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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한집 5
윤지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윤지운 작가의 『파한집破閑集』을 대하면 이 제목을 학교에서 언젠가 들은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그 생각이 맞다. ‘파한집’은 고려시대에 글로 이름을 떨친 이인로의 문집 제목으로, ‘한가로움을 깨뜨리는 책’이라는 의미이다.
깨어지다 1. 시대극이지만
고려시대 문집에서 이름을 빌렸으나 작품의 무대는 중국 당대 천보연간이다. 작가가 1권 부록에서 정리한 바에 따르면, 현종이 측실 양옥환을 귀비로 봉하고 예전의 현명함을 스스로 놓아버린 시기였다. 서기로는 700년대 중반쯤이 된다. 작가는 시대극이라는 이야기 틀에 걸맞게 그림도 새로이 맞추었다. 꺾이는 곳이 강조되는 펜선으로 저 옛날 붓그림의 흔적을 좇았다.
허나 『파한집』은 어디까지나 판타지. 당대 정세를 크게 다루지도 않거니와 시간 배경에 과도하게 얽매이지 않는다. 특히 개그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시대극의 굴레에서 여유롭게 빠져나올 때가 많다. 주인공의 의뢰인이 주인공이 머무르는 집 앞에 텐트를 치고 자장면을 시켜먹는달지. 주인공에게 작업을 방해받은 기녀가 '남의 영업과 컬렉션‘을 망쳤다고 소리를 친달지. 큰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등장하는 시대초월 개그는, 지금-여기에서 살아가는 독자에게 웃음을 안겨 준다.
깨어지다 2. 한 팀이지만
주인공이 두 명이다. 백언伯言(본 이름은 ‘주유周瑜’)과 호연淏淵(본 이름은 ‘원위元韋’). 백언은 귀신을 물리치고 부적을 쓰는 일로 먹고 사는 도사다. 호연은 신월晨月이라는 귀검을 들고 백언을 돕는다. 이 두 청년은 각지를 떠돌며 빼어난 실력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다. 분명 훌륭한 콤비다.
사실 둘은 언뜻 보기에 참 안 어울린다. 백언은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의뢰인에게 존대하는 법이 없으며 돈 왕창 벌어 기루에 좍 뿌리는 게 낙이다. 호연은 정확히 그 반대다. 백언이 벌인 일을 매번 수습해야 하는 호연의 처지가 딱하기 그지없다. 호연에게 더 큰 비극이라면, 지켜보는 독자 입장에선 둘이 아웅다웅 티격태격하는 모양새가 퍽 즐겁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랴. 계속 함께 있는 수 밖에.
깨어지다 3. 사람이지만
흔히들 ‘사람답다’는 표현을 쓴다. 이성적이다, 분별력 있다, 예의를 지킨다 등등의 표현과 바꾸어 쓸 수 있겠다. 백언과 호연이 상대하는 귀신들은 사람다움과는 한참 거리가 먼 존재다. 사람에 해 끼치기를 저어하지 않으니 얼른 붙잡아 성불시켜야 한다.
하지만 애초에 귀신이 나타난 사연을 볼작시면 문제가 그리 단순치 않다. 바람난 남편과 간악한 시어머니가 선한 며느리를 죽여 원귀로 만들었다. 관찰사가 술자리에서 물에다 독을 풀어 삼백년 수련한 교룡을 또한 같은 운명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람은 때로 전혀 사람답지 못하다. 어리석고 유혹에 쉽게 빠지며 도리 따위 무시해 버린다. 그렇다면 인간과 귀鬼의 경계는 어디쯤이고, 진정 사람다움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깨어지다 4. 옛이야기지만
이 작품은 짧은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구성을 취하는데, 이따금씩 익숙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심청전’, ‘옹고집전’, ‘선녀와 나무꾼’ 등등.『광고금오행기』, 『요재지의』등에서 따 온 에피소드도 있으니 중국 고전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더욱 반가울 거리가 많을 것이다. 이들 원작은 다수의 옛이야기가 그러하듯 대체로 권선징악을 마무리로 둔다.
그 마무리는 『파한집』속에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작가는 옛이야기의 뒷면을 본다. 심청이 기나긴 아버지 병수발에 지쳤다고 해도. 나무꾼이 부인으로서의 선녀보다 천녀로서의 선녀를 더 사랑했다고 해도 쉽게 도리질 칠 수가 없다. 외려 그 편이 더 진실에 가까우리라 끄덕이게 된다. 언제나 비극으로 치닫는 작품 속 이야기를 계속 읽어낸 독자라면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독을 품었다는 사실을. 하여 세상 한 구석 또한 마냥 슬프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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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한집』은 '독자만화대상 2007'의 대상 부문 본선 진출작이다(다른 진출작 목록은 여기에서. 독만상 공식 홈페이지: http://comicreader.org/2007/vote/vote_main_01.php). 투표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죄스러워 뒷북으로나마 리뷰를 쓰고 있다. 본선 진출작 가운데 챙겨본 작품들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