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ㅣ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ㄱ) 프루스트와 마르셀
프루스트가 평생 단 한 권의 책만을 쓰려고 했다는 주장은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하 <잃시찾>으로 표기)가 바로 그 책이고요. 하지만 그 전에도 프루스트는 오랫동안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잃시찾>의 주인공(이하 ‘마르셀’로 표기)과 저자 프루스트를 동일시하는 오류가 많은데, 적어도 글쓰기에 관한한 둘은 아주 다릅니다.
<잃시찾>의 주인공 마르셀은 항상 작가가 되고 싶어하면서도 평생 거의 글을 쓰지 않지요. 예외는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일단 어린 시절 꽁브레에서 마르탱빌르의 종탑에서 받은 인상을 마차에서 글로 옮긴 것이 첫 글이고요. 작품 후반에 <피가로>지에 기고한 글의 얘기가 나오고요. 그 외에 지나가면서 언급되는 것으로 ‘스완과 오데뜨의 사랑에 관한 소설 비슷한 글’을 쓰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번역을 했다는 말(프루스트의 러스킨 번역에 대한 암시)이 나오죠. 베르고트가 그의 글을 보고 ‘문장이 완벽하다’는 칭찬을 했다는 말이 <되찾은 시간>에 나오기도 하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본격적으로 창작에 몰두하는 일은 없습니다. 작품 끝에 가서 겨우 결심을 할 뿐이죠. 그래서 마르셀은 자신의 의지박약을 항상 한탄하고 그것은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주죠.
반대로 프루스트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굉장히 정력적이고 부지런한 작가의 인생이었습니다. 우선 20대 초반에 <즐거움과 나날들>을 내지요(제가 예전에 올린 게시물에 두 종류의 국역본에 대한 짧막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아나톨 프랑스이 서문을 써주었고요. 여담이지만 아나톨 프랑스가 베르고트의 모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사람들이 아나톨 프랑스에게 왜 프루스트의 <잃시찾>을 읽지 않냐고 묻자 “인생은 너무 짧고 프루스트는 너무 길다(la vie est trop courte, et Proust est trop long)”라는 재기발랄한 말을 남겼죠. 물론 <잃시찾>의 분량이 너무 길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프루스트가 <잃시찾> 이전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글은 <즐거움과 나날들> 외에 두 권의 러스킨 번역과 피가로 지에 실린 몇 개의 평문 등이 있습니다. 자세한 점은 책세상에서 나온 장 이브 타디에의 프루스트 전기를 참조하시고요. 러스킨 번역은 본문보다 역주와 해설이 더 긴 연구서에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그 외에 젊은 시절에 <장 상퇴이유>라는 제목으로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을 시도했고, 무엇보다 <생트뵈브 비판>이 있습니다.
(ㄴ) 생트뵈브와 전기주의
<생트뵈브 비판(Contre Sainte-Beuve)>을 보죠. 생트뵈브는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문학 비평가(이고 안 유명한 시인)입니다. 그는 실증주의에 입각해 작가의 삶을 연구한 후 그를 토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전기주의 비평의 창시자이지요. 19세기 말 이후로 소르본 대학의 문학 연구는 지금까지도 이런 방향을 따르고 있습니다. 작가가 살던 당시의 사회상, 작가 개인의 전기, 사상사 등이 소르본의 주요 연구과제지요. 프루스트가 자기 책의 제목을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라고 달은 것은 이러한 전기주의 비평을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기주의라고 해서 사실 그렇게 거창한 얘기는 아니구요. 한 마디로 '서정주는 친일파인데 그의 작품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문체가 힘차면 작가도 강인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인가?' 등의 문제에 관한 것이죠.
어쨌든 <생트뵈브 비판>에서 프루스트는 피상적 자아(사회적 자아)와 심층적 자아(창작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엄격히 구별하면서 작가의 삶에서 작품의 의미를 찾으려는 생트뵈브의 방법론을 격렬히 비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잃시찾>에서도 중요한 미학적 테마가 되지요.
작품에 등장하는 위대한 예술가들(엘스티르, 베르고트, 뱅퇴이유 등)은 실제로 만났을 때는 하나 같이 예술적 재능을 전혀 감지할 수 없는 평범하고 우둔한 사람으로 보이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예술 창작에 관한 일말의 도움도 얻을 수가 없잖아요. 무엇보다 이 작품의 중심 줄거리 자체가 한평생을 사교계 출입과 수많은 연애로 낭비하던 주인공이 소설가로 거듭난다는 내용이고요. 거칠게 얘기하면 만나봤을때 정말 똑똑하고 재기발랄한 사람도 작품은 형편없을 수 있고 둔하고 말주변도 없고 호감이 안 가는 작가가 작품은 좋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견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의외로 지금까지도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는 관점은 뿌리깊게 남아 있습니다. 프루스트 시대에는 더 했고요.
더우기 이러한 구도가 저자의 실제 삶과 완벽하게 겹치면서 프루스트는 작품 자체에 있어서나 자신의 인생 자체에 있어서나 텍스트가 작가의 생애에서 완벽히 분리되는 모범적인 예가 되지요(프루스트 같은 사교계 속물도 거장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미 얘기한 것처럼 프루스트 자신이 워낙 자기의 개인사 때문에 작가로서 고난을 많이 겪었으니 작가의 삶과 작품을 분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겠지요.
(ㄷ) <생트뵈브 비판>
<생트뵈브 비판>은 미완의 원고입니다. 여기에는 게르망트 쪽으로의 산책 등 소설적 파트와 보들레르론, 발자크론 등의 문학 비평, 프루스트와 어머니 사이의 대화 같은 자전적 파트 등 다양한 장르의 단장이 혼재되어 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생트뵈브 비판>이 <잃시찾>과 다른 독립된 작품이 아니라는거죠.
프루스트가 <생트뵈브 비판>을 시작한 것은 1905년경이고 <잃시찾>의 첫 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이하 <스완>)이 출판된 것은 1913년이지요. 프루스트는 처음 <생트뵈브 비판>을 시작할 때 이것을 순수한 비평서로 만들것인지 소설적 파트와 비평적 파트가 뒤섞인 책으로 만들지 고민합니다(이런 고민은 편지를 통해 확인되지요). 그러다가 이것 저것 뒤섞인 어정쩡한 상태로 글을 쓰기 시작하고 그런 식의 작업이 몇 년 동안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미 여기에는 게르망트라는 이름도 나오지요. 그래서 프루스트는 1907년경 ‘소설을 써야하는가, 철학책을 써야하는가? 나는 소설가인가?’라는 질문을 원고 위에 적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작품은 1인칭으로 쓰기로 결정하고 (그게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1907년 이후인건 확실합니다) 그 때부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스완네 집쪽으로>의 모습이 갖춰집니다. 문제는 현재의 <스완>이 거의 완성된 시점에서도 프루스트는 여전히 이 책을 <생트뵈브 비판>이라고 불렀다는 거죠. 그러다 책을 출판할 시점이 가까와져서야 겨우 <칼맞은 비둘기>, <마음의 간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의 이름 사이에서 고민하다 최종적으로 <잃시찾>으로 낙찰되지요.
따라서 <생트뵈브 비판>은 <잃시찾>과 구별되는 독립된 텍스트가 아닙니다. 전자를 쓰다가 천천히 조금씩 후자로 이행한 것이죠. 현재 책으로 나와있는 <생트뵈브 비판>은 1910년 이전의 원고들 중 <잃시찾>에 담기지 않은 것을 위주로 편집한 것이고요. ('생트뵈브 비판'은 한국어로는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ㄹ) 소설인가, 자서전인가?
<생트뵈브 비판>의 경우 비평서인가 소설책인가의 문제가 제기되었다면 <잃시찾>의 경우 주요 문제는 이것이 소설인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자서전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잃시찾> 역시 비평서인가 소설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는 합니다. 에세이(한국적 의미의 수필이 아니라 진지한 사변적 글) 형식의 심리 분석, 언어 분석, 외교 분석, 전술 분석 등이 작품 속에 워낙 많잖아요.
하지만 <잃시찾>의 진짜 문제는 이것이 픽션인가 논픽션(자서전)인가의 문제이죠. 스완이나 게르망트 집안 등 허구적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므로 진짜 자서전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워낙 작가 프루스트와 주인공 마르셀의 인생에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작품이 출간되고도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프루스트가 자기 인생을 약간만 픽션화해서 바꾼 것이라 생각하고 있죠.
그런데 소설작품이 ‘자전적’이라는 것은 비평적 평가에 있어 상당히 불리한 요소가 됩니다. 더구나 <잃시찾>은 도저히 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생각나는 대로 쓴 글처럼 보이기 때문에 문제는 워낙 심각하죠. 그래서 오랫동안 프루스트는 아름다운 문체와 훌륭한 심리분석이 돋보이는 회상록 작가라는 식으로 치부되었고, 이것이야말로 프루스트가 오랫동안 폄하된 주요 원인이지요.
특히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1부인 <꽁브레>의 경우 처음 읽을 때 도저히 스토리라인을 간파할 수 없을만큼 산만하고 무질서해 보이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제1권의 1부를 돌파하지 못하고 책을 놓게 되지요. 실제로 1913년 <스완>이 출판된 후로 구성의 부재를 둔 비난이 끊이질 않았고요.
여기에 주인공의 이름 문제가 애매모호하게 얽히면서 (1인칭 서술자-주인공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습니다만 딱 두 번 '작가인 내 이름을 빌어준다면 마르셀'이라고 나옵니다) 자서전이라는 의혹은 더욱 증폭되지요. 프루스트 본인은 자기 작품이 엄격한 구성을 지니고 있고 자서전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잘 먹히질 않았죠.
-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