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지은이) 문학동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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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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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철 2020-02-0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권

4부 2권

제4편 인실의 자리

01장 휘의 갈등

“봄아 봄아, 우찌 그리 더디 오노. 고봉준령 넘니라고, 허리 아파 쉬니라고 더디 오나. 산밑에는 명춘화 산수유도 피었일 기고 까치는 안짱걸음 걸음시로 고개 넘어 손 온다고 까까거릴 긴데 첩첩산중 이 골짝은 우찌 이리도 적막강산인고.”
납독이 올라 얼굴과 입술, 잇몸까지 푸르딩딩했던 춘매는 봄이 더디 온다고 푸념하곤 했었다. 그러던 춘매도 이른 어느 봄날, 꽃바람에 할미 죽는다는 말을 뇌면서 세상을 떴는데 그것도 꽤 오래된 일이다.
지리산 산록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에 봄은 분명히 와 있었다. 휘는 돌소금 한줌을 들고 개울가로 나왔다. 높은 계곡에는 낙수가 하얗게 얼어붙은 채 있었지만 개울은 녹아서 맑은 물이 구슬처럼 구르고 있었다.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서 이를 닦는데 휘는 발소리를 들었고 돌아보지 않았지만 순일 거라고 직감했다. 순이였다. 그는 이를 닦는 휘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서 이고 온 사기를 내렸다. 소매를 걷고, 팔뚝이 터서 빨갛다. 사기에 물을 붓고 휘휘 젓다가 물을 쏟은 뒤 보리쌀을 씻는다. 휘는 멈출 수 없는 듯 계속해 이를 닦고, 순이 역시 계속해 보리쌀을 씻는다. 두 사람의 침묵은 터질 듯 팽팽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도 터질 듯 팽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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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장 초야

혼례는 치렀다. 신방에 신랑도 들어갔다. 산은 끝없는 정적에 묻혀 있었고 이따금 밤새 우는 소리,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짝쇠네 집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 합석했던 짝쇠는 술이 몇 순배 돌자 일어섰다. 연소하여 그랫던지, 의기소침한 안서방 보기가 딱하여 그랬던지 안서방을 이끌고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하기는 방이 협소해서 여섯 사람이 앉아 술 마시기는 매우 옹색했다. 사돈지간이 된 김강쇠와 송관수, 그리고 혼례랄 것도 없는 초라한 의식을 흉내나마 절차를 밟아준 해도사, 일진도 없는 빈 절간에 상좌와 함께 머물러 있던 소지감, 네 사람이 남았다.
“그 댁에서는 이장을 해왔소?”
해도사가 관수에게 물었다.
“얼음이 풀리야 이장이고 머고.”
관수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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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은 송형 혼자만 왔다, 그 말씀이오?”
“질수가 다른께 함께 와야 할 까닭도 없고.”
“조카딸이 있다니께 유하는 데는 걱정이 없일 기고 느긋하게 구겡이나 하고 오믄 되겄네.”
강쇠 말이었다.
“구겡이 다 뭐꼬? 일각이 여삼추라 얼음 녹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거를 보고 왔구마.”
“하기는.”
해도사가 술잔을 놓으며 말했다.
“뿐이건대? 이거는 석고대죄라도 하는 꼴이라. 울기는 와 그리 쩔쩔 우는지, 핏줄도 아닌 양분데 머가 그리 맺히고 설분지 알다가도 모리겄더마.”
“그게 법이라.”
해도사의 말에 강쇠가 덧붙인다.
“양반네 법이제요.”
“양반이라고 저저이 다 그러지는 않소이다. 아무튼 매우 지순한 사람이군요.”
소지감이 한마디 했다.
“그 양부에 그 양자라, 할 말은 하지요. 내 어릴 직에 이웃에서 보아왔지마는 김훈장 그 양반 추수가 끝났다 하믄 노자 맨들어서 양자 찾니라고 사방을 쏘다녔구마는. 가문을 닫고 내가 무신 면목으로 조상을 대할가부냐, 그게 그 양반 입버릇이었제요. 꼬장꼬장한 늙은이, 고집이 평양땅 고집이고 나도 산에서 많이 대들고 했는데…… 지내놓고 보니 그 양반만한 어른도 세상에는 드물더만요. 말이 양반이지 농사꾼으로 살았고 글을 빌릴라 카믄 동네 사람들 그 양반 찾아갔인께. 그래도 비단가리 하나 바라는 게 없었고, 답대비, 그 골수에 박힌 양반이라는 생각이 병이었제요.”
“……”
“한경이 그 사람도 좀 모자라서 그렇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오. 그러니 효성이 지극하고 남부럽지 않는 아들을 두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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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할 때 관수의 얼굴은 쓸쓸해 뵀다. 소지감은 모르지만 강쇠와 해도사는 영광이 집 나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묘해진다.
“그러면 그때는 산에 들어갔으니 의병이었고 다음에는 동학군이었고, 다음에는 뭔고? 형평 운동 하는, 시쳇말로 무정부주읜가, 사회주읜가 뭐 그런 것인가? 아니면 독립 투사인가? 송형, 알쏭달쏭 하오이다. 어쨌거나 장돌뱅이 아들치고는 경력이 출중하니 개천에서 용 났다 할 수도 있겠구먼.”
해도사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지나간 얘기는 와 하는고. 된 일이 머 하나 있어서, 젠장.”
“하는 짓짓마다 남 안 하는 걸 했으니 하는 말이지.”
“앗따! 사내장부가 된장 담고 꼬치장 담고 산속에서 멀거니 해 쳐다봄시로 개대가리 죽써묵고 옴대가리 찜쪄묵는 소리나 중얼중얼, 그거는 남 하는 짓이던가?”
“하하핫핫핫…… 시비 나겠소. 면대하여 칭찬하기 면구스러워 그러는 거 아니겠소. 해도사 속으론 부러울 게고 부끄러워 그러는 거요.”
소지감 말에 해도사는
“아아니 물굽이가 왜 그렇게 돌아가지요? 은근슬쩍 사람을 화살판으로 내밀어놓으면서 뒤에서 두 손 싹싹 부비는 꼴이구먼.”
소지감은 껄껄껄 웃었다.
“자알들 노네. 오늘이 우떤 날이라꼬 송관수만 날개를 다노 말이다.”
“오늘이 무슨 날이오?”
짐짓 놀란 척하며 해도사가 묻는다.
“내 아들 장개간 날, 몰랐소? 말을 하자 카믄 내가 상객인데 뒷방 안늙은이맨크로 푸대접을 하니.”
“가만히 있자아, 여기가 그러면 지리산이 아니고 부산 항구란 말인가?”
해도사는 능청을 떤다. 강쇠는 피식 웃었다. 소지감도 웃고,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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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관수는 웃지 않았다.
“저놈의 인사 때문에상객 노릇도 못하고 제에기랄!”
강쇠는 농치면서 관수를 곁눈질해본다. 신부집에서 초례를 치러야 말 타고 따라간 신랑집 어른이 상객이 되는 때문에 해도사가 한 말이었다. 어쨌거나 강쇠는 상객이 아닌 주인의 처지인 것이다.
“그나저나, 용케 무덤을 찾았구먼요.”
소지감은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소. 뫼 슨 사람이 있었인께요. 무슨 핵교 선생이라 카든지 용정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데, 또 최참판댁 환국이아부지가 소상하게 알으키주었고 홍이가, 그러니까 조카사윈데, 발벗고 나서주었제요.”
“그 참 다행이구먼. 옛날에는 호지에서 부모 뼈 추려올려면 수천 냥을 짊어지고 가야 했다는데 왜놈들 땜누에 그렇지 돈은 안들어서 좋았겠소. 그는 그렇고, 어떻든가요? 희망이 터럭만큼이라도 있어 뵈든가요?”
해도사의 말이었다.
“머가요?”
“아, 뭐긴 뭐겠소. 그곳 형편 말이오.”
관수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무식한 내가 머를 알겄소. 잘난 사람들 만나본께 희망이 있다 카고 헹펜 돌아가는 거를 보니 하자세월, 이곳이나 그곳이나 다를 기이 머 있겄소. 왜놈한테 쫴고 되놈한테 쫴고, 오나가나 그 신세가 가련키는 매일반이지. 옛날에는 조선 사람들이 되놈으로 민적을 옮기기만 하믄 얼매든지 땅을 부치묵을 수도 있고 개간도 할수 있었다 카는데, 그래도 오만 고생 다 하믄서 민적 옮기는 것을 마다했다, 흥, 그 시절이 좋았다는 거요. 지금은 묵고살 수가 없고 왜놈 등살에 이도저도 할 수가 없으니 되놈으로 민적을 옮기고 머리도 깎고 하지마는 또 그기이 아이라는구마. 왜놈이 민적을 파주지 않은께 되놈 민적에 왜놈 민적 두 개를 달고 댕긴께 그 고달픔이 오죽하겄는가. 생각해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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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그럴 수가 았을꼬.”
해도사가 말했다.
“결국에는 왜놈 되놈 사이에 끼어서, 따지고 보믄 중국 사람이 그럴 만도 하지. 육실할 왜놈들이 조선땅 묵고 또 야금야금 중국땅묵을라 카이 그 사람들 와 안 그러겄소. 왜놈은 조선 사람이 땅 가지는 거는 언제든지 저거 꺼로 할 수 있인께, 때에 따라서는 조선사람 앞세워 땅을 살라고도 한께. 또 한 가지는 조선 사람이 중국민적으로 옮겨가믄 왜놈들이 잡아들일 권한이 없어지는 거라. 그러니 독립운동하는 사람 잡기도 어려버지는 기고. 중국 사람들은 또 일본놈 손에 움직이는 일부 조선 사람들이 있인께 조선 사람들을 경제하고 발 못 붙이게 하고, 그러니 죽어나는 것은 조선 사람들 아니겄소. 먼저 가서 자리잡은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지마는 뒤늦기간 사람들은 그 고생을 입으로는 다 말 못하는 거요. 풍찬노숙, 북풍이 쐥쐥! 부는, 죽어도 누가 알기나 하나. 돌아오자니 땅이 있어, 집이 있어. 생각해보믄 목이 터질 일이제. 땅 뺏기고 만주로 쫴끼간 사람치고 힘 있는 백성 한 사람이나 있었나? 의병이다 독립 투사다 하는 사라들만고는 땅 파믄서 게우 멩줄 잇듯 불쌍한 사람들뿐이었제. 죽지 못해 간 사람들이 그곳에서는 더한 핍박을 받으니, 그놈들이 땅 뺏고 이 땅에서 몰아냈이믄 그곳에서나 살게 내비리두지…… 우리는 한사코 싸워야 하요, 싸우는 것밖에 없소. 그 길밖에 없단 말이요. 사람우 한 세상 안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겄소.”
목소리는 낮았지만 절규하듯 응혈이 터질 듯 관수가 자아내느 분위기는 그러했다. 관수가 이 지점까지 온 것은 우연도 작심에서도 아니다. 동학당으로 죽음을 당한 장돌뱅이였던 아비, 김훈장을 따라 산에 들어간 사이 행방을 모르게 된 어미, 그리고 은신처에서 만나 부부로 맺어진 백정의 딸인 아내, 그 응어리가 여기까지 오게 했으며 또 앞으로 가야 할 길에는 아들 영광의 한이 짙게 서릴 것이다. 네 사람 중에 가장 많은 설움과 고통을 넘어온 송관수, 해서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다. 딸을 남겨두고 아들의 행방은 모른 채 떠나야 할 자신, 그는 마음속으로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강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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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너무나 잘 안다.
“잘 처묵고 잘살믄서 유세부리고 살던 사람들, 그 잘난 사람들 때문에 백성들은 헐벗고 굼주리야 했는데, 이 강산에서 젤 덕을 많이 본 그 잘난 사람들이 내 강산 팔아묵고 연명을 하는데 백성들은 설땅조차 없으니 이자는 그 잘난 사람들 처분만 기다리서는 안 되는기라. 내 살길 내가 찾더라고 언제까지 백성들은 이렇기만 살아야하노 말이다.”
“그래 아까 듣자니까 그쪽 잘난 사람들 얘기는 어떻던가요.”
해도사가 말했다. 관수는 해도사를 빤히 쳐다본다. 해도사는 그눈을 여유있게 받는다. 한참 후,
“세상 버리고 구찮은 짓 안 하고 태펭으로 삼서 세상일 머가 그리 알고 접어 앙달복달하요.”
관수도 조금은 여유를 찾은 듯 말했다.
“내가 언제 세상을 버렸든고? 여기는 세상 아니란 말이요? 내가 세상을 버렸다면 옛날옛적에 삭발했지. 그러지 말고 귀동냥 좀 합시다.”
“잘난 사람들 한둘이 아니고 제제각금 얘기의 질수가 다른께 나겉은 무식쟁이가 우찌 옳게 듣고 제대로 얘기할 수 있겄소. 그러나 대충 잡아서, 우떤 사람은 내다보기로 멀잖아 왜놈하고 중국이 붙을 긴께 장개석이하고 손을 잡아서 함께 싸워야 한다 카고, 우떤 사람은 장개석은 좀체로 일본하고 싸울라 카지 않은께,”
“와 그렇노? 와 안 싸울라 카노?”
뚝배기 깨지는 소리로 강쇠는 관수의 말을 잘랐다.
“대국이 쥐새끼 겉은 왜놈 무서바서 안 싸울라 카나!”
“제발 철늦은 소리는 그만 해라.”
“얼씨구? 잘난 소리 하네.”
“꿈에도 못 잊은 그 성님 말할 직에는 니는 귓구멍에다 소캐를 박았더나? 몰라도 한참 모린다.”
“부작대기 갖고 와서 귀 좀 후비야겄구마는. 그래 한참 모리는 이바구 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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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이 일본하고 싸워서 진 것도 모리나.”
“지금이 어디 청국가?”
“아라사하고 싸워서 일본이 이긴 것도 모리나.”
“그런께 간단하게 말해서 일본이 대국보다 세다 그 말이구마.”
“방천에서 풀 뜯는 소새끼를 붙잡고 얘기를 하는 기이 낫겄다.”
“허허어, 사돈지간에 왜들 이러시오.”
소지감이 중재에 나섰다.
“자중지난이 망쪼라. 자중지난이 없었던들 일본이 득세했을까. 거 김장사, 말에 뉘 넣지 말고, 늦은 밥 먹고 파장에 가는 말은 두었다 하시오.”
해도사의 면박이다. 물론 수작에 불과한 것, 아무도 진지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묵사발이네. 제에기랄! 아들 장개가는 날에도 유세 한분 못하고 접시물에 빠져죽든지 해야지 어디 살겄나. 설어서 못살겄다.”
한바탕 웃는다.
“송형 하던 얘기나 이어보시오.”
혼자 웃지 않고 있떤 관수는 해도사 재촉에,
“어지간히 보채쌌는다. 그렇기 알고 저브믄 찰떡 해 짊어지고 내일이라도 떠나는 기이 우떻겄소?”
“아닌게아니라 한번 그래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소이다. 그는 그렇고 하던 얘기나 끝내시오.”
“내가 어디까지 얘기를 하다 말았는고? 그렇지, 장개석이는 일본하고 싸우는 동안 공산당이 뒤통수 칠까봐서 일본이 별의별 짓으로 유인을 해도 꼼짝 않은께 공산당하고 손을 잡고 싸운다믄 아라사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기니, 또 앞으로의 세상은 공산당 천하가 될 기고 핍박받는 백성이 사람 대우 받고 살 것인즉 그쪽 편에 서서 뛰어야 머가 돼도 될 기라, 그런 말을 하는가 하믄 또 우떤 사람은 이를 갈믄서 그놈들을 믿느니 시베리아 벌판의 늑대들을 믿겄다, 지난날 피맺힌 원한을 몰라 하는 소린가, 우리 독립군을 모졸리 제 땅으로 불러딜이놓고 박살을 냈던 전사를 몰라 하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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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무도 믿을 기이 없고 마적질을 하든 우리 힘으로 무장을 해서 왜놈들 뒷구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왜놈 앞잡이들을 모조리 암살해야 한다, 그라고 나라 안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남에게 얹혀서 일하다가는 죽쑤어 개 주는 꼴이 될 기라 카서, 나는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더마.”
“아무리 일리가 있어도 힘을 도외시해서는 움직일 수 없지요. 주먹으로 바위를 친다고 끄덕이나 하겠소.”
소지감이 말했다.
“그거야 머 주먹 대신 지릿대를 쓸 수도 있고 바위 깨는 화약을 쓸 수도 있고,”
“지렛대, 화약을 쓰자면은 역시 빌려와야지 우리에겐 주먹밖에 없질 않소. 약게 그들 힘을 이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소이다.”
그 말 대답은 없이 있다가, 관수는 딴생각을 하면서 건성으로 하던 말을 계속한다.
“전쟁이 나야 하는가 하는 것도 생가들이 구구하더마. 전쟁이 나믄 조선 사람들 씨가 말릴 기라 걱정하는 사람도 많고 전쟁 없이는 끝도 없고 우리 나라 독립의 기회는 영영 없어진다 하든데 내 생각도 그렇소. 소선생이 아까 말심했듯이 큰놈끼리 붙어서 부서지는 사이에 우리가 살아남을 기라는. 전쟁이 안 난다 캐도 왜놈은 우리를 말리직일 기요. 우쨌든 꽝! 터져부리고 보아야 한다.”
“그래 쾅! 터져부리야, 하늘하고 땅하고 하루 한시에 붙어부리라! 시시로 나는 생각이제.”
강쇠는 내뱉듯 말했다.
“동문서답하네.”
해도사의 핀잔이었다.
“와 이라요? 나도 그런 뜻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말이요. 서당개 삼 년이믄 풍월을 읊는다고 했고 도방 출입 수삼 년, 제에기럴! 이런 날에도 그런 얘기 해야 하나?”
“누가 말려. 며누리 해주는 밥이나 먹고 구둘막이나 지키시오.”
핀잔은 또 날아왔다. 사실 강쇠는 심가 좀 뒤틀리어 있었다.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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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별로 하지 않고 줄담배만 피고 있는 관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내 아들이 우때서? 그렇기 앵하믄 누가 지 딸 데꼬오라 캤나.’
패주고 싶기도 했다 패주고 싶다는 것은 강쇠 자신이나 휘의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산에 두고 가는 딸에 대한 연민은 지금 송관수에게는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전후좌우의 역사와 상황에서 보면 영선은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관수에게 개인적인 그런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 위험하고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을 수도 없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관수는 자신의 개인적인 갖가지 비극을 지금 반추하고 이쓴 것이다. 그리고 새김질이 잘 된 것을 해야 할 일터로 넘겨주면서 해야 할 일에 튼튼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강쇠나 관수를 패주고 싶다는 것은 연민의 감정 때문이다. 소지감 때문에 뚜드려 패주었던 그때의 미묘한 배신감하고는 전혀 다르다.
‘제기랄! 잘난 놈들이나 할 일이제. 잘난 놈들 새이고 새있는데 와 우리 겉은 놈들이 맨 앞자리에 나서야 하노 말이다. 이런다고 백정이, 갖바치가 영웅호걸 될 기가. 흥, 우리 생전에 회포할 것 겉지도 않는 일을.’
슬픔과 분노가 치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분노가 치밀 때마다 강쇠는 관수를 패주고 싶은 것이다.
“식자우환이라.”
지금까지의 화제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방안의 사람들은 생소한 느낌을 받는다. 사실 처음부터 이 술자리는 경사를 치른 뒤의 느긋하게 즐기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안서방과 짝쇠는 순이 때문에 강쇠나 해도사의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했다. 그들 역시 술자리에 어울릴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물러났지만, 그러나 미묘한 관계를 모르는 소지감도 너털웃음을 웃곤 했으나 일말의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해도사의 말이 맞긴 맞소. 용이 못 된 이무기가 제아무리 뛰어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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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승천은 못할 기니 말이요. 내 아들놈의 경우도 공부 대신 칼을 쥐여주었더라면 저잣거리서 쇠고기나 팔고 살았일 긴데, 가심 쥐어뜯는 일도 없었일 기고.”
관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새벽녘에 그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하나. 하기야 용이 될지 이무기가 될지 그건 세월이 말해줄 것이고.”
하다가 해도사는 관수를 곁눈질하며,
“백정의 자식이,”
말을 끊고 다시 관수를 곁눈질하며 본다. 전갈이 관수 얼굴에 살기는 떠오르지 않았다. 애비가 백정 아닌데 아들이 어째 백정이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내에 대한 측은함 때문이리라. 하기는 여태 관수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백정의 자식이 칼 놔두고 붓을 들었다면 까시밭길로 들어선 거지. 식자 주워담아서 잘난 사람, 험집 없는 사람, 그들 속으로 엉덩이 부비며 들어가보아야 눈총에 송곳방석, 못 견딜 것이고 옛둥지에 돌아와본들 반쯤 양반이 되어 왔으니 그들에게는 낯선 나그네라. 혹 백정의 지도자로 떠받쳐 뫼실 경우가 있을 시에도 그건 깃발인 게요. 높이 쳐든 깃발이 바람을 타는 것은 정한 이치, 앞으로 몇 번 그 깃발이 찢기고 쓰러져야 백정의 흔적이 없어질런고 그건 불가지라. 해서 이리 가나 저리 가나 까시밭길이라 그 말이오.”
“이래도 저래도 죽은 판이다 그 말이구마.”
강쇠의 말이었다.
“아암.”
“그라믄 송관수 사위도 공부 때리치워야겄네.”
“뭐라 캤소?”
“고학하고 신학도 구별 못하오? 이제는 상놈들 고학좀 해두어얄게요. 시체 양반들 고학 하는 것 보았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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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양반 쓰다 버린 것 상놈이 주워 하게 돼 있고,”
“더러바서.”
소지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화제에서는 물러나 앉은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더럽다 할 것 없소이다. 입다 버린 누더기도 아니겠고 먹다 버린 밥찌꺼기도 아니겠고, 때에 따라서는 보화를 버리고 유리 구슬을 줍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으니까. 생각해보시우? 지금 일본으로 유학가는 사람들 말이오. 말장 다 버리고 가지 않던가요? 말짱 다 버리고 알몸으로 건너갔으니, 가서 걸음마부터 배워야 할 판이오. 일본 구경도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소선생은 배우는 데 편견 갖지 말라 할 것이며, 하나라도 더 배워서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할 것이오마는, 그것이 그렇지 않소이다. 또 나는 남의 것 배우지 말라 고집하는 것도 아니오. 배우기는 배우되 우리것을 내동댕이치고 박살을 내지 마라 그 얘기요. 그러나 형편을 보아하니 배우는 것보다는 버리고 박살내는 것을 더 주장하고 있으니 상놈들이라도 버리는 것 박살내기 전에 주워서 간수하라 그 말이오. 내가 세월을 보아하니 한동안 벽에 부딪치기까지는 소위 신학문이라는 것을 가지고 용천지랄들 할 모양인데 생각해보시오? 세월은 그냥 세월이 아니외다. 세월은 만들어놓고 가는 거요. 다듬어놓고 가는 거요. 갈아놓고 가는 거요. 왜 만들며 다듬으며 갈아놓는가. 삼라만상 생명 있는 것이 그 생명을 부지하기 위함이요, 부지하더라도 좀더 편안하게 부지하기 위함이 아니겠소이까. 하면은 우리의 수천 년이 그리 헐값은 아니라는 게요. 생각해보시오. 자고로 상층에서는 변화무쌍하여도 하층의 외곬이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전해준 거요.”
“꿈보다 해몽이 좋구려.”
겨우 소지감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해도사는 입술을 오므리며 끼룩기룩 웃는다. 웃다가.
“소선생, 사람 사는 이치는 안팎을 뒤져도 뻔한 거 아니외까?”
“아니라고 내가 말할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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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의 이치도 뻔한 것 아니던가요?”
“글쎄, 모르는 게 많아서 이치가 뻔하다 할 수 있을는지, 하하핫핫……”
“달이 뜨고 달이 지고 해가 솟고 해가 지고 그 얘기지, 왜 달이 지고 뜨는가 왜 해가 솟고 지는가 이유가 아니지 않소.”
“그렇다면은 뻔한 얘기지요.”
“신학문이라고 뻔한 이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시오? 양인들의 귓구멍이 셋은 아니지 않소? 눈알이 한 개도 아니지 않소? 서양서는 물고기가 산에서 살고 들짐승이 물속에서 사는 거는 아니지 않소? 그들도 비상을 먹으면 죽을 것이요 동삼을 먹으면 힘이 솟을 것이오. 연장이 좀 다르다 하여 근본이 다르지 않을 것이며 수많은 목숨들이 각각 흩어져서 살다 보니 사는 곳마다 산과 내가 조금씩 다르고 바다와 들판이 조금씩 다르고 사계절 기후가 조금씩 다르고.”
“염불하는구마.”
“허허어, 김장사, 끝까지 들으시오. 해서 목숨 있는 그 모든 것의 사는 방법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인데 그쪽이 서방정토는 아닐 터인즉 또 천당도 아닌 터에, 천당이라면 천당 가려고 예배당에 나가겠소? 하는 짓들을 보아하니 해놓은 밥 놔두고 쟁피 훑어서 죽쑤어 먹겠다고 들판으로 내달리는 꼬라지라. 굳이 내가 옛것 우리것을 고집하자는 게 아니외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조상없는 자손이 어디 있겠소이까. 남의 것을 가져와서 접목을 하더라도 뿌리는 있어야 하니하겠소오? 하기는 우주 근본의 얘기를 하자면 이것들은 지엽이요, 또 지엽이란 뿌리에 이어지는 것,”
“점입가경이오. 하여간 그 얘긴 한참, 한함 두었다 하시오. 나뭇가지를 말짱 잘리어 몽당나무가 되어 숨이 갈락말락, 이 판국에 엿가락 늘이듯, 하기야 뭐 길게 내다보고 하는 얘기 나쁠 것도 없겠소만, 그 새 숨 넘어가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는데 돌팔매로 새 잡자, 하하핫핫……”
심각한 논쟁도 아니었고 열을 올리는 것도 아니었다. 죽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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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주거니 받거니 시간을 흘리는 것이었다.
“허허어, 이럴 수가 잇나. 소선생도 내가 말한 큰 뜻을 몰라준다면 이거 이제 세상 다된 거요. 그래도 내 딴에는 속이 꽉 찬 선비로 알았는데 영 사람 잘못 보았어. 실버들 한 가지 꺾어들고 태산을 자질해도 유분수, 그래 내 말하리다. 제아무리 비행기가 잘 난들 제비를 당할손가, 벼락 한번 번뜩하면 콩가루가 될 터인데, 그래 그게 대수란 말씀이오? 만물에서 인간이 가장 영악하다고들 하지마는 나고 죽는 것을 어찌 관장할 것이며 봄은 제발로 오는 것이지 사람이 끌고 오는 것이 아닐진대 만물의 소생이 어찌 그쪽 사람들의 능사이겠는가.”
“내사 귀신 운감하는 소리맨크로 머가 먼지 하나도 못 알아듣겄소.”
해도사는 강쇠의 말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지조화를 깨뜨려서는 아니 되고 인간이 영악하게 조화를 한사코 깨뜨리려 들면은 끝에 가서 재앙을 받을 것이라, 재앙을 받기 전에 증산의 말을 빌리자면 천지공사를 바로잡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오. 서양 그들의 문물은 헛되고 헛된 것이 될 것이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장육부도 그래야 보존이 되는 법, 많이 먹어서 배터져 죽고 적게 먹어서 부황에 죽고, 이치에는 한치 어긋남이 없나니, 총, 대포 끌고 와서 남의 땅 거먼거먼 줏어먹듯 어찌 그들인들 배가 터지지 않을 것이오. 당장에는 강대국이라 하겠지만 과다한 섭취는 병들기 마련, 갖가지 처방은 하겠으나 혈맥이 제대로 통할 리가 없고 여기저기 막히니 여기저기 뚫어보나 뚫기보다 막히는 게 더 많아 그래 말기에는 광증으로 박살이 나는 게요. 우주만물이 막힘이 없이 돌아가야 그래야만 모든 생명들 거하는 곳이 극락이 되고 천국도 되고.”
“하하하핫 하핫핫핫…… 그거 그럴싸한 얘기로군. 한데 도사님, 그때가 언제쯤 되겠소?”
“어찌 천기를 누설할손가.”
해도사는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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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믄 그때꺼지 감나무 밑에서 잠을 자야겄네.”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이들은 자정이 지났을 때 밀담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맞대고 소리를 죽이며, 바닥에 자락을 깔았던 긴장이 노골화되었다.
이 무렵, 밖에서도 횃불을 켜든 안서방과 짝쇠는 산속을 뒤지고 있었다.
“경사에 소란스럽기 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지가 갔으믄 어디로 갔일꼬? 이 근처 어디에 있겄지.”
안서방이 당부하고 나갔으나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순이네는 집 뒤란을 쏘다니며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짝쇠 집은 다소 거리가 있어 바깥 기척을 모르고 있었지만 휘의 어미는 눈치를 채고 나왔다.
‘그 뭇아한 가시나가 일 저지른 거 아니까?’
신방에 신경을 쓰며, 울고불고하는 순이네에게 말도 걸지 못한채 팔장을 기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빌어묵을 가시나 뒤질라꼬 나갔나. 오밤중에 어디로 갔다 말고. 어이구 내 팔자야!”
순이네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쳤다.
혼사 끝에 이것저것 배불리 먹고 깊이 잠들었던 길륭이 방에서 기어나왔으나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땅바닥에 주질러앉아 있었다.
“어이구 이눔의 가시나를 우짜믄 좋노. 쇠 빠져 죽을 년 그만 범이나 물어가지. 부모 속썩이는 년은 자식도 아니다. 차라리 죽어부리는 기이 나을 기다! 어이구우, 이 일을 우짜노!”
순이네는 어둠 속을 뛰어나갔다가는 자빠지고 미끄러지고 하면서 돌아왔고 뒤란을 돌다가는 울곤 한다.
“참말이제 기도 안 찬다. 일이 우찌 이리 돼가노. 오늘겉이 좋은날에.”
팔장을 끼고 떨면서 휘의 어미는 중얼거렸다.
신방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열여덟 동갑나기 신랑과 신부, 휘는 진솔의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영선은 친정서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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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옷감으로 짝쇠댁네와 순이네가 밤새워 지은 다홍치마 유록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짝쇠가 마을까지 내려가서 겨우 빌려온 족두리는 벗겨져 있었으나 그들은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다. 철은 다 들었지만 암된 성질의 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참에 밖에서 술렁대는 기척을 이들은 들었다. 휘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관자놀이가 흔들렸고 무릎 위에 놓은 두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밤새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꽃잎이라도 떨어지듯 그렇게 들려왔다. 순이네의 우는 소리도 아슴푸레 들려왔다. 신방에 차려놓은 술상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영선은 고개를 숙이고 그림자 같이 앉아 있었다 산에 온 후 이상한 순이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바깥 기척에 영선이 예민해진 것도 마음에 쌓였던 의혹 때문이다.
“빌어묵을 년! 덩신 겉은 년! 내보란 듯 살 생각은 안 하고 지가 죽기는 와 죽노! 그래 이년아, 잘 생각했다! 죽을라 카믄 진작 죽어라! 어이구 이 일을 우짜믄 좋노. 어이구.”
넋두리하는 순이네 목소리가 바람 방향 탓인지 꽤 가까이서 들려왔다. 세상에 이런 난감한일이 흔할 것인가. 휘는 무거운 맷돌이 가슴을 짓눌러오는 것을 느낀다.
“저기.”
고개를 숙인 채 영선이 입을 떼었다.
“저기, 저어…… 혹 남 못할 짓 한 거는 아닌지.”
대답이 없었다. 밤새우는 소리, 바람이 이는가 문풍지가 조금 흔들렸다.
“저기.”
영선이 다시 말하려 했을 때
“우리 부모님 남 못할 짓 해감서 아들 장개들일 사람들은 아니거마는,”
한참 있다가,
“나도…… 나도 남 못할 짓 해감서 자, 장개들 그런 인간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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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실 실데없는 걱정 안 하는 기이 좋을 기고,”
하면서 휘는 고개를 흔들었다. 송이 따러 갔을 때의 일이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일이 큰 죄가 되는지, 그냥 있을 수 있는 실수일 뿐인지 휘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자기 때문에 한 여자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그를 공포로 몰고 갔다.
‘순이가 죽으믄 나는 우찌 해야 하노. 왜 순이가 죽어야 하노 말이다. 왜, 왜!’
휘는 술상을 끌어당겼다. 술잔에 술을 부어 마신다. 술은 쓰고 술이 타고 내려가는 가슴이 뜨거웠다.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다. 다시 술을 붓고 연거푸 마신다.
‘내가 지한테 우쨌다고 죽노 말이다! 열 사람 백 사람, 그라믄 다 안 받아주믄 죽어야 하나 말이다!’
그러나 입맞춤에 생각이 미치면 휘의 분노에 힘이 바지고 부끄럽고 두려움이 앞선다.
“저어어 저기, 아무래도 지가 산에 잘못 온 것 겉십니더.”
참다못해 영선이 말했다.
“무신 소리!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눈앞이 몽롱해진다. 소리를 질러놓고 휘는 영선을 보는데 반쯤고개를 든 영선의 얼굴이 눈앞에서 흔들린다. 다홍빛 유록빛이 흔들린다. 얼굴이 두 개가 되고 세 개도 된다. 촛불도 두 개가 됐다가 세 개도 됐다가, 휘는 팔을 들어 휘저어본다.
“나, 나도 처음 보았일 직에 거, 거기가 좋았소. 난생 처음 그런 생각을 해보았소. 음…… 으음.”
휘는 몸을 뒤틀 듯 했다. 캄캄한 절벽이 왔다갔다했다.
“으음…… 음.”
못마시는 술을 계속해 마셨기 때문에 휘는 도저히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영선이나 촛불뿐만 아니다. 방안이, 천장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그, 그렇지마는 거기가 안 왔이믄 수, 순이하고 혼사하게 됐을지 그, 그거는 모릴 일이구마. 모, 모릴 일, 언약한 것도 아, 아니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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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거 거기서걱정할 일은 아니고.”
정신이 몽롱한 속에서도 휘는 순이와 입맞춤한 일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첫날인 영선이 상처를 받아서느 안 되고 순이에게도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 거기서 걱정할,”
하다 말고 휘는 꿍 하고 모로 넘어졌다.
횃불을 켜들고 짝쇠와 함께 순이를 부르며 찾아다니던 안서방은 거의 새벽녘이 돠 되어 기진해 돌아왔다.
“못 찾았소!”
남정네에게 달려가 순이네는 거머리같이 달라붙으며 소리쳤다. 길륭이는 마당에 퍼질러 앉아서 아비를 쳐다보았다.
“와 이라노!”
거머리같이 달라붙는 순이네를 안서방은 떠밀어낸다. 휘의 어미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고 짝쇠는 말없이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인다. 짝쇠네 집에서는 불빛이 없었다. 술 마시던 사람들은 모두 잠든 것 같았고 온종일 혼삿일에 바빴고 저녁 늦게까지 술시중을 든 짝쇠댁네도 곤해서 곯아떨어진 눈치였다.
“이기이 무슨 날베락이고! 아이구우 청천의 하느님!”
“야밤에 제집이 요망시럽기, 울음 잡힐라 카나! 누가 죽기라도 했단 말가!”
안서방이 나무란다. 멈칫멈칫하는 휘의 어미가,
“안서방, 우짜믄 좋겄소.”
하고 한마디 했다.
“걱정 마이소.”
“우찌 걱정이 안 되겄소.‘
“집 나갔다고 꼭 죽어라는 법은 없인께요.”
“그래도 그렇지, 이 산중에서 갈 만한 곳이 어디 있겄소.”
“저 제집이 끝내 그럴 기가!”
자기 가슴을 치며 우는 순이네에게 야단을 쳐놓고
“날새기를 기다리보아야제요. 걱적한다고 머가 우찌 되겄십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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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짐씨는 그만 들어가보시이소.”
“천하태평이고나! 딸자식은 사람 아이가! 우리 순이가 와 죽노! 누구 땜에 죽노!”
“이렇기 아구성을 칠 기가!”
안서방은 순이네 양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세운 뒤 질질 끌고 가서 방문을 열고 엎어버리듯 방안으로 냅다 던지고 방문을 닫는다.
“만일에 무신 일이 있다 카믄 자식 하나 안 낳은 셈치지요. 일이 이렇기 되니 면목이 없십니더.”
방안에서는,
“아이고, 미치고 기 들겄네! 아이구우 아우구우 불쌍한 내 새끼!” 방바닥을 치며 순이네는 운다.
날이 밝았다.
짝쇠네의 손님들은 언제 빠져나갔는지 다 가고 없었다. 딸에게 잘살아라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송관수도 떠나고 없었다. 강쇠 혼자만 아침을 헤치고 짝쇠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순이는, 일이 싱겁게 끝났다. 밤사이의 그 소동은 아랑곳없이 그는 숯가마 속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길륭이가 행여 하고 가보았더니 자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누구 골탕먹이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죽으려고 그랬던 것도 물론 아니었다. 숨어서 울 곳을 찾다 보니 거기 가게 되었고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기에 그는 까맣게 밤의 소동을 모르고 있었다.
“이년, 그만 뒤이지지 머할라꼬 살아왔나. 십 년 감수, 그보다 남부끄러 우짜노, 이놈의 가시나!”
순이네는 딸을 쥐어박았다. 순이가 죽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지만, 그러나 없느니만 못한 사건임엔 틀림이 없다. 그리고 휘나 영선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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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장 강도 사건

도솔암에서 실컷 낮잠을 자고 저녁밥을 얻어먹은 뒤 밖이 어둑어둑해지는 것을 보고 관수는 절문을 나섰다.
“그러면 거기서 만납시다.”
소지감의 말에 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시오.”
아주 낮았지만 관수는 뒤통수에서 쫓아오는 소지감의 긴장된 목소리를 들었다. 산밑 마을에 당도했을 때는 그믐이어서 그랬겠지만 사방은 아주 새까만 어둠이었다. 주막에 들어간 관수.
“여기 술 한잔 주소.”
술손과 수작을 부리고 있던 주모가
“아이구 내 신세야!”
하면 몸을 일으켰다.
“손이 술 달라 카는데 신세 타령은 와 하노.”
“입버릇을 그라믄 우짤 기요.”
시비조다.
“기왕이믄 아이구 나무관세음보살 하는 기이 우떨고?”
주모는 키릴 웃었다.
“내가 염불 모시게 됐소? 나무관세음보살 했다가는 사나아들이 다 달아날 긴데 주막 문 닫으믄 나는 머 묵고 살 기요.”
“포전이나 쫓지.”
“누구 닮았나?”
“내 뭣 땜에 자네 서방을 닮을 기고.”
“서방은 무신 서방. 사팔뜨기 산놈, 오다가다 술잔이나 마시제요.”
“그라믄 기둥서방인가?”
관수는 강쇠 얼굴을 생각하며 피식 웃는다.
“기둥서방이라도 됨사? 그런 주제도 아니믄서 젊은 기이 뭐 할짓이 없어 술장사냐, 산에 가서 나무 뿌리 캔들 입에 거미줄 치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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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냐, 흥! 가다오다 해보는 말이겄지요 머.”
언제였는지 강쇠와 함게 술을 마시러 온 일이 있어서 관수는 주모의 얼굴을 알고 그의 내력도 좀 안다. 춘매의 조카라든가 뭐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주모는 관수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관수는 시간을 재듯 천천히 술을 마신다.
“말로라도 그런 사람이 있이니 쪼그랑 팔자지마는 마 괴않네.”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술손이 한마디 빈정거렸다
“아이고오, 쪼그랑 팔자라 했소? 그라믄 거기는 대리미로 삭 펴놓은 팔자다 그 말이요? 그런데 백결선생맨크로 옷은 와 그 모양이요? 염낭에 술값이나 들었는지 모리겄네.”
“내가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구나.”
사나이는 할 수 없다는 듯 껄껄 웃은다.
“입으로는 못 당할 기요.”
관수가 한마디 거든다.
“심 없는 제집이 입으로라도 갚아야제요. 누구 말마따나 기둥서방이라도 있었이믄 술값 떼묵고 달아나는 놈 정개이 뿌질러 앉히겄지마는. 서며 앉으며 내 팔자야, 하게도 됐지 머. 나도 좋은 부모만냈이믄 기영머리 마주 풀고 백년해로 했일 긴데, 세상 인심 오동지 설한풍이요.”
“……”
“누가 되고 저버서 봉사가 되었겄고, 누가 되고 저버서 버부리가 되었겄소. 보고 듣고, 복 많은 년놈들, 앞 못 본다고 속이묵고 뺏아무고, 말 못한다고 속이묵고 뺏아묵고, 세상이 그런 거라요. 심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엎어놓고 등짝 밟는 기이 예사, 흥! 절에 가봐도 그렇대요. 불쌍한 중생을 건진다 캄시로 어디 말과 같애야지. 부자가 오믄 매날로 뛰어나오고 기차븐 사람이 가믄 문전박대나 안함사?”
“절에서 문전박대했다는 것은 처음 듣겄네.”
관수가 말했다. 그 말 대꾸는 없이,
“언젠가 예수쟁이들 와가지고 하는 말이, 예수 믿고 회개하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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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마. 회개할라 카믄 나는 굶어죽게? 그 사람들이사 빼딱구두 신고 말똥머리 하고 얼마나 유식한지 몰라도 책도 들고. 다 묵고 살 만한께 그러고 댕기는 거 아니겄소?”
“청산유수다, 청산유수.”
술손이 말했다. 관순느 주모의 넋두리를 듣다 말고 술판에 술값을 내놓고 일어섰다. 몇 잔 술에 얼근해진 관수의 얼굴을 강바람이 쓸고 간다.
“누가 되고 저버서 봉사가 되었겄나, 누가 되고 저버서 버부리가 되었겄나. 흥! 맞기는 맞는 말이네.”
하는데 별안간 뜨거운 눈물이 뺨 타고 내린다. 다홍치마 유록저고리를 입은 딸 영선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간다온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칠흑 같은 karlf을 걷고 있는 자기 자신이 괘씸하기짝이 없다.
‘애비 노릇도 제대로 못한 주제에 서운하기는 와 이리 서운하노.’
관수는 걷다 말고 강변 둑에 주질러앉는다.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빨갛게 타는 담뱃불, 담뱃불이 빨갛다는 것을 처음 발견이라도 한 듯 눈앞에 담뱃개비를 세우며 쳐다본다. 바람이 불 때는 불꽃이 튄다. 한 모금 가슴 깊이 빨아당겨 연기를 뿜는다.
‘그놈이 있었던들 내 맘이 이렇기 서운하고 허전하까. 딸자식이야 언제 가믄 안 갈 기가.’
사방은 칠흑 같아도 강물은 희번덕이고 있었다. 강 건너 쪽에서 깜박이는 불빛, 세상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희맹이 있어야제. 희맹이 없다.”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주는 것이 있다면 시부모로 모시게 될 강쇠 내외의 변함없는 마음씨 때문에 영선의 시집살이가 편할 것은 없어도 마음 고생은 안 할 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학식이 없어 그렇지 사위 된 휘도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지 복이 그것뿐이라믄 그렇기 살아야지 웅짜겄노. 흥! 지가 되고 접어서 백정의 외손녀가 되었더나. 흥!”
관수는 담배를 버리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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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 마을에 못 미쳐서 관순느 ㄱ아변길을 버리고 숲속길로 접어들었다. 옛날 김평산이 귀녀를 만나기 위해 삼신당으로 가던 그 길이다. 길이라기보다 숲을 헤치고 가는 것이다. 삼신당이 가까워졌을 때,
“이자 오요.”
소리가 들렸다.
“음.”
관수가 대답했다. 연학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누각과 초당이 있는 방향과는 다르게 다시 숲을 헤쳐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숲이 나타났다. 그들은 대숲을 끼고 한참을 가서 사당 앞에 당도하였다. 사당은 감감해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연학이 사당 문을 열었을 때 불빛이 사당 뜨락에 쫓아나왔다.
“들어가소. 그런 일이야 없겄지마는 내가 기침하믄은 아시겄지요?”
“알겄네.”
관수는 재빨리 사당 안으로 발려들어갔고 사당문이 닫히면서 사방은 어둠에 묻힌다. 사당문에 검정 휘장을 쳐서 불빛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촛불을 켜놓고 길상이 앉아 있었다.
“이제 몸은 추스릴 만한가?”
관수가 물었다.
“괜찮네.”
길상이 대답했다. 지금은 최참판댁 당주나 다름없는 길상이었지만 소년기를 한마을에서 지냈고 밤이면 관수 집에 모여앉아 짚세기를 삼고 산태기도 만들면서 그들 나름대로 시국 얘기며 동학 얘기며, 길상은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었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윤보와 김훈장을 따라 의병으로 산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들 서로간의 추억에는 욕됨이 없었다. 현재의 처지가 달라졌다 하여 길상에게 존댓말을 한다는 것은 관수의 자존심이 허락지 아니하였고, 길상이 역시 옛날과 달라진 관수의 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앞에서는 환국이아부지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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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을 대접했으나 최참판댁이라는 배경 때문에 관수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앞으로 환이를 대신하여 제반사를 지휘하게 될 그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혼사는 잘 치르었는가?”
“그럭저럭.”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나수는 없는 놈이 혼사고 뭐고 찬물 한 그릇이믄 끝나는 거 아닌가, 필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의 성질을 아는 만큼 길상은 관례적인 선에서 축의금을 보냈을 뿐 더 이상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지만, 드세고 반항적인 송관수, 그러나 사려가 깊은 것은 그를 아는 사람이면 다 인정한다. 해서 그는 오늘가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길상의 물음에 없는 놈이, 하질 않고 그럭저럭…… 꽤나 섬세한 사내다.
“서운하겠군.”
“서운하지 않다 하믄 그거는 거짓말이고오, 하지마는 딸자식이란 언제 떠나도 떠나보내야 하니께.”
“그건 그렇지.”
서로 마주본다. 촛불이 앉은뱅이 춤을 추고 두 사나이 얼굴에 명암이 흔들린다. 이들하고는 아무 인연이 없는 사당, 남의 사당, 그것도 어쩌면 모독일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침입을 이들은 이 순간같이 느낀 것 같다. 최씨 가문 누대의 선조들 영신이 정좌한 곳, 아무리 나랏일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순간적인 위축감을 느낀다. 천민들에게도 신주는 매우 소중하고 두려운 것이다. 서로 바라보던 두 사내는 어느쪽이랄 것도 없이 서로를 외면한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 길이 없는 길상에게 조상이 있을 리 없고 부모가 있을리 없다. 부모는 있었지만 아비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어미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관수, 기일이 있을 리 없다. 칠월백중날이면 영광이네가 절로 찾아가서 얼굴도 모르는 시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어미는 어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한가닥 희망 때문에 백중 불사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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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떻게 되었는고?”
관수가 물었다.
“빈틈없이 다지기는 다져놨는데.”
“삼월 삼짇날 변동 없겄제?”
“음.”
“그라믄 됐네. 나도 전부터 손은 다 써놨고 마무리만 남았인께.”
“전에 말한 대로, 계획에 변한 사항은 없으나 그래도 장서방한테 한 번 더 자세한 얘길 들어야 할 거다.”
“그래야겄지…… 그라믄 나는 이 길로 떠나야겄는데, 우리가 또다시 만나게 될지 우떻지.”
“무슨 그런 말을 하는가. 우리는 꼭 만나게 된다.”
“아니 머 그런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니구마. 내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하는 말이네.”
“……”
“저기.”
하다가 관수는 앞가슴을 더듬어 봉투를 꺼내었다. 순간 길상의 얼굴에 노기가 떠오른다. 그 봉투는 길상이 축의금을 넣어 보낸 것이며 봉투는 봉해진 채 뜯어본 흔적이 없었다.
“자네, 생각보다 훨씬 졸장부군 그래.”
“말이나 다 들어보고 그러라고. 하기는 내가 대장부 아닌 것은 틀림이 없일 것 겉다.”
관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품속을 만지다가 사진 한 장을 꺼내어 길상에게 내밀었다. 길상은 사진을 받아 들여다본다.
“내 아들놈이네.”
사진은 고보의 교복과 교모를 쓴, 관수를 전혀 닮지 않은 소년, 아니 청년이었다.
“갈길이 바빠서 긴말 할 새는 없고, 그놈이 집 나가서 일본 동경에가 있다는 소문을 들어쓴데, 죽일 놈 살릴 놈 해봐야 별수없제. 자네 큰아들이 유학을 가 있이니, 무리한 청인 줄 알지마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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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고 찾아서 이 봉투를 전해주었이믄 싶어서.”
“미친 사람.”
길상이 웃었다.
“역시 졸장부구먼. 강도질한 놈이 새색시 같은 이런 짓 왜 하나, 정말 자네답지 않군 그래.”
길상은 사진만 조끼 주머니 속에 넣고 봉투는 밀어낸다.
“패거리들 술값이나 하게. 함께 술 마시고 있을 내처지도 아니니.”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럼 그렇기 하지. 그런데 환국이가 좀 쉽기 찾을라 카믄 그놈핵교 졸업생을 찾이믄 될 성싶구마. 그 핵교에서도 몇 사람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일 긴께.”
“걱정 말게.”
“그라믄 나는가야겄다. 오래 머물라 캐도 최씨네 신주들이 내 이노옴! 무엄하구나! 할 것 겉애서 답대비.”
처음으로 관수는 농담을 했다.
밖으로 나온 관수는 홀가분했다. 발도 가벼웠다. 관수가 오던 길을 되잡아서 가는데 연학은 말없이 뒤따라가고 있었다. 다른 것을 기대하고 길상에게 사진과 봉투를 내밀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아들을 봐달라, 못할 것도 없었다. 여러 가지 인연을 생각하면 최씨집에서 영광이 하나 돌보아주는 것은 무리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관수는 지금가지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분서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그는 다만 영광이에게 돈을 부쳐주어야겠다는 것은 늘 생각했었다. 그러나 길상이 걱정 말게, 하고 말했을 때 관수는 자기부탁 이상의 일을 길상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삼신당 앞에까지 와서 관수는 걸음을 멈추며 연학을 기다린다.
“그믐밤이라 어둡기는 참 어둡네. 코를 베가도 모리겄구마.”
연학이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뭐고?” 관수가 물었다. 두 개의 불빛이 어둠 속에 있었다.
“살쾡이지 머겄소. 동네 닭 잡아묵을라꼬 내리온 모양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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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은 이내 사라졌다.
“삼월 삼짇날…… 좋은 절기다. 그믐밤은 좀 비키선 셈인데.”
“그러씨…… 그러믄 이 길로 남원 갈 깁니까?”
“그래야지. 가다가 구례에서 자고, 구례까지 못 가믄 화개서 자든지.”
“산의 사람들은 길 떠났십니까?”
“떠났다.”
“괜찮겄십니까?”
“뭐가?”
“그 사람들,”
관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냥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고 나서, “그래서 두 갈래로 나누는 거 아이가. 하나가 끊어지더라 캐도 되게시리.”
“지는 그것보다 사람을 믿어도 되는가, 이제 와서 걱정해도 달리 도리는 없겄지마는.”
“그 사람들 못 믿는다믄 세상 사람 하낫도 믿을 사램이 없다. 하기는 영악하지를 못해서 나도 맴이 안 씨이는 거는 아니다마는, 때에 따라서는 뿌러지게 나오는 사람보다 히죽이죽거리는 사램이 오래 견디네라. 그라고 자네 보기보담은 만고풍상 다 겪은 사람들이다.”
“실은 그 사람들도 그렇지마는 앞에 나서는 기이 아닌께 그런 대로 넘어갈 성싶으나 젤 맘에 절리는 거는 손태산입니다.”
손태산은 남원 길서방의 생신 잔치 때 처음 연학이 만나본 인물이다. 그러나 만나기 전부터 연학은 그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다. 소상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연학의 임무였고 한 번 보았으면 그만, 다시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 연학의 위치였다. 그런데 그때 연학은 손태산을 좋게 보지 않았다. 말로 듣던 것보다 훨씬 경망했던 것이다.
“좁쌀 양식 오지랖에 싸고 댕기겄다. 전에 없이 와 그리 잔걱정이많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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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학은 어둠 속에서 피식 웃었다.
“많은 사람을 움직일라 카이, 여기서 터지까 저기서 터지가, 나도 모리게 근심이 되누마요.”
“터지는 데는 터지고 뚫고 나가는 데는 나가고, 하루 이틀 해온 일도 아니겄고…… 손태산이는 나도 여러모로 그물을 쳐놨다. 당분간은 다른 손이 안 닿으믄 쓸모가 있제. 해서 윤필구를 조져놓은 거 아이가.”
“진주 일은 물샐틈없이 짜놨인께 그 일은 아마 맘을 놓아도 될 깁니다.”
“마음을 놓아? 걱정해도 소앵이 없는 일이지마는 마음놓을 일이 따로 있지.”
나무라듯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
“머 또 할말이 있나?”
“지는 더 이상 할말은 없습니다. 호옥 형님은 다른, 머 하실 말심은 없습니까?”
“별로 변동한 기이 없인께 나도 더 할말은 없다. 저물고 했이니 가봐라.”
“둑길까지만 함께 가지요.”
말없이 두 사람은 어둠을 헤치고 걷는다. 부엉이가 울고 이따금 산짐승이 풀숲을 부시럭거리며 지나는 소리도 들렸다.
“영만이는 괜찮기 살더나?”
관수가 물었다.
“괜찮기 살지요.”
“아아가 몇이나 되든고?”
“하나 잃어부리고 셋이라 카든지,”
“세월 참 빠르다. 언제 이리 되었는고 꿈 겉네.”
“사십을 넘기니께 세월이 막 달아나는 것 같더마요.”
“그렇지이, 막 달아나지. 그래 자네 형수는 어마니를 닮았는지 모리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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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하믄 맏며누리로 잘 하시는 편이고 살림 이루노라고 고생도 했지마는 지금은 만고에 편합니다.”
“그런께 우리 어릴 적의 두마어매맨큼 됐겄다.”
“형님보다 두세 살 윌 겁니다.”
“그럴 기다. 두만이가 내 동갑나기고 두만이누분게, 시집가던 때가 생각난다.”
“……”
“그거는 그렇고, 너거 집이 여수서는 소리치는 부자 아니가. 그런데 와 이 짓을 하노. 니도 참 별난 놈이다.”
“지만 별납니까. 형님은 안 별나고요? 참,”
관수는 껄껄 웃는다.
“지가 이 집 일을 볼 때만 해도 여수서는 그냥 묵을 만했지요. 형님 말대로 소리칠 정도는 아니었고, 지금 부자가 됐다고 해서, 부자라 캐도 큰집이고 조카자식인데 머 얻어묵겄다고 가겄십니까. 다 이렇기 사는 것도 팔자 소관 아니겄소.”
“좀 보태주기는 하나?”
“보태주는 거 없십니다. 우리 식구 굶는 처지도 아니고…… 돌아오라, 그거지요. 돌아오믄 봐주겄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한가한 얘기 할 처지도 심경도 아니었다. 더욱이 관수의 입장에서는, 다같이 긴장돼 있으면서 얘기는 거의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한동안 말은 끊어졌다. 둑길이 가까워졌을 때,
“영광이한테서 소식 못 듣지요?”
하고 연학이 물었다.
“듣기야 들었제. 들으나마나……”
“환국이아버지가 환국이한테 이르더마요. 동경 가거든 영광이 어디서 뭘 하는지 수소문해보라고.”
“영광이 동경에 있는 거를 우찌 알꼬?”
“지가 말했십니다.‘
아가 사진을 내밀었을 때 길상은 그런 말은 내비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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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이도 신실한 사람이니께 힘 닿는 대로 애슬 깁니다.있는 곳만 알믄 다요량이 안 있겄십니까.”
“안 그래도 아가 그 사람 만냈일 적에 부탁을 했거마는.”
“형님이요?”
“우짤 기고, 내가 애비 노릇이나 제대로 했나? 그놈만 나무랄 수도 없고, 자식 때문에 상두꾼에 든다는 말도 안 있더나.”
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둑길까지 와서 이들은 헤어졌다. 이들이 헤어져서 열흘 남짓, 삼월 삼짇날 진주서는 씨름 대회가 있었다. 이 씨름 대회에 손태산이 출전한 것이다. 함양 대표로 나온 손태산은 비록 황소는 따지 못하였지만 고성의 이장사와 최후까지 겨루어 실력이 막상막하였으므로 구경꾼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기술은 이장사가 한수 위라 황소차지를 했지만 힘으로 볼 때 손태산이 세다고들 했다. 구경꾼 속에 끼여들어 씨름 구경을 하고 있던 연학은 눈살을 찌푸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흩어지는 구경꾼에 휩슬려 걸음을 옮기면서
‘저래가지고 되까?’
연학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요량껏 해두라꼬 조세질을 했일 긴데.’
물론 손태산은 주의를 몇 번이나 받았다. 그러나 막상 모래판에 서고 보니 주의 따위는 쉽게 잊어버렸고 승부욕에만 불탔던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진 그는 틀림없이,
“요량것 하라는 말만 안 들었이믄 황소 따는 것쯤이야 연반장이었제. 제에기럴!” 했을 것이다.
‘형님이 아무래도일을 잘못 꾸민 거는 아닌지 모르겄다.’
연학이 돌아왔을 때 최부자댁은 집이 비어 있는 듯 썰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크나큰 집에 안자 부부만 있었다.
“양현이는 어디 갔소?”
안자의 남정네 박서방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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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도련님이 데리고 강가로 갔소.”
안자 부부만 남겨놓고, 연학이는 왔다갔다했지만 식구들은 서울소님이 다녀간 후 모조리 평사리로 떠났고 개학이 되면서 윤국이와 양현이 진주로 돌아왔으며 나머지느 아직 그곳에 체류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환국이는 일본을으로 갔다. 음력설을 전후하여 제사를 모시기 위해 해마다 식구들이 평사리로 가는 것은 관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옥고를 치른 길상의 정양을 위해 오래 머무는 듯 했고 절에 불공을 드린다는 말도 있었다.
“누가 이깄십니까?”
박서방이 물었다.
“고성 사람.”
“구겡꾼이 많았십니까?”
“응.”
연학이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자 박서방은 뒤켠으로 돌아가고 연학은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만일에 뭐가 잘못되믄 풍지박산이다.’
처음부터 연학은 손태산을 끌어들이는데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간물이 될 그럴 위인은 아니었지만 자기 능력보다 야심이 컸고 저돌적인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사리에 의해 나섰다기보다 그는 조막손이 손가, 아비에 대한 환상 때문에, 그리고 그의 밑천이란 힘뿐이었다. 연학이 남원 길서방 집에서 모임을 가진 후 관수에게,
“사람이 신중하지 못한 것 겉소.”
자기 의견을 말했을 때
“쓰기 나름이제. 앞으로 나가는 놈도 있어야 하고 뒤로 돌아가는 놈도 있어야 하고, 다 쓸모가 있네라. 저저이 다 할라꼬 나서는 일도 아니지 않나.”
“하긴 그렇소.”
“답대비, 간뎅이가 부어서 기기이 탈이제. 심성이 나쁜 놈은 아닌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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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관수는 개의치 않았다.
연학은 집안을 한바퀴 돌아본다. 오늘 밤 실행에 옮기게 될 일을 계획하기론 꽤 오래 전이다. 길상이 출옥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관수가 제안했던 것이다.
“몇몇 관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것 이상으로 효율이 있는 일이네.” 길상은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찬성이었다.
“응징과 실리, 그리고 인심, 세 가지를 거둘 수 있지. 암살이나 폭탄 투척은 총기, 폭탄의 확보가 불가능하고 거의가 잡힐 것이니 인원을 아끼는 뜻에서도 그렇고,”
해서 세부 사항가지 면밀히 검토가 된 후 계획은 자였고 관수가 간도를 다녀오면서 일은 결정이 되었던 것이다. 길상을 국내에 잡아두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오백 섬지기 땅을 내놓은 서희는 물론 이러한 계획은 알지 못했지만 길상으로서는 지시하는 입장에서 그땅 오백섬지기는 명분을 세워준 것이기도 했다.
해가 지고 밤이 왔다. 쫑알쫑알 종알대던 소리가 들리더니 양현이도 안자 곁에서 잠이 들었는지 집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늦게까지 공부를 하던 윤국의 방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연학은 집에 가지 않았다. 행랑채 맨 끝방에 목침을 베고 누워서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최씨네 집에서 자기도 했었기 때문에. 박서방이 군불을 지핀 모양이다. 방은 따뜻했다. 정적을 깨고 대청의 기둥시계가 육중한 추를 흔들며 둔중한 소리를 낸다. 행랑에서도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연학은 귀를 세우며 시계 치는 소리를 센다. 열두 번이었다. 연학은 열한 번 칠 때도 세었고 열 번 칠 때도 세었다. 다시 사방은 정적에 묻혀버린다. 연학은 일어나 앉으며 담배를 붙여 문다.
이 무렵, 김두만의 집 담을 두 명의 괴한이 넘어가고 있었다. 두만은 그 동안 어느 부자가 살던 집을 구입하여 생활의 규모를 넓히면서 술도매상도 처분하고 양조장 사업에만 진력해왔으며 서울네도 비빔밥집에서 손을 떼고 안방마님으로 자리를 굳혀왔던 것이다. 오늘 밤 검두만의 집에는 서울네와 침모, 일하는 어멈 세 명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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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만 있었다. 일꾼들은 모두 양조장에 가 있었고 부친이 위중하다 하여 둘재인 기동과 함게 두만은 독골에 가고 없었다.
“둘째부인, 일어나시오.”
서울네는 잠결에 소리를 들었다.
“어서 일어나시오.”
“아아 아이구!”
“천천히, 소리를 지르면 상할 것이오.”
서울네는 비로소 가슴을 겨누고 있는 써늘한 것을 느꼈다.
“웬, 웬 사람이오?”
서울네는 사시나무 떨 듯 떤다. 방안도 어두웠고 문밖도 어두웠다. 새까맣게 어두웠다. 공포에 떠는 서울네에게는 지옥 구렁창에서 소리만 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상해 가정부에서 왔소이다. 이런 방법말고는 군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었소. 양해하시오.”
“도, 돈, 무 무슨 돈이, 집에는 도, 돈이 없습니다.”
“긴말 하면 시간만 가지. 양조장 자금으로 쓰려고 시장의 점포 두 개를 팔지 않았소. 알고 왔으니 자아 금고 문 여시오. 우리가 죽음을 불사하고 여기 들어온 만큼 사불여의하면 부인은 죽을 것이오.”
칼긑이 앞가슴에 바삭 와서 닿았다. 서울네는 본능적으로 더듬더듬 자리걸으믕로 금고 있는 곳에 다가간다. 칼은 등뒤에서 따라왔다.
“저 저 어, 어두워서 어이구!”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성냥을 그었다. 금고 문이 열렸고 성냥불은 꺼졌다. 사내는 꺼진 성냥개비를 입에 넣고 다시 성냥을 그었다. 얼굴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몸은 마른 편이었다. 칼을 들이댄 서울 말시의 사내는 몸이 건장한 것 같았으며 음성으로 미루어 젊은 남자인 것 같았다. 침묵의 사나이는 금고 속의 현찰을 확인한 뒤 꺼진 성냥개비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돈을 꺼내어 양쪽 호주머니 속에 나누어 넣는다.
“그러면 우리가 무사히 갈 수 있게 부인께서는 고생을 좀 해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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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겠소.”
준비해온 끈으로 서울네를 묶은 뒤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이들은 바람같이 담을 넘어 사라진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이상한 일은 또 벌어지고 있었다. 이순철의 집 담벽에 붙어선 두 사나이.
“불이 켜져 있는 방이 이 집 주인 거처방이다.”
한 사내가 소근거렸다. 그리고 덩치 큰 사내를 담 위로 밀어올려주는 것이었다. 담을 넘은 사내, 손태산은 사방을 살펴보다가 불이 켜져 있는 방을 향해 곧장 간다. 신돌 위에는 구두 한 켤레가 있었다. 손태산은 주저없이 방문을 쑤욱 연다. 한복을 입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순철의 부친 이도영이 얼굴을 돌렸다.
“억!”
몹시 놀란 듯 일어서려다 말고 도로 주저앉는다. 아랫목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나는 가정부에서 온 사람이오. 알아듣소?”
손태산은 여차하면 맨주먹으로 이동영의 면상을 내리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도영은 말없이 손태산을 쳐다만보고 있었다.
“두말 하믄 잔소리고오, 이런 부잣집에서 나랏일로 돈 빌리돌라카는데 못하겄다 하지는 못할 기요. 부모 없는 자식이 없고 나라없는 백성이 없이니, 내 하는 말이 틀리지 않다 생각하무는 순순히 내놓으소.”
“……”
“이거 귀가 먹었나, 입이 붙었나, 재미없기 나오믄.”
하다가 강도질하려 간 거는 아닌께, 통사정하는 입장인께로 말조심을 하고 시간을 끌지 않게시리, 하던 관수의 말이 생각났다.
“주인어른, 불학무식해서 예법을 모리니 용서하이소. 그러나 장수의 자손으로 부끄러븐 짓은 안 했인께, 그나저나 시간이 없는데 긴타령 할 수 없고 어서! 가부간,”
하자,
“저기,”
하며 이도영은 문갑을 눈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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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랍니까 주인장, 내가 얼라요? 철은 다 들었인께 주인장이 내놓으소.”
“참말 불학무식하네. 이런 일 할라 카믄 까막눈은 면해야지.”
하며 이도영은 문갑을 열고 부피가 얇은 것과 부피가 많은 돈다발 두 개를 꺼내온다.
“하여간에 고맙소. 미안시럽지마는 좀 묶여 있어야겄는데.”
손태산은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이도영을 묶은 뒤 재갈을 물린다. 돈을 챙기고 전등을 껐다.
“아닌게아니라, 주인장, 점잖은 사람한테 실례가 많았소.”
손태산은 유유히 나온다. 밖에 나왔을 때,
“사나아 배짱이 이만은 해야지.”
그는 큭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심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동행이 그를 잡아끌었다.
열두시가 넘은 시각, 큰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술집·기생집은 주홍이 무르익어 여자들의 웃음 소리 남자들의 술취한 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열두시에서 새벽까지 길고도 짧은 시간, 일은 계획대로 진행이 된 것 같았다. 어둠이 걷히고 뿌연 아침 안개가 거리에 깔렸을 때, 시가에는 비상이 걸렸다. 서울네는 침모가 발견했고, 이도영 씨는 그보다 훨씬 늦게 마누라가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서울네는 비교적 정확하게 어젯밤에 일어난 상황을 설명하였고 강탈당한 돈은 삼천원이라 했다. 기별을 받고 독골에서 달려온 김두만은 사색이 되어.
“그놈들 반드시, 틀림없이 잡으시오! 내 그 돈을 찾아서 경찰서에 기부하겠소! 그놈들만 잡아주시오!”
서투른 일본말로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돈 삼천 원이 적은돈인가. 면소 서기가 십 년을 고스란히 모은 월급도 그만한 돈엔 못 미친다. 아깝고 원통한 것을 생각하면 눈알이 빠질 지경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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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김두만은 돈 아까운 것 이상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칼 들고 야밤에 들어온 괴한들, 가정부에서 왔다는 그들에 대한 공포는 결코 아니었다. 일본 경찰에 대한 것이다. 상해 가정부 운운하지 않았더라면, 단순히 돈을 털러 들어온 강도였었더라면 김두만의 입에서 기부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의 하나 가정부와 내통하지 않았는가 의심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돈 삼천 원이 문제인가. 파멸까지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그들에 대한 증오심도 물론 대단해서 김두만은 진심으로 그들의 체포를 원하였다. 한편 탈진이 되어 자리에 쓰러진 이도영을 찾아온 두 명의 형사는 사건의 경위를 묻고 있었다. 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이도영은,
“키는 중키쯤 돼 보였고 몸은 마른 편이었소.”
몹시 땀을 흘리며 말했다.
“말씨는 어떻든가요?”
“서울 말씨였소.”
실로 해괴한 일이다. 손태산은 중키도 아니었고 마른 편도 아니었다. 이동영 자신이 불학무식하다는 말까지 한 손태산이 서울 말씨는커녕 사투리치고도 심한 편이었으며 상스러웠던 것이다.
“김두만 씨 댁에 침입한 자들과 인상 착의가 비슷하군요. 흉기는?”
“칼이었소.”
“시간은?”
“그러시…… 그기이 그러께 한시는 지났을 성싶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소이다.”
이도영은 계속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 손태산은 칼 같은 것 가져오지 않았고 침입한 시간도 열두시가 조금 지났을까.
“그자들이 김두만 씨 댁을 습격하고 나서 이곳에 왔군. 몇 사람이었소?”
“두 사람이었소.”
계속 이도영은 땀을 흘렸다. 얼굴은 창백했다
“운수 불길하여, 기왕지사 돈은 뺏깄지마는 이러다가 영감 병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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겄소. 꿈 한분 잘못 꾸었다 그렇기 생각하시이소.”
순철의 모친이 참다못해 말했다.
“임자는 가만있소.”
무너지려는 허리를 세우며 이동영은 마누라를 나무란다. 어투가 매우 엄격햇다. 듣기론 내세울 만한 문벌도 아니며 겨우 편지 정도 쓰고 읽는 학식밖에 없다는 것이었는데 깡말라 보여 그랬던지, 테가 가는 안경을 쓰고 가지런히 다듬은 콧수염 때문이었는지 그의 풍모는 돈에 무서운 상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도영의 얘기를 수첩에 적고 있던 형사는 순철 모친의 말이 비위에 거슬렸던지,
“우리도 당시네들 손해본 돈이 문제가 아니오. 서장 목이 오락가락하는 대사건이오. 대일본제국 경찰의 치욕인 것이 문제란 말이요. 하룻밤에 한 곳도 아니요 두 곳이나 습격을 당했다는 것은,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돼.”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조선인 형사였다.
“임자는 안에 들어가소. 남자들 하는 얘기에 끼여들어 요망하다는 말 듣기 전에,”
눈살을 찌푸리며 이도영은 마누라에게 다시 말했다.
“끼여들기는 누가 끼여들었십니가. 영감이 갱신을 못하신께 그랬지요.”
“허허어!”
“알았십니다.”
순철이 모친은 남편 영에 못 이겨 물러난다.
“제놈들이 달아나며 어딜 가. 독안에 든 쥐새기지. 이 기회에 이곳 불온도배들 뿌릴 뽑아야 해.”
함께 온 일본인 형사의 말이었다. 신속하기가 번개 같은 일본 경찰은 신고를 받는 즉시 진주서 빠져나가는 길목을 일제히 차단했고 불온하다고 점찍어놓은 사람들 집에 경찰관이 쫙 깔리면서 수색에 나서고 있었다. 물론 최씨네 집에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런데 이도영 씨,”
하고 형사는 날카롭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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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원이라면 흔히 만져볼 수 없는 큰 돈 아닙니까?”
“……”
“그런 현금을 마치 가져가 달라는 듯 집에 두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소?”
제일 중요한 얘기는 이제부터다, 하듯 형사는 이도영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무슨 말심을 그렇기 하시오! 불난 집에 와서 부채질을 해도 유분수지, 도둑에게 가져가라고 집에 돈 놔두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이오!”
“도둑이 아니지 않소.”
“아니며!”
“가정부에서 군자금으로 가져갔다 그 얘기 아니오.”
“들어온 놈이 누구이든 남의 돈 강탈해갔으면 도둑이지, 도둑 아니라니!”
얼굴이 벌개지면서 이도영은 화를 냈다.
“아아, 아 역정 내시지 마고 현금이 있었던 겨위를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한참 있다가 이도영은 화를 가라앉히며 본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원래 서미가 은행 같은 곳에 예금은 잘 하지 않소.”
“그래서요, 그래서 금고도 아닌 문갑 속에 아무렇게나 간수한다? 이해 못하겠는데요.”
“금고는 백화점에 있고오, 집에는 본시부터 금고가 없소, 이거는 내 판단이지마는 금고란 여기 돈 있소, 하고 도둑에게 가르쳐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오? 내가 현금을 관리하는 것은 당신네들한테도 말 못하오. 그거는 내 비밀인께. 그러나 오천 원이 어찌 문갑 속에 있었는가, 그것은 쉽게 이야기해줄 수 있소.”
“말씀해보시요.”
형사의 어세가 한결 누그러진다. 지방의 유지인 만큼, 경제권을 지고 있는 강자인 만큼 그도 말씨 보아가며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내 사업이 사업인 만큼 항상 자본이 넉넉해야 하는 관계상 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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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하질 못하였소. 한데 지난 가실에 마치 맞는 땅이 있다 말을 듣고, 두 차례 가보기도 했고 계약을 한 거는 달포 전이었소. 오늘이 잔금을 치를 날인데 어젯밤 그 꼴을 당했던 거요. 잔금 받을 사람이 이 소동을 보고 돌아갔거나 아니믄 근처에 있일 성싶소. 이만하믄 알아듣겄소? 문서도 있인께.”
“그럼 그 돈 있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그거는 나도 궁금하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놈의 소행인 듯한데.”
“아까 당신네들은 대일본제국 경찰의 치욕이다, 그런 말을 했는데 이거는 내 이도영의 치욕이오. 내가 친일파라는 것은 세상이 더러아는 일이지마는, 이제는 세상사람 놀림감이 되지 않았소? 진주사람들이 드세다는 것은 당신네들이 더 잘 알 거요. 나도 돈의 문제보다 이아무개가 친일을 해서 돈냥이나 벌더니 가정부 사람들이 와서 칼 딜이대고 털어갔다, 속이 시원하다, 그렇기들 입방아를 찧어싸면 내 장사는 어찌 되겠소. 당신네들 치안이 물샐틈없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소? 적반하장이라더니 피해자를 보고 머 어째요?”
“아아, 아 고정하시오. 우리도 신경이 곤두서다 보니, 언짢은 점이 있더라도 양해하시오.”
계속 땀을 흘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돼 있던 이동영은 성질을 내다가 자리에 픽 쓰러졌다. 혼절을 했던 것이다.
“아이구 영감! 이러다가 큰일나겄네!”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순철의 모친이 뛰어왔다. 그리고 의사 불러오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도영은 극도의 긴장 땜누에 혼절한 것이다. 그는 형사의 눈이 독사 같아서 몸서리치고 떨었던 것이다.
[4부 3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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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풀이
*괄호 속의 숫자는 본문 속의 면수와 행수를 가리킴.
상배(11:4): 상처의 높임말.
솥전만 돌지 말고(31:12): 변죽만 울리지 말고.
벅수(31:18): 장승.
거물장(33:30):(방언) 거멀장.
고반소(37:27):(방언) 파출소.
한 다리가 짧았지(44:25): 수운의 모친이 상민이었다는 얘기를 둘러서 한 말.
상충살(57:14): 방위나 일진이나 시 따위가 서로 맞질리는 살.
대대로(59:30):(방언) 비슷하게.
쪼다리(60:3):(방언) 꼴.
남우 앞(60:25):(방언) 남의 첩.
거천(68:17):(방언) 봉양.
매동구리(69:19): (방언) 매듭.
제금(71:8): (방언) 딴살림. 분가.
아금바리(71:10): (방언) 아금밭게. 알뜰하게 발밭다.
악문(73:21): 악으로 갚음. 배신.
덛들어서(73:23): (방언) 건드려서.
철기 날개(94:12): (방언) 잠자리 날개.
짚베옷(114:5): 바래지 않은 무명옷.
논(121:21): (방언) 설움.
헌해(122:16): (방언) 험담.
간불용불(142:22): 머리카락 하나 끼울 틈도 없음. 조금도 빈틈이 없음.
신이나 돌리놓지(145:10): ‘개가’를 돌려서 표현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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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146:2): (방언) 부처.
얌얌할(148:1): (방언) 심심할.
고내기(148:25): (방언) 고양이.
지운 데(152:6): (방언) 기운 데. 모자라는 데.
얼(153:30): (방언) 응어리. 원망.
은정(154:7): (방언) 하소연.
정지(156:2): (방언) 부엌.
밥대기(157:23) (방언) 밥을 해주는 사람. 여기서는 마누라를 뜻함.
된정(157:15): (방언) 짜증.
질주(159:18): (방언) 정상.
신기한 방어(172:19): 민간에서 하는 주술적인 예방.
이혈(177:4): (방언) 유혈.
성지간(179:6): (방언) 형제간.
처네(227:30): 지난날, 여자가 나들이할 때 장옷처럼 머리에 쓰던 물건.
조세질(229:6) (방언) 충고.
넘찐(241:4): (방언) 건방진.
도사리(245:14): 못자리에 난 어린 잡풀.
살림을 동개부릴라꼬(258:30): (방언) 살림을 합친다는 뜻.
찻머리(271:30): 정류장.
칭아(338:11): (방언) 차이.
후둣가 보내서(345:16): (방언) 닦달하여 쫓아 보내다.
이새(346:2): (방언) 혼전에 배우는 바느질 따위의 제반 가사.
쫄대기를 치고(349:24): (방언) 못살게 굴다.
소캐(335:27): (방언) 솜.
부작대기(355:29): (방언) 부지깽이.
앵하믄(358:3): (방언) 아까우면.
쟁피(361:19): (방언) 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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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철 2020-02-01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장 명희의 사막
해저 터널의 아치형 출구를 나왔을 때 학교는 왼편 언덕에 있었다. 지상 부분인 터널 옆을 따라 되돌아가는, 그러니까 바다의 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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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못 미쳐서 학교로 향한 길이 있었는데 왼편에는 채마밭이었고 오른쪽에는 초가 한 채, 야트막한 싸리울타리를 친 채마밭, 다시 초가 한 채가 있었다. 방 하나에 외양간을 거느린 대문채와 안채의 규모로 보아 조금은 넉넉한 듯한 농가였다. 학교길은 그곳으로부터 가파른 돌계단이었으며 여남은 개의 계단이 끝나니까 양켠에 벚나무를 즐비히 심은 오르막길이었고 다시 여남은 개의 돌계단을 올라섰을 대 콜타르를 칠한 단층 목조 건물이 눈앞에 드러났다. 넓지않는 운동장은 비어서 휑해 보였다. 메마른 잔디를 입고 비스듬히 드러누운 꽤 높은 축대 위에 교사는 마치 제단 위의 관과도 같았다. 교실이 네댓 개나 될까? 축대에도 양켠과 중심, 세 곳에 계단이 있었다. 황량하고 을씨년스런 풍경이었다. 그러나 교장의 주거인 듯 번듯한 왜식 주택이 교사와 좀 떨어진 곳에 있었고 읍내 신사가 멀었기 때문인지 혹은 진충보국, 국수에 투철한 어느 교장의 창안인지 알 수 없으나 교무실 앞의 장난감같이 축소하여 만들어놓은 신사, 국기 게양대, 그런 것들은 식민지교육 정책의 준엄한 권위를 충분히 나타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운동장을 질러 중심부의 계단 앞에까지 가서 멈추어섰다. 찬하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물었고 인실과 오가다는 사방을 둘러본다. 저 밑에 겨울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짙푸른 빛을 띤 바다는 호수같이 잔잔하였다. 돛단배가 떠 있었고 갈매기도 날고 있었다. 인실의 시선이 찬하를 잠시 스쳤다. 암울한 얼굴에 담배 연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제가 가서 물어보지요.”
인실은 말을 남기고 돌계단을 올라갔다. 여닫이의 유리창 문을 열었다. 시골 학교의 대개가 그러하듯 서류장에다 책상들, 별다를게 없는 교무실이었다. 소사가 난로 속의 재를 후벼내다가 얼굴을 들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예.”
“여기, 이 학교에 임명희라는 여자 선생님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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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심더.”
소사는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분을 찾아왔는데 어디 가며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방학이라서요. 핵교에는 안 나오시고 하숙집에 가보시이소.”
“하숙이 어딘지, 모릅니다.”
“와 거기, 층계다리로 올라오싰지예?”
“네.”
“바로 거기, 층계다리 옆에 붙은 집입니더.”
“고맙습니다.”
두 사내는 망연한 모습으로 서로를 외면한 채 서 있었다. 인실이 내려왔지만 그들은 그런 자세를 허물지 않았고 말도 걸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계시소.”
아까 왔던 길을 되잡아서 인실은 천천히 걷는다. 계단도 천천히 밟고 내려간다. 이런 한촌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도시풍의 남녀 세 사람이 새끼줄 잡고 칙칙폭폭, 기차놀이하는 아이들처럼 명희 하숙에 줄줄이 들어가는 광경은 아무래도 우스꽝스럽고 멋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명희가 충격을 받을 것 같기도 해서 일단 혼자 그를 먼저 만나야겠다고 인실은 생각했던 것이다.
“임선생님을 만나뵈려고 왔는데 계시는지요.”
장독가에서 삶은 빨래에 방망이질을 하고 있던 중년의 아낙이 방망이를 든 채 화드득 일어섰다. 삶은 빨래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디서 오싰습니까?”
“서울서 왔습니다.”
“예…… 저기 선상님은요, 핵교에 가싰는데예.”
인실은 난감해한다.
“학교에 갔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하숙에 계실 거라 해서 왔는데, 그럼 임선생님이 안 계시단 말씀이군요.”
아랫방 문이 여리면서 소년이 쫓아나왔다. 서둘러 신발을 신은 소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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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요, 분교에 가 계실 겁니더. 지가 가리치드릴 긴께 지를 따라오시이소.”
기세 좋게 말했다.
“참, 그래라. 그래야겄다. 그라믄 자아를 따라가보시이소. 촐랑대지 말고 가거라!”
아이를 향해 소리지르는 아낙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인실이 집을 나서는데 아이는 돌층계와 반대 방향을 향해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이애! 이애야!”
“야?”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잠시만 기다려주겠니? 일행이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내 가서 뫼시고 오마.”
“아니라예, 개안십니더. 핵교로 해서 가는 길도 있인께요.”
솜저고리 앞섶 밑에 두 손을 찔러넣고 염소새끼 뛰듯 아이는 껑충껑충, 되돌아왔다. 검정색 솜바지, 잿빛 솜버선, 신발은 신발은 검정 고무신이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삶은 빨래처럼, 쇠죽을 먹던 살찐 암소의 콧김처럼 아이는 따뜻해 뵌다. 벚나무가 즐비히 선 오르막길에서
“이리로 가믄요, 핵교 뒷산을 넘어가야 하고, 바닷가 신작로로 해서 가는 길도 있십니더.”
아이가 말했다.
“너도 이 학교엘 다니느냐?”
인실이 물었다.
“야.”
“몇 학년이니?”
“삼학년입니더.”
아이는 손등으로 코를 문지르며 인실을 한번 살펴본다.
“임선생님은 몇 학년 담임이니?”
“선생님은 담임 안 하십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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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삼학년에서부터 육학년까지 여자아이들만 모아놓고 수예하고 재봉만 가리치니께요. 그런께 촉탁선생님이라 안 캅니꺼.”
“그래서 분교에 가 계시니?”
“아니라예. 그거는 아니고요, 방학 동안 아무도 없인께…… 선생님은 혼자 기시는 거를 좋아하는가배요. 저기, 그런데 물어봐도 되겄십니꺼.”
“뭘?”
“혹, 우리 핵교에 오시는 선생님 아닙니꺼?”
“나 말이냐?”
“야.”
“아니다.”
아이는 실망을 나타낸다.
“우리 핵교는 여 선생님이 한 사람뿐입니더. 그라고 또오, 선생님이 모자라니께요.”
그래서 새로 오는 선생님으로 생각했다는 뜻인 모양이다.
“일학년은 옥선새님이고 이학년은 키다리 배선생님이고 삼학년,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도다라고 눈이 쪼맨코 입이 튀튀하게 나와서 별명이 돼지라예. 또 도다리라고도 하지마는 맘씨는 개안십니더. 아아들 안 때립니더. 사학년은 교장선생님이 가르치고요. 분교의 오학년, 육학년은 황선생님이락꼬, 서울내깁니더.”
해놓고 아이는 당황한다. 명희선생도 그렇지만 안내해가는 손님도 서울내기라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오륙학년을 한 분이 가르치느냐?”
“야, 와 그런고 하니요, 사학년에서 졸업하는 생도들이 많십니더. 그란께로 오륙하년을 모두 합쳐도 한 반밖에 안 되거든요.”
“음.”
운동장으로 올라간 인실은 아이들 따라가면서 두 사나이에게 손짓하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왠지 가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따라오려면 따라오라, 그런 심정은 명희가 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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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을 생각한 때문이지만 막상 와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명희가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왜 내가 이런 행동에 동행했을까.’
처음부터 찜찜했었다. 찜찜했던 것이 이제는 노골적인 후회로 인실은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교사와 교장 사택 사이를 지나 학교 뒤켠으로 돌아갔다. 후문을 나와 두덤 두 개가 나란히 있는 언덕을 올라가서 다시 내리막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소나무가 듬성듬성 솟아 있는 산은 향이 서북쪽이어서 음산했고 척박해 보였다. 얼마나 긁어내었는지 솔갈비 한줌 찾아볼 수 없는 땅바닥엔 세월에 부서지고 모가난 돌멩이만 굴러 있었다. 눈 아래는 여수로 향한 조은 수로, 해저터널이 바닥에 가로놓여 있는 그 수로의 목이 넓어지면서 섬들이 포개어지고 비켜서고, 바다는 서쪽으로 아득히 수평선을 긋고 있었다. 그러니까 교정에서 내려다본 것이 앞바다라면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은 뒷바다라 할까. 해저 터널 하나로 통영읍과 연결이 되는 미륵도, 산양면인데 이곳은 봉화대와 사찰 용화사가 있는 용화산의 자락인 셈이다. 본래는 섬이 아니었는데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에 쫓긴 왜군의 전함이 이곳에 몰리어 어마지두한 병졸들이 이 목을 파서 수로를 내었다 한다. 세칭 다이코보리, 풍신수길의 군사가 팠다는 뜻일 거다. 그러나 대부분 이곳 사람들은 이 좁은 수로를 판대목이라 한다.
내리막길을 다 내려갔을 때 수로의 방죽 옆은 꽤 넓은 신작로였다. 산자락에 바싹 붙어 잇는 신작로, 그 사이의 좁은 공간에 바라크 같은 목조 건물이 바다를 보고 한 채 서 있었다. 그것이 분교였다. 아이는 바람개비같이 날라갔다.
“선생님! 선생님! 서울서 손님 오십니다!”
복도 같은 것도 없고 건물 처마 밑에 들어서니 유리창을 통해 책상이며 걸상, 칠판 따위가 있는 교실 내부를 환히 볼 수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서울서 손님 오싰습니다!”
교실에 잇달리어 기역자로 되었으며 장지문이 닫혀져 있는 방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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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아이는 소리쳤지만 방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신돌위에 검정 여자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은 가까이 가지 못하고 아이의 뒤통수만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의 고함은 종기를 째려는 순간의 칼끝처럼 이들의 마음을 긴장시키는 것이었다. 명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떤 태도로 나타날 것인가.
“선생님요!”
침묵이 아타까웠든지 아이는 주먹으로 문을 한 번 탕! 하고 쳤다. 방문이 열렸다. 검정 치마저고리를 입은 임명희의 창백한 얼굴이 세 사람을 향해 떠올랐다. 그것은 유령이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전율을 느낀다. 살아 있는 징표, 생명의 빛을 잃어버린 모습, 그러나 다음 순간 명희 얼굴에 분노가 나타났다기보다 분출이라 해야 할까, 동시에 그것은 살아 있었다는 신호가 되었다. 인실은 달려갔다.
“선생님.”
“……”
“죄송합니다.”
“……”
“용서하세요.”
“어떻게 된 일이니?”
격렬한 분노의 얼굴과는 딴판으로 목소리는 평탄했다.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
“선생님은 원치 않으셨겠지만, 어, 어떻게 수수방관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인실은 터져나올 것만 같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찬하가 다가와 모자를 벗었다.
“형수님, 오래간만입니다.”
창백했던 명희 얼굴이 진홍빛으로 변해갔다. 눈이 증오에 타듯 희번덕인다. 찬하는 새파래진다.
“너무들 하시는군요.”
기계로 압축한 목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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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지들 마세요.”
명희는 다시 말했다. 상처투성이, 이 사람이 걷어차고 저 사람이 걷어차고 굴러서 굴러서 어느 구석에 처박힌 돌멩이같이 되어버린 명희,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변화였다.
“모, 모든 일은 저의 잘못으로,”
찬하는 얼어붙어서 말했다.
“이상하군요. 찬하씨의 잘못이라구요?”
“대안의 불구경하듯 할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여기 오시는 일이 옳은 방법이었을까요?”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그 그냥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책임과 의무가 찬하씨에게 있습니까? 그럴 이유가 없지 않아요?” 옛날 명희의 어투가 아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집으로 돌아가시라는 말씀은 않겠습니다. 나오시기는 잘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이렇게 계셔서 되겠습니까.”
“상관 마세요. 제발 상관 말아주세요!”
의아해하며 서 있는 아이에게 병아리 몰 듯 인실은 팔을 벌리며
“얘야, 고마워. 이제 가도 되겠구나.”
인실은 신작로로 나가는 아이를 뒤따른다. 아이는 신작로로 곧장 걸어갔고 인실은 방죽가에서 멈추었다. 목도리 대신 타월을 목에 감고 통을 인 생선장수 아낙이 지나간다. 아이는 굽어진 해안을 따라가다가 한 팔을 치켜들고 빙빙 돌리며 뛰었다. 그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생선장수 아낙도 사라지고 방죽을 치는 물결 소리, 그리고 사위는 적막하게 가라앉았다.
‘이상한 여행, 쓸쓸한 이 바닷가, 이곳에서 만나야 했던 임선생님, 내가 왜 여길 왔지?’
잘못했다는 후회는 명희르 ㄹ위한 것이면서 또 자신을 위한 후회이기도 했었다. 마치 주술같이 끌려 이 땅끝과도 같은 바닷가에 서 있는 느낌이다.
오가다가 옆에 와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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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하늘과 겨울바다, 척박한 언덕이 등뒤에 있었고 수로 건너편 마주보이는 곳은 햇볕에 등살을 펴듯 산의 능선은 부드럽다. 산자락에 띄엄띄엄 놓인 인가, 이따금 사람이 지나간다. 도대체 삶은 무엇이며 존재는 무엇인가, 인실은 한숨을 깨문다.
‘마치, 철새가 더나버리고 텅 빈 갈대숲 같다. 여기까지 오게 한 마음도 목적도 왜 이리 어렴풋한가. 기묘하기만 하고, 정녕 이 순간, 이곳, 이 풍경은 정상이 아니다.’
기묘하다는 것은 뭐 새삼스런 느낌은 아니었다. 여행하는 동안 시시로 벙어리 노릇을 해야 했고 꾸어다놓은 보릿자루같이 있어야 했던 오가다의 처지가 우선 기묘했다. 떠나올 때부터 형용하기 어려운 절실한 것, 그 절실한 것이 이곳까지 오게 했지만 인실뿐만 아니라 두 남자의 경우도 그 절실함이 무엇인지, 사실은 정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정시하라! 정시하라! 외치며 뒤쫓아오는 이성에서 도망치듯 애써 애매모호한 베일에 몸을 숨기며 왔는지 모른다. 생각하기에 따라 단순한 여행길에 진주 최씨네 댁을 방문하고 겸해서 명희도 찾아보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관계는 복잡미묘하고 감성은 보통 이상으로 섬세하며 예민하여 결코 단순치는 않았다. 명희를 찾아온 명분에서도 그러했다. 실상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명희를 찾을 명분이 없는 것이다. 찾아와야 할 이유, 의무가 없고 다시 말해서 주제넘다는 것이 이들 대면의 비극에다 희극적 요소를 가미한 결과가 된 것이다. 오가다는 아예 명희와는 면식이 없는 인물이었다. 은사이거나 친구라면 혹 모를까 제자인 인실이 개입했다는 것도 당돌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고 스승을 수치스럽게 했을 뿐이다. 찬한느 더더구나 명희를 찾아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조용하의 인간됨에 원인이 있었고 명희의 잘못된 선택에서 빚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용하와의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의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명희를 재기 불능의 경지까지 몰고 갔으니까. 진실은 엄폐된 채 찬하와의 불미스런 관계 운운 그 자체가 명희에게는 악몽이었다. 영원히 깨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악몽, 세 사람의 심정이 백 프로 선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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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라도, 물론 백 프로 선의지만 이들의 방문은 명희에게는 심장을 도려내는 비수 같은 것이었다. 불안은 이들이 떠나올 때부터 있었다. 과연 명희를 찾아가는 것은 옳은 일인가. 냉혹하게 얘기하자면 백 프로 선의의 뒤켠에는 에고이즘이 숨어 있었다. 불안을 외면하고 욕망에 쫓기어 이들은 왔다. 인실은 주술에 걸린 것처럼왔다고 표현했지만. 찬하는 명희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떠밀었다는 자책감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든 그를 구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 사랑의 불길이 있는 한 명희를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며 한 오라기의 반응이라도 건져내고 싶은 욕망은 있었을 것이다. 인실과 오가다는 여행 그 자체에 대한 유혹에 저항하지 못했을 것이고, 외형으론 두 남녀는 찬하의 들러리로 온 것 같지만 편승이라 해야 옳았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찬하 편이 들러리였는지 모른다. 두 남녀는 서로 사랑했으니까. 막연한 불안, 애매모호한 상태, 그러나 끝내 그들 자신의 에고이즘을 호도할 수는 없었다. 올 데까지 와서 코너에 몰린 명희와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도 코너에 몰린 것을 깨달았다.
“저 사람들…… 비극이군요.”
오가다가 중얼거렸다.
“희극인지도 모르지요.”
“어째서.”
“글쎄요…… 현실 같지가 않아서요.”
“왜 저렇게 돼야만 했을까?”
오가다는 등을 구부리며 바다를 내려다본다.
“시간적으로 안 맞은 거 아니었을까요?”
“한발 먼저 청혼을 했다, 그 얘기군요. 한발 처졌다면 그건 찬하씨 성격 탓이지요. 찬하씬 내성적인 사람이니까.”
“성격을 말하면 임선생님한테도 원인은 있었을 거예요. 전 선생님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사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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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할까요, 소극적이라 해야 할지, 그러니까 무엇이든 보호를 받을 때 쉽게, 그 보호가 없을 때는 힘들게 사는.”
“그거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선택이 까다롭다는 점이 있지요. 조용하씨를 선택한 것은 친정에 대한 희생 같은 것이 있었을 테지만 선택의 잘못을 알면서 들어갔을 성싶어요. 그러니까 대단히 어렵게 힘들게 살았을 거예요.”
인실의 말은 횡설수설인 듯도 했다. 명희의 사람됨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안타까움도 있는 듯했다.
“너무 착하고 더러운 것을 모르고 소극적으로 해서 힘이 들었을 거예요.”
덧붙여 말했다. 옛날 처녀 시절에 대담하게 상현의 하숙을 찾아갔던 일, 바로 이곳 바다에 투신했다가 어부가 건져주었던 일을 인실이 알았더라면 명희에 대한 인식은 좀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니 그래도 어쩌면 달라지지는 않았을 성싶다.
“너무나 황폐해졌어요.”
“그분 모습에 나도 놀랐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젯밤엔.”
“인실이 중얼거렸다.”
“사과 안 해도 좋습니다.”
“사과 같은 것 안 해요.”
“그럼 공격할 일이 또 남아 있습니까.”
오가다는 애써 인실의 가라앉는 기분을 일으켜 세우려는 듯 우스개 비슷하게 말했다. 인실은
“졸렬했어요.”
“……”
“혼란스러웠고요.”
“다 압니다. 모순과 갈등, 히토미 당신만이 아니지요. 세 사람 다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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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잘못한 거예요. 이곳에 오는 거,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부끄럽군요.”
한편 찬하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괴로워하며 명희를 설득하고 있었다. 서울이 싫으면 진주 최씨네댁에라도 가는 것이 좋겠다고.
“찬하씨가 왜 이러지요?”
명희의 눈매는 칼날 같았다.
“당신 형님 말대로 내가 찬하씨의 애인이라도 되나요?”
“그, 그런 말씀을.”
“나는 내 육친한테도 이런꼴 보이기 싫었어요. 한 마리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이 꼴 말예요!”
“……”
“제발 가주세요. 도대체 저기 서 있는 사람들, 찬하씬 나에게 뭔가요? 당신네들 동정이나 받아서 눈물 흘릴 그런 처지는 아니예요.”
˝동정이 아닙니다.“
찬하의 목소리는 낮았고 절망적이었다.
“왜 더 이상 못 가는 가 싶어요. 새가 되어서라도 이 땅에서 빠져나가고 싶어요. 조씨 가문, 그 집 자부, 조아무개의 아내.”
명희는 몸을 떨었다.
“십 년 동안 그게 때라면 밀어버리지요. 십 년을 벗길 수 있다면 난 살갗이라도 벗겨내고 싶은 심정이에요. 누굴 원망하는 건 아니예요. 내 자신을 원망하는 거예요.”
“형수씨에겐 아무런 때도 묻지 않았습니다. 벗겨낼 그 무슨 때가 있겠습니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귀족의 귀부인의 전락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친일파의 자부로 불미스런…… 네,”
하다가 말을 끓었다. 명희는 이성을 잃었고 감정은 극도로 흥분된 상태였다.
“그런 것 관계없습니다. 헌신짝처럼 다 버리세요. 피해망상입니다.”
“내가 형제를 농락했나요? 비밀이지요? 왜 내가 이런 비밀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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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야 합니까! 왜 사람의 눈을 무서워해야 합니까! 난 찬하씰 사랑한 적이 없는데, 난 조씨 집안의 조씨 성 가진 사람 누구도 사랑한 일이 없는데, 왜 내가 십 년을 그 집에서 살아야 했는지 아세요?”
찬하는 새파랗게 질려서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명희를 쳐다본다.
“나를 요녀같이 대하는 당신네 부모, 나는 결벽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내 결벽을 알면서 조용하는 독사를 내게 들이대듯 즐겼어요. 찬하씨는 잘 아실 텐데요. 왜 내가 그 집에서 못 나온 줄 아세요? 내가 나오면 그것을 무기 삼을 것이란 공포 때문이었어요. 난 사람이 무서워요. 아무도 믿지 않아요! 가세요! 왜 내게 공포를 환기시키는 겁니까. 나는 구경거리가 된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에요! 하지만 난 구경거리가 되었답니다.”
비로소 명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찬하는 새파랗게 질린 채 인실과 오가다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인실씨! 가보세요! 가봐주세요. 흐, 흥분해서,”
인실이 명희에게로 뛰어간다.
“갑시다, 우린 가는 게 좋겠어요.”
찬하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며 급히 도망치듯 걸음을 옮긴다. 한 동안 당황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인실 쪽을 바라보던 오가다도 허둥지둥 걸음을 내디뎠다. 해안길을 따라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가는 찬하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귓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몽유병자처럼 걷고 있었다. 담배 피는 것도 그는 잊은 듯했다. 터널의 입구, 국화빵을 구워 파는 중늙은 여자와 삶은 고구마를 파는 노파가 이쪽저쪽 마주보고 앉은 터널 입구에서 내리막길을 한참 지난 뒤 오가다는 겨우 찬하를 따라잡았다. 지상 부분을 지나 커브를 돌았을 대 터널 입구에서 비쳐들어오던 광선은 차단되고 띄엄띄엄 천장에 매달린 전등은 어둠 속에서 마치 숲속의 등불같이 깜박이는 듯했다.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발소리는 메아리가 메아리되어 끝없이 울린다. 오가다는 견딜 수가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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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벽 저 벽에 부딪치며 울리는 메아리에 힘입어 물었다.
“가엾어서 그래요?”
찬하는 걸음을 멈추고 오가다를 쳐다본다.
“아니,”
“그럼 왜 이러는 겁니까. 당신은 넋이 나간 것만 같아요.”
찬하는 겨우 생각이 난 듯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성냥개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걸으면서
“백 년 천 년 얼어붙어서 녹아버릴 것 같지가 않소. 끔찍스러워.”
“뭐가?”
“산다는 게.”
한참을 걷다가 오가다는
“이 어두컴컴한 굴속처럼 말이지요? 암중모색이지 뭐. 인생이란 끝없이 쓸쓸해. 저승길을 가는 것처럼. 이승길 저승길 따지고 보면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요.”
“……”
“사카상(찬하씨)!”
“……”
“역시 나나 당신은 봇짱이야. 모두들 배짱 두둑하고 낯가죽도 질기던데, 사이교(西行: 승려시인)의 방랑을 꿈꾸고,”
오가다는 찬하에게 말한다기보다 윙윙 울리는 자기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말하는 기분이었고 왠지 모르겠으나 소리를 질러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건 오가다 당신의 경우겠지요. 나는 사이교의 방랑 따위는 꿈꾸지 않소이다. 그보다 도덕과 휴머니즘은 다르지요, 분명히.”
어세가 강했다.
“네. 다르고 말구요. 때론 다를 정도가 아니라 상반되는 거 아닙니까.” 한참 있다가 찬하는
“그분은 도덕적이었지만 휴머니스트는 아니었소, 사막이었소.”
하며 짧아진 담배를 버린다.
“나는 꿈같은 것 꾸지 않소. 대체로 조선인은 일본인만큼 꿈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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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아요.”
“감상을 모멸하는군요. 그건 알 만해요.”
그러고는 말이 끊어졌다. 그런데 응얼응얼 이상한 소리가 멀리서 울려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차츰 가까워져서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런가 하면
“나무아이미타아불! 나무아미타아불!”
윙! 위! 울리는데 바구니를 인 중늙은 여자가 그것도 조만한 여자가 한 팔은 바구니를 잡고 한 팔은 열심히 휘저으며 모습을 나타내었다.
“관세음보오살! 관세음보오살! 나무아미타아불! 나무아미타아불!”
오가다는 마음속으로 아아 하고 납득했다. 아까 목청껏 노래 부르고 싶었던 자신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늙은 여자는 극락왕생을 빌며 소망을 염원하며 염불을 했다기보다 세상과 동떨어진 바다 밑의 공간, 그 공간 자체에 자유로움을 느꼈을 듯싶었고, 별로 걸리적거리는 사람, 부딪치는 행인도 없는 터에 갈 길을 밝혀줄 만큼의 어둠이 허물을 묻어주듯, 그리고 제 목소리가 가토록 오래 울리며 연이어져 사라지는 것이 마치도 육체를 망각하고 자신의 영혼의 목소리만을 들으며 영혼의 부유를 확실하게 느끼며―그렇다, 육신을 빠져나온 자유로움, 자의식을 풀어버린 홀가분함, 그것은 목소리로써 표현되고 인식된다. 중늙은 여자는 명부길을 환상하며 염불을 외웠는지 모르지만 명부길엔 육신은 없다. 육신이 없음은 욕망과 소망도 없는 것이다. 욕망과 소망이 없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오가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터널에 빛이 들어왔고 소리도 제자리에, 그리고 눈부신 외부로 그들은 나왔다. 국화빵장수, 고구마장수가 웅크리고 앉아 있던 저켠과 달리 이켠은 훨씬 풍요했다. 잡화상, 음식점, 한약국도 있었고 철물점, 사람이 사는 품을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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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고 있었다.
신작로를 따라서 걷는다. 오른편 바닷가에는 그ᅟᅮᆯ 손질하는 어부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참 가서 노천 조선소라고나할까 목수들이 배를 만들고 있었다. 잇달아 건어장, 그물 공장, 뭔지 모를 작은 공장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왼편에는 산을 등지고 민가가 즐비했으며 가간이 영세한 상점들이 끼여들곤 했다. 잔물결에 일렁이는 오후의 바다는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읍내 중심가로 들어왔고 여관에 당도했다.
“부산 가는 배가 어떻게 되지?”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찬하는 심부름 아이를 불러서 물었다.
“낮배는 떠났어요.”
“그러면?”
“네시에 있는 거는 마산으로 돌아서 가는 밴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조맨한 것이 통통배라요. 장사꾼들이 타고 가는 짐배나 다름없십니더.”
설명이 장황하다.
“그 배 말고는 없느냐?”
“아닙니더. 밤배가 안 있십니꺼. 그 배는 크고 부산으로 직행이니께 시간도 덜 걸리지요. 뱃멀미도 덜 남니더.”
여깃 설명이 장황하다. 찬하는 오원권 지폐 한 장을 주며 밤배의 표를 사라고 이른다. 한 장만 사라고 덧붙인다.
“이등표지요?”
“음, 그리고 술상 좀 차려줄 수 있겠느냐?”
“예. 그라믄 술은 머로 할까요? 정종으로 할까요?”
“그래라.”
여관방으로 들어온 두 사내는 외투를 벗어놓고 마주하고 앉아서 새삼스럽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찬하의 낯빛은 파랗게 질린 그대로였다. 이따금 그의 입가에서 경련이 일곤 했다.
이윽고 술상을 소년이 들여왔다. 두 사내는 작은 유리잔에 서로 술을 부어주며 말없이 마신다. 찬하는 이따금 오한 같은 것을 느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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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언어 자체의 의미보다 명희의 분위기는 거의 살인적일 만큼 강하고 살벌하였다. 명희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그것도 능히 짐작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하는 섬뜩섬뜩 공포까지 느낀다. 마음속에 품었던 것이 죄가 될지 모르지만 찬하는 단 한 번도 시동생으로서 예의에 벗어난 일은 한 적이 없다. 꽃같이 귀하고 소중했던 모습이, 한 오라기의 애정이 흐르는 눈빛을 기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르지도 않았는데 찬하가 본 것은 자기 방어의 영악한 명희의 본능이었다.
“오가다상!”
“네.”
“지금 당신은 낭인이오?”
“낭인이냐구요?”
“아니면 비밀 결사에서 일하고 있는 거요?”
뒤틀린 어투였다. 터널 속에서 사이교의 방랑, 그 따위는 꿈꾸지 않소이다, 했을 때처럼 신경의 날을 세우고 떠밀어내듯, 찬하는 결코 그런 투로 얘기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시골 중학교 선생질이나 할까 생각중이오.”
“왜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요?”
“현실 도피죠 뭐.”
“현실이 어때서,”
찬하의 음성은 한 옥타브 떨어지는 것 같았다. 혼잣말같이 다음을 잇는다.
“세상이란 늘 이랬었지…… 지겨워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지식인의 혓바닥으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 혓바닥이 짤려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오가다는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한약을 털어넣듯 입속에 술을 붓는다. 여관의 젊은 여주인의 손이 간 듯 술상은 조촐했다. 마른 대구를 먹기 좋게 찢어서 초장을 곁들여놨고 단칼에 싹둑 베어낸 대구알은 잘 익어서 석류같이 빨갰는데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고춧가루 깨소금을 살살 뿌려놨고 파아란 파래무침은 그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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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드높았다.
“옷을 갈아입고 또 갈아입고 나타나지만 기는 놈, 서는 놈, 나는 놈, 변함이 없이 따로, 따로.”
오가다 말에
“뭐가 말이오.”
“그렇지요. 사람 사는 게…… 지켜워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그렇지요, 뭐. 천지만물이 모두 다, 진화가 어디 있어요? 되풀이지 뭐.”
술에 안주가 필요하다. 말은? 말을 위해 술이 따라갈 수도 있고 술을 위해 말은 안주가 될 수도 있는 것인지. 이 경우 두 사람은 술을 마시기 위해 말을 한다. 그것도 흠뻑 마셔야 했고 흠뻑 취해야만 했다. 싫든 좋든 알맹이야 있든 없든. 무슨 내용이든 빈정거려야만 했다. 아니, 그보다 술만으로는 의식이 말뚱말뚱했고 살벌하고 황량한 광경이 통증처럼 가슴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이겠는가. 찬하는 물론이었고 오가다나 지금 이 자리에는 없는 인실의 경우만 하더라도 자기 모멸,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감은 절실한 욕망에 못지않게 준열했을 테니까. 빈정거리는 말투, 말뚱말뚱한 의식에 먹칠을 하고 싶은 것, 그것은 자기혐오 자기모멸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심정, 심정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엊그제 바람이 불었던 것처럼, 백 년 전에 홍수가 있었던 것처럼 바야흐로 지금도 홍수, 홍수요.”
“뭐가요.”
오가다 말에 찬하는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그거 좋지요. 대포 없이 혁명하고 독립도 하고, 하기는 그들이 승리하는 날 나 같은 싸구려 포장지 같은 귀족 문벌에 친일파, 타살되기 십상이지.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 그보다 나을 것 한푼 없어요. 내 부친께서는 생각을 매우 잘못한 겁니다. 친일파란 합방되기 이전에 필요한 것, 합방이 되고 나면 쓰레기로 변하는 것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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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만방에 체면 세우기 위하여 조선 왕실을 일본 황족으로 하고 친일파에겐 작위를 주고 그것도 일종의 체면용일 뿐, 일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영토와, 자원과 노동력뿐이지요. 다 써먹고 이제는 필요 없게 된 밥버러지가 뭐 그리 반갑겠소. 죽어 없어지는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게요. 처량한 신세지요. 나의 부친은 매우 셈을 잘못한 겁니다. 작위를 받을 게 아니라 상놈으로 격하됐어야 옳았어요. 노역형보다 금고형이 가혹한 걸 몰랐지요. 대학을 나오면 뭣합니까? 손도 발도 내밀 수 없는데, 과거 조선 문화에 대한 일본의 콤플렉스는 그것을 말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 유산을 많이 싸안고 있는 과거 지배층이 반가울 까닭이 있겠어요? 일본에게 협력하고 일본이 회유하여 목적을 달성한 오늘 그 계층이야말로 일본이 가장 기피하는 존재가 된 것은 공리에 철저한 일본이고 보면 당연한 귀결 아니겠소?”
찬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자학은 극에 달한 것 같았다.
“타살을 당하거나 종신 금고형을 받거나 피장파장, 내 뿌리를 내린 조국이 독립된다면 어느편이든 나는 상관없지요. 어차피 내가 속한 계층은 사라져야 하니까요. 그러나 당신 말대로 실개천이 아닌 홍수가 난다 하더라도 일본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겁니다.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급진파도 조선 독립을 언급하는 자들은 별로 없고.”
“그런 소리 마십시오. 여기 있지 않습니까.”
서둘며 오가다는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께 웃는다. 동양인 특유의 감정을 배버린 소리뿐인 웃음을.
“나카노 시게하루도 있지요. 「비 내리는 시나가와 역」말입니다. 신이여 잘 가거라, 김이여 잘 가거라, 그대들은 비내리는 시나가와 역에서 승차한다, 그 시를 쓴 나카노 시게하루.”
나카노 시게하루는 시인이면서 소설가, 평론가이며 나프[전일본무산자예술전체협의회]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비 내리는 시나가와 역」은 조선 독립과 독립운동에 대한 뜨거운 지지를 나타낸 시다.
“나도 『개조』에서 그걸 읽었어요. 그래 오가다상, 당신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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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세계인, 국제인, 범세계주의자]이오? 하기는 계명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까지 치르었으니까 그중의 어느 하나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찬하는 술잔을 놓고 담배를 붙여 문다.
“명칭이야 어떻든, 코스모폴리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어느 것이든, 한 마디로 허황하지요.”
“그게 그거지 뭐.”
“그게 그거지요. 허공에 둥 떠 있으니까, 허공에 뜬 달같이 에너지가 없으니까 그게 그거 아니겠소.”
오가다는 묘하게 둘러대었다. 그게 그거라는, 불투명한 언어 자체가 이들의 막연한 심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에너지가 없기론 다 마찬가지요. 하나만 빼고, 홍수가 나도 태풍이 불어도가 아니라, 결코 홍수가 나고 태풍이 부는 일은 없을 게요만 실개천, 그게 사방에서 찔끔찔끔 흐르는 거 아니오?”
“일본에서 말입니까?”
의아해하며 오가다는 되물었다.
“그렇소. 일본에서 말이오. 야나기는 조선의 예술만은 사대가 아니라고 웃기는 강변을 했는데 문화에서 사대로 일관해온 일본의 역사가 증명하듯 지금 불고 잇는 새 바람, 흐르고 있는 실개천도 분주하게 들여오는 서구 문화에 묻어서 온 것 아니오. 박래품 선호 사상의 일단에 불과한 거요.”
“허허어, 참 어젯밤 히토미상도 마구 쥐어박았지요. 야나기에 관해서,”
“그랬어요? 생각 이상으로 훨씬 똑똑하군요. 아무튼, 설사 홍수와 태풍이 불어도 다 소용없어요. 천황과 일본도에 잠시 나타나는 피부병 같은 거고 녹이 쓴 것에 불과하지. 천황의 피부병은 군부에서 약 발라줄 것이고 일본도의 녹은 천황이 닦아내고 기름 발라줄 것인데, 천황이야말로 불 먹는 공룡 같은 존재 아니오? 일본에서는 황도사상 이외 어떤 사상도 에너지를 가질 수가 없어요.”
일본인들에게는 기절초풍할 만큼 불경스런 찬하의 말이었고 어투였다. 증오와 모멸이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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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부터 계속 얻어터지는군요.”
오가다는 쓰게 웃었다. 인실이 여자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랬을까. 감싸안아 주었는데, 히토미는 말을 안 할 때 더 강했다는 얘기도 했었다. 그러나 찬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평소 온건하고 지극히 객관적이던 찬하 어디에 이 같은 증오와 분노가 숨어 있었던가. 그의 분위기는 마구 밀어붙이는 탱크와 같이 오가다에게 압도해왔다. 오가다는 저항을 느낀다.
“오가다상이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그 우정을 나는 믿습니다. 한데 어떻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당신, 천황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오가다는 당황한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듯 순간 어쩔 줄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그, 그거는, 네, 아직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요.”
“……”
“그게 대부분 일본인들의 한계가 아닐까요?”
오가다 얼굴에 막연한 표정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술을 마신다. 말없이 술을 마시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의 약점을 연민하는 이상한 애정 같은 것이 싹트는 것이었다. 오가다가 입을 열었다.
“1928년 보통선거가 실시됐을 때 군주제 철폐를 필두로 하여 열두 조항의 정책을 들고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타난 공산당은 선거중의 탄압은 물론 3·15의 비극을 불렀는데 산카상도 아시다시피 삼천 명 이상을 잡아들이는 검거 선풍이 불었고 야마센의 의회에서 폭로했듯이, 또 고바야시의 소설 『1928년 3월 15일』에도 상세히 묘사되었듯이 그 무시무시한 고문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산당은 침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공산당을 발본색원하기 위하여 이듬해 정부는 치안유지법을 보다 가혹히 개정하고 의회에서 긴급 칙령으로 개정된 법안 승인, 이때 홀로 반대한 야마센은 그날 밤 우익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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