대 논쟁' 중에 가장 덜 알려진 호락논쟁을 다룬다. 호락논쟁은 25년간 연구한 저자조차도 이해하기에 힘들고 사상을 연구하면 할수록 혼란에 빠진다고 표현할 만큼 난해하다.그렇지만 책 제목에 호락논쟁 이야기라는 말을 붙인 것처럼, 저자는 유학과 성리학의 탄생부터 호락논쟁 이면의 이야기까지 역사적 흐름, 논쟁 주역들의 대화와 일상, 심성과 욕구도 함께 설명한다

 

1. 곧음이냐 유연함이냐


  명이 멸망하자 조선은 유일한 유교 국가가 되었다. 그러니 조선을 주자학의 나라로 세워 유교의 명맥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 이후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강력한 생각이었다. 송시열로부터 이어지는 노론 학맥은 충청도의 권상하와 서울의 김창협으로 나뉘어 충청도의 호론과 서울의 낙론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나뉜 호론과 낙론 사이의 논쟁이 바로 호락논쟁이다. 호락논쟁은 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까지 이어졌다. 호락논쟁이 일어난 18세기는 안팎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시기였다. 오랑캐라고 무시해온 청의 문화와 지배는 점차 융성하고 확고해졌다. 조선 내부에서는 도시의 성장과 세속화, 여러 계층이 떠오르며 기존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변화되는 환경에 호론과 낙론은 서로 다르게 반응했다. 호론은 송시열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하였다.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자 타도할 적이었고, 남인과 소론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반면에 낙론은 새로운 국면에 유연하게 반응했다. 다른 학파와 정파의 주장에 귀를 열었고, 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들의 논쟁은 치열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말과 글이 오갔고, 분파가 형성되고 갈라졌으며 말과 글은 칼이 되어 많은 사람을 베기도 하였다.

  

  호락논쟁은 사단칠정 논쟁을 계승하는 성격이 있다. 사단칠정 논쟁은 만물의 형성 원리인 이()와 만물의 근본 질료이자 형질인 기()가 인간의 사단과 칠정에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에 비해서 호락논쟁의 성격은 인간 정의에 대한 문제로서 상대적으로 구체적이었다. 호락논쟁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놓고 논쟁했다. 먼저는 마음의 정체에 대한 논의이며, 두 번째는 인간과 물성, 인간과 외물의 관계 마지막은 성인과 범인, 인간의 변화와 평등에 관한 논의였다. 마음의 정체에 대한 논쟁은 수양의 문제였고, 인간과 물성은 타자에 대한 인정과 관련된 문제였으며, 성인과 범인은 다양한 계층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다.


  각각의 입장에는 앞서 언급한 새로운 상황에 대해 올곧은 호론과 유연한 낙론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호론은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여 기()로 인해 움직이는 현실 세계를 중시했다. 이이의 철학은 기의 가변성을 긍정하자 현실에서의 변화에 주목했다. 그러나 기의 중시는 기로 인해 생겨난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강조로 흐를 수 있었다. 호론의 사상은 후자였다.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며 기로 인한 차별과 분별을 강조하였고, 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움직임을 경계했다. 반면에 낙론은 이()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성인과 범인 인성과 물성은 같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보편성은 유교 문명만의 보편성으로서 청나라와 신분질서에까지 보편성이 확장되지는 못하였다.

 

2. 탁류 속으로

 

  호락논쟁은 정치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노론은 숙종 후반부터 정계와 학계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고 영조 대에 거의 굳어졌다. 이 시기에 노론은 호론과 낙론으로 학파가 갈라지고 논쟁이 벌어졌다. 숙종 대에서 경종 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발 딛고 있는 정치는 복잡했고 살얼음판이었다. 특히나 경종 때의 신축환국과 임인옥사는 노론, 특히 낙론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즉위한 영조는 탕평 정치를 선포하고 더 이상 붕당의 논쟁과 사문 시비를 허용하지 않았다. 탕평 정치에서 주도권은 군부이자 공을 대표하는 국왕에게 있었고, 어느 한 붕당이 정권을 잡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호론과 낙론은 영조의 탕평 정치에 서로 다르게 반응했다. 낙론은 탕평 가운데서도 노론의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탕평 정치의 주도권이 노론에게 있었지만, 호론은 노론이 완전한 주도권을 잡는 때까지 기다렸다. 영조 후반 왕권이 강해지자 그에 따라 외척의 권력도 강해졌다. 당시 외척은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북당과 정순왕후 계열의 김한구·김구주 부자를 중심으로 하는 남당으로 대립하였다. 남당은 학맥과 인맥으로 호론과 연결되었고, 북당은 낙론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은 호론과 낙론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을 이었지만, 영조와는 달리 국왕이 주도하는 의리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정계는 국왕을 따르는 시파와 붕당의 의리를 고수하는 벽파로 나뉘었다. 이들의 갈등은 정조 말년에 한원진의 시호 문제로 극단에 치닫고 정조가 죽은 후 파국에 이르렀다.


  정조가 죽은 후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한 정순왕후는 호론과 결탁하였다. 영조 후반 청류를 지원하여 척신과 대항했던 자신들의 사상을 저버리는 순간이었다. 호론은 스스로 척신이 되어 정순왕후와 함께 사학을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정과 사의 이분법은 천주교를 신봉했던 많은 인물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정계에서는 남인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고 낙론의 김건순이란 인물과 혜경궁의 동생까지도 사사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사상의 자유와 새로운 탄생을 경직시켰다. 서울에서 자유로운 문학을 전개하던 자들과 낙론의 한 부류로 청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한 북학파는 모두 활기를 잃었다. 사상의 전환을 불러온 홍대용과 박지원, 기발한 글을 썼던 이옥은 스스로를 검열하고 무기력함을 절감하였다.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자 정국은 급변하였다. 순조는 서울의 명문 안동 김씨 출신 순원왕후와 혼인하여 친정을 시작하였다. 안동 김씨 세력은 정국 변화를 주도하였고 이에 벽파는 일련의 사건으로 몰락했다. 결국 벽파와 호론의 학자들은 역적이 되어 제거되었다. 이렇게 정권을 장악한 순조의 외척 안동 김씨 세력이 순조·헌종·철종 때까지 정치를 주도한 것이 바로 세도정치다. 그리고 그 세도정치 기간 동안 호론이 벽파에 종속된 것 이상으로 낙론은 세도정치에 종속되었다.

 

3. 다른 지평에서

 

  호락논쟁은 순수한 학문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정쟁과 연관되고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되었다. 한원진은 도교, 불교, 허형을 비판하는 삼무분설을 통해 낙론을 거세게 몰아붙인다. 만물의 원리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보편 사상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배제와 차별의 논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낙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말로는 성인과 범인이 같다고 말하고,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면서도 실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호락논쟁은 점차 경직되었고 극단으로 치달았다.


  극단과 포화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배태되어 있는 법이다. 호락논쟁이 현실과 유리되어 이상만을 추구할 때 지역과 정파를 가리지 않는 소수의 학자들은 실()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의 폐해를 보며 진실, 현실, 실천, 무실 등을 외치며 자신을 수양하고 실천하는 실()로써 성리학의 이상세계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해석이 난무하고 어느새 본질로부터 멀어져 폐단을 드러내는 논쟁에서 소박했던 정신을 되찾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성리학 세계관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상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홍대용은 호락논쟁과는 다른 지평에 서 있었다. 홍대용은 노론의 명문 출신으로 정파로 따지자면 낙론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정파에 얽매이지 않았고,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닌 인물이었다. 홍대용은 청에 다녀온 이후 개방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그의 저서 의산문답에서 그는 유학 중심, 인간 중심, 더 나아가 우주 중심의 모든 중심성을 해체하고 상대적인 관점을 취했다. 이것은 외물에 대한 평등과 연대의 정신으로 뻗어 나갔다. 홍대용은 경직되어 가는 사상논쟁과 정쟁 속에서 새로운 사상과 가능성을 열어젖힌 인물이었다.


4. 이해로서의 역사


  호락논쟁은 저자는 물론이거니와 당시의 학자들도 어려워했던 내용이었다나도 예전부터 몇 번씩 한국사상에 관해 공부해보고 싶었지만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렇지만 이 책은 적절한 설명과 비유를 들며 간결하게 서술하여서 편히 읽을 수 있었다또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며 호락논쟁의 역사성을 재현해낸다그렇지만 조선 후기에 이뤄진 정치적 다툼을 호락논쟁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부분은 그 연관성이 와닿지 않았다더불어 이것이 학문적 논쟁인지 정쟁인지 학문적 논쟁이 정쟁에 이용된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논쟁의 지속성이라든지 파급력의 차원은 약간 의문스러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곳곳에서 시대와 사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호락논쟁의 의미를 찾고 호락논쟁과 현대를 엮으려는 저자의 노력은 인상적이었다개인적으로는 그들이 학문에 임하는 자세와 열성은 많은 배움이 되었고유학과 세상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통해서 조선시대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사실 조선, 특히 성리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강력하다. 그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역사는 대중들에게 꽤 인기 있는 상품이 되었다. 역사를 얘기하는 장도 다양해졌다. 누구든지 역사에 접근할 수 있게 되자 역사에 대한 다양한 평가도 이뤄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호사가로서 역사에 기웃거리며 심판자로서 역사를 판결하는 것 같다. 이들은 호락논쟁이나 성리학에 대해서 고리타분한 역사거나, 무익한 논쟁, 혹은 조선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시대착오적인 역사로 단정 짓는다. 역사는 (옛날)인간에 대한 이해이지만 이들에게는 역사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호락논쟁 이야기를 통해서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으며 그들의 사상과 삶을 통해 조선시대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면 호락논쟁은 충분히 가치 있는 역사다. 조선, 철학의 왕국-호락논쟁 이야기는 심판자와 호사가의 역사에게서 공격받은 조선의 역사, 성리학()과 호락논쟁을 훌륭히 변호해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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