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뒤늦게 눈길을 끈 뉴스가 있었다. 어느 말기 암 환자의 생전 장례식에 관한 것이었다. 환자는 고령이었고 자신의 죽음은 자신이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연명치료계획서에 서명을 했다. 임종 상황이 오면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과 같은 연명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부고장을 보내 생전 장례식을 열었다. ‘조문객’들에게는 검은 옷 대신 밝고 예쁜 옷을 입고 오라고 했다. 풍선과 꽃으로 장식된 장례식장에서 그는 조문객들과 추억을 이야기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장례식보다는 조촐한 파티 같은 분위기였을 것 같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지인들과 충분한 작별의 시간을 가진 그의 일화를 보며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어느 논설위원의 말을 빌리자면) ‘존엄한 이별’이었다. 그의 생전 장례식은, 떠날 이에게도 남겨질 이에게도 오래도록 반짝일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마스다 미리의 신작은, 소중한 두 사람의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했던 시간들을 기록한 에세이였다. 짧지만, 남겨진 이들에게는 긴 이별. 삼촌과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글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감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처럼 언뜻 잔잔했고 차분해 보였다. 그게 더 슬퍼서, 나는 그녀의 글이 하얀 쌀밥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 맛도 없는 것 같지만 꾹꾹 힘주어 씹을수록 달콤하고 진한 슬픔이 배어났다. 두 죽음을 겪어내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모습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모습 곳곳에, 지나간 죽음과 다가올 죽음을 떠올리는 내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병을 받아들이고 죽음이 드리운 아버지와 어묵을 사러 편의점에 가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취재하면서 그녀는 조금씩 아버지에 대해 더 알아간다. 대충 다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취재를 핑계로 나눈 아버지와의 이야기는 메모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많다. 첫 번째 취재 일주일 후, 아버지는 말끔한 차림으로 얘기할 준비를 한다. 아버지의 옛날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시간보다 아버지가 죽어가는 시간 속에서 알게 된 아버지의 모습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읽으면서, 나는 아빠의 옛날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하고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옛날이야기 뿐 아니라 요즘 이야기도 잘 모른다. 엄마와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아빠와는 그런 적이 별로 없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평소의 아빠는 수줍음이 많고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술이 들어가면 말이 많아졌다. 두서없이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했다.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어 아빠가 술에 취한 것 같다 싶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 아빠는 엄마를 붙들고 이야기하다가 잔소리를 듣곤 비척비척 이불로 들어가 쿨쿨 술냄새를 풍기며 잠을 잤다. 다음날이 되면 아빠는 다시 과묵한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면- 수줍음이 많고 표현이 서툴러, 술의 힘을 빌어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었을 뿐인데 아빠는 우리에게 ‘과묵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어릴 적 ‘엄마 아빠’라는 존재는 어린 시절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냥 원래부터 나의 엄마 아빠로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옛날 앨범을 보다가 아빠의 20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덥수룩한 장발머리의 앳된 젊은이가 나팔바지를 입고 활짝 웃고 있었다. “아빠, 이거 아빠야?”하며 보여주니 “그럼 아빠지 누구야, 임마~”하며 사진을 가져갔다. “멋쟁이였네.”라는 말에 별 대꾸 없이 아빠는 부신 듯 그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런 아빠의 새까맣던 머리에는 드문드문 흰 빛이 반짝였다. 아빠에게도 꿈 많은 청춘이 있었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올해는 아직 벚꽃을 못 봤네.”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결국 같이 가잔 말을 하지 않았고 “켄터키, 먹고 싶네.”라고 했던 아버지를 떠올렸지만 결국 귀찮아져 깎은 감을 들고 갔다던 일화를 읽으며,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잊을 만하면 마음을 쿡, 찌르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의 기억이었다.


나는 다정한 외할머니는 무척 좋아했지만, 외할아버지와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외갓집에 놀러 가면 환하게 맞아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옛날분이라 장손인 오빠나 남동생을 더 예뻐했다. 손자들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듯 뿌듯하고 대견해 보였다. 손녀인 내게는 그 정도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때때로 우리가 큰소리로 떠들면 혼을 내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주긴 했지만 식사 시간 외에는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별로 볼 수 없었다. 내게는 좀 어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며 점차 혼자 거동이 힘들어졌다. 점점 누워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와 둘이 집을 보던 날, 누워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참외가 먹고 싶지 않니.”라고 했다. 다른 방에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당시 할아버지의 손은 구부러져 혼자 참외의 껍질을 깔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얘기가 ‘참외를 하나 까 다오’라는 신호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한창 놀고 있던 것을 방해받기 싫고 귀찮아서 못 들은 척 했다. 할아버지는 다시 한 번 “참외가 먹고 싶지 않니”라고 하셨지만 내가 대답이 없자 체념한 듯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게 할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마지막 요청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그 참외 생각이 나 자꾸만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 미안해, 엄마 미안해, 하며 마구 울었다. 울어도 이제 할아버지에게 이 마음의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게 더 슬퍼져 자꾸 울었다.


20여년이 되어가는 일이지만 아직도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다른 무엇보다 참외가 먼저 불쑥 마음속에 떠오른다. 별 것도 아닌 것조차 못 해드렸다는 죄책감과 후회가 뒤섞여 가슴을 지그시 누른다. 순수하게 마음을 전하고 귀찮아하지 않는 것도, 살아계실 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 탓이다.


죽음은 삶의 파트너처럼 늘 우리 곁에 있다.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생(人生)의 마지막 단계. 삶은 죽음으로 흐른다.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다가오는 죽음도 피해갈 수 없다. 내 가족의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아마 미쳐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웃고 얘기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슬픔에 푹 잠겨 내 인생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 그런 나에게 마스다 미리는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와.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또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어. 밥을 먹고 구두를 사고 계절이 바뀌면 옷을 사면서. 그 사람이 곁에 없더라도 ‘있었던’ 것을 너는 알고 있어. 시간이 흐르면 바닥도 보이지 않는 슬프고 깊은 구멍 속에서도 점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게 돼ㅡ 라고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다가올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접어두고, 함께 있는 지금을 소중하게 살자고. 조금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귀 기울이고 이야기하면서, 그러면서 조금 더 많이 행복하자고. 할아버지의 참외 같은 후회는 이제 남기지 말자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그 순간’이 다가오면 물론 아주 많이 슬플 것이다. 한동안은 슬픔과 상실감에 푹 잠겨 아무 것도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이 아닌 수없이 교차하는 여정 중 하나. 죽음을 생각할 때에 우리 삶은 더 생생해진다. 누군가의 죽음 끝에는 또 각자의 삶이 있을 것이다. 그가 곁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또, 다시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묵묵히 차오르는 슬픔을 조금씩 희석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을- 이제 나는 안다.



책 속에서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은 할아버지. 만난 적도 없고, 그걸 쓸쓸하게 느낀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존재했다. 존재해서 어린 ‘내 아버지’와 함께 툇마루에서 아내에게 혼났다.

p.58-59


태어날 때부터 노인이었던 사람은 없다. 오래 살면 누구나 언젠가 노인이 된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그걸 실제로 피부로 느끼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 시절에는 엄마도 아버지도 젊었지, 라고 생각하는 일이 늘어나며 나도 겨우 실감하게 되었다.

p.63


오늘 밤, 내가 집에 갈 때까지 살아서 기다려주길 바랐다. 엄마와의 전화를 끊은 직후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신칸센에 흔들릴 무렵에는 그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것은 아버지의 죽음이다. 아버지의 인생이었다. 누구를 기다리고 기다리지 않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 개인의 아주 고귀한 시간이다. 날 기다려주길 바라는 것은 주제넘다는 생각이 들었다.

p.73


아버지 방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 손에 내 손을 포갰다. 아버지 손을 잡은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 처음이다. 

살짝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걸어 다닐 것 같았다. “아빠.”하고 불러본다. 익숙한 내 목소리인 “아빠”였다. “아빠!” 큰 소리로도 불렀다. 이것이 아버지의 죽음을 순수하게 슬퍼할 마지막 시간이었다.

p.74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잃었다고 해도 ‘있었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 그것이 흰나비를 대신하는 나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힌트는 바깥에, 사람 수만큼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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