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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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에 순간 당황했으나, 첫장을 펼치자 마자 보인 이시봉의 발자국 사인을 보자마자 느꼈다. 이거 재밌겠다…
주인공인 이시습은 알콜 중독인 20살 남자이다. 키우던 강아지 이시봉 때문에 '앙시앙 하우스'라는 비숑 전문 업체?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시습과 이시봉의 이야기, 그리고 이시봉의 조상인 베로와 베로를 키우던 고도이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전개된다. 처음엔 이 전개가 낯설었는데 읽을 수록 빠져들었고, 되레 이야기에 풍성함이 더해졌다. 특히 180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베로의 이야기가 꽤나 촘촘한 서사로 흡입력있다. 줄거리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하고싶지만 뭘 이야기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참는다.
더하여 이 책에 대한 박정민님의 추천사 중 하나가 정말 공감되어 함께 적어본다. «그리고 전국의 반려인들이여, 이 책을 절대 보지 마시오. 아니 보시오. 아니 보지 마시오. 아니. 몰라 시봉. 그냥 보시오!» 반려인들은 이 책을 삽니다.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어요.

사실 귀여운 표지와 제목만 보고 신청했던 서평단인데.. 웬 벽돌책..? 이렇게 두꺼운 지 몰랐는데요, 하면서 빨리 시작해야겠다 하고 읽은지 며칠 걸리지 않아 금방 끝났다. 벽돌책에 겁내지 말자. 이기호 작가님 소설은 처음인데 또 읽고 싶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그의 별명에 납득했다.


< 책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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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왜 미안해하지 않고 억울해했을까? 아빠는 살면서 그 말을 자주 떠올렸다고 한다. 미안한 것과 억울한 것을 뒤섞지 말 것. 나와 시현을 키울 때도, 공장에서 동료들과 일하고 투쟁할 때도, 아빠는 자주 그 말을 생각했고, 또 주문처럼 입안에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아빠에겐 그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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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이시봉과 시현이 동시에 위기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할지 상상해보았다. 아마도 나는……시현을 먼저 구하려 들 것이다. 몇 번을 상상해봐도 답은 같았다. 그러니 이시봉을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게 이시봉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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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게 결국 다 자기가 싼 똥 냄새 맡는 거거든. 동물들은 다 자기 똥 냄새를 맡아보는데, 인간만 아닌 척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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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종이라는 게 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김태형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사랑인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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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려고 한 과학 아닙니다 - 아주 사소한 질문에서 출발한 세상을 바꿀 실험들
이창욱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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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들. 이를테면 유변학적 관점에서 고양이는 액체로 정의된다던지, 최근 더 관심을 갖게된 주식시장이 복잡계라는 것, 내게 너무나 생소한 황색망사점균이라는 그들이(?) 지하철 노선도를 만들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는 사실 등등… 웃긴 과학 연구에 주는 노벨상의 패러디 이그노벨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감자칩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나, 실제로 욕설을 하는 게 통증을 줄이는 데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와 같이 다소 엉뚱하고 웃긴 과학이 잔뜩 있다. 이 모든 것이 실제 과학적으로 입증되었거나 오랜 시간에 걸쳐 관찰 또는 실험되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느껴졌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나로서 책을 읽는 내내 유익한 시간이었다. 책에서 다뤄진 '이그노벨상'이 단지 웃긴 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저변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괄목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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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결과, 욕을 한 사람들이 탁자를 설명하는 단어를 사용한 사람들보다 통증을 더 잘 참았다. 남성의 경우 욕을 한 사람이 (190.63초) 욕을 하지 않은 사람(146.71초)보다 찬물에서 43.92초나 오래 버텼다. 여성도 욕을 한 경우에 37.01초를 더 참았다. 실험 후 통증 척도 검사에서도 욕설을 한 참가자들이 느낀 통증의 강도가 덜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렇다. 여러분, 삶이 힘들면 욕을 좀 해도 된다! 과학이 여러분께 드리는 삶의 꿀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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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과학 연구는 사실 다 이런 호기심에서 시작됩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무엇이 좋은 과학인지 너무 빨리 정하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이 경제적 논리 아래서 숫자로 치환되는 지금의 세계에서 이상한 호기심은 아마도 가장 변호하기 힘든 가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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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었던 과학 도서 <찬란한 멸종>처럼 구어체로 서술되어 있어서 읽기 쉽기도 했고, 과학동아 부편집장이자 과학칼럼리스트인 저자 이창욱님이 괄호 안에 쓴 문장들은 친한 친구, 또는 선배로부터 직접 듣는 이야기 같아서 더욱 재미있게 읽었다. 웃기려고 한 과학 아니라고 했지만 웃겼다. 쉽고 재밌게 읽을만한 과학서를 찾는다면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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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지와 광기
야콥 하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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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스럽다는 추천사가 정말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채식주의가 당연한 세상에서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기분이 딱 이럴까. 소설은 한 사건에 연루된 피의자가 형사에게 진술하는 조서를 독백 형식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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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사고 싶다면,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할복할 것이냐 아니면 실제로 할복할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는 거였죠. 그렇게 멀리 와 있더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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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채식주의자가 되는 걸 자기도 돕겠다더군요.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을요. 나는 절대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아, 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저 몇 년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것뿐이라고. 그걸로 뭔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단 말이야. 제가 이 년 동안 티라나에서 일한다고 알바니아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제가 앞으로 여기, 이 취조실에서 이십 년을 보낸다고 형사가 되겠느냐고요. 제 말뜻이 뭔지 아시겠어요. 형사님? 그건 제 결정이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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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는 피조물에 대한 연민에서 육식 향유를 포기하지만, 저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 때문에 채식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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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접시 가득한 채소는 주례 앞에 신랑 혼자 달랑 서 있는 결혼식 같은 그런 모자라는 음식이란 말입니다. 간단한 진리입니다, 형사님. 채소는 그냥 맛이 없어요. 배추, 양파, 콩을 먹으면 배에 가스가 차고, 가지와 호박은 익으면 질척거리고, 파프리카를 생각하면 트림이 납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건 감자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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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채식주의를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 일어난 사건의 발단과 결말을 재미있게 풀어낸다. 주인공은 동료들과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육식 메뉴를 주문했다가 비난을 받고 타의적이면서 충동적으로 채식을 결심한다. 채식을 하게 되며 일어나는 부작용과 상황에 대해 진솔하고, 또 통찰력 있게 진술하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하면서 웃고, 또 경악하며 읽었다.
가볍게 읽기에도 그저 재밌긴 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하다고 느낀다. 채식의 유행, 그리고 그에 반하는 육식에 대한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반응이 획일화되고, 이러한 것들이 이데올로기화 되는 것을 경계해야함을 꼬집는다. 실제 옮긴이의 말을 보면, 작가인 야콥 하인은 [〈도이칠란트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그 스스로 사프란 포어의 책을 읽은 다음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지만,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거부한다고 밝혔다. 유행처럼 번져가는 독일 내의 채식주의에 뭔가 불편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에 너희보다 나은 사람이다. 그렇게 믿는 순간, 채식주의는 이데올로기화된다. 참여하지 않으면 나만 도태될 듯한.] 이라고 쓰여있다. 재미로 읽어도 좋고, 가볍게, 또는 무겁게 읽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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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사이
케이티 기타무라 지음, 백지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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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 해문클럽 이벤트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부모님은 싱가폴 출신이며, 자신은 뉴욕에서 살다가, 네덜란드 헤이그의 재판소에서 통역사로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에는 지난 문학동네 해문클럽의 선정작들과 비슷하게 이민자이자 여성인 주인공의 설정을 두고, 소수자 또는 약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인가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으며 드는 생각은 그렇지 않다.
< 친밀한 사이 >, 책 제목과 일맥상통하게 주인공과 그 주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헤이그에서 새로 사귄 친구 야나, 직장 동료들이나, 연인 관계인 아드리안, 야나를 통해 만난 엘리너와 안톤 그리고 재판소에서 일을 하며 반인도적 범죄자인 전직 대통령까지. 등장인물이 한명 한명 등장할 때마다 친밀한 사이는 주인공과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궁금해하며 읽었다. 결론적으로 이 모두가 주인공의 의사에 상관없이 조금 또는 많이, 분명 친밀했다고 느꼈다.
처음엔 등장인물들이 말할 때 큰따옴표가 없이 서술되어서 한 문장을 놓치면 문단 앞까지 다시 올라가야해서 집중력이 필요한 책이었다. 재판소 이야기 부분은 익숙치 않은 이야기라 흥미가 조금 떨어지기도 했지만 친밀함에 대한 서사를 좇다보니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친밀함이라는 감정 자체가 유동적이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소설은 내내 긴장감이 있었다.
그리고 작가인 케이티 기타무라의 문장 하나하나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 책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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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나가 찬장을 열어 올리브오 일병과 후추 그라인더를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고, 모든 것에 벌써 제자리가 있음을 눈치챘다.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질투 때문은 아니고 어쩌면 동경 때문일 테지만, 그 둘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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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말로 볼 수는 없는 법이다—이 세상은 제 범속함(구치소의 땅딸막한 담벼락, 일상적인 노선을 따라 달리는 버스)과 제 극단성(그 감방과 감방 안의 그 남자) 사이의 모순에 현상대로 자리하고 있으니, 우리는 오로지 이 세상을 잠깐 보고 난 다음에는 설사 볼 일이 있다손 쳐도 오래도록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이 목격한 바를, 소름 끼치는 광경이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목소리를 잊는 것은 놀랄 만큼 쉽다.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우리는 잊어야만 하고 실제로 잊는다. 알지만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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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 시선에서 어딘가 그 생각이 드러났는지. 그녀는 갑자기 창피해 하는 듯 보였다. 우리는 이런 폭로가 우리를 더 가깝게 해줄 만큼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우리는 잘못된 방식으로, 잘못된 때에 서로를 드러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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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그에게 말하려고 작정했던 것들이, 몇 번이고 내 머릿속을 거쳤던 말들이, 우리 사이에 말해질 필요가 있다고 믿었던 말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오로지 이 말만을 했다. 이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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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수반캄 탐마봉사 지음, 이윤실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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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 해문클럽 이벤트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캐나다 최고 문학상인 스코샤뱅크 길러상을 받은 소설집으로 표제작인 <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을 필두로, 1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라오어는 이 책을 관통한다. 두 편 정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소설에서 한 번씩은 언급되어 있다. 라오어는 중국·티베트 어족의 캄타이 어군(語群)에 속한 언어. 라오스를 중심으로 타이 동북부, 베트남 중부 등지에서 쓴다. [표준국어 대사전 정의]라는 사전적 정의가 있다.

책 속에서 라오어는 누군가에게는 숨기고 감추고 싶은 것, 또 누군가에겐 뿌리와 같아 지울 수 없는 정체성, 그들의 자긍심이기도, 또는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무언가로 나온다.

실제로 작가 수반컴 탐마봉사가 한 살 때 라오스 난민촌에서 정부의 도움으로 캐나다로 이주한 일, 그에 따른 경험과 감정이 소설 많은 부분에 녹아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해문클럽의 선정도서였던 < 세 중국인의 삶 >에서와 같이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라오스계의 이민자들, 북미 사회에서 대체로 소수자이며, 하류층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서글프고 안타까우면서도, 또 따뜻했다. 냉혹한 현실을 각자의 방식으로 헤쳐나가고 이겨내기도, 또 단념하기도 하며 다양한 갈등을 이렇게나 다양하게 받아들이는구나, 하며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장, 노인, 어린이, 여성 등 라오스 이주민들의 삶을 다룬 이야기들이 무려 14가지의 짧은 소설로 쓰여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다. 공통된 주제로 이렇게나 다채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다니. 번역도 매끄러워 좋았다. 그중 < 저멀리 있는 것 >과 < 지렁이 잡기 >가 가장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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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 한마디만 할게. 꼭 기억해! 꼭 기억해야 해! 진심으로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엄마가 되고 나서야 그걸 깨닫지."

< 당신은 너무 창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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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소리는, 어떤 언어에서든 웃음소리다. 그의 웃음은 부드럽고 은밀했으며 따뜻했다. 어딘가 외로운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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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드문 우리 쪽으로 손을 흔들면 엄마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우리는 어둠 속 까만 점에 불과했다. 아빠가 우리를 콘서트에 데려오기 위해 치른 대가를 떠올렸다. 그가 다른 사람의 가구를 들어 올려 포장한 뒤 우리는 결코 살 수 없을 집으로 배달하던 시간들을. 랜디 트래비스를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사람들의 집으로. 우리가 앉은 곳에서 무대 조명이 그들의 머리를 비추었고 그들은 환히 빛났다.

< 랜디 트래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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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시에 이런 차림이라니, 엄마는 대체 무슨 일을 구한 걸까. 한 친구에게 들은 바로는 돼지 농장엔 항상 일거리가 있다고 했다. 그런 일을 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바닥의 똥을 치우거나 작업대로 데려가기 직전 살아 있는 돼지를 씻기는 일. 혹은 수컷의 몸을 문질러 흥분시킨 뒤 짝짓기를 유도하는 일. 나는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고 엄마가 구했다는 일자리가 그런 게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일은 일이다.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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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너무 역겹다고 소리 지르며 땅에다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엄마를 창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참았다. 많은 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었고, 엄마 덕분에 이 일을 얻게 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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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내가 아직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머릿속에 그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나를 못난이라고 부르던 게 기억난다. 엄마는 외모를 자만하지 말라고 아빠가 그렇게 부른 거라고 말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직장을 구한 뒤에야 외모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제야 외모가, 나쁘지 않게 생겼다면, 내게 가치 있는 것이 된다고. 하지만 그 순서를 바꿀 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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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 반대편에서 서서,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문구멍의 금색 테두리 안으로 보이는 그를 지켜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손가락으로 문구멍을 막고 가만히 있었다. 그가 나의 눈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지렁이 잡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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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그녀에게 끔찍한 것이었다. 바라는 게 무엇이든 그것이 그 자리에 없다는 걸 뜻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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