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톤 와일더(Thornton Wilder) 김영선 (옮긴이) 샘터사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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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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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철 2020-02-01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권 제4편 인실의 자리 토지 12권

4부 3권
차례
제 4편 인실의 자리
4장 장례식 날 밤 11
5장 동경의 인실 36
6장 영광의 부상 59
7장 영호네의 부탁 78
8장 수유리에서 96
9장 만주사변 116
10장 조용하의 자살 136
11장 양자 얘기 164
12장 오누의 재회 189
13장 양현과 이부사댁 210

제 5편 악령
1장 서비스 공장 221
2장 동성반점에서 243
3장 인실의 변신 263
4장 노파가 된 임이 286
5장 남경 학살 299
6장 일본인의 시국관 318
7장 떠나는 마차 339

[부록]
어휘풀이 359

제 4편
인실의 자리











4장 장례식 날 밤
사건이 난 뒤 열흘이 지났으나 경찰은 범인의 흔적조차 찾아내질 못하였다. 온통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하마 어디서 쾅! 하고 터질지 모르는 소리를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이도시의 사람들, 그러나 열흘을 넘기면서 긴장은 풀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즐거움에 가슴이 뿌듯해져갔다. 어디서나 그 사건은 화제가 되었다. 모르는 사람끼리 눈과 눈이 마주치면 눈으로 이야기하였고 귓속말로 몸짓으로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들리지 않는 함성은 차츰차츰 도시를 휩쓸어가고 있었다. 추상적이던 가정부, 상해에 있다는 우리 임시정부, 사람들은 그존재를 실감하면서 무기력해진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희망의 빛을 보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조국. 그 조국이 내게로 올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남녀노소 빈부와 계급의 차이 없이 누구나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보다 더 가증스러운 배신자, 반역자, 한겨레의 뿌리에서 나온 친일파 앞잡이들에 대한 응징도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만일에 어느 누가 거리에 군자금 모금함을 내놓았다면 이 순간만은 사람들 마음이 가락지 비녀 다뽑아넣었을 것이며, 지게꾼 노점상 죽 팔던 노파까지 하루벌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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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털어넣었을 것이다. 윤국이도 걸핏하면 남강 모래밭으로 달려나가 데굴데굴 굴렀다. 몸이 가려운 강아지처럼 굴렀다. 구르면서 ‘아버지다! 아버지가 다 꾸미신 일이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나 모든 것 다 알 것 같았다. 알 것같아서 피가 끓었다. 그 자신도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진주의 집을 수색한 것은 물론 평사리까지 형사대가 파견되어 집안을 뒤졌고 마을 사람들까지 불러들여 조사를 했다. 형사가 넌지시 관련되지 않았는가 말했을 때 길상은 물끄러미 형사를 바라보며 “그만한 돈 만들려면 우리도 어려운 처지는 아닌데 뭐가 답답하여 남의 집에 가서 강도질을 했겠소.”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어쨌다는 거요. 나는 석 달 가까이 이곳에 와서 정야하고 있었는데 내 혼백이 가서 그 짓을 했단 말씀이오?”
“댁은 피해가 없질 않소. 그들보다 댁의 재력이 월등한데 이상하지 않느냐 그 말이오.”
“글쎄올시다. 왜 우리집은 털지 않았는가, 이상하긴 이상하군요. 감옥살일 했다고 봐준 겐가?”
“이보시요! 혁명지사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그건 내가 할 마리오. 정말 왜 이러시오? 현금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가졌을 터이고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온들 뭐가 나오겠소.”
“……”
“누가 압니까? 요 다음엔 우리집에 화살이 꽂힐지. 하룻밤에 두집 털기도 벅찬 일, 세 집이나 털 수는 없을 게요.”
“당신은 재미있어 하는군. 뭐가 그리 신이 나오!”
“그러면 악을 쓰리까? 그것 다 해본 짓이오. 무고하다고 악을 써본들 생떼 쓰고 나오면 별수없더군. 사람의 기만 넘고 명대로 살지도 못하겠더군.”
그러고도 듣기 거북한 얘기가 한동안 서로간에 오고갔으나 형사는 꼬리를 잡지 못한 채 떠났다. 혐의가 있고 없고 간에 범인을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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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여 노심초사,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경찰이 길상의 전력을 감안하면 그를 진주까지 구인하여 조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분히 친일적으로 보여지는 서희의 존재, 평소 음으로 양으로 돈을 뿌려놨던 것이 이럴 경우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애꿎은 두 서기, 그러니까 이도영 집의 서기와 김두만 집의 서기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거의 병신이 되다시피 고문을 당하였고 다급한 나머지 덮어놓고 이름들을 입에 올려 무관한 사람들이 곤욕을 치러야 했었다. 아무튼 두 명의 서기는 파멸이었다. 전쟁에 부상한 병사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그것은 비참한 희생이었다. 그동안 김두만은 만나는사람마다 내 돈 강탈해간 놈들 잽히기만 해봐라! 칼로 배애지를 푹 찔러 직이지 그냥 두나 하고 욕을 했다. 어느놈이든 턱아리를 놀렸기 때무에 돈 있는 줄 알고 들어오지 않았겄는가. 입에 거품을 물고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떠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맞장구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운수 불길하여 손해가 크다는 정도의 위로를 하던 사람들도 차츰 그를 피하게 되었고, 흥분하는 김두만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 한마디 없이 발길을 돌리곤 했다. 별수없이 그도 욕을 안 하게 되었지만 겨찰이 내통했다는 의심을 그에게 전혀 갖지 않는 것을 알고는 빼앗긴 돈이 아까워 혼자 꿍꿍 앓았다.
“우떻게 해서 번 돈고. 내 피땀으로 번 돈, 돈 잃고 인심 잃고, 어이구 내 가심이야!”
자기 가슴을 치곤했다. 서울네는 서울네대로 뾰로통해서 말했다.
“왜 하필이면 그날 독골로 가셨소?”
“내가 가고 저버서 갔나! 아부지가 오늘만 내일만 하는데 그라믄 자식된 도리에 안 가고 우짤 기고!”
˝초상이 난 것도 아니지 않아요. 가신 건 그렇다 하더라도 저녁에는 왜 못 돌아오셨소! 돌아오셨으면 빼앗기진 않았을 거예요.“
본댁이 있는 곳에서 잤다는 것이 서울네는 더 괘씸했던 것 같다.
“약한 여자 혼자 놔두고 두 부자가 한꺼번에 집을 비운 것이 잘못이예요. 나를 무시하니까 그랬지. 그놈들도 업신여겨 둘째부인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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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시오, 그러더라구요.“
하며 울었다.
“칼 들고 두 놈이나 들어왔는데 설사 내가 있었다 하더라도 속절없이 당했지 별수 있을 기든가.”
˝나는 지금 돈 얘길 하는 건 아니예요! 당신네들 마음 쓰는 것이 틀렸다 그 말을 하는 거예요! 돈만 제일, 인명은 생각지 않는 당신! 기동이만 해도 안 그래요? 아버지가 못 올 형편이면 저라도 와야 하지 않았느냐 그 말이예요! 낳아놓기만 하면 그만인가요? 두 아이한테 내 정성 쏜은 걸 생각하면 분하고 서러워. 주야로 공부하게 뒷바라지한 사람은 누군죠? 연장 망태 질멍지고 남의 집 품일이나 할 주제에 양조장 주인은 뉘 덕이며, 동경 유학은 뉘 덕이며, 중학교는 웬 중학교, 사람이 그러면 못써요! 조강지쳐? 대체 조강지처가 누구지요? 사람 구실도 못하는 걸 두고 조강치처? 생모? 흥! 내가 칼에 맞아 죽었으면 속 시원했겠지요? 속 시원했을 거예요!“
서울네는 히스테리를 부렸다. 열심히 돈을 벌 때와는 달리 큰 집에 이사온 후 안방마님으로 행세하면서 서울네는 옛날같이 고분고분하다가도 성질을 부리는 일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기성이와 기동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이 서울 여자는 앞날을 생각하여 막딸이한테서 남편을 빼앗은 것과 같이 두 아들도 철저하게 자기 자식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해서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편뿐만 아니라 두 형제가 독골로 가는 일이었다. 그날 부자가 집을 비운 것은 우연이었다. 이평노인의 병이 위중하여 가기는 갔으되, 병세가 오늘 내일 한다는 것도 벌써 여러 날 전부터의 일이었고 특별히 화급하게 기별이 온 것도 아닌 터에, 또 평소 부모에게 데면데면했었던 두만이었던지라 굳이 그날 가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날이 삼월 삼짇날이어서 양조장은 쉬었고 일꾼들은 모두 씨름 구경에 가고 없었기에 그 틈을 이용하여 두만은 아들을 데리고 독골로 갔던 것인데 언제나 그랬듯이 모친이 놓아주질 않았다. 누워 있던 이평노인의 눈빛도 매우 강경하여 할 수 없이 그곳에서 밤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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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것이다.
시일은 지체 없이 흘러갔다. 양력으로 오월에 접어든 진주 시가에 녹음은 싱그러웠다. 그리고 사람들은 활기차 보이기도 했다. 오월이 가고 유월이 가고 여름으로 접어들었을 때, 오늘 내일 하던 이평노인은 석 달을 넘게 견디다 드디어 타계하였다. 독골 상가에는 꽤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왔다. 그중에는 영팔노인 내외의 모습이 보였고, 사돈지간인 장연학이 있었다. 그러나 조문객의 주류를 이룬 것은 시장 상인들과 주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대중이란 끝없이 인내하면서 변화에 대하여 성급하고 가슴에 맺혀 있으면서도 쉬이 체념하며 망각한다. 신출귀몰이라는 말이 한참 유행했고 인심이 소용돌이치던 도시에 여름이 찾아왔을 때 신출귀몰이라는 말은 퇴색해가고 있었으며 인심은 소용돌이는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몸조심 말조심을 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주판을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상가에 모여든 상인들은 그 대표적인 존재였다. 가정부를 칭하고 군자금을 털어갔다고 해서, 경찰이 그들을 잡지 못하고 이를 간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는 것도 아닌었는데, 독립만 된다면 이까짓 점방 하나 팔아올린들 뭐가 대순가! 했었던 그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썰물같이 격앙된 감정이 밀려가 버리고 나면 그들은 독립이 요원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두만이를 슬금슬금 피하던 사람들, 욕을 하는 두만에게 눈총을 주던 사람들, 그들은 본시 있던 자리로 돌아와서, 돌아온 모습으로 두만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한분 가믄 못 보는데 얼매나 허전하겄소. 그래도 복 많은 어른이요. 자식들 잘된 것 보고 눈을 감았으니, 효자가 따로 있소?”
하며 손을 굳게 잡는 사람도 있었다. 적잖은 부의금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손상된 감정을 복구하기 위하여. 그러나 상가를 하직하고 둑길을 지나면서
“묵고 살라 카이 우짜노. 입이 포도청이제. 제에기랄! 돈 좋다. 참말로 돈 좋구나!”
하고 자조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오일장으로 장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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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을 치료는 동안 오복을 갖추었다고들 하는 딸, 여수의 선이가 젤 섧게 울었다.
“불쌍한 울 아부지, 아들 사우 잘 두었다 넘들은 그라지마는 하루도 편키 못 산 울 아부지. 식구들 일이라 카믄 살 깎고 뻬를 깎고, 다 소앵이 없는 기라요. 나부텀도 믿거라 하고 출가외인이라 하고 편키 아부지 한분 모신 일이 없고 잘살믄 저거들 잘살았제, 평생을 깡보리밥에 일만 하시고 어이구 불쌍한 울 아부지! 사람 하나 인연이 잘못되어 울 아부지 골수에 병들었제. 화목하기로 소문난 우리집이 와 이 지경 되었는고.”
“청승이 늘어지는구마.”
못마땅해서 두만이 혀를 찼다.
“내비나두게. 이럴 때 안 울곤 언제 울 기고.”
매형 종학이 말했다. 마을 아낙들도 뒤꼍에서 일을 하며 입이 놀고 있지는 않았다.
“잘산께 큰소리하네.”
“하모. 잘산께, 없이 살았이믄 저런 말 못할 기고 쬐끼갔을 기다.”˝큰소리하게 돼 있제. 사돈노인이 다니감서 초상 비용 하라고 큰돈 내놨다 카더마.“
˝그뿐이가, 짚배도 필필이 가지오고, 초상에 쓰는 개기는 말장 여수서 가져왔다 카데, 얼음에 채워가지고 자동차로 실어왔다 안 카나.“
“그러기, 동기간도 잘살고 봐야. 불쌍한 거는 기성이네 아니가. 울음 한분 크게 못 울고 친정 식구라고는 개미 한 마리 없이니.”
˝친정에 누가 있었다믄 그냥 두기나 했일 기든가? 시도 때도 없이 가서 탕탕 뽀사부릿지.“
˝그거는 헹펜 모리는 이야기고 그 여자 때문에 오늘 이렇기 됐인께.“
“이따! 그라믄 금송아지 갖고 왔든가> 과분지 소박데긴지 아니믄덤짜인지 그 여자 내력이사 우리가 우찌 알까마는 혼자 있는 젊은것이 돈이 많았이믄 얼매나 많았겄노. 또 그랬다믄 머가 답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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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아배 같은 목수를 따라왔겄노. 다 협심해서 벌었기에 오늘이 있는 기지.“
“하기사 여자가 제아무리 나부대봐도 별수가 없기는 업지. 불쌍한거는 기성이네, 친정이 있어 어리등대 했이믄 법으로 만냈겄다. 아들 형제 낳았겄다, 와 큰소리 못하겄노.”
“이분에 초상에 와서 하는 행사 봤제?”
“와 아니라. 보통내기가 아니더마, 눈앞에 사람이 없는 기라.”
“노리깨깨하고 입술은 포리쪽쪽하고 비상이라도 타겄더라.”
시누이가 섧게섧게 울었지마는 사무치게 서러운 사람은 막딸이었따. 그러나 막딸이는 울어보질 못했다. 일이 태산 같았기 땜누도 아니요 딸 아닌 며느리였기 때문도 아니었다.
“저기이 제집이가, 저 꼬라지 하고서 에미라꼬? 남자 우세시키지말고 자식 우세시키지 말고 제발 뒷구석에 콱 처박히 못 있겄나!”
남편 입버릇 때문이었다. 게다가 함께 머리를 푼 서울네가 한 소동을 벌여놓고 진주로 가버린 탓도 있었다. 집안 사람의 차가운 표정, 동네 사람의 눈살도 따가웠을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지나치게 서울네는 소외되기는 했었다. 그러나 어느 집안이든 대사를 치를때는 서열을 엄히 따지게 돼 있었고 서울네는 그것을 감수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적진에 날아든 한 마리 작은 새같이 자신을 느꼈던지
“난 머리 풀 자격이 없어요. 어중이떠중이 잘 놀아보세요. 난 진주로 돌아가겠어요.”
눈을 희뜨고 두만에게 앙칼진 소리로 대어들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옥신각신, 서울네는 미친 듯 악을 썼고 울부짖고 하다가 가버린 것이다.
“만고에 저런 요망한 것이 어디 있노, 서울년은 법도 모리나. 이 자리가 우떤 자리고!”
두만네는 노발대발했다.
“어무이 시끄럽소. 예사 굴러온 돌이 본돌 치는 거 아닙니까. 행실이 그러믄 딱 무시해부리는 기이 젤이요. 내사 가고 나이 앓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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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진 것맨크로 씨원하거마는, 불상한 우리 올케 그 꼬라지 안 보이 좋고.“
두만이 들으란 듯 선이는 큰소리로 말했다. 사방에서 비난이 분분했다. 화가 난 두만은 죄 없는 막딸이를 볶았고 마주치기만 하면 잡아먹을 듯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태산같이 믿고 의지했던 시아버지 죽음 앞에 막딸이는 울지도 못했다.
장지까지 따라갔던 사람들을 위해 마당에 쳐놓은 차일 밑에는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백수가 된 영팔노인은 근력이 좋은 편이어서 장지까지 갔다왔고 연학이도 따라갔었다. 대개는 장지에서 돌아가고 마을 사람 몇몇과 영팔노인, 두만과 종학이 술상에 둘러앉았다.
“날씨도 좋았고 호상이라 뒤끝이 깨끗하고.”
“남의 나이(팔십 이상)도 아닌데 호상은 무슨 호상.”
“오십 넘기기도 어러븐데 칠십을 넘깃이믄 호상이지 머. 자손들 무탈하고, 벼룩박에 똥칠하며 사는 것도 죄라.”
동네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다가 영팔노인은,
“이 사람들아 그만해라, 늙은 사람 옆에 두고 욕하는 기가.”
하고 말했다.
“아이고 어르신 무신 말심입니까. 젊은놈들 뺨치게 짱짱하신데, 제술 한잔 받응리소.”
영팔노인은 따라주는 술잔을 비우고 수염에 묻은 술을 손바닥으로 닦으면서
“청춘이 잠간이네라, 눈 깜짝할 사이제. 늙는 것이 남의 일 같더마는 어느새 하나씩 가부리고…… 말할 수 없이 허전쿠나.”
˝하기야 머, 죽음에 노소가 있겄십니까. 타고난 명대로 사는 기지요.“
“평사리서 용이가 죽었일 직에는 원통해서 땅을 치고 울었다마는, 오늘 이평이성님을 묻고 나이 샛바람 속에 혼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의 평생이 일장춘몽 같지마는 다시 생각해보믄 세월은 긴 기라. 한동네서 나가지고 함께 큼시로 별의별 일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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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었제. 그 겪은 일들 하나하나가 우찌 그리 생생한고. 젊은 시절에는 이평이성님이 좀 돌리는 편이었다. 죽으라고 일만 하고 술 사는 일이 있나 제 앞만 가린다고 밉으라 했제. 두마이모친이 후덕해서…… 이평이성님은 젊었일 때나 늙었일 때나 몸이 줄도 늘도 않고 뽀뽀하게 생기서 오래 살 줄 알았더마는.”
“듣고보니 자기 앞만 가맀다는 것은 부전자전이구마요.”
선이 남편이자 연학의 사촌형인 종학의 말이었다. 물론 농담이었다.
“아이가, 아이가, 어림 없제. 두만이가 돈은 좀 벌었는지는 모리겄다마는 아부지 따라갈라 카믄 한참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고 평생 농간 부린 일 없고 남 못할 짓 한 일 없고, 얼랑 누굴랑이 없어 그렇지.”
“아제씨도 참, 그라믄 지는 농간을 부리고 남 못할 짓 했다 그 말심입니까?”
발끈해서 두만이 말했다.
“농간 안 부리고 우찌 장사를 하노. 농간 안 부리고 우찌 부자가 되노. 그러자 카이 남 못할 짓도 하게 되는 거 아니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아무도 손을 못 된 자갈땅을 밭 맨들어보겄다고 죽자사자, 명태겉이 예비서 일하든 이평이성님, 눈에 선하다. 얼매나 땅에 포은이 졌으믄 그랬겄나. 다 그래가지고 너거들 안 키웠나.”
그 말 대꾸는 두만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년에는 더러 후회도 했네라.”
“머를 후회했단 말입니까?”
종학이 물었다.
“그럴 일이 있었네. 다 지나간 일 아니가.”
“산에 같이 안 간 그 일 말입니까?”
두만이 말했다. 영팔노인은 잠자코 있었다.
“후회할 일이 따로 있지. 그리 됐이믄 명대로 살기나 했겄소. 식구들은 삼지사방으로 흩어져서 거지가 됐일 기고, 아부지가 그거를 후회했을 리가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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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하늘이 주신 거고, 사람이 잘 묵어야 하루 밥 세 끼, 저승길에 이고 지고 갈 기가. 나이 들어봐라. 재물 그거 별거 아니네라. 살아온 길을 돌아보고 돌아보고 하믄은 잘못한 거만 짐이 되제, 그저 푼수껏 사는 기이 젤이다. 그러고보믄 이평이성님이 잘못 살았다 할 수는 없일 기구마.”
한편 안방에서는 영팔노인의 마누라 판술네와 마주앉은 두만의 모친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일장을 치르는 동안 두만의 모친은 통곡한 적이 없었다. 마지막 무덤 앞에서 무덤을 어루만지며 “보소, 나도 곧 갈 긴게 마음 편히 기시이소. 썩는 꼴 안 보고 잘갔십니다. 야 나도 곧 갈 기요.”
하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만 내리가입시다.”
영만이 와서 팔을 잡고 일으켰다.
“놔라. 내 혼자 갈 수 있다.”
하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왔던 것이다.
“시아부지가 살아 있었이믄 그 제집이 그랬겄나. 어림도 없지. 제년이 우찌 감히 그라겠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두만의 모친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판술네도 눈물을 닦았다.
“아닌게아니라 기가 찹디다. 어디서 배운 버릇인고, 풀었던 머리걷어올리고 나가는 꼴을 보이 눈에 불이 나더마요. 그럴 거라믄 애씨당초 오지를 말든가.”
“무서븐 시아부지 세상 버맀이니 겁날 것 없다, 그 봇장이제. 우리네하고는 사람이 다르다. 마음 묵으믄 묵은 대로 말하고, 정월 초하루 묵은 맴이 섣달 그믐까지 가지마는, 그 제집은 속 다르고 겉 다르고, 얼매나 수단이 좋은지 머시마들까지 손아귀에 넣어서 기성이 기둥이 그놈들도 지 에미를 대수로 안 여긴다. 남정네를 틀어쥐고 이자는 자식들까지 싹 뺏아갔다. 그년이 우리도 호락호락했이믄 벌써 옛날 옛적에 기성에미 내쫓았일 기구마. 참말로 무서븐 제집이다. 참말이제 우리 기성에미를 우찌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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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이소, 성님. 영만이가 안 있십니까.˝
“가아들이라도 있인께…… 내가 살믄 얼매나 더 살겄노, 세상만사다 보지 말고 지금이라도 눈 감았이믄 싶다. 그놈 말말이 부모가 해준 기이 머 있는가, 해준 거사 없제.”
“놔두고 안 해주었겄소.”
“그기이 그놈 말이건데, 제집이 귀에 못이 백히도록 한께 그런말이 나왔겄지. 자식 말 해봐야 내 얼굴에 똥칠하기, 입을 다물고 있일라 카이 복장이 터지고.”
“참으소 고만.”
“우리 영만ㅇ리도 성 덕본 것 없다. 지가 근한께로 땅마지기나 갖고살지.”
“은앙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덮더라고 그래도 형제가 아니요.” “우리 모두, 죽은 늙은이도 병들어 눕기까지 뼈빠지게 농사지었다. 말말이 자식 덕에 잘산다, 그것도 어디 그놈 말이건데? 제집말이고, 그 제집 덕에 잘산다 그 말 아니겄나.”
“그래봐야 다 소용 없십니다. 자식을 낳았소, 법으로 만낸 제집이겄소, 늙으믄 지 불쌍치.”
“그기이 안 그렇다. 안 그러이 내가 이러제. 오십 년 넘기 자식 낳고 같이 살던 늙은이를 내다버리고 내가 무슨 정에 자식들 험담이나 하고 있겄노. 그기이 아닌 기라. 기성할배 눈 감은께 사정이 싹달라졌다. 이자는 내 영이 통하지도 않을 기고 기성애비가 늙은이 살았일 직에 마음대로 못한 일이 하나 있었거마는……”
“……”
“이분에 제집이 하는 행실만 봐도 틀림없이 그 말을 끄낼 기다.”
“머가 말이요?”
“기성에미보고 민적 파자, 그럴 기라 말이다.”
“민적을 파다니?”
“한분 그런 일이 있었네라. 에미 꼬라지가 그렇다고.”
“에미 꼬라지가 우때서요? 살림 사는 지어미가 기생도 아니겄고, 핵교 선생도 아니겄고 가축 안 하믄 다 그렇지요. 도방에서 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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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이묵는 것도 아니겄고 일이 좀 세야지, 농사를 아무나 지을 기든가.”
“내 말이 그 말 아니가. 그래 에미 꼬라지가 그러이 자식 앞길 막고 이자는 지도 진주서는 윗자리에 앉는 몸이니 남사스럽다 안 그카나? 그 말이사 늘 하는 입버릇인께 그렇다 치고, 그러이 alas적 파고 남 되자, 돈을 좀 줄 것이니 절로 가든 제 갈 길을 가라.”
“시상에 그런 경우가 어디 있소. 시적 며누리 보게 됐는데 두만이가 환장했네.”
“그 일이사 한참 전의 일이었제. 그래서 기성할배가 몽둥이 들고 아들 직인다고 야단이 안 났더나.”
“시상에, 그런 일이 다 있었고나.”
“이자는 내가 와 이라는지 알겄제? 틀림없이 민적 파자고 나올기다. 불쌍한 우리 기성에미를 우짜믄 좋노.”
“걱정 마이소. 자식들이 가만 있겄소? 다 컸는데.”
“니도 참 답답하다. 여태 멋을 들었더노. 자식들이 에미 생각한다믄 무신 걱정할 기고.”
“그래도 성님, 말이 그렇지 우찌 조강지처를 내쫓겄소. 진주 바닥에 얼굴 치키들고 댕길라 카믄 그렇키는 못할 깁니다.”
“모리는 소리 마라. 괘씸키는 손주놈들이 더 괘씸타. 장개갈 나이가 됐이믄서, 그놈들이 에밀 감싼다믄 애빈들 우짜겄노. 그러나 그기이 아닌 기라.”
언제였던지 에미 생각 안 하고 서울네 편든다고 나무란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 괄시하고 미워하니까 오히려 동정이 갑니다. 사람이란 감정의 동물이거든요. 우리 눈에도 집에서 너무 심한 것 같소.”
기성은 냉담하게 말했다.
“자식도 서방도 독골에는 얼씬 못하게 하는 그 제집 소행이 그라믄 니는 옳다 그 말가?”
“옳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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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간에 뜻이 안 맞으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을 어떻게 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는 무리지요. 있을 수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틀린 일입니다. 서양에서는 서로 좋아서 결혼했따가도 싫어지면 이혼하고 다시 결혼하는 것 보통이지요. 축첩하는것보다 훨씬 깨끗하지 않습니까?”
기성은 건방지게 유식한 척 말했다.
“이놈아! 우리는 서양 사람 아니고 조선 사람이다!”
“글쎄요. 나쁜 풍습을 고쳐나가야지요. 그래야 우리도 문명국이 될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서 독골어머니는 너무 무식하고, 누가 보아도 진주어머니하고는 비교가 안 되지요.”
“진주어머니라니!”
“왜요?”
“이놈아! 작은에미다, 진주어머니라니!”
“하, 참 할머니도 머리 좀 쓰십시오. 말에 밑천 들었습니까? 자꾸 그렇게 나오니까 집안이 시끄럽지요. 인정해줄 것은 인정해주고 그분의 공로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그 노래미겉이 생긴 년!”
“그만하면 미인이지요.”
약을 올리듯 말했다.
“식자 있고 머리는 좋고, 진주어머닐 만나지 못했으면 아버진 목수밖에 더 했겠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공평치가 못합니다. 좀 신식으로 이해해보십시오.”
기성은 실실 웃기까지 했다.
“니가 머를 아노! 머리빡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모르기로는 할아버지 할머니지요.”
“우리가 이 정도라도 했이니 니 에미가 쫓기나지 않았다. 그 백여시 겉은 년! 천륜을 우찌 끊노!”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집안은 더 많이 달라졌고요. 할머니는 옛날 식으로 하실 생각 아예 마십시오. 자식이라 해서 부모 마음대로 못합니다. 자식이 평생 함께 살아야 할 여자를 어째서 부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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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하지요? 그런 구습은 하루라도 빨리 벗어버려야지 서로가 다 비극 아닙니까. 아버지도 괴롭고 진주어머니도 괴롭고 편한 사람 아무도 없지요. 우리 역시 고통스러우니까요.”
“그래서?”
“네?”
“그래서 니는 우짜믄 좋겄노?”
“제 자신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자인 세 사람이 해결해야겠지요.”
“그라믄 니는 어이서 낳노? 누구 뱃속에서 나왔노? 하늘에서 떨어졌나? 짐승도 지 에미는 아는 법인데 니 말대로 하자믄, 일본까지 가서 배운 니 말대로 하자믄 다음 세상은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살아가겄고나.”
그때 두만의 모친은 절망을 했다.
“무자식 상팔자라 카든가. 옛말 하나 그른 기이 없다. 자식 그거다 소앵이 없네라. 배운 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기성이할배가 이녁 죽은 뒤 우떻게 될 긴가를 알고 땅을 모두 기성에미 앞으로 넘겨놨는데, 문서는 영만이가 간수하기로 하고.”
“야? 땅을 며누리 앞으로 다 했다 그기이 정말입니까?”
“운냐. 정말이다. 그래서 한 소동 벌어졌제. 그것도 생각해보믄 걱정이다. 돈을 뺏깄니 우찌니 하고 또 늙은이가 세상 버리고 없이니, 영마이가 우찌 견딜란고 모리겄다. 사업 자금으로 문서 내놔라 할 기이 뻔하다. 이리저리 더듬어도 내 눈 하나 없이믄 우리 기성이에미 앞날이 걱정이다. 울고 갈 친정이 있다 말가, 지 몫 챙길 성질도 아니고.”
밖에서는 삼월 삼짇날의 얘기를 누군가가 꺼내었다. 그 사건 이래 피해를 본 당사자 두만이를 처음 대하는 사람도 있어서 당연히 궁금했을 것이다. 장레가 끝나자 곧장 진주로 내달리고 싶었던 두만은 차마 남의 눈 때문에 그러질 못하고 울적해 있었던 참인데 그 얘기가 나온 것이다.
“조선놈들 망해야 싸지 싸아. 남 잘되는 거를 보믄 밤에 잠이 안 page 24

오는 기이 조선놈들 심뽀 아니든가. 어느놈이든 턱아리를 놀리도 놀맀길래 현금 있는 줄 알고 내 집을 덮친 거 아니겄소.”
“서기가 벵신이 됐다믄? 풀리난 거를 보니 죄가 없었던 모앵인데.”
종학이 말했다. 연학과 영만은 술자리에 끼여들지 못하고 멍석 끝에 나란히 걸터앉은 채 말이 없었다.
“그 속을 누가 알겄소.”
“그라믄 자네는 서기를 의심한다 그 말가?”
“하기사 머, 시장의 점방을 판 거를 아는 사램이야 많겄지요. 여하간에 내막을 세세히 알리주고 배가 맞아서 한 짓 아니겄소. 잽히기만 하믄 배애지를 칼로 푹 찔러직일 기요.”
“아직도 못 잡았이믄 이자 잡기는 영영 그른 기다.”
영팔노인의 말이었다.
“죄지은 놈, 어느때 잽히도 잽힐 기요. 피땀으로 모은 남의 돈, 그것 묵고 얼매나 하늘 보고 살겄소.”
“니 말을 들으니 가정부 사람들 아니고 그냥 강도다.”
“아제씨, 와 이러십니까?”
“와, 내가 머를 잘못했나?”
영팔이노인은 심술궂게 웃으며 눈을 꿈벅꿈벅한다.
“내가 놈 짜 붙이고 배애지 찔러직인다 카고 도적놈이라 카이 그라믄 가정부놈 아니다, 얘기가 그렇기 되는 겁니까? 가정부 놈들 겉으믄 가정부 나으리, 배를 찔러 직이기는 커냥 찔린 배 싸안아주고 방바닥에 이마빡 찧어감서 돈을 상납해야 하고 머 그런 얘깁니까?”
영팔노인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대신 종학이가
“세상 인심이 다 그리 돌아가는데 자네도 풀세게 너무 그러지 마라.”
“야아, 잘 알구마요. 세상 인심 잘 압니다. 바늘 하나 축간 것이 없는 놈들이야 무신 말인들 못하겄소. 입 가지고 만고충신도 되고 입 가지고 나라 독립도 하고, 닳아지는 기이 아닌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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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하나 축간 것이 없는 놈들, 그 속에는 나도 끼인께, 나보고도 두만이 니가 놈짜 놓은 기가?”
영팔노인 말에 두만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오늘겉이 좋잖은 날에는 좋은 얘기나 하는 거요. 자아 술이나 마시고, 아무리 호상이라고는 하지마는 한분 간 부모는 다시 못 본께.”
마을 사람의 그 말도 두만에게는 가시였다.
“여기술 떨어졌구마.”
하자 영만이 화드득 일어섰다.
“인 주이소.”
주전자를 받아들고 영만은 부엌 쪽으로 가서 술ㄹ을 내온다. 그리고 아까처럼 연학이와 나란히 멍석 끝에 걸터앉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해는 서편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노을이 시뻘건 하늘을 갈가마귀떼가 울며 날아간다. 몇몇 사람이 일어서서 하직을 하고 떠났다. 초상집의 일을 도와주던 마을 아낙들도 음식을 나누어가지고 다 돌아갔다. 사람 하나 비어버린 자리, 사람들이 하나 둘 상가를 떠나자 그 비어버린 자리가 남은 사람들 마음에 허무하게 스며든다. 올이 굵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색이 바래진 여름 모자를 쓴 이평노인이,
“기성아!”
하고 문간에서 방금 들어올 것 같기도 했다. 기성아, 손자 이름이지만 때론 며느리를 부르는 것이기도 했고, 때론 마누라를 부르는 것이기도 했었다.
영만의 아이들이 큰집에 오다 말고 차일 밑에 어른들이 그냥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되돌아간다. 막딸이는 부엌 부뚜막에 앉아서 행주치마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영만이댁네가 울고 있는 동서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초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하여 곡을 했던 선이는 지쳐버렸던지 작은방에 들어간 채 기척이 없었다.
“조선팔도 다 댕기도 우리 시아부지 겉은 어른이 어디 기실꼬. 지나가시다가도 내가 발을 매믄 아가 니는 들어가서 보리방아나 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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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라. 내가 밭은 매줄 긴께…… 어디서 그 어른을 또 만낼꼬, 한시반시 쉬시는 법이 없고, 아들 잘 두었다 캐도 남 가는 데 한분 못가보시고.”
영만이댁네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팔짱을 끼고 부엌바닥에 쭈그리고 앉는다. 믿고 의지하고 큰 나무의 그늘 같았던 시아버지가 이제는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먹딸이는 우는 것이었지만 맏손자이자 자신이 낳은 큰아들 기성은 분명히 전보를 받았을터인데 장례가 끝난 지금까지 일본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둘째기동이도 장지에서 곧장 진주로 가버리고 말았다. 어미한테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버린 것이다. 옛날에는 남편이 없어도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만으로도 방안은 가득 찬 듯 막딸은 행복했었다.
사방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논에서는 개구리 우는 소리, 산에서는 뻐꾸기가 울었다. 영만이댁네가 기둥에 등을 내건다. 동시에 안방에서도 등잔에 불을 밝혔는지 장지문이 환해졌다.
“아까 산에서 피뚝 생각한 일인데……”
두만이 다소 신중해진 어투로 말을 꺼내었다.
“그 일에 송관수가 관련도지 않았이까 그런 생각이 들더마요.”
빈 자리를 채운 듯 연학과 영만이 술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연학이 두만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일구월심이다. 이자 그만 잊어부리라. 그러다가 세상 사람이 다 도적으로 안 뵈겄나. 해서 잃어부린 사람이 죄를 짓는다 카이. ”
장종학이 미쳐 말을 끝내기도 전에.
“생사람 잡겄고나.”
영팔노인은 곰방대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두만을 노려본다.
“대관절 송관순가 하는 사램이 누고?”
종학이 물었다.
“백정놈인데, 전에 농청하고 백정들이 한판 붙었일 직에 내가 농청에다 돈 안 받고 공짜술 주었다 함서 그놈이 나한테 찍짜를 붙은 일이 있었소. 아주 영악한 놈이지요.”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 했다. 우째서 관수가 백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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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씨가 와 징을 냅니까, 남의 일로. 백정이 집에 대리사우로 들어갔이믄 백정이지 그라믄 백정이 아니다 그 말심입니까?”
“백정이건 아니건 나는 니 심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릴 직부터 한이웃에서 함께 큰 친구 사이 아니가. 설령 남들이 그런 말을 한다 카더라도 근본을 아는 니가 발명을 해주어야 옳지. 사램이 그러는 거 아니다. 관수가 형팽인지 먼지 하는 운동을 하기는 했다 카더라마는 그거는 니하고 상관이 없는 일일뿐더러, 앞장선 것은 백정이보다 신학문 한 사람들이라 카데.”
“그놈이 내 잘되는 기이 배가 아파서 사사건건 날 보기만 하믄 씹었지요. 그리고 생각을 좀 해보시이소 형평사운동만 했다고 해서 관수를 관에서 찾아댕기겄소? 먼가 다른, 법에 걸리는 일을 했인께 경찰에 쬐끼댕기는 것 아니겄소.”
“그라믄 니 없어진 그 돈 때문에 쬐끼댕긴다 그 말가?”
“허허어, 참 아제씨도 으멍시럽기는.”
두만은 잠투세하는 아이같이, 잠자리가 편찮은 심장병 환자같이 짜증스럽고 답답했다. 딴전을 피는 영팔노인이 증오스럽기도 했다.
“지 말은 송관수 그놈이 지 주제도 모리고 독립운동인가 먼가 했일 기다, 그 말이오.”
“그런께 독립운동을 했일지 모린다 하니 돈을 털어가는 데 관련이 있일지도 모린다?”
“바로 그렇지요.”
“애키 순! 이 나쁜 놈아.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마라. 니말대로 하자믄 관에서 쬐끼댕기는 놈이 잡아주소 하고 진주에 왔겄나? 종무소식,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리는 사람을 두고,”
주거니받거니 하는데 연학과 영만은 종시일관 침묵을 지키며 술안주만 집어먹고 있었다.
“아제씨 말대로 하자믄 이 김두만은 천하에 막돼묵은 놈이다, 예, 그렇다 칩시다. 하지마는 아제씨는 와 그리 깃대 치키들고 나서는 깁니까?”
“깃대를 치키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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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안 그렇다 말입니까? 관수놈이 청백하다는 거를 아제씨는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라믄 니는 관수가 그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 말가?”
“처남!”
“매형은 그만 있이소. 모두 한당이 돼가지고.”
“처남! 이제 그만두는 기이 좋겄다. 장인어른 친구분이믄 자네한테는 아부지 맞재빈데.”
“흥! 초록은 동색이라 카더마는 다 그렇고 그런께 편역들고 나서는 것 나도 압니다. 의병인지 동학인지 옛날에는 다 한통속인 거를 누가 모립니까.”
“머 우째?”
“울 아부지가 산에 안 들어갔다고 후회를 했다고요? 어림 반푼어치 없는 말 하지도 마소. 의병질을 했건 동학당을 했건 만주 가서 독립군을 했건 그거는 아제씨 소관이지 울 아부지가 와 후회를 합니까. 누구 망해묵을라꼬 후회를 합니까?”
“말 다했나?”
영팔노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노오음! 이 불가사리 겉은 놈아! 그래 니 말이 맞다. 나는 동학당도 했고 의병질도 했고오 만주 가서 독립군도 했다. 우짤라노? 내 이 늙은 모가지에 썩은 새끼줄 감아서 왜놈한테 끌고 갈라나? 끌고 가믄 상 많이 탈 기다. 다 산 목심, 내 그기이 무서브믄 성을 갈겄다. 이 천하무도한 놈, 지 뿌리를 짤라묵고 사는 놈!”
다투는 바깥 기척에, 자리가 자리인 만큼 참고 있던 안방의 두 안늙은이가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나왔다.
“보소, 와 이랍니까. 술이 과하다 싶었더마는, 젊은 사람들 앞에서 무신 망신입니까.”
판술네가 영팔노인의 팔을 잡아끌었고 두만의 모친은 아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저물어서 진주 가시기는 글렀고, 어르신, 작은사돈댁에 가시서 주무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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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연학이 일어섰다.
“그래, 그러시야겄다.”
종학도 엉거주춤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영팔노인의 겨드랑 밑으로 연학이 팔을 찔러넣으며 부축한다.
“이노오음! 내 이 늙은 모가지에 썩은 새끼줄 감아서 왜놈한테 끌고 가라 카는데 와 말이 없노!”
“아이구 참. 늙어감서 이기이 무신 짓이요.”
“모리거든 임자는 입 다물어. 저놈은 저, 저놈은, 돈이라 카믄 지애비 묏자리도 팔아묵을……”
영팔노인의 술이 과했던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정정하다 하여도 나이를 당할 장사는 없는 것이다.
“봐아라! 기완아!”
영만이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댁네가 달려나왔다. 영만이 말했다.
“두 분 뫼시고 가서 자리 봐드리라.”
“야.”
판술네와 영만이댁네가 영팔노인을 부툭하는 바람에 연학은 물러섰고 그들이 문밖으로 나간 뒤 자리로 돌아온다.
“니가 이래야겄나? 세상에 뵈는 기이 없나? 니가 누고? 니가 멋꼬?”
두만의 모친은 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두만이는 이리저리 모친의 눈길에서 도망을 치다가,
“와 나만 가지고 이러요. 내가 잘못한 기이 머 있다고 모두 나만보믄 덤비드는가 말이요! 억울하고 분한 거는 나 혼자밖에 없다 그 말이요! 내 밥 묵고 내 돈 쓰고, 부모 형제까지 이러이 서글퍼서 우찌 살겄소!”
울먹였다.
“우리는 니 밥 안 묵고 니 돈 안 썼다. 니 아부지 벵들어 눕던 그날꺼지 삐빠지게 일하고 살았다. 이놈아 니 아부지 숨 걷을 때 머라 카싰는지 벌써 잊었더나? 남의 가심에 못박지 마라. 그 말을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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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잊었나? 별말할 거 없다. 판술아배, 판술어매, 그리고 니 에미꺼지 모두 끌고 가거라. 독립군 했다고 끌고 가서 까바치라. 그라믄 상금 많이 줄 기고 축간 돈 아귀가 맞일 거 아니가.”
“기가 차서.”
“기가 차는 거는 나다. 아무리 돈이 좋기로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해도 되는 기가? 니 아부지 땅에 묻고 날도 안 밝았다. 피알 하나 안 속이고 살아온 아부지 같은 노인을 모함해?”
“모함은 무슨, 말이 그렇다는 기고.”
“관수는 와 들먹이노? 못사는 친구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자식 키우는 놈이 사람을 사지로 몰아!”
확 달려들어 아들의 멱살을 잡는다.
“장모님 참으이소. 지도 울화가 치민께 그러는 기지요. 부모 자식간에 질기 이러믄 정만 떨어지고……”
종학이 나서서 뜯어말린다.
“나도 이러고 접지 않다. 컬 때는 안 그렇더마는, 부모 안 닮은 자식이 어디 있겄나 하고 생각했더마는 틀린 기라. 사람 아주 베맀다. 돈 있이믄 머하노. 집안이 풍지박산인데,”
하다가 사위 보기가 민망했던지 두만의 모친은
“기성아, 나 작은집에 가서 잘 긴께 찾지 마라.”
며느리에게 말하고 훵하니 나가버린다. 초상 뒤끝이 엉망이 되었다. 두만이는 쥐어박힌 사람같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멱살을 잡아도 어머니는 어머닌 것이다. 끈덕지고 가장 강한 공격수가 어머니였는데 두만은 모친이 나가버리자 갑자기 추위를 타는 것 같은 이상한 고독감에 빠진다. 매형과 그의 동생 연학에게 계면쩍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시일관 말이 없는 동생 영만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성.”
하고 영만이 형을 불렀다.
“성은 자기 한 대만 살고 말 생각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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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한 대만 살고 말라 카믄 마음대로 하소.”
“무신 말고?”
“나는 내 자식 내 손자 대꺼지 살ㄹ아주기를 바래는 맴이니께 이렇키 되믄 성하고 남이 되든지 해야겄소.”
“좀더 알기 쉽기 말해봐라.”
“그라믄 내가 묻겄소. 성은 왜놈이 천년만년 우리 백성을 누르고 살 기라 믿소?”
“……”
“우리 백성들이 천년만년 왜놈의 종으로 살 기라 성은 그렇기 믿고 있소?”
“나중 일을 누가 알꼬.”
“모리지요. 나도 모리요. 하지마는 한 가지 틀림이 없는 일은 만일에 나라가 독립한다믄 성이 역적이 된다, 그것만은 틀림이 없을 기고, 삼족을 멸한다믄 조카 두 놈에 우리 새끼들은 우찌 될 기요.”
“야가 무슨 소리를 하노.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이 개명천지에 삼족을 멸할 기라꼬? 자다가 꿈 겉은 소리 하네. 하하핫핫핫…… 하하하핫……”
그러나 웃음 소리는 공허했고 한풀 꺾인 느낌이다. 모친한테 멱살을 잡혔을 때 한풀 꺾이긴 했었지만, 종학이 연학을 힐끗 쳐다본다. 형제의 눈이 부딪쳤다. 잠자코 술이나 마시라는 듯 연학은 형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성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덩신이요.”
“머?”
“장사 눈이 밝아서 돈을 좀 벌었는지 모리지마는 번 돈 간수하기는 영 어럽겄소.”
“건방진 소리 하네.”
“진주의 그 머라 카는, 이 머라 카는 사람 따라갈라 카믄 아득하요. 뿔따구 난 황소맨크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봤자 뿔따구만 뿌러지지 얻는 기이 머 있일 기라고 그러요.”
“니가 진주 일을 우찌 아노. 시건방진 소리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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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요? 나는 귀도 눈도 없다 캅디까? 이 아무개라는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인께 소문이 나기로 가정부한테 돈을 뺏긴 기 아니고 내어주었다, 그러이 우리는 바늘 하나라도 그 집에 가서 사자, 사실은 여하간에 인심이 그렇다는 긴데.”
두만이 깜짝 놀란다.
“누가 그러더노?”
자신도 그 비슷한 말을 듣기는 했으나 그 집 물건을 사자, 하는 민심의 동향은 모르고 있었다.
“방물장사 할망구가 그럽디다. 기왕지사 돈은 잃은 거고, 찾으믄 다행, 더 말할 것도 없겄지마는 성이 악담을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죄 없는 사람을 찍어넣는다꼬 돈이 돌아오겄소? 원수만 사지. 가만히 있어도 돌아올 돈이믄 돌아올 기고 못 돌아올 돈이믄 못 돌아오는 거 아니겄소. 집도 터도 없이 다 뺏긴 것도 아닌데 제잘 그러지마소.”
차근차근 말하는 영만은 여러모로 그 문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본 것 같았다. 아까 김두만의 입에서 송관수의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 사실 연학은 등골이 오싹했다. 연학이 진주로 돌아가지 않고 미적거리며 앉아 있는 것은 오래간만에 형제가 만나서 할 얘기도 있을 것이고, 남 보기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간의 김두만의 심경이라든가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고, 거기다 송관수가 거론되고 보니 연학은 더더구나 자리를 뜰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이따금 덩치가 크고 나이 들면서 비계살이 붙은 형을 바라보곤 한다. 처남인 김두만보다는 여유가 있고 너그러운 편이지만 그도 실리에는 밝은 사람이다. 연학의 신중한 눈이 영만에게 옮겨진다. 술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만은 연학과 마찬가지로 오늘은 술을 입데 대지 않았다. 미끈하게 때가 빠지고 제법 뭐하는 사람같이 된 형에 비하여 영만은 갈 데 없는 농사꾼이었다. 손은 갈구리 같았고 얼굴은 검둥이였으며 햇볕에 탄 머리칼도 누릿누릿했다.
“성의 말대로 삼족을 멸하는 그런 일은 없일 기라 하드라도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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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일은 아니제요. 넘한테 손가락질 받으믄서 자식들 공부 시키보았자 사람 구실 하겄십니까 내 생각은 그렇거마는, 나야 독립군 될 인야도 못 되고 언애 꼬꾸랭이 조금 끄적이는 식자고 보이 면서기 할 자격도 없고 평생 삽자루나 잡고 땅 파고 살 기요마는 앞뒤 재보는 감양은 있소.”
이런 기회에, 모처럼 두만과 마주앉은 기회에다 부친의 장례는 끝났고, 매형도 있는 자리니만큼 가정일까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영만은 작정한 것 같다. 어떤 책임감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상채기는 아무게 가만히 내비리두고, 휘젓어봐야 덧나기밖에 더하겄소? 무식한 놈 말이라꼬 덮어놓고 물리치지만 말고 잘 생각해보소. 그라고 좋으니 궂으니 해도 궂은 일에는 부모 형제고 좋은 일에는 남이라 안 카요? 남이야 떡이나 묵고 굿이나 보고 안 그렇소? 이분 일도 일이지마는 집안일도 그렇소. 남자 할 일 따로 있고 여자 할 일 따로 있고 소견머리 좁은 여자 말만 들을 기이 아니라 다른 식구 말에도 좀 귀기기울소. 자식 낳고 사는 조강지처라믄 모리까, 여자란 좋은 때 좋은 기지 돌아서믄 남이고 해악을 끼치는 것도 흔히 있는 일 아니요. 언제 내가 성보고 이런 말 합디까? 아부지도 이자는 안 기시고 하이 식구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안 하겄소. 남한테 척지는 짓 해도 안 되고 가숙한테 모질기 해도 안 될 기요. 그라고 믿는다 하믄서 남자가 세세히 여자한테 이야기다 하는 것도 못난 짓이라요.”
영만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했다. 종학이 술을 부었다.
“목 좀 추기감서 얘기해라.”
“오늘은 술 안 할랍니다.”
매형의 손을 밀어내고,
“그라고 머, 더 할말도 없십니다.”
순간 영만의 얼굴에는 스스러워하는 빛이 떠돌았다.
“작은처남이 자네보다 국량이 넓네. 듣고 보이 하낫도 틀린 말은 아니다. 집안끼리니, 남 없으니 하는 말이다만 왜놈들한테 잽히가지않을 만큼 처신하고, 작은처남 말마따나 독립군 할 형편은 못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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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는 중뿔나게 원성 사고 살아서는 안 되겄다. 말이야 바로 하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 안 하든가? 강약이 부동이라 지금은 우쩔 수도 없지마는.”
종학의 말에 두만은 침묵을 지켰다.
“지 생각에는.”
연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본의 경비가 어디 보통입니까? 물샐 틈 없는 것이 일본의 경비고, 또 사건이 사건인만큼 이 잡듯 할 긴게 조만간에 잽히기는 잽힐 성싶습니다.”
“그럴까?”
종학이 의문을 나타내었다. 두만이, 영만은 좀 뜻밖이란 표정이다. “그런 일로 안 잽힌 경우가 별로 없지요. 그것이 또 가정부서 정말 그랬는지 의심스럽기고 하고, 차라리 강도한테 당했이믄 후환이나 없일 긴데.”
“후환이라니?”
튕기듯 두만이 되물었다.
“첫째는 경찰에서 시끄럽고 혹시 내통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한께.”
“그, 그 점은 나도 생각했고, 이도영이 그 사람도 그것 때문에 오라가라 했던 모앵인데……”
두만의 눈빛이 불안해진다.
“두 번째는 반대로, 그 사람들이 잽히는 날이믄, 또 친일파로 지목을 하고 그랬다믄은 물귀신맨크로 끌고들어갈 수도 있는 일 아니겄소.”
연학은 무표정이었지만 그러나 무서운 말이었다.
“내, 내가 순사 형사도 아니겄고 돈 좀 번 것이 치, 친일이라 할 수는 없는 일.”
하다가 두만은 헝클어진 머릿속을 가다듬기나 하듯 생각에 잠긴다. 한동안 긴장이 흘렀다. 연학의 말은 두만뿐만 아니라 종학과 영만에게도 공포감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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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는 친일파한테 폭탄을 던지고 칼부림도 한다 카이…… 이래저래 참 어러븐 세상이다.”
종학이 중얼거렸다. 관수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더라면 연학은 그런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 심사가 편한 것도 아니었다. 상당한 위험이 따를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닌게아니라 두만은 강한 의혹을 느낀다. 길상의 존재가 크게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의혹이 짙어지면 질수록 공포심도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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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김원기 (옮긴이),유종일 (감수) 갈라파고스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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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티아 센 지음, 김원기 옮김, 유종일 감수.해제 / 갈라파고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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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철 2020-02-01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권
4부 3권
제4편 인실의 자리

12권

5장 동경의 인실

인실이 머물고 있는 호리가와의 시영 주택을 찾아가는 찬하는 갈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곤욕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그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곤욕스런 방문을 한 번도 아니요 거의 관례적으로 한 주일에 한 번 정도 실행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이 딱하기도 했었다. 굳이 이유를 따져본다면 그 항구에 오가다와 인실을 남겨 놓고 도망치다시피 혼자 와버렸으니 책임이 전혀 없다 할 수는 없었고 오가다와의 우정을 이유로 삼을 수도 있었다. 또 유인실이 동포라는 것도 이유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여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가다와 인실의 문제요 찬하가 간여하지 않는다 하여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어려운 형편이라면 얼마간의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그것만으로도 찬하는 도리를 다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인실이 청하는 도움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경제적인 준비는 되어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지난 칠월 초순의 일이다. 조선에서 일어난 배화 폭동이 날로 확대되고 격렬해진다는 신문 기사를 찬하는 읽고 있었다. 만주 길림성에 있는 만보산 부근에서 중국인 농민과 조선 농민 상에 벌어진 충돌 사건이 [조선일보] 호외로 시작하여, 연이어 선동적인 기사로 사건이 보도되면서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 습격 학살이라는 엄청난 참극이 각처에서 자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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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조선인의 어리석음과 일본의 사악함이 교묘히 맞아떨어지면서 저질러진 어처구니없는 만행이었으며 대만의 무사사건을 연상케 하였다.
‘비겁하고 비천하군. 이래가지고는 구제불능이다. 진재 때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을 무슨 낯짝 치켜들고 비난을 하겠나. 참으로 혐오스럽다!’
신문을 꾸겨쥐는데 배달된 편지 한 통을 하녀인 하루가 가져왔던 것이다. 편지를 볼 기분도 아니어서 하루에게 차를 끓여오라 이르고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곳에서는 사상자가 있었다는 보도도 없었는데 이건 무슨 미친지랄인가!’
찬하는 온종일 기분이 언짢아 있었다. 저녁밥을 들 때도 그의 얼굴은 우울해 뵜다. 현재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찬하로 하여금 분개하게 했고 깊은 실망을 갖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양식 있는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다 그랬을 테니가. 그러나 찬하의 감정이 요즘 균형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녁을 끝냈을 때 아내인 노리코가 안색이 좋지 않다, 기분이 안 좋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찬하는 고개만 흔들고 서재로 돌아왔다. 한나절을 내버려두었던 편지를 찬하는 무심히 집어들고 봉함을 돌려보았다. 뜻밖에도 유인실이라는 이름이 정확한 필치로 적혀 있었다. 편지의 발송지는 서울이 아닌 동경이었다.

제례하옵고,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조선생님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선생께서 지장이 없으시면 오는 칠일, 시간을 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히비야 공회당 앞에서 오후 세시부터 네시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못 오셔도 저로서는 하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간단하고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찬하는 왠지 가슴이 철렁했다. 불가피한 사정이라는 말이 갖는 긴박감도 그러했으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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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하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그 말에서 절박한 인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일까?’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실이 관헌에게 쫓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인실은 히비야 공회당 건물 한곁에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찬하를 먼발치로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찬하가 가까이까지가는 동안 줄곧 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오라기 흩트리지 않게 치올려서 빗은 머리를 모아 고무줄로 동여매고 흰 바탕에 회색 물방울 무늬가 있는 헐렁한 원피스를 인실은 입고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찬하가 먼저 인사를 했다. 인실은 잠자코 있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다시 찬하가 말했다. 인실은 웃지 않았다. 고개만 숙여 인사를 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몰라보게 여위어 있었다. 관골은 날카롭게 보였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그늘에 가서, 벤치에 앉을까요?”
하면서 인실은 앞서 걸음을 옮겨놓는다. 여윈 얼굴이며 어깻죽지와는 다르게 헐렁한 원피스 속에서 움직이는 몸은 몹시 비대해 있었다. 찬하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누가 뒤에서 자신의 목을 누르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나!’
찬하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밴 땀을 닦으며 걷는다.
‘죽일 놈! 지가 감히.’
했으나 찬하는 이상하게 오가다에 대한 연민을 가슴 뜨겁게 느낀다. 두 사람은 숲 사이에 있는 벤치에 앉는다. 푸른 수목, 수목은 푸르기보다 검게 보였다. 그 속에 있는 인실은 마치 풀물을 들인것처럼 더욱 푸르게 보여, 그것은 찬하의 착각이었지만, 녹색의 여인 같은 느낌을 준다. 소나기가 쏟아질 직전처럼, 번개가 칠 직전처럼 검은 숲속의 공간은 파아랗게 느껴졌고 그 공간에 있는 인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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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여인이었다.
“죄송합니다.”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구만리 밖을 바라보기나 하듯 인실이 말했다.
“웬일이세요?”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실은 찬하의 목소리를 저울질이나 하듯 동공을 한곳에 모았다.
“추악한 모습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동경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온 지 오래 됐습니다.”
“못 만나보셨습니까?”
왠지 찬하는 인실이 오가다를 만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
“지금 그 사람 삿포로에 있습니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더군요.”
“……”
“만나셔야지요. 제가 연락을 해드릴까요?”
“아니요.”
“……”
“저는 그분을 찾아 일본에 온 건 아닙니다.”
먼 곳에 있던 인실의 시선이 돌아와서 자기 발, 하얀 운동화로 옮겨진다.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조선생님께선 아시겠지요.”
“……”
“우리는 이제 다 끝났습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두렵지도 않습니다. 다만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
“진실이 현실에서는 추악하게 뵈는 것은…… 왜 그럴까요.”
찬하는 인실의 말을 들으면서 도덕과 휴머니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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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르고말구요. 때론 다를 정도가 아니라 상반되는 거 아닙니까.’
하던 오가다의 말이 생각났다.
“인류가 서로 적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결코 현실에서 놓여날 순 없지만 추악하다는 생각을 마십시오. 우린 다만 소외당할 뿐입니다.”
“우리……”
인실은 비로소 찬하가 일본 여자와 결혼한 것을 상기한 것 같았다.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인실씨와 저의 사정이 다르긴 합니다만 미온적인 저로서는 괴로움 같은 것도 뱃멀미하듯이 합니다만 치열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고통도 치열하겠습니다만.”
말은 모두 무의미하고 피상적이었다. 숲 사이로 산책 나온 사람들이 꽤 많이 서성대고 있었다. 비가 오시려는지 날씨는 무더웠고 불어오는 바람도 후텁지근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날개를 치켜들고 열심히 주둥이로 털을 고르고 있었다.
‘임명희…… 임명희 그도 사랑을 하면 인실씨 같은까?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는 않겠지. 왜 나는 그 사람 생각을 또 할까? 정떨어지게 포악하기까지 했던 여자를!’
찬하는 웅크러드는 마음을 펴듯 어깨를 펴면서 강해진 어세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조선생님.”
“네. 말씀하십시오.”
“선생님을 만나뵙고자 한 것은 아이 문제 때문입니다.”
순간 인실의 눈은 표독스럽게 빛났다. 찬하는 당황한다. 이미 짐작했던 일이다. 그러나 막상 인실의 입에서 아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것도 주저함이 없이 마치 칼날을 들이대듯, 당황할밖에 없었다.
“전 아이를 조선에서 낳고 싶지 않았습니다. 낳아서도 조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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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가지는 않을 겁니다. 아이는 이곳에 있어야 해요.”
수백 번 수천 번 연습한 대사처럼 인실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다. 얼마 많이, 얼마나 지독하게 수치심을 갈고 갈아서 그 수치심은 완전히 마모되고 말았는가. 인실은 차라리 도도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해합니다.”
오히려 찬하 쪽에서 숨이 가빴다. 속으론 이런 빌어먹을! 하면서도 허둥지둥 다시 말했다. “하면은 인실씨는 가신다 그 말씀입니까? 아이는 두고.”
“만주, 아니면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처럼 말입니다. 소외된 채 살아볼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그 사람하고 결혼해서……”
찬하의 목소리는 차츰 소곤거리듯 낮아졌다. 한동안 인실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그런 자세는 아니었다. 멍청히,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듯이. 그러다가 말을 했다.
“우리는 끝났습니다.”
“이 사실을 오기다상이 압니까?”
“아니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상의한 뒤 두 분이 끝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는데 갑자기 인실의 목소리가 잠긴다.
“저는 그분한테 생명보다 중한 것을 주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줄 것이 없어요.”
생명보다 중한 것,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찬하는 안다. 조국에 헌신할 것을 맹서한 여자가 그 조국에 반역 행위를 했다는 뜻이 더욱 깊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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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찬하는
“이제는 그 사람한테 받으십시오.”
하고 말했던 것이다.
“제가 설명을 해야만 아시겠습니까? 하기는 선생님이 알아야 할 의무는 없는 거지요. 저는 울부짖었습니다. 우리의 진실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저의 행동은 마땅히 돌로 쳐죽여야 할 배신인 것을 저 자신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어느것에도 승복 안 할 결심입니다. 저는 새롭게 시작할 거예요. 그렇습니다. 저는 속죄할 그 아무것도 없고 인간을 몰아넣는 그 비정한 것과 싸울 거예요.”
잠긴 목소리였으나 말은 여전히 또박또박했다. 그러나 인실의 내부는 거의 광란 상태인 것을 찬하는 느꼈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미쳤는지 몰라요. 결국, 그렇지요. 아이는 일본에 있어야 합니다. 오가다 지로의 자식도 유인실의 자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낳은 생명일 뿐이예요.”
“인실씨!”
“……”
“그 사람한테 갑시다. 우리 가서 의논합시다.”
“그럴 생각이면 왜 제가 조선생님을 만나뵙자고 했겠습니까? 전, 전 아이를 낳은 후의 방도가 막연합니다. 길가에 버릴 수도 없고, 병원에서도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조선생님께서 주선해주십시오, 아일 길러줄 곳을.”
인실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왜 오가다상하고 의논을 안 하려 합니까? 그는 아이의 아버집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건 안 돼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왜지요? 왜 그래야 합니까?”
찬하는 떼를 쓰듯 말했다.
“우린 끝났어요. 절대로 다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아이의 아버지도, 아이의 엄마도 아, 아니어야…… 절대로 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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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껴 운다. 작은 새 한 마리같이 흐느낀다.
“자신을 다 버리고, 자신을 다, 송두리째 주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할 것 가, 같았어요. 언제까지나 그 사람 생각할 것 같았어요. 그 사람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이런 결과가 나타날 것은 모, 몰랐지요.”
더욱 흐느낀다.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울음 그치시오! 자아 울음 그치시오!”
찬하는 분노를 느끼며 소리치다시피 했다. 찬하 자신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비극에 자신도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들 눈에 이들은 사연 많은 연인들로 비쳤을 것이다. 그 후 호리가와의 시영 주택 이층에 방을 하나 빌려 있는 인실을 찬하가 찾아갈 때 그때마다 사연 많은 남녀로 오해를 받게 되었다. 누군가가 찬하에게 당신이 아이 아버지요? 당신이 그 여자 남편이오? 애인이오? 하고 물어준다면 모를까, 찬하는 그 오해를 변명할 길이 없었다. 저희들 마음대로 애인이다, 아이아비다, 아니 숨겨놓은 여자다, 그런 식으로 상상하는데,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뭐라 하겠는가. 등골에 땀이 흐를 만큼 곤욕스러울 뿐이었다. 찬하는 현재 자신의 역할을 아내인 노리코에게 떠넘길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인실이 어디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버릴 것만 같아서 생각을 고쳐먹은 일이 있었다. 오늘도 찬하는 그 곤욕스런 방문을 감행하기 위해 백화점에서 과일 바구니를 하나 사들었다.
백화점을 나서려는데
“어머! 산카상!”
여자가 물었다.
“아아.”
찬하는 걸음을 멈추며 엉거주춤 인사를 한다.
“오래간만이에요.”
“그렇군요.”
여자는 세련된 양장이었고 나이는 노리코보다 서너 살 위, 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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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의 외사촌인 노다 마리코다.
“과일 바구니 들고, 어디 병문안?”
“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바쁘지 않으면 커피 한잔 마시지 않겠어요?”
“그러지요.”
두 사람은 백화점 가까운 끽다점으로 들어간다.
“노리코랑 아이랑 모두 건강해요?”
차를 마시며 마리코는 안부를 묻는다.
“괜찮습니다.”
“이런 우연 아니면 산카상 만나보기 힘드네요.”
“원래 게을러서요.”
“귀족이라 우릴 얕보는 거 아닌가요.”
“별말씀을, 노다상이 누군데 얕보겠습니까.”
마리코의 남편은 상당한 고급 관리다.
“그래 지금은 뭘 하세요?”
“집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지요.”
“하기야 산카사은 부자니까, 집에서 학문을 연구할 수도 있지요.”
“번역 따위가 연굽니까?” 찬하는 웃는다.
“그것도 일종의 영문학 연구 아니겠어요?”
“글쎄요……”
“학교는 왜 그만두었지요?”
“오래된 얘긴데요, 있으면 뭐합니까?”
“왜?”
“일본에서 중학의 교사 자리 하나도 조선인에게 내주지 않는데 대학의 강좌를 얻는다는 건 미친 사람의 꿈이겠지요.”
“아아, 그건 심하군. 말도 안 돼, 그건 옳지 않아요.”
“할 수 없지요. 그런 것 모르셨습니까?”
마리코는 좀 당황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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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산카상은 다르지 않아요?”
“다를 것 없어요. 저의 국적은 엄연히 조선이니까요.”
순간 마리코의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나도 조선의 식민지 정책엔 비판적이예요. 민족성이 어떻다는 둥하는 말에 대해서도 그건 일본인의 편견이라 했지요. 하지만 지난 칠월에 있었던 지나인 학살을 신문지상에서 보고 놀랬어요. 산카상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천인공노할 만행이지요.”
“정말 야만적이었어요. 난 신문 보고 떨었어요. 얼마나 놀랬는지.”
“무지몽매한 소치지요.”
“네. 맞아요. 평소 내 인식도 싹 달라지더군. 이젠 일본인의 편견이란 말은 못하겠지요?”
“그렇습니까?”
찬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요. 우리도 일본인에 대한 것이 편견이라 하여 나무라던 사람에게 얼굴을 치켜들 수 없게 됐습니다. 이제는 진재 때 조선인 학살에 대해 말 못하게 됐지요.”
“어머! 산카상도 참 짓궂은 데가 있네요.”
했으나 마리코의 얼굴에는 완전히 불쾌한 빛이 나타났다. 찬하는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이제 실례해야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끽다점을 나서는 찬하는 구역질을 느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차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마리코 언닌 좀 대샤바리예요.’
비교적 남의 흉을 보지 않는 노리코가 그런 말을 했었다. 대샤바리란 잘난 체, 남의 앞에서 나서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차에서 내려 시영 주택 어귀에 들어서면서 찬하는
‘어째 마음이 요즘에 자꾸 격해지는 걸까. 뭔가 치사스러워. 왜놈한테 동냥이나 한 것 같은 기분이야. 오늘은 두 번 다시 안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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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기까지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 그 따위 생각은 말자. 인실씨는 우리 조선 사람들의 누이가 아닌가.’
거북한 인실과의 대면은 그랬고 주위 눈빛도 피부에 닿는 가시같았어 찬하는 방문을 하고 집을 나섰을 때는 언제나 다시 안 오겠다. 아일 낳았다는 기별이 있기까지는 안 올 것이다, 그렇게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면 그는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실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 때문이다.
“형체도 남기지 앟는 파괴,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에요. 어느 곳 어느 때든 그것만은 저의 권리고 자유니까요.”
그 말을 했을 때 찬하는 인실이 미웠다. 그러나 그에게 눌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 무심결에 튀어나왔을 뿐 겁을 주기 위해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찬하는 여러 번 삿포로에 있는 오가다에게 연락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자신이 떠맡은 일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리코에게 떠넘기려다 말았던 것처럼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실이 오가다를 만나게 된다면 스스로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찬하는 배짱이 두둑한 편은 아니었지만 단호하고 냉정한 일면이 있었고 결코 허약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러나 히비야 공원에서 인실을 만나는 순간 그들의 비극에 사로잡힌 것은 연민 때문이겠으나 한편 인실에 투영된 자신을 보았을지 모르고 은둔에 가까운 동경 생활의 숨막히는 자기 폐쇄에서 출구를 찾는 몸부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집주인 여자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속발에 누리끼한 빗을 꽂고 길쭉한 여자의 얼굴, 입 언저리에 검정 사마귀가 있었다. 찬하는 그 사마귀를 볼 때마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여자는,
“오십시오. 이번에는 좀 늦었군요.”
하며 묘하게 웃었다. 교태 같기도 했고 비웃음 같기도 했다. 매번 겪게 되는 일이었지만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물론 여자는 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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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찾아오는 남자에 대하여. 그러나 아는 사람, 그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인실은 여자 호기심을 채워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주변에 신경을 쓸 그럴 여유도 없었다. 사실 아는 사람이라는 이상의 할말도 없었던 것이다.
“올라가보십시오.”
“네.”
“젊은 여자가 혼자서, 참 안됐어요.”
예의 바르고 점잖고 귀공자 같은 찬하, 어떤 뜻에선 귀공자이기도 한 조찬하에 대하여 여자는 항상 정중하기는 했었다.
“여러 가지로 신세가 많습니다.”
“홀몸이 아니니까 저도 마음이 쓰이는 거지요.”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잘 닦여져서 미끄러운 계단을 밟으며 올라간다. 인실의 신상에 불안을 느낄 때 계단의 수는 많은 것 같았고 거북한 대면을 생각할 때 계단의 수는 너무 적은 것 같았다. 방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방문을 두드린다.
“네”
“조찬합니다.”
“네.”
언제나처럼 인실은 무릎을 모으고 등은 벽에 기대이듯 앉아 있었다. 그는 숨이 찬 듯했고 허리 둘레는 더 커졌으나 반대로 팔과 어깻죽지는 더욱 여위어 보였다.
“어떻습니까?”
과일 바구니를 한 곁에 놓아두고 자리에 앉으며 찬하는 또 물었다.
“괜찮습니까?”
처음 찬하가 찾아왔을 때 인실은,
“이제 오시지 마십시오.”
했다. 그 말은 찬하가 찾아갈 때마다 잊지 않고 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인실은 그 말을 안 하게 되었다. 어차피 찬하는 올 것이기 때문에 그랬는지 자기 생각에 몰두하여 사소한 일은 모두 잊고 있어 그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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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츠키소이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츠키소이란 병자를 돌보아주는 직업인으로, 간호원하고는 달라서 허드렛일까지 다 하는 사람이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필요할 때 여기 아주머니한테 부탁하겠어요.”
“내일이라도, 제가 한 사람 보내드릴까요?”
“아닙니다. 아직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식사 준비까지 하시려면…… 그리고 방도 어디 아래층으로 옮기든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인실은 순간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사양이 아닌, 제발 날 가만히 내버려두어 달라는 부탁인 것이었다. 일어서야 마땅한 것인데 찬하는 몸이 붙은 것처럼 일어설 수가 없었다. 혼자 있고 싶어하는 인실이, 찬하 역시 숨이 막힐 것 같은 장소에게 피해 달아나고 싶었는데…… 역시 연민이었다. 그것은 찬하 가슴 밑바닥에 우러나느 연민 때문이었다. 찬하는 지금 자기집 뜰에 한창인 수국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축축한 음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수국, 병자 방에는 꽂지 않는다는 그 수국이 녹색으로 변했을 때, 찬하는 히비야 공원에서 녹색의 여인으로 착각한 인실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이다.
서로 멍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다. 인실은 찬하가 있는 것도 잊은 듯했다. 찬하는 이 막연한 침묵을 깰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실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가, 서울의 가족들에게는 해방이라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한 얘기였지만 다시 물어볼 수는 있었다. 오가다에 관한 얘기를 한 번쯤 더 꺼내어 심경의 변화를 촉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찬하는 안다, 인실이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태어날 아이의 문제인 것이다. 인실은 찬하가 나타날 때마다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상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찬하에게는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없었다. 아니 방안이 없었다기보다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판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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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있다는 것이 옳고, 그보다는 그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가끔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사도코로 보내면 어떨까. 그러나 그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사도코란 시골 가정에 양육비를 주고 아이를 맡기는 것이었는데, 일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엄마가 약하다든지 병들어다든지 아이가 많다든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아이를 시골 가정에다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도 유모를 들이는 대신 그런 방법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있었다. 찬하가 선뜻 그 말을 하고 나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는 시간을 기다리며 인실의 심경에 변화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모른다.
‘세상을 등지고 어느 산골에 가서 남 몰래 두 사람이 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민족이라는 굴레 같은 것 벗어던져 버리고 계급이라는 그 따위 남의 일 관여치 말고…… 민족이란 도시 무엇인가. 이것에는 다분히 허식이 있다. 자애하는 이기심도 분명히 있다, 침해하는 쪽이나 침해당하는 쪽이나.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민족이란…… 결국 필요에 의해 흩어지지 않고 모인 집단, 무리를 짓는 동물과 같이 생존을 위한 집단이 아닌가. 다만 좀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인간은 본능을 사랑이라 하고, 외로움에서 필사적으로 도주하려는 것을 사랑이라 하고 진실이라고도 한다. 이런 불안정한 인간들을 수용한 집단은 조국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한 핏줄이라는 끈으로 묶어놓고 일방통행을 한다. 조국! 핏줄! 그것은 절대적인 것인가? 항구불멸의 것으로 이탈하면 안 되는 것인가? 생존을 위한 공동체, 그것은 과연 공동체였던가? 민족을, 국가를, 그리고 소수를 위해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 밑깔개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 대하여 민족적인 분노를 느낀 것은 그것은 감정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그것처럼, 거의 이성은 아니다. 그러나 저 여자의 경우는 감정보다 이성이 더 강한 것 같다. 만일 동족끼리 불륜으로 사생아를 낳았다면 저 여자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 그는 수모를 감내하면서 아이를 길렀을 거야. 버리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남자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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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태어날 또 하나의 생명, 이들의 결합을 저해하는 것은 지금 민족이라는 명제다. 큰 것은 항상 작은 것을 말살하고 먹어치운다. 이 정당성, 이 논리는 끝이 없는 것일까? 끝이 없는 것이다! 끝이없는……’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리고 호주머니 속에서 휴지를 꺼내어 담뱃재를 턴다. 담뱃재를 털면서 찬하는 인실을 빌려 현재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끄러움 같기도 하고 아픔 같기도 한 것이 잠시 스쳤으나 이내 가슴이 답답했다. 사방 벽에 주먹질하지만 뜷고 나갈 길이 없는 막막함. 삶 자체에 대하여, 진실이나 진리에 대하여 어느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막막함, 절망을 느낀다. 방안은 밝은 편이었다. 육조 다다미방에는 하다 못해 벽면에 옷가지 하나 걸린 게 없었다. 방안은 이사간 뒤처럼 비어 있었다. 방 길이의 절반쯤 오시이래(벽장)가 있었는데 아마 모든 소지품은 그 속에 넣어둔 모양이다. 유리창 밖의 난간에 손수건 두 장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유리창 밖의 하늘에는 구름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미풍이 이따금 불어와서 후덥한 몸과 마음을 식혀주곤 한다.
‘일본 여자들에겐 그런 갈등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노리코의 경우도 거의 그것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하기는 일본 여자하고 사는 조선 남자는 더러 있지만 일본 남자와 조선 여자가 함께 사는 그런 것은 본 일이 없으니까. 조선 여자는 아예 쇠대문을 내려놓고, 그 쇠대문을 뚫고 나왔으니 저 여자는 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지. 그런 의식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모화 사상이 지배적이던 시절에도 여자가 이민족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그들은 고국과 절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실씨도 만주나 중국으로 가겠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영원히 고국에는 아니 오겠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그 의식의 벽에 갇힌 옛날의 조선 여인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여자들, 인실씨는 그들과 조금도 달라진 여자가 아니더란 말인가? 오히려 그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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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더 철저하게 물론 정조관도 그러했겠지만 반일 사상의 불덩이 같았던 여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그의 말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참으로 엄청난 이율배반이다. 그는 적어도 사회주의에 물든 여자가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관습적 의식과 사상에 다소는 간격이 있게 마련이지만 인실씨는 어느 측면에서도 그 도랑이 너무 깊고 넓다. 그것은 극복되어야 해. 모순이야, 모순. 자신을 찢어발기는 결과밖에는 없다. 진실, 진리? 그것은 과연 옳기만 한가? 선, 절대 선일 수만은 없다. 인간이 죽는 것 하나의 진실이다. 그 진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쫓기며 간다. 하면은 그것을 극복하는 것밖에 인간은 달리 길이 없는 것이다. 흥!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게지? 밥 세 끼 먹고 할 일 없는 돼지가 사변의 노예가 될 자격이나 있는가? 관두자, 관두어. 끝이 없다.’
한 그릇의 밥보다 상아탑이 그리 값진 것은 아니야 하던 어느 친구의 말이 찬하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그것 돼지의 발상이다.’
어느 친구가 그 말에 응수했다.
‘뭐 별다를 게 없네 이 친구야. 자네 생각만큼 인간은 위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위대하다는 것은 인간의 자화자찬인 게야. 누구 심판관 있어? 신이 모습을 드러내어야 진상을 알 게 아니냐 말이다. 결국 인간도 밥그릇 때문에 사워온 거 아니냐, 내 말은 그거야.’
인실은 망연한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형무소에 있을 때 감방안에서 인실은 저런 모습은 온종일 앉아 있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찬하는 일어사야 한다. 이제 가야지 하면서도 방을 나서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입 언저리에 가만 사마귀가 있는 집주인여자와 부딪칠 것이 지겨웠다. 어쩌면 인실이 따로, 자기 따로의 뭔지 모를 골똘한 시간에 스스로 얽매여 있는 것을 찬하는 좋아했는지 모른다.
‘오가다는 인실씨를 알고부터 코스모폴리탄인가 뭔가, 그렇게 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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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아니면 그 사상 때문에 저 여잘 사랑하게 됐을까? 이건 또 뭐야? 별 시시한 생각을 다 하는군. 오가다는 다만 여자를 사랑했고 인실씨는 다만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게야. 도시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 도시 이 여자는 누구인가? 조선의 잔다르크라도 된단 말인가? 그런 거창한 여자는 아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연소시키며 자기 완성을 꾀하려는 것인가? 그것 역시 너무 거창하다. 이 여자는 자신 속에 타인과 자신이 공존하는 그런 박애주의? 그것도 물론 아니다. 이 여잔 그런 위선자가 되기엔 너무 말뚱말뚱하다. 조선의 여자가 갇혀 있었던 곳에서 빠져나와 가장 첨단의 흐름속에 뛰어들어 그 두 개의 이빨 속에 생각과 몸이 짓이겨지는, 다만 그런 희생자에 불과한 걸가? 뭔가 이 여자는 정리를 해야 해. 어느 것이든 하나를 극복해야 해. 개미 쳇바퀴 돌듯 나는 언제까지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헛된 자문자답, 끝나지도 않을 일, 이건 망상이다. 끝없는 망상이다.’
거리 쪽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각에 두부장수가 다니지도 않을 터인데 찬하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종소리는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럼.”
하다가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서려는데,
“고맙습니다.”
인실의 말에 찬하는 놀라는 듯 돌아본다.
“아,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찬하는 밖으로 나왔다. 죄송하다는 말은 여러 번 했으나 인실이 고맙다는 말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찬하가 돌아가고 난 뒤 인실은 여전히 벽에 기대이듯 하고 앉아서 손수건 두 장이 널려 있는 난간 밖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하늘과 구름과 손수건뿐인 공간, 그 공간에 이따금 새가 질러가곤 했다. 가라앉은 시간이다. 의식 속에서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질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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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가라앉은 시간에서 일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같이, 덫에 걸린 짐승같이, 감겨오는 시간의 실구리, 번데기가 되고 말 것 같다. 인실은 그것을 떠밀어내듯 몸짓을 하며 일어섰다. 일어선 뒤에도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벽장 문을 열고 트렁크 위에 개켜놓은 옷을 꺼내어 갈아입는다. 흰바탕에 회색 물방울 무늬의 헐렁한 그 원피스다. 머리를 매만지고 왕골로 만든 여름용 손가방을 찾아든 인실은 그 속에 지갑을 넣고 손수건을 넣고 책보를 접어서 넣는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방을 나간다. 예정일은 넉넉하게 한 달은 남아 있었다. 진작부터 배를 싸매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임신부임을 알 수는 있었지만 배가 남산만 하지는 않았다.
전차를 타고 내리고 하면서 인실이 간 곳은 신주쿠에 있는 미츠코시 백화점이었다. 그는 백화점을 배회하다가 양말 한 켤레를 샀고, 또 몇 바퀴를 돌아다니다 손수건 한 장을 샀고, 한참 후 그는 다시 갓난아이의 모자를 하나 샀다. 그러나 그는 물건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온 것은 아니었다. 물건은 목적도 의미도 없이, 배회하는 장소에 사용료를 지불하듯 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호리가와의 그 이층 방에는 혼자 있어도 늘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방안의 물건을 모조리 벽장 속에 넣어버리고 빈방같이 했지만 여전히 옆에 누가 있는 것만 같았다. 여름이엉서 다소 줄기는 했지만 역시 백화점 안은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인파 속을 천천히 누비고 다니면 인실은 마치 무인지경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는 장소에서 탈출하기 위해, 정지된 시간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외출을 했다. 지하철을 타고 아사쿠사에서 내려 아사쿠사 일ㄹ대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고, 어떤 때는 마루비루(마루베니 빌딩)가 있는 오피스가들 돌아다니기도 했다. 전차를 타고 가다가 아무 곳에서나 내려서 한없이 걷기도 했다. 동경에 왔을 그 무렵, 그때는 지금같이 몸이 무겁지 않았기 때문에 더 멀리까지 가서 쏘다녔다. 교토에도 갔었고 나라에도 갔었다. 아시노고(하코네 산에 있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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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서 청록색 물빛을 언제가지나 내려다보고 서 있었으며 요코하마 부둣가에까지 가서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항구에는 어마어마한 배들이 떠 있었다. 상선이 있었고 여객선도 있었다.
인실은 작은 항구, 적옥이란 빨간 네온의 카페가 있던 그밤의 항구를 생각하고 검정옷에 창백했던 명희를 생각햇다. 기차를 타고 전차를 타고, 마치 피리어드를 찍는 것처럼 레일을 지나가는 진동의 하나하나, 그것은 일각일각 시간에서 탈출하고 있다는 실감이었다. 걷는 것도 그러했다. 한발한발 내디딜 때마다 시간을 잡아먹으며 앞을 향해, 아무튼 어느 정거장이든 내리게 될 것이라는, 희미하지만 그것은 희망이었다. 얼마간의 안도감이기도 했다. 길고 긴 동경 체류, 기간은 몇 개월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인실에게는 십 년 백 년의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백화점에서 나왔다. 해가 떨어지고 밖은 황혼이었다. 해 지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거리는 사람에 밀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네온사인과 불빛, 거대한 도시는 무지개에 싸인 듯 아슴아슴하다가 황혼이 차츰 짙어지는 데 따라 찬란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완숙한 과일의 방향과도 같고 어쩌면 부패하기 시작한 향기와도 같은 도시의 입김을 풍기면서,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금빛 황혼의 사람 같았다. 설레이면서 밤을 맞이할 차비를 하고 꿈꾸듯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기쿠치 간의 진주부인을 소망하는 여자가 걸어가고, 베를렌의 번역시에 홀린 청년이 걸어가고 달콤한 허무주의 달콤한 비관주의, 도시의 황혼은 그리고 여름의 황혼은 미풍에 흔들리는 가로수와 더불어 달콤하고 슬프게 사람들을 매혹한다. 도시의 애수, 영광과 자부와 그리고 착각, 어둠이 밀려오면서 네온사인은 한결 선명해진다. 별보다 가깝고 별보다 미려하고, 나폴레옹도 아이스크림의 맛은 모를 것이다! 새삼 그 말을 상기하게 하는 네온사인. 인실은 가로수 밑에 서 있었다. 모던하고 스마트하고 엑조틱하고, 비록 영화 간판 같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만끽하고 지향하는 무리와는 동떨어져서 착각이나 환상의 여지가 없는 부른 배를 안고 인실은 동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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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이 군사, 토목, 법제에 주력하면서 정복자의 면모를 약여케 한 바 있었고 특히 토목은 그 규모가 거대 웅장하여 대로마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사위를 진경케 했듯이 관동대진재 이후 일본의 토목은 실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섬나라 일본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대국 청나라를 누르고 노랑머리 파란눈의 외경하여 마지 않는 배인의 나라 러시아르 견제하고 아시아에서 강국으로 도약, 천재일우의 시기를 맞이한 그들, 그들이 즐겨 썼던 촌스런 말 중에 일등 국민이라는 것이 있는데, 소위 일등 국민에 걸맞게, 아니 그 이상으로 외모를 갖추어야겠다는 욕망이야 새삼 말할 나위 없는 일, 그야말로 미증유의 마천룬들 아니 세우고 싶었겠는가. 게다짝 시고 안짱걸음 걸으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 살피듯 땅을 보고 걷는 그들 습성일지라도 새로운 것이면 모조리, 큰 것이면 모조리 개미떼같이 달려들어 건설한 도시, 농염한 시다마치 무스메(에도에 사는 하층민의 딸)나 규범에 투철한 하가쿠레부시(충성을 맹서한 무사) 같은 존재는 잔잔바라바라(칼싸움) 영화라는 무대가 있기는 하되 안방에 모셔진 불단처럼 에도(동경의 옛 이름)의 자취를 걷어낸 동경에는 파리가 있었고, 런던·뉴욕도 있었다. 루바시카의 모스크바도 있었다. 유행이라면 무엇이든지 사회 전반에서 현기증 나게 탈바꿈을 거듭하는데, 환락가·유흥가·연예계는 구미를 뺨칠 만큼 개방적이며, 성냥갑이나 포스터의 나체 그림은 그들의 전통인 남녀 혼욕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에로구로(선정적이고 괴기적인)의 엔본(원본: 값싼 책)이 홍수같이 쏟아져나오고 신바시의 게이샤(기생)가 사교댄스를 추는 것도 꽤 오랜 일이며, 졸부의 부인들은 골프를 치고, 하기는 도시건설은 진재 이전에도 샐러리맨 일만 명을 수용하고 하루 출입자가 삼만이 넘는다는 매머드 마루비루를 세웠으니 일본인들의 팽창주의거대 일변도, 물론 그것은 도시나 문물에 한한 것은 아니었고 군국주의를 관통하는 주된 흐름인 동시에 세계로 뻗으려는 그들의 야망이었다. 한편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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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 죽이는 데 아이쿠치(비수)가 필요 없다. 즉, 장마가 계속되면 노가다는 비수 없이도 굶어죽게 돼 있다는 뜻인데, 도시 뒤켠에는 그같은 계층이 있고 농촌에서는 소작료가 밀렸다 하여 농가의 농기구에 빨간 딱지가 붙는 현실, 정쟁이 있고 암살이 있고 쿠데타의 기도가 있고 계급투쟁·노동쟁의·여성해방의 운동이 있고, 노동자 열 명의 이십 년 월급조다 훨신 많은 돈을 방 하나 치장하는데 스는 나리킨(성금: 벼락부자)이 있고,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일본의 얼굴이 뿐이다. 분을 바르건 성형수술을 하건, 보기 흉한 종기에는 반창고를 붙이건 잘라내버리건 그것은 얼굴에 다름없다. 천하무적의 군비, 일본의 심장은 그것으로 뛰고 있는 것이다.『삼국유사』에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벼랑의 철쭉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읊은 「헌화가」, 겨울 참나무 같은 노인의 무사한 멋에서 연상되는 것은 출진하는 남편 투구에 향을 사르는 일본 여인이다. 생과 사를 초월한 멋에 얼핏 공통점이 있는 듯싶지만 우리는 향을 사르는 여인에게서 전쟁의 미학을 보는 것이다. 아무튼 모집으로 끌려온 조선의 수많은 백성이 무서운 채직 아래 이승과 저승을 헤맬 때, 물론 그들은 동경의 찬란한 불빛을 알 턱이 없고 일본의 힘을 과시하는 도시를 본 적도 없고 환락가의 지분 짙은 여자웃음 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 오지의 탄광촌 바라크에서 꿈도 없는 지친 잠자리의 그들은 일본의 힘을 채찍에서 느끼고 목검에서 느낄 뿐 더 이상 죽여야만 할 기도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동경 유학생들의 동경을 바라보는 심회는 어떠했을까? 모집으로 끌려온 노동자와 동경 유학생, 사정이 다르다. 사정이 다른 정도가아니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지금은 여름방학이어서 대부분 조선으로 돌아갔을 테지만 더러 남아 있는 사람 중에는 적지 심장부 동경 거리에서 휘청거리고 있을 유학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력이건 두뇌건 혹은 문벌이건, 그들은 선택받아 이곳에 왔다. 희소가치의 존재로서도 그들의 자긍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긍심은 동경에서 온전했을까? 이조 오백 년 차별 대우를 뼛속깊이 맛보아야 했던 서출들처럼 이들은 동경 땅에서 뼈에 사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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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차별 대우를 어떻게 감내했을까. 사사건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일각일각 부딪치는 것은 내 땅을 빼앗고, 내 존엄성을 빼앗고, 뿌리를 뽑고 짓밟는 그들 일본의 실상을 동경 유학생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그 힘에 경도되어 칼을 꺾으며 경의를 표했을까? 거대한 힘에 공포를 느꼈을까? 아니면 이를 갈고 증오했을까? 부러움, 모멸감, 내일을 기한 인내심? 어쨌거나 명분에서 따지자면 그들은 민족에 대한 배신, 내 백성에 등을 돌리고 왔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으리라. 그들의 대부분이 출세 지향이었으니까. 일본 치하의 출세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조선에서 종래의 지식인, 지도적인 지식인이었던 선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 자리를 이어받을 동경유학생들, 그들의 갈등과 고뇌는 개인적으로 비극이지만 그것은 또 조선 민족의 비극이다. 합리주의적 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묻혀올 일본의 가치관이 역사를 난도질하고 민족정신을 파괴할 위험 부담은 심각하다. 그 맥락은 후일 오랫동안 스며들어 자기 부정의 자해 현상으로 조선 백성은 시달리게 될 것이다. 사실 엽전이라는 자학은 유학생 사이에 팽배해 있고, 생업이 없이도 살 만한 계층에서는 쉽사리 댄디즘의 무풍지대로 도망치고 학문은 어디 산 홍차, 어디 산 양복지의 값어치로 전락했다. 또한 어느 무리는 반일의 거점을 사회주의로 찾을 수밖에 없었고, 또한 어느 무리는 계몽주의에 의거하여 기독교와 연합하면서 우리것을 파괴하는데, 그것은 실로 일본이 바라는 바이다. 또 이들은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어느 무리는 미래의 관직을 꿈꾸며 육법전서를 맹렬히 들이파면서 기회 불균등을 한탄한다.
동경 거리는 아니 신주쿠의 거리는 이제 어두워졌다. 인실은 걸음을 옮긴다. 다리가 천근같이 무거웠다. 서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하였던 육체가 갑자기 그에게 압박을 가했다. 아무곳이든 주저앉고 싶었다.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검정 바탕에 희게 뽑은 우동이란 글시의 노랜(상점 입구의 처마 끝이나 점두에 치는 막)이 눈에 띄었다. 그곳으로 들어간 인실은 자리에 앉는다. 빈 자리가 더러 있었지만 손님은 많은 편이었다. 대개가 젊은 사람들이었다. 우동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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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을 시킨 인실은 깍지낀 손 위에 턱을 올려놓고 멍하니 벽면을 바라본다.
“자아 드십시오.”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우동 그릇을 탁자 위에 놓으며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고마워요.”
무뚝뚝하고 드센 조선 사람과 달리 일본의 상인이나 음식점 종업원은 매우 친절하고 공손한 것이 특성이다. 손님 역시 그런 친절에 대하여 고맙다고 하는 것은 관례다. 우동에서 파 냄새 어묵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인실은 다리가 무거웠을 분만 아니라 몹시 시장했다. 아침에 찬밥을 물에 말아서 단무지 몇 쪽하고 서너 술 먹는 둥 마는 둥 했기 때문에 우동을 내려다보는 것이 조금은 행복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는 선뜻 젓가락을 들지 못한다. 전에는 그랬었다. 동경 와서 공부할 무렵, 혼자 밥을 먹고 있노라면 괜히 코허리가 시큰해지며 뼈에 사무치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곤 했었다. 강한 성격에 좀처럼 그런 감정에 빠지는 일이 없었는데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면 겨울 벌판을 걷듯 외로워지는 것이었다. 그 후 형무소에 있을 때 인실은 음식을 대하면 외로운 것과는 사뭇 다른, 먹는 행위 자체가 비천하기 그지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수구를 들락거리며 밥풀을 주워먹는 한 마리 쥐 같았고 자신이 쓰레기가 되어간다는 기분이었다. 고문을 당하고 왜경한테 심한 욕설을 들었을 때도 인실은 자신이 비천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동경에 와서 거처를 정하고…… 비천하다든가 외롭다든가, 그것이 모두 감정의 사치라는 것을 인실은 깨달았다. 밥을 먹는다든가 몇 끼를 굶는다든가, 그런 일들은 그냥 무의식으로 흘러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의식, 그것에는 얼마간의 자학도 있었으리라. 인실은 천천히 우동을 먹기 시작한다.
“그거 다 뻔한 얘기야.”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조선말이었다.
“오나가나 문제는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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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인실은 관심도 없었다. 한참 후 그들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사람들의 웃음 소리였다. 인실은 젓가락을 놓았다. 절차 하나가 끝나 홀가분한 기분이다. 그새 손님들은 많이 빠져나갔는가 가게 안이 넓어 보였다. 앞치마 두른 남자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인실은 좀처럼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등뒤에서 조선말로 얘기하던 남자, 청년들이 일어서는 기척이다. 그들은 인실에게 등을 보인 모습으로 우동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흰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인실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학생 중 한 사람이 돌아보았다. 순간 인실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환국이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듯 그러나 그는 급히 인실에게 다가왔다.
“아주머니!”
환국은 저도 모르게 인실의 팔을 잡았다. 그는 인실을 보고 놀랐다기보다 인실의 임신한 모습에 놀랐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팔을 잡은 것은 인실의 위태로운 모습 탓이었다.
“이 팔 놔요.”
인실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우동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간다. 결코 사람을 잘못 본 것도 착각도 아니라고 환국은 생각했다. 그는 똑똑히 조선말로 이 팔 놔요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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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장 영광의 부상

이리저리 뒤치락거리며 잠을 청했으나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환국은 일어나 앉았다. 담배를 붙여물고 보다만 화집을 끌어당겨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들여다본다. 현란한 꿈 같은 색채의 세계, 환국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이 좋았다. 칸딘스키가 추상화의 이론가라는 것은 그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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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그의 초기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주변에 별로 없는 것같았다. 사철 눈과 얼음에 덮여 있을 것 같고, 색채가 빈곤할 것만 같은 러시아에서 어떻게 현란한 이런 색채를 빚어내었는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볼 때마다 환국은 신비스러움과 동경을 느끼는 것이었다. 친구 중에는 예술 자체에 대한 것보다 시인 에세닌과 무희 덩컨과 무회 덩컨과의 연애에 흥미를 갖듯, 칸딘스키와 니나와의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환국은 어쩐지 그것이 역겨웠다. 속물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여전히 잠은 올 것 같지 않다. 밤은 깊어가는데, 캔버스 앞에 서본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쳐보듯 서 있다가 나이프로 물감을 이겨 캔버스에 찍어 발라본다. 오랫동안 그는 그러고 있었다. 결국 새벽녘에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환국은 겨우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창문이 훤했다. 비는 멎었고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새벽에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밤을 꼬박 지샐 뻔했다. 장지문은 열려진 채, 복도 너머 유리문도 열려진 채였고, 모기향은 모두 재가 되어 토막토막 접시에 떨어져 있었다. 뒤뜰은 여남은 평쯤 될는지, 하숙집 노인이 잘가꾼 수목은 싱싱했다. 이끼 낀 돌도 파아랗게 살아나 시원해 보였다. 수목에 맺힌 물방우링 햇빛에 반짝이곤 한다. 비가 멎은 지는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다. 물받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똑! 똑! 들려왔다.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환국은 담배를 붙여물면서 재떨이를 끌어당긴다. 계속 뭔가에 의해 강타를 당하는 느낌이다.
‘그럴 수가 잇나, 그럴 수는 없다!’
형용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 치민다. 이성으로는 다스려지지 않는, 왜 그런가조차 알 수 없는 기분이다. 이 팔 놔요, 그것은 결코 유인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유인실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환국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끔찍한 일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 끔찍한 일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인실의 임신과 관계가 있었다. 이 팔 놔요, 비정한 그 목소리는 임신에 얽힌 어떤 사정 때문일 것이라는 추적, 그럼에도 불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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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환국은 궁금증이나 걱정보다 강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인실아주머니의 배가 불러야 했나!’
인실은 결혼을 해도 안 될 사람이요, 아이를 낳아서도 안 될 사람처럼, 그럿은 기정사실이었던 것처럼, 신성불가침의 여인으로 생각했던 것을 환국은 그것이 깨어지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풋사랑이라고나 할까, 청춘의 상흔이라고 해야 할까, 양소림의 모습과 손등의 그 혹은 연민과 혐오감과 자책감으로 환국의 가슴속에 아직 남아 있다. 박외과 의원에 있던 허정윤가 결혼하여 딸인지 아들이닞 아이들 낳았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양소림을 생각할 때마다 환국은 지금도 썩 유쾌한 기분일 수는 없었다. 사랑을 고백한 것도 아니었고 자기 감저어에 확신도 없는 채 소림의 불구를 목격했다는 것은, 그리고 혐오감과 함께 가책과 연민 때문에 갈등했었던 기억이 환국의 청춘을 조그은 병적으로 물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들에게 무관심한 것이 양소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명의 여성, 환국의 의식 밑바닥에는 어머니인 서희와 임명희, 유인실, 이 빼어난 세 명의 여자가 있었다. 서희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혈육으로서 보다 밀착된 감정이었지만 임명희와 유인실은 타인이면서, 타인이기 때문에 거리가 있었고 그 거리 때문에 오히려 수수께끼 같았으며 신기루와 같이, 신비스러운 대상으로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그 비슷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수는 없다!’
배가 부른 모습, 삭막한 얼굴, 차갑게 빛나던 눈동자, 어젯밤에 우동집에서 만난 인실은 쉬르레알리즘의 그림같이 괴이하고 비현실적이며 먼 피안에 서 있는 목각인형 같기도 했다. 만난 그 순간보다 헤엉진 뒤, 그 만남을 상기할 때 도무지 그것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다시 시작해본다. 그러나 시작도 끝도 없는 일이었다. 이팔 놔요, 하던 타인의 목소리와 임산부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환국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재빠르게 이불을 개켜놓고 밖에 나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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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를 하고 들어왔다.
“사이상 식사는 어쩌실래요?”
하녀 오하츠가 와서 물었다. 머리에 빗질을 하다 말고 시계를 본다.
“벌써 이렇게 됐나? 열한시가 지났어.”
“잠꾸러기.”
오하츠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환국의 나이 또래, 낯빛은 검고 동그란 눈에 얼굴도 동글동글했다.
“그런 말 말아요. 새벽녘에 잠이 들었거든.”
“그래요? 난 그때 일어나 있었어요.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에 잠이 깼는데 굉장히 무서웠어요.”
“왜?”
“하늘이 우르르 쾅쾅, 번개가 번쩍번쩍.”
“어떡한다?”
“뭘요?”
“열한시에 아침 먹기도 뭣하고 기다렸따가 점심이나 먹지 뭐.”
“그래요? 그럼 그럭하세요.”
오하츠는 방문을 닫아주고 갔다. 환국은 휴지로 빗을 닦아 서랍속에 넣고 복도로 나온다. 소나무 밑둥 가까운 곳에 함지만한 크기의 앙증스런 연못에 붕어 두 마리가 놀고 있었다. 둘레에 이끼 낀 작은 정원석을 배치하고 곰상스럽게 만들어놓은 연못은 소일거리가 없는 이 집 노인의 손장난이었던 것이다.
‘내 자리는? 이게 무슨 자리지?’
인실과의 만남은 그렇다 치고 요즘 환국의 주변 사정은 어젯밤 일에 못지 않게 우울한 것이었다. 우울한 정도를 지나 어떤 위기의식으로 환국에게 육박해오고 있었다. 가정부의 이름으로 거금을 강탈해간 진주의 사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윤국이와 마찬가지로 환국은 부친이 관련됐을 거을 직감했다. 그러나 환국은 윤국이처럼 피가 끓었다기보다 부친을 연상한 그 의식 자체에 깊은 경계심을 가졌던 것이다. 부친을 연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을 위험 인물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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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했다. 만일의 경우 자신이 경찰관의 취조를 받게 된다면, 아니 급모다 고문을 당한다면? 고문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환국은 견디어낼 용기쯤은 있다고 생각했다. 두려운 것은 자기 심중이 노출되지 ㅇ낳을까 그것이었고 저도 모르게 취조하는 상대가 자기 심중을 포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결국 자기 능력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것과 그 사건이 끝내 미국으로 묻혀지기를 바라는 소망, 지나치게 경계하는 그런 심리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환국의 긴장을 가중하게 했다. 신간회 해산, 예맹 검거, 최근에 있었던 중국인 습격 사건 등, 그러한 일련의 사태를 동경에서 바라보는 환국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의 포위망이 좁혀져가고 있는 것만 같았고, 뭔지 모르지만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게 했던 것이다.
방학이었지만 환국이 동경에 남아 있는 것은 부친 길상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이쪽 사정이 복잡하니까 돌아올 것 없고 대신 송영광을 찾으라는 인편의 전갈이 있었다. 지난 초봄, 그 사건이 있기 직전에 환국은 동경으로 왔다. 떠나올 때 부친은 송영관을 찾으라는 당부를 했다. 분위기를 보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는데도 또다시 전갈을 받고 보니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은 송영광이 송관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환국은 송관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송관수가 진주 집에 드나든 일이 있었고,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형평사운동, 과거 의병으로 산에 들어간 일, 남들이 알고 있는 정도는 다 안다. 그러나 환국은 형평사운동이 관수가 하는 일의 전부가 아닌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하튼 부친이 시키는 대로 환국은 고향으로 가지 않을 외적 구실은 어느 정도 있었다. 그 동안 환국은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지난 봄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갔다. 해서 목적이나 선택의 변경에서 오는 준비라 해도 좋고, 화구를 메고 교외로 나다니며 스케치를 하는 행위, 하고 싶어서 하고,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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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지만 방학을 이용해 한다는 구실도 되는 것이다. 미술학교로 옮기게 된 데는 부친 길상의 도움이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려면 자유업을 가지는 게 유리하지요. 행동도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을 거구, 내 기분은 만일 환국이가 망설이고 있다면 용기를 주고 권하고 싶을 정도요. 소질이 있는 것도 다행이며 마음을 굳힌 모양이라 당신도 응낙하는 게 좋을 거요.”
“하지만 그 아이는 이 집을 이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없는 거요. 조만간, 우리 민족에게 급박한 사태가 밀려올 것이오. 앞으로 세상은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변할 것인즉, 그 점을 명심해야 하오.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환국의 일본 유학, 그것이 마땅치 않소. 환국은 중국에 가서 공부를 했어야, 당신이 그 점만은 양보하지 않을 것은 알지만.”
결국 서희는 길상에게 설득당한 듯했으나, 그러나 서희는 자기마음속에서 납득을 하지 않는 한 굽힐 여자는 아니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자유업이란 말은 다소 효력이 있었고 중국 유학 운운은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런 것보다 서희는 환국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았다. 확고한 것이라면 반대는 모자간 서로 상처를 남기는 결과밖에 되지 못한다. 서희는 자기 고집을 꺾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설득당하기보다 남편에게 설득당했다는 편이 어미로서 위신의 훼손도 없을 것인즉, 길상도 모르지는 않았다. 서희가 남편에게 복종하여 고집을 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상은 서희의 현명함을 믿었고 꺾이지 않는 성품을 사랑했다. 그의 인내를 고맙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환국은 큰 마찰 없이 숙원을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앞날의 방향이 달라졌다 하여 환국의 유학 생활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동안 그는 계속하여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법서 대신 미술에 관한 서적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정도였다. 노부부가 사는 조촐한 하숙집, 그것도 하나래(별채)여서 거처는 늘 조용했고 쓰는 공간도 뒤뜰을 합하여 넓은 편이며 아틀리에는 아닐지라도 불편한 것은 없었다. 먹고 살기에 어려움이 없는 노부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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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출신으로 상당한 교양이 있었으며 가족 관계는 잘 알 수 없었지만 허전하여 한 사람쯤 하숙생을 둔다는 취지였으므로 환국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잘생기고 점잖으며 예의바르고 깔끔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하며 노부부는 졸업할 때까지 있어달라 오히려 부탁을 했다. 동경에서의 환국의 신변은 단순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문제는 진주에 있었고 영광이를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하였다. 영광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경에 오면서부터 부산 P고보 출신의 유학생을 만나 수소문했다. 그들의 소개로 다른 대학, 혹은 전문학교에 있는 P고보 춠힌도 만났다. 그러나 영광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숫제 송영광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시일이 갈수록 환국은 초조했다. 자신이 없어졌다. 동경 넓은 바닥에서 영광을 찾는다는 것은 서울 가 김서방 찾는 것만틈 어려운 일인 것을 깨달았다. 과연 그는 동경에 있는가, 그것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름쯤 됐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름쯤 됐는지 환국은 화구를 메고 다마가와강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 말 좀 묻겠는데.”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다. 조선말이었다.
“혹시 최한국이 아닌지요?”
상고머리에 신색이 그리 좋아 뵈지 않는 중키의 충년이었다.
“그렇소만……”
청년은 갑자기 활기에 넘친 표정이 되어
“나 김수봉이다!”
“……?”
“모르겠나? 보통학교를 오학년까지 같이 댕긴 김수봉, 알겠지?”
“아아, 아!”
“알겠지?”
“그래 그렇구나! 맞아. 김수봉이다!”
“겨우 알아보네.”
활기찼던 표정이 갑자기 시들면서 서운해하는 기색을 나타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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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환국은 반가웠다.
“하기야 뭐, 자네하고 나하고는 처지가 다르니까 쉬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해. 모르고 지나쳐도 할 수 업는 일이지.”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그래 여기는 언제 왔나?”
“아마 자네하고 비슷한 시기에 왔을 거다.”
서운해한 것을 넘어서 김수봉 얼굴에 비애 같은 것이 서린다. 환국은 그것을 느꼈다.
“뭘 하나 지금?”
“……”
“학교에 다니나?”
“학교? 청강생을 학생이라 할 수 있는지, 하기는 저세상 학생이라 하긴 하지. 하하핫핫…… 하하하……”
비애는 무산되고 김수봉은 쾌활하게 웃었다.
“하여간에 반갑다. 어디 가서 쉬면서 얘기하자.”
“그랬으면 좋겠는데 글쎄……”
머뭇거린다.
“일행이 있어서 오늘은 그만, 다음에 만나지 뭐.”
김수봉은 뒤돌아보았다. 환국이도 그의 시선을 따라 수봉의 등뒤를 바라보았으나 일행이라 할 만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아싸. 높은 하늘에 구름만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강기슭에 하얀 물새만 몇 마리 머물고 있었다.
“일행도 함께 가면 될 거 아닌가?”
“아니, 그럴 처지가 못 된다.”
“애인하고 함께 왔어?”
환국은 웃으며 말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라.”
수봉도 픽 웃었다.
“그럼 잠깐 기다리게.”
환국은 수첩을 꺼내어 재빠르게 자기 하숙집 주소를 적는다. 그리고 수첩에서 적은 것을 뿍 찢어 김수봉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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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내 있는 곳 주소야.”
수봉은 그것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그보다 밖에서 한번 만나자. 만날 날짜를 약속해서.”
“그럴까?”
“언제면 좋겠나?”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내일말고…… 수요일이면.”
“나는 언제든지 좋다. 방학이니까.”
“참 방학인데, 왜 안 갔나?”
“볼일이 좀 있어서.”
시간과 만날 장소를 정하고 환국은 김수봉과 헤어졌다. 그와 헤어져서 한참 지난 후 환국은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진작 그 생각을 왜 못했나!’
수봉이 부산 P고보와 관련이 있는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보통학교 오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해간 김수봉은 그 후 P고보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기억이 났던 것이다.
‘수요일에 만날 건데 뭐.’
그러나 불안하고 초조했다. 손안에 든 물고기를 놓친 그런 기분이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지만 약속을 지키리라 믿어도 되는 것인지, 사정에 의해 그가 못 올 경우, 명심코 주소를 들고 그가 만나러 오지 않는 한 환국은 김수봉을 찾아갈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영광이를 찾아야 한다는 문제가 그를 뒤쫓고 있는 만큼 어떤 강박과도 같은 심리, 그러나 설사 김수봉을 만난다 하더라도 수봉이 영광을 알고 있고 영광을 찾을 단서를 갖고 있을 것이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약속된 날 약속된 시간까지 환국은 초조해 있었다. 그런데 김수봉은 송영광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식은 왜 찾으려 하나?”
“그 사람 부친하고 내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한동네서 자랐거던.”
“그거야 뭐 흔히 있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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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광이 그 사람 부친께서 날 찾아오셨다. 꼭 만나서 전해달라 하시면서 돈을 주시더군.”
환국은 신중하게 부친이 개입되지 않는 선에서 말하는 것이었고 수봉은 뭔지 모르지만 심각한 표정이다.
“돈만이라면 자네편에 보내도 되겠으나 그분 말씀이 꼭 만나라, 아주 간곡한 부탁을 하셨기에.”
“하기는, 왜 안 그러겠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엉망이다.”
하면서 수봉은 영광과의 관계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영광이는 내가 어릴 적부터 서로 아는 사이다. 우리가 진주 있을 때 이웃에 살았거든. 그래서 집안 내력도 잘 아는데, 부산으로 이사한 후 다시 영광이를 만난 것은 고보 삼학년 때, 그 자식은 일학년이었고, 영광이네 집은 부산 온 후 수도 없이 이사를 한 모양이고. 옛날의 알음으로 우리집에 세들어서 한 일 년 남짓 살았다. 처음 부산에 왔을 때는 점방도 장만하고 집도 있고 괜찮게 살았다 했는데, 영광이 아부지가 자네도 알겠지만 왜경에게 쫓기는 몸이고 보니…… 영광이하고 나하고 학년 차이는 있으나 나이는 한 살밖에 차이가 없다. 아마 자네하고는 동갑일 게다. 고보에 늦게 들어왔고 또 무슨 일 때문인지 일 년을 구워먹었다 하고, 그나마 제대로 했으면 금년에는 졸업을 했을 텐데…… 온통 망가져버렸다. 사람될까싶지도 않고.”
환국은 여러 가지 생각을 머릿속에 굴리면서 서두르지 않았다. 평소 침착한 상태로 돌아가서 수봉의 얘기만 듣고 있었다.
“나도 집안 형편이 뭐 그렇고 그런 정도라서 대학 간다는 것은 바랄 수 없고 집에서는 졸업한 뒤 금융 조합에 취직해서 장가나 가라, 그러나 무턱대놓고 배를 탔지. 설마 무슨 수가 없을라구, 혈기만 믿었다. 말도 마라. 참말로 말도 마라. 조선서 고보 출신이면 그래도 괜찮다고들 하는데 일본서는 인간 쓰레기다. 조선서는 왜놈 종질한다고 손가락질하던 반도(고참 점원 혹은 책임자)는커녕 고조(심부름꾼) 자리 하나 내주는 줄 아나? 노동밖에는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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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없다. 공사판에서 벽돌 지고 모래 나르고 그나마 풀발선 오야지를 만나야 일거리도 얻어 걸리고 품삯도 제대로 받지. 일본서 조선놈은 사람이 아니다. 쓰레기지. 영국놈이 중국에 와서 저희들 술집에 중국인과 파리는 사양한다 그랬다지만.“
“돌아가지. 돌아가아.”
“오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
“그러면 지금도 공사판에 나간다 그 말인가?”
“지금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 우에키야(화원)에서 있었지.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는데, 하기는 공사판도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지만, 지금은 고물장수다.”
“구즈히로이(쓰레기 줍는 것)란 말인가?”
“아니, 제대로 차리고 다니면서 고맨구다사이(실례합니다), 고맨구사다시이.”
하다가 수봉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사람이 나오면 쓰지 않는 것 팔아라, 그거지.”
“그래, 그 편이 낫던가?”
“났지. 좀 유식하다는 게 밑천이 되고 동정도 받고, 그러나 무엇보다 자유스러우니까. 비굴해질 때도 많지만 누가 하라 마라 그런 소리는 안 듣지. 공사판에 모여드는 인종이라는 게, 그게 별의별 게다 있거던. 걸핏하면 아이쿠치 뽑아들고 생사를 겨루는가 하면 경찰의 끄나풀이 있고 아나키스트 공산당이 잇고 밥만 먹여주고 임금을 몽땅 말아올리는 조직도 있고, 노동이 고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 땜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판에서도 인종 차별, 지역적 감정, 인간이란 참말이지 어디까지 사악하고 악독한지 바닥을 모르겠어. 젊은 날의 꿈이라는 거, 그거 물거품보다 더 허망한 것이더라. 이 세상에 달콤한 것은 없다. 어디로 가나 그것은 없어.”
“그러면 돌아가아. 나 자신도 그래. 부모님 덕분에 유학이랍시고 와 있지만 허송세월이야.”
“안 돌아갈 거다. 청운의 뜻, 그 따위 어리석고 낭만적인 것, 이미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이건 내 싸움의 과정이다. 나, 나는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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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건 자네 개인적인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인 것인가?”
“실은 어느것인지 나도 몰라. 어쩌면 무작정 그걸 거다. 자네는 허송세월이라, 자네다운 말이지. 하지만 여기 와 있는 몇몇 동창들은 그렇지 않아. 판검사, 고등관, 그걸 잡은 듯 안하무인이다. 개새끼들! 왜놈한텐 발발 기면서 동족에게는 거만스럽게, 정말이지 테러라도 하고 싶은 심정 알겠나? 자넨 모를 거다.”
“더러 그런 사람도 있겠지. 자네가 그런 처지라면 어쩌겠나?”
수봉은 말문이 막힌 듯 환국을 쳐다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환국이 묻는 말엔 대답을 않고
“공산주의 한다 하고 사회주의 한다 하고 껍적거리는 놈들, 날 만나면 피해간다. 손 벌릴까 싶어. 그라고 내 해색이 초라하니까 그러는 거지. 참말로 사람 웃기는 거는 가시나들 끼고 댕기면서 천석지기 만석지기 부잣집 아들놈들 떨어진 내복 안 입고 카페 가서 고급술 마시면서 공산주의 한다는 거지. 허참.”
“그러면 나도 할말이 없다. 그는 그렇고 송영광이 그 사람의 근황에 대해서 얘기해주게.”
“그간의 사정은 알고 있나? 그러니까 조선에서 있었던 일.”
“자세히는,”
“그럼 그 일에 대해서는 말 안 하겠다. 그러니까 작년 늦은 여름이던가? 집에서 주소를 얻어 영광이가 날 찾아왔더라. 죽기 아니면 살기라 하면서, 꼴은 말이 아니고. 역전에서 왜놈하고 쌈박질을 했던 모양이라 유치장에서 하룻밤 잤다 하는데 이마에는 피멍이 들고, 원래 그 자식 성질이 과격하거든. 도둑질을 하든 강도질을 하든 조선에는 안 돌아간다 하길래 졸업을 눈앞에 두고 뛰쳐나온 심정을 모르지는 않으나 경솔했다고 나무랐지. 했더니 형이 내 입장이 되어보라. 뛰쳐나온 게 아니고 퇴학을 당했는데 어쩔 것이냐 하며 악을 쓰더라구. 하여간에 골치가 아프게 돼 있다. 머리도 좋고 인물도 훤하게 잘생긴 놈이, 자네가 만나보면 그놈 자식 상태가 어떤지 알게 될 거다. 측은한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때는 지긋지긋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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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에 만나봐야겠네. 지금이라도.”
“지금은 안 돼.”
“왜?”
“여기 없더ㅏ.”
“뭐? 어디 갔는데!”
“관서 지방에 일 나갔다.”
“일 나가다니?”
“노가다지 뭐. 전에 알던 오야지한테 붙여주었는데, 글세 얼마나 갈란지. 나하고 고물장사도 할 수 있고 전에 있던 우에키야에 말해 줄 수도 있지만, 그놈 자식 성질 콱 죽여야, 세상살이가 어떤 건지 알아야 그래야 제 명대로 살 거다.”
환국은 아직 송영광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광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닐 때의 초조함과는 달리 이제는 영광과의 대면을 걱정하고 있었다. 상대가 순순히 이쪽 호의를 받아줄 것인지, 상처투성이의 젊은 그가 어느 면으로 보나 우월해 뵈는 환국은 반발 없이 대해줄 것인지 그것은 매우 의심스러웠다. 사실 환국은 미리부터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환국은 노부부와 함께 식사를 한다. 점심상에 그들과 환국은 마주앉았다. 오하츠가 시중을 들었다.
“사이상 웬일이지?”
“네?”
환국은 아리요시 노인의 노처 오시마의 얼굴을 쳐다본다. 감색에 흰 무늬가 있는 가수리(붓으로 살짝 스친 것 같은 잔 무늬가있는 천)의 기모노를 단정하게 입은 오시마는 미소를 지으며,
“전에 없이 늦잠을 자고, 그것도 아마 열한시까지 잔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어젯밤, 새벽까지 잠을 못 잤습니다.”
“사내자식이 네모 반듯한 것도 좋은 건 아니지. 더러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피고, 사이는 너무 얌전해.”
아리요시 노인이 말했다. 칠십을 바라보는 노부부, 아리요시 노인은 깡마르고 안경을 썼고 오시마는 다소 비대했으나 흉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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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 깨끗하게 늙은 양주였고 건강한 것 같았다.
“여보, 그렇지도 않아요, 사이상은 술도 마시는 눈치예요. 담배도 피고.”
오시마는 영감이 환국을 비판한다 생각했는지 열심히 변호하는 표정이다.
“죄송합니다. 술 마시는 건 비밀이었는데 오하츠가 일러바쳤군요.”
“일러바쳤다기보다,”
오하츠가 변명하려 하자
“오하츠, 걱정할 것 없다. 사이가 술을 마신다니까 한결 맘이 놓이는구나.”
아리요시 노인의 말에 모두 웃는다.
“여보!”
“무슨 항의가 또 남아 있소?”
아리요시 노인은 오싱코(소금에 절인 배추에 왜간장을 친 것)를 사각사각 씹으며 노처를 바라본다.
“그게 아닙니다. 사이상은 우리 다미오를 많이 닮았어요. 당신은 그리 생각지 않으세요?”
“당신 눈에는 사이가 다미오 같은 추남으로 보입니까? 큰일났군.”
“그건 너무 심합니다. 우리 다미오도 그만하면 괜찮지요. 사이상만큼은 아니지만, 저는 성격이 닮았다 싶었습니다.”
“다미오가 누굽니까?”
환국이 물었다. 오시마가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 손자라오.”
“그런데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까요?”
“여기 없으니까.”
입속에 밥이 든 채 아리요시 노인이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환국에게 오시마가 설명해준다.
“지금 그애는 영국에 가 있어요. 유학간 거요. 사이상보다 두세 살위, 스물넷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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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멀리 보냈느냐 그 얘기지? 누구나 그런 얘기 하지만 사정이 있어요. 그애 아버지가 죽은 지 십오 년, 다미오가 아홉 살 때 죽었어요. 아카몬(동대의 별칭) 출신으로 장차 교수나 문사로도 대성할 거라 주위에서들 그랬지. 영문학이 전공인데 그애는 영국으로 유학하고 싶어했으나 외아들이어서 우리도 반대했고 본인도 용기가 없었던 것 같았어. 그러고는 세상을 다 못 살고 갔으니 손자에게나마, 그리 된 거지 뭐.”
오시마는 담담하게 말하다가 끝에 와서 흐지부지 끊었다. 아리요시 노인도 표정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 순간 환국은 노부부의 외로움이 가슴 저리게 전해져왔다. 여태 손자가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도, 자기에게 졸업까지 있어 달라 했던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엽차를 마신 뒤,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환국은 하나래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어쩔가 하고 그는 생각한다. 조찬하를 찾아가볼까 하다가 인실에 관한 것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또 자신이 없다기보다 인실을 위해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망설여졌던 것이다.
“사이상!”
오하츠가 불렀다.
“손님이에요, 사이상!”
“아아.”
환국은 일어섰다. 뒤뜰을 돌아 현관 쪽으로 나갔을 때 오하츠는 환국을 힐끗 쳐다보며,
“어딘지 좀,”
머뭇거리듯 말했다.
“뭐가?”
“이상한 사람 같아요.”
“무서운 사람이야?”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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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 뵌단 말이지?”
오하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라한 것하고 이상한 건 상당한 차이야.”
환국은 수봉이 찾아왔을 거라 생각했다. 과연 수봉이었다. 그는 담벽에 박쥐처럼 붙어 있다가 문을 열고 환국이 내다보자 허겁지겁 다가왔다.
“나하고 가주어야겠다.”
“하여간 잠시 들어와. 나가는 건 어렵잖으니까.”
“그게 아니다. 사정이 바쁘다.”
일상복인 듯 두 번 만났을 때보다 수봉의 차림은 초라했다기보다 남루했다. 낯빛도 나빴고 몹시 긴장해 있었다.
“영광이 때문이다.”
‘사고가 난 게로구나!’
비로소 환국은 깨닫는다.
“잠시만 기다려.”
방으로 돌아온 환국은 책상 서랍 속에서 돈을 꺼내어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서둘러 나왔다.
“가자.”
수봉의 걸음은 빨랐다. 그를 따라 환국이도 걸음을 빨리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다 죽게 됐다!”
“뭐라구?”
“다 죽게 됐다!”
“우선 병원에 떼메다놓고 이리로 달려왔다.”
“다 죽게 되다니, 왜?”
“그런 설명할 새 없다. 어서 가자!”
전차를 타고 또 갈아타고 하는 동안 수봉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어젯밤 열두시가 지난 뒤 송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수봉은 또 사고쳤구나!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데다 입고 있는 옷이 찢기고 얼굴에는 찰상, 꼴을 보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수봉이 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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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사는 다다미 석 장짜리 방으로 들어선 그는 이유 없이 소리 내어 웃다가 하는 말이 술을 사달라고 했다.
“미친놈, 지랄하네. 돈 벌어왔으면 니가 술을 사지, 내가 왜?”
했더니
“일이고 자시고, 끝내기 전에 와버렸으니 품삯이야 그냥 떠내려갔지.”
“왜 또 그랬어!”
“한 놈 때려눕히고 도망왔지 뭐. 그 새끼들 벌떼같이 덤벼들어서 있으면 맞아죽겠더라.”
“구제불능이다. 내가 뭐랬나, 참고 또 참아라, 쇠 귀에 경 읽기다. 이젠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
“그 새끼들 센진 어쩌구, 사람의 오장을 뒤집어놓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나도 후회하고 있어.”
“일본서 센진 어쩌구 한다 해서 시비했다가는 모가지가 열 개 있어도 못 당할 거다. 니가 센진이지 그러면 왜놈이더나? 쪽바리가!” 하다가 수봉은 홧김에 술을 사다 영광과 나누어 마신 뒤 과히 멀지 않은 곳, 빈민굴이나 다름없는 나가야 한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영광의 거처까지 데려다주었다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마신 술탓인지 몸이 찌뿌듯해서 아침 늦게까지 자리에 눈워 있던 수봉은 여자 비명에 놀라 일어났다. 나가보니 영광이와 함께 있는 여자, 수봉은 함께 있는 여자라 했다.
“영광씨가 죽어요! 사, 살려주어, 으 흐흐흣…… 매, 매를 맞고.” 부들부들 떨면서 여자는 울부짖더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뛰었지. 나가야 뒤켠에 있는 공지로 달려갔을 때 영광이는 엎드러져 있었고 이미 놈들은 다 달아나고 없었다. 참말이지 비참해서 두 눈 뜨고 볼 수가…… 얼굴은 묵사발이 되었고 안아 일으키는데 팔과 다리가 부러졌는지 제 마음대로 덜렁거리고, 마치 망치로 때려부순 장난감 같더라니까. 의식도 없었고 혜숙씨 말이 건장한 사내 세 놈이 와서 다짜고짜 공지로 끌고 나가서 팼다는 거라. 아마 영광이가 때려눕혔다는 그놈의 한패거리가 뒤쫓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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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보복을 한 모양이다. 그래가지고는 사람 될까 싶지가 않다. 살아도 병신이 되거나, 미친놈! 그렇게 타일렀는데 세상 무서운 주 ㄹ모르고, 아무래도 그 자식 일본 와서 죽으려고 작심을 한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영광을 메다놨다는 병원은 간다 부근에 있었다. 외과 전문의 개인 병원인데 규모는 꽤 컸다. 수봉과 환국이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복도 옆의 긴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됐습니까?”
수봉이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라기보다 소녀라 해야 할 앳되고(애띠고), 아이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연신 떨면서
“아무말 없어요.”
“내 만나보지, 의살.”
환국은 진찰실 문을 밀고 마치 쳐들어가기라도 하듯, 간호원이 뭐라 하는데 개의ㅏ치 않고 의사 앞에 섰다.
“환자의 보호잡니다.”
처방을 쓰고 있던 의사는 안경 너머 눈을 치뜨고 환국을 보았다. 사십대 중반쯤 깐깐하게 생긴 사내다. 그는 다시 처방을 쓰고 나서 간호원에게 그걸 넘겨주고 다시 환국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요.”
“어느 환자 말입니까.”
“송영광입니다.”
“아아, 그 조선인.”
했다. 그리고 의외란 듯 환국의 차림새를 살핀다.
“어떻습니까 상태가.”
“굉장히 험하더군 말짱 다 망가졌어요. 장출혈도 있고.”
“그, 그럼 살겠습니까!”
“수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수속이나 밟으시오.”
“네. 그,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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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환자하고 어떤 관계요?”
순간적으로
“사촌입니다.”
거짓말을 했다. 어떤 관계냐고 묻는 의사의 목소리는 헌병이나 경찰관의 목소리와 흡사했다.
“사촌, 사촌치고는…… 좋소. 나가서 기다리시오.”
진찰실을 나와 도어를 닫느 ㄴ순간 환국은 좀더 의사에게 매달려 봤어야 했지 않았을까 후회를 했다.
“뭐라 하던가?”
수봉이 물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군.”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하던가?”
“지장이 없으면 수술하려 하겠나. 기다려보자. 그리고 나는 사무실에 가서 수속을 해야겠다.”
수속을 해야 한다는 것은 돈을 낸다는 뜻이었다.
“고맙다.”
수봉은 환국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듯 떨고만 있었다. 수봉이 환국의 하숙으로 달려간 첫째 이유는 수술이든 입원이든 바로 그 수속을 밟기 위해서였고, 수속에 필요한 돈을 생각한 때문이다.
“혜, 혜숙씨”
수봉이 말에 여자는 당황한다.
“내 친구고, 또 영광이 친군데 최환국, 그라고 여기는 강혜숙 씨.” 하고 소개를 했다. 혜숙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최환국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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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장 영호네의 부탁

한복이가 거름을 넣고 반듯하게 다듬어놓은 남새밭에 김장 배추가 제법 손가락 하나 마디만큼 자라 있었다.
콩밭을 매고 고추를 널어 말리고 보리방아 찧고 빨래하고, 영호네는 왼종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짬을 내어 남새밭으로 나왔다.
“식구 한 줄고 보이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리겄네. 인호가 있었이믄 보리방아, 빨래, 집안일은 지가 하고…… 도모지 밭에 나올 새가 없다. 벌써 솎아야 하는 긴데 밭이 얼산 같구나.”
영호네는 중얼중얼 중얼거리며 배추를 솎기 시작한다.
“그 잘나빠진 데 보내느니 차라리 늙히 직이는 편이 나았제. 에미애비 잘못 만나……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카이 아이구 내 가심이야.”
계속 중얼거리는데
“우리는 이제 겨우 움이 트든데 너거들은 일찍 심었고나.”
“야?”
영호네가 얼굴을 든다. 천일어매가 광주리를 이고 밭둑에 서 있었다.
“야, 좀 일찍 심었십니다. 고추 따가아 오십니까?”
영호네는 호미를 든 채 땀에 젖은 머리칼을 팔로 걷어넘기며 말했다. 천일어매는 광주리를 밭둑에 내려놓고
“고추도 긑물인가, 별로 따낼 기이 없네.”
“그새 비가 잦어서, 아직이사 끝물이겄소.”
“하기사 노 비가 질금거렸으니, 날씨가 좋으믄 우떨란고.”
치맛자락을 당겨 땀을 닦다가 억센 삼베치마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일어매는 남새밭으로 내려온다. 천일이는 장가를 들어 아들 딸을 낳았고, 둘째 부일도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며 딸마저 시집을 보내버린 천일어매는 짐을 풀어버린 뒤, 해이해진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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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는지 부쩍 늙었다. 경우 없이 욕심 많고 행실이 개차반이던 마당쇠의 아낙이던 천일어매, 남편 생시 때는 그의 비행으로 남에게 누 끼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몰래 뒷감당을 하던 과묵하고 단정했던 아낙이, 그러나 그는 옛날과 달리 말씨며 옷맵시도 느슨했다. 밭고랑에 쭈그리고 앉은 천일어매는 영호네랑 함께 배추를 솎는다.
“그만두이소.”
“가만 있이믄 머하노.”
“왼종일 꿈제기고, 좀 쉬시야제요.”
“일이 보배라는 말도 못 들었나? 가만 있이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나서 병난다.”
“무신 걱정이 있어 병이 날 깁니까. 성자할무이는 할 일 다 하시고 자식들은 모두 자리를 잡았고 병날 일이 머 있겄십니까?”
“이 사람아, 그런 말 마라. 살고 보니 세상만사가 다 덧없고 허망하다.”
“무신 일이라도 있었십니까?”
“무신 일이 있기는, 그렇다느 ㄴ기지. 고추를 따고 있인께 불각처 눈물이 펑펑 쏟아지데.”
“자식들이 섭섭키 했는가배요.”
“그런 것도 아니다.”
“……”
“천일아배가 야속하더마.”
“참. 성자할무이도.”
“넘들한테는 못할 짓도 많이 했제. 하지마는 이녁 살았일 직에 제집이라고 욕 한마디 했이까 볼때기 한분 쥐어박았이까.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나를 그리 섬기겄노. 날 두고 먼저 간 기이 야속하고 괘씸타.”
“언제 일인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합니까?”
영호네는 웃는다.
“모리는 소리. 그기이 그렇지가 않다. 자식들 데리고 살아볼 기라고 동동거릴 때는 아무 생각이 없더마는,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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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이 옳다. 만가지가 다 논이 난다. 해지는 산을 보아도 그렇고 흐르는 강물을 보아도 그렇고 비감한 생각만 자꾸 든다. 나도 젊었을 직에는 참사하다는 말을 들었고 말 많은 노인네를 보믄 늙어도 나는 군담 같은 거 안할 기다 생각했다마는 어디 장담할 일이 있더나.”
“남 보기사 성자할무이겉이 만고에 걱정 없는 사람이 없다 카는데, 천일이는 집을 샀다문서요.”
“집이사 샀제. 가아는 이자 심이 피었네라.”
하는데 주름진 얼굴에 쓸쓸함이 감돈다.
“그라믄 진주로 가시지요. 도방이니께 이놈의 엉걸나는 농삿일도 안 하고 편하실 긴데.”
“그란해도 지가 맏이라꼬 어무이 모시야 한다 카지마는…… 내사 싫구나. 낯선 곳에 가고 접지 않다. 가보이 까깝해서 못 살겄더라. 여기서는 부애가 나믄 호미자리 들고 밭에라도 나오지마는, 그래 인호가 시집가고 나이 일손이 딸리제?”
“야.”
움질하다가 영호네는 힘 없는 대답을 했다.
“나도 제집아아 시집보내고 나서 우찌 그리 허전튼고, 밤에 잠이 안 오데. 그래 너거 집 인호는 시집가서 잘산다 카더나.”
“잘살기야 하겄소. 시부모가 안 기시니 좀 우떨란가, 하기사 머 손위 시누도 시모 맞재비니께 맘 고생이야 하겄지요.”
“살림 내준다 카든데, 안 그랬나?”
“말이 쉽지, 아직이사.”
영호네는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며 손등으로 땀을 닦느느데 그의 얼굴은 한순간 시들어버린 듯 해쓱해 보였다. 집안 내력 때문에 딸의 혼처를 찾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던 한복이 내외는 지난 늦봄, 중매장이 말을 믿고 인호를 통영에다 여의었는데, 설령 중매장이의 말을 믿지 못했다 하더라도 여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지만 총각은 조실부모하여 누이 집에서 자랐다 했고 인호의 곱절인 서른을 넘긴 나이에 매형이 저잣거리에서 크게 어물전을 하기 때문에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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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까지 함께 장사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혼인만 하게 되면 총각이 벌어놓은 돈이 있어 누이가 제금을 내어줄 것이라는, 대강 그런 얘기였다. 영호네가 나이 많다, 나이 그쯤 되도록 장가를 못 갔으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지 않겠는가 했을 때
“잘살고 못사는 것은 지 복이고, 우리 형편에 찬밥 더운밥 가릴수도 없으니 그렇다고 해서 여식아아를 집에 두고 늙힐 수도 없는 일 아니겄소.”
곰방대를 물고 앉아서 한복은 절망적으로 말했다. 결국 인호는 시집을 갔다. 그러나 인편에 들려오는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제금 내어준다는 것은 빈말이었다. 신랑된 위인도 불출인 데다 매형 가게의 일꾼에 불과했으며 인호 역시 바쁜 집안의 일손을 채우기 위해 데려갔을 뿐, 초혼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누이가 혹사하고 학대하여 견디지 못하고 여자가 달아났다는 얘기였다. 한복이 내외는 속았다는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쪽의 험이 아무리 큰들 살인 죄인의 손녀요, 거렁뱅이의 딸이고 보면 입 벌리고 말하기도 민망하였던 것이다. 이미 쏟아져버린 물,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거니와 주워담은들 별 뾰족한 수도 없는 터에 그런 처지나마 끝까지 살아주어 일부종사, 팔자치레나 해주었으면, 바라는 것 외 달리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도 영호네는 딸을 생각하며 울었다.
“이까짓 땅떼기 팔아부리고 고만 아이들 큰아부지한테 가서 사입시다. 만주로 가잔 말입니다.”
“무슨 소리!”
모깃불을 피다 말고 한복이는 화를 내었다.
“기대볼 곳 없는 사람들도 거산해서 만주로 떠나던데 우리는 그래도 시아주버니가 기시고 오라, 오라 하시는데 와 그캅니까.”
“실데없는 소리 마소.”
“제집아아도 그렇기 내던지부리고 다음의 우리 영호는 우짤 깁니까. 우리 강호 성호는 또 우찌 되는 깁니까. 근본 모리는 곳에 가서 자식들 사람 맨들어주어야 안 하겄소.”
“짚신도 제 짝이 있는데 대대로 만내믄 될 거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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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사하자는 사램이 없으니 하는 말 아니겄소. 영호를 저리 내비리둘라 캅니까?”
“넓은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많소. 우리가 가문 찾고 인물 찾을처지요? 어디 맘씨 착하고 불상한 아이 있이믄 데리오는 기지.”
“참 태펭이네요. 나도 머 낯선 대국땅에 가고 저버서 이러는 줄 압니까.”
“형님 있는 곳에 갈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기구마. 나는 고향에 뿌리박고 살 기요. 남이야 뭐라 하든말든 두 귀 막고 살기요.”
한복은 대못으로 쾅쾅 박아버리듯 완강하게 말했다.
“영호는 우짤 기고?”
천일어매는 배추를 솎다 말고 눈부시게 흰 나래를 부챗살같이 펴고 나는 백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슬에는 장개보내야 안 하겄나.”
“보내야 할 긴데.”
“매가리 없이 와 그라노. 말하는 데도 없나?”
“아무도…… 우리집 일이 늘 안 그렇십니까. 혼삿길 열기가 어럽지요.”
“우리도 혼삿말 있을 때마다 천일아배 성질 때문에 말이 많았네라. 그러이 부모란 자식 혼인길 막는 짓은 하지 말아야, 우떤 때는 양잿물 묵고 콱 죽고 저버도 자신들 앞길 생각해서……”
“성자할무이가 그러시믄 세상에 살고 저븐 사람이 있겄십니까?”
“남이 남의 사정 속속들이 우찌 알 기고.”
“그거는 그렇제요. 실은 영호아배가 탐내던 처니가 하나 있기는 있었는데.”
“그래?”
“내는 보지도 못했지마는.”
“근동 처니가 아닌가배.”
“야. 그랬는데 영호아배가 말을 끄내기도 전에 그만 시집을 가부린 기라요. 처니가 보통핵교도 나오고 집안이사 우리 청혼 거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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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지도 아니고 영호가 경찰에 붙잽혀가는 바람에 서둘지 않았더마는 낙심천만이제요.”
“그런 일이 있었고나.”
두 사람은 밭고랑을 옮겨 앉는다.
“이자 그만두이소.”
“아니다.”
“가서 쉬이소.”
“아지 rgo가 남았는데.”
천일어매는 웬일인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광주리 들고 고추밭에 나올 때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저기이 귀남애비 아니가?”
천일어매 말에 영호는 얼굴을 들어본다.
“새신랑같이 옷 갈아입고 어디로 가는고?”
“그렇네요. 밤낮 불머시마겉이 해가지고 댕기더마는 우짠 일이까요.”
“옷이 날개라 카더마는 채리고 나서니 제법 사람 같고나.”
올발이야 굵겠지만 명색이 모시라, 모시 중의 적삼을 입고 대님을 치고 흰 고무신에다 생고사 조기까지 입은 귀남애비는 어디로 가는지 두 활개를 치며 걸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천일어매가 말했다.
“죽은 우리 천일아배도 그런 말을 들었다마는 귀남애비 저 사람도 소다 소. 이마에 소 우 짜 붙이고 사는 사람이다.”
“글대ㅗ 성자할무이가 잘했이니 동네서 인심은 안 잃었제요.”
“내가 머 잘한 것도 없다마는 하도 남정네가 말썽을 피고 댕긴께 감당은 내가 해야지 우짤 기고. 밖에서 미련하믄 안에서 사지역지해야, 자식 키우는 사람이 남의 입질에 오리내리는 것도 좋지 않제.”
역지사지를 반대로 말한 것이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즉 이해한다는 뜻인데 위에 오르고 아래로 내려왔다 해서 뜻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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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남네 가아는 안 되겄더마. 소나아 제집이 똑같다. 며칠 전에 야단난 거 니도 알제?”
“머가요?”
“모리는 모앵이구나. 야무어매 기가 넘어서 까무라친 일이 있었다.”
“와 그랬던고요?”
“성환할매가 여러 날 꼼짝도 않고 있어서 야무어매가 가봤던 갑더라. 갔더니 복동이댁네가 와서 귀남네랑 함께 장독가에서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더란다.”
“두 사람이 친한갑십디다. 음식이 오고가고 하더마요.”
“짝짜꿍이 맞아서 요새 그러는 갑더라. 그래 야무어매가 들어갔는데 젊은것들이 오느냐는 말도 없고 씻죽하니 쳐다만 보는데 야무어매 심사가 뒤틀리더라는 거지. 성환할매는 마루 뒷문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고, 와 요새는 꼼짝 안 하느냐 함서 야무어매가 마루로 올라갔더니 성환할매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더라는 기지. 아이들은 강가에 갔는지 안 보이고. 했더니 자식들 해주는 밥이나 묵고 가만히 있일 일이지 늙어감서 와 설치고 댕기는지 모르겄다. 들으란 듯 복동이댁네가 말하더라는 기라. 그리고 또 하는 말이 남도 아닌 고몬데 설마 조카 밥 굶기직이겄느냐 하더란다.”
천일어매는 그날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설명을 했다. 괘씸하여, 또 입이 바른 야무어매는 마루긑으로 나앉으며
“군은 군대로 모인다 카더마는 자알 논다.”
하고 비아냥거렸는데
“오복이할매, 군은 군대로 모인다. 무신 말입니까?”
복동이댁네가 눈을 희뜨고 따졌던 것이다.
“몰라서 묻나? 가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다듬던 김칫거리를 획 팽개치고 발딱 일어선 복동이댁네는
“귀남네 나 간다.”
하고서는 삽짝을 쐥! 하니 소리를 내듯 나가버리더라는 것이다.
“남으 일에 와 챙견일꼬? 그런 챙견 할라 카믄 이녁들 집에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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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지.”
입이 툭사리같이 된 귀남네는 뇌까렸던 것이다.
“그 제집은 와 남으 집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 본 바 없는 것은 할 수 없다. 지가 성환할매 밥 한 끼 먹있다고 그런 소리 하나? 사람이 그라믄 못씬다. 듣자 카이 복동이 집하고는 서로 모리는 임석이 없다 카든데 어째 지 피붙이한테는 그리 야박하노. 내가 오믄 눈의 까시겉이 한께 안 오겄다 생각함서도 할매 불쌍해서 와봤더니 그 제집까지 장구 치고 북 치네.”
“그리 불쌍하믄 오복이할매가 돌보지 그러요.”
“그러라믄 못 그럴까봐? 돌보고말고, 너거들만 없이믄 집하고 땅하고 나 아니라도 동네서 돌봐줄 사람 얼매든지 있다.”
귀남네는 한풀 꺾이는데
“야무어매 그만 하소,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소.”
성환할매의 목멘 소리에 풀이 꺾였던 귀남네는
“누가 머라 캤나! 사람만 오믄 금세 우는 소리라 카이. 니 내노라고.”
쌀 속의 뉘같이 나타나게 한다는 뜻인데 귀남네는 중얼거리며 성환할매 쪽을 향해 눈을 흘긴다.
“세상에 니 겉으믄 누가 자식 낳을라 카겄노. 해도 너무한다.”
“누가 우쨌십니까. 자식 헌해하고 댕기는 어매도 잘한 거 없십니다.”
“너거들 헌해한다꼬? 니 어매 너거들 감싸노라 열두 폭 치마도 모잘랄 지경이다. 벌받을 소리 하지도 마라. 옛말에 공 안 든 자식덕보고 많이 묵은 놈이 악문은 더 한다 카더마는, 끼리끼리 자알 논다. 까마귀가 백로하고 놀겄나. 핏덩이 주워다가 금이야 옥이야 키워가지고 집 주고 땅 주고 장개들있더니 악독한 며누리 따문에 복동어매 명대로 못 살았고, 그 며누리년과 어울리서 어무이를 면박해?”
“억설하지 마소. 복동어매가 더러분 소문 때문에 죽었지 며누리 땜에 죽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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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헛소문을 누가 퍼뜨맀제? 시어무니한테 오굼 건 거는 누고? 동네에 놔두는 것만도 고맙게 여기 조신하기는커냥 넘우 집에 와서 노인네보고 머 어쩌고 어째? 니가 어무이를 대수로 안 여긴께. 입이 열 개 있이도 말 못할 제집까지 와서 머 해주는 밥이나 묵고 가만히 있이라꼬?”
“얼매나 동네방네 댕기믄서 자식 헌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맞다. 그래서 니가 노인네 가두워놓고 덩신 만들었나.”
“머 어째요!”
귀남네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리 풀세기 날뛰다가 뜨거운 일 볼까 무섭네. 죄는 지은 대로, 부모 눈에 눈물나게 해서 니가 복받을 것 같나? 어디 시상에 그런법이 어디 있노. 저거 집에 얻어묵으로 가도 안 그럴 긴데.”
야무네의 말도 과하기는 과했다. 말이란 내치고 보면 거둬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야아, 그라믄 오복이할매는 지은 죄가 많아서 소싯적에 남편 잡아묵고 딸자식 잡아묵고 지금도 방안에 산송장이 앉아 있십니까?”
귀남네는 눈이 시퍼래져서 악을 썼다.
“머라 캤노? 머, 머, 머라 캤제? 이 몹쓸 년, 니, 니는 다 살았……” 야무네는 픽 쓰러져서 까무라쳤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구마요. 오복이할무이도 뼈아픈 말을 하싰지마는 귀남네가 심했네요. 가심에 피가 지는 일을…… 둘째딸은 어마니나 조카한테 다시 없이 한다 카더마는.”
“그러이 한배에서 나와도 자식이란 오랭이 조랭이라. 세상에 머니 머니 해도 자식 일만큼은 부모 뜻대로 안 되네라. 자식을 낳아 부 노릇을 해도 부모 맘을 모리니, 성환할매가 얼매나 저거들을 감쌌기에? 그것들 여기서 나가믄 머 묵고 살겄는가. 내가 에미 애비없는 손주를 너무 감싼게 그러는 거 아니겄는가. 딸자식도 자식이다. 그러건만 귀남네는 자식들 헌해한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 해도 곧이듣나. 하니 성환할매 속이 내고 내도 말 안 하는 거 아니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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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할매 아니라도 그렇지. 자식을 우찌 내어쫓노. 부모는 그리 못한다. 에미 애비 없는 그 불쌍한 조카들, 남정네가 곰이믄 귀남네가 알아 해야지. 소나아 제집이 똑같다 카이, 그래가지고 나중에 오래비 얼굴 우찌 볼 긴고.”
“성질이 그러믄 할 수 없는갑십디다. 동생은 안 그런데…… 지난 설에도 어마니 옷 한 벌, 조카들 옷에 버선까지 지어서 인편에 보내왔다 카데요. 농사가 많아 일도 지천이고 시부모 모시고 삼서 그거 해보내노라고 밤에 잠이나 잤겄십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지가 못하믄 그만이지. 그것도 새를 내더란다. 하기사 사람이란 천층만층 구만층이라 카이 별의별 사램이 다있제. 옛적 얘기다마는, 그해는 가물었네라. 우리 천일아배, 니도 알다시피 무경우한 사람 아니더나. 그래 밤이 되믄 남의 논이사 우째되든지 물고를 트러 나가는 기라. 날이 새믄 보나마나 동네가 시끄러블 긴데 우짤 기고, 살재기 따라나가서 트놓은 물고를 막았네라. 아무리 가장이 하늘겉다 하지마는 옳지 못할 때는 여자가 막아주어야 하는 기라. 그기이 남정네 욕을 덜 먹이는 기고 자식들 앞길도 열어주는 기고.”
“그 말심은 맞십니다. 성자할무이가 그러이 혼삿길도 수울했지요.”
“아닌게아니라 그렇기는 했다. 시어무이 보고 딸 주겄다 딸 데리가겄다 하기는 했제.”
“이자 대강 됐십니다. 나가입시다.”
두 사람은 일어섰다. 그리고 논도랑으로 가서 세수를 하고 발을 담근다.
“영호네.”
“야.”
“요조숙녀가 하나 있는데,”
“야?”
천일어매는 깔깔 웃는다.
“그거는 내 말이 아니고 주막집 영산댁 말이다. 시영딸로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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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처니를 두고 그 할매 말이 우리 요조숙녀,”
“야……”
대답은 시원찮았지만 영호네 얼굴에 반응이 나타났다.
“조맨치라도 생각이 있이믄 야무어매를 찾아가보아라.”
“오복이할무이를요?”
“내가 들은 말이 있어서 그런다.”
“무슨 말을?”
“가보믄 알 기다. 나도 그 처니를 참하다 생각했지.”
“야……, 오복이할무이 큰아들 때문에 그럴 겨를이 있이까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당장 우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괜찮을 기다.”
“차도는 없다 캅니까?”
“골벵이 들었는데 하루 이틀에 낫지도 않겄지만, 야무어매도 자식 때문에 풍파 많이 겪는다. 영호네, 저기 또 최참판댁에 형사가 간다.”
“야?”
겁에 질린 영호네가 뒤돌아본다. 오르막길을, 최참판댁을 향해 낯선 양복쟁이 한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형사가 아니었다. 오가다였다.
“왜놈들 참말로 질기네.”
“아직 못 잡아서 그런 모앵이지요?”
“몇 달이 지났노. 잡기는 우찌 잡아. 버얼서 돈도 사람도 대국에 가 있일 기라 하드마. 왜놈이 철랑개비 재주를 지니도 이자는 못 잡을 기라 하는데.”
“진주에는 가지도 않고 여기 있었다 카는데 와 저럴꼬요.”
“까막소에 갔다왔다고 해서 그런단다. 애국자라꼬 그런다 안 카나.”
“야아……”
“직일 놈들, 저거가 안 망하고 우짤 기고. 죄 없는 사람 총 노아 직이고, 우리 머시마들도 똑똑했이믄 애국자 돼서 아배 원수를 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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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긴데, 그날 생각을 하믄 지금도 눈앞이 캄캄하다. 자식이라는 것도 저거 살 생각만 하고 부모 생각 조맨치라도 해야 말이제. 아배 기일에도 사라지게 걱정만 했지, 제상 차리는 것 보믄 눈물이 난다. 눈가림으로 시늉만 하고, 운전대를 잡고 있이니 할 수는 없지마는 천일이도 아배 제사에 참니하는 일도 드물다. 지도 미안해서 그러는지 진주로 모시가겄다 하지마는, 없이(일없다). 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러고 접지도 않고…… 내 눈 하나 감고 나믄 천일아배산소는 우묵장성, 풀이나 베줄란가.”
굿마당에서 왜병에게 총맞아 죽은, 남편 마당쇠의 죽음은 세월이 갈수록 천일어매 마음속에서 새로워지는 모양이다. 비극의 현장에 한사코 남아 있고자 하는 한복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이들은 슬픔을 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려 하는 것인지 모른다. 살구나무에 목을 매 죽은 어머니를, 굿마당에서 총맞아 죽은 남편을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튿날 해거름이었다. 영호네는 아침나절에 쪄놨던 쑥버무리를 작은 소쿠리에 담고 삼베수건을 덮어 들고 집을 나섰다. 꾸불꾸불한 내리막길을 지나 돌담 옆에까지 왔을 때 엽이네가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었다.
“여기 와 이라고 있노.”
“음?”
엽이네는 멀거니 영호네를 쳐다본다. 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듯
“내사 못 살겄다, 그만.”
하고 머리를 절절 흔든다.
“와?”
“무신 액운인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동네서 이러고 살겄나.”
“……”
“그란해도 우서방이 꿈에 뵈믄 하루 종일 맴이 산란하고 우서방 생각만 하믄 무서바서 밤길도 못 걷는데, 참말로 미치겄네. 본 대로 이야기한 기이 머가 잘못인고. 징언 잘못해서 성구아배(오서방) 징역이 사 년으로 떨어졌다. 사형이 되어도 분이 안 풀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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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째 징역이 사 년이고, 귀에 못이 박히게 우서방 집 식구들 원성아니가. 그거는 마 그렇다 하고 있는 심술 없는 심술, 사사건건 사람을 감아오고 참말로 못할 짓이다. 그 악종들을 갈바서 싸워봤자 이길 사램이 누가 있겄노.”
그간의 사정은 영호네도 알고 있었기에
“참아라.”
“아, 오늘도 우쨌는지 아나! 우서방 아들이 우리 콩밭에 소를 몰아넣고 콩밭을 낭태질했단 말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참말 못 살겄네.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누가 그 식구들을 갈겄노. 막나가는데.”
“해악할까봐 모두 겁내제. 하이 용천지랄하는 거 아니가. 질기 이라믄 우리가 떠든지 해야지. 벼락맞는 거사 죄져서 그렇다 카지마는 이런 액운도 또 어디 있겄노.”
“살자 카믄 우짜겄노. 참아라. 이거나 좀 묵어봐라.”
영호네는 소쿠리 속의 쑥버무리를 조금 떼어서 엽이네 손에 쥐어주고
“집에 가서 맘 가라앉히라. 질에 퍼질러 앉아 있이믄 머할 기고.”
영호네는 야무네 삽짝까지 왔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듯 걸음을 멈추고 콧물을 들이마신 뒤 마당으로 들어간다. 자기 깐에는 이야기의 성질상 구정물 냄새 나는 옷을 벗고 빨아놓은 옷으로 갈아입기는 했는데 삼베치마의 기장이 짧은데 풀발이 세어서, 허리를 끈으로 질끈 동여매기는 했으나 가늘은 종아리 하며 흡사 암탉 같은 모습이었다. 야무네 초가지붕 너머 느티나무의 짙은 그늘 사이로 두 마리의 까치가 날고 있었다. 해는 아직 남았더란 말인가. 까치의 몸짓은 느긋하기만 하다.
“아무도 없나?”
영호네는 기침을 해본다.
“와 이리 집안이 쥐죽은 듯할꼬?”
아래채, 야무가 누워 있는 방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야무네, 야무어매 하지마는 야무의 나이는 사십을 넘었다. 영호네는 그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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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구경도 못한 터에 아무리 병자라고는 하나 남녀가 유별이라 내외법이 엄존하니, 말을 걸어 물어볼 수도 없거니와 왠지 모르게 거북하고 으스스했다. 가버릴까 하다가 부엌을 들여다본다. 부엌바닥은 싹 쓸려져 있었다. 선반에는 투박한 사발이 가지런히 엎어져 있었고 솥전은 걸레질을 했는가 반들반들했다.
“집을 비워놓고 모두 어디로 갔일꼬?”
돌아나오는데 큰방 앞 신돌 위에 짚세기 한 켤레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복이할무이요, 안 기십니까?”
허행이구나 싶었지만, 어렵게 결심하고 왔는데 일이 잘못될 건가 불안을 느꼈지만 불러본다.
“누고?”
큰방 문이 열렸다.
“누가 왔나?”
부승부승 얼굴이 부은 야무어매가 내다본다.
“나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십니다.”
영호네는 반가워서 말했다.
“잠시 깜박했던가배.”
“할무이 혼자 기시는가배요.”
그 말 대답은 없이
“몸이 짚동겉이 무겁네. 비가 올라 카나?”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루로 나온다.
“모두 어디 갔십니까?”
“응 안사돈 환갑이라고 해서 식구들 모두 구례 외갓집에 갔다. 병자가 있이니 나는 참니도 못한다.”
“야……”
“무슨 일고?”
좀체 마을다니는 일이 없는 영호네였기에 야무어매는 의아해한다. 소쿠리 속에 뭐가 들어는지 알 수 없지만 음식을 나누어먹으려고 온 것만은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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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할 이야기도 있고, 아아들이 묵고 접다고 해서 조맨 해봤는데 오는 길에 가지왔십니다.”
야무어매는 소쿠리를 받아 삼베 수건을 들쳐본다.
“쑥버무리네. 너거들도 식구가 많은데 남 주 ㄹ기이 어디 있어서.”
부엌에서 접시하고 작은 함지를 가져온 야무어매는 접시에 쑥버무리를 옮기면서 조금 뜯어 먹어본다.
“간이 맞네.”
나머지 것은 함지에 올겨 살강에다 간수하고 접시에 담은 것은 아랫방 야무 있는 곳으로 가져간다. 방문을 열고 접시를 넣어주면서
“좀 묵어봐라. 꼽꼽해서 마치 묵기 좋다. 물 떠다주까?”
“괜찮습니다.”
낮은 야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꼭 씹어 묵으라. 체할라.”
마루로 돌아와 걸터앉는 야무어매를 보고 영호네는 물었다.
“요새는 좀 우떻십니까?”
“저분때 개소주를 내서 믹있더마는 요새는 좀 묵는다.”
했으나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얼굴이 부은 것 같은데.”
“이래저래 심장이 상해서 안 그렇나. 한분씩 속을 끓이고 나믄 이렇네라. 가심이 뛰고 밤에는 잠도 못 잔다. 그러다가 괜찮아지네라.”
영호네는 천일어매한테서 들은 얘기가 있어 왜 속을 끓였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귀남네하고 무슨 일이 있었다 하데요 하고 말하지 않았고 야무어매 역시 가슴에 맺히는 그 말, 서방 잡아먹고 딸자식 잡아먹고 지금도 방에 산송장이 있다는 기막힌 그 말을 입밖에 내기조차 끔찍스러운 듯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실은 그 말대로 심장이 상하여 얼굴이 부은 것도 사실이지만, 식구들 없는 새방안에서 야무네는 울었고 울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것이다.
“방에 들어가자. 뒷문을 열어놔서 씨원타.”
뒤늦게 아들 방에 신경을 쓰며 야무네는 당황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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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영호네 역시 야무에게 신경을 써가며 마루에 걸터앉아 말할 성질의 일도 아니어서 얼른 야무네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아닌게아니라 뒷문이 열려진 채였고 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 뒤란이 내다보였으며 방안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야무어매는 습관처럼 방에 걸레질을 하며
“너거들은 옛말하고 산다. 영호네, 나는 와 이렇겠노. 갈수록 태산이다.”
걸레를 구석에 밀어붙여 놓고 티라도 들어간 것처럼 눈을 비빈다. “사람 사는 기이 다 안 그렇십니까. 병자만 좋아지믄 오복이할무이도 무신 걱정이 있십니까?”
“말해 머하겄노. 아랫방의 자아만 나으믄 내사 내일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겄다. 불쌍한 우리 야무, 따따스리 밥 한 끼 못 무고 십여년을 객지 생활 함시로 에미하고 동생은 살게 해놨는데 지 몸이 저지경 되었으니 참말로 내가 죄 많은 에미다.”
“너무 심로 마이소. 설마 좋아지겄지요.”
“그러씨…… 조금 기동은 한다마는.”
야무네의 얼굴으 ㄴ여전히 어두웠다. 그 어둠은 다만 야무의 신병탓만은 아닌 듯싶었다.
“그래 할 얘기란 멋꼬?”
“맘도 안 편하신데 지가 이런 말을 해야 좋을지.”
“마음 편할 날이 어디 있나. 그날이 그날이지. 말해봐라.”
“어젯밤에 영호아배하고 의논을 해지마는, 우리 영호 때문에…… 핵교도 중도지폐하고 집에 있이니 맘을 못 잡는 모앵이라요.”
“그럴 기다. 와 안 그렇겄노.”
“지 맴이사 서울이나 일본에 가서 하든 공부를 더 하고 싶겄지요. 그럴 성시도 안 되지마는 또 붙잽히가믄 우짜꼬, 부모 맘에 안 그렇십니까. 그래서 장개라도 보내믄 우떨까, 맘 붙이고, 나이도 그럴 나이 아닙니까. 아니 늦었이믄 늦었지.”
영호네는 말하기 난감해하는 표정이었고 야무어매는 담박 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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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찾아온 뜻을 알아차린다.
“실은 어제 성자할무이 말심도 있고 해서 밤에 영호아배하고 의논도 했십니다.”
“주막집 숙이한테 중신들어달라 그 말 아니가? 그렇제?”
야무어매는 처음으로 웃었다.
“아, 아닙니다. 중신을 들어달라기보다 오복할무이 생각은 우쩐고 싶기도 하고 의논 삼아서.”
난감해하면서도 영호네는 매우 신중하다.
“의논하고 자시고 있나. 아아가 그만하믄 잘 컸지. 참하고 심성 곱고, 처지가 그래 그렇지 이 근동에서 그만한 아이는 없다.”
“야, 지도 그 처니는 보아서 압니다. 조신하고, 그런데 영호가 우찌 생각할까 싶기도 하고.”
하다가는 영호네는 당황한다. 너희들 처지에? 비난을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모가 하라 카믄 하는 기지. 무슨 소리고.”
“요새 아아들은, 신식이 머리에 들어가서 주장을 하는 갑데요. 우리 처지에 푼수없는 말이지마는 자식도 머리가 커져놓은께.”
“실은 영산댁이 나보고 한 말이 있었네라.”
“주막집 할무이가요?”
“응, 한복이 집에서 우리 숙이를 우찌 생가하는지 말 좀 건네보라 하더마. 그런 참에 우리 큰아이가 저리 돼가지고 돌아왔이니 무슨 경황이 있었겄나. 잊어부리고 정신이 없었제.”
“야. 그래서 성자할무이가.”
“음, 천일어매한테 말한 일이 있었다. 영산댁 말로는 죽은 남정네, 와 그 팔난봉 겉은 남정네가 어디서 낳았는지 아들이라 캄씨로 찾아왔는데 그놈이 숙이를 채고 들앉을 심산이라, 몽둥이를 드록 쫓아내기는 했으나 늘 맴이 안 놓인다 하믄서 서둘러 숙이를 치웠으믄 하는 기라.”
“그 소문은 지도 들었십니다.”
“전생에 무슨 인연인지 피도 살도 안 닿은 남의 자식을,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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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도 숙이한테는 공자라. 일구월심 숙이를 앉힐 자리 앉히겄다 그 생각뿐인 기라. 남한테 빠지지 않게 혼수도 장만할 기다 카고. 우리끼리니께 까놓고 얘기하자믄 너거들도 혼처 구하기 심든 처지 아니가.”
“그거는 그렇지요.”
“내 말 섭섭히 듣지 마라. 아이가 혼자 떠돌아댕긴 것도 아니고 아비가 영산댁한테 맽기고 갔으니, 또 주막에 있다 캐도 영산댁이 술심부름 시킨 것도 아니고 우리 요조숙녀 요조숙녀 함서 얼매나 떠받들었노.”
혼자 떠돌아다닌 것도 아니라는 것은 영호네에겐 가슴 아픈 말이었다. 그러나 야무어매가 가슴 아프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닌 것도 안다. 혼자 떠돈 너도 이렇게 자식 낳고 잘살지 않는가, 그런 뜻인 것도 안다.
“그라믄 그 아아 시집보내고 나믄 주막집 할무이는 우째 살 긴고요.”
“절에나 가서 있일 모앵이더만. 영호네 딴 생각 말고 내 말 들어라. 이 일은 너거들을 위해서도 성사해야 한다. 내 말 알아듣겄제?”
“야.”
“서로가 다 사람 하나 보고 하는 것이니 영 딴 생각 마라.”
“그런데 맘에 끼는 일이 하나 있어서.”
“맘에 끼는 일이라니?”
“소문을 믿어서가 아니라 저기 그런께 말해도 되겄는지.”
“니새 나새 말 못할 기 머 있노.”
“최참판댁 둘째도련님하고 어쩌고.”
하자 야무어매는 웃었다.
“그 얘기라 카믄 나도 안다. 그 기이 까닭이 있제. 최참판댁 작은 도련님이 바람을 잡아 댕기다가 강가에 스러진 거를 숙이가 본 기라. 해서 영산댁하고 함께 주막까지 데리온 긴데.”
“그기이 그런데,”
“빨래터 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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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여간에 말 많은 기이 탈이라. 생각을 해봐라. 쓰러졌을 직에 도움을 받았으니 만나믄 인사하는 기이 정한 이치고, 또 그 댁의 작은도련님은 예사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 모두 공펴키 살아야 한께 또 높고 낮은 기이 없인께 함시로 도련님이라 불러도 질색을 한다는 기라. 그렇기 차별을 아니 둔게 숙이한테도 말을 건 거 아니겄나. 그라고 또 숙이가 엄전한께 그 댁 도련님이 만의 일이라도 마음을 두었다 치자. 그기이 너거한테 못할 기이 머 있노. 최참판댁 도련님이 마음을 둔 처자를 며누리로 데리온다믄 그야말로 영광아니가. 숙이가 지 처지를 아는데 빨래터에서 말 몇 마디 걸었다고, 그거는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소리고오. 그러이 내 생각에는 빠르믄 빠를수록 혼사 성사시키는 기이 좋다.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지만 최참판댁에서도 좋아할 일이 아니가. 소문이 그렇다믄 그 소문 지우는 것이 된께.”
“말을 듣고 보이 그렇소.”
영호네는 비로소 얼굴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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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장 수유리에서

푹푹 찌는 날씨였다. 흐르는 땀도 땀이지만 습기찬 공기가 치덕치덕 몸을 휘감았다. 붉귀신 물귀신이 한꺼번에 달겨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칠 지경으로 더운 날이었다. 춥다든가 덥다든가 시원하다든가, 혹은 경치가 좋다 나쁘다, 용모가 어떻고 따위의 감각적 표현에 절제가 강하 유인성은 음식에 관해서도 누가 맛이 있네 없네, 짜네 싱겁네, 그런 말을 할라치면
“맛이 있으면 맛나게 먹어. 맛이 없으면 수저를 놓고. 사내자식이 채신머리없이 그러는 게 아니야.”
따금하게 일침을 놓아 상대를 무색하게 하였다. 그런 유인성도 오늘 같은 날시는 견디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람의 방문을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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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열어놓고 안동포 적삼의 고름을 풀어헤친 채 연신 땀을 닦다가 부채질을 하다가, 그러고 있는데 선우 형제가 찾아왔다.
“이런 날 방구석에서 체력 소모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경제라는 거다.”
쪽문을 열고 좁은 사랑 마당으로 들어서며 선우일이 큰소리로 말했다.
“불경제라……”
옷고름을 여미고 일어서며 유인성이 중얼거렸다. 회색 바지에 반소매 흰 셔츠를 입은 선우신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광대뼈가 솟고 양볼이 꺼져서 여우상 같은 그의 인상, 그러나 날카로움은 많이 마모된 듯했으나 달콤하고 깨끗해 뵈는 웃음은 전과 다르지 않앗다. 선우일은 마지의 양복 차림이었고 나비 넥타이에 파나마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올라오게. 왜 그리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가.”
“아닐세, 나가자구.”
선우일이 말했다.
“어디로?”
“물 찾아가는 게지. 옷 갈아입고 나오게나.”
“가시지요, 형님.”
선우신도 거들었다.
“물 찾아간다구? 그렇담 옷 갈아입을 것도 없네.”
안동포 홑바지의 걷어올린 가랑이를 풀어내리고 다시 한 번만 접어올린 유인성은 밀짚 모자를 머리에 올렸다.
“친구 따라 강남 가더라고, 그럼 나서볼까?”
대절하여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에 올라탄 세 사람은 우이동 골짜기를 찾았다. 물소리만 들어도 땀이 식는 것 같았다. 골짜기마다 수박·참외·복숭아, 싱그러운 여름 과일을 물에 담가놓고 여인네 아이들이 물맞이를 하고 있었다. 영계백숙을 뜯으며 소줏잔을 기울이는 남정네들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뜸해졌고 물소리만 줄기차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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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지?”
선우일이 말했다.
“그런 것 같네.”
“자넨 표현에 인색해. 언제나 그렇거든.”
“반풍수 안 되려고 그런다.”
“비트는군.”
“아니 다행이다. 이것저것 반풍수 아닌 게 없지.”
“흠 이것저것이라…… 이것저것 다 대신해줄 놈이 있어야 물러날 것 아닌가. 빌어먹을 놈의 세상, 나 같은 놈을 세상이 만들었지. 모두 명분만 찾고 원칙만 고집하고 허니 어쩌겠나.”
선우신은 개울 한켠에 돌을 쌓아 흐르는 물을 막아서 수박, 참외를 담가놓고 그늘 밑의 평평한 바위에다 술병과 술안주 따위를 펴놓는다. 오늘 도중 매점에서 꾸려온 것들이다.
“사방에서 욕은 바가지로 먹으면서, 그래도 어쩌겠나. 급하면 날 찾는걸.”
“……”
“이 선우일은 머슴이냐 피에로냐, 허허헛헛……”
유인성도 싱긋이 웃는다. 선우일은 양복 윗도리와 바지를 벗는다. 무릎까지 오는 인조견 속바지 밑에 종아리는 가늘고 희다. 노리끼한 털이 물결같이 밀려 있다. 유인성도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린다.
“적삼 벗고 은가락지 낀다더니 그 꼴이 뭔고?”
유인성 말에
“아아.”
하다가 선우일은 나비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의 단추도 끄르고 소매를 걷어올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으며 물속에 발을 담근다.
“시원하구나. 어이 시원타!”
선우일은 탄성을 질렀다. 선우신은 술자리를 펴놓은 바위 옆에서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은 뒤 유인성과 형을 바라본다. 이윽고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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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술자리에 와서 앉았다. 묘한 침묵이 한순간 흘렀다. 술을 마시고 수박을 베먹고 씨를 뱉으며 선우일이 먼저 입을 떼었다.
“인실의 소식은 들었는가?”
“……”
“아직 소식을 모르고 있어?”
“……”
“형님한테 오가다가 찾아가지 않앗던가요?”
이번에는 선우신이 물었다.
“왔더군.”
“그러면 인실이 소식은 들었겠군.”
선우일 말에 선우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형님!”
“왜?”
“오가다가 인실씨 소식을 어찌 알겠어요. 그도 궁금해서 방학을 이용하여 나왔을 뿐인데.”
하자 인성이
“그애는,”
하다가 술을 마신다.
“죽은 거나 다름없어.”
“그게 무슨 뜻인가?”
“자네 말 뜻 나는 모르겠네. 형무소 출입을 했기로 그건 조선의 딸로서 영광 아닌가.”
선우신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영광이라…… 영광, 하하핫핫…… 영광?”
유인성의 웃음 속에는 분노와 비애가 있었다. 잊을 만하면 어디선가, 누군가가 끌고 나와서 인성의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큰누이 인숙이 찾아왔다. 병석에 누워 있던 모친이 큰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가엾은 것, 가엾은 것 하며 흐느꼈던 것이다. 모친의 울음 속에는 아들 인성에 대한 원항오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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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인실이 집 나간 것은 지난봄이었다.
“오빠, 인실이 죽어서 장사지내는 비용쯤 생각하시고 돈 좀 주세요.”
느닷없이 그런 말을 인실은 했다.
“무슨 말버릇이 그러냐?”
“절 믿으시지요.”
“너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냐.”
유인성은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막내 인실을 사랑했다. 꺾이지 않는 그의 기상을 사랑했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신념대로 살 거예요. 강하게 살 거예요. 빈손으로 나가느니보다 얼마간의 돈 쥐고 나가야 오빠 마음도 덜 아플 거예요. 물론 전 지금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실이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인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긴 세월 인실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벌리고 돈 달라는 그 자체의 의미, 인실은 긴 세월이거나 아니면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서는 그같은 행동을 취할 성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성은 가족들 몰래 오백 원을 마련하여 인실에게 주었다. 오백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좀더 넉넉하게 주지 못했던 것이 한탄스러웠다. 인성은 그때 암울하고 오뇌에 젖어 있던 인실의 눈을 가끔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고 알지 못할 노여우을 느끼는데 오가다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실이 오가다의 아이를 배태했다는 사실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가다는 초라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밖에서 인실의 소식이라도 들었더라면 그는 결코 인성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성은 오가다를 보면서 일종의 안도감을 가졌다. 인실은 오가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갔을 거라고, 그러나 오가다의 진실에 연민을 느꼈다. 말없이 술을 마시다가 그는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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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인실씨를 잡아먹은 거지요. 배신에 대한 분노가 정당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지만 대중이란 쉽사리 등을 돌리더군요. 사회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 아닙니까.”
선우신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 말에 선우일은 찔금했다.
“다행이네. 신이가 몽상에서 깨어난 건.”
유인성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선우일이 물었다.
“자넨 관에다 못질할 때까지 의문으로 끝날 거야.”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누.”
그 말 대꾸는 없이 인성은
“사회 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라는 말은 맞는 말이네. 전폭적인 긍정으로 감상주의에 흐르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더더구나 민족주의를 휘두르고 나가는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민중에게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나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어리석어. 실체를 뚫어보지 않고 하는 일은 결국 붕괴된다.”
인성은 말을 계속할 듯했으나 그만둔다.
“그래 어떤 뜻에선 사회가 인실을 배신했지. 그러나 인실이도 피해망상이었어. 친일파나 할 일 없는 한량들의 입방아쯤 무시해도 좋았던 게야. 누가 뭐래도 인실은 조선의 딸이고 조선의 잔다르크야.”
“형님은 늘 그렇게 순진하시지요.”
선우신이 비꼬듯 말했다.
“뭐라구?”
“친일파 한량들이 뭐라 했습니까? 그들은 관심도 없어요. 소위 일한다는 것들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것들, 그것들이 계집같이 종알대는 주둥이를 몰라 그러십니까?”
평소 성격을 봐서 선우신의 어세는 매우 강했다.
“주둥이 하나 가지고 다해먹는 놈들, 검거 선푸이 불면 이상하게도 빠져나가는 놈들, 개의할 것 없어. 나보고도 회색분자니 기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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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니 하며 매도하는데 정작 그들이야말로 정체가 뭔지 모르겠더군.”
“그들 주둥이에 난도질 당할까봐 고분거리는 무리는 어떻고요.”
“그만들 두게. 인실을 배신한 것은 없어. 뭐 그애가 거물이야?”
인성은 쓰게 웃다가
“차가운 눈길이나 노골적인 비난에 좌절할 인실은 아니야. 그애는 지 자신이 선택한 대로 갔을 뿐이다.”
유인성 말에 선우 형제는 입을 다물었다.
“자아 술이나 붓게.”
선우신이 유인성 술잔에 술을 붓는다.
“여름이 가고 나면 의돈형님이 나올 텐데. 나와도 세상이 뒤숭숭하니 걱정이야.”
선우일이 말했다.
“가족들한테도 충분히 못해 서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소.”
계명회사건 때문에 잡혀간 사람 중에서 선우신, 유인성, 유인실 그리고 오가다 그 밖의 몇 사람은 비교적 일찍 풀려났고 작년에는 최길상(김길상)이 출소를 했으며 마지막 서의돈이 올 가을에는 형기를 마치고 나올 것이다. 그런데 선우일의 걱정과 자책 비슷한 말에 유인성은 왠지 냉담했다.
“권오송이 나왔다며?”
서의돈에 관한 말을 묵살하고 인성은 말머리를 돌렸다.
“나오기는 나왔는데 말들이 많아.”
권오송은 지난 늦봄 예맹 검거 때 잡혀갔다. 그러나 권오송은 예맹과는 깊은 관계가 없었고 오히려 약간의 알력도 있었던 터이어서 주위 사람들은 권오송의 검거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예맹검거 사건에 앞선 정월, 사무실 아래층 다실에서 저녁 늦은 시간, 극단 산호주는 실험 비슷하게 연극 동호인만 모아놓고 고리키의「밑바닥」을 공연한 바 있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니겠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취한 강선혜 때문에 더 말이 많은 모양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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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서 일체 외부와 연락을 끊은 것도 오해에 부채질을 한 것 같습니다.”
선우신이 덧붙여서 말했다.
“늘 있어온 일 아닌가.”
유인성은 가볍게 말했다.
“그런 정도의 얘기가 아니네. 아주 흉측스러워. 사전에 양해가 되어 잡혀갔다는 말도 있고 극단 산호주에 정체 모를 전주가 붙었다는 말도 있고.”
“권오송이가 이 모와 비교적 가까운 사이라 그런 말 듣는 거 아닐까?”
“그 점도 있지. 과거 이 아무개가 총독부에 의해 회유되었던 것은 사실이고 지금 민족주의라는 미명 하에 매문 행위, 괴상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권오송에 관한 흉측한 소문이 사실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말치고는, 현실성이 없구먼. 이 모같이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도 아니고, 희곡 몇 편 썼기로 거의 대중에게는 알려진 사람도 아닌데.”
“잡지하고 극단이 있거든.”
“……”
“만일 총독부의 손이 권오송에게 갔다면, 그건 이 아무개가 미치는 대중에의 영향을 꺾어버리려는 의도하고는 내용이 다를 게야. 이 아무개의 작업은 혼자 하는 것이지만 잡지 언저리에 모여드는 사람, 극단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 결국 예술인들 속을 파고 들어온다, 그렇게 봐야 하고 잡지나 극단의 방향도 일본 정책에 따라 조정할 수 있고, 한발 더 나아가서 친일의 선전장일 수도 있고 이건 어디까지나 가상이지만.”
“그건 일본을 과소평가하여 하는 얘기다. 치밀하고 교활하며 황당하고 대담한 일본이 문화 정책을 내세웠다 하여 예술을 육성할 의사는 물론 없지만 예술인들을 이용하여 친일의 선전장으로 만들만큼 자신 없는 놈들도 아니라구. 이 모의 경우는 그가 지녔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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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비중 때문이지, 그의 문학에 있었던 건 아니야. 하기야 이 모에게 있어서 정치와 문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뭐, 권오송의 손을 빌릴 것도 없이 그들은 개인을 상대하며 회유하거나 위협할 수 있고, 극단쯤 몇 개 만드는 게 뭐 그리 대수겠나. 현재로선 조선의 예술 따위는 그들 안중에도 없어. 독립운동가, 수상한 사상을 가졌다 하면은 집어내는, 다만 그것뿐인 게야. 권오송이를 어쩌구저쩌구 하는 발상부터 황당하기 짝이 없다.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나?”
“말의 진원지는 대강 짐작이 가네만 하여간.”
“권오송이가 수완이 좋아서 잡지도 하고 극단도 있고, 그러나 사재를 털어넣을 만큼 자기 나르므이 사명감은 잇을 것이며 섣불리 돈에 넘어갈 그 따위로 우둔한 사람도 아니야.”
“시기심이지요. 강선혜 씨가 적도 만들었구요. 결혼 전에 강여사는 좌충우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좌충우돌하게끔 몇몇 주변의 시선이 잔인했습니다.”
유인성은 술을 마시려다 말고 선우신을 쳐다본다.
“동경 유학했다는 걸로 강여사 콧대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별재주도 없는, 그 남녀평등을 주장한 글 때문에 조롱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시를 쓰네 연극을 합네 하고 『청조』주변에 모여드는 사라들이 주로 그랬었지요. 인간이란 무리를 지으면 바닥 없이 잔인해지고 무책임해지고, 그건 마치 무대를 보는 관객과도 같이 신랄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철부지에다 돈푼깨나 있는 집 딸, 낭비를 일삼는 골, 보기에 아니꼬운 것은 사람의 상정이지만,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그런 자들도 까불어보아야 지가 마포강 강서방 딸이지 누구겠는가, 그런 주제에 동경 유학이라니,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언사로 내뱉는 겁니다. 상대가 모질고 표독스러웠으면 면대하여 그랬겠습니까? 심지가 약하고 보면 계속 짓밟는 겁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게 아니고 약점을 꺼내어 계속 망가뜨리는 거지요. 건드려도 별 해가 없을 것이다 하면 계속 건드리게 되는 속성, 주변에서 가세하게 되고, 여자가 뭐, 하는 것도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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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닌 특성보다 약자라는 전제 하에 감정이 자행되는 것 아닙니까. 무리란 상향과 하향, 양면을 지닌 것 같습니다. 무리가 사명으로 뭉쳐지면 지고선으로, 협동과 사랑으로 가지만, 힘으로 뭉쳐지면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공격의 대상을 찾게 되고 가장 취약한 것을 골라잡아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며, 크게는 다른 민족을 침해하고, 작게는 골목 대장식의 잔학성을 나타내는데…… 생각해보면 역사란 늘 그래왔다, 언제나 강자 편에서 있었다. 조그마한 그룹에서도 그런 것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뭔지 사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지요.”
선우신은 흥분하고 있었다. 강선혜르 ㄹ비호하는 말이라기보다 그는 오가다라는 일본 남자로 인해 취약점을 ㄹ안고 있다고 보는 인실의 처지를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인간 본성으로 확대되어 선우신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을 테지만.
“막상 강여사가 오송형님하고 결혼을 하고 보니, 또 잡지나 극단에 강여사 쪽에서 출자를 하는 형편이고 보니 일이 묘하게 됐어요. 오송형님 주변에서 심히 강여사를 괄시했던 사람들 입장이 곤란해졌지요. 청조사 최기자도 사표를 내고 나갈 수밖에 없었지요. 이번에 검거 사건이 터지니까 그들은 은근히 좋아했을 겁니다. 어디 골탕 좀 먹어봐라, 『청조』도 망하고 산호주도 해산할 것이다. 한데 그 감정이란 게 줄기를 찾아보면 참으로 하찮은 것에서 출발했거던요. 그런데 그들의 뜻한 바와는 달리 오송형님이 나오게 되니 또 곤란해졌다 그 말입니다. 내친 걸음 되돌릴 수도 없는 고약한 루머가 퍼진 거지요. 한마디로 추악합니다. 아무 원수진 것도 없고 이해 상관도 없이 어는 서슬엔가 출발을 해서 험악한 관계로 치닫는 그런상황을 도처에서 보게 되면 정말 견딜 수가 없지요. 머리 박박 깎고 절에 가든지 동해물에 빠져죽고 싶어집니다. 독립이고 해방이고 뭐 되는 것 있겠습니까! 기아로부터 해방! 인간 소외로부터 해방! 빛 좋은 개살굽니다. 서로 유리 조각 들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서로의 살갗에 상처를 내는.”
선우신은 자신의 흥분을 깨달았는지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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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어디서나 있어왔던 일인 게야.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쓰레기는 나게 마련 아닌가. 지엽 때문에 근본을 망각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게야.”
선우신은 약간 무안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자네 같은 사람도 있으니 모든 것에는 다 양면이 있는 게야. 그는 그렇고 그놈의 잡지는 뭣하러 해.”
“나쁠 거야 없지 않나. 좁은 우리들 지면을 생각하면.”
선우일이 말했다.
“민적민적 민적거리고 있는 그가짓 것.”
“폐간당하지 ㅇ낳으려면 할 수 없다. 없는 것보다 나아.”
“없는 것보다 낫지가 않아.”
“어째서?”
“연극이란 사람을 모아야 되는 일이고 잡지가 있으면 사람 모으기 편리하긴 하지. 이론의 뒷받침도 되고 연극에 대한 계몽·관심도 확산되고, 우리 처지에선 미미한 거지만. 그러나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칫 잡지 하는 쪽의 추종자가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그런 면에서 오송이가 계산을 하는 모양인데, 그러나 잡지를 존속시키기 위해 미온적으로 계속하다 보면 알맹이는 빠져나가고 이해관계에 민감한 껍데기들만 난아서, 지금 오송이가 치르는 곤욕도 그런 선에서 비록된 거야. 세상 돌아가는 것은 물론 미흡하지만 신문이 있으니 내 생각에는 잡지보다 시집이나 창작집, 정선한 번역물 혹은 학술 논문 같은 것을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편이 낫겠어. 그건 우리들의 작업이라 할 수 있지만 총독부 눈치 보아가며 독자들 취향을 살려가며, 또 자기 측근에다 지면을 안배하려 하고, 죽도 밥도 아닌 꼴이 되지 뭐. 게다가 일본을 거쳐서 온, 그나마 일본서 선택되고 해석한 것을 재탕하자니 그것도 단편적으로 말씀이야. 궁색하기 짝이 없지. 한구석만 보고 사물의 전부라 생각하는 반풍수 만들기 십상이고 겉멋 든 속물들이 단편적인 것 치켜들고 지식인 행세나 하고, 그놈의 계몽주읜가 뭔가 하는 것을 보라고 와장창 부숴버리는 게 그들의 능사 아닌가. 엽전이 어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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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비하 자기 부정은 일본인과 궤도를 같이 하고 있거던. 마치 우리것을 부정하는 일이 독립에의 첩경이요 민족을 구제하는 거로 착각을 하고 있어. 그런 망상의 도배들을 나는 반역자라 규정하겠네. 문화란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것도 아닌게야. 독립이란 국토와 문화를 되찾고 지키는 것, 국토가 육신이라면 문화는 영혼인 게야. 뭐 그렇다고 해서 남의 것 무조건 배격하자, 그런 얘기는 아니네. 묵묵히 종전대로 사는 백성들 꼭대기에 서서 미치광이처럼 남의 것의 찬송가를 불러대는 소위 그 지식층, 산호주니,『청조』니 하는 따위의 극단이나 잡지 이름은 또 뭔고? 사이죠 야소풍인가? 사소한 일이지만 그런 경박함은 언젠가는 아래로 흘러 백성들의, 민족 전체의 경박성으로 화하는 게야.”
사이죠 야소는 사픈사픈 달작지근한 시를 쓰는 일본의 삼류 시인이다.
“불과 십 년 전인 삼일운동 때도 아직은 우리의 뿌리가 남아 있었어. 십여 년 동안 무섭게 변했다. 더욱더 무섭게 변하겠지. 내가 걱정하는 거는, 악용당할 수도 있다……”
“잡지 말인가?”
“아까 소문이 어쩌구 했는데 사실 무근인 것은 알지만, 앞으로 오송이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지.”
“내 생각에도.”
“소문도 그러하니 쾅 때리고 폐간해버리는 게, 이용당하는 고통보다 덜 할 건데 나 같으면 그러겠다.”
“그건 아까 얘기하고 다르지 않나?”
“앞으로 달라질 거라는 예상이지. 만보산사건으로 전쟁이 된다면…… 일본의 야심이 도중하차는 아니할 게야.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양상이 나타나겠지. 안중에도 없는 조선의 예술인에게도 메가폰을 들릴 수도 있을 게고. 『청조』같은 것 폐간시켜버리면 그건 다행이지만 인원 동원의 도구로 쓰일 수도 있고 일본 찬송의 글 나부랭이 실어라 할 수 있고 악용당할 소지는 있지. 그와는 경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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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지만 『조선일보』의 경우, 아주 교묘하게 악용당하지 않앗나.”
“그 일은 참 고약하게 됐지.”
“이제 와서? 되놈들 다 때려잡자 하고서 입에 거품을 물던 작자가 누구였나. 그게 엊그제 일이야.”
“그, 그때야 누구나 다 그랬었지. 신문의 요란한 기사 보고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선우일은 쩔쩔매며 얘기한다.
“경거망동, 그게 민족주의가 가진 취약점이다. 민족주의만 내세우면 어떤 범죄도 합리화하는, 나는 오늘날 식민지 정책을 강행하는 나라에 대해 민족주의보다 국가주의, 그러니까 그건 제국주의지만 그들 스스로는 모두 민족주의자지. 생각해보게. 만보산에서 농민들의 충돌이 있었다 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을 습격하고 살상하고, 입맛 쓴 얘기야.”
유인성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물었다. 선우일은 술을 마시고 술에 약한 선우신은 안주로 사온 콩을 집어먹고 있었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 숲에서 찢어지게 우는 매미 소리, 물 마시러 왔을가 작은 새한 마리가 바위 사이를 건너뛰고 있었다. 오랫동안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자는 청맹과니더란 말인가.”
술잔을 내려다보며 유인성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누구 말인가?”
“누구긴…… 기사를 넘긴 그자 말일세.”
“하긴, 태수형도 비난을 하더군. 경거망동이었다구. 공산당 했던 김아무개 아닌가.”
“그거 다 사회주의 낭인이 우굴거리는 동경서 보고 들은 때문이야.”
“자네는 안 그런 것 같네구려.”
유인성은 쓴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물었다.
“자네라면 어찌 했겠나?”
선우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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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에.”
“되놈들 모조리 때리잡아라, 기살 넘겼을 테지.”
“너무들 그러지 말게. 자네같이 이성에 투철한 사람이 흔하겠나.”
비꼬아놓고 다시
“너무 그러는 것도 나는 불만이네. 동경진재 때 조선인 학살하고 뭐가 다르냐 하면서 지나치게 비난하는 것, 난 불만이야. 어째서 그 일하고 이 일이같으냐 말이야. 이번 사건은 역사적으로 쌓이고 쌓였던 우리 민족의 원한이 폭발한 거야. 물론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가 왜놈 계략에 놀아난 꼴이자만.”
하자 선우신이 말했다.
“신문사에서는 전에도 특종을 보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장춘 주재기자의 통신을 그대로 받았다 하더군요.”
“만보산사건의 진상은 몰랐다 하더라도 그곳에 있던 놈이면 그곳 실정쯤 파악하고 있어야지. 일본 기관에서 고의적으로 홀린 오보를 판단 없이 송고해? 의도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조선일보』는 어용지『경성일보』와 함께 일본의 계략을 도운 셈이야. 함정에 빠진거라 해도 좋고.”
“하지만 우리 농민이 핍박받는 것은 사실 아닌가. 다지고 보면 그땅이 누구 땅인데? 태고적부터 우리 땅이었다구.”
“꿈 같은 소리 하는군.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땅은 우리 땅이야?”
철없는 아우 바라보듯 유인성은 선우일을 본다.
“지금 중국인들, 속속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있는데, 대체 일본은 어쩔 요량일까요?”
선우신이 물었다.
“돌아가서 통곡하고 길길이 뛰고 외치라는 거지 뭐겠나. 중국을 싸움판으로 끌어내자는 일본의 수작이야. 중국이 총칼 들고 달려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본은 여러 가지 이득을 본 것이고, 그러지 않아도 재만 독립군이 발붙일 곳이 없고 독립운동도 날로 하기 어려워져가는 상황인데,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게야.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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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조선인들에게 핍박이 가중되면 될수록 일본에라도 의지하려들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형편없는 민족, 잔악하고 분열을 일삼는 조선 민족, 일본이 계속 목탁 두드리는 듯 해온 소리 아니었나. 국제적으로 실증이 되었으니 일본으로선 매우 만족스러웠을 게야. 게다가 중국인이 빠져나간 뒤 그들의 상권도 일본인이 차지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결과만을 따지는 건 역시 난 불만이야. 간도 땅은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 있는 우리 땅이라구. 우리 민족이 가서 살 권리가 있는 땅이야.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면 요동이 고구려 땅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고 말갈병을 일끌고 고구려는 요하를 넘어 요서까지 나간 일이 있어. 요서가 어디야? 몽고로 가는 곳 아닌가. 고구려의 광개토왕 때 동부여를 치고 예순네 개의 성을 공략했다 하니, 또 영류왕 때는 동북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의 장성을 쌓았다, 그러고 보면 그 영토의 넓이를 상상할 수 잇는 일 아닌가. 삼국이 통일됨녀서 당에 빼앗겼던 땅도 고구려인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으로 실지가 회복되었다 할 수 있고, 누가 알어? 우리 조상들이 우수리강, 흑룡강도 넘어을는지. 『동이전』이었던가? 어디서 보았는데, 하여간 우리 민족이 큰 활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그만큼 사정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가 되지. 십육세기에 와서 몽고 지배 하에 있던 러시아가 겨우 국가를 형성하였고 시베리아는 그보다 훨씬 후에 모피를 얻기 위하여 러시아가 개척했으니,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이 그곳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구.”
“그럴 것 없이 이보게 동생, 하는 게 어떨고? 에스키모에게 말이야.”
유인성의 놀려대는 말은 들은 척하지 않고 선우일은
“그런 저런, 옛날 옛적, 고릿적 얘기는 다 그만두고라도 두만강 압록강으로 국경을 정한 것이 어디 우리였나? 우리였느냐고! 왜놈들이 저희 마음대로 조약을 맺은 거 아닌가. 나라 안이 쑥밭이던 이조 말엽에도 조선은 결코 간도를 포기 안 했어. 이중하는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선을 좁힐 수 없다 했어. 간도는 우리 땅인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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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백성이 되놈한테 구걸하고 살아야 하나.”
“태평성세에 풍월 읊는 그 따위 소리 하면 뭘 해. 그러면 한반도는 조선인이 일본에 갖다바쳤단 말인가? 왜놈 마음대로 한 짓이 아니란 말인가? 집안이 불바단데 들판의 볏가리 챙기러 뛰어나가는 꼴이군.”
유인성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선우일의 말이나 분노를 잘못이라 할 수는 없었다. 흑룡강을 넘고 우수리강을 넘고 어쩌고하는 말은 당소 황당했을지 모르지만, 간도가 우리 민족의 원한이 사무쳐 있는 곳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지난날, 용정촌 상의학교의 젊은 교사였던 송장환은 생도들에게 말하기를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쓰러뜨려 삼국을 통일하여 팔백 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는 통일의 대가로 요동 일대의 우리 영토와 영토 내의 수많은 우리 백성을 잃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청인들 속에 우리가 잃은 조상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 간도도 옛날에는 우리 땅이었고 가시덤불과 울창한 수림을 낫으로 헤치고 도끼로 찍어내어 용정촌을 만든 것도 우리들의 부모님이 아니었던가―사라져간 민족의 영광을 강조하고 물거품이 된 개척 정신을 애통해했던 송장환, 그의 비분은 나라를 빼앗긴 약자의 부질없는 감상이라 할 수 있겠고, 선우일 여깃 약자의 허세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본연의 어쩔 수 없는 감정이며 자신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도덕이기도 하다. 한말, 일본이 조선을 먹어들어올 무렵, 의병 봉기에 이어 오늘 현재까지 과히 민족의 대이동이라 할 만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으 ㄹ버리고 남부여대, 이주해갔고 항쟁의 터전으로 부상된 곳, 조선 민족에게는 서사시적 무대이며 아득한 옛적부터 민족의 혈흔이 점철된 그곳 간도의 땅을 선우일이 말한 대로 중국에게 결정적으로 넘겨준 것은 일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사살했던 그해, 1909년 청일간에 간도협약을 맺음으로써 그 땅은 청국으로 넘어갔다. 말하자면 일본은 두 걸음 전진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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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간도를 중국 땅으로 확정지으면서 일본이 얻어낸 것은 일본 영사관 내지 영사관 분관을 설치하는 일이었고 장차 청국의 길장철도를 연길 남쪽까지 연장하여 회령의 조선 철도와 연락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영사관 설치는 조선 독립군을 색출 탄압하는 합법적 본거지가 될 것이며 철도의 연결은 병력과 군수품의 신속한 이송을 위한 장차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요동 일대가 한민족의 코토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밀리고 밀어붙이는 끊임없는 판도의 변화 속에서도 여진족은 금과 후금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기까지 대체로 한민족의 지배, 혹은 영향권 속에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주변 국가에 둘러싸여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던 만주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충지였으며, 어쩌면 반만년 역사에 단일 민족으로,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여 존속해왔던 조선은 만주라는 완충 지대의 덕분인지 모른다. 한민족과 중국, 몽고의 각축장이기도 했던, 그러나 대청제국이 성립되고 만주는 중국을 정복한 대제국으로 부상함으로써 완충 지대는 간도 지방으로 좁혀지고 고정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사정 또한 매우 복잡하게 되었던 것이다. 간도 지방에 할거했던 오란가이족과 충돌이 있어 사십여 호의 부족을 이끌고 돈화 방면으로 도주한 건주여직의 간타리족에서 청의 시조 누루하치가 나왔다 하여 그들 발생의 영지를 보존한다는 의지와 그밖에 정복한 타부족이 월경하여 도피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것을 방지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고 해서 1628년 청의 태종은 간도를 비원호고 피차 사월하는 것을 엄단한다, 그것을 제시하여 조선의 인조와의 사이에 협약을 맺은 것인데 소위 간광 지대로서 봉금한 것이다. 강약이 부동하여 조선은 불평등 협약에 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조선에서도 권리는 있었다. 이쪽에서 그 땅으로 넘어가면 아니 될 일이나 그쪽 역시 농부들이 넘어와 주거를 마련할 때 조선은 청에 통보하여 그들을 철수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옥한 땅, 국법이 아무리 엄하다 하여도 굶주린 쌍방의 백성들이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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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청이 쇠퇴기에 들면서 간도 지방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 그 틈을 타서, 또 흉년을 맞이하여 많은 유민들이 그곳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런데 1881년 청은 도문강 동북의 간광지를 개간할 계획을 세워 미리 조선에게 통고하고 시찰을 한 바, 많은 조선 백성이 거주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해서 청은 변발하고 그들 복색에 따를 것이며 그들 정교에 복종 아니 하는 조선 백성은 간광지에서 나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선 백성은 그들 요구에 불응했고, 많은 유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그것은 심히 난감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의 동북경략사였던 어윤중이 종성의 사람, 김우식으로 하여금 백두산을 답사하게 하고 정계비와 토문강의 원류를 규명하게 한 것이 이 무렵이다. 그리하여 토문과 도문은 별개의 것으로서, 정계비에 씌어진 토문강은 북류하여 송화강에 이르는 것이므로 철수해야 할 조선 유민은 토문강 밖에 있는 사람에 한할 것이며 도문강 밖의 유민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은 청에다 제기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국경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1885년 두 나라는, 청의 가원계·진영, 조선의 이중하·조창식이 마주앉아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은 정계비에 씌어진 강 이름의 차이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아니하다가 실지를 답사하고 산천의 형세를 살핀 뒤 당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결판을 내리지 못하고 그들은 물러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차 삼차로, 담판은 속개되어 청은 협박으로 밀고 나왔으나 이중하는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을 좁힐 수는 없다 하여 강경히 맞섰던 것이다. 간도 내에 거주하는 유민 중 조선인이 십만이요 청인이 삼만, 십 대 삼이었지만 그간 대국의 세를 믿고 청인의 핍박을 조선 백성은 겪어야 했고 그 고초는 오죽했겠는가. 끊임없이 변발과 복색의 변경을 강요당하며 그러지 아니할 때 땅을 몰수당하는 등, 군과 경찰이 그들 수중에 있는 만큼 소수 청인들의 횡포는 격심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빗발 같은 간도 유민들의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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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청을 받은 조선 정부는 이범윤을 시찰원으로 파견하였고 이범윤은 동포들의 참상을 보고 정부의 허가를 무시한 채 사포대를 조직하여 청에 대항했다. 이범윤은 노일전쟁 때 러시아에 가담했는데 그것은 북청사변 때, 러시아가 진주했을 때 청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곳 백성들 경향에 따라 한 짓이며 그 역시 러시아의 힘을 빌어 청을 밀어내려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패전하게 되자 이범윤은 노령으로 잠적했던 것이다.
간도의 사정은 대강 이상으로 설명이 되었는데 그러면 만보산사건은 어떤 것이었는가. 동북 지방, 길림성의 장춘에서 서북방 삼십 킬로 지점에 있는 맘보산 부근에서 중국 농미노가 조선 농민의 충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일 관헌의 무력 충돌이라 해야 옳고, 더 정확하게는 무력 충돌이기보다 쌍방간의 시위로 보아야 옳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측 농민 한 사람이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 쌍방간에 사상자는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사건은 그렇게 엄청난 것으로 반전했고 국내 중국인 학살로 격화되었는가. 그러면 간도협약 이후의 간도 사정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말하여 간도의 백만을 헤아린다는 조선인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쿠션 같은 존재였다. 중국은 조선인을 때림으로써 일본을 때리는 효과를 얻으려 했고 일본은 조선인을 방패 삼아 밀고 나간다 할 수 있었으니까. 조선인의 대부분이 소작농과 고용의 입장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데 오 할의 소작료, 전수입의 일할 오부가 공과금, 팔부의 비싼 이자, 게다가 일본 경찰의 지배하에 있는 우리 백성들, 착취는 중국이, 탄압은 일본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간도 주민 자체가 완강한 저항 세력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찰권은 강화되고 일본 경찰권의 강화에 불안을 느끼는 중국은 조선독립운동을 저지하려 들었고 일본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는 만큼 조선인을 앞세워 토지 매수를 공작하고 중국은 또 불안하여 토지매매는커녕 토지상조궈에 대해서조차 창구를 닫아버리는 현상, 일본은 조선인의 국적 이탈을 절대로 승인 아니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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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중국은 귀화해야 땅을 준다, 해서 이중 국적자는 늘어났고 따라서 조선인은 이중의 탄압에 신음해야 했다. 그리고 배일 민족운동은 조선인 배척운도으로 나타났는데 물론 일본의 앞잡이가 조선인에게 없지 않았으나 동북 정권의 일본을 업으려던 지난날의 행적이 있고 팽배해오는 배일 민족운동은 그들에게 일말의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켜 그 칼끝을 조선인 배척운동으로 돌려왔다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단순한 민족 배외운동으로 흐르기 쉬운 존재였기에 결과적으로 관민 모두가 합세하여 쫓기는, 상처입은 짐승 한 마리를 일본과 함께 몰아붙였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은 중국인이 조선인을 몰아붙이며 그럴수록 좋다. 독립운동의 지반이 없어지는 것이 우선 좋고 중국이 가혹해지면 그럴수록 조선인이 이롭네 기대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중국은 분쟁의 씨로 보기 때문에 조선인을 내몰려 하고 이런 사정에서 중국인 장롱도전공사 지배인이 만보산 부근의 토지 삼백 헥타르를 지주 열두 명으로부터 십 년 계약으로 빌려 그것을 아홉 사람의 조선인에게 빌려주었고 이들 빌린 사람은 이백여 명의 조선인을 동원하고 개간에 착수했는데 개간 비용의 삼천 원은 일본 영사관 감독하에 있는 조선인민회 금융부에서 조달하였고 수전의 설계, 씨앗 구십 석은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니까 애당초 문제가 있었던 공작으로 보아야 옳고 지주와 중각에 땅을 빌린 자와 또다시 조선인이 빌리는 이 과정에서 계약상의 하자도 있었으며, 그러나 무엇보다 수로 개설로 인근의 다른 농토에 침수 위험이 있다는 것이 분쟁 발단의 가장 큰 이유였다. 중국 농민들은 일을 막으려 했고 조선 농민은 강행하려 했고 중국 공안국에서 사람이 나오게 되고 일본 영사관에서 압력을 넣고 아홉 명의 조선인 개간 당사자가 체포되는가 하면 다시 영사관 경찰에서 충돌하고, 일은 확대일로로 치달아 무장한 쌍방 경찰, 보안대가 대치하고 이쪽저쪽농민들이 대치하고, 위기촉발의 상태로까지 갔던 것이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러나 쌍방간에 중국인 농부가 약간의 부상을 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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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 사상자는 없었고, 결국 일본의 압도적 무력 하에 공사는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여러 가지 면에서 억울했던 것은 중국 농민측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7원 2일『조선일보』호외로 만보산사건은 조선 국내로 비화되었다. 일본 기관에서 흘린 허위 자료를 받은 장춘 주재의 기자가 본사에 타전했던 것이다. 남의 땅에서 가난한 내 동포가 생명에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강조한 그 보도는 순식간에 민족 감정을 자극했던 것이다. 7월 3일에 벌써 인천에서는 중국인 습격이 시작되었고 서울, 가장 격렬했던 곳은 평야이었다. 연이어 부산·신의주·원산, 학살된 중국인 백이십칠 명, 부상자 삼백구십삼 명, 물적 손해는 이백오십만 원에 이른다 했다. 이러는 동안 일본 경찰은 방관했고 또는 극히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물론 만보산사건이 파급되어 국내에서 일어났던 폭풍은 일본이 면밀하게 짜낸 각본 때문이었다. 칠월을 넘기고 팔월을 넘기고 구월 만주사변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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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장 만주사변

송관수가 만주로 떠난 것은 중국인이 속속 본국으로 철수하던 그 무렵의 일이었다.
마주사변은 만보산사건 후 두 달을 넘긴 구월에 발발했는데 정확하게 구월십팔일 유조구의 만철 폭파로써 일본은 만주 침략의 각본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오랜 세월 그들은 얼마나 이 시기를 꿈꾸며 고대해왔는가. 얼마나 초조했으며 또 주저해왔는가. 만주의 군벌 장작림이 북평의 국민군을 내몰고 대원수가 되었으나 결국 북벌군 장개석에게 패하여 봉천으로 가던 열차에서 한때는 동업자였던 관동군에 의해 폭사했는데, 패전한 장작림을 뒤쫓아 국민군이 만주로 진격해올 경우 일본은 매우 불리한 입장이므로 관동군의 고급 참모 가와모토 다이사쿠의 공작에 의해 장작림을 폭살하고 동북 삼성을 혼란에 빠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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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그들은 민주를 장악한다는,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1927년의 일이거니와 역시 만보산사건을 이용하여 던진 미끼를 중국은 물지 않아 일본의 희망은 또 한 번 무너졌다. 무저항방침을 견지하는 중국은 국토가 넓고 세월이 길어 그랬는가. 발버둥치는 일본은 섬나라, 시간이 짧았다고나 할까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정이 급박하게 되긴 했다.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국민정부와 합류한 것은 일본에게는 청천벽력이었을 터이고 중국 전토에 팽배한 반일·항일운동의 격화, 간도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조선인의 무장 봉기가 있었고, 수차 만주 땅에 침입한 바 있는 소련 또한 호시탐탐 남진을 노리고 있었다. 만주를 먹어치우겠다는 불타는 야망의 성취는커녕 자칫 잘못되면 일본은 기득권마저 잃게 될 형편이었던 것이다. 동지철도의 회수를 중국이 강행한 것을 보더라도.
일본의 국내 사정 역시 심각했다. 금융 공황은 경제계를 휩쓸었고 급속한 공업화에 과도한 군비 확장으로 농촌은 피폐해졌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주의 물결은 드세게 일렁였다. 불경기는 수많은 실업자를 거리로 내몰았으며 노동 쟁의는 격화일로, 사회 풍조는 퇴폐와 환락에 흠씬 젖어가고 있었다. 정계 또한 혼란의 연속이었다. 불발이었지만 삼월사건, 런던 군축조약을 들러싸고 천황의 통수권을 간범했다 하여 벌어진 소동, 하마구치 수상의 저격사건, 빈번한 내각의 경질, 일본으로선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만주로 향한 진격,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군부의 관동군 스스로 봉천역 북방 팔 키로 지점에 있는 유조구의 철도를 폭파한 뒤 장학량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면서 공격을 개시한 각본은 관동군의 고급 참모 이다가키 세이시로와 이시하라 간지의 작품이다. 공격을 개시한 십팔일에서 이십일일까지 관동군은 봉천·장춘·길림을 장악했고, 이듬해 이월까지 찌찌하루·금주·하얼빈 등, 사건이 발발한 후 불과 반년 만에 만리장성으로부터 노령인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중요 도시, 전략 거점을 점령했으며 이시하라하고 쌍벽인 모사꾼 도이하라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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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공작으로 천진 폭동을 유도하면서 교묘히 끌어낸 청의 마지막 항제 부의를 내걸고 1932년 3월 1일 드디어 일본은 대망의 만주국 괴뢰 정권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 동안 일본 정부는 세계의 여론을 두려워하여 사변의 불확대를 성명했으나 그것은 구두선에 불과했다. 신속하기가 질풍과도 같은 관동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고 일본 국민은 열렬히 만주 침략을 지지하고 나섰다. 만몽은 일본의 생명선이라 외치면서. 만몽이 일본의 생명선이라 한 것은 정우회 대의원이자 만철의 부총재를 역임한 바 있는 마쓰오카 요소케가 최초다. 그러나 오늘날 이본의 생명선이라고 누구나 말한다. 만몽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책은 그것을 우리 영토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시하라의 호언이었다. 일본 거리 거리에는 애조 띤 군가가 물결치고 퇴폐풍조는 하루아침에 군국주의로 결속이 되었다. 그리고 살찐 암소 같은 만주를 어떻게 요리해 먹을 것인지 군침을 삼키면서 상하 국민 모두가 대륙으로 나는 꿈에 부풀어 애국심은 고양되고 신국, 황도는 한층 공고해졌으며 군병은 신병으로 장엄시되었다. 이 모두가 세계의 주시 속에서 백주에 일어난 범죄였다. 국제간이 정의는 없다. 오직 잇속이 있을 뿐, 모두 어슷비슷한 약탈자이던 열강은 살찐 암송아지를 일본이 독식한다 싶었겠지만 세계적인 경제 공황에 국내 사정이 복잡하였고 실력을 행사할 처지도 아니었으니 입으로나마 떠들듯했으나 막상 소리나마 높인 것은 미국뿐이었다. 하니 중국이 태산같이 믿었던 국제연맹은 공기 빠진 고무풍선이었고, 조사단인가 뭔가 구성하기는 했지만 질풍을 막는 막대기 하나의 역할이라고나 할까. 걸작인 것은 연맹의 사무총장이라는 사람의 말이었는데 와, 일본은 수치를 모르느냐, 일본의 무사도는 어디 있느냐. 과연 일본의 무사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일본 무사도의 본질을 알고서 한 말이었을까.
여하튼 부의를 깃발로 세우고 일본이 만주국 수립을 선포하였는데 이에 앞서 중국의 항일 운동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대되어 특히 상해에선 십만 학생이 수업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왔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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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부두 노동자수만 명이 반일 파업에 돌입하였고 상해 중국은행가협회까지 일본인과 관계를 끊음으로써 경제적 보복을 가하고 시민은 모두 항일 대열에 합류하여 격렬한 배척 운동이 전개되었다. 운동은 나약한 정부에 대한 응징으로도 흘러 외교부장 왕정정의 구타, 국민당사에 난입하여 요인들을 구타, 그 밖에도 항의행동은 속출하였다. 이때 일본은 상해에서 또다시 사악한 음모를 실행하였다. 소위 일본 승려 살상 사건이다. 세계의 이목을 만주에서 돌려놓기 위해 만주 건국의 주모자인 관동군 이다가키의 의뢰를 받은 상해 주재 육군 무관 다나카 류키치가 중국인을 매수하여 승려를 죽이게 했고 범인이 달아난 공장을 습격한 것은 다나카의 지시를 받은 일본의 우익 단체 청년동지회의 회원들이었다. 물론 일본은 즉각 병력을 증강했다. 그리고 일본 영사는 상해 시장에게 시장의 사과, 범인의 체포·처벌, 배일 단체의 즉각 해산 등 네 가지 항목을 시한부로 내밀었다. 수락되지 않기를 바란 일본은 그러나 의외로 시장이 요구를 수락한 것에 당황하면서 수락을 무시하고 육전대로써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이것이 상해사변이다. 무사통과를 예상했던 일본은 분노에 불탄 십구로군의 격렬한 반격과 항쟁의 강한 의지 앞에, 또 중국 민중의 열렬한 군의지지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3월3일, 만주에서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일본은 정전을 성명했다.
송관수가 들어간 만주의 급변한 사정은 대강 이상으로 설명이 되었고, 자아 그러면 지리산의 우리 해도사와 소지감 선생의 동향은 어떠했는가.
해도사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소지감은 돌 위에 엉덩이를 박고 앉아서 해도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작년 음력으로 삼월 삼짇날 밤 김두만의 집을 습격한 두 사내 중 한 사람은 물론 송관수였고 서울 말씨에 젊은 남자는 소지감의 외사촌, 형평사운동에 가담했던 최범준이었다. 그리고 이도영의 집으로 간 손태산을 담위로 밀어올려주고 담 밑에서 기다린 사내는 양필구다. 석이의 전처, 그러니까 성환과 남희의 생모 양을례의 배다른 오라비로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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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손태산에게도 변성명을 하여 정체를 감추었고 일부러 강한 사투리를 쓰기도 했다. 필구는 과거 석이와는 처남 매부지간이었지만 친구이기도 했다. 최범준과 함께 일을 해왔으며 식자층인 그는 다소 냉소적인 일면이 없지 않았으나 을례와는 딴판으로 심지가 굳고 능력 있는 일꾼이었다. 그날의 돈은 소지감과 해도사가 양편에 갈라져서 릴레이식으로 옮겼으며 도솔암 일진이 보관했고, 최범준과 양필구는 구례로 갔는데 양필구와 동명인 윤필구집에 피신해 있다가 서울로 갔다. 송관수는 강쇠를 따라 광주리장수로 떠돌면서 더러는 통영 조병수 집에 묵기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일진과 함께 만주로 간 것이다.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떠나시오.”
연장 망태에 연장을 챙겨 넣으며 해도사가 말했다.
“어느 누가 날 잡아.”
소지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나 약간 난처해하는 빛도 있었다. 수일 전에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 끝에 일이 우습게 되어버렸다. 해도사는 살던 산막의 일체를 소지감에게 떠넘기고 떠나게 된 것이다. 말이 산막이지 구석구석 손질이 잘 되어 조촐했고 필요한 세간은 모두 구비된 데다 장무새며 뒤꼍에 묻어놓은 머루주, 십 년이 넘는 더덕으로 담근 술이며, 술이 소지감을 유혹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밥도 짓고 심부름도 곧잘하며 이제는 철이 든 몽치를 두고 간다는 것이다. 상당한 거리이긴 했지만 아래쪽엔 도솔암이 있었고 왼편으로 곧장 가면 강쇠의 산막이 있어서 오고 가고 반나절 거리, 왔다갔다 할 수도 있었다. 해도사는 연장 망태와 갈청같이 얇은 이불 하나, 옷 몇 벌, 당장에 끓여먹을 기구들을 꾸리면서 피아골 쪽에 쓸 만한 목기막 하나를 봐두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떠났다가 오고 싶으면 또 오는 거구, 새도 둥지가 있는 법인데.”
홀가분해진 해도사는 히쭉히쭉 웃었다.
“누구 말이오?”
“누구긴 소선생이지요. 나야 뭐 옮겨봤자 산속이지.”
사실 해도사는 홀가분했다. 진작부터 털고 일어날 심산으로 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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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보고 와서 살라는 말도 했었다. 그때만 해도 강쇠 곁이 아니면 죽는 줄 알았던지 안서방은 도통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후론 팔자에 없는 훈장질 하느라 매여버린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어째 일이 재미없게 된 것 같구먼.”
햇볕 따라 돌에서 축담으로 옮겨앉으며 소지감이 말했다.
“지금 와서 그래봐야 소용없소이다.”
“내가 자주 와서 귀찮아진 거요? 내빼는 거 아니오?”
“내뺀다…… 그런 점도 있겠지요. 산은 원래 인내를 싫어하고 산짐승도 인내를 싫어하고 산사람도 그러니,”
“흥, 산놈은 사람 아닌가?”
“사람이로되,”
하다가
“역마살 든 소선생도 인내야 반쯤 빠진 사람이지. 하니 이 산막의 주인으론 자격이 없지도 않고.”
“거 징그러운 소리 마시오. 주인이라니.”
“왜요? 천년만년 묶어둘까봐 겁이 나는 거요?”
“도사께서 왜 이러시오.”
“산사람하고 역마살 든 사람하고는 골육간이라, 말뚝 박아놓고 베리줄에 묶여서는 못 사는 사람, 집이 있으되 산에서는 그게 집이던가. 내가 있으되 그게 어디 나이던가. 내가 있으므로 남이 있는 것, 남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 남이 없는데 어찌 내가 있을꼬. 소선생께서는 오십 평생을 해인으로 왔건만 그거 말장 허행이었었소. 아직 자신으로부터 풀려나지 못하니 눈먼 말이 은령 소리만 듣고왔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하다가
“은령 소리 듣기론 눈먼 말이나 눈뜬 말이나 매일반이지.”
그 말대꾸는 하지 않고 해도사는
“산에는 갈구리질하는 관속도 없고요, 채찍 들고 호령하는 상전도 없고 다락같은 소작료, 못 내면 딸년이라도 내놔라 할 지주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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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래저ㅐ 해서 죄지은 사람 억울한 사람 잡아가두는 감옥도 없고 누가 하라마라 할 사람이 있소? 불질러 화전 부쳐먹다가 땅심 덜어지면 옮겨가고 임자 없는 열매, 임자 없는 산채,”
“허니 무정부주의다,”
“아암 암요.”
“그러니까 선남선녀들이다,”
“무도한 인사가 없다 할 수는 없으나 빼앗아갈 재화가 산속에 있어야지. 하여도 명줄은 이어갈 수 있는 곳,”
“지상천국이구려.”
“산에 맛을 딜이고 한번 인이 박혀버리면 산을 더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시쳇말로 자유라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것이다, 그 말인데 신선이 무어이겠소? 소위 자유인, 풀려난 사람 아니겠소이까? 어디 사람뿐이겠소? 천지만물 생명 있는 것, 그 모두가 남에게서 풀려나면 나로부터도 풀려나는 게요. 수십 년 기나긴 성상 소지감선생께서 헤매고 다닌 것은 무슨 까닭이요? 골육에서 풀려나고자, 윤리 도덕에서 풀려나고자 한 몸부림 아니외까?”
“도사 말씀대로 하자면 독립운동하는 놈들 모두 시러배자식들이군.”
“원칙으로는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이오. 독립이다, 침략이다, 그것다 없느니 못한 것 아니겠소?”
“침략이 없었으면 독립운동도 없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
소지감은 소리내어 웃었다. 웃거나 말거나 해도사는
“무리를 짓고 당을 만들고 그게 민족이요, 국가요, 법이오. 그야아 인간이란 똑똑하고도 영악한 조물이니 어쩌겠소. 그러나 생명을 만들고 운행하게 한 조물의 법보다 신기할 수는 없는 것,”
“그럴싸하게 늘어놓기는 하오만 말같이 쉬운 것이라면 해도사와 소지감이 이렇게 앉아서, 한 사람은 짐을 꾸리고, 그렇게는 안 되었을 것이오.”
“말이 쉬운 것이 아니지요. 이치가 쉬운 것이요 명료한 것인데 사람들이 어렵게, 어렵게 사는 탓으로 쉬운 것을 알질 못하는 거요.”
page 122

어쨌거나 두 사람은 죽이 맞는다. 내용이야 있건 없건 말은 이들에게서 장단인 것이다. 짊어지기에 알맞게 짐을 꾸린 해도사는 손을 털고 일어섰다. 먼산을 한번 바라보고 집터 주변을 돌아보고 나서 해도사는 마당에 멍석을 깔았다.
“몽치야? 술상 내오너라.”
족제비를 보고 마당 앞뒤를 쏘다니던 몽치는 예상하고 있었소, 하듯
“예애……”
늘어져빠진 대답을 했다.
진다래철은 갔다. 골짜기마다, 개울가 바위틈에 철쭉은 터질 듯 봉오리를 물고 있었다. 궐련을 붙여문 소지감의 망연한 눈이 구름을 보고 있다. 산새 소리는 왜 그리 요란한지 알 자리를 찾는가, 수컷을 부르는가, 산, 산, 끝이 없이 연이어진 산, 눈으로 생각으로도 가늠해볼 수 없고 침묵도 언어로서도 아무 소용이 없는 산, 말이건 생각이건 다람쥐가 가먹고 버린 도토리 껍질만큼 쓸모도 없는 곳,

















 

알베르토 망겔 (Alberto Manguel) 양병찬 (옮긴이) 행성B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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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된 독자-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양병찬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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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목하 (지은이) 아작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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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지음 / 아작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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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지은이) 문학동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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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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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철 2020-02-0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권

4부 2권

제4편 인실의 자리

01장 휘의 갈등

“봄아 봄아, 우찌 그리 더디 오노. 고봉준령 넘니라고, 허리 아파 쉬니라고 더디 오나. 산밑에는 명춘화 산수유도 피었일 기고 까치는 안짱걸음 걸음시로 고개 넘어 손 온다고 까까거릴 긴데 첩첩산중 이 골짝은 우찌 이리도 적막강산인고.”
납독이 올라 얼굴과 입술, 잇몸까지 푸르딩딩했던 춘매는 봄이 더디 온다고 푸념하곤 했었다. 그러던 춘매도 이른 어느 봄날, 꽃바람에 할미 죽는다는 말을 뇌면서 세상을 떴는데 그것도 꽤 오래된 일이다.
지리산 산록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에 봄은 분명히 와 있었다. 휘는 돌소금 한줌을 들고 개울가로 나왔다. 높은 계곡에는 낙수가 하얗게 얼어붙은 채 있었지만 개울은 녹아서 맑은 물이 구슬처럼 구르고 있었다.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서 이를 닦는데 휘는 발소리를 들었고 돌아보지 않았지만 순일 거라고 직감했다. 순이였다. 그는 이를 닦는 휘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서 이고 온 사기를 내렸다. 소매를 걷고, 팔뚝이 터서 빨갛다. 사기에 물을 붓고 휘휘 젓다가 물을 쏟은 뒤 보리쌀을 씻는다. 휘는 멈출 수 없는 듯 계속해 이를 닦고, 순이 역시 계속해 보리쌀을 씻는다. 두 사람의 침묵은 터질 듯 팽팽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도 터질 듯 팽팽했다.
page 4부 2권 331




02장 초야

혼례는 치렀다. 신방에 신랑도 들어갔다. 산은 끝없는 정적에 묻혀 있었고 이따금 밤새 우는 소리,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짝쇠네 집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 합석했던 짝쇠는 술이 몇 순배 돌자 일어섰다. 연소하여 그랫던지, 의기소침한 안서방 보기가 딱하여 그랬던지 안서방을 이끌고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하기는 방이 협소해서 여섯 사람이 앉아 술 마시기는 매우 옹색했다. 사돈지간이 된 김강쇠와 송관수, 그리고 혼례랄 것도 없는 초라한 의식을 흉내나마 절차를 밟아준 해도사, 일진도 없는 빈 절간에 상좌와 함께 머물러 있던 소지감, 네 사람이 남았다.
“그 댁에서는 이장을 해왔소?”
해도사가 관수에게 물었다.
“얼음이 풀리야 이장이고 머고.”
관수가 대답했다.
page 350

“하면은 송형 혼자만 왔다, 그 말씀이오?”
“질수가 다른께 함께 와야 할 까닭도 없고.”
“조카딸이 있다니께 유하는 데는 걱정이 없일 기고 느긋하게 구겡이나 하고 오믄 되겄네.”
강쇠 말이었다.
“구겡이 다 뭐꼬? 일각이 여삼추라 얼음 녹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거를 보고 왔구마.”
“하기는.”
해도사가 술잔을 놓으며 말했다.
“뿐이건대? 이거는 석고대죄라도 하는 꼴이라. 울기는 와 그리 쩔쩔 우는지, 핏줄도 아닌 양분데 머가 그리 맺히고 설분지 알다가도 모리겄더마.”
“그게 법이라.”
해도사의 말에 강쇠가 덧붙인다.
“양반네 법이제요.”
“양반이라고 저저이 다 그러지는 않소이다. 아무튼 매우 지순한 사람이군요.”
소지감이 한마디 했다.
“그 양부에 그 양자라, 할 말은 하지요. 내 어릴 직에 이웃에서 보아왔지마는 김훈장 그 양반 추수가 끝났다 하믄 노자 맨들어서 양자 찾니라고 사방을 쏘다녔구마는. 가문을 닫고 내가 무신 면목으로 조상을 대할가부냐, 그게 그 양반 입버릇이었제요. 꼬장꼬장한 늙은이, 고집이 평양땅 고집이고 나도 산에서 많이 대들고 했는데…… 지내놓고 보니 그 양반만한 어른도 세상에는 드물더만요. 말이 양반이지 농사꾼으로 살았고 글을 빌릴라 카믄 동네 사람들 그 양반 찾아갔인께. 그래도 비단가리 하나 바라는 게 없었고, 답대비, 그 골수에 박힌 양반이라는 생각이 병이었제요.”
“……”
“한경이 그 사람도 좀 모자라서 그렇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오. 그러니 효성이 지극하고 남부럽지 않는 아들을 두었고.”
page 4부 2권 351

그 말을 할 때 관수의 얼굴은 쓸쓸해 뵀다. 소지감은 모르지만 강쇠와 해도사는 영광이 집 나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묘해진다.
“그러면 그때는 산에 들어갔으니 의병이었고 다음에는 동학군이었고, 다음에는 뭔고? 형평 운동 하는, 시쳇말로 무정부주읜가, 사회주읜가 뭐 그런 것인가? 아니면 독립 투사인가? 송형, 알쏭달쏭 하오이다. 어쨌거나 장돌뱅이 아들치고는 경력이 출중하니 개천에서 용 났다 할 수도 있겠구먼.”
해도사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지나간 얘기는 와 하는고. 된 일이 머 하나 있어서, 젠장.”
“하는 짓짓마다 남 안 하는 걸 했으니 하는 말이지.”
“앗따! 사내장부가 된장 담고 꼬치장 담고 산속에서 멀거니 해 쳐다봄시로 개대가리 죽써묵고 옴대가리 찜쪄묵는 소리나 중얼중얼, 그거는 남 하는 짓이던가?”
“하하핫핫핫…… 시비 나겠소. 면대하여 칭찬하기 면구스러워 그러는 거 아니겠소. 해도사 속으론 부러울 게고 부끄러워 그러는 거요.”
소지감 말에 해도사는
“아아니 물굽이가 왜 그렇게 돌아가지요? 은근슬쩍 사람을 화살판으로 내밀어놓으면서 뒤에서 두 손 싹싹 부비는 꼴이구먼.”
소지감은 껄껄껄 웃었다.
“자알들 노네. 오늘이 우떤 날이라꼬 송관수만 날개를 다노 말이다.”
“오늘이 무슨 날이오?”
짐짓 놀란 척하며 해도사가 묻는다.
“내 아들 장개간 날, 몰랐소? 말을 하자 카믄 내가 상객인데 뒷방 안늙은이맨크로 푸대접을 하니.”
“가만히 있자아, 여기가 그러면 지리산이 아니고 부산 항구란 말인가?”
해도사는 능청을 떤다. 강쇠는 피식 웃었다. 소지감도 웃고, 그러
page 352

나 관수는 웃지 않았다.
“저놈의 인사 때문에상객 노릇도 못하고 제에기랄!”
강쇠는 농치면서 관수를 곁눈질해본다. 신부집에서 초례를 치러야 말 타고 따라간 신랑집 어른이 상객이 되는 때문에 해도사가 한 말이었다. 어쨌거나 강쇠는 상객이 아닌 주인의 처지인 것이다.
“그나저나, 용케 무덤을 찾았구먼요.”
소지감은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소. 뫼 슨 사람이 있었인께요. 무슨 핵교 선생이라 카든지 용정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데, 또 최참판댁 환국이아부지가 소상하게 알으키주었고 홍이가, 그러니까 조카사윈데, 발벗고 나서주었제요.”
“그 참 다행이구먼. 옛날에는 호지에서 부모 뼈 추려올려면 수천 냥을 짊어지고 가야 했다는데 왜놈들 땜누에 그렇지 돈은 안들어서 좋았겠소. 그는 그렇고, 어떻든가요? 희망이 터럭만큼이라도 있어 뵈든가요?”
해도사의 말이었다.
“머가요?”
“아, 뭐긴 뭐겠소. 그곳 형편 말이오.”
관수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무식한 내가 머를 알겄소. 잘난 사람들 만나본께 희망이 있다 카고 헹펜 돌아가는 거를 보니 하자세월, 이곳이나 그곳이나 다를 기이 머 있겄소. 왜놈한테 쫴고 되놈한테 쫴고, 오나가나 그 신세가 가련키는 매일반이지. 옛날에는 조선 사람들이 되놈으로 민적을 옮기기만 하믄 얼매든지 땅을 부치묵을 수도 있고 개간도 할수 있었다 카는데, 그래도 오만 고생 다 하믄서 민적 옮기는 것을 마다했다, 흥, 그 시절이 좋았다는 거요. 지금은 묵고살 수가 없고 왜놈 등살에 이도저도 할 수가 없으니 되놈으로 민적을 옮기고 머리도 깎고 하지마는 또 그기이 아이라는구마. 왜놈이 민적을 파주지 않은께 되놈 민적에 왜놈 민적 두 개를 달고 댕긴께 그 고달픔이 오죽하겄는가. 생각해보소.”
page 4부 2권 353


“어째 그럴 수가 았을꼬.”
해도사가 말했다.
“결국에는 왜놈 되놈 사이에 끼어서, 따지고 보믄 중국 사람이 그럴 만도 하지. 육실할 왜놈들이 조선땅 묵고 또 야금야금 중국땅묵을라 카이 그 사람들 와 안 그러겄소. 왜놈은 조선 사람이 땅 가지는 거는 언제든지 저거 꺼로 할 수 있인께, 때에 따라서는 조선사람 앞세워 땅을 살라고도 한께. 또 한 가지는 조선 사람이 중국민적으로 옮겨가믄 왜놈들이 잡아들일 권한이 없어지는 거라. 그러니 독립운동하는 사람 잡기도 어려버지는 기고. 중국 사람들은 또 일본놈 손에 움직이는 일부 조선 사람들이 있인께 조선 사람들을 경제하고 발 못 붙이게 하고, 그러니 죽어나는 것은 조선 사람들 아니겄소. 먼저 가서 자리잡은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지마는 뒤늦기간 사람들은 그 고생을 입으로는 다 말 못하는 거요. 풍찬노숙, 북풍이 쐥쐥! 부는, 죽어도 누가 알기나 하나. 돌아오자니 땅이 있어, 집이 있어. 생각해보믄 목이 터질 일이제. 땅 뺏기고 만주로 쫴끼간 사람치고 힘 있는 백성 한 사람이나 있었나? 의병이다 독립 투사다 하는 사라들만고는 땅 파믄서 게우 멩줄 잇듯 불쌍한 사람들뿐이었제. 죽지 못해 간 사람들이 그곳에서는 더한 핍박을 받으니, 그놈들이 땅 뺏고 이 땅에서 몰아냈이믄 그곳에서나 살게 내비리두지…… 우리는 한사코 싸워야 하요, 싸우는 것밖에 없소. 그 길밖에 없단 말이요. 사람우 한 세상 안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겄소.”
목소리는 낮았지만 절규하듯 응혈이 터질 듯 관수가 자아내느 분위기는 그러했다. 관수가 이 지점까지 온 것은 우연도 작심에서도 아니다. 동학당으로 죽음을 당한 장돌뱅이였던 아비, 김훈장을 따라 산에 들어간 사이 행방을 모르게 된 어미, 그리고 은신처에서 만나 부부로 맺어진 백정의 딸인 아내, 그 응어리가 여기까지 오게 했으며 또 앞으로 가야 할 길에는 아들 영광의 한이 짙게 서릴 것이다. 네 사람 중에 가장 많은 설움과 고통을 넘어온 송관수, 해서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다. 딸을 남겨두고 아들의 행방은 모른 채 떠나야 할 자신, 그는 마음속으로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강쇠
page 354

는 너무나 잘 안다.
“잘 처묵고 잘살믄서 유세부리고 살던 사람들, 그 잘난 사람들 때문에 백성들은 헐벗고 굼주리야 했는데, 이 강산에서 젤 덕을 많이 본 그 잘난 사람들이 내 강산 팔아묵고 연명을 하는데 백성들은 설땅조차 없으니 이자는 그 잘난 사람들 처분만 기다리서는 안 되는기라. 내 살길 내가 찾더라고 언제까지 백성들은 이렇기만 살아야하노 말이다.”
“그래 아까 듣자니까 그쪽 잘난 사람들 얘기는 어떻던가요.”
해도사가 말했다. 관수는 해도사를 빤히 쳐다본다. 해도사는 그눈을 여유있게 받는다. 한참 후,
“세상 버리고 구찮은 짓 안 하고 태펭으로 삼서 세상일 머가 그리 알고 접어 앙달복달하요.”
관수도 조금은 여유를 찾은 듯 말했다.
“내가 언제 세상을 버렸든고? 여기는 세상 아니란 말이요? 내가 세상을 버렸다면 옛날옛적에 삭발했지. 그러지 말고 귀동냥 좀 합시다.”
“잘난 사람들 한둘이 아니고 제제각금 얘기의 질수가 다른께 나겉은 무식쟁이가 우찌 옳게 듣고 제대로 얘기할 수 있겄소. 그러나 대충 잡아서, 우떤 사람은 내다보기로 멀잖아 왜놈하고 중국이 붙을 긴께 장개석이하고 손을 잡아서 함께 싸워야 한다 카고, 우떤 사람은 장개석은 좀체로 일본하고 싸울라 카지 않은께,”
“와 그렇노? 와 안 싸울라 카노?”
뚝배기 깨지는 소리로 강쇠는 관수의 말을 잘랐다.
“대국이 쥐새끼 겉은 왜놈 무서바서 안 싸울라 카나!”
“제발 철늦은 소리는 그만 해라.”
“얼씨구? 잘난 소리 하네.”
“꿈에도 못 잊은 그 성님 말할 직에는 니는 귓구멍에다 소캐를 박았더나? 몰라도 한참 모린다.”
“부작대기 갖고 와서 귀 좀 후비야겄구마는. 그래 한참 모리는 이바구 해봐라.”
page 4 부 2권 355

“청국이 일본하고 싸워서 진 것도 모리나.”
“지금이 어디 청국가?”
“아라사하고 싸워서 일본이 이긴 것도 모리나.”
“그런께 간단하게 말해서 일본이 대국보다 세다 그 말이구마.”
“방천에서 풀 뜯는 소새끼를 붙잡고 얘기를 하는 기이 낫겄다.”
“허허어, 사돈지간에 왜들 이러시오.”
소지감이 중재에 나섰다.
“자중지난이 망쪼라. 자중지난이 없었던들 일본이 득세했을까. 거 김장사, 말에 뉘 넣지 말고, 늦은 밥 먹고 파장에 가는 말은 두었다 하시오.”
해도사의 면박이다. 물론 수작에 불과한 것, 아무도 진지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묵사발이네. 제에기랄! 아들 장개가는 날에도 유세 한분 못하고 접시물에 빠져죽든지 해야지 어디 살겄나. 설어서 못살겄다.”
한바탕 웃는다.
“송형 하던 얘기나 이어보시오.”
혼자 웃지 않고 있떤 관수는 해도사 재촉에,
“어지간히 보채쌌는다. 그렇기 알고 저브믄 찰떡 해 짊어지고 내일이라도 떠나는 기이 우떻겄소?”
“아닌게아니라 한번 그래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소이다. 그는 그렇고 하던 얘기나 끝내시오.”
“내가 어디까지 얘기를 하다 말았는고? 그렇지, 장개석이는 일본하고 싸우는 동안 공산당이 뒤통수 칠까봐서 일본이 별의별 짓으로 유인을 해도 꼼짝 않은께 공산당하고 손을 잡고 싸운다믄 아라사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기니, 또 앞으로의 세상은 공산당 천하가 될 기고 핍박받는 백성이 사람 대우 받고 살 것인즉 그쪽 편에 서서 뛰어야 머가 돼도 될 기라, 그런 말을 하는가 하믄 또 우떤 사람은 이를 갈믄서 그놈들을 믿느니 시베리아 벌판의 늑대들을 믿겄다, 지난날 피맺힌 원한을 몰라 하는 소린가, 우리 독립군을 모졸리 제 땅으로 불러딜이놓고 박살을 냈던 전사를 몰라 하는 소리가,
page 356

그 아무도 믿을 기이 없고 마적질을 하든 우리 힘으로 무장을 해서 왜놈들 뒷구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왜놈 앞잡이들을 모조리 암살해야 한다, 그라고 나라 안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남에게 얹혀서 일하다가는 죽쑤어 개 주는 꼴이 될 기라 카서, 나는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더마.”
“아무리 일리가 있어도 힘을 도외시해서는 움직일 수 없지요. 주먹으로 바위를 친다고 끄덕이나 하겠소.”
소지감이 말했다.
“그거야 머 주먹 대신 지릿대를 쓸 수도 있고 바위 깨는 화약을 쓸 수도 있고,”
“지렛대, 화약을 쓰자면은 역시 빌려와야지 우리에겐 주먹밖에 없질 않소. 약게 그들 힘을 이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소이다.”
그 말 대답은 없이 있다가, 관수는 딴생각을 하면서 건성으로 하던 말을 계속한다.
“전쟁이 나야 하는가 하는 것도 생가들이 구구하더마. 전쟁이 나믄 조선 사람들 씨가 말릴 기라 걱정하는 사람도 많고 전쟁 없이는 끝도 없고 우리 나라 독립의 기회는 영영 없어진다 하든데 내 생각도 그렇소. 소선생이 아까 말심했듯이 큰놈끼리 붙어서 부서지는 사이에 우리가 살아남을 기라는. 전쟁이 안 난다 캐도 왜놈은 우리를 말리직일 기요. 우쨌든 꽝! 터져부리고 보아야 한다.”
“그래 쾅! 터져부리야, 하늘하고 땅하고 하루 한시에 붙어부리라! 시시로 나는 생각이제.”
강쇠는 내뱉듯 말했다.
“동문서답하네.”
해도사의 핀잔이었다.
“와 이라요? 나도 그런 뜻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말이요. 서당개 삼 년이믄 풍월을 읊는다고 했고 도방 출입 수삼 년, 제에기럴! 이런 날에도 그런 얘기 해야 하나?”
“누가 말려. 며누리 해주는 밥이나 먹고 구둘막이나 지키시오.”
핀잔은 또 날아왔다. 사실 강쇠는 심가 좀 뒤틀리어 있었다. 술
page 4 부 2권 357

은 별로 하지 않고 줄담배만 피고 있는 관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내 아들이 우때서? 그렇기 앵하믄 누가 지 딸 데꼬오라 캤나.’
패주고 싶기도 했다 패주고 싶다는 것은 강쇠 자신이나 휘의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산에 두고 가는 딸에 대한 연민은 지금 송관수에게는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전후좌우의 역사와 상황에서 보면 영선은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관수에게 개인적인 그런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 위험하고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을 수도 없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관수는 자신의 개인적인 갖가지 비극을 지금 반추하고 이쓴 것이다. 그리고 새김질이 잘 된 것을 해야 할 일터로 넘겨주면서 해야 할 일에 튼튼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강쇠나 관수를 패주고 싶다는 것은 연민의 감정 때문이다. 소지감 때문에 뚜드려 패주었던 그때의 미묘한 배신감하고는 전혀 다르다.
‘제기랄! 잘난 놈들이나 할 일이제. 잘난 놈들 새이고 새있는데 와 우리 겉은 놈들이 맨 앞자리에 나서야 하노 말이다. 이런다고 백정이, 갖바치가 영웅호걸 될 기가. 흥, 우리 생전에 회포할 것 겉지도 않는 일을.’
슬픔과 분노가 치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분노가 치밀 때마다 강쇠는 관수를 패주고 싶은 것이다.
“식자우환이라.”
지금까지의 화제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방안의 사람들은 생소한 느낌을 받는다. 사실 처음부터 이 술자리는 경사를 치른 뒤의 느긋하게 즐기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안서방과 짝쇠는 순이 때문에 강쇠나 해도사의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했다. 그들 역시 술자리에 어울릴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물러났지만, 그러나 미묘한 관계를 모르는 소지감도 너털웃음을 웃곤 했으나 일말의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해도사의 말이 맞긴 맞소. 용이 못 된 이무기가 제아무리 뛰어봤
page 358

자 승천은 못할 기니 말이요. 내 아들놈의 경우도 공부 대신 칼을 쥐여주었더라면 저잣거리서 쇠고기나 팔고 살았일 긴데, 가심 쥐어뜯는 일도 없었일 기고.”
관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새벽녘에 그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하나. 하기야 용이 될지 이무기가 될지 그건 세월이 말해줄 것이고.”
하다가 해도사는 관수를 곁눈질하며,
“백정의 자식이,”
말을 끊고 다시 관수를 곁눈질하며 본다. 전갈이 관수 얼굴에 살기는 떠오르지 않았다. 애비가 백정 아닌데 아들이 어째 백정이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내에 대한 측은함 때문이리라. 하기는 여태 관수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백정의 자식이 칼 놔두고 붓을 들었다면 까시밭길로 들어선 거지. 식자 주워담아서 잘난 사람, 험집 없는 사람, 그들 속으로 엉덩이 부비며 들어가보아야 눈총에 송곳방석, 못 견딜 것이고 옛둥지에 돌아와본들 반쯤 양반이 되어 왔으니 그들에게는 낯선 나그네라. 혹 백정의 지도자로 떠받쳐 뫼실 경우가 있을 시에도 그건 깃발인 게요. 높이 쳐든 깃발이 바람을 타는 것은 정한 이치, 앞으로 몇 번 그 깃발이 찢기고 쓰러져야 백정의 흔적이 없어질런고 그건 불가지라. 해서 이리 가나 저리 가나 까시밭길이라 그 말이오.”
“이래도 저래도 죽은 판이다 그 말이구마.”
강쇠의 말이었다.
“아암.”
“그라믄 송관수 사위도 공부 때리치워야겄네.”
“뭐라 캤소?”
“고학하고 신학도 구별 못하오? 이제는 상놈들 고학좀 해두어얄게요. 시체 양반들 고학 하는 것 보았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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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양반 쓰다 버린 것 상놈이 주워 하게 돼 있고,”
“더러바서.”
소지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화제에서는 물러나 앉은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더럽다 할 것 없소이다. 입다 버린 누더기도 아니겠고 먹다 버린 밥찌꺼기도 아니겠고, 때에 따라서는 보화를 버리고 유리 구슬을 줍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으니까. 생각해보시우? 지금 일본으로 유학가는 사람들 말이오. 말장 다 버리고 가지 않던가요? 말짱 다 버리고 알몸으로 건너갔으니, 가서 걸음마부터 배워야 할 판이오. 일본 구경도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소선생은 배우는 데 편견 갖지 말라 할 것이며, 하나라도 더 배워서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할 것이오마는, 그것이 그렇지 않소이다. 또 나는 남의 것 배우지 말라 고집하는 것도 아니오. 배우기는 배우되 우리것을 내동댕이치고 박살을 내지 마라 그 얘기요. 그러나 형편을 보아하니 배우는 것보다는 버리고 박살내는 것을 더 주장하고 있으니 상놈들이라도 버리는 것 박살내기 전에 주워서 간수하라 그 말이오. 내가 세월을 보아하니 한동안 벽에 부딪치기까지는 소위 신학문이라는 것을 가지고 용천지랄들 할 모양인데 생각해보시오? 세월은 그냥 세월이 아니외다. 세월은 만들어놓고 가는 거요. 다듬어놓고 가는 거요. 갈아놓고 가는 거요. 왜 만들며 다듬으며 갈아놓는가. 삼라만상 생명 있는 것이 그 생명을 부지하기 위함이요, 부지하더라도 좀더 편안하게 부지하기 위함이 아니겠소이까. 하면은 우리의 수천 년이 그리 헐값은 아니라는 게요. 생각해보시오. 자고로 상층에서는 변화무쌍하여도 하층의 외곬이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전해준 거요.”
“꿈보다 해몽이 좋구려.”
겨우 소지감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해도사는 입술을 오므리며 끼룩기룩 웃는다. 웃다가.
“소선생, 사람 사는 이치는 안팎을 뒤져도 뻔한 거 아니외까?”
“아니라고 내가 말할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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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의 이치도 뻔한 것 아니던가요?”
“글쎄, 모르는 게 많아서 이치가 뻔하다 할 수 있을는지, 하하핫핫……”
“달이 뜨고 달이 지고 해가 솟고 해가 지고 그 얘기지, 왜 달이 지고 뜨는가 왜 해가 솟고 지는가 이유가 아니지 않소.”
“그렇다면은 뻔한 얘기지요.”
“신학문이라고 뻔한 이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시오? 양인들의 귓구멍이 셋은 아니지 않소? 눈알이 한 개도 아니지 않소? 서양서는 물고기가 산에서 살고 들짐승이 물속에서 사는 거는 아니지 않소? 그들도 비상을 먹으면 죽을 것이요 동삼을 먹으면 힘이 솟을 것이오. 연장이 좀 다르다 하여 근본이 다르지 않을 것이며 수많은 목숨들이 각각 흩어져서 살다 보니 사는 곳마다 산과 내가 조금씩 다르고 바다와 들판이 조금씩 다르고 사계절 기후가 조금씩 다르고.”
“염불하는구마.”
“허허어, 김장사, 끝까지 들으시오. 해서 목숨 있는 그 모든 것의 사는 방법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인데 그쪽이 서방정토는 아닐 터인즉 또 천당도 아닌 터에, 천당이라면 천당 가려고 예배당에 나가겠소? 하는 짓들을 보아하니 해놓은 밥 놔두고 쟁피 훑어서 죽쑤어 먹겠다고 들판으로 내달리는 꼬라지라. 굳이 내가 옛것 우리것을 고집하자는 게 아니외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조상없는 자손이 어디 있겠소이까. 남의 것을 가져와서 접목을 하더라도 뿌리는 있어야 하니하겠소오? 하기는 우주 근본의 얘기를 하자면 이것들은 지엽이요, 또 지엽이란 뿌리에 이어지는 것,”
“점입가경이오. 하여간 그 얘긴 한참, 한함 두었다 하시오. 나뭇가지를 말짱 잘리어 몽당나무가 되어 숨이 갈락말락, 이 판국에 엿가락 늘이듯, 하기야 뭐 길게 내다보고 하는 얘기 나쁠 것도 없겠소만, 그 새 숨 넘어가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는데 돌팔매로 새 잡자, 하하핫핫……”
심각한 논쟁도 아니었고 열을 올리는 것도 아니었다. 죽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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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주거니 받거니 시간을 흘리는 것이었다.
“허허어, 이럴 수가 잇나. 소선생도 내가 말한 큰 뜻을 몰라준다면 이거 이제 세상 다된 거요. 그래도 내 딴에는 속이 꽉 찬 선비로 알았는데 영 사람 잘못 보았어. 실버들 한 가지 꺾어들고 태산을 자질해도 유분수, 그래 내 말하리다. 제아무리 비행기가 잘 난들 제비를 당할손가, 벼락 한번 번뜩하면 콩가루가 될 터인데, 그래 그게 대수란 말씀이오? 만물에서 인간이 가장 영악하다고들 하지마는 나고 죽는 것을 어찌 관장할 것이며 봄은 제발로 오는 것이지 사람이 끌고 오는 것이 아닐진대 만물의 소생이 어찌 그쪽 사람들의 능사이겠는가.”
“내사 귀신 운감하는 소리맨크로 머가 먼지 하나도 못 알아듣겄소.”
해도사는 강쇠의 말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지조화를 깨뜨려서는 아니 되고 인간이 영악하게 조화를 한사코 깨뜨리려 들면은 끝에 가서 재앙을 받을 것이라, 재앙을 받기 전에 증산의 말을 빌리자면 천지공사를 바로잡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오. 서양 그들의 문물은 헛되고 헛된 것이 될 것이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장육부도 그래야 보존이 되는 법, 많이 먹어서 배터져 죽고 적게 먹어서 부황에 죽고, 이치에는 한치 어긋남이 없나니, 총, 대포 끌고 와서 남의 땅 거먼거먼 줏어먹듯 어찌 그들인들 배가 터지지 않을 것이오. 당장에는 강대국이라 하겠지만 과다한 섭취는 병들기 마련, 갖가지 처방은 하겠으나 혈맥이 제대로 통할 리가 없고 여기저기 막히니 여기저기 뚫어보나 뚫기보다 막히는 게 더 많아 그래 말기에는 광증으로 박살이 나는 게요. 우주만물이 막힘이 없이 돌아가야 그래야만 모든 생명들 거하는 곳이 극락이 되고 천국도 되고.”
“하하하핫 하핫핫핫…… 그거 그럴싸한 얘기로군. 한데 도사님, 그때가 언제쯤 되겠소?”
“어찌 천기를 누설할손가.”
해도사는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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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믄 그때꺼지 감나무 밑에서 잠을 자야겄네.”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이들은 자정이 지났을 때 밀담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맞대고 소리를 죽이며, 바닥에 자락을 깔았던 긴장이 노골화되었다.
이 무렵, 밖에서도 횃불을 켜든 안서방과 짝쇠는 산속을 뒤지고 있었다.
“경사에 소란스럽기 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지가 갔으믄 어디로 갔일꼬? 이 근처 어디에 있겄지.”
안서방이 당부하고 나갔으나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순이네는 집 뒤란을 쏘다니며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짝쇠 집은 다소 거리가 있어 바깥 기척을 모르고 있었지만 휘의 어미는 눈치를 채고 나왔다.
‘그 뭇아한 가시나가 일 저지른 거 아니까?’
신방에 신경을 쓰며, 울고불고하는 순이네에게 말도 걸지 못한채 팔장을 기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빌어묵을 가시나 뒤질라꼬 나갔나. 오밤중에 어디로 갔다 말고. 어이구 내 팔자야!”
순이네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쳤다.
혼사 끝에 이것저것 배불리 먹고 깊이 잠들었던 길륭이 방에서 기어나왔으나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땅바닥에 주질러앉아 있었다.
“어이구 이눔의 가시나를 우짜믄 좋노. 쇠 빠져 죽을 년 그만 범이나 물어가지. 부모 속썩이는 년은 자식도 아니다. 차라리 죽어부리는 기이 나을 기다! 어이구우, 이 일을 우짜노!”
순이네는 어둠 속을 뛰어나갔다가는 자빠지고 미끄러지고 하면서 돌아왔고 뒤란을 돌다가는 울곤 한다.
“참말이제 기도 안 찬다. 일이 우찌 이리 돼가노. 오늘겉이 좋은날에.”
팔장을 끼고 떨면서 휘의 어미는 중얼거렸다.
신방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열여덟 동갑나기 신랑과 신부, 휘는 진솔의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영선은 친정서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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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옷감으로 짝쇠댁네와 순이네가 밤새워 지은 다홍치마 유록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짝쇠가 마을까지 내려가서 겨우 빌려온 족두리는 벗겨져 있었으나 그들은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다. 철은 다 들었지만 암된 성질의 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참에 밖에서 술렁대는 기척을 이들은 들었다. 휘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관자놀이가 흔들렸고 무릎 위에 놓은 두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밤새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꽃잎이라도 떨어지듯 그렇게 들려왔다. 순이네의 우는 소리도 아슴푸레 들려왔다. 신방에 차려놓은 술상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영선은 고개를 숙이고 그림자 같이 앉아 있었다 산에 온 후 이상한 순이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바깥 기척에 영선이 예민해진 것도 마음에 쌓였던 의혹 때문이다.
“빌어묵을 년! 덩신 겉은 년! 내보란 듯 살 생각은 안 하고 지가 죽기는 와 죽노! 그래 이년아, 잘 생각했다! 죽을라 카믄 진작 죽어라! 어이구 이 일을 우짜믄 좋노. 어이구.”
넋두리하는 순이네 목소리가 바람 방향 탓인지 꽤 가까이서 들려왔다. 세상에 이런 난감한일이 흔할 것인가. 휘는 무거운 맷돌이 가슴을 짓눌러오는 것을 느낀다.
“저기.”
고개를 숙인 채 영선이 입을 떼었다.
“저기, 저어…… 혹 남 못할 짓 한 거는 아닌지.”
대답이 없었다. 밤새우는 소리, 바람이 이는가 문풍지가 조금 흔들렸다.
“저기.”
영선이 다시 말하려 했을 때
“우리 부모님 남 못할 짓 해감서 아들 장개들일 사람들은 아니거마는,”
한참 있다가,
“나도…… 나도 남 못할 짓 해감서 자, 장개들 그런 인간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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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실 실데없는 걱정 안 하는 기이 좋을 기고,”
하면서 휘는 고개를 흔들었다. 송이 따러 갔을 때의 일이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일이 큰 죄가 되는지, 그냥 있을 수 있는 실수일 뿐인지 휘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자기 때문에 한 여자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그를 공포로 몰고 갔다.
‘순이가 죽으믄 나는 우찌 해야 하노. 왜 순이가 죽어야 하노 말이다. 왜, 왜!’
휘는 술상을 끌어당겼다. 술잔에 술을 부어 마신다. 술은 쓰고 술이 타고 내려가는 가슴이 뜨거웠다.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다. 다시 술을 붓고 연거푸 마신다.
‘내가 지한테 우쨌다고 죽노 말이다! 열 사람 백 사람, 그라믄 다 안 받아주믄 죽어야 하나 말이다!’
그러나 입맞춤에 생각이 미치면 휘의 분노에 힘이 바지고 부끄럽고 두려움이 앞선다.
“저어어 저기, 아무래도 지가 산에 잘못 온 것 겉십니더.”
참다못해 영선이 말했다.
“무신 소리!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눈앞이 몽롱해진다. 소리를 질러놓고 휘는 영선을 보는데 반쯤고개를 든 영선의 얼굴이 눈앞에서 흔들린다. 다홍빛 유록빛이 흔들린다. 얼굴이 두 개가 되고 세 개도 된다. 촛불도 두 개가 됐다가 세 개도 됐다가, 휘는 팔을 들어 휘저어본다.
“나, 나도 처음 보았일 직에 거, 거기가 좋았소. 난생 처음 그런 생각을 해보았소. 음…… 으음.”
휘는 몸을 뒤틀 듯 했다. 캄캄한 절벽이 왔다갔다했다.
“으음…… 음.”
못마시는 술을 계속해 마셨기 때문에 휘는 도저히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영선이나 촛불뿐만 아니다. 방안이, 천장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그, 그렇지마는 거기가 안 왔이믄 수, 순이하고 혼사하게 됐을지 그, 그거는 모릴 일이구마. 모, 모릴 일, 언약한 것도 아, 아니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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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거 거기서걱정할 일은 아니고.”
정신이 몽롱한 속에서도 휘는 순이와 입맞춤한 일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첫날인 영선이 상처를 받아서느 안 되고 순이에게도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 거기서 걱정할,”
하다 말고 휘는 꿍 하고 모로 넘어졌다.
횃불을 켜들고 짝쇠와 함께 순이를 부르며 찾아다니던 안서방은 거의 새벽녘이 돠 되어 기진해 돌아왔다.
“못 찾았소!”
남정네에게 달려가 순이네는 거머리같이 달라붙으며 소리쳤다. 길륭이는 마당에 퍼질러 앉아서 아비를 쳐다보았다.
“와 이라노!”
거머리같이 달라붙는 순이네를 안서방은 떠밀어낸다. 휘의 어미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고 짝쇠는 말없이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인다. 짝쇠네 집에서는 불빛이 없었다. 술 마시던 사람들은 모두 잠든 것 같았고 온종일 혼삿일에 바빴고 저녁 늦게까지 술시중을 든 짝쇠댁네도 곤해서 곯아떨어진 눈치였다.
“이기이 무슨 날베락이고! 아이구우 청천의 하느님!”
“야밤에 제집이 요망시럽기, 울음 잡힐라 카나! 누가 죽기라도 했단 말가!”
안서방이 나무란다. 멈칫멈칫하는 휘의 어미가,
“안서방, 우짜믄 좋겄소.”
하고 한마디 했다.
“걱정 마이소.”
“우찌 걱정이 안 되겄소.‘
“집 나갔다고 꼭 죽어라는 법은 없인께요.”
“그래도 그렇지, 이 산중에서 갈 만한 곳이 어디 있겄소.”
“저 제집이 끝내 그럴 기가!”
자기 가슴을 치며 우는 순이네에게 야단을 쳐놓고
“날새기를 기다리보아야제요. 걱적한다고 머가 우찌 되겄십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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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짐씨는 그만 들어가보시이소.”
“천하태평이고나! 딸자식은 사람 아이가! 우리 순이가 와 죽노! 누구 땜에 죽노!”
“이렇기 아구성을 칠 기가!”
안서방은 순이네 양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세운 뒤 질질 끌고 가서 방문을 열고 엎어버리듯 방안으로 냅다 던지고 방문을 닫는다.
“만일에 무신 일이 있다 카믄 자식 하나 안 낳은 셈치지요. 일이 이렇기 되니 면목이 없십니더.”
방안에서는,
“아이고, 미치고 기 들겄네! 아이구우 아우구우 불쌍한 내 새끼!” 방바닥을 치며 순이네는 운다.
날이 밝았다.
짝쇠네의 손님들은 언제 빠져나갔는지 다 가고 없었다. 딸에게 잘살아라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송관수도 떠나고 없었다. 강쇠 혼자만 아침을 헤치고 짝쇠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순이는, 일이 싱겁게 끝났다. 밤사이의 그 소동은 아랑곳없이 그는 숯가마 속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길륭이가 행여 하고 가보았더니 자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누구 골탕먹이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죽으려고 그랬던 것도 물론 아니었다. 숨어서 울 곳을 찾다 보니 거기 가게 되었고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기에 그는 까맣게 밤의 소동을 모르고 있었다.
“이년, 그만 뒤이지지 머할라꼬 살아왔나. 십 년 감수, 그보다 남부끄러 우짜노, 이놈의 가시나!”
순이네는 딸을 쥐어박았다. 순이가 죽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지만, 그러나 없느니만 못한 사건임엔 틀림이 없다. 그리고 휘나 영선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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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장 강도 사건

도솔암에서 실컷 낮잠을 자고 저녁밥을 얻어먹은 뒤 밖이 어둑어둑해지는 것을 보고 관수는 절문을 나섰다.
“그러면 거기서 만납시다.”
소지감의 말에 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시오.”
아주 낮았지만 관수는 뒤통수에서 쫓아오는 소지감의 긴장된 목소리를 들었다. 산밑 마을에 당도했을 때는 그믐이어서 그랬겠지만 사방은 아주 새까만 어둠이었다. 주막에 들어간 관수.
“여기 술 한잔 주소.”
술손과 수작을 부리고 있던 주모가
“아이구 내 신세야!”
하면 몸을 일으켰다.
“손이 술 달라 카는데 신세 타령은 와 하노.”
“입버릇을 그라믄 우짤 기요.”
시비조다.
“기왕이믄 아이구 나무관세음보살 하는 기이 우떨고?”
주모는 키릴 웃었다.
“내가 염불 모시게 됐소? 나무관세음보살 했다가는 사나아들이 다 달아날 긴데 주막 문 닫으믄 나는 머 묵고 살 기요.”
“포전이나 쫓지.”
“누구 닮았나?”
“내 뭣 땜에 자네 서방을 닮을 기고.”
“서방은 무신 서방. 사팔뜨기 산놈, 오다가다 술잔이나 마시제요.”
“그라믄 기둥서방인가?”
관수는 강쇠 얼굴을 생각하며 피식 웃는다.
“기둥서방이라도 됨사? 그런 주제도 아니믄서 젊은 기이 뭐 할짓이 없어 술장사냐, 산에 가서 나무 뿌리 캔들 입에 거미줄 치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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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냐, 흥! 가다오다 해보는 말이겄지요 머.”
언제였는지 강쇠와 함게 술을 마시러 온 일이 있어서 관수는 주모의 얼굴을 알고 그의 내력도 좀 안다. 춘매의 조카라든가 뭐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주모는 관수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관수는 시간을 재듯 천천히 술을 마신다.
“말로라도 그런 사람이 있이니 쪼그랑 팔자지마는 마 괴않네.”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술손이 한마디 빈정거렸다
“아이고오, 쪼그랑 팔자라 했소? 그라믄 거기는 대리미로 삭 펴놓은 팔자다 그 말이요? 그런데 백결선생맨크로 옷은 와 그 모양이요? 염낭에 술값이나 들었는지 모리겄네.”
“내가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구나.”
사나이는 할 수 없다는 듯 껄껄 웃은다.
“입으로는 못 당할 기요.”
관수가 한마디 거든다.
“심 없는 제집이 입으로라도 갚아야제요. 누구 말마따나 기둥서방이라도 있었이믄 술값 떼묵고 달아나는 놈 정개이 뿌질러 앉히겄지마는. 서며 앉으며 내 팔자야, 하게도 됐지 머. 나도 좋은 부모만냈이믄 기영머리 마주 풀고 백년해로 했일 긴데, 세상 인심 오동지 설한풍이요.”
“……”
“누가 되고 저버서 봉사가 되었겄고, 누가 되고 저버서 버부리가 되었겄소. 보고 듣고, 복 많은 년놈들, 앞 못 본다고 속이묵고 뺏아무고, 말 못한다고 속이묵고 뺏아묵고, 세상이 그런 거라요. 심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엎어놓고 등짝 밟는 기이 예사, 흥! 절에 가봐도 그렇대요. 불쌍한 중생을 건진다 캄시로 어디 말과 같애야지. 부자가 오믄 매날로 뛰어나오고 기차븐 사람이 가믄 문전박대나 안함사?”
“절에서 문전박대했다는 것은 처음 듣겄네.”
관수가 말했다. 그 말 대꾸는 없이,
“언젠가 예수쟁이들 와가지고 하는 말이, 예수 믿고 회개하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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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마. 회개할라 카믄 나는 굶어죽게? 그 사람들이사 빼딱구두 신고 말똥머리 하고 얼마나 유식한지 몰라도 책도 들고. 다 묵고 살 만한께 그러고 댕기는 거 아니겄소?”
“청산유수다, 청산유수.”
술손이 말했다. 관순느 주모의 넋두리를 듣다 말고 술판에 술값을 내놓고 일어섰다. 몇 잔 술에 얼근해진 관수의 얼굴을 강바람이 쓸고 간다.
“누가 되고 저버서 봉사가 되었겄나, 누가 되고 저버서 버부리가 되었겄나. 흥! 맞기는 맞는 말이네.”
하는데 별안간 뜨거운 눈물이 뺨 타고 내린다. 다홍치마 유록저고리를 입은 딸 영선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간다온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칠흑 같은 karlf을 걷고 있는 자기 자신이 괘씸하기짝이 없다.
‘애비 노릇도 제대로 못한 주제에 서운하기는 와 이리 서운하노.’
관수는 걷다 말고 강변 둑에 주질러앉는다.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빨갛게 타는 담뱃불, 담뱃불이 빨갛다는 것을 처음 발견이라도 한 듯 눈앞에 담뱃개비를 세우며 쳐다본다. 바람이 불 때는 불꽃이 튄다. 한 모금 가슴 깊이 빨아당겨 연기를 뿜는다.
‘그놈이 있었던들 내 맘이 이렇기 서운하고 허전하까. 딸자식이야 언제 가믄 안 갈 기가.’
사방은 칠흑 같아도 강물은 희번덕이고 있었다. 강 건너 쪽에서 깜박이는 불빛, 세상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희맹이 있어야제. 희맹이 없다.”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주는 것이 있다면 시부모로 모시게 될 강쇠 내외의 변함없는 마음씨 때문에 영선의 시집살이가 편할 것은 없어도 마음 고생은 안 할 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학식이 없어 그렇지 사위 된 휘도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지 복이 그것뿐이라믄 그렇기 살아야지 웅짜겄노. 흥! 지가 되고 접어서 백정의 외손녀가 되었더나. 흥!”
관수는 담배를 버리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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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 마을에 못 미쳐서 관순느 ㄱ아변길을 버리고 숲속길로 접어들었다. 옛날 김평산이 귀녀를 만나기 위해 삼신당으로 가던 그 길이다. 길이라기보다 숲을 헤치고 가는 것이다. 삼신당이 가까워졌을 때,
“이자 오요.”
소리가 들렸다.
“음.”
관수가 대답했다. 연학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누각과 초당이 있는 방향과는 다르게 다시 숲을 헤쳐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숲이 나타났다. 그들은 대숲을 끼고 한참을 가서 사당 앞에 당도하였다. 사당은 감감해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연학이 사당 문을 열었을 때 불빛이 사당 뜨락에 쫓아나왔다.
“들어가소. 그런 일이야 없겄지마는 내가 기침하믄은 아시겄지요?”
“알겄네.”
관수는 재빨리 사당 안으로 발려들어갔고 사당문이 닫히면서 사방은 어둠에 묻힌다. 사당문에 검정 휘장을 쳐서 불빛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촛불을 켜놓고 길상이 앉아 있었다.
“이제 몸은 추스릴 만한가?”
관수가 물었다.
“괜찮네.”
길상이 대답했다. 지금은 최참판댁 당주나 다름없는 길상이었지만 소년기를 한마을에서 지냈고 밤이면 관수 집에 모여앉아 짚세기를 삼고 산태기도 만들면서 그들 나름대로 시국 얘기며 동학 얘기며, 길상은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었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윤보와 김훈장을 따라 의병으로 산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들 서로간의 추억에는 욕됨이 없었다. 현재의 처지가 달라졌다 하여 길상에게 존댓말을 한다는 것은 관수의 자존심이 허락지 아니하였고, 길상이 역시 옛날과 달라진 관수의 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앞에서는 환국이아부지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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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을 대접했으나 최참판댁이라는 배경 때문에 관수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앞으로 환이를 대신하여 제반사를 지휘하게 될 그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혼사는 잘 치르었는가?”
“그럭저럭.”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나수는 없는 놈이 혼사고 뭐고 찬물 한 그릇이믄 끝나는 거 아닌가, 필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의 성질을 아는 만큼 길상은 관례적인 선에서 축의금을 보냈을 뿐 더 이상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지만, 드세고 반항적인 송관수, 그러나 사려가 깊은 것은 그를 아는 사람이면 다 인정한다. 해서 그는 오늘가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길상의 물음에 없는 놈이, 하질 않고 그럭저럭…… 꽤나 섬세한 사내다.
“서운하겠군.”
“서운하지 않다 하믄 그거는 거짓말이고오, 하지마는 딸자식이란 언제 떠나도 떠나보내야 하니께.”
“그건 그렇지.”
서로 마주본다. 촛불이 앉은뱅이 춤을 추고 두 사나이 얼굴에 명암이 흔들린다. 이들하고는 아무 인연이 없는 사당, 남의 사당, 그것도 어쩌면 모독일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침입을 이들은 이 순간같이 느낀 것 같다. 최씨 가문 누대의 선조들 영신이 정좌한 곳, 아무리 나랏일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순간적인 위축감을 느낀다. 천민들에게도 신주는 매우 소중하고 두려운 것이다. 서로 바라보던 두 사내는 어느쪽이랄 것도 없이 서로를 외면한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 길이 없는 길상에게 조상이 있을 리 없고 부모가 있을리 없다. 부모는 있었지만 아비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어미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관수, 기일이 있을 리 없다. 칠월백중날이면 영광이네가 절로 찾아가서 얼굴도 모르는 시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어미는 어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한가닥 희망 때문에 백중 불사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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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떻게 되었는고?”
관수가 물었다.
“빈틈없이 다지기는 다져놨는데.”
“삼월 삼짇날 변동 없겄제?”
“음.”
“그라믄 됐네. 나도 전부터 손은 다 써놨고 마무리만 남았인께.”
“전에 말한 대로, 계획에 변한 사항은 없으나 그래도 장서방한테 한 번 더 자세한 얘길 들어야 할 거다.”
“그래야겄지…… 그라믄 나는 이 길로 떠나야겄는데, 우리가 또다시 만나게 될지 우떻지.”
“무슨 그런 말을 하는가. 우리는 꼭 만나게 된다.”
“아니 머 그런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니구마. 내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하는 말이네.”
“……”
“저기.”
하다가 관수는 앞가슴을 더듬어 봉투를 꺼내었다. 순간 길상의 얼굴에 노기가 떠오른다. 그 봉투는 길상이 축의금을 넣어 보낸 것이며 봉투는 봉해진 채 뜯어본 흔적이 없었다.
“자네, 생각보다 훨씬 졸장부군 그래.”
“말이나 다 들어보고 그러라고. 하기는 내가 대장부 아닌 것은 틀림이 없일 것 겉다.”
관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품속을 만지다가 사진 한 장을 꺼내어 길상에게 내밀었다. 길상은 사진을 받아 들여다본다.
“내 아들놈이네.”
사진은 고보의 교복과 교모를 쓴, 관수를 전혀 닮지 않은 소년, 아니 청년이었다.
“갈길이 바빠서 긴말 할 새는 없고, 그놈이 집 나가서 일본 동경에가 있다는 소문을 들어쓴데, 죽일 놈 살릴 놈 해봐야 별수없제. 자네 큰아들이 유학을 가 있이니, 무리한 청인 줄 알지마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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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고 찾아서 이 봉투를 전해주었이믄 싶어서.”
“미친 사람.”
길상이 웃었다.
“역시 졸장부구먼. 강도질한 놈이 새색시 같은 이런 짓 왜 하나, 정말 자네답지 않군 그래.”
길상은 사진만 조끼 주머니 속에 넣고 봉투는 밀어낸다.
“패거리들 술값이나 하게. 함께 술 마시고 있을 내처지도 아니니.”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럼 그렇기 하지. 그런데 환국이가 좀 쉽기 찾을라 카믄 그놈핵교 졸업생을 찾이믄 될 성싶구마. 그 핵교에서도 몇 사람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일 긴께.”
“걱정 말게.”
“그라믄 나는가야겄다. 오래 머물라 캐도 최씨네 신주들이 내 이노옴! 무엄하구나! 할 것 겉애서 답대비.”
처음으로 관수는 농담을 했다.
밖으로 나온 관수는 홀가분했다. 발도 가벼웠다. 관수가 오던 길을 되잡아서 가는데 연학은 말없이 뒤따라가고 있었다. 다른 것을 기대하고 길상에게 사진과 봉투를 내밀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아들을 봐달라, 못할 것도 없었다. 여러 가지 인연을 생각하면 최씨집에서 영광이 하나 돌보아주는 것은 무리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관수는 지금가지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분서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그는 다만 영광이에게 돈을 부쳐주어야겠다는 것은 늘 생각했었다. 그러나 길상이 걱정 말게, 하고 말했을 때 관수는 자기부탁 이상의 일을 길상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삼신당 앞에까지 와서 관수는 걸음을 멈추며 연학을 기다린다.
“그믐밤이라 어둡기는 참 어둡네. 코를 베가도 모리겄구마.”
연학이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뭐고?” 관수가 물었다. 두 개의 불빛이 어둠 속에 있었다.
“살쾡이지 머겄소. 동네 닭 잡아묵을라꼬 내리온 모양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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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은 이내 사라졌다.
“삼월 삼짇날…… 좋은 절기다. 그믐밤은 좀 비키선 셈인데.”
“그러씨…… 그러믄 이 길로 남원 갈 깁니까?”
“그래야지. 가다가 구례에서 자고, 구례까지 못 가믄 화개서 자든지.”
“산의 사람들은 길 떠났십니까?”
“떠났다.”
“괜찮겄십니까?”
“뭐가?”
“그 사람들,”
관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냥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고 나서, “그래서 두 갈래로 나누는 거 아이가. 하나가 끊어지더라 캐도 되게시리.”
“지는 그것보다 사람을 믿어도 되는가, 이제 와서 걱정해도 달리 도리는 없겄지마는.”
“그 사람들 못 믿는다믄 세상 사람 하낫도 믿을 사램이 없다. 하기는 영악하지를 못해서 나도 맴이 안 씨이는 거는 아니다마는, 때에 따라서는 뿌러지게 나오는 사람보다 히죽이죽거리는 사램이 오래 견디네라. 그라고 자네 보기보담은 만고풍상 다 겪은 사람들이다.”
“실은 그 사람들도 그렇지마는 앞에 나서는 기이 아닌께 그런 대로 넘어갈 성싶으나 젤 맘에 절리는 거는 손태산입니다.”
손태산은 남원 길서방의 생신 잔치 때 처음 연학이 만나본 인물이다. 그러나 만나기 전부터 연학은 그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다. 소상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연학의 임무였고 한 번 보았으면 그만, 다시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 연학의 위치였다. 그런데 그때 연학은 손태산을 좋게 보지 않았다. 말로 듣던 것보다 훨씬 경망했던 것이다.
“좁쌀 양식 오지랖에 싸고 댕기겄다. 전에 없이 와 그리 잔걱정이많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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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학은 어둠 속에서 피식 웃었다.
“많은 사람을 움직일라 카이, 여기서 터지까 저기서 터지가, 나도 모리게 근심이 되누마요.”
“터지는 데는 터지고 뚫고 나가는 데는 나가고, 하루 이틀 해온 일도 아니겄고…… 손태산이는 나도 여러모로 그물을 쳐놨다. 당분간은 다른 손이 안 닿으믄 쓸모가 있제. 해서 윤필구를 조져놓은 거 아이가.”
“진주 일은 물샐틈없이 짜놨인께 그 일은 아마 맘을 놓아도 될 깁니다.”
“마음을 놓아? 걱정해도 소앵이 없는 일이지마는 마음놓을 일이 따로 있지.”
나무라듯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
“머 또 할말이 있나?”
“지는 더 이상 할말은 없습니다. 호옥 형님은 다른, 머 하실 말심은 없습니까?”
“별로 변동한 기이 없인께 나도 더 할말은 없다. 저물고 했이니 가봐라.”
“둑길까지만 함께 가지요.”
말없이 두 사람은 어둠을 헤치고 걷는다. 부엉이가 울고 이따금 산짐승이 풀숲을 부시럭거리며 지나는 소리도 들렸다.
“영만이는 괜찮기 살더나?”
관수가 물었다.
“괜찮기 살지요.”
“아아가 몇이나 되든고?”
“하나 잃어부리고 셋이라 카든지,”
“세월 참 빠르다. 언제 이리 되었는고 꿈 겉네.”
“사십을 넘기니께 세월이 막 달아나는 것 같더마요.”
“그렇지이, 막 달아나지. 그래 자네 형수는 어마니를 닮았는지 모리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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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하믄 맏며누리로 잘 하시는 편이고 살림 이루노라고 고생도 했지마는 지금은 만고에 편합니다.”
“그런께 우리 어릴 적의 두마어매맨큼 됐겄다.”
“형님보다 두세 살 윌 겁니다.”
“그럴 기다. 두만이가 내 동갑나기고 두만이누분게, 시집가던 때가 생각난다.”
“……”
“그거는 그렇고, 너거 집이 여수서는 소리치는 부자 아니가. 그런데 와 이 짓을 하노. 니도 참 별난 놈이다.”
“지만 별납니까. 형님은 안 별나고요? 참,”
관수는 껄껄 웃는다.
“지가 이 집 일을 볼 때만 해도 여수서는 그냥 묵을 만했지요. 형님 말대로 소리칠 정도는 아니었고, 지금 부자가 됐다고 해서, 부자라 캐도 큰집이고 조카자식인데 머 얻어묵겄다고 가겄십니까. 다 이렇기 사는 것도 팔자 소관 아니겄소.”
“좀 보태주기는 하나?”
“보태주는 거 없십니다. 우리 식구 굶는 처지도 아니고…… 돌아오라, 그거지요. 돌아오믄 봐주겄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한가한 얘기 할 처지도 심경도 아니었다. 더욱이 관수의 입장에서는, 다같이 긴장돼 있으면서 얘기는 거의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한동안 말은 끊어졌다. 둑길이 가까워졌을 때,
“영광이한테서 소식 못 듣지요?”
하고 연학이 물었다.
“듣기야 들었제. 들으나마나……”
“환국이아버지가 환국이한테 이르더마요. 동경 가거든 영광이 어디서 뭘 하는지 수소문해보라고.”
“영광이 동경에 있는 거를 우찌 알꼬?”
“지가 말했십니다.‘
아가 사진을 내밀었을 때 길상은 그런 말은 내비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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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이도 신실한 사람이니께 힘 닿는 대로 애슬 깁니다.있는 곳만 알믄 다요량이 안 있겄십니까.”
“안 그래도 아가 그 사람 만냈일 적에 부탁을 했거마는.”
“형님이요?”
“우짤 기고, 내가 애비 노릇이나 제대로 했나? 그놈만 나무랄 수도 없고, 자식 때문에 상두꾼에 든다는 말도 안 있더나.”
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둑길까지 와서 이들은 헤어졌다. 이들이 헤어져서 열흘 남짓, 삼월 삼짇날 진주서는 씨름 대회가 있었다. 이 씨름 대회에 손태산이 출전한 것이다. 함양 대표로 나온 손태산은 비록 황소는 따지 못하였지만 고성의 이장사와 최후까지 겨루어 실력이 막상막하였으므로 구경꾼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기술은 이장사가 한수 위라 황소차지를 했지만 힘으로 볼 때 손태산이 세다고들 했다. 구경꾼 속에 끼여들어 씨름 구경을 하고 있던 연학은 눈살을 찌푸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흩어지는 구경꾼에 휩슬려 걸음을 옮기면서
‘저래가지고 되까?’
연학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요량껏 해두라꼬 조세질을 했일 긴데.’
물론 손태산은 주의를 몇 번이나 받았다. 그러나 막상 모래판에 서고 보니 주의 따위는 쉽게 잊어버렸고 승부욕에만 불탔던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진 그는 틀림없이,
“요량것 하라는 말만 안 들었이믄 황소 따는 것쯤이야 연반장이었제. 제에기럴!” 했을 것이다.
‘형님이 아무래도일을 잘못 꾸민 거는 아닌지 모르겄다.’
연학이 돌아왔을 때 최부자댁은 집이 비어 있는 듯 썰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크나큰 집에 안자 부부만 있었다.
“양현이는 어디 갔소?”
안자의 남정네 박서방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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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도련님이 데리고 강가로 갔소.”
안자 부부만 남겨놓고, 연학이는 왔다갔다했지만 식구들은 서울소님이 다녀간 후 모조리 평사리로 떠났고 개학이 되면서 윤국이와 양현이 진주로 돌아왔으며 나머지느 아직 그곳에 체류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환국이는 일본을으로 갔다. 음력설을 전후하여 제사를 모시기 위해 해마다 식구들이 평사리로 가는 것은 관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옥고를 치른 길상의 정양을 위해 오래 머무는 듯 했고 절에 불공을 드린다는 말도 있었다.
“누가 이깄십니까?”
박서방이 물었다.
“고성 사람.”
“구겡꾼이 많았십니까?”
“응.”
연학이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자 박서방은 뒤켠으로 돌아가고 연학은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만일에 뭐가 잘못되믄 풍지박산이다.’
처음부터 연학은 손태산을 끌어들이는데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간물이 될 그럴 위인은 아니었지만 자기 능력보다 야심이 컸고 저돌적인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사리에 의해 나섰다기보다 그는 조막손이 손가, 아비에 대한 환상 때문에, 그리고 그의 밑천이란 힘뿐이었다. 연학이 남원 길서방 집에서 모임을 가진 후 관수에게,
“사람이 신중하지 못한 것 겉소.”
자기 의견을 말했을 때
“쓰기 나름이제. 앞으로 나가는 놈도 있어야 하고 뒤로 돌아가는 놈도 있어야 하고, 다 쓸모가 있네라. 저저이 다 할라꼬 나서는 일도 아니지 않나.”
“하긴 그렇소.”
“답대비, 간뎅이가 부어서 기기이 탈이제. 심성이 나쁜 놈은 아닌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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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관수는 개의치 않았다.
연학은 집안을 한바퀴 돌아본다. 오늘 밤 실행에 옮기게 될 일을 계획하기론 꽤 오래 전이다. 길상이 출옥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관수가 제안했던 것이다.
“몇몇 관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것 이상으로 효율이 있는 일이네.” 길상은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찬성이었다.
“응징과 실리, 그리고 인심, 세 가지를 거둘 수 있지. 암살이나 폭탄 투척은 총기, 폭탄의 확보가 불가능하고 거의가 잡힐 것이니 인원을 아끼는 뜻에서도 그렇고,”
해서 세부 사항가지 면밀히 검토가 된 후 계획은 자였고 관수가 간도를 다녀오면서 일은 결정이 되었던 것이다. 길상을 국내에 잡아두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오백 섬지기 땅을 내놓은 서희는 물론 이러한 계획은 알지 못했지만 길상으로서는 지시하는 입장에서 그땅 오백섬지기는 명분을 세워준 것이기도 했다.
해가 지고 밤이 왔다. 쫑알쫑알 종알대던 소리가 들리더니 양현이도 안자 곁에서 잠이 들었는지 집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늦게까지 공부를 하던 윤국의 방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연학은 집에 가지 않았다. 행랑채 맨 끝방에 목침을 베고 누워서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최씨네 집에서 자기도 했었기 때문에. 박서방이 군불을 지핀 모양이다. 방은 따뜻했다. 정적을 깨고 대청의 기둥시계가 육중한 추를 흔들며 둔중한 소리를 낸다. 행랑에서도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연학은 귀를 세우며 시계 치는 소리를 센다. 열두 번이었다. 연학은 열한 번 칠 때도 세었고 열 번 칠 때도 세었다. 다시 사방은 정적에 묻혀버린다. 연학은 일어나 앉으며 담배를 붙여 문다.
이 무렵, 김두만의 집 담을 두 명의 괴한이 넘어가고 있었다. 두만은 그 동안 어느 부자가 살던 집을 구입하여 생활의 규모를 넓히면서 술도매상도 처분하고 양조장 사업에만 진력해왔으며 서울네도 비빔밥집에서 손을 떼고 안방마님으로 자리를 굳혀왔던 것이다. 오늘 밤 검두만의 집에는 서울네와 침모, 일하는 어멈 세 명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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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만 있었다. 일꾼들은 모두 양조장에 가 있었고 부친이 위중하다 하여 둘재인 기동과 함게 두만은 독골에 가고 없었다.
“둘째부인, 일어나시오.”
서울네는 잠결에 소리를 들었다.
“어서 일어나시오.”
“아아 아이구!”
“천천히, 소리를 지르면 상할 것이오.”
서울네는 비로소 가슴을 겨누고 있는 써늘한 것을 느꼈다.
“웬, 웬 사람이오?”
서울네는 사시나무 떨 듯 떤다. 방안도 어두웠고 문밖도 어두웠다. 새까맣게 어두웠다. 공포에 떠는 서울네에게는 지옥 구렁창에서 소리만 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상해 가정부에서 왔소이다. 이런 방법말고는 군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었소. 양해하시오.”
“도, 돈, 무 무슨 돈이, 집에는 도, 돈이 없습니다.”
“긴말 하면 시간만 가지. 양조장 자금으로 쓰려고 시장의 점포 두 개를 팔지 않았소. 알고 왔으니 자아 금고 문 여시오. 우리가 죽음을 불사하고 여기 들어온 만큼 사불여의하면 부인은 죽을 것이오.”
칼긑이 앞가슴에 바삭 와서 닿았다. 서울네는 본능적으로 더듬더듬 자리걸으믕로 금고 있는 곳에 다가간다. 칼은 등뒤에서 따라왔다.
“저 저 어, 어두워서 어이구!”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성냥을 그었다. 금고 문이 열렸고 성냥불은 꺼졌다. 사내는 꺼진 성냥개비를 입에 넣고 다시 성냥을 그었다. 얼굴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몸은 마른 편이었다. 칼을 들이댄 서울 말시의 사내는 몸이 건장한 것 같았으며 음성으로 미루어 젊은 남자인 것 같았다. 침묵의 사나이는 금고 속의 현찰을 확인한 뒤 꺼진 성냥개비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돈을 꺼내어 양쪽 호주머니 속에 나누어 넣는다.
“그러면 우리가 무사히 갈 수 있게 부인께서는 고생을 좀 해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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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겠소.”
준비해온 끈으로 서울네를 묶은 뒤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이들은 바람같이 담을 넘어 사라진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이상한 일은 또 벌어지고 있었다. 이순철의 집 담벽에 붙어선 두 사나이.
“불이 켜져 있는 방이 이 집 주인 거처방이다.”
한 사내가 소근거렸다. 그리고 덩치 큰 사내를 담 위로 밀어올려주는 것이었다. 담을 넘은 사내, 손태산은 사방을 살펴보다가 불이 켜져 있는 방을 향해 곧장 간다. 신돌 위에는 구두 한 켤레가 있었다. 손태산은 주저없이 방문을 쑤욱 연다. 한복을 입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순철의 부친 이도영이 얼굴을 돌렸다.
“억!”
몹시 놀란 듯 일어서려다 말고 도로 주저앉는다. 아랫목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나는 가정부에서 온 사람이오. 알아듣소?”
손태산은 여차하면 맨주먹으로 이동영의 면상을 내리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도영은 말없이 손태산을 쳐다만보고 있었다.
“두말 하믄 잔소리고오, 이런 부잣집에서 나랏일로 돈 빌리돌라카는데 못하겄다 하지는 못할 기요. 부모 없는 자식이 없고 나라없는 백성이 없이니, 내 하는 말이 틀리지 않다 생각하무는 순순히 내놓으소.”
“……”
“이거 귀가 먹었나, 입이 붙었나, 재미없기 나오믄.”
하다가 강도질하려 간 거는 아닌께, 통사정하는 입장인께로 말조심을 하고 시간을 끌지 않게시리, 하던 관수의 말이 생각났다.
“주인어른, 불학무식해서 예법을 모리니 용서하이소. 그러나 장수의 자손으로 부끄러븐 짓은 안 했인께, 그나저나 시간이 없는데 긴타령 할 수 없고 어서! 가부간,”
하자,
“저기,”
하며 이도영은 문갑을 눈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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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랍니까 주인장, 내가 얼라요? 철은 다 들었인께 주인장이 내놓으소.”
“참말 불학무식하네. 이런 일 할라 카믄 까막눈은 면해야지.”
하며 이도영은 문갑을 열고 부피가 얇은 것과 부피가 많은 돈다발 두 개를 꺼내온다.
“하여간에 고맙소. 미안시럽지마는 좀 묶여 있어야겄는데.”
손태산은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이도영을 묶은 뒤 재갈을 물린다. 돈을 챙기고 전등을 껐다.
“아닌게아니라, 주인장, 점잖은 사람한테 실례가 많았소.”
손태산은 유유히 나온다. 밖에 나왔을 때,
“사나아 배짱이 이만은 해야지.”
그는 큭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심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동행이 그를 잡아끌었다.
열두시가 넘은 시각, 큰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술집·기생집은 주홍이 무르익어 여자들의 웃음 소리 남자들의 술취한 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열두시에서 새벽까지 길고도 짧은 시간, 일은 계획대로 진행이 된 것 같았다. 어둠이 걷히고 뿌연 아침 안개가 거리에 깔렸을 때, 시가에는 비상이 걸렸다. 서울네는 침모가 발견했고, 이도영 씨는 그보다 훨씬 늦게 마누라가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서울네는 비교적 정확하게 어젯밤에 일어난 상황을 설명하였고 강탈당한 돈은 삼천원이라 했다. 기별을 받고 독골에서 달려온 김두만은 사색이 되어.
“그놈들 반드시, 틀림없이 잡으시오! 내 그 돈을 찾아서 경찰서에 기부하겠소! 그놈들만 잡아주시오!”
서투른 일본말로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돈 삼천 원이 적은돈인가. 면소 서기가 십 년을 고스란히 모은 월급도 그만한 돈엔 못 미친다. 아깝고 원통한 것을 생각하면 눈알이 빠질 지경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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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김두만은 돈 아까운 것 이상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칼 들고 야밤에 들어온 괴한들, 가정부에서 왔다는 그들에 대한 공포는 결코 아니었다. 일본 경찰에 대한 것이다. 상해 가정부 운운하지 않았더라면, 단순히 돈을 털러 들어온 강도였었더라면 김두만의 입에서 기부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의 하나 가정부와 내통하지 않았는가 의심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돈 삼천 원이 문제인가. 파멸까지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그들에 대한 증오심도 물론 대단해서 김두만은 진심으로 그들의 체포를 원하였다. 한편 탈진이 되어 자리에 쓰러진 이도영을 찾아온 두 명의 형사는 사건의 경위를 묻고 있었다. 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이도영은,
“키는 중키쯤 돼 보였고 몸은 마른 편이었소.”
몹시 땀을 흘리며 말했다.
“말씨는 어떻든가요?”
“서울 말씨였소.”
실로 해괴한 일이다. 손태산은 중키도 아니었고 마른 편도 아니었다. 이동영 자신이 불학무식하다는 말까지 한 손태산이 서울 말씨는커녕 사투리치고도 심한 편이었으며 상스러웠던 것이다.
“김두만 씨 댁에 침입한 자들과 인상 착의가 비슷하군요. 흉기는?”
“칼이었소.”
“시간은?”
“그러시…… 그기이 그러께 한시는 지났을 성싶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소이다.”
이도영은 계속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 손태산은 칼 같은 것 가져오지 않았고 침입한 시간도 열두시가 조금 지났을까.
“그자들이 김두만 씨 댁을 습격하고 나서 이곳에 왔군. 몇 사람이었소?”
“두 사람이었소.”
계속 이도영은 땀을 흘렸다. 얼굴은 창백했다
“운수 불길하여, 기왕지사 돈은 뺏깄지마는 이러다가 영감 병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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겄소. 꿈 한분 잘못 꾸었다 그렇기 생각하시이소.”
순철의 모친이 참다못해 말했다.
“임자는 가만있소.”
무너지려는 허리를 세우며 이동영은 마누라를 나무란다. 어투가 매우 엄격햇다. 듣기론 내세울 만한 문벌도 아니며 겨우 편지 정도 쓰고 읽는 학식밖에 없다는 것이었는데 깡말라 보여 그랬던지, 테가 가는 안경을 쓰고 가지런히 다듬은 콧수염 때문이었는지 그의 풍모는 돈에 무서운 상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도영의 얘기를 수첩에 적고 있던 형사는 순철 모친의 말이 비위에 거슬렸던지,
“우리도 당시네들 손해본 돈이 문제가 아니오. 서장 목이 오락가락하는 대사건이오. 대일본제국 경찰의 치욕인 것이 문제란 말이요. 하룻밤에 한 곳도 아니요 두 곳이나 습격을 당했다는 것은,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돼.”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조선인 형사였다.
“임자는 안에 들어가소. 남자들 하는 얘기에 끼여들어 요망하다는 말 듣기 전에,”
눈살을 찌푸리며 이도영은 마누라에게 다시 말했다.
“끼여들기는 누가 끼여들었십니가. 영감이 갱신을 못하신께 그랬지요.”
“허허어!”
“알았십니다.”
순철이 모친은 남편 영에 못 이겨 물러난다.
“제놈들이 달아나며 어딜 가. 독안에 든 쥐새기지. 이 기회에 이곳 불온도배들 뿌릴 뽑아야 해.”
함께 온 일본인 형사의 말이었다. 신속하기가 번개 같은 일본 경찰은 신고를 받는 즉시 진주서 빠져나가는 길목을 일제히 차단했고 불온하다고 점찍어놓은 사람들 집에 경찰관이 쫙 깔리면서 수색에 나서고 있었다. 물론 최씨네 집에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런데 이도영 씨,”
하고 형사는 날카롭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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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원이라면 흔히 만져볼 수 없는 큰 돈 아닙니까?”
“……”
“그런 현금을 마치 가져가 달라는 듯 집에 두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소?”
제일 중요한 얘기는 이제부터다, 하듯 형사는 이도영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무슨 말심을 그렇기 하시오! 불난 집에 와서 부채질을 해도 유분수지, 도둑에게 가져가라고 집에 돈 놔두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이오!”
“도둑이 아니지 않소.”
“아니며!”
“가정부에서 군자금으로 가져갔다 그 얘기 아니오.”
“들어온 놈이 누구이든 남의 돈 강탈해갔으면 도둑이지, 도둑 아니라니!”
얼굴이 벌개지면서 이도영은 화를 냈다.
“아아, 아 역정 내시지 마고 현금이 있었던 겨위를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한참 있다가 이도영은 화를 가라앉히며 본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원래 서미가 은행 같은 곳에 예금은 잘 하지 않소.”
“그래서요, 그래서 금고도 아닌 문갑 속에 아무렇게나 간수한다? 이해 못하겠는데요.”
“금고는 백화점에 있고오, 집에는 본시부터 금고가 없소, 이거는 내 판단이지마는 금고란 여기 돈 있소, 하고 도둑에게 가르쳐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오? 내가 현금을 관리하는 것은 당신네들한테도 말 못하오. 그거는 내 비밀인께. 그러나 오천 원이 어찌 문갑 속에 있었는가, 그것은 쉽게 이야기해줄 수 있소.”
“말씀해보시요.”
형사의 어세가 한결 누그러진다. 지방의 유지인 만큼, 경제권을 지고 있는 강자인 만큼 그도 말씨 보아가며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내 사업이 사업인 만큼 항상 자본이 넉넉해야 하는 관계상 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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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하질 못하였소. 한데 지난 가실에 마치 맞는 땅이 있다 말을 듣고, 두 차례 가보기도 했고 계약을 한 거는 달포 전이었소. 오늘이 잔금을 치를 날인데 어젯밤 그 꼴을 당했던 거요. 잔금 받을 사람이 이 소동을 보고 돌아갔거나 아니믄 근처에 있일 성싶소. 이만하믄 알아듣겄소? 문서도 있인께.”
“그럼 그 돈 있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그거는 나도 궁금하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놈의 소행인 듯한데.”
“아까 당신네들은 대일본제국 경찰의 치욕이다, 그런 말을 했는데 이거는 내 이도영의 치욕이오. 내가 친일파라는 것은 세상이 더러아는 일이지마는, 이제는 세상사람 놀림감이 되지 않았소? 진주사람들이 드세다는 것은 당신네들이 더 잘 알 거요. 나도 돈의 문제보다 이아무개가 친일을 해서 돈냥이나 벌더니 가정부 사람들이 와서 칼 딜이대고 털어갔다, 속이 시원하다, 그렇기들 입방아를 찧어싸면 내 장사는 어찌 되겠소. 당신네들 치안이 물샐틈없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소? 적반하장이라더니 피해자를 보고 머 어째요?”
“아아, 아 고정하시오. 우리도 신경이 곤두서다 보니, 언짢은 점이 있더라도 양해하시오.”
계속 땀을 흘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돼 있던 이동영은 성질을 내다가 자리에 픽 쓰러졌다. 혼절을 했던 것이다.
“아이구 영감! 이러다가 큰일나겄네!”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순철의 모친이 뛰어왔다. 그리고 의사 불러오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도영은 극도의 긴장 땜누에 혼절한 것이다. 그는 형사의 눈이 독사 같아서 몸서리치고 떨었던 것이다.
[4부 3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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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풀이
*괄호 속의 숫자는 본문 속의 면수와 행수를 가리킴.
상배(11:4): 상처의 높임말.
솥전만 돌지 말고(31:12): 변죽만 울리지 말고.
벅수(31:18): 장승.
거물장(33:30):(방언) 거멀장.
고반소(37:27):(방언) 파출소.
한 다리가 짧았지(44:25): 수운의 모친이 상민이었다는 얘기를 둘러서 한 말.
상충살(57:14): 방위나 일진이나 시 따위가 서로 맞질리는 살.
대대로(59:30):(방언) 비슷하게.
쪼다리(60:3):(방언) 꼴.
남우 앞(60:25):(방언) 남의 첩.
거천(68:17):(방언) 봉양.
매동구리(69:19): (방언) 매듭.
제금(71:8): (방언) 딴살림. 분가.
아금바리(71:10): (방언) 아금밭게. 알뜰하게 발밭다.
악문(73:21): 악으로 갚음. 배신.
덛들어서(73:23): (방언) 건드려서.
철기 날개(94:12): (방언) 잠자리 날개.
짚베옷(114:5): 바래지 않은 무명옷.
논(121:21): (방언) 설움.
헌해(122:16): (방언) 험담.
간불용불(142:22): 머리카락 하나 끼울 틈도 없음. 조금도 빈틈이 없음.
신이나 돌리놓지(145:10): ‘개가’를 돌려서 표현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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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146:2): (방언) 부처.
얌얌할(148:1): (방언) 심심할.
고내기(148:25): (방언) 고양이.
지운 데(152:6): (방언) 기운 데. 모자라는 데.
얼(153:30): (방언) 응어리. 원망.
은정(154:7): (방언) 하소연.
정지(156:2): (방언) 부엌.
밥대기(157:23) (방언) 밥을 해주는 사람. 여기서는 마누라를 뜻함.
된정(157:15): (방언) 짜증.
질주(159:18): (방언) 정상.
신기한 방어(172:19): 민간에서 하는 주술적인 예방.
이혈(177:4): (방언) 유혈.
성지간(179:6): (방언) 형제간.
처네(227:30): 지난날, 여자가 나들이할 때 장옷처럼 머리에 쓰던 물건.
조세질(229:6) (방언) 충고.
넘찐(241:4): (방언) 건방진.
도사리(245:14): 못자리에 난 어린 잡풀.
살림을 동개부릴라꼬(258:30): (방언) 살림을 합친다는 뜻.
찻머리(271:30): 정류장.
칭아(338:11): (방언) 차이.
후둣가 보내서(345:16): (방언) 닦달하여 쫓아 보내다.
이새(346:2): (방언) 혼전에 배우는 바느질 따위의 제반 가사.
쫄대기를 치고(349:24): (방언) 못살게 굴다.
소캐(335:27): (방언) 솜.
부작대기(355:29): (방언) 부지깽이.
앵하믄(358:3): (방언) 아까우면.
쟁피(361:19): (방언) 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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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철 2020-02-01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장 명희의 사막
해저 터널의 아치형 출구를 나왔을 때 학교는 왼편 언덕에 있었다. 지상 부분인 터널 옆을 따라 되돌아가는, 그러니까 바다의 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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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못 미쳐서 학교로 향한 길이 있었는데 왼편에는 채마밭이었고 오른쪽에는 초가 한 채, 야트막한 싸리울타리를 친 채마밭, 다시 초가 한 채가 있었다. 방 하나에 외양간을 거느린 대문채와 안채의 규모로 보아 조금은 넉넉한 듯한 농가였다. 학교길은 그곳으로부터 가파른 돌계단이었으며 여남은 개의 계단이 끝나니까 양켠에 벚나무를 즐비히 심은 오르막길이었고 다시 여남은 개의 돌계단을 올라섰을 대 콜타르를 칠한 단층 목조 건물이 눈앞에 드러났다. 넓지않는 운동장은 비어서 휑해 보였다. 메마른 잔디를 입고 비스듬히 드러누운 꽤 높은 축대 위에 교사는 마치 제단 위의 관과도 같았다. 교실이 네댓 개나 될까? 축대에도 양켠과 중심, 세 곳에 계단이 있었다. 황량하고 을씨년스런 풍경이었다. 그러나 교장의 주거인 듯 번듯한 왜식 주택이 교사와 좀 떨어진 곳에 있었고 읍내 신사가 멀었기 때문인지 혹은 진충보국, 국수에 투철한 어느 교장의 창안인지 알 수 없으나 교무실 앞의 장난감같이 축소하여 만들어놓은 신사, 국기 게양대, 그런 것들은 식민지교육 정책의 준엄한 권위를 충분히 나타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운동장을 질러 중심부의 계단 앞에까지 가서 멈추어섰다. 찬하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물었고 인실과 오가다는 사방을 둘러본다. 저 밑에 겨울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짙푸른 빛을 띤 바다는 호수같이 잔잔하였다. 돛단배가 떠 있었고 갈매기도 날고 있었다. 인실의 시선이 찬하를 잠시 스쳤다. 암울한 얼굴에 담배 연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제가 가서 물어보지요.”
인실은 말을 남기고 돌계단을 올라갔다. 여닫이의 유리창 문을 열었다. 시골 학교의 대개가 그러하듯 서류장에다 책상들, 별다를게 없는 교무실이었다. 소사가 난로 속의 재를 후벼내다가 얼굴을 들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예.”
“여기, 이 학교에 임명희라는 여자 선생님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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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심더.”
소사는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분을 찾아왔는데 어디 가며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방학이라서요. 핵교에는 안 나오시고 하숙집에 가보시이소.”
“하숙이 어딘지, 모릅니다.”
“와 거기, 층계다리로 올라오싰지예?”
“네.”
“바로 거기, 층계다리 옆에 붙은 집입니더.”
“고맙습니다.”
두 사내는 망연한 모습으로 서로를 외면한 채 서 있었다. 인실이 내려왔지만 그들은 그런 자세를 허물지 않았고 말도 걸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계시소.”
아까 왔던 길을 되잡아서 인실은 천천히 걷는다. 계단도 천천히 밟고 내려간다. 이런 한촌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도시풍의 남녀 세 사람이 새끼줄 잡고 칙칙폭폭, 기차놀이하는 아이들처럼 명희 하숙에 줄줄이 들어가는 광경은 아무래도 우스꽝스럽고 멋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명희가 충격을 받을 것 같기도 해서 일단 혼자 그를 먼저 만나야겠다고 인실은 생각했던 것이다.
“임선생님을 만나뵈려고 왔는데 계시는지요.”
장독가에서 삶은 빨래에 방망이질을 하고 있던 중년의 아낙이 방망이를 든 채 화드득 일어섰다. 삶은 빨래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디서 오싰습니까?”
“서울서 왔습니다.”
“예…… 저기 선상님은요, 핵교에 가싰는데예.”
인실은 난감해한다.
“학교에 갔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하숙에 계실 거라 해서 왔는데, 그럼 임선생님이 안 계시단 말씀이군요.”
아랫방 문이 여리면서 소년이 쫓아나왔다. 서둘러 신발을 신은 소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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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요, 분교에 가 계실 겁니더. 지가 가리치드릴 긴께 지를 따라오시이소.”
기세 좋게 말했다.
“참, 그래라. 그래야겄다. 그라믄 자아를 따라가보시이소. 촐랑대지 말고 가거라!”
아이를 향해 소리지르는 아낙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인실이 집을 나서는데 아이는 돌층계와 반대 방향을 향해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이애! 이애야!”
“야?”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잠시만 기다려주겠니? 일행이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내 가서 뫼시고 오마.”
“아니라예, 개안십니더. 핵교로 해서 가는 길도 있인께요.”
솜저고리 앞섶 밑에 두 손을 찔러넣고 염소새끼 뛰듯 아이는 껑충껑충, 되돌아왔다. 검정색 솜바지, 잿빛 솜버선, 신발은 신발은 검정 고무신이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삶은 빨래처럼, 쇠죽을 먹던 살찐 암소의 콧김처럼 아이는 따뜻해 뵌다. 벚나무가 즐비히 선 오르막길에서
“이리로 가믄요, 핵교 뒷산을 넘어가야 하고, 바닷가 신작로로 해서 가는 길도 있십니더.”
아이가 말했다.
“너도 이 학교엘 다니느냐?”
인실이 물었다.
“야.”
“몇 학년이니?”
“삼학년입니더.”
아이는 손등으로 코를 문지르며 인실을 한번 살펴본다.
“임선생님은 몇 학년 담임이니?”
“선생님은 담임 안 하십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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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삼학년에서부터 육학년까지 여자아이들만 모아놓고 수예하고 재봉만 가리치니께요. 그런께 촉탁선생님이라 안 캅니꺼.”
“그래서 분교에 가 계시니?”
“아니라예. 그거는 아니고요, 방학 동안 아무도 없인께…… 선생님은 혼자 기시는 거를 좋아하는가배요. 저기, 그런데 물어봐도 되겄십니꺼.”
“뭘?”
“혹, 우리 핵교에 오시는 선생님 아닙니꺼?”
“나 말이냐?”
“야.”
“아니다.”
아이는 실망을 나타낸다.
“우리 핵교는 여 선생님이 한 사람뿐입니더. 그라고 또오, 선생님이 모자라니께요.”
그래서 새로 오는 선생님으로 생각했다는 뜻인 모양이다.
“일학년은 옥선새님이고 이학년은 키다리 배선생님이고 삼학년,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도다라고 눈이 쪼맨코 입이 튀튀하게 나와서 별명이 돼지라예. 또 도다리라고도 하지마는 맘씨는 개안십니더. 아아들 안 때립니더. 사학년은 교장선생님이 가르치고요. 분교의 오학년, 육학년은 황선생님이락꼬, 서울내깁니더.”
해놓고 아이는 당황한다. 명희선생도 그렇지만 안내해가는 손님도 서울내기라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오륙학년을 한 분이 가르치느냐?”
“야, 와 그런고 하니요, 사학년에서 졸업하는 생도들이 많십니더. 그란께로 오륙하년을 모두 합쳐도 한 반밖에 안 되거든요.”
“음.”
운동장으로 올라간 인실은 아이들 따라가면서 두 사나이에게 손짓하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왠지 가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따라오려면 따라오라, 그런 심정은 명희가 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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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을 생각한 때문이지만 막상 와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명희가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왜 내가 이런 행동에 동행했을까.’
처음부터 찜찜했었다. 찜찜했던 것이 이제는 노골적인 후회로 인실은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교사와 교장 사택 사이를 지나 학교 뒤켠으로 돌아갔다. 후문을 나와 두덤 두 개가 나란히 있는 언덕을 올라가서 다시 내리막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소나무가 듬성듬성 솟아 있는 산은 향이 서북쪽이어서 음산했고 척박해 보였다. 얼마나 긁어내었는지 솔갈비 한줌 찾아볼 수 없는 땅바닥엔 세월에 부서지고 모가난 돌멩이만 굴러 있었다. 눈 아래는 여수로 향한 조은 수로, 해저터널이 바닥에 가로놓여 있는 그 수로의 목이 넓어지면서 섬들이 포개어지고 비켜서고, 바다는 서쪽으로 아득히 수평선을 긋고 있었다. 그러니까 교정에서 내려다본 것이 앞바다라면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은 뒷바다라 할까. 해저 터널 하나로 통영읍과 연결이 되는 미륵도, 산양면인데 이곳은 봉화대와 사찰 용화사가 있는 용화산의 자락인 셈이다. 본래는 섬이 아니었는데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에 쫓긴 왜군의 전함이 이곳에 몰리어 어마지두한 병졸들이 이 목을 파서 수로를 내었다 한다. 세칭 다이코보리, 풍신수길의 군사가 팠다는 뜻일 거다. 그러나 대부분 이곳 사람들은 이 좁은 수로를 판대목이라 한다.
내리막길을 다 내려갔을 때 수로의 방죽 옆은 꽤 넓은 신작로였다. 산자락에 바싹 붙어 잇는 신작로, 그 사이의 좁은 공간에 바라크 같은 목조 건물이 바다를 보고 한 채 서 있었다. 그것이 분교였다. 아이는 바람개비같이 날라갔다.
“선생님! 선생님! 서울서 손님 오십니다!”
복도 같은 것도 없고 건물 처마 밑에 들어서니 유리창을 통해 책상이며 걸상, 칠판 따위가 있는 교실 내부를 환히 볼 수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서울서 손님 오싰습니다!”
교실에 잇달리어 기역자로 되었으며 장지문이 닫혀져 있는 방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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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아이는 소리쳤지만 방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신돌위에 검정 여자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은 가까이 가지 못하고 아이의 뒤통수만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의 고함은 종기를 째려는 순간의 칼끝처럼 이들의 마음을 긴장시키는 것이었다. 명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떤 태도로 나타날 것인가.
“선생님요!”
침묵이 아타까웠든지 아이는 주먹으로 문을 한 번 탕! 하고 쳤다. 방문이 열렸다. 검정 치마저고리를 입은 임명희의 창백한 얼굴이 세 사람을 향해 떠올랐다. 그것은 유령이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전율을 느낀다. 살아 있는 징표, 생명의 빛을 잃어버린 모습, 그러나 다음 순간 명희 얼굴에 분노가 나타났다기보다 분출이라 해야 할까, 동시에 그것은 살아 있었다는 신호가 되었다. 인실은 달려갔다.
“선생님.”
“……”
“죄송합니다.”
“……”
“용서하세요.”
“어떻게 된 일이니?”
격렬한 분노의 얼굴과는 딴판으로 목소리는 평탄했다.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
“선생님은 원치 않으셨겠지만, 어, 어떻게 수수방관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인실은 터져나올 것만 같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찬하가 다가와 모자를 벗었다.
“형수님, 오래간만입니다.”
창백했던 명희 얼굴이 진홍빛으로 변해갔다. 눈이 증오에 타듯 희번덕인다. 찬하는 새파래진다.
“너무들 하시는군요.”
기계로 압축한 목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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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지들 마세요.”
명희는 다시 말했다. 상처투성이, 이 사람이 걷어차고 저 사람이 걷어차고 굴러서 굴러서 어느 구석에 처박힌 돌멩이같이 되어버린 명희,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변화였다.
“모, 모든 일은 저의 잘못으로,”
찬하는 얼어붙어서 말했다.
“이상하군요. 찬하씨의 잘못이라구요?”
“대안의 불구경하듯 할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여기 오시는 일이 옳은 방법이었을까요?”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그 그냥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책임과 의무가 찬하씨에게 있습니까? 그럴 이유가 없지 않아요?” 옛날 명희의 어투가 아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집으로 돌아가시라는 말씀은 않겠습니다. 나오시기는 잘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이렇게 계셔서 되겠습니까.”
“상관 마세요. 제발 상관 말아주세요!”
의아해하며 서 있는 아이에게 병아리 몰 듯 인실은 팔을 벌리며
“얘야, 고마워. 이제 가도 되겠구나.”
인실은 신작로로 나가는 아이를 뒤따른다. 아이는 신작로로 곧장 걸어갔고 인실은 방죽가에서 멈추었다. 목도리 대신 타월을 목에 감고 통을 인 생선장수 아낙이 지나간다. 아이는 굽어진 해안을 따라가다가 한 팔을 치켜들고 빙빙 돌리며 뛰었다. 그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생선장수 아낙도 사라지고 방죽을 치는 물결 소리, 그리고 사위는 적막하게 가라앉았다.
‘이상한 여행, 쓸쓸한 이 바닷가, 이곳에서 만나야 했던 임선생님, 내가 왜 여길 왔지?’
잘못했다는 후회는 명희르 ㄹ위한 것이면서 또 자신을 위한 후회이기도 했었다. 마치 주술같이 끌려 이 땅끝과도 같은 바닷가에 서 있는 느낌이다.
오가다가 옆에 와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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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하늘과 겨울바다, 척박한 언덕이 등뒤에 있었고 수로 건너편 마주보이는 곳은 햇볕에 등살을 펴듯 산의 능선은 부드럽다. 산자락에 띄엄띄엄 놓인 인가, 이따금 사람이 지나간다. 도대체 삶은 무엇이며 존재는 무엇인가, 인실은 한숨을 깨문다.
‘마치, 철새가 더나버리고 텅 빈 갈대숲 같다. 여기까지 오게 한 마음도 목적도 왜 이리 어렴풋한가. 기묘하기만 하고, 정녕 이 순간, 이곳, 이 풍경은 정상이 아니다.’
기묘하다는 것은 뭐 새삼스런 느낌은 아니었다. 여행하는 동안 시시로 벙어리 노릇을 해야 했고 꾸어다놓은 보릿자루같이 있어야 했던 오가다의 처지가 우선 기묘했다. 떠나올 때부터 형용하기 어려운 절실한 것, 그 절실한 것이 이곳까지 오게 했지만 인실뿐만 아니라 두 남자의 경우도 그 절실함이 무엇인지, 사실은 정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정시하라! 정시하라! 외치며 뒤쫓아오는 이성에서 도망치듯 애써 애매모호한 베일에 몸을 숨기며 왔는지 모른다. 생각하기에 따라 단순한 여행길에 진주 최씨네 댁을 방문하고 겸해서 명희도 찾아보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관계는 복잡미묘하고 감성은 보통 이상으로 섬세하며 예민하여 결코 단순치는 않았다. 명희를 찾아온 명분에서도 그러했다. 실상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명희를 찾을 명분이 없는 것이다. 찾아와야 할 이유, 의무가 없고 다시 말해서 주제넘다는 것이 이들 대면의 비극에다 희극적 요소를 가미한 결과가 된 것이다. 오가다는 아예 명희와는 면식이 없는 인물이었다. 은사이거나 친구라면 혹 모를까 제자인 인실이 개입했다는 것도 당돌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고 스승을 수치스럽게 했을 뿐이다. 찬한느 더더구나 명희를 찾아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조용하의 인간됨에 원인이 있었고 명희의 잘못된 선택에서 빚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용하와의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의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명희를 재기 불능의 경지까지 몰고 갔으니까. 진실은 엄폐된 채 찬하와의 불미스런 관계 운운 그 자체가 명희에게는 악몽이었다. 영원히 깨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악몽, 세 사람의 심정이 백 프로 선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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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라도, 물론 백 프로 선의지만 이들의 방문은 명희에게는 심장을 도려내는 비수 같은 것이었다. 불안은 이들이 떠나올 때부터 있었다. 과연 명희를 찾아가는 것은 옳은 일인가. 냉혹하게 얘기하자면 백 프로 선의의 뒤켠에는 에고이즘이 숨어 있었다. 불안을 외면하고 욕망에 쫓기어 이들은 왔다. 인실은 주술에 걸린 것처럼왔다고 표현했지만. 찬하는 명희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떠밀었다는 자책감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든 그를 구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 사랑의 불길이 있는 한 명희를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며 한 오라기의 반응이라도 건져내고 싶은 욕망은 있었을 것이다. 인실과 오가다는 여행 그 자체에 대한 유혹에 저항하지 못했을 것이고, 외형으론 두 남녀는 찬하의 들러리로 온 것 같지만 편승이라 해야 옳았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찬하 편이 들러리였는지 모른다. 두 남녀는 서로 사랑했으니까. 막연한 불안, 애매모호한 상태, 그러나 끝내 그들 자신의 에고이즘을 호도할 수는 없었다. 올 데까지 와서 코너에 몰린 명희와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도 코너에 몰린 것을 깨달았다.
“저 사람들…… 비극이군요.”
오가다가 중얼거렸다.
“희극인지도 모르지요.”
“어째서.”
“글쎄요…… 현실 같지가 않아서요.”
“왜 저렇게 돼야만 했을까?”
오가다는 등을 구부리며 바다를 내려다본다.
“시간적으로 안 맞은 거 아니었을까요?”
“한발 먼저 청혼을 했다, 그 얘기군요. 한발 처졌다면 그건 찬하씨 성격 탓이지요. 찬하씬 내성적인 사람이니까.”
“성격을 말하면 임선생님한테도 원인은 있었을 거예요. 전 선생님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사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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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할까요, 소극적이라 해야 할지, 그러니까 무엇이든 보호를 받을 때 쉽게, 그 보호가 없을 때는 힘들게 사는.”
“그거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선택이 까다롭다는 점이 있지요. 조용하씨를 선택한 것은 친정에 대한 희생 같은 것이 있었을 테지만 선택의 잘못을 알면서 들어갔을 성싶어요. 그러니까 대단히 어렵게 힘들게 살았을 거예요.”
인실의 말은 횡설수설인 듯도 했다. 명희의 사람됨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안타까움도 있는 듯했다.
“너무 착하고 더러운 것을 모르고 소극적으로 해서 힘이 들었을 거예요.”
덧붙여 말했다. 옛날 처녀 시절에 대담하게 상현의 하숙을 찾아갔던 일, 바로 이곳 바다에 투신했다가 어부가 건져주었던 일을 인실이 알았더라면 명희에 대한 인식은 좀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니 그래도 어쩌면 달라지지는 않았을 성싶다.
“너무나 황폐해졌어요.”
“그분 모습에 나도 놀랐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젯밤엔.”
“인실이 중얼거렸다.”
“사과 안 해도 좋습니다.”
“사과 같은 것 안 해요.”
“그럼 공격할 일이 또 남아 있습니까.”
오가다는 애써 인실의 가라앉는 기분을 일으켜 세우려는 듯 우스개 비슷하게 말했다. 인실은
“졸렬했어요.”
“……”
“혼란스러웠고요.”
“다 압니다. 모순과 갈등, 히토미 당신만이 아니지요. 세 사람 다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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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잘못한 거예요. 이곳에 오는 거,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부끄럽군요.”
한편 찬하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괴로워하며 명희를 설득하고 있었다. 서울이 싫으면 진주 최씨네댁에라도 가는 것이 좋겠다고.
“찬하씨가 왜 이러지요?”
명희의 눈매는 칼날 같았다.
“당신 형님 말대로 내가 찬하씨의 애인이라도 되나요?”
“그, 그런 말씀을.”
“나는 내 육친한테도 이런꼴 보이기 싫었어요. 한 마리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이 꼴 말예요!”
“……”
“제발 가주세요. 도대체 저기 서 있는 사람들, 찬하씬 나에게 뭔가요? 당신네들 동정이나 받아서 눈물 흘릴 그런 처지는 아니예요.”
˝동정이 아닙니다.“
찬하의 목소리는 낮았고 절망적이었다.
“왜 더 이상 못 가는 가 싶어요. 새가 되어서라도 이 땅에서 빠져나가고 싶어요. 조씨 가문, 그 집 자부, 조아무개의 아내.”
명희는 몸을 떨었다.
“십 년 동안 그게 때라면 밀어버리지요. 십 년을 벗길 수 있다면 난 살갗이라도 벗겨내고 싶은 심정이에요. 누굴 원망하는 건 아니예요. 내 자신을 원망하는 거예요.”
“형수씨에겐 아무런 때도 묻지 않았습니다. 벗겨낼 그 무슨 때가 있겠습니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귀족의 귀부인의 전락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친일파의 자부로 불미스런…… 네,”
하다가 말을 끓었다. 명희는 이성을 잃었고 감정은 극도로 흥분된 상태였다.
“그런 것 관계없습니다. 헌신짝처럼 다 버리세요. 피해망상입니다.”
“내가 형제를 농락했나요? 비밀이지요? 왜 내가 이런 비밀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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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야 합니까! 왜 사람의 눈을 무서워해야 합니까! 난 찬하씰 사랑한 적이 없는데, 난 조씨 집안의 조씨 성 가진 사람 누구도 사랑한 일이 없는데, 왜 내가 십 년을 그 집에서 살아야 했는지 아세요?”
찬하는 새파랗게 질려서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명희를 쳐다본다.
“나를 요녀같이 대하는 당신네 부모, 나는 결벽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내 결벽을 알면서 조용하는 독사를 내게 들이대듯 즐겼어요. 찬하씨는 잘 아실 텐데요. 왜 내가 그 집에서 못 나온 줄 아세요? 내가 나오면 그것을 무기 삼을 것이란 공포 때문이었어요. 난 사람이 무서워요. 아무도 믿지 않아요! 가세요! 왜 내게 공포를 환기시키는 겁니까. 나는 구경거리가 된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에요! 하지만 난 구경거리가 되었답니다.”
비로소 명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찬하는 새파랗게 질린 채 인실과 오가다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인실씨! 가보세요! 가봐주세요. 흐, 흥분해서,”
인실이 명희에게로 뛰어간다.
“갑시다, 우린 가는 게 좋겠어요.”
찬하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며 급히 도망치듯 걸음을 옮긴다. 한 동안 당황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인실 쪽을 바라보던 오가다도 허둥지둥 걸음을 내디뎠다. 해안길을 따라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가는 찬하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귓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몽유병자처럼 걷고 있었다. 담배 피는 것도 그는 잊은 듯했다. 터널의 입구, 국화빵을 구워 파는 중늙은 여자와 삶은 고구마를 파는 노파가 이쪽저쪽 마주보고 앉은 터널 입구에서 내리막길을 한참 지난 뒤 오가다는 겨우 찬하를 따라잡았다. 지상 부분을 지나 커브를 돌았을 대 터널 입구에서 비쳐들어오던 광선은 차단되고 띄엄띄엄 천장에 매달린 전등은 어둠 속에서 마치 숲속의 등불같이 깜박이는 듯했다.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발소리는 메아리가 메아리되어 끝없이 울린다. 오가다는 견딜 수가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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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벽 저 벽에 부딪치며 울리는 메아리에 힘입어 물었다.
“가엾어서 그래요?”
찬하는 걸음을 멈추고 오가다를 쳐다본다.
“아니,”
“그럼 왜 이러는 겁니까. 당신은 넋이 나간 것만 같아요.”
찬하는 겨우 생각이 난 듯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성냥개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걸으면서
“백 년 천 년 얼어붙어서 녹아버릴 것 같지가 않소. 끔찍스러워.”
“뭐가?”
“산다는 게.”
한참을 걷다가 오가다는
“이 어두컴컴한 굴속처럼 말이지요? 암중모색이지 뭐. 인생이란 끝없이 쓸쓸해. 저승길을 가는 것처럼. 이승길 저승길 따지고 보면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요.”
“……”
“사카상(찬하씨)!”
“……”
“역시 나나 당신은 봇짱이야. 모두들 배짱 두둑하고 낯가죽도 질기던데, 사이교(西行: 승려시인)의 방랑을 꿈꾸고,”
오가다는 찬하에게 말한다기보다 윙윙 울리는 자기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말하는 기분이었고 왠지 모르겠으나 소리를 질러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건 오가다 당신의 경우겠지요. 나는 사이교의 방랑 따위는 꿈꾸지 않소이다. 그보다 도덕과 휴머니즘은 다르지요, 분명히.”
어세가 강했다.
“네. 다르고 말구요. 때론 다를 정도가 아니라 상반되는 거 아닙니까.” 한참 있다가 찬하는
“그분은 도덕적이었지만 휴머니스트는 아니었소, 사막이었소.”
하며 짧아진 담배를 버린다.
“나는 꿈같은 것 꾸지 않소. 대체로 조선인은 일본인만큼 꿈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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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아요.”
“감상을 모멸하는군요. 그건 알 만해요.”
그러고는 말이 끊어졌다. 그런데 응얼응얼 이상한 소리가 멀리서 울려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차츰 가까워져서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런가 하면
“나무아이미타아불! 나무아미타아불!”
윙! 위! 울리는데 바구니를 인 중늙은 여자가 그것도 조만한 여자가 한 팔은 바구니를 잡고 한 팔은 열심히 휘저으며 모습을 나타내었다.
“관세음보오살! 관세음보오살! 나무아미타아불! 나무아미타아불!”
오가다는 마음속으로 아아 하고 납득했다. 아까 목청껏 노래 부르고 싶었던 자신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늙은 여자는 극락왕생을 빌며 소망을 염원하며 염불을 했다기보다 세상과 동떨어진 바다 밑의 공간, 그 공간 자체에 자유로움을 느꼈을 듯싶었고, 별로 걸리적거리는 사람, 부딪치는 행인도 없는 터에 갈 길을 밝혀줄 만큼의 어둠이 허물을 묻어주듯, 그리고 제 목소리가 가토록 오래 울리며 연이어져 사라지는 것이 마치도 육체를 망각하고 자신의 영혼의 목소리만을 들으며 영혼의 부유를 확실하게 느끼며―그렇다, 육신을 빠져나온 자유로움, 자의식을 풀어버린 홀가분함, 그것은 목소리로써 표현되고 인식된다. 중늙은 여자는 명부길을 환상하며 염불을 외웠는지 모르지만 명부길엔 육신은 없다. 육신이 없음은 욕망과 소망도 없는 것이다. 욕망과 소망이 없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오가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터널에 빛이 들어왔고 소리도 제자리에, 그리고 눈부신 외부로 그들은 나왔다. 국화빵장수, 고구마장수가 웅크리고 앉아 있던 저켠과 달리 이켠은 훨씬 풍요했다. 잡화상, 음식점, 한약국도 있었고 철물점, 사람이 사는 품을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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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고 있었다.
신작로를 따라서 걷는다. 오른편 바닷가에는 그ᅟᅮᆯ 손질하는 어부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참 가서 노천 조선소라고나할까 목수들이 배를 만들고 있었다. 잇달아 건어장, 그물 공장, 뭔지 모를 작은 공장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왼편에는 산을 등지고 민가가 즐비했으며 가간이 영세한 상점들이 끼여들곤 했다. 잔물결에 일렁이는 오후의 바다는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읍내 중심가로 들어왔고 여관에 당도했다.
“부산 가는 배가 어떻게 되지?”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찬하는 심부름 아이를 불러서 물었다.
“낮배는 떠났어요.”
“그러면?”
“네시에 있는 거는 마산으로 돌아서 가는 밴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조맨한 것이 통통배라요. 장사꾼들이 타고 가는 짐배나 다름없십니더.”
설명이 장황하다.
“그 배 말고는 없느냐?”
“아닙니더. 밤배가 안 있십니꺼. 그 배는 크고 부산으로 직행이니께 시간도 덜 걸리지요. 뱃멀미도 덜 남니더.”
여깃 설명이 장황하다. 찬하는 오원권 지폐 한 장을 주며 밤배의 표를 사라고 이른다. 한 장만 사라고 덧붙인다.
“이등표지요?”
“음, 그리고 술상 좀 차려줄 수 있겠느냐?”
“예. 그라믄 술은 머로 할까요? 정종으로 할까요?”
“그래라.”
여관방으로 들어온 두 사내는 외투를 벗어놓고 마주하고 앉아서 새삼스럽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찬하의 낯빛은 파랗게 질린 그대로였다. 이따금 그의 입가에서 경련이 일곤 했다.
이윽고 술상을 소년이 들여왔다. 두 사내는 작은 유리잔에 서로 술을 부어주며 말없이 마신다. 찬하는 이따금 오한 같은 것을 느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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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언어 자체의 의미보다 명희의 분위기는 거의 살인적일 만큼 강하고 살벌하였다. 명희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그것도 능히 짐작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하는 섬뜩섬뜩 공포까지 느낀다. 마음속에 품었던 것이 죄가 될지 모르지만 찬하는 단 한 번도 시동생으로서 예의에 벗어난 일은 한 적이 없다. 꽃같이 귀하고 소중했던 모습이, 한 오라기의 애정이 흐르는 눈빛을 기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르지도 않았는데 찬하가 본 것은 자기 방어의 영악한 명희의 본능이었다.
“오가다상!”
“네.”
“지금 당신은 낭인이오?”
“낭인이냐구요?”
“아니면 비밀 결사에서 일하고 있는 거요?”
뒤틀린 어투였다. 터널 속에서 사이교의 방랑, 그 따위는 꿈꾸지 않소이다, 했을 때처럼 신경의 날을 세우고 떠밀어내듯, 찬하는 결코 그런 투로 얘기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시골 중학교 선생질이나 할까 생각중이오.”
“왜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요?”
“현실 도피죠 뭐.”
“현실이 어때서,”
찬하의 음성은 한 옥타브 떨어지는 것 같았다. 혼잣말같이 다음을 잇는다.
“세상이란 늘 이랬었지…… 지겨워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지식인의 혓바닥으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 혓바닥이 짤려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오가다는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한약을 털어넣듯 입속에 술을 붓는다. 여관의 젊은 여주인의 손이 간 듯 술상은 조촐했다. 마른 대구를 먹기 좋게 찢어서 초장을 곁들여놨고 단칼에 싹둑 베어낸 대구알은 잘 익어서 석류같이 빨갰는데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고춧가루 깨소금을 살살 뿌려놨고 파아란 파래무침은 그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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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드높았다.
“옷을 갈아입고 또 갈아입고 나타나지만 기는 놈, 서는 놈, 나는 놈, 변함이 없이 따로, 따로.”
오가다 말에
“뭐가 말이오.”
“그렇지요. 사람 사는 게…… 지켜워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그렇지요, 뭐. 천지만물이 모두 다, 진화가 어디 있어요? 되풀이지 뭐.”
술에 안주가 필요하다. 말은? 말을 위해 술이 따라갈 수도 있고 술을 위해 말은 안주가 될 수도 있는 것인지. 이 경우 두 사람은 술을 마시기 위해 말을 한다. 그것도 흠뻑 마셔야 했고 흠뻑 취해야만 했다. 싫든 좋든 알맹이야 있든 없든. 무슨 내용이든 빈정거려야만 했다. 아니, 그보다 술만으로는 의식이 말뚱말뚱했고 살벌하고 황량한 광경이 통증처럼 가슴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이겠는가. 찬하는 물론이었고 오가다나 지금 이 자리에는 없는 인실의 경우만 하더라도 자기 모멸,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감은 절실한 욕망에 못지않게 준열했을 테니까. 빈정거리는 말투, 말뚱말뚱한 의식에 먹칠을 하고 싶은 것, 그것은 자기혐오 자기모멸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심정, 심정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엊그제 바람이 불었던 것처럼, 백 년 전에 홍수가 있었던 것처럼 바야흐로 지금도 홍수, 홍수요.”
“뭐가요.”
오가다 말에 찬하는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그거 좋지요. 대포 없이 혁명하고 독립도 하고, 하기는 그들이 승리하는 날 나 같은 싸구려 포장지 같은 귀족 문벌에 친일파, 타살되기 십상이지.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 그보다 나을 것 한푼 없어요. 내 부친께서는 생각을 매우 잘못한 겁니다. 친일파란 합방되기 이전에 필요한 것, 합방이 되고 나면 쓰레기로 변하는 것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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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만방에 체면 세우기 위하여 조선 왕실을 일본 황족으로 하고 친일파에겐 작위를 주고 그것도 일종의 체면용일 뿐, 일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영토와, 자원과 노동력뿐이지요. 다 써먹고 이제는 필요 없게 된 밥버러지가 뭐 그리 반갑겠소. 죽어 없어지는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게요. 처량한 신세지요. 나의 부친은 매우 셈을 잘못한 겁니다. 작위를 받을 게 아니라 상놈으로 격하됐어야 옳았어요. 노역형보다 금고형이 가혹한 걸 몰랐지요. 대학을 나오면 뭣합니까? 손도 발도 내밀 수 없는데, 과거 조선 문화에 대한 일본의 콤플렉스는 그것을 말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 유산을 많이 싸안고 있는 과거 지배층이 반가울 까닭이 있겠어요? 일본에게 협력하고 일본이 회유하여 목적을 달성한 오늘 그 계층이야말로 일본이 가장 기피하는 존재가 된 것은 공리에 철저한 일본이고 보면 당연한 귀결 아니겠소?”
찬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자학은 극에 달한 것 같았다.
“타살을 당하거나 종신 금고형을 받거나 피장파장, 내 뿌리를 내린 조국이 독립된다면 어느편이든 나는 상관없지요. 어차피 내가 속한 계층은 사라져야 하니까요. 그러나 당신 말대로 실개천이 아닌 홍수가 난다 하더라도 일본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겁니다.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급진파도 조선 독립을 언급하는 자들은 별로 없고.”
“그런 소리 마십시오. 여기 있지 않습니까.”
서둘며 오가다는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께 웃는다. 동양인 특유의 감정을 배버린 소리뿐인 웃음을.
“나카노 시게하루도 있지요. 「비 내리는 시나가와 역」말입니다. 신이여 잘 가거라, 김이여 잘 가거라, 그대들은 비내리는 시나가와 역에서 승차한다, 그 시를 쓴 나카노 시게하루.”
나카노 시게하루는 시인이면서 소설가, 평론가이며 나프[전일본무산자예술전체협의회]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비 내리는 시나가와 역」은 조선 독립과 독립운동에 대한 뜨거운 지지를 나타낸 시다.
“나도 『개조』에서 그걸 읽었어요. 그래 오가다상, 당신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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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세계인, 국제인, 범세계주의자]이오? 하기는 계명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까지 치르었으니까 그중의 어느 하나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찬하는 술잔을 놓고 담배를 붙여 문다.
“명칭이야 어떻든, 코스모폴리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어느 것이든, 한 마디로 허황하지요.”
“그게 그거지 뭐.”
“그게 그거지요. 허공에 둥 떠 있으니까, 허공에 뜬 달같이 에너지가 없으니까 그게 그거 아니겠소.”
오가다는 묘하게 둘러대었다. 그게 그거라는, 불투명한 언어 자체가 이들의 막연한 심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에너지가 없기론 다 마찬가지요. 하나만 빼고, 홍수가 나도 태풍이 불어도가 아니라, 결코 홍수가 나고 태풍이 부는 일은 없을 게요만 실개천, 그게 사방에서 찔끔찔끔 흐르는 거 아니오?”
“일본에서 말입니까?”
의아해하며 오가다는 되물었다.
“그렇소. 일본에서 말이오. 야나기는 조선의 예술만은 사대가 아니라고 웃기는 강변을 했는데 문화에서 사대로 일관해온 일본의 역사가 증명하듯 지금 불고 잇는 새 바람, 흐르고 있는 실개천도 분주하게 들여오는 서구 문화에 묻어서 온 것 아니오. 박래품 선호 사상의 일단에 불과한 거요.”
“허허어, 참 어젯밤 히토미상도 마구 쥐어박았지요. 야나기에 관해서,”
“그랬어요? 생각 이상으로 훨씬 똑똑하군요. 아무튼, 설사 홍수와 태풍이 불어도 다 소용없어요. 천황과 일본도에 잠시 나타나는 피부병 같은 거고 녹이 쓴 것에 불과하지. 천황의 피부병은 군부에서 약 발라줄 것이고 일본도의 녹은 천황이 닦아내고 기름 발라줄 것인데, 천황이야말로 불 먹는 공룡 같은 존재 아니오? 일본에서는 황도사상 이외 어떤 사상도 에너지를 가질 수가 없어요.”
일본인들에게는 기절초풍할 만큼 불경스런 찬하의 말이었고 어투였다. 증오와 모멸이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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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부터 계속 얻어터지는군요.”
오가다는 쓰게 웃었다. 인실이 여자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랬을까. 감싸안아 주었는데, 히토미는 말을 안 할 때 더 강했다는 얘기도 했었다. 그러나 찬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평소 온건하고 지극히 객관적이던 찬하 어디에 이 같은 증오와 분노가 숨어 있었던가. 그의 분위기는 마구 밀어붙이는 탱크와 같이 오가다에게 압도해왔다. 오가다는 저항을 느낀다.
“오가다상이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그 우정을 나는 믿습니다. 한데 어떻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당신, 천황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오가다는 당황한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듯 순간 어쩔 줄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그, 그거는, 네, 아직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요.”
“……”
“그게 대부분 일본인들의 한계가 아닐까요?”
오가다 얼굴에 막연한 표정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술을 마신다. 말없이 술을 마시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의 약점을 연민하는 이상한 애정 같은 것이 싹트는 것이었다. 오가다가 입을 열었다.
“1928년 보통선거가 실시됐을 때 군주제 철폐를 필두로 하여 열두 조항의 정책을 들고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타난 공산당은 선거중의 탄압은 물론 3·15의 비극을 불렀는데 산카상도 아시다시피 삼천 명 이상을 잡아들이는 검거 선풍이 불었고 야마센의 의회에서 폭로했듯이, 또 고바야시의 소설 『1928년 3월 15일』에도 상세히 묘사되었듯이 그 무시무시한 고문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산당은 침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공산당을 발본색원하기 위하여 이듬해 정부는 치안유지법을 보다 가혹히 개정하고 의회에서 긴급 칙령으로 개정된 법안 승인, 이때 홀로 반대한 야마센은 그날 밤 우익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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