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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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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법률가들이여!
저주받으리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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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서의 발전 원제:Development As 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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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철
(
) l 2020-01-29 21:17
https://blog.aladin.co.kr/749089172/11467334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김원기 (옮긴이),유종일 (감수) 갈라파고스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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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티아 센 지음, 김원기 옮김, 유종일 감수.해제 / 갈라파고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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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철
2020-02-01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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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4부 3권 제4편 인실의 자리 12권 5장 동경의 인실 인실이 머물고 있는 호리가와의 시영 주택을 찾아가는 찬하는 갈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곤욕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그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곤욕스런 방문을 한 번도 아니요 거의 관례적으로 한 주일에 한 번 정도 실행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이 딱하기도 했었다. 굳이 이유를 따져본다면 그 항구에 오가다와 인실을 남겨 놓고 도망치다시피 혼자 와버렸으니 책임이 전혀 없다 할 수는 없었고 오가다와의 우정을 이유로 삼을 수도 있었다. 또 유인실이 동포라는 것도 이유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여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가다와 인실의 문제요 찬하가 간여하지 않는다 하여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어려운 형편이라면 얼마간의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그것만으로도 찬하는 도리를 다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인실이 청하는 도움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경제적인 준비는 되어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지난 칠월 초순의 일이다. 조선에서 일어난 배화 폭동이 날로 확대되고 격렬해진다는 신문 기사를 찬하는 읽고 있었다. 만주 길림성에 있는 만보산 부근에서 중국인 농민과 조선 농민 상에 벌어진 충돌 사건이 [조선일보] 호외로 시작하여, 연이어 선동적인 기사로 사건이 보도되면서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 습격 학살이라는 엄청난 참극이 각처에서 자행된 것이다. page 36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조선인의 어리석음과 일본의 사악함이 교묘히 맞아떨어지면서 저질러진 어처구니없는 만행이었으며 대만의 무사사건을 연상케 하였다. ‘비겁하고 비천하군. 이래가지고는 구제불능이다. 진재 때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을 무슨 낯짝 치켜들고 비난을 하겠나. 참으로 혐오스럽다!’ 신문을 꾸겨쥐는데 배달된 편지 한 통을 하녀인 하루가 가져왔던 것이다. 편지를 볼 기분도 아니어서 하루에게 차를 끓여오라 이르고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곳에서는 사상자가 있었다는 보도도 없었는데 이건 무슨 미친지랄인가!’ 찬하는 온종일 기분이 언짢아 있었다. 저녁밥을 들 때도 그의 얼굴은 우울해 뵜다. 현재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찬하로 하여금 분개하게 했고 깊은 실망을 갖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양식 있는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다 그랬을 테니가. 그러나 찬하의 감정이 요즘 균형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녁을 끝냈을 때 아내인 노리코가 안색이 좋지 않다, 기분이 안 좋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찬하는 고개만 흔들고 서재로 돌아왔다. 한나절을 내버려두었던 편지를 찬하는 무심히 집어들고 봉함을 돌려보았다. 뜻밖에도 유인실이라는 이름이 정확한 필치로 적혀 있었다. 편지의 발송지는 서울이 아닌 동경이었다. 제례하옵고,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조선생님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선생께서 지장이 없으시면 오는 칠일, 시간을 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히비야 공회당 앞에서 오후 세시부터 네시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못 오셔도 저로서는 하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간단하고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찬하는 왠지 가슴이 철렁했다. 불가피한 사정이라는 말이 갖는 긴박감도 그러했으나 마지막 page 4부 3권 37 에 하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그 말에서 절박한 인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일까?’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실이 관헌에게 쫓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인실은 히비야 공회당 건물 한곁에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찬하를 먼발치로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찬하가 가까이까지가는 동안 줄곧 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오라기 흩트리지 않게 치올려서 빗은 머리를 모아 고무줄로 동여매고 흰 바탕에 회색 물방울 무늬가 있는 헐렁한 원피스를 인실은 입고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찬하가 먼저 인사를 했다. 인실은 잠자코 있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다시 찬하가 말했다. 인실은 웃지 않았다. 고개만 숙여 인사를 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몰라보게 여위어 있었다. 관골은 날카롭게 보였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그늘에 가서, 벤치에 앉을까요?” 하면서 인실은 앞서 걸음을 옮겨놓는다. 여윈 얼굴이며 어깻죽지와는 다르게 헐렁한 원피스 속에서 움직이는 몸은 몹시 비대해 있었다. 찬하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누가 뒤에서 자신의 목을 누르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나!’ 찬하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밴 땀을 닦으며 걷는다. ‘죽일 놈! 지가 감히.’ 했으나 찬하는 이상하게 오가다에 대한 연민을 가슴 뜨겁게 느낀다. 두 사람은 숲 사이에 있는 벤치에 앉는다. 푸른 수목, 수목은 푸르기보다 검게 보였다. 그 속에 있는 인실은 마치 풀물을 들인것처럼 더욱 푸르게 보여, 그것은 찬하의 착각이었지만, 녹색의 여인 같은 느낌을 준다. 소나기가 쏟아질 직전처럼, 번개가 칠 직전처럼 검은 숲속의 공간은 파아랗게 느껴졌고 그 공간에 있는 인실은 page 38 녹색의 여인이었다. “죄송합니다.”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구만리 밖을 바라보기나 하듯 인실이 말했다. “웬일이세요?”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실은 찬하의 목소리를 저울질이나 하듯 동공을 한곳에 모았다. “추악한 모습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동경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온 지 오래 됐습니다.” “못 만나보셨습니까?” 왠지 찬하는 인실이 오가다를 만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 “지금 그 사람 삿포로에 있습니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더군요.” “……” “만나셔야지요. 제가 연락을 해드릴까요?” “아니요.” “……” “저는 그분을 찾아 일본에 온 건 아닙니다.” 먼 곳에 있던 인실의 시선이 돌아와서 자기 발, 하얀 운동화로 옮겨진다.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조선생님께선 아시겠지요.” “……” “우리는 이제 다 끝났습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두렵지도 않습니다. 다만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 “진실이 현실에서는 추악하게 뵈는 것은…… 왜 그럴까요.” 찬하는 인실의 말을 들으면서 도덕과 휴머니즘에 대하여, page 4부 3권 39 ‘네, 다르고말구요. 때론 다를 정도가 아니라 상반되는 거 아닙니까.’ 하던 오가다의 말이 생각났다. “인류가 서로 적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결코 현실에서 놓여날 순 없지만 추악하다는 생각을 마십시오. 우린 다만 소외당할 뿐입니다.” “우리……” 인실은 비로소 찬하가 일본 여자와 결혼한 것을 상기한 것 같았다.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인실씨와 저의 사정이 다르긴 합니다만 미온적인 저로서는 괴로움 같은 것도 뱃멀미하듯이 합니다만 치열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고통도 치열하겠습니다만.” 말은 모두 무의미하고 피상적이었다. 숲 사이로 산책 나온 사람들이 꽤 많이 서성대고 있었다. 비가 오시려는지 날씨는 무더웠고 불어오는 바람도 후텁지근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날개를 치켜들고 열심히 주둥이로 털을 고르고 있었다. ‘임명희…… 임명희 그도 사랑을 하면 인실씨 같은까?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는 않겠지. 왜 나는 그 사람 생각을 또 할까? 정떨어지게 포악하기까지 했던 여자를!’ 찬하는 웅크러드는 마음을 펴듯 어깨를 펴면서 강해진 어세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조선생님.” “네. 말씀하십시오.” “선생님을 만나뵙고자 한 것은 아이 문제 때문입니다.” 순간 인실의 눈은 표독스럽게 빛났다. 찬하는 당황한다. 이미 짐작했던 일이다. 그러나 막상 인실의 입에서 아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것도 주저함이 없이 마치 칼날을 들이대듯, 당황할밖에 없었다. “전 아이를 조선에서 낳고 싶지 않았습니다. 낳아서도 조선으로 page 40 데려가지는 않을 겁니다. 아이는 이곳에 있어야 해요.” 수백 번 수천 번 연습한 대사처럼 인실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다. 얼마 많이, 얼마나 지독하게 수치심을 갈고 갈아서 그 수치심은 완전히 마모되고 말았는가. 인실은 차라리 도도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해합니다.” 오히려 찬하 쪽에서 숨이 가빴다. 속으론 이런 빌어먹을! 하면서도 허둥지둥 다시 말했다. “하면은 인실씨는 가신다 그 말씀입니까? 아이는 두고.” “만주, 아니면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처럼 말입니다. 소외된 채 살아볼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그 사람하고 결혼해서……” 찬하의 목소리는 차츰 소곤거리듯 낮아졌다. 한동안 인실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그런 자세는 아니었다. 멍청히,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듯이. 그러다가 말을 했다. “우리는 끝났습니다.” “이 사실을 오기다상이 압니까?” “아니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상의한 뒤 두 분이 끝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는데 갑자기 인실의 목소리가 잠긴다. “저는 그분한테 생명보다 중한 것을 주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줄 것이 없어요.” 생명보다 중한 것,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찬하는 안다. 조국에 헌신할 것을 맹서한 여자가 그 조국에 반역 행위를 했다는 뜻이 더욱 깊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 page 4부 3권 41 하고 찬하는 “이제는 그 사람한테 받으십시오.” 하고 말했던 것이다. “제가 설명을 해야만 아시겠습니까? 하기는 선생님이 알아야 할 의무는 없는 거지요. 저는 울부짖었습니다. 우리의 진실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저의 행동은 마땅히 돌로 쳐죽여야 할 배신인 것을 저 자신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어느것에도 승복 안 할 결심입니다. 저는 새롭게 시작할 거예요. 그렇습니다. 저는 속죄할 그 아무것도 없고 인간을 몰아넣는 그 비정한 것과 싸울 거예요.” 잠긴 목소리였으나 말은 여전히 또박또박했다. 그러나 인실의 내부는 거의 광란 상태인 것을 찬하는 느꼈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미쳤는지 몰라요. 결국, 그렇지요. 아이는 일본에 있어야 합니다. 오가다 지로의 자식도 유인실의 자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낳은 생명일 뿐이예요.” “인실씨!” “……” “그 사람한테 갑시다. 우리 가서 의논합시다.” “그럴 생각이면 왜 제가 조선생님을 만나뵙자고 했겠습니까? 전, 전 아이를 낳은 후의 방도가 막연합니다. 길가에 버릴 수도 없고, 병원에서도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조선생님께서 주선해주십시오, 아일 길러줄 곳을.” 인실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왜 오가다상하고 의논을 안 하려 합니까? 그는 아이의 아버집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건 안 돼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왜지요? 왜 그래야 합니까?” 찬하는 떼를 쓰듯 말했다. “우린 끝났어요. 절대로 다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아이의 아버지도, 아이의 엄마도 아, 아니어야…… 절대로 몰라야 합니다.” page 42 흐느껴 운다. 작은 새 한 마리같이 흐느낀다. “자신을 다 버리고, 자신을 다, 송두리째 주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할 것 가, 같았어요. 언제까지나 그 사람 생각할 것 같았어요. 그 사람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이런 결과가 나타날 것은 모, 몰랐지요.” 더욱 흐느낀다.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울음 그치시오! 자아 울음 그치시오!” 찬하는 분노를 느끼며 소리치다시피 했다. 찬하 자신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비극에 자신도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들 눈에 이들은 사연 많은 연인들로 비쳤을 것이다. 그 후 호리가와의 시영 주택 이층에 방을 하나 빌려 있는 인실을 찬하가 찾아갈 때 그때마다 사연 많은 남녀로 오해를 받게 되었다. 누군가가 찬하에게 당신이 아이 아버지요? 당신이 그 여자 남편이오? 애인이오? 하고 물어준다면 모를까, 찬하는 그 오해를 변명할 길이 없었다. 저희들 마음대로 애인이다, 아이아비다, 아니 숨겨놓은 여자다, 그런 식으로 상상하는데,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뭐라 하겠는가. 등골에 땀이 흐를 만큼 곤욕스러울 뿐이었다. 찬하는 현재 자신의 역할을 아내인 노리코에게 떠넘길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인실이 어디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버릴 것만 같아서 생각을 고쳐먹은 일이 있었다. 오늘도 찬하는 그 곤욕스런 방문을 감행하기 위해 백화점에서 과일 바구니를 하나 사들었다. 백화점을 나서려는데 “어머! 산카상!” 여자가 물었다. “아아.” 찬하는 걸음을 멈추며 엉거주춤 인사를 한다. “오래간만이에요.” “그렇군요.” 여자는 세련된 양장이었고 나이는 노리코보다 서너 살 위, 노리 page 4부 3권 43 코의 외사촌인 노다 마리코다. “과일 바구니 들고, 어디 병문안?” “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바쁘지 않으면 커피 한잔 마시지 않겠어요?” “그러지요.” 두 사람은 백화점 가까운 끽다점으로 들어간다. “노리코랑 아이랑 모두 건강해요?” 차를 마시며 마리코는 안부를 묻는다. “괜찮습니다.” “이런 우연 아니면 산카상 만나보기 힘드네요.” “원래 게을러서요.” “귀족이라 우릴 얕보는 거 아닌가요.” “별말씀을, 노다상이 누군데 얕보겠습니까.” 마리코의 남편은 상당한 고급 관리다. “그래 지금은 뭘 하세요?” “집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지요.” “하기야 산카사은 부자니까, 집에서 학문을 연구할 수도 있지요.” “번역 따위가 연굽니까?” 찬하는 웃는다. “그것도 일종의 영문학 연구 아니겠어요?” “글쎄요……” “학교는 왜 그만두었지요?” “오래된 얘긴데요, 있으면 뭐합니까?” “왜?” “일본에서 중학의 교사 자리 하나도 조선인에게 내주지 않는데 대학의 강좌를 얻는다는 건 미친 사람의 꿈이겠지요.” “아아, 그건 심하군. 말도 안 돼, 그건 옳지 않아요.” “할 수 없지요. 그런 것 모르셨습니까?” 마리코는 좀 당황하는 것 같았다. page 44 “하지만 산카상은 다르지 않아요?” “다를 것 없어요. 저의 국적은 엄연히 조선이니까요.” 순간 마리코의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나도 조선의 식민지 정책엔 비판적이예요. 민족성이 어떻다는 둥하는 말에 대해서도 그건 일본인의 편견이라 했지요. 하지만 지난 칠월에 있었던 지나인 학살을 신문지상에서 보고 놀랬어요. 산카상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천인공노할 만행이지요.” “정말 야만적이었어요. 난 신문 보고 떨었어요. 얼마나 놀랬는지.” “무지몽매한 소치지요.” “네. 맞아요. 평소 내 인식도 싹 달라지더군. 이젠 일본인의 편견이란 말은 못하겠지요?” “그렇습니까?” 찬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요. 우리도 일본인에 대한 것이 편견이라 하여 나무라던 사람에게 얼굴을 치켜들 수 없게 됐습니다. 이제는 진재 때 조선인 학살에 대해 말 못하게 됐지요.” “어머! 산카상도 참 짓궂은 데가 있네요.” 했으나 마리코의 얼굴에는 완전히 불쾌한 빛이 나타났다. 찬하는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이제 실례해야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끽다점을 나서는 찬하는 구역질을 느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차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마리코 언닌 좀 대샤바리예요.’ 비교적 남의 흉을 보지 않는 노리코가 그런 말을 했었다. 대샤바리란 잘난 체, 남의 앞에서 나서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차에서 내려 시영 주택 어귀에 들어서면서 찬하는 ‘어째 마음이 요즘에 자꾸 격해지는 걸까. 뭔가 치사스러워. 왜놈한테 동냥이나 한 것 같은 기분이야. 오늘은 두 번 다시 안 오겠다. page 4부 3권 45 아이 낳기까지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 그 따위 생각은 말자. 인실씨는 우리 조선 사람들의 누이가 아닌가.’ 거북한 인실과의 대면은 그랬고 주위 눈빛도 피부에 닿는 가시같았어 찬하는 방문을 하고 집을 나섰을 때는 언제나 다시 안 오겠다. 아일 낳았다는 기별이 있기까지는 안 올 것이다, 그렇게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면 그는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실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 때문이다. “형체도 남기지 앟는 파괴,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에요. 어느 곳 어느 때든 그것만은 저의 권리고 자유니까요.” 그 말을 했을 때 찬하는 인실이 미웠다. 그러나 그에게 눌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 무심결에 튀어나왔을 뿐 겁을 주기 위해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찬하는 여러 번 삿포로에 있는 오가다에게 연락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자신이 떠맡은 일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리코에게 떠넘기려다 말았던 것처럼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실이 오가다를 만나게 된다면 스스로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찬하는 배짱이 두둑한 편은 아니었지만 단호하고 냉정한 일면이 있었고 결코 허약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러나 히비야 공원에서 인실을 만나는 순간 그들의 비극에 사로잡힌 것은 연민 때문이겠으나 한편 인실에 투영된 자신을 보았을지 모르고 은둔에 가까운 동경 생활의 숨막히는 자기 폐쇄에서 출구를 찾는 몸부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집주인 여자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속발에 누리끼한 빗을 꽂고 길쭉한 여자의 얼굴, 입 언저리에 검정 사마귀가 있었다. 찬하는 그 사마귀를 볼 때마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여자는, “오십시오. 이번에는 좀 늦었군요.” 하며 묘하게 웃었다. 교태 같기도 했고 비웃음 같기도 했다. 매번 겪게 되는 일이었지만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물론 여자는 인실 page 46 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찾아오는 남자에 대하여. 그러나 아는 사람, 그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인실은 여자 호기심을 채워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주변에 신경을 쓸 그럴 여유도 없었다. 사실 아는 사람이라는 이상의 할말도 없었던 것이다. “올라가보십시오.” “네.” “젊은 여자가 혼자서, 참 안됐어요.” 예의 바르고 점잖고 귀공자 같은 찬하, 어떤 뜻에선 귀공자이기도 한 조찬하에 대하여 여자는 항상 정중하기는 했었다. “여러 가지로 신세가 많습니다.” “홀몸이 아니니까 저도 마음이 쓰이는 거지요.”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잘 닦여져서 미끄러운 계단을 밟으며 올라간다. 인실의 신상에 불안을 느낄 때 계단의 수는 많은 것 같았고 거북한 대면을 생각할 때 계단의 수는 너무 적은 것 같았다. 방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방문을 두드린다. “네” “조찬합니다.” “네.” 언제나처럼 인실은 무릎을 모으고 등은 벽에 기대이듯 앉아 있었다. 그는 숨이 찬 듯했고 허리 둘레는 더 커졌으나 반대로 팔과 어깻죽지는 더욱 여위어 보였다. “어떻습니까?” 과일 바구니를 한 곁에 놓아두고 자리에 앉으며 찬하는 또 물었다. “괜찮습니까?” 처음 찬하가 찾아왔을 때 인실은, “이제 오시지 마십시오.” 했다. 그 말은 찬하가 찾아갈 때마다 잊지 않고 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인실은 그 말을 안 하게 되었다. 어차피 찬하는 올 것이기 때문에 그랬는지 자기 생각에 몰두하여 사소한 일은 모두 잊고 있어 그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page 4부 3권 47 “앞으로 츠키소이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츠키소이란 병자를 돌보아주는 직업인으로, 간호원하고는 달라서 허드렛일까지 다 하는 사람이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필요할 때 여기 아주머니한테 부탁하겠어요.” “내일이라도, 제가 한 사람 보내드릴까요?” “아닙니다. 아직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식사 준비까지 하시려면…… 그리고 방도 어디 아래층으로 옮기든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인실은 순간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사양이 아닌, 제발 날 가만히 내버려두어 달라는 부탁인 것이었다. 일어서야 마땅한 것인데 찬하는 몸이 붙은 것처럼 일어설 수가 없었다. 혼자 있고 싶어하는 인실이, 찬하 역시 숨이 막힐 것 같은 장소에게 피해 달아나고 싶었는데…… 역시 연민이었다. 그것은 찬하 가슴 밑바닥에 우러나느 연민 때문이었다. 찬하는 지금 자기집 뜰에 한창인 수국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축축한 음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수국, 병자 방에는 꽂지 않는다는 그 수국이 녹색으로 변했을 때, 찬하는 히비야 공원에서 녹색의 여인으로 착각한 인실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이다. 서로 멍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다. 인실은 찬하가 있는 것도 잊은 듯했다. 찬하는 이 막연한 침묵을 깰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실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가, 서울의 가족들에게는 해방이라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한 얘기였지만 다시 물어볼 수는 있었다. 오가다에 관한 얘기를 한 번쯤 더 꺼내어 심경의 변화를 촉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찬하는 안다, 인실이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태어날 아이의 문제인 것이다. 인실은 찬하가 나타날 때마다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상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찬하에게는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없었다. 아니 방안이 없었다기보다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판단을 page 48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옳고, 그보다는 그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가끔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사도코로 보내면 어떨까. 그러나 그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사도코란 시골 가정에 양육비를 주고 아이를 맡기는 것이었는데, 일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엄마가 약하다든지 병들어다든지 아이가 많다든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아이를 시골 가정에다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도 유모를 들이는 대신 그런 방법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있었다. 찬하가 선뜻 그 말을 하고 나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는 시간을 기다리며 인실의 심경에 변화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모른다. ‘세상을 등지고 어느 산골에 가서 남 몰래 두 사람이 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민족이라는 굴레 같은 것 벗어던져 버리고 계급이라는 그 따위 남의 일 관여치 말고…… 민족이란 도시 무엇인가. 이것에는 다분히 허식이 있다. 자애하는 이기심도 분명히 있다, 침해하는 쪽이나 침해당하는 쪽이나.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민족이란…… 결국 필요에 의해 흩어지지 않고 모인 집단, 무리를 짓는 동물과 같이 생존을 위한 집단이 아닌가. 다만 좀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인간은 본능을 사랑이라 하고, 외로움에서 필사적으로 도주하려는 것을 사랑이라 하고 진실이라고도 한다. 이런 불안정한 인간들을 수용한 집단은 조국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한 핏줄이라는 끈으로 묶어놓고 일방통행을 한다. 조국! 핏줄! 그것은 절대적인 것인가? 항구불멸의 것으로 이탈하면 안 되는 것인가? 생존을 위한 공동체, 그것은 과연 공동체였던가? 민족을, 국가를, 그리고 소수를 위해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 밑깔개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 대하여 민족적인 분노를 느낀 것은 그것은 감정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그것처럼, 거의 이성은 아니다. 그러나 저 여자의 경우는 감정보다 이성이 더 강한 것 같다. 만일 동족끼리 불륜으로 사생아를 낳았다면 저 여자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 그는 수모를 감내하면서 아이를 길렀을 거야. 버리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남자와 여자, page 4부 3권 49 그리고 태어날 또 하나의 생명, 이들의 결합을 저해하는 것은 지금 민족이라는 명제다. 큰 것은 항상 작은 것을 말살하고 먹어치운다. 이 정당성, 이 논리는 끝이 없는 것일까? 끝이 없는 것이다! 끝이없는……’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리고 호주머니 속에서 휴지를 꺼내어 담뱃재를 턴다. 담뱃재를 털면서 찬하는 인실을 빌려 현재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끄러움 같기도 하고 아픔 같기도 한 것이 잠시 스쳤으나 이내 가슴이 답답했다. 사방 벽에 주먹질하지만 뜷고 나갈 길이 없는 막막함. 삶 자체에 대하여, 진실이나 진리에 대하여 어느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막막함, 절망을 느낀다. 방안은 밝은 편이었다. 육조 다다미방에는 하다 못해 벽면에 옷가지 하나 걸린 게 없었다. 방안은 이사간 뒤처럼 비어 있었다. 방 길이의 절반쯤 오시이래(벽장)가 있었는데 아마 모든 소지품은 그 속에 넣어둔 모양이다. 유리창 밖의 난간에 손수건 두 장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유리창 밖의 하늘에는 구름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미풍이 이따금 불어와서 후덥한 몸과 마음을 식혀주곤 한다. ‘일본 여자들에겐 그런 갈등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노리코의 경우도 거의 그것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하기는 일본 여자하고 사는 조선 남자는 더러 있지만 일본 남자와 조선 여자가 함께 사는 그런 것은 본 일이 없으니까. 조선 여자는 아예 쇠대문을 내려놓고, 그 쇠대문을 뚫고 나왔으니 저 여자는 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지. 그런 의식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모화 사상이 지배적이던 시절에도 여자가 이민족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그들은 고국과 절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실씨도 만주나 중국으로 가겠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영원히 고국에는 아니 오겠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그 의식의 벽에 갇힌 옛날의 조선 여인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여자들, 인실씨는 그들과 조금도 달라진 여자가 아니더란 말인가? 오히려 그들보 page 50 다 더 철저하게 물론 정조관도 그러했겠지만 반일 사상의 불덩이 같았던 여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그의 말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참으로 엄청난 이율배반이다. 그는 적어도 사회주의에 물든 여자가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관습적 의식과 사상에 다소는 간격이 있게 마련이지만 인실씨는 어느 측면에서도 그 도랑이 너무 깊고 넓다. 그것은 극복되어야 해. 모순이야, 모순. 자신을 찢어발기는 결과밖에는 없다. 진실, 진리? 그것은 과연 옳기만 한가? 선, 절대 선일 수만은 없다. 인간이 죽는 것 하나의 진실이다. 그 진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쫓기며 간다. 하면은 그것을 극복하는 것밖에 인간은 달리 길이 없는 것이다. 흥!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게지? 밥 세 끼 먹고 할 일 없는 돼지가 사변의 노예가 될 자격이나 있는가? 관두자, 관두어. 끝이 없다.’ 한 그릇의 밥보다 상아탑이 그리 값진 것은 아니야 하던 어느 친구의 말이 찬하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그것 돼지의 발상이다.’ 어느 친구가 그 말에 응수했다. ‘뭐 별다를 게 없네 이 친구야. 자네 생각만큼 인간은 위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위대하다는 것은 인간의 자화자찬인 게야. 누구 심판관 있어? 신이 모습을 드러내어야 진상을 알 게 아니냐 말이다. 결국 인간도 밥그릇 때문에 사워온 거 아니냐, 내 말은 그거야.’ 인실은 망연한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형무소에 있을 때 감방안에서 인실은 저런 모습은 온종일 앉아 있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찬하는 일어사야 한다. 이제 가야지 하면서도 방을 나서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입 언저리에 가만 사마귀가 있는 집주인여자와 부딪칠 것이 지겨웠다. 어쩌면 인실이 따로, 자기 따로의 뭔지 모를 골똘한 시간에 스스로 얽매여 있는 것을 찬하는 좋아했는지 모른다. ‘오가다는 인실씨를 알고부터 코스모폴리탄인가 뭔가, 그렇게 됐을 page 4부 3권 51 까? 아니면 그 사상 때문에 저 여잘 사랑하게 됐을까? 이건 또 뭐야? 별 시시한 생각을 다 하는군. 오가다는 다만 여자를 사랑했고 인실씨는 다만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게야. 도시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 도시 이 여자는 누구인가? 조선의 잔다르크라도 된단 말인가? 그런 거창한 여자는 아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연소시키며 자기 완성을 꾀하려는 것인가? 그것 역시 너무 거창하다. 이 여자는 자신 속에 타인과 자신이 공존하는 그런 박애주의? 그것도 물론 아니다. 이 여잔 그런 위선자가 되기엔 너무 말뚱말뚱하다. 조선의 여자가 갇혀 있었던 곳에서 빠져나와 가장 첨단의 흐름속에 뛰어들어 그 두 개의 이빨 속에 생각과 몸이 짓이겨지는, 다만 그런 희생자에 불과한 걸가? 뭔가 이 여자는 정리를 해야 해. 어느 것이든 하나를 극복해야 해. 개미 쳇바퀴 돌듯 나는 언제까지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헛된 자문자답, 끝나지도 않을 일, 이건 망상이다. 끝없는 망상이다.’ 거리 쪽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각에 두부장수가 다니지도 않을 터인데 찬하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종소리는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럼.” 하다가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서려는데, “고맙습니다.” 인실의 말에 찬하는 놀라는 듯 돌아본다. “아,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찬하는 밖으로 나왔다. 죄송하다는 말은 여러 번 했으나 인실이 고맙다는 말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찬하가 돌아가고 난 뒤 인실은 여전히 벽에 기대이듯 하고 앉아서 손수건 두 장이 널려 있는 난간 밖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하늘과 구름과 손수건뿐인 공간, 그 공간에 이따금 새가 질러가곤 했다. 가라앉은 시간이다. 의식 속에서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질러도 page 52 도저히 가라앉은 시간에서 일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같이, 덫에 걸린 짐승같이, 감겨오는 시간의 실구리, 번데기가 되고 말 것 같다. 인실은 그것을 떠밀어내듯 몸짓을 하며 일어섰다. 일어선 뒤에도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벽장 문을 열고 트렁크 위에 개켜놓은 옷을 꺼내어 갈아입는다. 흰바탕에 회색 물방울 무늬의 헐렁한 그 원피스다. 머리를 매만지고 왕골로 만든 여름용 손가방을 찾아든 인실은 그 속에 지갑을 넣고 손수건을 넣고 책보를 접어서 넣는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방을 나간다. 예정일은 넉넉하게 한 달은 남아 있었다. 진작부터 배를 싸매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임신부임을 알 수는 있었지만 배가 남산만 하지는 않았다. 전차를 타고 내리고 하면서 인실이 간 곳은 신주쿠에 있는 미츠코시 백화점이었다. 그는 백화점을 배회하다가 양말 한 켤레를 샀고, 또 몇 바퀴를 돌아다니다 손수건 한 장을 샀고, 한참 후 그는 다시 갓난아이의 모자를 하나 샀다. 그러나 그는 물건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온 것은 아니었다. 물건은 목적도 의미도 없이, 배회하는 장소에 사용료를 지불하듯 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호리가와의 그 이층 방에는 혼자 있어도 늘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방안의 물건을 모조리 벽장 속에 넣어버리고 빈방같이 했지만 여전히 옆에 누가 있는 것만 같았다. 여름이엉서 다소 줄기는 했지만 역시 백화점 안은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인파 속을 천천히 누비고 다니면 인실은 마치 무인지경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는 장소에서 탈출하기 위해, 정지된 시간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외출을 했다. 지하철을 타고 아사쿠사에서 내려 아사쿠사 일ㄹ대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고, 어떤 때는 마루비루(마루베니 빌딩)가 있는 오피스가들 돌아다니기도 했다. 전차를 타고 가다가 아무 곳에서나 내려서 한없이 걷기도 했다. 동경에 왔을 그 무렵, 그때는 지금같이 몸이 무겁지 않았기 때문에 더 멀리까지 가서 쏘다녔다. 교토에도 갔었고 나라에도 갔었다. 아시노고(하코네 산에 있는 호 page 4부 3권 53 수)에서 청록색 물빛을 언제가지나 내려다보고 서 있었으며 요코하마 부둣가에까지 가서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항구에는 어마어마한 배들이 떠 있었다. 상선이 있었고 여객선도 있었다. 인실은 작은 항구, 적옥이란 빨간 네온의 카페가 있던 그밤의 항구를 생각하고 검정옷에 창백했던 명희를 생각햇다. 기차를 타고 전차를 타고, 마치 피리어드를 찍는 것처럼 레일을 지나가는 진동의 하나하나, 그것은 일각일각 시간에서 탈출하고 있다는 실감이었다. 걷는 것도 그러했다. 한발한발 내디딜 때마다 시간을 잡아먹으며 앞을 향해, 아무튼 어느 정거장이든 내리게 될 것이라는, 희미하지만 그것은 희망이었다. 얼마간의 안도감이기도 했다. 길고 긴 동경 체류, 기간은 몇 개월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인실에게는 십 년 백 년의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백화점에서 나왔다. 해가 떨어지고 밖은 황혼이었다. 해 지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거리는 사람에 밀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네온사인과 불빛, 거대한 도시는 무지개에 싸인 듯 아슴아슴하다가 황혼이 차츰 짙어지는 데 따라 찬란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완숙한 과일의 방향과도 같고 어쩌면 부패하기 시작한 향기와도 같은 도시의 입김을 풍기면서,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금빛 황혼의 사람 같았다. 설레이면서 밤을 맞이할 차비를 하고 꿈꾸듯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기쿠치 간의 진주부인을 소망하는 여자가 걸어가고, 베를렌의 번역시에 홀린 청년이 걸어가고 달콤한 허무주의 달콤한 비관주의, 도시의 황혼은 그리고 여름의 황혼은 미풍에 흔들리는 가로수와 더불어 달콤하고 슬프게 사람들을 매혹한다. 도시의 애수, 영광과 자부와 그리고 착각, 어둠이 밀려오면서 네온사인은 한결 선명해진다. 별보다 가깝고 별보다 미려하고, 나폴레옹도 아이스크림의 맛은 모를 것이다! 새삼 그 말을 상기하게 하는 네온사인. 인실은 가로수 밑에 서 있었다. 모던하고 스마트하고 엑조틱하고, 비록 영화 간판 같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만끽하고 지향하는 무리와는 동떨어져서 착각이나 환상의 여지가 없는 부른 배를 안고 인실은 동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page 54 밤의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이 군사, 토목, 법제에 주력하면서 정복자의 면모를 약여케 한 바 있었고 특히 토목은 그 규모가 거대 웅장하여 대로마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사위를 진경케 했듯이 관동대진재 이후 일본의 토목은 실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섬나라 일본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대국 청나라를 누르고 노랑머리 파란눈의 외경하여 마지 않는 배인의 나라 러시아르 견제하고 아시아에서 강국으로 도약, 천재일우의 시기를 맞이한 그들, 그들이 즐겨 썼던 촌스런 말 중에 일등 국민이라는 것이 있는데, 소위 일등 국민에 걸맞게, 아니 그 이상으로 외모를 갖추어야겠다는 욕망이야 새삼 말할 나위 없는 일, 그야말로 미증유의 마천룬들 아니 세우고 싶었겠는가. 게다짝 시고 안짱걸음 걸으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 살피듯 땅을 보고 걷는 그들 습성일지라도 새로운 것이면 모조리, 큰 것이면 모조리 개미떼같이 달려들어 건설한 도시, 농염한 시다마치 무스메(에도에 사는 하층민의 딸)나 규범에 투철한 하가쿠레부시(충성을 맹서한 무사) 같은 존재는 잔잔바라바라(칼싸움) 영화라는 무대가 있기는 하되 안방에 모셔진 불단처럼 에도(동경의 옛 이름)의 자취를 걷어낸 동경에는 파리가 있었고, 런던·뉴욕도 있었다. 루바시카의 모스크바도 있었다. 유행이라면 무엇이든지 사회 전반에서 현기증 나게 탈바꿈을 거듭하는데, 환락가·유흥가·연예계는 구미를 뺨칠 만큼 개방적이며, 성냥갑이나 포스터의 나체 그림은 그들의 전통인 남녀 혼욕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에로구로(선정적이고 괴기적인)의 엔본(원본: 값싼 책)이 홍수같이 쏟아져나오고 신바시의 게이샤(기생)가 사교댄스를 추는 것도 꽤 오랜 일이며, 졸부의 부인들은 골프를 치고, 하기는 도시건설은 진재 이전에도 샐러리맨 일만 명을 수용하고 하루 출입자가 삼만이 넘는다는 매머드 마루비루를 세웠으니 일본인들의 팽창주의거대 일변도, 물론 그것은 도시나 문물에 한한 것은 아니었고 군국주의를 관통하는 주된 흐름인 동시에 세계로 뻗으려는 그들의 야망이었다. 한편 노 page 4부 3권 55 가다 죽이는 데 아이쿠치(비수)가 필요 없다. 즉, 장마가 계속되면 노가다는 비수 없이도 굶어죽게 돼 있다는 뜻인데, 도시 뒤켠에는 그같은 계층이 있고 농촌에서는 소작료가 밀렸다 하여 농가의 농기구에 빨간 딱지가 붙는 현실, 정쟁이 있고 암살이 있고 쿠데타의 기도가 있고 계급투쟁·노동쟁의·여성해방의 운동이 있고, 노동자 열 명의 이십 년 월급조다 훨신 많은 돈을 방 하나 치장하는데 스는 나리킨(성금: 벼락부자)이 있고,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일본의 얼굴이 뿐이다. 분을 바르건 성형수술을 하건, 보기 흉한 종기에는 반창고를 붙이건 잘라내버리건 그것은 얼굴에 다름없다. 천하무적의 군비, 일본의 심장은 그것으로 뛰고 있는 것이다.『삼국유사』에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벼랑의 철쭉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읊은 「헌화가」, 겨울 참나무 같은 노인의 무사한 멋에서 연상되는 것은 출진하는 남편 투구에 향을 사르는 일본 여인이다. 생과 사를 초월한 멋에 얼핏 공통점이 있는 듯싶지만 우리는 향을 사르는 여인에게서 전쟁의 미학을 보는 것이다. 아무튼 모집으로 끌려온 조선의 수많은 백성이 무서운 채직 아래 이승과 저승을 헤맬 때, 물론 그들은 동경의 찬란한 불빛을 알 턱이 없고 일본의 힘을 과시하는 도시를 본 적도 없고 환락가의 지분 짙은 여자웃음 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 오지의 탄광촌 바라크에서 꿈도 없는 지친 잠자리의 그들은 일본의 힘을 채찍에서 느끼고 목검에서 느낄 뿐 더 이상 죽여야만 할 기도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동경 유학생들의 동경을 바라보는 심회는 어떠했을까? 모집으로 끌려온 노동자와 동경 유학생, 사정이 다르다. 사정이 다른 정도가아니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지금은 여름방학이어서 대부분 조선으로 돌아갔을 테지만 더러 남아 있는 사람 중에는 적지 심장부 동경 거리에서 휘청거리고 있을 유학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력이건 두뇌건 혹은 문벌이건, 그들은 선택받아 이곳에 왔다. 희소가치의 존재로서도 그들의 자긍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긍심은 동경에서 온전했을까? 이조 오백 년 차별 대우를 뼛속깊이 맛보아야 했던 서출들처럼 이들은 동경 땅에서 뼈에 사무치 page 56 는 차별 대우를 어떻게 감내했을까. 사사건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일각일각 부딪치는 것은 내 땅을 빼앗고, 내 존엄성을 빼앗고, 뿌리를 뽑고 짓밟는 그들 일본의 실상을 동경 유학생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그 힘에 경도되어 칼을 꺾으며 경의를 표했을까? 거대한 힘에 공포를 느꼈을까? 아니면 이를 갈고 증오했을까? 부러움, 모멸감, 내일을 기한 인내심? 어쨌거나 명분에서 따지자면 그들은 민족에 대한 배신, 내 백성에 등을 돌리고 왔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으리라. 그들의 대부분이 출세 지향이었으니까. 일본 치하의 출세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조선에서 종래의 지식인, 지도적인 지식인이었던 선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 자리를 이어받을 동경유학생들, 그들의 갈등과 고뇌는 개인적으로 비극이지만 그것은 또 조선 민족의 비극이다. 합리주의적 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묻혀올 일본의 가치관이 역사를 난도질하고 민족정신을 파괴할 위험 부담은 심각하다. 그 맥락은 후일 오랫동안 스며들어 자기 부정의 자해 현상으로 조선 백성은 시달리게 될 것이다. 사실 엽전이라는 자학은 유학생 사이에 팽배해 있고, 생업이 없이도 살 만한 계층에서는 쉽사리 댄디즘의 무풍지대로 도망치고 학문은 어디 산 홍차, 어디 산 양복지의 값어치로 전락했다. 또한 어느 무리는 반일의 거점을 사회주의로 찾을 수밖에 없었고, 또한 어느 무리는 계몽주의에 의거하여 기독교와 연합하면서 우리것을 파괴하는데, 그것은 실로 일본이 바라는 바이다. 또 이들은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어느 무리는 미래의 관직을 꿈꾸며 육법전서를 맹렬히 들이파면서 기회 불균등을 한탄한다. 동경 거리는 아니 신주쿠의 거리는 이제 어두워졌다. 인실은 걸음을 옮긴다. 다리가 천근같이 무거웠다. 서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하였던 육체가 갑자기 그에게 압박을 가했다. 아무곳이든 주저앉고 싶었다.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검정 바탕에 희게 뽑은 우동이란 글시의 노랜(상점 입구의 처마 끝이나 점두에 치는 막)이 눈에 띄었다. 그곳으로 들어간 인실은 자리에 앉는다. 빈 자리가 더러 있었지만 손님은 많은 편이었다. 대개가 젊은 사람들이었다. 우동 한 page 4부 3권 57 그릇을 시킨 인실은 깍지낀 손 위에 턱을 올려놓고 멍하니 벽면을 바라본다. “자아 드십시오.”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우동 그릇을 탁자 위에 놓으며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고마워요.” 무뚝뚝하고 드센 조선 사람과 달리 일본의 상인이나 음식점 종업원은 매우 친절하고 공손한 것이 특성이다. 손님 역시 그런 친절에 대하여 고맙다고 하는 것은 관례다. 우동에서 파 냄새 어묵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인실은 다리가 무거웠을 분만 아니라 몹시 시장했다. 아침에 찬밥을 물에 말아서 단무지 몇 쪽하고 서너 술 먹는 둥 마는 둥 했기 때문에 우동을 내려다보는 것이 조금은 행복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는 선뜻 젓가락을 들지 못한다. 전에는 그랬었다. 동경 와서 공부할 무렵, 혼자 밥을 먹고 있노라면 괜히 코허리가 시큰해지며 뼈에 사무치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곤 했었다. 강한 성격에 좀처럼 그런 감정에 빠지는 일이 없었는데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면 겨울 벌판을 걷듯 외로워지는 것이었다. 그 후 형무소에 있을 때 인실은 음식을 대하면 외로운 것과는 사뭇 다른, 먹는 행위 자체가 비천하기 그지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수구를 들락거리며 밥풀을 주워먹는 한 마리 쥐 같았고 자신이 쓰레기가 되어간다는 기분이었다. 고문을 당하고 왜경한테 심한 욕설을 들었을 때도 인실은 자신이 비천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동경에 와서 거처를 정하고…… 비천하다든가 외롭다든가, 그것이 모두 감정의 사치라는 것을 인실은 깨달았다. 밥을 먹는다든가 몇 끼를 굶는다든가, 그런 일들은 그냥 무의식으로 흘러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의식, 그것에는 얼마간의 자학도 있었으리라. 인실은 천천히 우동을 먹기 시작한다. “그거 다 뻔한 얘기야.”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조선말이었다. “오나가나 문제는 문제야.” page 58 그러고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인실은 관심도 없었다. 한참 후 그들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사람들의 웃음 소리였다. 인실은 젓가락을 놓았다. 절차 하나가 끝나 홀가분한 기분이다. 그새 손님들은 많이 빠져나갔는가 가게 안이 넓어 보였다. 앞치마 두른 남자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인실은 좀처럼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등뒤에서 조선말로 얘기하던 남자, 청년들이 일어서는 기척이다. 그들은 인실에게 등을 보인 모습으로 우동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흰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인실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학생 중 한 사람이 돌아보았다. 순간 인실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환국이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듯 그러나 그는 급히 인실에게 다가왔다. “아주머니!” 환국은 저도 모르게 인실의 팔을 잡았다. 그는 인실을 보고 놀랐다기보다 인실의 임신한 모습에 놀랐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팔을 잡은 것은 인실의 위태로운 모습 탓이었다. “이 팔 놔요.” 인실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우동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간다. 결코 사람을 잘못 본 것도 착각도 아니라고 환국은 생각했다. 그는 똑똑히 조선말로 이 팔 놔요 했던 것이다. page 4부 3권 59 06장 영광의 부상 이리저리 뒤치락거리며 잠을 청했으나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환국은 일어나 앉았다. 담배를 붙여물고 보다만 화집을 끌어당겨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들여다본다. 현란한 꿈 같은 색채의 세계, 환국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이 좋았다. 칸딘스키가 추상화의 이론가라는 것은 그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 page 4부 3권 59 만 그의 초기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주변에 별로 없는 것같았다. 사철 눈과 얼음에 덮여 있을 것 같고, 색채가 빈곤할 것만 같은 러시아에서 어떻게 현란한 이런 색채를 빚어내었는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볼 때마다 환국은 신비스러움과 동경을 느끼는 것이었다. 친구 중에는 예술 자체에 대한 것보다 시인 에세닌과 무희 덩컨과 무회 덩컨과의 연애에 흥미를 갖듯, 칸딘스키와 니나와의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환국은 어쩐지 그것이 역겨웠다. 속물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여전히 잠은 올 것 같지 않다. 밤은 깊어가는데, 캔버스 앞에 서본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쳐보듯 서 있다가 나이프로 물감을 이겨 캔버스에 찍어 발라본다. 오랫동안 그는 그러고 있었다. 결국 새벽녘에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환국은 겨우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창문이 훤했다. 비는 멎었고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새벽에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밤을 꼬박 지샐 뻔했다. 장지문은 열려진 채, 복도 너머 유리문도 열려진 채였고, 모기향은 모두 재가 되어 토막토막 접시에 떨어져 있었다. 뒤뜰은 여남은 평쯤 될는지, 하숙집 노인이 잘가꾼 수목은 싱싱했다. 이끼 낀 돌도 파아랗게 살아나 시원해 보였다. 수목에 맺힌 물방우링 햇빛에 반짝이곤 한다. 비가 멎은 지는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다. 물받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똑! 똑! 들려왔다.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환국은 담배를 붙여물면서 재떨이를 끌어당긴다. 계속 뭔가에 의해 강타를 당하는 느낌이다. ‘그럴 수가 잇나, 그럴 수는 없다!’ 형용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 치민다. 이성으로는 다스려지지 않는, 왜 그런가조차 알 수 없는 기분이다. 이 팔 놔요, 그것은 결코 유인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유인실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환국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끔찍한 일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 끔찍한 일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인실의 임신과 관계가 있었다. 이 팔 놔요, 비정한 그 목소리는 임신에 얽힌 어떤 사정 때문일 것이라는 추적, 그럼에도 불구하 page 60 고 환국은 궁금증이나 걱정보다 강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인실아주머니의 배가 불러야 했나!’ 인실은 결혼을 해도 안 될 사람이요, 아이를 낳아서도 안 될 사람처럼, 그럿은 기정사실이었던 것처럼, 신성불가침의 여인으로 생각했던 것을 환국은 그것이 깨어지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풋사랑이라고나 할까, 청춘의 상흔이라고 해야 할까, 양소림의 모습과 손등의 그 혹은 연민과 혐오감과 자책감으로 환국의 가슴속에 아직 남아 있다. 박외과 의원에 있던 허정윤가 결혼하여 딸인지 아들이닞 아이들 낳았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양소림을 생각할 때마다 환국은 지금도 썩 유쾌한 기분일 수는 없었다. 사랑을 고백한 것도 아니었고 자기 감저어에 확신도 없는 채 소림의 불구를 목격했다는 것은, 그리고 혐오감과 함께 가책과 연민 때문에 갈등했었던 기억이 환국의 청춘을 조그은 병적으로 물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들에게 무관심한 것이 양소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명의 여성, 환국의 의식 밑바닥에는 어머니인 서희와 임명희, 유인실, 이 빼어난 세 명의 여자가 있었다. 서희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혈육으로서 보다 밀착된 감정이었지만 임명희와 유인실은 타인이면서, 타인이기 때문에 거리가 있었고 그 거리 때문에 오히려 수수께끼 같았으며 신기루와 같이, 신비스러운 대상으로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그 비슷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수는 없다!’ 배가 부른 모습, 삭막한 얼굴, 차갑게 빛나던 눈동자, 어젯밤에 우동집에서 만난 인실은 쉬르레알리즘의 그림같이 괴이하고 비현실적이며 먼 피안에 서 있는 목각인형 같기도 했다. 만난 그 순간보다 헤엉진 뒤, 그 만남을 상기할 때 도무지 그것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다시 시작해본다. 그러나 시작도 끝도 없는 일이었다. 이팔 놔요, 하던 타인의 목소리와 임산부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환국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재빠르게 이불을 개켜놓고 밖에 나가 세 page 4부 3권 61 수를 하고 들어왔다. “사이상 식사는 어쩌실래요?” 하녀 오하츠가 와서 물었다. 머리에 빗질을 하다 말고 시계를 본다. “벌써 이렇게 됐나? 열한시가 지났어.” “잠꾸러기.” 오하츠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환국의 나이 또래, 낯빛은 검고 동그란 눈에 얼굴도 동글동글했다. “그런 말 말아요. 새벽녘에 잠이 들었거든.” “그래요? 난 그때 일어나 있었어요.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에 잠이 깼는데 굉장히 무서웠어요.” “왜?” “하늘이 우르르 쾅쾅, 번개가 번쩍번쩍.” “어떡한다?” “뭘요?” “열한시에 아침 먹기도 뭣하고 기다렸따가 점심이나 먹지 뭐.” “그래요? 그럼 그럭하세요.” 오하츠는 방문을 닫아주고 갔다. 환국은 휴지로 빗을 닦아 서랍속에 넣고 복도로 나온다. 소나무 밑둥 가까운 곳에 함지만한 크기의 앙증스런 연못에 붕어 두 마리가 놀고 있었다. 둘레에 이끼 낀 작은 정원석을 배치하고 곰상스럽게 만들어놓은 연못은 소일거리가 없는 이 집 노인의 손장난이었던 것이다. ‘내 자리는? 이게 무슨 자리지?’ 인실과의 만남은 그렇다 치고 요즘 환국의 주변 사정은 어젯밤 일에 못지 않게 우울한 것이었다. 우울한 정도를 지나 어떤 위기의식으로 환국에게 육박해오고 있었다. 가정부의 이름으로 거금을 강탈해간 진주의 사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윤국이와 마찬가지로 환국은 부친이 관련됐을 거을 직감했다. 그러나 환국은 윤국이처럼 피가 끓었다기보다 부친을 연상한 그 의식 자체에 깊은 경계심을 가졌던 것이다. 부친을 연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을 위험 인물로 인 page 62 식했다. 만일의 경우 자신이 경찰관의 취조를 받게 된다면, 아니 급모다 고문을 당한다면? 고문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환국은 견디어낼 용기쯤은 있다고 생각했다. 두려운 것은 자기 심중이 노출되지 ㅇ낳을까 그것이었고 저도 모르게 취조하는 상대가 자기 심중을 포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결국 자기 능력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것과 그 사건이 끝내 미국으로 묻혀지기를 바라는 소망, 지나치게 경계하는 그런 심리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환국의 긴장을 가중하게 했다. 신간회 해산, 예맹 검거, 최근에 있었던 중국인 습격 사건 등, 그러한 일련의 사태를 동경에서 바라보는 환국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의 포위망이 좁혀져가고 있는 것만 같았고, 뭔지 모르지만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게 했던 것이다. 방학이었지만 환국이 동경에 남아 있는 것은 부친 길상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이쪽 사정이 복잡하니까 돌아올 것 없고 대신 송영광을 찾으라는 인편의 전갈이 있었다. 지난 초봄, 그 사건이 있기 직전에 환국은 동경으로 왔다. 떠나올 때 부친은 송영관을 찾으라는 당부를 했다. 분위기를 보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는데도 또다시 전갈을 받고 보니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은 송영광이 송관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환국은 송관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송관수가 진주 집에 드나든 일이 있었고,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형평사운동, 과거 의병으로 산에 들어간 일, 남들이 알고 있는 정도는 다 안다. 그러나 환국은 형평사운동이 관수가 하는 일의 전부가 아닌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하튼 부친이 시키는 대로 환국은 고향으로 가지 않을 외적 구실은 어느 정도 있었다. 그 동안 환국은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지난 봄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갔다. 해서 목적이나 선택의 변경에서 오는 준비라 해도 좋고, 화구를 메고 교외로 나다니며 스케치를 하는 행위, 하고 싶어서 하고,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 page 4부 3권 63 는 것이지만 방학을 이용해 한다는 구실도 되는 것이다. 미술학교로 옮기게 된 데는 부친 길상의 도움이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려면 자유업을 가지는 게 유리하지요. 행동도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을 거구, 내 기분은 만일 환국이가 망설이고 있다면 용기를 주고 권하고 싶을 정도요. 소질이 있는 것도 다행이며 마음을 굳힌 모양이라 당신도 응낙하는 게 좋을 거요.” “하지만 그 아이는 이 집을 이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없는 거요. 조만간, 우리 민족에게 급박한 사태가 밀려올 것이오. 앞으로 세상은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변할 것인즉, 그 점을 명심해야 하오.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환국의 일본 유학, 그것이 마땅치 않소. 환국은 중국에 가서 공부를 했어야, 당신이 그 점만은 양보하지 않을 것은 알지만.” 결국 서희는 길상에게 설득당한 듯했으나, 그러나 서희는 자기마음속에서 납득을 하지 않는 한 굽힐 여자는 아니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자유업이란 말은 다소 효력이 있었고 중국 유학 운운은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런 것보다 서희는 환국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았다. 확고한 것이라면 반대는 모자간 서로 상처를 남기는 결과밖에 되지 못한다. 서희는 자기 고집을 꺾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설득당하기보다 남편에게 설득당했다는 편이 어미로서 위신의 훼손도 없을 것인즉, 길상도 모르지는 않았다. 서희가 남편에게 복종하여 고집을 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상은 서희의 현명함을 믿었고 꺾이지 않는 성품을 사랑했다. 그의 인내를 고맙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환국은 큰 마찰 없이 숙원을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앞날의 방향이 달라졌다 하여 환국의 유학 생활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동안 그는 계속하여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법서 대신 미술에 관한 서적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정도였다. 노부부가 사는 조촐한 하숙집, 그것도 하나래(별채)여서 거처는 늘 조용했고 쓰는 공간도 뒤뜰을 합하여 넓은 편이며 아틀리에는 아닐지라도 불편한 것은 없었다. 먹고 살기에 어려움이 없는 노부부는 page 64 사족 출신으로 상당한 교양이 있었으며 가족 관계는 잘 알 수 없었지만 허전하여 한 사람쯤 하숙생을 둔다는 취지였으므로 환국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잘생기고 점잖으며 예의바르고 깔끔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하며 노부부는 졸업할 때까지 있어달라 오히려 부탁을 했다. 동경에서의 환국의 신변은 단순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문제는 진주에 있었고 영광이를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하였다. 영광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경에 오면서부터 부산 P고보 출신의 유학생을 만나 수소문했다. 그들의 소개로 다른 대학, 혹은 전문학교에 있는 P고보 춠힌도 만났다. 그러나 영광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숫제 송영광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시일이 갈수록 환국은 초조했다. 자신이 없어졌다. 동경 넓은 바닥에서 영광을 찾는다는 것은 서울 가 김서방 찾는 것만틈 어려운 일인 것을 깨달았다. 과연 그는 동경에 있는가, 그것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름쯤 됐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름쯤 됐는지 환국은 화구를 메고 다마가와강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 말 좀 묻겠는데.”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다. 조선말이었다. “혹시 최한국이 아닌지요?” 상고머리에 신색이 그리 좋아 뵈지 않는 중키의 충년이었다. “그렇소만……” 청년은 갑자기 활기에 넘친 표정이 되어 “나 김수봉이다!” “……?” “모르겠나? 보통학교를 오학년까지 같이 댕긴 김수봉, 알겠지?” “아아, 아!” “알겠지?” “그래 그렇구나! 맞아. 김수봉이다!” “겨우 알아보네.” 활기찼던 표정이 갑자기 시들면서 서운해하는 기색을 나타내었 page 4부 3권 65 다. 그러나 환국은 반가웠다. “하기야 뭐, 자네하고 나하고는 처지가 다르니까 쉬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해. 모르고 지나쳐도 할 수 업는 일이지.”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그래 여기는 언제 왔나?” “아마 자네하고 비슷한 시기에 왔을 거다.” 서운해한 것을 넘어서 김수봉 얼굴에 비애 같은 것이 서린다. 환국은 그것을 느꼈다. “뭘 하나 지금?” “……” “학교에 다니나?” “학교? 청강생을 학생이라 할 수 있는지, 하기는 저세상 학생이라 하긴 하지. 하하핫핫…… 하하하……” 비애는 무산되고 김수봉은 쾌활하게 웃었다. “하여간에 반갑다. 어디 가서 쉬면서 얘기하자.” “그랬으면 좋겠는데 글쎄……” 머뭇거린다. “일행이 있어서 오늘은 그만, 다음에 만나지 뭐.” 김수봉은 뒤돌아보았다. 환국이도 그의 시선을 따라 수봉의 등뒤를 바라보았으나 일행이라 할 만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아싸. 높은 하늘에 구름만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강기슭에 하얀 물새만 몇 마리 머물고 있었다. “일행도 함께 가면 될 거 아닌가?” “아니, 그럴 처지가 못 된다.” “애인하고 함께 왔어?” 환국은 웃으며 말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라.” 수봉도 픽 웃었다. “그럼 잠깐 기다리게.” 환국은 수첩을 꺼내어 재빠르게 자기 하숙집 주소를 적는다. 그리고 수첩에서 적은 것을 뿍 찢어 김수봉에게 내밀었다. page 66 “이거 내 있는 곳 주소야.” 수봉은 그것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그보다 밖에서 한번 만나자. 만날 날짜를 약속해서.” “그럴까?” “언제면 좋겠나?”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내일말고…… 수요일이면.” “나는 언제든지 좋다. 방학이니까.” “참 방학인데, 왜 안 갔나?” “볼일이 좀 있어서.” 시간과 만날 장소를 정하고 환국은 김수봉과 헤어졌다. 그와 헤어져서 한참 지난 후 환국은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진작 그 생각을 왜 못했나!’ 수봉이 부산 P고보와 관련이 있는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보통학교 오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해간 김수봉은 그 후 P고보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기억이 났던 것이다. ‘수요일에 만날 건데 뭐.’ 그러나 불안하고 초조했다. 손안에 든 물고기를 놓친 그런 기분이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지만 약속을 지키리라 믿어도 되는 것인지, 사정에 의해 그가 못 올 경우, 명심코 주소를 들고 그가 만나러 오지 않는 한 환국은 김수봉을 찾아갈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영광이를 찾아야 한다는 문제가 그를 뒤쫓고 있는 만큼 어떤 강박과도 같은 심리, 그러나 설사 김수봉을 만난다 하더라도 수봉이 영광을 알고 있고 영광을 찾을 단서를 갖고 있을 것이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약속된 날 약속된 시간까지 환국은 초조해 있었다. 그런데 김수봉은 송영광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식은 왜 찾으려 하나?” “그 사람 부친하고 내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한동네서 자랐거던.” “그거야 뭐 흔히 있는 일 아닌가.” page 4부 3권 67 “그런데 영광이 그 사람 부친께서 날 찾아오셨다. 꼭 만나서 전해달라 하시면서 돈을 주시더군.” 환국은 신중하게 부친이 개입되지 않는 선에서 말하는 것이었고 수봉은 뭔지 모르지만 심각한 표정이다. “돈만이라면 자네편에 보내도 되겠으나 그분 말씀이 꼭 만나라, 아주 간곡한 부탁을 하셨기에.” “하기는, 왜 안 그러겠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엉망이다.” 하면서 수봉은 영광과의 관계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영광이는 내가 어릴 적부터 서로 아는 사이다. 우리가 진주 있을 때 이웃에 살았거든. 그래서 집안 내력도 잘 아는데, 부산으로 이사한 후 다시 영광이를 만난 것은 고보 삼학년 때, 그 자식은 일학년이었고, 영광이네 집은 부산 온 후 수도 없이 이사를 한 모양이고. 옛날의 알음으로 우리집에 세들어서 한 일 년 남짓 살았다. 처음 부산에 왔을 때는 점방도 장만하고 집도 있고 괜찮게 살았다 했는데, 영광이 아부지가 자네도 알겠지만 왜경에게 쫓기는 몸이고 보니…… 영광이하고 나하고 학년 차이는 있으나 나이는 한 살밖에 차이가 없다. 아마 자네하고는 동갑일 게다. 고보에 늦게 들어왔고 또 무슨 일 때문인지 일 년을 구워먹었다 하고, 그나마 제대로 했으면 금년에는 졸업을 했을 텐데…… 온통 망가져버렸다. 사람될까싶지도 않고.” 환국은 여러 가지 생각을 머릿속에 굴리면서 서두르지 않았다. 평소 침착한 상태로 돌아가서 수봉의 얘기만 듣고 있었다. “나도 집안 형편이 뭐 그렇고 그런 정도라서 대학 간다는 것은 바랄 수 없고 집에서는 졸업한 뒤 금융 조합에 취직해서 장가나 가라, 그러나 무턱대놓고 배를 탔지. 설마 무슨 수가 없을라구, 혈기만 믿었다. 말도 마라. 참말로 말도 마라. 조선서 고보 출신이면 그래도 괜찮다고들 하는데 일본서는 인간 쓰레기다. 조선서는 왜놈 종질한다고 손가락질하던 반도(고참 점원 혹은 책임자)는커녕 고조(심부름꾼) 자리 하나 내주는 줄 아나? 노동밖에는 할 page 68 게 없다. 공사판에서 벽돌 지고 모래 나르고 그나마 풀발선 오야지를 만나야 일거리도 얻어 걸리고 품삯도 제대로 받지. 일본서 조선놈은 사람이 아니다. 쓰레기지. 영국놈이 중국에 와서 저희들 술집에 중국인과 파리는 사양한다 그랬다지만.“ “돌아가지. 돌아가아.” “오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 “그러면 지금도 공사판에 나간다 그 말인가?” “지금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 우에키야(화원)에서 있었지.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는데, 하기는 공사판도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지만, 지금은 고물장수다.” “구즈히로이(쓰레기 줍는 것)란 말인가?” “아니, 제대로 차리고 다니면서 고맨구다사이(실례합니다), 고맨구사다시이.” 하다가 수봉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사람이 나오면 쓰지 않는 것 팔아라, 그거지.” “그래, 그 편이 낫던가?” “났지. 좀 유식하다는 게 밑천이 되고 동정도 받고, 그러나 무엇보다 자유스러우니까. 비굴해질 때도 많지만 누가 하라 마라 그런 소리는 안 듣지. 공사판에 모여드는 인종이라는 게, 그게 별의별 게다 있거던. 걸핏하면 아이쿠치 뽑아들고 생사를 겨루는가 하면 경찰의 끄나풀이 있고 아나키스트 공산당이 잇고 밥만 먹여주고 임금을 몽땅 말아올리는 조직도 있고, 노동이 고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 땜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판에서도 인종 차별, 지역적 감정, 인간이란 참말이지 어디까지 사악하고 악독한지 바닥을 모르겠어. 젊은 날의 꿈이라는 거, 그거 물거품보다 더 허망한 것이더라. 이 세상에 달콤한 것은 없다. 어디로 가나 그것은 없어.” “그러면 돌아가아. 나 자신도 그래. 부모님 덕분에 유학이랍시고 와 있지만 허송세월이야.” “안 돌아갈 거다. 청운의 뜻, 그 따위 어리석고 낭만적인 것, 이미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이건 내 싸움의 과정이다. 나, 나는 백 page 4부 3권 69 들고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건 자네 개인적인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인 것인가?” “실은 어느것인지 나도 몰라. 어쩌면 무작정 그걸 거다. 자네는 허송세월이라, 자네다운 말이지. 하지만 여기 와 있는 몇몇 동창들은 그렇지 않아. 판검사, 고등관, 그걸 잡은 듯 안하무인이다. 개새끼들! 왜놈한텐 발발 기면서 동족에게는 거만스럽게, 정말이지 테러라도 하고 싶은 심정 알겠나? 자넨 모를 거다.” “더러 그런 사람도 있겠지. 자네가 그런 처지라면 어쩌겠나?” 수봉은 말문이 막힌 듯 환국을 쳐다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환국이 묻는 말엔 대답을 않고 “공산주의 한다 하고 사회주의 한다 하고 껍적거리는 놈들, 날 만나면 피해간다. 손 벌릴까 싶어. 그라고 내 해색이 초라하니까 그러는 거지. 참말로 사람 웃기는 거는 가시나들 끼고 댕기면서 천석지기 만석지기 부잣집 아들놈들 떨어진 내복 안 입고 카페 가서 고급술 마시면서 공산주의 한다는 거지. 허참.” “그러면 나도 할말이 없다. 그는 그렇고 송영광이 그 사람의 근황에 대해서 얘기해주게.” “그간의 사정은 알고 있나? 그러니까 조선에서 있었던 일.” “자세히는,” “그럼 그 일에 대해서는 말 안 하겠다. 그러니까 작년 늦은 여름이던가? 집에서 주소를 얻어 영광이가 날 찾아왔더라. 죽기 아니면 살기라 하면서, 꼴은 말이 아니고. 역전에서 왜놈하고 쌈박질을 했던 모양이라 유치장에서 하룻밤 잤다 하는데 이마에는 피멍이 들고, 원래 그 자식 성질이 과격하거든. 도둑질을 하든 강도질을 하든 조선에는 안 돌아간다 하길래 졸업을 눈앞에 두고 뛰쳐나온 심정을 모르지는 않으나 경솔했다고 나무랐지. 했더니 형이 내 입장이 되어보라. 뛰쳐나온 게 아니고 퇴학을 당했는데 어쩔 것이냐 하며 악을 쓰더라구. 하여간에 골치가 아프게 돼 있다. 머리도 좋고 인물도 훤하게 잘생긴 놈이, 자네가 만나보면 그놈 자식 상태가 어떤지 알게 될 거다. 측은한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때는 지긋지긋해.” page 70 “하여간에 만나봐야겠네. 지금이라도.” “지금은 안 돼.” “왜?” “여기 없더ㅏ.” “뭐? 어디 갔는데!” “관서 지방에 일 나갔다.” “일 나가다니?” “노가다지 뭐. 전에 알던 오야지한테 붙여주었는데, 글세 얼마나 갈란지. 나하고 고물장사도 할 수 있고 전에 있던 우에키야에 말해 줄 수도 있지만, 그놈 자식 성질 콱 죽여야, 세상살이가 어떤 건지 알아야 그래야 제 명대로 살 거다.” 환국은 아직 송영광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광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닐 때의 초조함과는 달리 이제는 영광과의 대면을 걱정하고 있었다. 상대가 순순히 이쪽 호의를 받아줄 것인지, 상처투성이의 젊은 그가 어느 면으로 보나 우월해 뵈는 환국은 반발 없이 대해줄 것인지 그것은 매우 의심스러웠다. 사실 환국은 미리부터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환국은 노부부와 함께 식사를 한다. 점심상에 그들과 환국은 마주앉았다. 오하츠가 시중을 들었다. “사이상 웬일이지?” “네?” 환국은 아리요시 노인의 노처 오시마의 얼굴을 쳐다본다. 감색에 흰 무늬가 있는 가수리(붓으로 살짝 스친 것 같은 잔 무늬가있는 천)의 기모노를 단정하게 입은 오시마는 미소를 지으며, “전에 없이 늦잠을 자고, 그것도 아마 열한시까지 잔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어젯밤, 새벽까지 잠을 못 잤습니다.” “사내자식이 네모 반듯한 것도 좋은 건 아니지. 더러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피고, 사이는 너무 얌전해.” 아리요시 노인이 말했다. 칠십을 바라보는 노부부, 아리요시 노인은 깡마르고 안경을 썼고 오시마는 다소 비대했으나 흉하지 않을 page 4부 3권 71 정도 깨끗하게 늙은 양주였고 건강한 것 같았다. “여보, 그렇지도 않아요, 사이상은 술도 마시는 눈치예요. 담배도 피고.” 오시마는 영감이 환국을 비판한다 생각했는지 열심히 변호하는 표정이다. “죄송합니다. 술 마시는 건 비밀이었는데 오하츠가 일러바쳤군요.” “일러바쳤다기보다,” 오하츠가 변명하려 하자 “오하츠, 걱정할 것 없다. 사이가 술을 마신다니까 한결 맘이 놓이는구나.” 아리요시 노인의 말에 모두 웃는다. “여보!” “무슨 항의가 또 남아 있소?” 아리요시 노인은 오싱코(소금에 절인 배추에 왜간장을 친 것)를 사각사각 씹으며 노처를 바라본다. “그게 아닙니다. 사이상은 우리 다미오를 많이 닮았어요. 당신은 그리 생각지 않으세요?” “당신 눈에는 사이가 다미오 같은 추남으로 보입니까? 큰일났군.” “그건 너무 심합니다. 우리 다미오도 그만하면 괜찮지요. 사이상만큼은 아니지만, 저는 성격이 닮았다 싶었습니다.” “다미오가 누굽니까?” 환국이 물었다. 오시마가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 손자라오.” “그런데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까요?” “여기 없으니까.” 입속에 밥이 든 채 아리요시 노인이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환국에게 오시마가 설명해준다. “지금 그애는 영국에 가 있어요. 유학간 거요. 사이상보다 두세 살위, 스물넷이니까.” page 72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멀리 보냈느냐 그 얘기지? 누구나 그런 얘기 하지만 사정이 있어요. 그애 아버지가 죽은 지 십오 년, 다미오가 아홉 살 때 죽었어요. 아카몬(동대의 별칭) 출신으로 장차 교수나 문사로도 대성할 거라 주위에서들 그랬지. 영문학이 전공인데 그애는 영국으로 유학하고 싶어했으나 외아들이어서 우리도 반대했고 본인도 용기가 없었던 것 같았어. 그러고는 세상을 다 못 살고 갔으니 손자에게나마, 그리 된 거지 뭐.” 오시마는 담담하게 말하다가 끝에 와서 흐지부지 끊었다. 아리요시 노인도 표정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 순간 환국은 노부부의 외로움이 가슴 저리게 전해져왔다. 여태 손자가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도, 자기에게 졸업까지 있어 달라 했던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엽차를 마신 뒤,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환국은 하나래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어쩔가 하고 그는 생각한다. 조찬하를 찾아가볼까 하다가 인실에 관한 것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또 자신이 없다기보다 인실을 위해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망설여졌던 것이다. “사이상!” 오하츠가 불렀다. “손님이에요, 사이상!” “아아.” 환국은 일어섰다. 뒤뜰을 돌아 현관 쪽으로 나갔을 때 오하츠는 환국을 힐끗 쳐다보며, “어딘지 좀,” 머뭇거리듯 말했다. “뭐가?” “이상한 사람 같아요.” “무서운 사람이야?” “아니……” page 4부 3권 73 “초라해 뵌단 말이지?” 오하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라한 것하고 이상한 건 상당한 차이야.” 환국은 수봉이 찾아왔을 거라 생각했다. 과연 수봉이었다. 그는 담벽에 박쥐처럼 붙어 있다가 문을 열고 환국이 내다보자 허겁지겁 다가왔다. “나하고 가주어야겠다.” “하여간 잠시 들어와. 나가는 건 어렵잖으니까.” “그게 아니다. 사정이 바쁘다.” 일상복인 듯 두 번 만났을 때보다 수봉의 차림은 초라했다기보다 남루했다. 낯빛도 나빴고 몹시 긴장해 있었다. “영광이 때문이다.” ‘사고가 난 게로구나!’ 비로소 환국은 깨닫는다. “잠시만 기다려.” 방으로 돌아온 환국은 책상 서랍 속에서 돈을 꺼내어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서둘러 나왔다. “가자.” 수봉의 걸음은 빨랐다. 그를 따라 환국이도 걸음을 빨리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다 죽게 됐다!” “뭐라구?” “다 죽게 됐다!” “우선 병원에 떼메다놓고 이리로 달려왔다.” “다 죽게 되다니, 왜?” “그런 설명할 새 없다. 어서 가자!” 전차를 타고 또 갈아타고 하는 동안 수봉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어젯밤 열두시가 지난 뒤 송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수봉은 또 사고쳤구나!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데다 입고 있는 옷이 찢기고 얼굴에는 찰상, 꼴을 보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수봉이 세들 page 74 어 사는 다다미 석 장짜리 방으로 들어선 그는 이유 없이 소리 내어 웃다가 하는 말이 술을 사달라고 했다. “미친놈, 지랄하네. 돈 벌어왔으면 니가 술을 사지, 내가 왜?” 했더니 “일이고 자시고, 끝내기 전에 와버렸으니 품삯이야 그냥 떠내려갔지.” “왜 또 그랬어!” “한 놈 때려눕히고 도망왔지 뭐. 그 새끼들 벌떼같이 덤벼들어서 있으면 맞아죽겠더라.” “구제불능이다. 내가 뭐랬나, 참고 또 참아라, 쇠 귀에 경 읽기다. 이젠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 “그 새끼들 센진 어쩌구, 사람의 오장을 뒤집어놓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나도 후회하고 있어.” “일본서 센진 어쩌구 한다 해서 시비했다가는 모가지가 열 개 있어도 못 당할 거다. 니가 센진이지 그러면 왜놈이더나? 쪽바리가!” 하다가 수봉은 홧김에 술을 사다 영광과 나누어 마신 뒤 과히 멀지 않은 곳, 빈민굴이나 다름없는 나가야 한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영광의 거처까지 데려다주었다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마신 술탓인지 몸이 찌뿌듯해서 아침 늦게까지 자리에 눈워 있던 수봉은 여자 비명에 놀라 일어났다. 나가보니 영광이와 함께 있는 여자, 수봉은 함께 있는 여자라 했다. “영광씨가 죽어요! 사, 살려주어, 으 흐흐흣…… 매, 매를 맞고.” 부들부들 떨면서 여자는 울부짖더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뛰었지. 나가야 뒤켠에 있는 공지로 달려갔을 때 영광이는 엎드러져 있었고 이미 놈들은 다 달아나고 없었다. 참말이지 비참해서 두 눈 뜨고 볼 수가…… 얼굴은 묵사발이 되었고 안아 일으키는데 팔과 다리가 부러졌는지 제 마음대로 덜렁거리고, 마치 망치로 때려부순 장난감 같더라니까. 의식도 없었고 혜숙씨 말이 건장한 사내 세 놈이 와서 다짜고짜 공지로 끌고 나가서 팼다는 거라. 아마 영광이가 때려눕혔다는 그놈의 한패거리가 뒤쫓아와 page 4부 3권 75 서 보복을 한 모양이다. 그래가지고는 사람 될까 싶지가 않다. 살아도 병신이 되거나, 미친놈! 그렇게 타일렀는데 세상 무서운 주 ㄹ모르고, 아무래도 그 자식 일본 와서 죽으려고 작심을 한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영광을 메다놨다는 병원은 간다 부근에 있었다. 외과 전문의 개인 병원인데 규모는 꽤 컸다. 수봉과 환국이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복도 옆의 긴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됐습니까?” 수봉이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라기보다 소녀라 해야 할 앳되고(애띠고), 아이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연신 떨면서 “아무말 없어요.” “내 만나보지, 의살.” 환국은 진찰실 문을 밀고 마치 쳐들어가기라도 하듯, 간호원이 뭐라 하는데 개의ㅏ치 않고 의사 앞에 섰다. “환자의 보호잡니다.” 처방을 쓰고 있던 의사는 안경 너머 눈을 치뜨고 환국을 보았다. 사십대 중반쯤 깐깐하게 생긴 사내다. 그는 다시 처방을 쓰고 나서 간호원에게 그걸 넘겨주고 다시 환국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요.” “어느 환자 말입니까.” “송영광입니다.” “아아, 그 조선인.” 했다. 그리고 의외란 듯 환국의 차림새를 살핀다. “어떻습니까 상태가.” “굉장히 험하더군 말짱 다 망가졌어요. 장출혈도 있고.” “그, 그럼 살겠습니까!” “수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수속이나 밟으시오.” “네. 그,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부, 부탁합니다.” page 76 환국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환자하고 어떤 관계요?” 순간적으로 “사촌입니다.” 거짓말을 했다. 어떤 관계냐고 묻는 의사의 목소리는 헌병이나 경찰관의 목소리와 흡사했다. “사촌, 사촌치고는…… 좋소. 나가서 기다리시오.” 진찰실을 나와 도어를 닫느 ㄴ순간 환국은 좀더 의사에게 매달려 봤어야 했지 않았을까 후회를 했다. “뭐라 하던가?” 수봉이 물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군.”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하던가?” “지장이 없으면 수술하려 하겠나. 기다려보자. 그리고 나는 사무실에 가서 수속을 해야겠다.” 수속을 해야 한다는 것은 돈을 낸다는 뜻이었다. “고맙다.” 수봉은 환국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듯 떨고만 있었다. 수봉이 환국의 하숙으로 달려간 첫째 이유는 수술이든 입원이든 바로 그 수속을 밟기 위해서였고, 수속에 필요한 돈을 생각한 때문이다. “혜, 혜숙씨” 수봉이 말에 여자는 당황한다. “내 친구고, 또 영광이 친군데 최환국, 그라고 여기는 강혜숙 씨.” 하고 소개를 했다. 혜숙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최환국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page 4부 3권 77 07장 영호네의 부탁 한복이가 거름을 넣고 반듯하게 다듬어놓은 남새밭에 김장 배추가 제법 손가락 하나 마디만큼 자라 있었다. 콩밭을 매고 고추를 널어 말리고 보리방아 찧고 빨래하고, 영호네는 왼종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짬을 내어 남새밭으로 나왔다. “식구 한 줄고 보이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리겄네. 인호가 있었이믄 보리방아, 빨래, 집안일은 지가 하고…… 도모지 밭에 나올 새가 없다. 벌써 솎아야 하는 긴데 밭이 얼산 같구나.” 영호네는 중얼중얼 중얼거리며 배추를 솎기 시작한다. “그 잘나빠진 데 보내느니 차라리 늙히 직이는 편이 나았제. 에미애비 잘못 만나……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카이 아이구 내 가심이야.” 계속 중얼거리는데 “우리는 이제 겨우 움이 트든데 너거들은 일찍 심었고나.” “야?” 영호네가 얼굴을 든다. 천일어매가 광주리를 이고 밭둑에 서 있었다. “야, 좀 일찍 심었십니다. 고추 따가아 오십니까?” 영호네는 호미를 든 채 땀에 젖은 머리칼을 팔로 걷어넘기며 말했다. 천일어매는 광주리를 밭둑에 내려놓고 “고추도 긑물인가, 별로 따낼 기이 없네.” “그새 비가 잦어서, 아직이사 끝물이겄소.” “하기사 노 비가 질금거렸으니, 날씨가 좋으믄 우떨란고.” 치맛자락을 당겨 땀을 닦다가 억센 삼베치마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일어매는 남새밭으로 내려온다. 천일이는 장가를 들어 아들 딸을 낳았고, 둘째 부일도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며 딸마저 시집을 보내버린 천일어매는 짐을 풀어버린 뒤, 해이해진 탓 page 78 이었는지 부쩍 늙었다. 경우 없이 욕심 많고 행실이 개차반이던 마당쇠의 아낙이던 천일어매, 남편 생시 때는 그의 비행으로 남에게 누 끼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몰래 뒷감당을 하던 과묵하고 단정했던 아낙이, 그러나 그는 옛날과 달리 말씨며 옷맵시도 느슨했다. 밭고랑에 쭈그리고 앉은 천일어매는 영호네랑 함께 배추를 솎는다. “그만두이소.” “가만 있이믄 머하노.” “왼종일 꿈제기고, 좀 쉬시야제요.” “일이 보배라는 말도 못 들었나? 가만 있이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나서 병난다.” “무신 걱정이 있어 병이 날 깁니까. 성자할무이는 할 일 다 하시고 자식들은 모두 자리를 잡았고 병날 일이 머 있겄십니까?” “이 사람아, 그런 말 마라. 살고 보니 세상만사가 다 덧없고 허망하다.” “무신 일이라도 있었십니까?” “무신 일이 있기는, 그렇다느 ㄴ기지. 고추를 따고 있인께 불각처 눈물이 펑펑 쏟아지데.” “자식들이 섭섭키 했는가배요.” “그런 것도 아니다.” “……” “천일아배가 야속하더마.” “참. 성자할무이도.” “넘들한테는 못할 짓도 많이 했제. 하지마는 이녁 살았일 직에 제집이라고 욕 한마디 했이까 볼때기 한분 쥐어박았이까.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나를 그리 섬기겄노. 날 두고 먼저 간 기이 야속하고 괘씸타.” “언제 일인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합니까?” 영호네는 웃는다. “모리는 소리. 그기이 그렇지가 않다. 자식들 데리고 살아볼 기라고 동동거릴 때는 아무 생각이 없더마는,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page 4부 3권 79 옛말이 옳다. 만가지가 다 논이 난다. 해지는 산을 보아도 그렇고 흐르는 강물을 보아도 그렇고 비감한 생각만 자꾸 든다. 나도 젊었을 직에는 참사하다는 말을 들었고 말 많은 노인네를 보믄 늙어도 나는 군담 같은 거 안할 기다 생각했다마는 어디 장담할 일이 있더나.” “남 보기사 성자할무이겉이 만고에 걱정 없는 사람이 없다 카는데, 천일이는 집을 샀다문서요.” “집이사 샀제. 가아는 이자 심이 피었네라.” 하는데 주름진 얼굴에 쓸쓸함이 감돈다. “그라믄 진주로 가시지요. 도방이니께 이놈의 엉걸나는 농삿일도 안 하고 편하실 긴데.” “그란해도 지가 맏이라꼬 어무이 모시야 한다 카지마는…… 내사 싫구나. 낯선 곳에 가고 접지 않다. 가보이 까깝해서 못 살겄더라. 여기서는 부애가 나믄 호미자리 들고 밭에라도 나오지마는, 그래 인호가 시집가고 나이 일손이 딸리제?” “야.” 움질하다가 영호네는 힘 없는 대답을 했다. “나도 제집아아 시집보내고 나서 우찌 그리 허전튼고, 밤에 잠이 안 오데. 그래 너거 집 인호는 시집가서 잘산다 카더나.” “잘살기야 하겄소. 시부모가 안 기시니 좀 우떨란가, 하기사 머 손위 시누도 시모 맞재비니께 맘 고생이야 하겄지요.” “살림 내준다 카든데, 안 그랬나?” “말이 쉽지, 아직이사.” 영호네는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며 손등으로 땀을 닦느느데 그의 얼굴은 한순간 시들어버린 듯 해쓱해 보였다. 집안 내력 때문에 딸의 혼처를 찾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던 한복이 내외는 지난 늦봄, 중매장이 말을 믿고 인호를 통영에다 여의었는데, 설령 중매장이의 말을 믿지 못했다 하더라도 여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지만 총각은 조실부모하여 누이 집에서 자랐다 했고 인호의 곱절인 서른을 넘긴 나이에 매형이 저잣거리에서 크게 어물전을 하기 때문에 오 page 80 늘까지 함께 장사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혼인만 하게 되면 총각이 벌어놓은 돈이 있어 누이가 제금을 내어줄 것이라는, 대강 그런 얘기였다. 영호네가 나이 많다, 나이 그쯤 되도록 장가를 못 갔으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지 않겠는가 했을 때 “잘살고 못사는 것은 지 복이고, 우리 형편에 찬밥 더운밥 가릴수도 없으니 그렇다고 해서 여식아아를 집에 두고 늙힐 수도 없는 일 아니겄소.” 곰방대를 물고 앉아서 한복은 절망적으로 말했다. 결국 인호는 시집을 갔다. 그러나 인편에 들려오는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제금 내어준다는 것은 빈말이었다. 신랑된 위인도 불출인 데다 매형 가게의 일꾼에 불과했으며 인호 역시 바쁜 집안의 일손을 채우기 위해 데려갔을 뿐, 초혼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누이가 혹사하고 학대하여 견디지 못하고 여자가 달아났다는 얘기였다. 한복이 내외는 속았다는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쪽의 험이 아무리 큰들 살인 죄인의 손녀요, 거렁뱅이의 딸이고 보면 입 벌리고 말하기도 민망하였던 것이다. 이미 쏟아져버린 물,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거니와 주워담은들 별 뾰족한 수도 없는 터에 그런 처지나마 끝까지 살아주어 일부종사, 팔자치레나 해주었으면, 바라는 것 외 달리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도 영호네는 딸을 생각하며 울었다. “이까짓 땅떼기 팔아부리고 고만 아이들 큰아부지한테 가서 사입시다. 만주로 가잔 말입니다.” “무슨 소리!” 모깃불을 피다 말고 한복이는 화를 내었다. “기대볼 곳 없는 사람들도 거산해서 만주로 떠나던데 우리는 그래도 시아주버니가 기시고 오라, 오라 하시는데 와 그캅니까.” “실데없는 소리 마소.” “제집아아도 그렇기 내던지부리고 다음의 우리 영호는 우짤 깁니까. 우리 강호 성호는 또 우찌 되는 깁니까. 근본 모리는 곳에 가서 자식들 사람 맨들어주어야 안 하겄소.” “짚신도 제 짝이 있는데 대대로 만내믄 될 거 아니요.” page 4부 3권 81 “혼사하자는 사램이 없으니 하는 말 아니겄소. 영호를 저리 내비리둘라 캅니까?” “넓은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많소. 우리가 가문 찾고 인물 찾을처지요? 어디 맘씨 착하고 불상한 아이 있이믄 데리오는 기지.” “참 태펭이네요. 나도 머 낯선 대국땅에 가고 저버서 이러는 줄 압니까.” “형님 있는 곳에 갈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기구마. 나는 고향에 뿌리박고 살 기요. 남이야 뭐라 하든말든 두 귀 막고 살기요.” 한복은 대못으로 쾅쾅 박아버리듯 완강하게 말했다. “영호는 우짤 기고?” 천일어매는 배추를 솎다 말고 눈부시게 흰 나래를 부챗살같이 펴고 나는 백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슬에는 장개보내야 안 하겄나.” “보내야 할 긴데.” “매가리 없이 와 그라노. 말하는 데도 없나?” “아무도…… 우리집 일이 늘 안 그렇십니까. 혼삿길 열기가 어럽지요.” “우리도 혼삿말 있을 때마다 천일아배 성질 때문에 말이 많았네라. 그러이 부모란 자식 혼인길 막는 짓은 하지 말아야, 우떤 때는 양잿물 묵고 콱 죽고 저버도 자신들 앞길 생각해서……” “성자할무이가 그러시믄 세상에 살고 저븐 사람이 있겄십니까?” “남이 남의 사정 속속들이 우찌 알 기고.” “그거는 그렇제요. 실은 영호아배가 탐내던 처니가 하나 있기는 있었는데.” “그래?” “내는 보지도 못했지마는.” “근동 처니가 아닌가배.” “야. 그랬는데 영호아배가 말을 끄내기도 전에 그만 시집을 가부린 기라요. 처니가 보통핵교도 나오고 집안이사 우리 청혼 거절할 page 82 처지도 아니고 영호가 경찰에 붙잽혀가는 바람에 서둘지 않았더마는 낙심천만이제요.” “그런 일이 있었고나.” 두 사람은 밭고랑을 옮겨 앉는다. “이자 그만두이소.” “아니다.” “가서 쉬이소.” “아지 rgo가 남았는데.” 천일어매는 웬일인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광주리 들고 고추밭에 나올 때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저기이 귀남애비 아니가?” 천일어매 말에 영호는 얼굴을 들어본다. “새신랑같이 옷 갈아입고 어디로 가는고?” “그렇네요. 밤낮 불머시마겉이 해가지고 댕기더마는 우짠 일이까요.” “옷이 날개라 카더마는 채리고 나서니 제법 사람 같고나.” 올발이야 굵겠지만 명색이 모시라, 모시 중의 적삼을 입고 대님을 치고 흰 고무신에다 생고사 조기까지 입은 귀남애비는 어디로 가는지 두 활개를 치며 걸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천일어매가 말했다. “죽은 우리 천일아배도 그런 말을 들었다마는 귀남애비 저 사람도 소다 소. 이마에 소 우 짜 붙이고 사는 사람이다.” “글대ㅗ 성자할무이가 잘했이니 동네서 인심은 안 잃었제요.” “내가 머 잘한 것도 없다마는 하도 남정네가 말썽을 피고 댕긴께 감당은 내가 해야지 우짤 기고. 밖에서 미련하믄 안에서 사지역지해야, 자식 키우는 사람이 남의 입질에 오리내리는 것도 좋지 않제.” 역지사지를 반대로 말한 것이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즉 이해한다는 뜻인데 위에 오르고 아래로 내려왔다 해서 뜻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page 4부 3권 83 “귀남네 가아는 안 되겄더마. 소나아 제집이 똑같다. 며칠 전에 야단난 거 니도 알제?” “머가요?” “모리는 모앵이구나. 야무어매 기가 넘어서 까무라친 일이 있었다.” “와 그랬던고요?” “성환할매가 여러 날 꼼짝도 않고 있어서 야무어매가 가봤던 갑더라. 갔더니 복동이댁네가 와서 귀남네랑 함께 장독가에서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더란다.” “두 사람이 친한갑십디다. 음식이 오고가고 하더마요.” “짝짜꿍이 맞아서 요새 그러는 갑더라. 그래 야무어매가 들어갔는데 젊은것들이 오느냐는 말도 없고 씻죽하니 쳐다만 보는데 야무어매 심사가 뒤틀리더라는 거지. 성환할매는 마루 뒷문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고, 와 요새는 꼼짝 안 하느냐 함서 야무어매가 마루로 올라갔더니 성환할매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더라는 기지. 아이들은 강가에 갔는지 안 보이고. 했더니 자식들 해주는 밥이나 묵고 가만히 있일 일이지 늙어감서 와 설치고 댕기는지 모르겄다. 들으란 듯 복동이댁네가 말하더라는 기라. 그리고 또 하는 말이 남도 아닌 고몬데 설마 조카 밥 굶기직이겄느냐 하더란다.” 천일어매는 그날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설명을 했다. 괘씸하여, 또 입이 바른 야무어매는 마루긑으로 나앉으며 “군은 군대로 모인다 카더마는 자알 논다.” 하고 비아냥거렸는데 “오복이할매, 군은 군대로 모인다. 무신 말입니까?” 복동이댁네가 눈을 희뜨고 따졌던 것이다. “몰라서 묻나? 가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다듬던 김칫거리를 획 팽개치고 발딱 일어선 복동이댁네는 “귀남네 나 간다.” 하고서는 삽짝을 쐥! 하니 소리를 내듯 나가버리더라는 것이다. “남으 일에 와 챙견일꼬? 그런 챙견 할라 카믄 이녁들 집에 가서 page 84 나 하지.” 입이 툭사리같이 된 귀남네는 뇌까렸던 것이다. “그 제집은 와 남으 집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 본 바 없는 것은 할 수 없다. 지가 성환할매 밥 한 끼 먹있다고 그런 소리 하나? 사람이 그라믄 못씬다. 듣자 카이 복동이 집하고는 서로 모리는 임석이 없다 카든데 어째 지 피붙이한테는 그리 야박하노. 내가 오믄 눈의 까시겉이 한께 안 오겄다 생각함서도 할매 불쌍해서 와봤더니 그 제집까지 장구 치고 북 치네.” “그리 불쌍하믄 오복이할매가 돌보지 그러요.” “그러라믄 못 그럴까봐? 돌보고말고, 너거들만 없이믄 집하고 땅하고 나 아니라도 동네서 돌봐줄 사람 얼매든지 있다.” 귀남네는 한풀 꺾이는데 “야무어매 그만 하소,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소.” 성환할매의 목멘 소리에 풀이 꺾였던 귀남네는 “누가 머라 캤나! 사람만 오믄 금세 우는 소리라 카이. 니 내노라고.” 쌀 속의 뉘같이 나타나게 한다는 뜻인데 귀남네는 중얼거리며 성환할매 쪽을 향해 눈을 흘긴다. “세상에 니 겉으믄 누가 자식 낳을라 카겄노. 해도 너무한다.” “누가 우쨌십니까. 자식 헌해하고 댕기는 어매도 잘한 거 없십니다.” “너거들 헌해한다꼬? 니 어매 너거들 감싸노라 열두 폭 치마도 모잘랄 지경이다. 벌받을 소리 하지도 마라. 옛말에 공 안 든 자식덕보고 많이 묵은 놈이 악문은 더 한다 카더마는, 끼리끼리 자알 논다. 까마귀가 백로하고 놀겄나. 핏덩이 주워다가 금이야 옥이야 키워가지고 집 주고 땅 주고 장개들있더니 악독한 며누리 따문에 복동어매 명대로 못 살았고, 그 며누리년과 어울리서 어무이를 면박해?” “억설하지 마소. 복동어매가 더러분 소문 때문에 죽었지 며누리 땜에 죽었소?” page 4부 3권 85 “그 헛소문을 누가 퍼뜨맀제? 시어무니한테 오굼 건 거는 누고? 동네에 놔두는 것만도 고맙게 여기 조신하기는커냥 넘우 집에 와서 노인네보고 머 어쩌고 어째? 니가 어무이를 대수로 안 여긴께. 입이 열 개 있이도 말 못할 제집까지 와서 머 해주는 밥이나 묵고 가만히 있이라꼬?” “얼매나 동네방네 댕기믄서 자식 헌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맞다. 그래서 니가 노인네 가두워놓고 덩신 만들었나.” “머 어째요!” 귀남네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리 풀세기 날뛰다가 뜨거운 일 볼까 무섭네. 죄는 지은 대로, 부모 눈에 눈물나게 해서 니가 복받을 것 같나? 어디 시상에 그런법이 어디 있노. 저거 집에 얻어묵으로 가도 안 그럴 긴데.” 야무네의 말도 과하기는 과했다. 말이란 내치고 보면 거둬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야아, 그라믄 오복이할매는 지은 죄가 많아서 소싯적에 남편 잡아묵고 딸자식 잡아묵고 지금도 방안에 산송장이 앉아 있십니까?” 귀남네는 눈이 시퍼래져서 악을 썼다. “머라 캤노? 머, 머, 머라 캤제? 이 몹쓸 년, 니, 니는 다 살았……” 야무네는 픽 쓰러져서 까무라쳤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구마요. 오복이할무이도 뼈아픈 말을 하싰지마는 귀남네가 심했네요. 가심에 피가 지는 일을…… 둘째딸은 어마니나 조카한테 다시 없이 한다 카더마는.” “그러이 한배에서 나와도 자식이란 오랭이 조랭이라. 세상에 머니 머니 해도 자식 일만큼은 부모 뜻대로 안 되네라. 자식을 낳아 부 노릇을 해도 부모 맘을 모리니, 성환할매가 얼매나 저거들을 감쌌기에? 그것들 여기서 나가믄 머 묵고 살겄는가. 내가 에미 애비없는 손주를 너무 감싼게 그러는 거 아니겄는가. 딸자식도 자식이다. 그러건만 귀남네는 자식들 헌해한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 해도 곧이듣나. 하니 성환할매 속이 내고 내도 말 안 하는 거 아니겄나. page 86 성환할매 아니라도 그렇지. 자식을 우찌 내어쫓노. 부모는 그리 못한다. 에미 애비 없는 그 불쌍한 조카들, 남정네가 곰이믄 귀남네가 알아 해야지. 소나아 제집이 똑같다 카이, 그래가지고 나중에 오래비 얼굴 우찌 볼 긴고.” “성질이 그러믄 할 수 없는갑십디다. 동생은 안 그런데…… 지난 설에도 어마니 옷 한 벌, 조카들 옷에 버선까지 지어서 인편에 보내왔다 카데요. 농사가 많아 일도 지천이고 시부모 모시고 삼서 그거 해보내노라고 밤에 잠이나 잤겄십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지가 못하믄 그만이지. 그것도 새를 내더란다. 하기사 사람이란 천층만층 구만층이라 카이 별의별 사램이 다있제. 옛적 얘기다마는, 그해는 가물었네라. 우리 천일아배, 니도 알다시피 무경우한 사람 아니더나. 그래 밤이 되믄 남의 논이사 우째되든지 물고를 트러 나가는 기라. 날이 새믄 보나마나 동네가 시끄러블 긴데 우짤 기고, 살재기 따라나가서 트놓은 물고를 막았네라. 아무리 가장이 하늘겉다 하지마는 옳지 못할 때는 여자가 막아주어야 하는 기라. 그기이 남정네 욕을 덜 먹이는 기고 자식들 앞길도 열어주는 기고.” “그 말심은 맞십니다. 성자할무이가 그러이 혼삿길도 수울했지요.” “아닌게아니라 그렇기는 했다. 시어무이 보고 딸 주겄다 딸 데리가겄다 하기는 했제.” “이자 대강 됐십니다. 나가입시다.” 두 사람은 일어섰다. 그리고 논도랑으로 가서 세수를 하고 발을 담근다. “영호네.” “야.” “요조숙녀가 하나 있는데,” “야?” 천일어매는 깔깔 웃는다. “그거는 내 말이 아니고 주막집 영산댁 말이다. 시영딸로 데리고 page 4부 3권 87 있는 처니를 두고 그 할매 말이 우리 요조숙녀,” “야……” 대답은 시원찮았지만 영호네 얼굴에 반응이 나타났다. “조맨치라도 생각이 있이믄 야무어매를 찾아가보아라.” “오복이할무이를요?” “내가 들은 말이 있어서 그런다.” “무슨 말을?” “가보믄 알 기다. 나도 그 처니를 참하다 생각했지.” “야……, 오복이할무이 큰아들 때문에 그럴 겨를이 있이까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당장 우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괜찮을 기다.” “차도는 없다 캅니까?” “골벵이 들었는데 하루 이틀에 낫지도 않겄지만, 야무어매도 자식 때문에 풍파 많이 겪는다. 영호네, 저기 또 최참판댁에 형사가 간다.” “야?” 겁에 질린 영호네가 뒤돌아본다. 오르막길을, 최참판댁을 향해 낯선 양복쟁이 한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형사가 아니었다. 오가다였다. “왜놈들 참말로 질기네.” “아직 못 잡아서 그런 모앵이지요?” “몇 달이 지났노. 잡기는 우찌 잡아. 버얼서 돈도 사람도 대국에 가 있일 기라 하드마. 왜놈이 철랑개비 재주를 지니도 이자는 못 잡을 기라 하는데.” “진주에는 가지도 않고 여기 있었다 카는데 와 저럴꼬요.” “까막소에 갔다왔다고 해서 그런단다. 애국자라꼬 그런다 안 카나.” “야아……” “직일 놈들, 저거가 안 망하고 우짤 기고. 죄 없는 사람 총 노아 직이고, 우리 머시마들도 똑똑했이믄 애국자 돼서 아배 원수를 갚 page 88 을 긴데, 그날 생각을 하믄 지금도 눈앞이 캄캄하다. 자식이라는 것도 저거 살 생각만 하고 부모 생각 조맨치라도 해야 말이제. 아배 기일에도 사라지게 걱정만 했지, 제상 차리는 것 보믄 눈물이 난다. 눈가림으로 시늉만 하고, 운전대를 잡고 있이니 할 수는 없지마는 천일이도 아배 제사에 참니하는 일도 드물다. 지도 미안해서 그러는지 진주로 모시가겄다 하지마는, 없이(일없다). 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러고 접지도 않고…… 내 눈 하나 감고 나믄 천일아배산소는 우묵장성, 풀이나 베줄란가.” 굿마당에서 왜병에게 총맞아 죽은, 남편 마당쇠의 죽음은 세월이 갈수록 천일어매 마음속에서 새로워지는 모양이다. 비극의 현장에 한사코 남아 있고자 하는 한복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이들은 슬픔을 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려 하는 것인지 모른다. 살구나무에 목을 매 죽은 어머니를, 굿마당에서 총맞아 죽은 남편을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튿날 해거름이었다. 영호네는 아침나절에 쪄놨던 쑥버무리를 작은 소쿠리에 담고 삼베수건을 덮어 들고 집을 나섰다. 꾸불꾸불한 내리막길을 지나 돌담 옆에까지 왔을 때 엽이네가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었다. “여기 와 이라고 있노.” “음?” 엽이네는 멀거니 영호네를 쳐다본다. 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듯 “내사 못 살겄다, 그만.” 하고 머리를 절절 흔든다. “와?” “무신 액운인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동네서 이러고 살겄나.” “……” “그란해도 우서방이 꿈에 뵈믄 하루 종일 맴이 산란하고 우서방 생각만 하믄 무서바서 밤길도 못 걷는데, 참말로 미치겄네. 본 대로 이야기한 기이 머가 잘못인고. 징언 잘못해서 성구아배(오서방) 징역이 사 년으로 떨어졌다. 사형이 되어도 분이 안 풀리는데 page 4부 3권 89 우째 징역이 사 년이고, 귀에 못이 박히게 우서방 집 식구들 원성아니가. 그거는 마 그렇다 하고 있는 심술 없는 심술, 사사건건 사람을 감아오고 참말로 못할 짓이다. 그 악종들을 갈바서 싸워봤자 이길 사램이 누가 있겄노.” 그간의 사정은 영호네도 알고 있었기에 “참아라.” “아, 오늘도 우쨌는지 아나! 우서방 아들이 우리 콩밭에 소를 몰아넣고 콩밭을 낭태질했단 말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참말 못 살겄네.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누가 그 식구들을 갈겄노. 막나가는데.” “해악할까봐 모두 겁내제. 하이 용천지랄하는 거 아니가. 질기 이라믄 우리가 떠든지 해야지. 벼락맞는 거사 죄져서 그렇다 카지마는 이런 액운도 또 어디 있겄노.” “살자 카믄 우짜겄노. 참아라. 이거나 좀 묵어봐라.” 영호네는 소쿠리 속의 쑥버무리를 조금 떼어서 엽이네 손에 쥐어주고 “집에 가서 맘 가라앉히라. 질에 퍼질러 앉아 있이믄 머할 기고.” 영호네는 야무네 삽짝까지 왔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듯 걸음을 멈추고 콧물을 들이마신 뒤 마당으로 들어간다. 자기 깐에는 이야기의 성질상 구정물 냄새 나는 옷을 벗고 빨아놓은 옷으로 갈아입기는 했는데 삼베치마의 기장이 짧은데 풀발이 세어서, 허리를 끈으로 질끈 동여매기는 했으나 가늘은 종아리 하며 흡사 암탉 같은 모습이었다. 야무네 초가지붕 너머 느티나무의 짙은 그늘 사이로 두 마리의 까치가 날고 있었다. 해는 아직 남았더란 말인가. 까치의 몸짓은 느긋하기만 하다. “아무도 없나?” 영호네는 기침을 해본다. “와 이리 집안이 쥐죽은 듯할꼬?” 아래채, 야무가 누워 있는 방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야무네, 야무어매 하지마는 야무의 나이는 사십을 넘었다. 영호네는 그의 얼 page 90 굴 구경도 못한 터에 아무리 병자라고는 하나 남녀가 유별이라 내외법이 엄존하니, 말을 걸어 물어볼 수도 없거니와 왠지 모르게 거북하고 으스스했다. 가버릴까 하다가 부엌을 들여다본다. 부엌바닥은 싹 쓸려져 있었다. 선반에는 투박한 사발이 가지런히 엎어져 있었고 솥전은 걸레질을 했는가 반들반들했다. “집을 비워놓고 모두 어디로 갔일꼬?” 돌아나오는데 큰방 앞 신돌 위에 짚세기 한 켤레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복이할무이요, 안 기십니까?” 허행이구나 싶었지만, 어렵게 결심하고 왔는데 일이 잘못될 건가 불안을 느꼈지만 불러본다. “누고?” 큰방 문이 열렸다. “누가 왔나?” 부승부승 얼굴이 부은 야무어매가 내다본다. “나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십니다.” 영호네는 반가워서 말했다. “잠시 깜박했던가배.” “할무이 혼자 기시는가배요.” 그 말 대답은 없이 “몸이 짚동겉이 무겁네. 비가 올라 카나?”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루로 나온다. “모두 어디 갔십니까?” “응 안사돈 환갑이라고 해서 식구들 모두 구례 외갓집에 갔다. 병자가 있이니 나는 참니도 못한다.” “야……” “무슨 일고?” 좀체 마을다니는 일이 없는 영호네였기에 야무어매는 의아해한다. 소쿠리 속에 뭐가 들어는지 알 수 없지만 음식을 나누어먹으려고 온 것만은 아닌 듯했다. page 4부 3권 91 “저기, 할 이야기도 있고, 아아들이 묵고 접다고 해서 조맨 해봤는데 오는 길에 가지왔십니다.” 야무어매는 소쿠리를 받아 삼베 수건을 들쳐본다. “쑥버무리네. 너거들도 식구가 많은데 남 주 ㄹ기이 어디 있어서.” 부엌에서 접시하고 작은 함지를 가져온 야무어매는 접시에 쑥버무리를 옮기면서 조금 뜯어 먹어본다. “간이 맞네.” 나머지 것은 함지에 올겨 살강에다 간수하고 접시에 담은 것은 아랫방 야무 있는 곳으로 가져간다. 방문을 열고 접시를 넣어주면서 “좀 묵어봐라. 꼽꼽해서 마치 묵기 좋다. 물 떠다주까?” “괜찮습니다.” 낮은 야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꼭 씹어 묵으라. 체할라.” 마루로 돌아와 걸터앉는 야무어매를 보고 영호네는 물었다. “요새는 좀 우떻십니까?” “저분때 개소주를 내서 믹있더마는 요새는 좀 묵는다.” 했으나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얼굴이 부은 것 같은데.” “이래저래 심장이 상해서 안 그렇나. 한분씩 속을 끓이고 나믄 이렇네라. 가심이 뛰고 밤에는 잠도 못 잔다. 그러다가 괜찮아지네라.” 영호네는 천일어매한테서 들은 얘기가 있어 왜 속을 끓였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귀남네하고 무슨 일이 있었다 하데요 하고 말하지 않았고 야무어매 역시 가슴에 맺히는 그 말, 서방 잡아먹고 딸자식 잡아먹고 지금도 방에 산송장이 있다는 기막힌 그 말을 입밖에 내기조차 끔찍스러운 듯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실은 그 말대로 심장이 상하여 얼굴이 부은 것도 사실이지만, 식구들 없는 새방안에서 야무네는 울었고 울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것이다. “방에 들어가자. 뒷문을 열어놔서 씨원타.” 뒤늦게 아들 방에 신경을 쓰며 야무네는 당황하듯 말했다. page 92 “야.” 영호네 역시 야무에게 신경을 써가며 마루에 걸터앉아 말할 성질의 일도 아니어서 얼른 야무네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아닌게아니라 뒷문이 열려진 채였고 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 뒤란이 내다보였으며 방안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야무어매는 습관처럼 방에 걸레질을 하며 “너거들은 옛말하고 산다. 영호네, 나는 와 이렇겠노. 갈수록 태산이다.” 걸레를 구석에 밀어붙여 놓고 티라도 들어간 것처럼 눈을 비빈다. “사람 사는 기이 다 안 그렇십니까. 병자만 좋아지믄 오복이할무이도 무신 걱정이 있십니까?” “말해 머하겄노. 아랫방의 자아만 나으믄 내사 내일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겄다. 불쌍한 우리 야무, 따따스리 밥 한 끼 못 무고 십여년을 객지 생활 함시로 에미하고 동생은 살게 해놨는데 지 몸이 저지경 되었으니 참말로 내가 죄 많은 에미다.” “너무 심로 마이소. 설마 좋아지겄지요.” “그러씨…… 조금 기동은 한다마는.” 야무네의 얼굴으 ㄴ여전히 어두웠다. 그 어둠은 다만 야무의 신병탓만은 아닌 듯싶었다. “그래 할 얘기란 멋꼬?” “맘도 안 편하신데 지가 이런 말을 해야 좋을지.” “마음 편할 날이 어디 있나. 그날이 그날이지. 말해봐라.” “어젯밤에 영호아배하고 의논을 해지마는, 우리 영호 때문에…… 핵교도 중도지폐하고 집에 있이니 맘을 못 잡는 모앵이라요.” “그럴 기다. 와 안 그렇겄노.” “지 맴이사 서울이나 일본에 가서 하든 공부를 더 하고 싶겄지요. 그럴 성시도 안 되지마는 또 붙잽히가믄 우짜꼬, 부모 맘에 안 그렇십니까. 그래서 장개라도 보내믄 우떨까, 맘 붙이고, 나이도 그럴 나이 아닙니까. 아니 늦었이믄 늦었지.” 영호네는 말하기 난감해하는 표정이었고 야무어매는 담박 영호 page 4부 3권 93 네가 찾아온 뜻을 알아차린다. “실은 어제 성자할무이 말심도 있고 해서 밤에 영호아배하고 의논도 했십니다.” “주막집 숙이한테 중신들어달라 그 말 아니가? 그렇제?” 야무어매는 처음으로 웃었다. “아, 아닙니다. 중신을 들어달라기보다 오복할무이 생각은 우쩐고 싶기도 하고 의논 삼아서.” 난감해하면서도 영호네는 매우 신중하다. “의논하고 자시고 있나. 아아가 그만하믄 잘 컸지. 참하고 심성 곱고, 처지가 그래 그렇지 이 근동에서 그만한 아이는 없다.” “야, 지도 그 처니는 보아서 압니다. 조신하고, 그런데 영호가 우찌 생각할까 싶기도 하고.” 하다가는 영호네는 당황한다. 너희들 처지에? 비난을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모가 하라 카믄 하는 기지. 무슨 소리고.” “요새 아아들은, 신식이 머리에 들어가서 주장을 하는 갑데요. 우리 처지에 푼수없는 말이지마는 자식도 머리가 커져놓은께.” “실은 영산댁이 나보고 한 말이 있었네라.” “주막집 할무이가요?” “응, 한복이 집에서 우리 숙이를 우찌 생가하는지 말 좀 건네보라 하더마. 그런 참에 우리 큰아이가 저리 돼가지고 돌아왔이니 무슨 경황이 있었겄나. 잊어부리고 정신이 없었제.” “야. 그래서 성자할무이가.” “음, 천일어매한테 말한 일이 있었다. 영산댁 말로는 죽은 남정네, 와 그 팔난봉 겉은 남정네가 어디서 낳았는지 아들이라 캄씨로 찾아왔는데 그놈이 숙이를 채고 들앉을 심산이라, 몽둥이를 드록 쫓아내기는 했으나 늘 맴이 안 놓인다 하믄서 서둘러 숙이를 치웠으믄 하는 기라.” “그 소문은 지도 들었십니다.” “전생에 무슨 인연인지 피도 살도 안 닿은 남의 자식을, 우리가 page 94 보기에도 숙이한테는 공자라. 일구월심 숙이를 앉힐 자리 앉히겄다 그 생각뿐인 기라. 남한테 빠지지 않게 혼수도 장만할 기다 카고. 우리끼리니께 까놓고 얘기하자믄 너거들도 혼처 구하기 심든 처지 아니가.” “그거는 그렇지요.” “내 말 섭섭히 듣지 마라. 아이가 혼자 떠돌아댕긴 것도 아니고 아비가 영산댁한테 맽기고 갔으니, 또 주막에 있다 캐도 영산댁이 술심부름 시킨 것도 아니고 우리 요조숙녀 요조숙녀 함서 얼매나 떠받들었노.” 혼자 떠돌아다닌 것도 아니라는 것은 영호네에겐 가슴 아픈 말이었다. 그러나 야무어매가 가슴 아프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닌 것도 안다. 혼자 떠돈 너도 이렇게 자식 낳고 잘살지 않는가, 그런 뜻인 것도 안다. “그라믄 그 아아 시집보내고 나믄 주막집 할무이는 우째 살 긴고요.” “절에나 가서 있일 모앵이더만. 영호네 딴 생각 말고 내 말 들어라. 이 일은 너거들을 위해서도 성사해야 한다. 내 말 알아듣겄제?” “야.” “서로가 다 사람 하나 보고 하는 것이니 영 딴 생각 마라.” “그런데 맘에 끼는 일이 하나 있어서.” “맘에 끼는 일이라니?” “소문을 믿어서가 아니라 저기 그런께 말해도 되겄는지.” “니새 나새 말 못할 기 머 있노.” “최참판댁 둘째도련님하고 어쩌고.” 하자 야무어매는 웃었다. “그 얘기라 카믄 나도 안다. 그 기이 까닭이 있제. 최참판댁 작은 도련님이 바람을 잡아 댕기다가 강가에 스러진 거를 숙이가 본 기라. 해서 영산댁하고 함께 주막까지 데리온 긴데.” “그기이 그런데,” “빨래터 얘기가.” page 4부 3권 95 “야.” “하여간에 말 많은 기이 탈이라. 생각을 해봐라. 쓰러졌을 직에 도움을 받았으니 만나믄 인사하는 기이 정한 이치고, 또 그 댁의 작은도련님은 예사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 모두 공펴키 살아야 한께 또 높고 낮은 기이 없인께 함시로 도련님이라 불러도 질색을 한다는 기라. 그렇기 차별을 아니 둔게 숙이한테도 말을 건 거 아니겄나. 그라고 또 숙이가 엄전한께 그 댁 도련님이 만의 일이라도 마음을 두었다 치자. 그기이 너거한테 못할 기이 머 있노. 최참판댁 도련님이 마음을 둔 처자를 며누리로 데리온다믄 그야말로 영광아니가. 숙이가 지 처지를 아는데 빨래터에서 말 몇 마디 걸었다고, 그거는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소리고오. 그러이 내 생각에는 빠르믄 빠를수록 혼사 성사시키는 기이 좋다.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지만 최참판댁에서도 좋아할 일이 아니가. 소문이 그렇다믄 그 소문 지우는 것이 된께.” “말을 듣고 보이 그렇소.” 영호네는 비로소 얼굴이 환해진다. page 96 08장 수유리에서 푹푹 찌는 날씨였다. 흐르는 땀도 땀이지만 습기찬 공기가 치덕치덕 몸을 휘감았다. 붉귀신 물귀신이 한꺼번에 달겨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칠 지경으로 더운 날이었다. 춥다든가 덥다든가 시원하다든가, 혹은 경치가 좋다 나쁘다, 용모가 어떻고 따위의 감각적 표현에 절제가 강하 유인성은 음식에 관해서도 누가 맛이 있네 없네, 짜네 싱겁네, 그런 말을 할라치면 “맛이 있으면 맛나게 먹어. 맛이 없으면 수저를 놓고. 사내자식이 채신머리없이 그러는 게 아니야.” 따금하게 일침을 놓아 상대를 무색하게 하였다. 그런 유인성도 오늘 같은 날시는 견디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람의 방문을 활 page 96 짝 열어놓고 안동포 적삼의 고름을 풀어헤친 채 연신 땀을 닦다가 부채질을 하다가, 그러고 있는데 선우 형제가 찾아왔다. “이런 날 방구석에서 체력 소모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경제라는 거다.” 쪽문을 열고 좁은 사랑 마당으로 들어서며 선우일이 큰소리로 말했다. “불경제라……” 옷고름을 여미고 일어서며 유인성이 중얼거렸다. 회색 바지에 반소매 흰 셔츠를 입은 선우신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광대뼈가 솟고 양볼이 꺼져서 여우상 같은 그의 인상, 그러나 날카로움은 많이 마모된 듯했으나 달콤하고 깨끗해 뵈는 웃음은 전과 다르지 않앗다. 선우일은 마지의 양복 차림이었고 나비 넥타이에 파나마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올라오게. 왜 그리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가.” “아닐세, 나가자구.” 선우일이 말했다. “어디로?” “물 찾아가는 게지. 옷 갈아입고 나오게나.” “가시지요, 형님.” 선우신도 거들었다. “물 찾아간다구? 그렇담 옷 갈아입을 것도 없네.” 안동포 홑바지의 걷어올린 가랑이를 풀어내리고 다시 한 번만 접어올린 유인성은 밀짚 모자를 머리에 올렸다. “친구 따라 강남 가더라고, 그럼 나서볼까?” 대절하여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에 올라탄 세 사람은 우이동 골짜기를 찾았다. 물소리만 들어도 땀이 식는 것 같았다. 골짜기마다 수박·참외·복숭아, 싱그러운 여름 과일을 물에 담가놓고 여인네 아이들이 물맞이를 하고 있었다. 영계백숙을 뜯으며 소줏잔을 기울이는 남정네들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뜸해졌고 물소리만 줄기차게 들려왔다. page 4부 3권 97 “잘 왔지?” 선우일이 말했다. “그런 것 같네.” “자넨 표현에 인색해. 언제나 그렇거든.” “반풍수 안 되려고 그런다.” “비트는군.” “아니 다행이다. 이것저것 반풍수 아닌 게 없지.” “흠 이것저것이라…… 이것저것 다 대신해줄 놈이 있어야 물러날 것 아닌가. 빌어먹을 놈의 세상, 나 같은 놈을 세상이 만들었지. 모두 명분만 찾고 원칙만 고집하고 허니 어쩌겠나.” 선우신은 개울 한켠에 돌을 쌓아 흐르는 물을 막아서 수박, 참외를 담가놓고 그늘 밑의 평평한 바위에다 술병과 술안주 따위를 펴놓는다. 오늘 도중 매점에서 꾸려온 것들이다. “사방에서 욕은 바가지로 먹으면서, 그래도 어쩌겠나. 급하면 날 찾는걸.” “……” “이 선우일은 머슴이냐 피에로냐, 허허헛헛……” 유인성도 싱긋이 웃는다. 선우일은 양복 윗도리와 바지를 벗는다. 무릎까지 오는 인조견 속바지 밑에 종아리는 가늘고 희다. 노리끼한 털이 물결같이 밀려 있다. 유인성도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린다. “적삼 벗고 은가락지 낀다더니 그 꼴이 뭔고?” 유인성 말에 “아아.” 하다가 선우일은 나비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의 단추도 끄르고 소매를 걷어올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으며 물속에 발을 담근다. “시원하구나. 어이 시원타!” 선우일은 탄성을 질렀다. 선우신은 술자리를 펴놓은 바위 옆에서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은 뒤 유인성과 형을 바라본다. 이윽고 두 page 98 사내는 술자리에 와서 앉았다. 묘한 침묵이 한순간 흘렀다. 술을 마시고 수박을 베먹고 씨를 뱉으며 선우일이 먼저 입을 떼었다. “인실의 소식은 들었는가?” “……” “아직 소식을 모르고 있어?” “……” “형님한테 오가다가 찾아가지 않앗던가요?” 이번에는 선우신이 물었다. “왔더군.” “그러면 인실이 소식은 들었겠군.” 선우일 말에 선우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형님!” “왜?” “오가다가 인실씨 소식을 어찌 알겠어요. 그도 궁금해서 방학을 이용하여 나왔을 뿐인데.” 하자 인성이 “그애는,” 하다가 술을 마신다. “죽은 거나 다름없어.” “그게 무슨 뜻인가?” “자네 말 뜻 나는 모르겠네. 형무소 출입을 했기로 그건 조선의 딸로서 영광 아닌가.” 선우신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영광이라…… 영광, 하하핫핫…… 영광?” 유인성의 웃음 속에는 분노와 비애가 있었다. 잊을 만하면 어디선가, 누군가가 끌고 나와서 인성의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큰누이 인숙이 찾아왔다. 병석에 누워 있던 모친이 큰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가엾은 것, 가엾은 것 하며 흐느꼈던 것이다. 모친의 울음 속에는 아들 인성에 대한 원항오 있었 page 4부 3권 99 다. 인실이 집 나간 것은 지난봄이었다. “오빠, 인실이 죽어서 장사지내는 비용쯤 생각하시고 돈 좀 주세요.” 느닷없이 그런 말을 인실은 했다. “무슨 말버릇이 그러냐?” “절 믿으시지요.” “너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냐.” 유인성은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막내 인실을 사랑했다. 꺾이지 않는 그의 기상을 사랑했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신념대로 살 거예요. 강하게 살 거예요. 빈손으로 나가느니보다 얼마간의 돈 쥐고 나가야 오빠 마음도 덜 아플 거예요. 물론 전 지금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실이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인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긴 세월 인실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벌리고 돈 달라는 그 자체의 의미, 인실은 긴 세월이거나 아니면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서는 그같은 행동을 취할 성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성은 가족들 몰래 오백 원을 마련하여 인실에게 주었다. 오백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좀더 넉넉하게 주지 못했던 것이 한탄스러웠다. 인성은 그때 암울하고 오뇌에 젖어 있던 인실의 눈을 가끔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고 알지 못할 노여우을 느끼는데 오가다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실이 오가다의 아이를 배태했다는 사실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가다는 초라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밖에서 인실의 소식이라도 들었더라면 그는 결코 인성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성은 오가다를 보면서 일종의 안도감을 가졌다. 인실은 오가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갔을 거라고, 그러나 오가다의 진실에 연민을 느꼈다. 말없이 술을 마시다가 그는 돌아갔다. page 100 “사회가 인실씨를 잡아먹은 거지요. 배신에 대한 분노가 정당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지만 대중이란 쉽사리 등을 돌리더군요. 사회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 아닙니까.” 선우신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 말에 선우일은 찔금했다. “다행이네. 신이가 몽상에서 깨어난 건.” 유인성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선우일이 물었다. “자넨 관에다 못질할 때까지 의문으로 끝날 거야.”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누.” 그 말 대꾸는 없이 인성은 “사회 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라는 말은 맞는 말이네. 전폭적인 긍정으로 감상주의에 흐르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더더구나 민족주의를 휘두르고 나가는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민중에게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나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어리석어. 실체를 뚫어보지 않고 하는 일은 결국 붕괴된다.” 인성은 말을 계속할 듯했으나 그만둔다. “그래 어떤 뜻에선 사회가 인실을 배신했지. 그러나 인실이도 피해망상이었어. 친일파나 할 일 없는 한량들의 입방아쯤 무시해도 좋았던 게야. 누가 뭐래도 인실은 조선의 딸이고 조선의 잔다르크야.” “형님은 늘 그렇게 순진하시지요.” 선우신이 비꼬듯 말했다. “뭐라구?” “친일파 한량들이 뭐라 했습니까? 그들은 관심도 없어요. 소위 일한다는 것들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것들, 그것들이 계집같이 종알대는 주둥이를 몰라 그러십니까?” 평소 성격을 봐서 선우신의 어세는 매우 강했다. “주둥이 하나 가지고 다해먹는 놈들, 검거 선푸이 불면 이상하게도 빠져나가는 놈들, 개의할 것 없어. 나보고도 회색분자니 기회주 page 4부 3권 101 의자니 하며 매도하는데 정작 그들이야말로 정체가 뭔지 모르겠더군.” “그들 주둥이에 난도질 당할까봐 고분거리는 무리는 어떻고요.” “그만들 두게. 인실을 배신한 것은 없어. 뭐 그애가 거물이야?” 인성은 쓰게 웃다가 “차가운 눈길이나 노골적인 비난에 좌절할 인실은 아니야. 그애는 지 자신이 선택한 대로 갔을 뿐이다.” 유인성 말에 선우 형제는 입을 다물었다. “자아 술이나 붓게.” 선우신이 유인성 술잔에 술을 붓는다. “여름이 가고 나면 의돈형님이 나올 텐데. 나와도 세상이 뒤숭숭하니 걱정이야.” 선우일이 말했다. “가족들한테도 충분히 못해 서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소.” 계명회사건 때문에 잡혀간 사람 중에서 선우신, 유인성, 유인실 그리고 오가다 그 밖의 몇 사람은 비교적 일찍 풀려났고 작년에는 최길상(김길상)이 출소를 했으며 마지막 서의돈이 올 가을에는 형기를 마치고 나올 것이다. 그런데 선우일의 걱정과 자책 비슷한 말에 유인성은 왠지 냉담했다. “권오송이 나왔다며?” 서의돈에 관한 말을 묵살하고 인성은 말머리를 돌렸다. “나오기는 나왔는데 말들이 많아.” 권오송은 지난 늦봄 예맹 검거 때 잡혀갔다. 그러나 권오송은 예맹과는 깊은 관계가 없었고 오히려 약간의 알력도 있었던 터이어서 주위 사람들은 권오송의 검거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예맹검거 사건에 앞선 정월, 사무실 아래층 다실에서 저녁 늦은 시간, 극단 산호주는 실험 비슷하게 연극 동호인만 모아놓고 고리키의「밑바닥」을 공연한 바 있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니겠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취한 강선혜 때문에 더 말이 많은 모양이더군.” page 102 “나와서 일체 외부와 연락을 끊은 것도 오해에 부채질을 한 것 같습니다.” 선우신이 덧붙여서 말했다. “늘 있어온 일 아닌가.” 유인성은 가볍게 말했다. “그런 정도의 얘기가 아니네. 아주 흉측스러워. 사전에 양해가 되어 잡혀갔다는 말도 있고 극단 산호주에 정체 모를 전주가 붙었다는 말도 있고.” “권오송이가 이 모와 비교적 가까운 사이라 그런 말 듣는 거 아닐까?” “그 점도 있지. 과거 이 아무개가 총독부에 의해 회유되었던 것은 사실이고 지금 민족주의라는 미명 하에 매문 행위, 괴상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권오송에 관한 흉측한 소문이 사실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말치고는, 현실성이 없구먼. 이 모같이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도 아니고, 희곡 몇 편 썼기로 거의 대중에게는 알려진 사람도 아닌데.” “잡지하고 극단이 있거든.” “……” “만일 총독부의 손이 권오송에게 갔다면, 그건 이 아무개가 미치는 대중에의 영향을 꺾어버리려는 의도하고는 내용이 다를 게야. 이 아무개의 작업은 혼자 하는 것이지만 잡지 언저리에 모여드는 사람, 극단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 결국 예술인들 속을 파고 들어온다, 그렇게 봐야 하고 잡지나 극단의 방향도 일본 정책에 따라 조정할 수 있고, 한발 더 나아가서 친일의 선전장일 수도 있고 이건 어디까지나 가상이지만.” “그건 일본을 과소평가하여 하는 얘기다. 치밀하고 교활하며 황당하고 대담한 일본이 문화 정책을 내세웠다 하여 예술을 육성할 의사는 물론 없지만 예술인들을 이용하여 친일의 선전장으로 만들만큼 자신 없는 놈들도 아니라구. 이 모의 경우는 그가 지녔던 정치 page 4부 3권 103 적 비중 때문이지, 그의 문학에 있었던 건 아니야. 하기야 이 모에게 있어서 정치와 문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뭐, 권오송의 손을 빌릴 것도 없이 그들은 개인을 상대하며 회유하거나 위협할 수 있고, 극단쯤 몇 개 만드는 게 뭐 그리 대수겠나. 현재로선 조선의 예술 따위는 그들 안중에도 없어. 독립운동가, 수상한 사상을 가졌다 하면은 집어내는, 다만 그것뿐인 게야. 권오송이를 어쩌구저쩌구 하는 발상부터 황당하기 짝이 없다.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나?” “말의 진원지는 대강 짐작이 가네만 하여간.” “권오송이가 수완이 좋아서 잡지도 하고 극단도 있고, 그러나 사재를 털어넣을 만큼 자기 나르므이 사명감은 잇을 것이며 섣불리 돈에 넘어갈 그 따위로 우둔한 사람도 아니야.” “시기심이지요. 강선혜 씨가 적도 만들었구요. 결혼 전에 강여사는 좌충우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좌충우돌하게끔 몇몇 주변의 시선이 잔인했습니다.” 유인성은 술을 마시려다 말고 선우신을 쳐다본다. “동경 유학했다는 걸로 강여사 콧대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별재주도 없는, 그 남녀평등을 주장한 글 때문에 조롱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시를 쓰네 연극을 합네 하고 『청조』주변에 모여드는 사라들이 주로 그랬었지요. 인간이란 무리를 지으면 바닥 없이 잔인해지고 무책임해지고, 그건 마치 무대를 보는 관객과도 같이 신랄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철부지에다 돈푼깨나 있는 집 딸, 낭비를 일삼는 골, 보기에 아니꼬운 것은 사람의 상정이지만,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그런 자들도 까불어보아야 지가 마포강 강서방 딸이지 누구겠는가, 그런 주제에 동경 유학이라니,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언사로 내뱉는 겁니다. 상대가 모질고 표독스러웠으면 면대하여 그랬겠습니까? 심지가 약하고 보면 계속 짓밟는 겁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게 아니고 약점을 꺼내어 계속 망가뜨리는 거지요. 건드려도 별 해가 없을 것이다 하면 계속 건드리게 되는 속성, 주변에서 가세하게 되고, 여자가 뭐, 하는 것도 여자 page 104 가 지닌 특성보다 약자라는 전제 하에 감정이 자행되는 것 아닙니까. 무리란 상향과 하향, 양면을 지닌 것 같습니다. 무리가 사명으로 뭉쳐지면 지고선으로, 협동과 사랑으로 가지만, 힘으로 뭉쳐지면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공격의 대상을 찾게 되고 가장 취약한 것을 골라잡아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며, 크게는 다른 민족을 침해하고, 작게는 골목 대장식의 잔학성을 나타내는데…… 생각해보면 역사란 늘 그래왔다, 언제나 강자 편에서 있었다. 조그마한 그룹에서도 그런 것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뭔지 사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지요.” 선우신은 흥분하고 있었다. 강선혜르 ㄹ비호하는 말이라기보다 그는 오가다라는 일본 남자로 인해 취약점을 ㄹ안고 있다고 보는 인실의 처지를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인간 본성으로 확대되어 선우신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을 테지만. “막상 강여사가 오송형님하고 결혼을 하고 보니, 또 잡지나 극단에 강여사 쪽에서 출자를 하는 형편이고 보니 일이 묘하게 됐어요. 오송형님 주변에서 심히 강여사를 괄시했던 사람들 입장이 곤란해졌지요. 청조사 최기자도 사표를 내고 나갈 수밖에 없었지요. 이번에 검거 사건이 터지니까 그들은 은근히 좋아했을 겁니다. 어디 골탕 좀 먹어봐라, 『청조』도 망하고 산호주도 해산할 것이다. 한데 그 감정이란 게 줄기를 찾아보면 참으로 하찮은 것에서 출발했거던요. 그런데 그들의 뜻한 바와는 달리 오송형님이 나오게 되니 또 곤란해졌다 그 말입니다. 내친 걸음 되돌릴 수도 없는 고약한 루머가 퍼진 거지요. 한마디로 추악합니다. 아무 원수진 것도 없고 이해 상관도 없이 어는 서슬엔가 출발을 해서 험악한 관계로 치닫는 그런상황을 도처에서 보게 되면 정말 견딜 수가 없지요. 머리 박박 깎고 절에 가든지 동해물에 빠져죽고 싶어집니다. 독립이고 해방이고 뭐 되는 것 있겠습니까! 기아로부터 해방! 인간 소외로부터 해방! 빛 좋은 개살굽니다. 서로 유리 조각 들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서로의 살갗에 상처를 내는.” 선우신은 자신의 흥분을 깨달았는지 말을 끊었다. page 4부 3권 105 “언제나. 어디서나 있어왔던 일인 게야.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쓰레기는 나게 마련 아닌가. 지엽 때문에 근본을 망각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게야.” 선우신은 약간 무안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자네 같은 사람도 있으니 모든 것에는 다 양면이 있는 게야. 그는 그렇고 그놈의 잡지는 뭣하러 해.” “나쁠 거야 없지 않나. 좁은 우리들 지면을 생각하면.” 선우일이 말했다. “민적민적 민적거리고 있는 그가짓 것.” “폐간당하지 ㅇ낳으려면 할 수 없다. 없는 것보다 나아.” “없는 것보다 낫지가 않아.” “어째서?” “연극이란 사람을 모아야 되는 일이고 잡지가 있으면 사람 모으기 편리하긴 하지. 이론의 뒷받침도 되고 연극에 대한 계몽·관심도 확산되고, 우리 처지에선 미미한 거지만. 그러나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칫 잡지 하는 쪽의 추종자가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그런 면에서 오송이가 계산을 하는 모양인데, 그러나 잡지를 존속시키기 위해 미온적으로 계속하다 보면 알맹이는 빠져나가고 이해관계에 민감한 껍데기들만 난아서, 지금 오송이가 치르는 곤욕도 그런 선에서 비록된 거야. 세상 돌아가는 것은 물론 미흡하지만 신문이 있으니 내 생각에는 잡지보다 시집이나 창작집, 정선한 번역물 혹은 학술 논문 같은 것을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편이 낫겠어. 그건 우리들의 작업이라 할 수 있지만 총독부 눈치 보아가며 독자들 취향을 살려가며, 또 자기 측근에다 지면을 안배하려 하고, 죽도 밥도 아닌 꼴이 되지 뭐. 게다가 일본을 거쳐서 온, 그나마 일본서 선택되고 해석한 것을 재탕하자니 그것도 단편적으로 말씀이야. 궁색하기 짝이 없지. 한구석만 보고 사물의 전부라 생각하는 반풍수 만들기 십상이고 겉멋 든 속물들이 단편적인 것 치켜들고 지식인 행세나 하고, 그놈의 계몽주읜가 뭔가 하는 것을 보라고 와장창 부숴버리는 게 그들의 능사 아닌가. 엽전이 어떻고 page 106 자기 비하 자기 부정은 일본인과 궤도를 같이 하고 있거던. 마치 우리것을 부정하는 일이 독립에의 첩경이요 민족을 구제하는 거로 착각을 하고 있어. 그런 망상의 도배들을 나는 반역자라 규정하겠네. 문화란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것도 아닌게야. 독립이란 국토와 문화를 되찾고 지키는 것, 국토가 육신이라면 문화는 영혼인 게야. 뭐 그렇다고 해서 남의 것 무조건 배격하자, 그런 얘기는 아니네. 묵묵히 종전대로 사는 백성들 꼭대기에 서서 미치광이처럼 남의 것의 찬송가를 불러대는 소위 그 지식층, 산호주니,『청조』니 하는 따위의 극단이나 잡지 이름은 또 뭔고? 사이죠 야소풍인가? 사소한 일이지만 그런 경박함은 언젠가는 아래로 흘러 백성들의, 민족 전체의 경박성으로 화하는 게야.” 사이죠 야소는 사픈사픈 달작지근한 시를 쓰는 일본의 삼류 시인이다. “불과 십 년 전인 삼일운동 때도 아직은 우리의 뿌리가 남아 있었어. 십여 년 동안 무섭게 변했다. 더욱더 무섭게 변하겠지. 내가 걱정하는 거는, 악용당할 수도 있다……” “잡지 말인가?” “아까 소문이 어쩌구 했는데 사실 무근인 것은 알지만, 앞으로 오송이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지.” “내 생각에도.” “소문도 그러하니 쾅 때리고 폐간해버리는 게, 이용당하는 고통보다 덜 할 건데 나 같으면 그러겠다.” “그건 아까 얘기하고 다르지 않나?” “앞으로 달라질 거라는 예상이지. 만보산사건으로 전쟁이 된다면…… 일본의 야심이 도중하차는 아니할 게야.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양상이 나타나겠지. 안중에도 없는 조선의 예술인에게도 메가폰을 들릴 수도 있을 게고. 『청조』같은 것 폐간시켜버리면 그건 다행이지만 인원 동원의 도구로 쓰일 수도 있고 일본 찬송의 글 나부랭이 실어라 할 수 있고 악용당할 소지는 있지. 그와는 경우가 page 4부 3권 107 다르지만 『조선일보』의 경우, 아주 교묘하게 악용당하지 않앗나.” “그 일은 참 고약하게 됐지.” “이제 와서? 되놈들 다 때려잡자 하고서 입에 거품을 물던 작자가 누구였나. 그게 엊그제 일이야.” “그, 그때야 누구나 다 그랬었지. 신문의 요란한 기사 보고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선우일은 쩔쩔매며 얘기한다. “경거망동, 그게 민족주의가 가진 취약점이다. 민족주의만 내세우면 어떤 범죄도 합리화하는, 나는 오늘날 식민지 정책을 강행하는 나라에 대해 민족주의보다 국가주의, 그러니까 그건 제국주의지만 그들 스스로는 모두 민족주의자지. 생각해보게. 만보산에서 농민들의 충돌이 있었다 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을 습격하고 살상하고, 입맛 쓴 얘기야.” 유인성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물었다. 선우일은 술을 마시고 술에 약한 선우신은 안주로 사온 콩을 집어먹고 있었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 숲에서 찢어지게 우는 매미 소리, 물 마시러 왔을가 작은 새한 마리가 바위 사이를 건너뛰고 있었다. 오랫동안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자는 청맹과니더란 말인가.” 술잔을 내려다보며 유인성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누구 말인가?” “누구긴…… 기사를 넘긴 그자 말일세.” “하긴, 태수형도 비난을 하더군. 경거망동이었다구. 공산당 했던 김아무개 아닌가.” “그거 다 사회주의 낭인이 우굴거리는 동경서 보고 들은 때문이야.” “자네는 안 그런 것 같네구려.” 유인성은 쓴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물었다. “자네라면 어찌 했겠나?” 선우일은 page 108 “글쎄에.” “되놈들 모조리 때리잡아라, 기살 넘겼을 테지.” “너무들 그러지 말게. 자네같이 이성에 투철한 사람이 흔하겠나.” 비꼬아놓고 다시 “너무 그러는 것도 나는 불만이네. 동경진재 때 조선인 학살하고 뭐가 다르냐 하면서 지나치게 비난하는 것, 난 불만이야. 어째서 그 일하고 이 일이같으냐 말이야. 이번 사건은 역사적으로 쌓이고 쌓였던 우리 민족의 원한이 폭발한 거야. 물론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가 왜놈 계략에 놀아난 꼴이자만.” 하자 선우신이 말했다. “신문사에서는 전에도 특종을 보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장춘 주재기자의 통신을 그대로 받았다 하더군요.” “만보산사건의 진상은 몰랐다 하더라도 그곳에 있던 놈이면 그곳 실정쯤 파악하고 있어야지. 일본 기관에서 고의적으로 홀린 오보를 판단 없이 송고해? 의도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조선일보』는 어용지『경성일보』와 함께 일본의 계략을 도운 셈이야. 함정에 빠진거라 해도 좋고.” “하지만 우리 농민이 핍박받는 것은 사실 아닌가. 다지고 보면 그땅이 누구 땅인데? 태고적부터 우리 땅이었다구.” “꿈 같은 소리 하는군.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땅은 우리 땅이야?” 철없는 아우 바라보듯 유인성은 선우일을 본다. “지금 중국인들, 속속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있는데, 대체 일본은 어쩔 요량일까요?” 선우신이 물었다. “돌아가서 통곡하고 길길이 뛰고 외치라는 거지 뭐겠나. 중국을 싸움판으로 끌어내자는 일본의 수작이야. 중국이 총칼 들고 달려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본은 여러 가지 이득을 본 것이고, 그러지 않아도 재만 독립군이 발붙일 곳이 없고 독립운동도 날로 하기 어려워져가는 상황인데,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게야. 그리고 page 4부 3권 109 그곳 조선인들에게 핍박이 가중되면 될수록 일본에라도 의지하려들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형편없는 민족, 잔악하고 분열을 일삼는 조선 민족, 일본이 계속 목탁 두드리는 듯 해온 소리 아니었나. 국제적으로 실증이 되었으니 일본으로선 매우 만족스러웠을 게야. 게다가 중국인이 빠져나간 뒤 그들의 상권도 일본인이 차지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결과만을 따지는 건 역시 난 불만이야. 간도 땅은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 있는 우리 땅이라구. 우리 민족이 가서 살 권리가 있는 땅이야.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면 요동이 고구려 땅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고 말갈병을 일끌고 고구려는 요하를 넘어 요서까지 나간 일이 있어. 요서가 어디야? 몽고로 가는 곳 아닌가. 고구려의 광개토왕 때 동부여를 치고 예순네 개의 성을 공략했다 하니, 또 영류왕 때는 동북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의 장성을 쌓았다, 그러고 보면 그 영토의 넓이를 상상할 수 잇는 일 아닌가. 삼국이 통일됨녀서 당에 빼앗겼던 땅도 고구려인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으로 실지가 회복되었다 할 수 있고, 누가 알어? 우리 조상들이 우수리강, 흑룡강도 넘어을는지. 『동이전』이었던가? 어디서 보았는데, 하여간 우리 민족이 큰 활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그만큼 사정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가 되지. 십육세기에 와서 몽고 지배 하에 있던 러시아가 겨우 국가를 형성하였고 시베리아는 그보다 훨씬 후에 모피를 얻기 위하여 러시아가 개척했으니,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이 그곳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구.” “그럴 것 없이 이보게 동생, 하는 게 어떨고? 에스키모에게 말이야.” 유인성의 놀려대는 말은 들은 척하지 않고 선우일은 “그런 저런, 옛날 옛적, 고릿적 얘기는 다 그만두고라도 두만강 압록강으로 국경을 정한 것이 어디 우리였나? 우리였느냐고! 왜놈들이 저희 마음대로 조약을 맺은 거 아닌가. 나라 안이 쑥밭이던 이조 말엽에도 조선은 결코 간도를 포기 안 했어. 이중하는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선을 좁힐 수 없다 했어. 간도는 우리 땅인 게야. page 110 왜 우리 백성이 되놈한테 구걸하고 살아야 하나.” “태평성세에 풍월 읊는 그 따위 소리 하면 뭘 해. 그러면 한반도는 조선인이 일본에 갖다바쳤단 말인가? 왜놈 마음대로 한 짓이 아니란 말인가? 집안이 불바단데 들판의 볏가리 챙기러 뛰어나가는 꼴이군.” 유인성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선우일의 말이나 분노를 잘못이라 할 수는 없었다. 흑룡강을 넘고 우수리강을 넘고 어쩌고하는 말은 당소 황당했을지 모르지만, 간도가 우리 민족의 원한이 사무쳐 있는 곳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지난날, 용정촌 상의학교의 젊은 교사였던 송장환은 생도들에게 말하기를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쓰러뜨려 삼국을 통일하여 팔백 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는 통일의 대가로 요동 일대의 우리 영토와 영토 내의 수많은 우리 백성을 잃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청인들 속에 우리가 잃은 조상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 간도도 옛날에는 우리 땅이었고 가시덤불과 울창한 수림을 낫으로 헤치고 도끼로 찍어내어 용정촌을 만든 것도 우리들의 부모님이 아니었던가―사라져간 민족의 영광을 강조하고 물거품이 된 개척 정신을 애통해했던 송장환, 그의 비분은 나라를 빼앗긴 약자의 부질없는 감상이라 할 수 있겠고, 선우일 여깃 약자의 허세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본연의 어쩔 수 없는 감정이며 자신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도덕이기도 하다. 한말, 일본이 조선을 먹어들어올 무렵, 의병 봉기에 이어 오늘 현재까지 과히 민족의 대이동이라 할 만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으 ㄹ버리고 남부여대, 이주해갔고 항쟁의 터전으로 부상된 곳, 조선 민족에게는 서사시적 무대이며 아득한 옛적부터 민족의 혈흔이 점철된 그곳 간도의 땅을 선우일이 말한 대로 중국에게 결정적으로 넘겨준 것은 일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사살했던 그해, 1909년 청일간에 간도협약을 맺음으로써 그 땅은 청국으로 넘어갔다. 말하자면 일본은 두 걸음 전진하기 위 page 4부 3권 111 하여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간도를 중국 땅으로 확정지으면서 일본이 얻어낸 것은 일본 영사관 내지 영사관 분관을 설치하는 일이었고 장차 청국의 길장철도를 연길 남쪽까지 연장하여 회령의 조선 철도와 연락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영사관 설치는 조선 독립군을 색출 탄압하는 합법적 본거지가 될 것이며 철도의 연결은 병력과 군수품의 신속한 이송을 위한 장차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요동 일대가 한민족의 코토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밀리고 밀어붙이는 끊임없는 판도의 변화 속에서도 여진족은 금과 후금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기까지 대체로 한민족의 지배, 혹은 영향권 속에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주변 국가에 둘러싸여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던 만주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충지였으며, 어쩌면 반만년 역사에 단일 민족으로,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여 존속해왔던 조선은 만주라는 완충 지대의 덕분인지 모른다. 한민족과 중국, 몽고의 각축장이기도 했던, 그러나 대청제국이 성립되고 만주는 중국을 정복한 대제국으로 부상함으로써 완충 지대는 간도 지방으로 좁혀지고 고정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사정 또한 매우 복잡하게 되었던 것이다. 간도 지방에 할거했던 오란가이족과 충돌이 있어 사십여 호의 부족을 이끌고 돈화 방면으로 도주한 건주여직의 간타리족에서 청의 시조 누루하치가 나왔다 하여 그들 발생의 영지를 보존한다는 의지와 그밖에 정복한 타부족이 월경하여 도피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것을 방지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고 해서 1628년 청의 태종은 간도를 비원호고 피차 사월하는 것을 엄단한다, 그것을 제시하여 조선의 인조와의 사이에 협약을 맺은 것인데 소위 간광 지대로서 봉금한 것이다. 강약이 부동하여 조선은 불평등 협약에 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조선에서도 권리는 있었다. 이쪽에서 그 땅으로 넘어가면 아니 될 일이나 그쪽 역시 농부들이 넘어와 주거를 마련할 때 조선은 청에 통보하여 그들을 철수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옥한 땅, 국법이 아무리 엄하다 하여도 굶주린 쌍방의 백성들이 옥 page 112 토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청이 쇠퇴기에 들면서 간도 지방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 그 틈을 타서, 또 흉년을 맞이하여 많은 유민들이 그곳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런데 1881년 청은 도문강 동북의 간광지를 개간할 계획을 세워 미리 조선에게 통고하고 시찰을 한 바, 많은 조선 백성이 거주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해서 청은 변발하고 그들 복색에 따를 것이며 그들 정교에 복종 아니 하는 조선 백성은 간광지에서 나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선 백성은 그들 요구에 불응했고, 많은 유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그것은 심히 난감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의 동북경략사였던 어윤중이 종성의 사람, 김우식으로 하여금 백두산을 답사하게 하고 정계비와 토문강의 원류를 규명하게 한 것이 이 무렵이다. 그리하여 토문과 도문은 별개의 것으로서, 정계비에 씌어진 토문강은 북류하여 송화강에 이르는 것이므로 철수해야 할 조선 유민은 토문강 밖에 있는 사람에 한할 것이며 도문강 밖의 유민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은 청에다 제기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국경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1885년 두 나라는, 청의 가원계·진영, 조선의 이중하·조창식이 마주앉아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은 정계비에 씌어진 강 이름의 차이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아니하다가 실지를 답사하고 산천의 형세를 살핀 뒤 당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결판을 내리지 못하고 그들은 물러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차 삼차로, 담판은 속개되어 청은 협박으로 밀고 나왔으나 이중하는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을 좁힐 수는 없다 하여 강경히 맞섰던 것이다. 간도 내에 거주하는 유민 중 조선인이 십만이요 청인이 삼만, 십 대 삼이었지만 그간 대국의 세를 믿고 청인의 핍박을 조선 백성은 겪어야 했고 그 고초는 오죽했겠는가. 끊임없이 변발과 복색의 변경을 강요당하며 그러지 아니할 때 땅을 몰수당하는 등, 군과 경찰이 그들 수중에 있는 만큼 소수 청인들의 횡포는 격심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빗발 같은 간도 유민들의 보호 page 4부 3권 113 요청을 받은 조선 정부는 이범윤을 시찰원으로 파견하였고 이범윤은 동포들의 참상을 보고 정부의 허가를 무시한 채 사포대를 조직하여 청에 대항했다. 이범윤은 노일전쟁 때 러시아에 가담했는데 그것은 북청사변 때, 러시아가 진주했을 때 청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곳 백성들 경향에 따라 한 짓이며 그 역시 러시아의 힘을 빌어 청을 밀어내려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패전하게 되자 이범윤은 노령으로 잠적했던 것이다. 간도의 사정은 대강 이상으로 설명이 되었는데 그러면 만보산사건은 어떤 것이었는가. 동북 지방, 길림성의 장춘에서 서북방 삼십 킬로 지점에 있는 맘보산 부근에서 중국 농미노가 조선 농민의 충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일 관헌의 무력 충돌이라 해야 옳고, 더 정확하게는 무력 충돌이기보다 쌍방간의 시위로 보아야 옳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측 농민 한 사람이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 쌍방간에 사상자는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사건은 그렇게 엄청난 것으로 반전했고 국내 중국인 학살로 격화되었는가. 그러면 간도협약 이후의 간도 사정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말하여 간도의 백만을 헤아린다는 조선인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쿠션 같은 존재였다. 중국은 조선인을 때림으로써 일본을 때리는 효과를 얻으려 했고 일본은 조선인을 방패 삼아 밀고 나간다 할 수 있었으니까. 조선인의 대부분이 소작농과 고용의 입장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데 오 할의 소작료, 전수입의 일할 오부가 공과금, 팔부의 비싼 이자, 게다가 일본 경찰의 지배하에 있는 우리 백성들, 착취는 중국이, 탄압은 일본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간도 주민 자체가 완강한 저항 세력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찰권은 강화되고 일본 경찰권의 강화에 불안을 느끼는 중국은 조선독립운동을 저지하려 들었고 일본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는 만큼 조선인을 앞세워 토지 매수를 공작하고 중국은 또 불안하여 토지매매는커녕 토지상조궈에 대해서조차 창구를 닫아버리는 현상, 일본은 조선인의 국적 이탈을 절대로 승인 아니 하는가 page 114 하면 중국은 귀화해야 땅을 준다, 해서 이중 국적자는 늘어났고 따라서 조선인은 이중의 탄압에 신음해야 했다. 그리고 배일 민족운동은 조선인 배척운도으로 나타났는데 물론 일본의 앞잡이가 조선인에게 없지 않았으나 동북 정권의 일본을 업으려던 지난날의 행적이 있고 팽배해오는 배일 민족운동은 그들에게 일말의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켜 그 칼끝을 조선인 배척운동으로 돌려왔다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단순한 민족 배외운동으로 흐르기 쉬운 존재였기에 결과적으로 관민 모두가 합세하여 쫓기는, 상처입은 짐승 한 마리를 일본과 함께 몰아붙였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은 중국인이 조선인을 몰아붙이며 그럴수록 좋다. 독립운동의 지반이 없어지는 것이 우선 좋고 중국이 가혹해지면 그럴수록 조선인이 이롭네 기대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중국은 분쟁의 씨로 보기 때문에 조선인을 내몰려 하고 이런 사정에서 중국인 장롱도전공사 지배인이 만보산 부근의 토지 삼백 헥타르를 지주 열두 명으로부터 십 년 계약으로 빌려 그것을 아홉 사람의 조선인에게 빌려주었고 이들 빌린 사람은 이백여 명의 조선인을 동원하고 개간에 착수했는데 개간 비용의 삼천 원은 일본 영사관 감독하에 있는 조선인민회 금융부에서 조달하였고 수전의 설계, 씨앗 구십 석은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니까 애당초 문제가 있었던 공작으로 보아야 옳고 지주와 중각에 땅을 빌린 자와 또다시 조선인이 빌리는 이 과정에서 계약상의 하자도 있었으며, 그러나 무엇보다 수로 개설로 인근의 다른 농토에 침수 위험이 있다는 것이 분쟁 발단의 가장 큰 이유였다. 중국 농민들은 일을 막으려 했고 조선 농민은 강행하려 했고 중국 공안국에서 사람이 나오게 되고 일본 영사관에서 압력을 넣고 아홉 명의 조선인 개간 당사자가 체포되는가 하면 다시 영사관 경찰에서 충돌하고, 일은 확대일로로 치달아 무장한 쌍방 경찰, 보안대가 대치하고 이쪽저쪽농민들이 대치하고, 위기촉발의 상태로까지 갔던 것이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러나 쌍방간에 중국인 농부가 약간의 부상을 했을 page 4부 3권 115 뿐 사상자는 없었고, 결국 일본의 압도적 무력 하에 공사는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여러 가지 면에서 억울했던 것은 중국 농민측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7원 2일『조선일보』호외로 만보산사건은 조선 국내로 비화되었다. 일본 기관에서 흘린 허위 자료를 받은 장춘 주재의 기자가 본사에 타전했던 것이다. 남의 땅에서 가난한 내 동포가 생명에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강조한 그 보도는 순식간에 민족 감정을 자극했던 것이다. 7월 3일에 벌써 인천에서는 중국인 습격이 시작되었고 서울, 가장 격렬했던 곳은 평야이었다. 연이어 부산·신의주·원산, 학살된 중국인 백이십칠 명, 부상자 삼백구십삼 명, 물적 손해는 이백오십만 원에 이른다 했다. 이러는 동안 일본 경찰은 방관했고 또는 극히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물론 만보산사건이 파급되어 국내에서 일어났던 폭풍은 일본이 면밀하게 짜낸 각본 때문이었다. 칠월을 넘기고 팔월을 넘기고 구월 만주사변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page 116 09장 만주사변 송관수가 만주로 떠난 것은 중국인이 속속 본국으로 철수하던 그 무렵의 일이었다. 마주사변은 만보산사건 후 두 달을 넘긴 구월에 발발했는데 정확하게 구월십팔일 유조구의 만철 폭파로써 일본은 만주 침략의 각본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오랜 세월 그들은 얼마나 이 시기를 꿈꾸며 고대해왔는가. 얼마나 초조했으며 또 주저해왔는가. 만주의 군벌 장작림이 북평의 국민군을 내몰고 대원수가 되었으나 결국 북벌군 장개석에게 패하여 봉천으로 가던 열차에서 한때는 동업자였던 관동군에 의해 폭사했는데, 패전한 장작림을 뒤쫓아 국민군이 만주로 진격해올 경우 일본은 매우 불리한 입장이므로 관동군의 고급 참모 가와모토 다이사쿠의 공작에 의해 장작림을 폭살하고 동북 삼성을 혼란에 빠뜨려 page 116 단숨에 그들은 민주를 장악한다는,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1927년의 일이거니와 역시 만보산사건을 이용하여 던진 미끼를 중국은 물지 않아 일본의 희망은 또 한 번 무너졌다. 무저항방침을 견지하는 중국은 국토가 넓고 세월이 길어 그랬는가. 발버둥치는 일본은 섬나라, 시간이 짧았다고나 할까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정이 급박하게 되긴 했다.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국민정부와 합류한 것은 일본에게는 청천벽력이었을 터이고 중국 전토에 팽배한 반일·항일운동의 격화, 간도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조선인의 무장 봉기가 있었고, 수차 만주 땅에 침입한 바 있는 소련 또한 호시탐탐 남진을 노리고 있었다. 만주를 먹어치우겠다는 불타는 야망의 성취는커녕 자칫 잘못되면 일본은 기득권마저 잃게 될 형편이었던 것이다. 동지철도의 회수를 중국이 강행한 것을 보더라도. 일본의 국내 사정 역시 심각했다. 금융 공황은 경제계를 휩쓸었고 급속한 공업화에 과도한 군비 확장으로 농촌은 피폐해졌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주의 물결은 드세게 일렁였다. 불경기는 수많은 실업자를 거리로 내몰았으며 노동 쟁의는 격화일로, 사회 풍조는 퇴폐와 환락에 흠씬 젖어가고 있었다. 정계 또한 혼란의 연속이었다. 불발이었지만 삼월사건, 런던 군축조약을 들러싸고 천황의 통수권을 간범했다 하여 벌어진 소동, 하마구치 수상의 저격사건, 빈번한 내각의 경질, 일본으로선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만주로 향한 진격,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군부의 관동군 스스로 봉천역 북방 팔 키로 지점에 있는 유조구의 철도를 폭파한 뒤 장학량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면서 공격을 개시한 각본은 관동군의 고급 참모 이다가키 세이시로와 이시하라 간지의 작품이다. 공격을 개시한 십팔일에서 이십일일까지 관동군은 봉천·장춘·길림을 장악했고, 이듬해 이월까지 찌찌하루·금주·하얼빈 등, 사건이 발발한 후 불과 반년 만에 만리장성으로부터 노령인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중요 도시, 전략 거점을 점령했으며 이시하라하고 쌍벽인 모사꾼 도이하라 겐지 page 4부 3권 117 의 공작으로 천진 폭동을 유도하면서 교묘히 끌어낸 청의 마지막 항제 부의를 내걸고 1932년 3월 1일 드디어 일본은 대망의 만주국 괴뢰 정권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 동안 일본 정부는 세계의 여론을 두려워하여 사변의 불확대를 성명했으나 그것은 구두선에 불과했다. 신속하기가 질풍과도 같은 관동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고 일본 국민은 열렬히 만주 침략을 지지하고 나섰다. 만몽은 일본의 생명선이라 외치면서. 만몽이 일본의 생명선이라 한 것은 정우회 대의원이자 만철의 부총재를 역임한 바 있는 마쓰오카 요소케가 최초다. 그러나 오늘날 이본의 생명선이라고 누구나 말한다. 만몽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책은 그것을 우리 영토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시하라의 호언이었다. 일본 거리 거리에는 애조 띤 군가가 물결치고 퇴폐풍조는 하루아침에 군국주의로 결속이 되었다. 그리고 살찐 암소 같은 만주를 어떻게 요리해 먹을 것인지 군침을 삼키면서 상하 국민 모두가 대륙으로 나는 꿈에 부풀어 애국심은 고양되고 신국, 황도는 한층 공고해졌으며 군병은 신병으로 장엄시되었다. 이 모두가 세계의 주시 속에서 백주에 일어난 범죄였다. 국제간이 정의는 없다. 오직 잇속이 있을 뿐, 모두 어슷비슷한 약탈자이던 열강은 살찐 암송아지를 일본이 독식한다 싶었겠지만 세계적인 경제 공황에 국내 사정이 복잡하였고 실력을 행사할 처지도 아니었으니 입으로나마 떠들듯했으나 막상 소리나마 높인 것은 미국뿐이었다. 하니 중국이 태산같이 믿었던 국제연맹은 공기 빠진 고무풍선이었고, 조사단인가 뭔가 구성하기는 했지만 질풍을 막는 막대기 하나의 역할이라고나 할까. 걸작인 것은 연맹의 사무총장이라는 사람의 말이었는데 와, 일본은 수치를 모르느냐, 일본의 무사도는 어디 있느냐. 과연 일본의 무사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일본 무사도의 본질을 알고서 한 말이었을까. 여하튼 부의를 깃발로 세우고 일본이 만주국 수립을 선포하였는데 이에 앞서 중국의 항일 운동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대되어 특히 상해에선 십만 학생이 수업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왔으 page 118 며 부두 노동자수만 명이 반일 파업에 돌입하였고 상해 중국은행가협회까지 일본인과 관계를 끊음으로써 경제적 보복을 가하고 시민은 모두 항일 대열에 합류하여 격렬한 배척 운동이 전개되었다. 운동은 나약한 정부에 대한 응징으로도 흘러 외교부장 왕정정의 구타, 국민당사에 난입하여 요인들을 구타, 그 밖에도 항의행동은 속출하였다. 이때 일본은 상해에서 또다시 사악한 음모를 실행하였다. 소위 일본 승려 살상 사건이다. 세계의 이목을 만주에서 돌려놓기 위해 만주 건국의 주모자인 관동군 이다가키의 의뢰를 받은 상해 주재 육군 무관 다나카 류키치가 중국인을 매수하여 승려를 죽이게 했고 범인이 달아난 공장을 습격한 것은 다나카의 지시를 받은 일본의 우익 단체 청년동지회의 회원들이었다. 물론 일본은 즉각 병력을 증강했다. 그리고 일본 영사는 상해 시장에게 시장의 사과, 범인의 체포·처벌, 배일 단체의 즉각 해산 등 네 가지 항목을 시한부로 내밀었다. 수락되지 않기를 바란 일본은 그러나 의외로 시장이 요구를 수락한 것에 당황하면서 수락을 무시하고 육전대로써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이것이 상해사변이다. 무사통과를 예상했던 일본은 분노에 불탄 십구로군의 격렬한 반격과 항쟁의 강한 의지 앞에, 또 중국 민중의 열렬한 군의지지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3월3일, 만주에서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일본은 정전을 성명했다. 송관수가 들어간 만주의 급변한 사정은 대강 이상으로 설명이 되었고, 자아 그러면 지리산의 우리 해도사와 소지감 선생의 동향은 어떠했는가. 해도사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소지감은 돌 위에 엉덩이를 박고 앉아서 해도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작년 음력으로 삼월 삼짇날 밤 김두만의 집을 습격한 두 사내 중 한 사람은 물론 송관수였고 서울 말씨에 젊은 남자는 소지감의 외사촌, 형평사운동에 가담했던 최범준이었다. 그리고 이도영의 집으로 간 손태산을 담위로 밀어올려주고 담 밑에서 기다린 사내는 양필구다. 석이의 전처, 그러니까 성환과 남희의 생모 양을례의 배다른 오라비로서 그 page 4부 3권 119 는 손태산에게도 변성명을 하여 정체를 감추었고 일부러 강한 사투리를 쓰기도 했다. 필구는 과거 석이와는 처남 매부지간이었지만 친구이기도 했다. 최범준과 함께 일을 해왔으며 식자층인 그는 다소 냉소적인 일면이 없지 않았으나 을례와는 딴판으로 심지가 굳고 능력 있는 일꾼이었다. 그날의 돈은 소지감과 해도사가 양편에 갈라져서 릴레이식으로 옮겼으며 도솔암 일진이 보관했고, 최범준과 양필구는 구례로 갔는데 양필구와 동명인 윤필구집에 피신해 있다가 서울로 갔다. 송관수는 강쇠를 따라 광주리장수로 떠돌면서 더러는 통영 조병수 집에 묵기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일진과 함께 만주로 간 것이다.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떠나시오.” 연장 망태에 연장을 챙겨 넣으며 해도사가 말했다. “어느 누가 날 잡아.” 소지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나 약간 난처해하는 빛도 있었다. 수일 전에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 끝에 일이 우습게 되어버렸다. 해도사는 살던 산막의 일체를 소지감에게 떠넘기고 떠나게 된 것이다. 말이 산막이지 구석구석 손질이 잘 되어 조촐했고 필요한 세간은 모두 구비된 데다 장무새며 뒤꼍에 묻어놓은 머루주, 십 년이 넘는 더덕으로 담근 술이며, 술이 소지감을 유혹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밥도 짓고 심부름도 곧잘하며 이제는 철이 든 몽치를 두고 간다는 것이다. 상당한 거리이긴 했지만 아래쪽엔 도솔암이 있었고 왼편으로 곧장 가면 강쇠의 산막이 있어서 오고 가고 반나절 거리, 왔다갔다 할 수도 있었다. 해도사는 연장 망태와 갈청같이 얇은 이불 하나, 옷 몇 벌, 당장에 끓여먹을 기구들을 꾸리면서 피아골 쪽에 쓸 만한 목기막 하나를 봐두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떠났다가 오고 싶으면 또 오는 거구, 새도 둥지가 있는 법인데.” 홀가분해진 해도사는 히쭉히쭉 웃었다. “누구 말이오?” “누구긴 소선생이지요. 나야 뭐 옮겨봤자 산속이지.” 사실 해도사는 홀가분했다. 진작부터 털고 일어날 심산으로 안서 page 120 방보고 와서 살라는 말도 했었다. 그때만 해도 강쇠 곁이 아니면 죽는 줄 알았던지 안서방은 도통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후론 팔자에 없는 훈장질 하느라 매여버린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어째 일이 재미없게 된 것 같구먼.” 햇볕 따라 돌에서 축담으로 옮겨앉으며 소지감이 말했다. “지금 와서 그래봐야 소용없소이다.” “내가 자주 와서 귀찮아진 거요? 내빼는 거 아니오?” “내뺀다…… 그런 점도 있겠지요. 산은 원래 인내를 싫어하고 산짐승도 인내를 싫어하고 산사람도 그러니,” “흥, 산놈은 사람 아닌가?” “사람이로되,” 하다가 “역마살 든 소선생도 인내야 반쯤 빠진 사람이지. 하니 이 산막의 주인으론 자격이 없지도 않고.” “거 징그러운 소리 마시오. 주인이라니.” “왜요? 천년만년 묶어둘까봐 겁이 나는 거요?” “도사께서 왜 이러시오.” “산사람하고 역마살 든 사람하고는 골육간이라, 말뚝 박아놓고 베리줄에 묶여서는 못 사는 사람, 집이 있으되 산에서는 그게 집이던가. 내가 있으되 그게 어디 나이던가. 내가 있으므로 남이 있는 것, 남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 남이 없는데 어찌 내가 있을꼬. 소선생께서는 오십 평생을 해인으로 왔건만 그거 말장 허행이었었소. 아직 자신으로부터 풀려나지 못하니 눈먼 말이 은령 소리만 듣고왔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하다가 “은령 소리 듣기론 눈먼 말이나 눈뜬 말이나 매일반이지.” 그 말대꾸는 하지 않고 해도사는 “산에는 갈구리질하는 관속도 없고요, 채찍 들고 호령하는 상전도 없고 다락같은 소작료, 못 내면 딸년이라도 내놔라 할 지주도 없 page 4부 3권 121 고, 그래저ㅐ 해서 죄지은 사람 억울한 사람 잡아가두는 감옥도 없고 누가 하라마라 할 사람이 있소? 불질러 화전 부쳐먹다가 땅심 덜어지면 옮겨가고 임자 없는 열매, 임자 없는 산채,” “허니 무정부주의다,” “아암 암요.” “그러니까 선남선녀들이다,” “무도한 인사가 없다 할 수는 없으나 빼앗아갈 재화가 산속에 있어야지. 하여도 명줄은 이어갈 수 있는 곳,” “지상천국이구려.” “산에 맛을 딜이고 한번 인이 박혀버리면 산을 더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시쳇말로 자유라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것이다, 그 말인데 신선이 무어이겠소? 소위 자유인, 풀려난 사람 아니겠소이까? 어디 사람뿐이겠소? 천지만물 생명 있는 것, 그 모두가 남에게서 풀려나면 나로부터도 풀려나는 게요. 수십 년 기나긴 성상 소지감선생께서 헤매고 다닌 것은 무슨 까닭이요? 골육에서 풀려나고자, 윤리 도덕에서 풀려나고자 한 몸부림 아니외까?” “도사 말씀대로 하자면 독립운동하는 놈들 모두 시러배자식들이군.” “원칙으로는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이오. 독립이다, 침략이다, 그것다 없느니 못한 것 아니겠소?” “침략이 없었으면 독립운동도 없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 소지감은 소리내어 웃었다. 웃거나 말거나 해도사는 “무리를 짓고 당을 만들고 그게 민족이요, 국가요, 법이오. 그야아 인간이란 똑똑하고도 영악한 조물이니 어쩌겠소. 그러나 생명을 만들고 운행하게 한 조물의 법보다 신기할 수는 없는 것,” “그럴싸하게 늘어놓기는 하오만 말같이 쉬운 것이라면 해도사와 소지감이 이렇게 앉아서, 한 사람은 짐을 꾸리고, 그렇게는 안 되었을 것이오.” “말이 쉬운 것이 아니지요. 이치가 쉬운 것이요 명료한 것인데 사람들이 어렵게, 어렵게 사는 탓으로 쉬운 것을 알질 못하는 거요.” page 122 어쨌거나 두 사람은 죽이 맞는다. 내용이야 있건 없건 말은 이들에게서 장단인 것이다. 짊어지기에 알맞게 짐을 꾸린 해도사는 손을 털고 일어섰다. 먼산을 한번 바라보고 집터 주변을 돌아보고 나서 해도사는 마당에 멍석을 깔았다. “몽치야? 술상 내오너라.” 족제비를 보고 마당 앞뒤를 쏘다니던 몽치는 예상하고 있었소, 하듯 “예애……” 늘어져빠진 대답을 했다. 진다래철은 갔다. 골짜기마다, 개울가 바위틈에 철쭉은 터질 듯 봉오리를 물고 있었다. 궐련을 붙여문 소지감의 망연한 눈이 구름을 보고 있다. 산새 소리는 왜 그리 요란한지 알 자리를 찾는가, 수컷을 부르는가, 산, 산, 끝이 없이 연이어진 산, 눈으로 생각으로도 가늠해볼 수 없고 침묵도 언어로서도 아무 소용이 없는 산, 말이건 생각이건 다람쥐가 가먹고 버린 도토리 껍질만큼 쓸모도 없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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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인실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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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동경의 인실
인실이 머물고 있는 호리가와의 시영 주택을 찾아가는 찬하는 갈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곤욕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그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곤욕스런 방문을 한 번도 아니요 거의 관례적으로 한 주일에 한 번 정도 실행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이 딱하기도 했었다. 굳이 이유를 따져본다면 그 항구에 오가다와 인실을 남겨 놓고 도망치다시피 혼자 와버렸으니 책임이 전혀 없다 할 수는 없었고 오가다와의 우정을 이유로 삼을 수도 있었다. 또 유인실이 동포라는 것도 이유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여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가다와 인실의 문제요 찬하가 간여하지 않는다 하여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어려운 형편이라면 얼마간의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그것만으로도 찬하는 도리를 다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인실이 청하는 도움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경제적인 준비는 되어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지난 칠월 초순의 일이다. 조선에서 일어난 배화 폭동이 날로 확대되고 격렬해진다는 신문 기사를 찬하는 읽고 있었다. 만주 길림성에 있는 만보산 부근에서 중국인 농민과 조선 농민 상에 벌어진 충돌 사건이 [조선일보] 호외로 시작하여, 연이어 선동적인 기사로 사건이 보도되면서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 습격 학살이라는 엄청난 참극이 각처에서 자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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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조선인의 어리석음과 일본의 사악함이 교묘히 맞아떨어지면서 저질러진 어처구니없는 만행이었으며 대만의 무사사건을 연상케 하였다.
‘비겁하고 비천하군. 이래가지고는 구제불능이다. 진재 때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을 무슨 낯짝 치켜들고 비난을 하겠나. 참으로 혐오스럽다!’
신문을 꾸겨쥐는데 배달된 편지 한 통을 하녀인 하루가 가져왔던 것이다. 편지를 볼 기분도 아니어서 하루에게 차를 끓여오라 이르고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곳에서는 사상자가 있었다는 보도도 없었는데 이건 무슨 미친지랄인가!’
찬하는 온종일 기분이 언짢아 있었다. 저녁밥을 들 때도 그의 얼굴은 우울해 뵜다. 현재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찬하로 하여금 분개하게 했고 깊은 실망을 갖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양식 있는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다 그랬을 테니가. 그러나 찬하의 감정이 요즘 균형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녁을 끝냈을 때 아내인 노리코가 안색이 좋지 않다, 기분이 안 좋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찬하는 고개만 흔들고 서재로 돌아왔다. 한나절을 내버려두었던 편지를 찬하는 무심히 집어들고 봉함을 돌려보았다. 뜻밖에도 유인실이라는 이름이 정확한 필치로 적혀 있었다. 편지의 발송지는 서울이 아닌 동경이었다.
제례하옵고,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조선생님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선생께서 지장이 없으시면 오는 칠일, 시간을 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히비야 공회당 앞에서 오후 세시부터 네시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못 오셔도 저로서는 하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간단하고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찬하는 왠지 가슴이 철렁했다. 불가피한 사정이라는 말이 갖는 긴박감도 그러했으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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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하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그 말에서 절박한 인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일까?’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실이 관헌에게 쫓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인실은 히비야 공회당 건물 한곁에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찬하를 먼발치로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찬하가 가까이까지가는 동안 줄곧 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오라기 흩트리지 않게 치올려서 빗은 머리를 모아 고무줄로 동여매고 흰 바탕에 회색 물방울 무늬가 있는 헐렁한 원피스를 인실은 입고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찬하가 먼저 인사를 했다. 인실은 잠자코 있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다시 찬하가 말했다. 인실은 웃지 않았다. 고개만 숙여 인사를 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몰라보게 여위어 있었다. 관골은 날카롭게 보였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그늘에 가서, 벤치에 앉을까요?”
하면서 인실은 앞서 걸음을 옮겨놓는다. 여윈 얼굴이며 어깻죽지와는 다르게 헐렁한 원피스 속에서 움직이는 몸은 몹시 비대해 있었다. 찬하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누가 뒤에서 자신의 목을 누르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나!’
찬하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밴 땀을 닦으며 걷는다.
‘죽일 놈! 지가 감히.’
했으나 찬하는 이상하게 오가다에 대한 연민을 가슴 뜨겁게 느낀다. 두 사람은 숲 사이에 있는 벤치에 앉는다. 푸른 수목, 수목은 푸르기보다 검게 보였다. 그 속에 있는 인실은 마치 풀물을 들인것처럼 더욱 푸르게 보여, 그것은 찬하의 착각이었지만, 녹색의 여인 같은 느낌을 준다. 소나기가 쏟아질 직전처럼, 번개가 칠 직전처럼 검은 숲속의 공간은 파아랗게 느껴졌고 그 공간에 있는 인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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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여인이었다.
“죄송합니다.”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구만리 밖을 바라보기나 하듯 인실이 말했다.
“웬일이세요?”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실은 찬하의 목소리를 저울질이나 하듯 동공을 한곳에 모았다.
“추악한 모습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동경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온 지 오래 됐습니다.”
“못 만나보셨습니까?”
왠지 찬하는 인실이 오가다를 만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
“지금 그 사람 삿포로에 있습니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더군요.”
“……”
“만나셔야지요. 제가 연락을 해드릴까요?”
“아니요.”
“……”
“저는 그분을 찾아 일본에 온 건 아닙니다.”
먼 곳에 있던 인실의 시선이 돌아와서 자기 발, 하얀 운동화로 옮겨진다.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조선생님께선 아시겠지요.”
“……”
“우리는 이제 다 끝났습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두렵지도 않습니다. 다만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
“진실이 현실에서는 추악하게 뵈는 것은…… 왜 그럴까요.”
찬하는 인실의 말을 들으면서 도덕과 휴머니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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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르고말구요. 때론 다를 정도가 아니라 상반되는 거 아닙니까.’
하던 오가다의 말이 생각났다.
“인류가 서로 적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결코 현실에서 놓여날 순 없지만 추악하다는 생각을 마십시오. 우린 다만 소외당할 뿐입니다.”
“우리……”
인실은 비로소 찬하가 일본 여자와 결혼한 것을 상기한 것 같았다.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인실씨와 저의 사정이 다르긴 합니다만 미온적인 저로서는 괴로움 같은 것도 뱃멀미하듯이 합니다만 치열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고통도 치열하겠습니다만.”
말은 모두 무의미하고 피상적이었다. 숲 사이로 산책 나온 사람들이 꽤 많이 서성대고 있었다. 비가 오시려는지 날씨는 무더웠고 불어오는 바람도 후텁지근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날개를 치켜들고 열심히 주둥이로 털을 고르고 있었다.
‘임명희…… 임명희 그도 사랑을 하면 인실씨 같은까?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는 않겠지. 왜 나는 그 사람 생각을 또 할까? 정떨어지게 포악하기까지 했던 여자를!’
찬하는 웅크러드는 마음을 펴듯 어깨를 펴면서 강해진 어세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조선생님.”
“네. 말씀하십시오.”
“선생님을 만나뵙고자 한 것은 아이 문제 때문입니다.”
순간 인실의 눈은 표독스럽게 빛났다. 찬하는 당황한다. 이미 짐작했던 일이다. 그러나 막상 인실의 입에서 아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것도 주저함이 없이 마치 칼날을 들이대듯, 당황할밖에 없었다.
“전 아이를 조선에서 낳고 싶지 않았습니다. 낳아서도 조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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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가지는 않을 겁니다. 아이는 이곳에 있어야 해요.”
수백 번 수천 번 연습한 대사처럼 인실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다. 얼마 많이, 얼마나 지독하게 수치심을 갈고 갈아서 그 수치심은 완전히 마모되고 말았는가. 인실은 차라리 도도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해합니다.”
오히려 찬하 쪽에서 숨이 가빴다. 속으론 이런 빌어먹을! 하면서도 허둥지둥 다시 말했다. “하면은 인실씨는 가신다 그 말씀입니까? 아이는 두고.”
“만주, 아니면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처럼 말입니다. 소외된 채 살아볼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그 사람하고 결혼해서……”
찬하의 목소리는 차츰 소곤거리듯 낮아졌다. 한동안 인실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그런 자세는 아니었다. 멍청히,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듯이. 그러다가 말을 했다.
“우리는 끝났습니다.”
“이 사실을 오기다상이 압니까?”
“아니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상의한 뒤 두 분이 끝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는데 갑자기 인실의 목소리가 잠긴다.
“저는 그분한테 생명보다 중한 것을 주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줄 것이 없어요.”
생명보다 중한 것,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찬하는 안다. 조국에 헌신할 것을 맹서한 여자가 그 조국에 반역 행위를 했다는 뜻이 더욱 깊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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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찬하는
“이제는 그 사람한테 받으십시오.”
하고 말했던 것이다.
“제가 설명을 해야만 아시겠습니까? 하기는 선생님이 알아야 할 의무는 없는 거지요. 저는 울부짖었습니다. 우리의 진실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저의 행동은 마땅히 돌로 쳐죽여야 할 배신인 것을 저 자신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어느것에도 승복 안 할 결심입니다. 저는 새롭게 시작할 거예요. 그렇습니다. 저는 속죄할 그 아무것도 없고 인간을 몰아넣는 그 비정한 것과 싸울 거예요.”
잠긴 목소리였으나 말은 여전히 또박또박했다. 그러나 인실의 내부는 거의 광란 상태인 것을 찬하는 느꼈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미쳤는지 몰라요. 결국, 그렇지요. 아이는 일본에 있어야 합니다. 오가다 지로의 자식도 유인실의 자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낳은 생명일 뿐이예요.”
“인실씨!”
“……”
“그 사람한테 갑시다. 우리 가서 의논합시다.”
“그럴 생각이면 왜 제가 조선생님을 만나뵙자고 했겠습니까? 전, 전 아이를 낳은 후의 방도가 막연합니다. 길가에 버릴 수도 없고, 병원에서도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조선생님께서 주선해주십시오, 아일 길러줄 곳을.”
인실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왜 오가다상하고 의논을 안 하려 합니까? 그는 아이의 아버집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건 안 돼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왜지요? 왜 그래야 합니까?”
찬하는 떼를 쓰듯 말했다.
“우린 끝났어요. 절대로 다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아이의 아버지도, 아이의 엄마도 아, 아니어야…… 절대로 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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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껴 운다. 작은 새 한 마리같이 흐느낀다.
“자신을 다 버리고, 자신을 다, 송두리째 주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할 것 가, 같았어요. 언제까지나 그 사람 생각할 것 같았어요. 그 사람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이런 결과가 나타날 것은 모, 몰랐지요.”
더욱 흐느낀다.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울음 그치시오! 자아 울음 그치시오!”
찬하는 분노를 느끼며 소리치다시피 했다. 찬하 자신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비극에 자신도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들 눈에 이들은 사연 많은 연인들로 비쳤을 것이다. 그 후 호리가와의 시영 주택 이층에 방을 하나 빌려 있는 인실을 찬하가 찾아갈 때 그때마다 사연 많은 남녀로 오해를 받게 되었다. 누군가가 찬하에게 당신이 아이 아버지요? 당신이 그 여자 남편이오? 애인이오? 하고 물어준다면 모를까, 찬하는 그 오해를 변명할 길이 없었다. 저희들 마음대로 애인이다, 아이아비다, 아니 숨겨놓은 여자다, 그런 식으로 상상하는데,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뭐라 하겠는가. 등골에 땀이 흐를 만큼 곤욕스러울 뿐이었다. 찬하는 현재 자신의 역할을 아내인 노리코에게 떠넘길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인실이 어디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버릴 것만 같아서 생각을 고쳐먹은 일이 있었다. 오늘도 찬하는 그 곤욕스런 방문을 감행하기 위해 백화점에서 과일 바구니를 하나 사들었다.
백화점을 나서려는데
“어머! 산카상!”
여자가 물었다.
“아아.”
찬하는 걸음을 멈추며 엉거주춤 인사를 한다.
“오래간만이에요.”
“그렇군요.”
여자는 세련된 양장이었고 나이는 노리코보다 서너 살 위, 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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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의 외사촌인 노다 마리코다.
“과일 바구니 들고, 어디 병문안?”
“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바쁘지 않으면 커피 한잔 마시지 않겠어요?”
“그러지요.”
두 사람은 백화점 가까운 끽다점으로 들어간다.
“노리코랑 아이랑 모두 건강해요?”
차를 마시며 마리코는 안부를 묻는다.
“괜찮습니다.”
“이런 우연 아니면 산카상 만나보기 힘드네요.”
“원래 게을러서요.”
“귀족이라 우릴 얕보는 거 아닌가요.”
“별말씀을, 노다상이 누군데 얕보겠습니까.”
마리코의 남편은 상당한 고급 관리다.
“그래 지금은 뭘 하세요?”
“집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지요.”
“하기야 산카사은 부자니까, 집에서 학문을 연구할 수도 있지요.”
“번역 따위가 연굽니까?” 찬하는 웃는다.
“그것도 일종의 영문학 연구 아니겠어요?”
“글쎄요……”
“학교는 왜 그만두었지요?”
“오래된 얘긴데요, 있으면 뭐합니까?”
“왜?”
“일본에서 중학의 교사 자리 하나도 조선인에게 내주지 않는데 대학의 강좌를 얻는다는 건 미친 사람의 꿈이겠지요.”
“아아, 그건 심하군. 말도 안 돼, 그건 옳지 않아요.”
“할 수 없지요. 그런 것 모르셨습니까?”
마리코는 좀 당황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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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산카상은 다르지 않아요?”
“다를 것 없어요. 저의 국적은 엄연히 조선이니까요.”
순간 마리코의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나도 조선의 식민지 정책엔 비판적이예요. 민족성이 어떻다는 둥하는 말에 대해서도 그건 일본인의 편견이라 했지요. 하지만 지난 칠월에 있었던 지나인 학살을 신문지상에서 보고 놀랬어요. 산카상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천인공노할 만행이지요.”
“정말 야만적이었어요. 난 신문 보고 떨었어요. 얼마나 놀랬는지.”
“무지몽매한 소치지요.”
“네. 맞아요. 평소 내 인식도 싹 달라지더군. 이젠 일본인의 편견이란 말은 못하겠지요?”
“그렇습니까?”
찬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요. 우리도 일본인에 대한 것이 편견이라 하여 나무라던 사람에게 얼굴을 치켜들 수 없게 됐습니다. 이제는 진재 때 조선인 학살에 대해 말 못하게 됐지요.”
“어머! 산카상도 참 짓궂은 데가 있네요.”
했으나 마리코의 얼굴에는 완전히 불쾌한 빛이 나타났다. 찬하는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이제 실례해야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끽다점을 나서는 찬하는 구역질을 느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차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마리코 언닌 좀 대샤바리예요.’
비교적 남의 흉을 보지 않는 노리코가 그런 말을 했었다. 대샤바리란 잘난 체, 남의 앞에서 나서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차에서 내려 시영 주택 어귀에 들어서면서 찬하는
‘어째 마음이 요즘에 자꾸 격해지는 걸까. 뭔가 치사스러워. 왜놈한테 동냥이나 한 것 같은 기분이야. 오늘은 두 번 다시 안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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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기까지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 그 따위 생각은 말자. 인실씨는 우리 조선 사람들의 누이가 아닌가.’
거북한 인실과의 대면은 그랬고 주위 눈빛도 피부에 닿는 가시같았어 찬하는 방문을 하고 집을 나섰을 때는 언제나 다시 안 오겠다. 아일 낳았다는 기별이 있기까지는 안 올 것이다, 그렇게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면 그는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실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 때문이다.
“형체도 남기지 앟는 파괴,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에요. 어느 곳 어느 때든 그것만은 저의 권리고 자유니까요.”
그 말을 했을 때 찬하는 인실이 미웠다. 그러나 그에게 눌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 무심결에 튀어나왔을 뿐 겁을 주기 위해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찬하는 여러 번 삿포로에 있는 오가다에게 연락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자신이 떠맡은 일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리코에게 떠넘기려다 말았던 것처럼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실이 오가다를 만나게 된다면 스스로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찬하는 배짱이 두둑한 편은 아니었지만 단호하고 냉정한 일면이 있었고 결코 허약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러나 히비야 공원에서 인실을 만나는 순간 그들의 비극에 사로잡힌 것은 연민 때문이겠으나 한편 인실에 투영된 자신을 보았을지 모르고 은둔에 가까운 동경 생활의 숨막히는 자기 폐쇄에서 출구를 찾는 몸부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집주인 여자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속발에 누리끼한 빗을 꽂고 길쭉한 여자의 얼굴, 입 언저리에 검정 사마귀가 있었다. 찬하는 그 사마귀를 볼 때마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여자는,
“오십시오. 이번에는 좀 늦었군요.”
하며 묘하게 웃었다. 교태 같기도 했고 비웃음 같기도 했다. 매번 겪게 되는 일이었지만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물론 여자는 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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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찾아오는 남자에 대하여. 그러나 아는 사람, 그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인실은 여자 호기심을 채워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주변에 신경을 쓸 그럴 여유도 없었다. 사실 아는 사람이라는 이상의 할말도 없었던 것이다.
“올라가보십시오.”
“네.”
“젊은 여자가 혼자서, 참 안됐어요.”
예의 바르고 점잖고 귀공자 같은 찬하, 어떤 뜻에선 귀공자이기도 한 조찬하에 대하여 여자는 항상 정중하기는 했었다.
“여러 가지로 신세가 많습니다.”
“홀몸이 아니니까 저도 마음이 쓰이는 거지요.”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잘 닦여져서 미끄러운 계단을 밟으며 올라간다. 인실의 신상에 불안을 느낄 때 계단의 수는 많은 것 같았고 거북한 대면을 생각할 때 계단의 수는 너무 적은 것 같았다. 방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방문을 두드린다.
“네”
“조찬합니다.”
“네.”
언제나처럼 인실은 무릎을 모으고 등은 벽에 기대이듯 앉아 있었다. 그는 숨이 찬 듯했고 허리 둘레는 더 커졌으나 반대로 팔과 어깻죽지는 더욱 여위어 보였다.
“어떻습니까?”
과일 바구니를 한 곁에 놓아두고 자리에 앉으며 찬하는 또 물었다.
“괜찮습니까?”
처음 찬하가 찾아왔을 때 인실은,
“이제 오시지 마십시오.”
했다. 그 말은 찬하가 찾아갈 때마다 잊지 않고 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인실은 그 말을 안 하게 되었다. 어차피 찬하는 올 것이기 때문에 그랬는지 자기 생각에 몰두하여 사소한 일은 모두 잊고 있어 그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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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츠키소이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츠키소이란 병자를 돌보아주는 직업인으로, 간호원하고는 달라서 허드렛일까지 다 하는 사람이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필요할 때 여기 아주머니한테 부탁하겠어요.”
“내일이라도, 제가 한 사람 보내드릴까요?”
“아닙니다. 아직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식사 준비까지 하시려면…… 그리고 방도 어디 아래층으로 옮기든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인실은 순간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사양이 아닌, 제발 날 가만히 내버려두어 달라는 부탁인 것이었다. 일어서야 마땅한 것인데 찬하는 몸이 붙은 것처럼 일어설 수가 없었다. 혼자 있고 싶어하는 인실이, 찬하 역시 숨이 막힐 것 같은 장소에게 피해 달아나고 싶었는데…… 역시 연민이었다. 그것은 찬하 가슴 밑바닥에 우러나느 연민 때문이었다. 찬하는 지금 자기집 뜰에 한창인 수국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축축한 음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수국, 병자 방에는 꽂지 않는다는 그 수국이 녹색으로 변했을 때, 찬하는 히비야 공원에서 녹색의 여인으로 착각한 인실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이다.
서로 멍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다. 인실은 찬하가 있는 것도 잊은 듯했다. 찬하는 이 막연한 침묵을 깰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실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가, 서울의 가족들에게는 해방이라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한 얘기였지만 다시 물어볼 수는 있었다. 오가다에 관한 얘기를 한 번쯤 더 꺼내어 심경의 변화를 촉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찬하는 안다, 인실이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태어날 아이의 문제인 것이다. 인실은 찬하가 나타날 때마다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상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찬하에게는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없었다. 아니 방안이 없었다기보다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판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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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있다는 것이 옳고, 그보다는 그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가끔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사도코로 보내면 어떨까. 그러나 그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사도코란 시골 가정에 양육비를 주고 아이를 맡기는 것이었는데, 일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엄마가 약하다든지 병들어다든지 아이가 많다든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아이를 시골 가정에다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도 유모를 들이는 대신 그런 방법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있었다. 찬하가 선뜻 그 말을 하고 나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는 시간을 기다리며 인실의 심경에 변화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모른다.
‘세상을 등지고 어느 산골에 가서 남 몰래 두 사람이 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민족이라는 굴레 같은 것 벗어던져 버리고 계급이라는 그 따위 남의 일 관여치 말고…… 민족이란 도시 무엇인가. 이것에는 다분히 허식이 있다. 자애하는 이기심도 분명히 있다, 침해하는 쪽이나 침해당하는 쪽이나.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민족이란…… 결국 필요에 의해 흩어지지 않고 모인 집단, 무리를 짓는 동물과 같이 생존을 위한 집단이 아닌가. 다만 좀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인간은 본능을 사랑이라 하고, 외로움에서 필사적으로 도주하려는 것을 사랑이라 하고 진실이라고도 한다. 이런 불안정한 인간들을 수용한 집단은 조국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한 핏줄이라는 끈으로 묶어놓고 일방통행을 한다. 조국! 핏줄! 그것은 절대적인 것인가? 항구불멸의 것으로 이탈하면 안 되는 것인가? 생존을 위한 공동체, 그것은 과연 공동체였던가? 민족을, 국가를, 그리고 소수를 위해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 밑깔개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 대하여 민족적인 분노를 느낀 것은 그것은 감정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그것처럼, 거의 이성은 아니다. 그러나 저 여자의 경우는 감정보다 이성이 더 강한 것 같다. 만일 동족끼리 불륜으로 사생아를 낳았다면 저 여자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 그는 수모를 감내하면서 아이를 길렀을 거야. 버리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남자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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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태어날 또 하나의 생명, 이들의 결합을 저해하는 것은 지금 민족이라는 명제다. 큰 것은 항상 작은 것을 말살하고 먹어치운다. 이 정당성, 이 논리는 끝이 없는 것일까? 끝이 없는 것이다! 끝이없는……’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리고 호주머니 속에서 휴지를 꺼내어 담뱃재를 턴다. 담뱃재를 털면서 찬하는 인실을 빌려 현재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끄러움 같기도 하고 아픔 같기도 한 것이 잠시 스쳤으나 이내 가슴이 답답했다. 사방 벽에 주먹질하지만 뜷고 나갈 길이 없는 막막함. 삶 자체에 대하여, 진실이나 진리에 대하여 어느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막막함, 절망을 느낀다. 방안은 밝은 편이었다. 육조 다다미방에는 하다 못해 벽면에 옷가지 하나 걸린 게 없었다. 방안은 이사간 뒤처럼 비어 있었다. 방 길이의 절반쯤 오시이래(벽장)가 있었는데 아마 모든 소지품은 그 속에 넣어둔 모양이다. 유리창 밖의 난간에 손수건 두 장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유리창 밖의 하늘에는 구름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미풍이 이따금 불어와서 후덥한 몸과 마음을 식혀주곤 한다.
‘일본 여자들에겐 그런 갈등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노리코의 경우도 거의 그것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하기는 일본 여자하고 사는 조선 남자는 더러 있지만 일본 남자와 조선 여자가 함께 사는 그런 것은 본 일이 없으니까. 조선 여자는 아예 쇠대문을 내려놓고, 그 쇠대문을 뚫고 나왔으니 저 여자는 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지. 그런 의식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모화 사상이 지배적이던 시절에도 여자가 이민족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그들은 고국과 절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실씨도 만주나 중국으로 가겠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영원히 고국에는 아니 오겠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그 의식의 벽에 갇힌 옛날의 조선 여인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여자들, 인실씨는 그들과 조금도 달라진 여자가 아니더란 말인가? 오히려 그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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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더 철저하게 물론 정조관도 그러했겠지만 반일 사상의 불덩이 같았던 여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그의 말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참으로 엄청난 이율배반이다. 그는 적어도 사회주의에 물든 여자가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관습적 의식과 사상에 다소는 간격이 있게 마련이지만 인실씨는 어느 측면에서도 그 도랑이 너무 깊고 넓다. 그것은 극복되어야 해. 모순이야, 모순. 자신을 찢어발기는 결과밖에는 없다. 진실, 진리? 그것은 과연 옳기만 한가? 선, 절대 선일 수만은 없다. 인간이 죽는 것 하나의 진실이다. 그 진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쫓기며 간다. 하면은 그것을 극복하는 것밖에 인간은 달리 길이 없는 것이다. 흥!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게지? 밥 세 끼 먹고 할 일 없는 돼지가 사변의 노예가 될 자격이나 있는가? 관두자, 관두어. 끝이 없다.’
한 그릇의 밥보다 상아탑이 그리 값진 것은 아니야 하던 어느 친구의 말이 찬하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그것 돼지의 발상이다.’
어느 친구가 그 말에 응수했다.
‘뭐 별다를 게 없네 이 친구야. 자네 생각만큼 인간은 위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위대하다는 것은 인간의 자화자찬인 게야. 누구 심판관 있어? 신이 모습을 드러내어야 진상을 알 게 아니냐 말이다. 결국 인간도 밥그릇 때문에 사워온 거 아니냐, 내 말은 그거야.’
인실은 망연한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형무소에 있을 때 감방안에서 인실은 저런 모습은 온종일 앉아 있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찬하는 일어사야 한다. 이제 가야지 하면서도 방을 나서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입 언저리에 가만 사마귀가 있는 집주인여자와 부딪칠 것이 지겨웠다. 어쩌면 인실이 따로, 자기 따로의 뭔지 모를 골똘한 시간에 스스로 얽매여 있는 것을 찬하는 좋아했는지 모른다.
‘오가다는 인실씨를 알고부터 코스모폴리탄인가 뭔가, 그렇게 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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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아니면 그 사상 때문에 저 여잘 사랑하게 됐을까? 이건 또 뭐야? 별 시시한 생각을 다 하는군. 오가다는 다만 여자를 사랑했고 인실씨는 다만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게야. 도시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 도시 이 여자는 누구인가? 조선의 잔다르크라도 된단 말인가? 그런 거창한 여자는 아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연소시키며 자기 완성을 꾀하려는 것인가? 그것 역시 너무 거창하다. 이 여자는 자신 속에 타인과 자신이 공존하는 그런 박애주의? 그것도 물론 아니다. 이 여잔 그런 위선자가 되기엔 너무 말뚱말뚱하다. 조선의 여자가 갇혀 있었던 곳에서 빠져나와 가장 첨단의 흐름속에 뛰어들어 그 두 개의 이빨 속에 생각과 몸이 짓이겨지는, 다만 그런 희생자에 불과한 걸가? 뭔가 이 여자는 정리를 해야 해. 어느 것이든 하나를 극복해야 해. 개미 쳇바퀴 돌듯 나는 언제까지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헛된 자문자답, 끝나지도 않을 일, 이건 망상이다. 끝없는 망상이다.’
거리 쪽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각에 두부장수가 다니지도 않을 터인데 찬하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종소리는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럼.”
하다가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서려는데,
“고맙습니다.”
인실의 말에 찬하는 놀라는 듯 돌아본다.
“아,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찬하는 밖으로 나왔다. 죄송하다는 말은 여러 번 했으나 인실이 고맙다는 말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찬하가 돌아가고 난 뒤 인실은 여전히 벽에 기대이듯 하고 앉아서 손수건 두 장이 널려 있는 난간 밖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하늘과 구름과 손수건뿐인 공간, 그 공간에 이따금 새가 질러가곤 했다. 가라앉은 시간이다. 의식 속에서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질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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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가라앉은 시간에서 일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같이, 덫에 걸린 짐승같이, 감겨오는 시간의 실구리, 번데기가 되고 말 것 같다. 인실은 그것을 떠밀어내듯 몸짓을 하며 일어섰다. 일어선 뒤에도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벽장 문을 열고 트렁크 위에 개켜놓은 옷을 꺼내어 갈아입는다. 흰바탕에 회색 물방울 무늬의 헐렁한 그 원피스다. 머리를 매만지고 왕골로 만든 여름용 손가방을 찾아든 인실은 그 속에 지갑을 넣고 손수건을 넣고 책보를 접어서 넣는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방을 나간다. 예정일은 넉넉하게 한 달은 남아 있었다. 진작부터 배를 싸매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임신부임을 알 수는 있었지만 배가 남산만 하지는 않았다.
전차를 타고 내리고 하면서 인실이 간 곳은 신주쿠에 있는 미츠코시 백화점이었다. 그는 백화점을 배회하다가 양말 한 켤레를 샀고, 또 몇 바퀴를 돌아다니다 손수건 한 장을 샀고, 한참 후 그는 다시 갓난아이의 모자를 하나 샀다. 그러나 그는 물건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온 것은 아니었다. 물건은 목적도 의미도 없이, 배회하는 장소에 사용료를 지불하듯 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호리가와의 그 이층 방에는 혼자 있어도 늘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방안의 물건을 모조리 벽장 속에 넣어버리고 빈방같이 했지만 여전히 옆에 누가 있는 것만 같았다. 여름이엉서 다소 줄기는 했지만 역시 백화점 안은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인파 속을 천천히 누비고 다니면 인실은 마치 무인지경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는 장소에서 탈출하기 위해, 정지된 시간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외출을 했다. 지하철을 타고 아사쿠사에서 내려 아사쿠사 일ㄹ대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고, 어떤 때는 마루비루(마루베니 빌딩)가 있는 오피스가들 돌아다니기도 했다. 전차를 타고 가다가 아무 곳에서나 내려서 한없이 걷기도 했다. 동경에 왔을 그 무렵, 그때는 지금같이 몸이 무겁지 않았기 때문에 더 멀리까지 가서 쏘다녔다. 교토에도 갔었고 나라에도 갔었다. 아시노고(하코네 산에 있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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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서 청록색 물빛을 언제가지나 내려다보고 서 있었으며 요코하마 부둣가에까지 가서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항구에는 어마어마한 배들이 떠 있었다. 상선이 있었고 여객선도 있었다.
인실은 작은 항구, 적옥이란 빨간 네온의 카페가 있던 그밤의 항구를 생각하고 검정옷에 창백했던 명희를 생각햇다. 기차를 타고 전차를 타고, 마치 피리어드를 찍는 것처럼 레일을 지나가는 진동의 하나하나, 그것은 일각일각 시간에서 탈출하고 있다는 실감이었다. 걷는 것도 그러했다. 한발한발 내디딜 때마다 시간을 잡아먹으며 앞을 향해, 아무튼 어느 정거장이든 내리게 될 것이라는, 희미하지만 그것은 희망이었다. 얼마간의 안도감이기도 했다. 길고 긴 동경 체류, 기간은 몇 개월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인실에게는 십 년 백 년의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백화점에서 나왔다. 해가 떨어지고 밖은 황혼이었다. 해 지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거리는 사람에 밀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네온사인과 불빛, 거대한 도시는 무지개에 싸인 듯 아슴아슴하다가 황혼이 차츰 짙어지는 데 따라 찬란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완숙한 과일의 방향과도 같고 어쩌면 부패하기 시작한 향기와도 같은 도시의 입김을 풍기면서,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금빛 황혼의 사람 같았다. 설레이면서 밤을 맞이할 차비를 하고 꿈꾸듯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기쿠치 간의 진주부인을 소망하는 여자가 걸어가고, 베를렌의 번역시에 홀린 청년이 걸어가고 달콤한 허무주의 달콤한 비관주의, 도시의 황혼은 그리고 여름의 황혼은 미풍에 흔들리는 가로수와 더불어 달콤하고 슬프게 사람들을 매혹한다. 도시의 애수, 영광과 자부와 그리고 착각, 어둠이 밀려오면서 네온사인은 한결 선명해진다. 별보다 가깝고 별보다 미려하고, 나폴레옹도 아이스크림의 맛은 모를 것이다! 새삼 그 말을 상기하게 하는 네온사인. 인실은 가로수 밑에 서 있었다. 모던하고 스마트하고 엑조틱하고, 비록 영화 간판 같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만끽하고 지향하는 무리와는 동떨어져서 착각이나 환상의 여지가 없는 부른 배를 안고 인실은 동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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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이 군사, 토목, 법제에 주력하면서 정복자의 면모를 약여케 한 바 있었고 특히 토목은 그 규모가 거대 웅장하여 대로마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사위를 진경케 했듯이 관동대진재 이후 일본의 토목은 실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섬나라 일본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대국 청나라를 누르고 노랑머리 파란눈의 외경하여 마지 않는 배인의 나라 러시아르 견제하고 아시아에서 강국으로 도약, 천재일우의 시기를 맞이한 그들, 그들이 즐겨 썼던 촌스런 말 중에 일등 국민이라는 것이 있는데, 소위 일등 국민에 걸맞게, 아니 그 이상으로 외모를 갖추어야겠다는 욕망이야 새삼 말할 나위 없는 일, 그야말로 미증유의 마천룬들 아니 세우고 싶었겠는가. 게다짝 시고 안짱걸음 걸으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 살피듯 땅을 보고 걷는 그들 습성일지라도 새로운 것이면 모조리, 큰 것이면 모조리 개미떼같이 달려들어 건설한 도시, 농염한 시다마치 무스메(에도에 사는 하층민의 딸)나 규범에 투철한 하가쿠레부시(충성을 맹서한 무사) 같은 존재는 잔잔바라바라(칼싸움) 영화라는 무대가 있기는 하되 안방에 모셔진 불단처럼 에도(동경의 옛 이름)의 자취를 걷어낸 동경에는 파리가 있었고, 런던·뉴욕도 있었다. 루바시카의 모스크바도 있었다. 유행이라면 무엇이든지 사회 전반에서 현기증 나게 탈바꿈을 거듭하는데, 환락가·유흥가·연예계는 구미를 뺨칠 만큼 개방적이며, 성냥갑이나 포스터의 나체 그림은 그들의 전통인 남녀 혼욕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에로구로(선정적이고 괴기적인)의 엔본(원본: 값싼 책)이 홍수같이 쏟아져나오고 신바시의 게이샤(기생)가 사교댄스를 추는 것도 꽤 오랜 일이며, 졸부의 부인들은 골프를 치고, 하기는 도시건설은 진재 이전에도 샐러리맨 일만 명을 수용하고 하루 출입자가 삼만이 넘는다는 매머드 마루비루를 세웠으니 일본인들의 팽창주의거대 일변도, 물론 그것은 도시나 문물에 한한 것은 아니었고 군국주의를 관통하는 주된 흐름인 동시에 세계로 뻗으려는 그들의 야망이었다. 한편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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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 죽이는 데 아이쿠치(비수)가 필요 없다. 즉, 장마가 계속되면 노가다는 비수 없이도 굶어죽게 돼 있다는 뜻인데, 도시 뒤켠에는 그같은 계층이 있고 농촌에서는 소작료가 밀렸다 하여 농가의 농기구에 빨간 딱지가 붙는 현실, 정쟁이 있고 암살이 있고 쿠데타의 기도가 있고 계급투쟁·노동쟁의·여성해방의 운동이 있고, 노동자 열 명의 이십 년 월급조다 훨신 많은 돈을 방 하나 치장하는데 스는 나리킨(성금: 벼락부자)이 있고,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일본의 얼굴이 뿐이다. 분을 바르건 성형수술을 하건, 보기 흉한 종기에는 반창고를 붙이건 잘라내버리건 그것은 얼굴에 다름없다. 천하무적의 군비, 일본의 심장은 그것으로 뛰고 있는 것이다.『삼국유사』에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벼랑의 철쭉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읊은 「헌화가」, 겨울 참나무 같은 노인의 무사한 멋에서 연상되는 것은 출진하는 남편 투구에 향을 사르는 일본 여인이다. 생과 사를 초월한 멋에 얼핏 공통점이 있는 듯싶지만 우리는 향을 사르는 여인에게서 전쟁의 미학을 보는 것이다. 아무튼 모집으로 끌려온 조선의 수많은 백성이 무서운 채직 아래 이승과 저승을 헤맬 때, 물론 그들은 동경의 찬란한 불빛을 알 턱이 없고 일본의 힘을 과시하는 도시를 본 적도 없고 환락가의 지분 짙은 여자웃음 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 오지의 탄광촌 바라크에서 꿈도 없는 지친 잠자리의 그들은 일본의 힘을 채찍에서 느끼고 목검에서 느낄 뿐 더 이상 죽여야만 할 기도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동경 유학생들의 동경을 바라보는 심회는 어떠했을까? 모집으로 끌려온 노동자와 동경 유학생, 사정이 다르다. 사정이 다른 정도가아니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지금은 여름방학이어서 대부분 조선으로 돌아갔을 테지만 더러 남아 있는 사람 중에는 적지 심장부 동경 거리에서 휘청거리고 있을 유학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력이건 두뇌건 혹은 문벌이건, 그들은 선택받아 이곳에 왔다. 희소가치의 존재로서도 그들의 자긍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긍심은 동경에서 온전했을까? 이조 오백 년 차별 대우를 뼛속깊이 맛보아야 했던 서출들처럼 이들은 동경 땅에서 뼈에 사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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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차별 대우를 어떻게 감내했을까. 사사건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일각일각 부딪치는 것은 내 땅을 빼앗고, 내 존엄성을 빼앗고, 뿌리를 뽑고 짓밟는 그들 일본의 실상을 동경 유학생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그 힘에 경도되어 칼을 꺾으며 경의를 표했을까? 거대한 힘에 공포를 느꼈을까? 아니면 이를 갈고 증오했을까? 부러움, 모멸감, 내일을 기한 인내심? 어쨌거나 명분에서 따지자면 그들은 민족에 대한 배신, 내 백성에 등을 돌리고 왔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으리라. 그들의 대부분이 출세 지향이었으니까. 일본 치하의 출세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조선에서 종래의 지식인, 지도적인 지식인이었던 선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 자리를 이어받을 동경유학생들, 그들의 갈등과 고뇌는 개인적으로 비극이지만 그것은 또 조선 민족의 비극이다. 합리주의적 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묻혀올 일본의 가치관이 역사를 난도질하고 민족정신을 파괴할 위험 부담은 심각하다. 그 맥락은 후일 오랫동안 스며들어 자기 부정의 자해 현상으로 조선 백성은 시달리게 될 것이다. 사실 엽전이라는 자학은 유학생 사이에 팽배해 있고, 생업이 없이도 살 만한 계층에서는 쉽사리 댄디즘의 무풍지대로 도망치고 학문은 어디 산 홍차, 어디 산 양복지의 값어치로 전락했다. 또한 어느 무리는 반일의 거점을 사회주의로 찾을 수밖에 없었고, 또한 어느 무리는 계몽주의에 의거하여 기독교와 연합하면서 우리것을 파괴하는데, 그것은 실로 일본이 바라는 바이다. 또 이들은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어느 무리는 미래의 관직을 꿈꾸며 육법전서를 맹렬히 들이파면서 기회 불균등을 한탄한다.
동경 거리는 아니 신주쿠의 거리는 이제 어두워졌다. 인실은 걸음을 옮긴다. 다리가 천근같이 무거웠다. 서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하였던 육체가 갑자기 그에게 압박을 가했다. 아무곳이든 주저앉고 싶었다.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검정 바탕에 희게 뽑은 우동이란 글시의 노랜(상점 입구의 처마 끝이나 점두에 치는 막)이 눈에 띄었다. 그곳으로 들어간 인실은 자리에 앉는다. 빈 자리가 더러 있었지만 손님은 많은 편이었다. 대개가 젊은 사람들이었다. 우동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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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을 시킨 인실은 깍지낀 손 위에 턱을 올려놓고 멍하니 벽면을 바라본다.
“자아 드십시오.”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우동 그릇을 탁자 위에 놓으며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고마워요.”
무뚝뚝하고 드센 조선 사람과 달리 일본의 상인이나 음식점 종업원은 매우 친절하고 공손한 것이 특성이다. 손님 역시 그런 친절에 대하여 고맙다고 하는 것은 관례다. 우동에서 파 냄새 어묵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인실은 다리가 무거웠을 분만 아니라 몹시 시장했다. 아침에 찬밥을 물에 말아서 단무지 몇 쪽하고 서너 술 먹는 둥 마는 둥 했기 때문에 우동을 내려다보는 것이 조금은 행복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는 선뜻 젓가락을 들지 못한다. 전에는 그랬었다. 동경 와서 공부할 무렵, 혼자 밥을 먹고 있노라면 괜히 코허리가 시큰해지며 뼈에 사무치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곤 했었다. 강한 성격에 좀처럼 그런 감정에 빠지는 일이 없었는데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면 겨울 벌판을 걷듯 외로워지는 것이었다. 그 후 형무소에 있을 때 인실은 음식을 대하면 외로운 것과는 사뭇 다른, 먹는 행위 자체가 비천하기 그지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수구를 들락거리며 밥풀을 주워먹는 한 마리 쥐 같았고 자신이 쓰레기가 되어간다는 기분이었다. 고문을 당하고 왜경한테 심한 욕설을 들었을 때도 인실은 자신이 비천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동경에 와서 거처를 정하고…… 비천하다든가 외롭다든가, 그것이 모두 감정의 사치라는 것을 인실은 깨달았다. 밥을 먹는다든가 몇 끼를 굶는다든가, 그런 일들은 그냥 무의식으로 흘러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의식, 그것에는 얼마간의 자학도 있었으리라. 인실은 천천히 우동을 먹기 시작한다.
“그거 다 뻔한 얘기야.”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조선말이었다.
“오나가나 문제는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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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인실은 관심도 없었다. 한참 후 그들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사람들의 웃음 소리였다. 인실은 젓가락을 놓았다. 절차 하나가 끝나 홀가분한 기분이다. 그새 손님들은 많이 빠져나갔는가 가게 안이 넓어 보였다. 앞치마 두른 남자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인실은 좀처럼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등뒤에서 조선말로 얘기하던 남자, 청년들이 일어서는 기척이다. 그들은 인실에게 등을 보인 모습으로 우동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흰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인실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학생 중 한 사람이 돌아보았다. 순간 인실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환국이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듯 그러나 그는 급히 인실에게 다가왔다.
“아주머니!”
환국은 저도 모르게 인실의 팔을 잡았다. 그는 인실을 보고 놀랐다기보다 인실의 임신한 모습에 놀랐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팔을 잡은 것은 인실의 위태로운 모습 탓이었다.
“이 팔 놔요.”
인실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우동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간다. 결코 사람을 잘못 본 것도 착각도 아니라고 환국은 생각했다. 그는 똑똑히 조선말로 이 팔 놔요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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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장 영광의 부상
이리저리 뒤치락거리며 잠을 청했으나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환국은 일어나 앉았다. 담배를 붙여물고 보다만 화집을 끌어당겨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들여다본다. 현란한 꿈 같은 색채의 세계, 환국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이 좋았다. 칸딘스키가 추상화의 이론가라는 것은 그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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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그의 초기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주변에 별로 없는 것같았다. 사철 눈과 얼음에 덮여 있을 것 같고, 색채가 빈곤할 것만 같은 러시아에서 어떻게 현란한 이런 색채를 빚어내었는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볼 때마다 환국은 신비스러움과 동경을 느끼는 것이었다. 친구 중에는 예술 자체에 대한 것보다 시인 에세닌과 무희 덩컨과 무회 덩컨과의 연애에 흥미를 갖듯, 칸딘스키와 니나와의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환국은 어쩐지 그것이 역겨웠다. 속물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여전히 잠은 올 것 같지 않다. 밤은 깊어가는데, 캔버스 앞에 서본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쳐보듯 서 있다가 나이프로 물감을 이겨 캔버스에 찍어 발라본다. 오랫동안 그는 그러고 있었다. 결국 새벽녘에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환국은 겨우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창문이 훤했다. 비는 멎었고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새벽에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밤을 꼬박 지샐 뻔했다. 장지문은 열려진 채, 복도 너머 유리문도 열려진 채였고, 모기향은 모두 재가 되어 토막토막 접시에 떨어져 있었다. 뒤뜰은 여남은 평쯤 될는지, 하숙집 노인이 잘가꾼 수목은 싱싱했다. 이끼 낀 돌도 파아랗게 살아나 시원해 보였다. 수목에 맺힌 물방우링 햇빛에 반짝이곤 한다. 비가 멎은 지는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다. 물받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똑! 똑! 들려왔다.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환국은 담배를 붙여물면서 재떨이를 끌어당긴다. 계속 뭔가에 의해 강타를 당하는 느낌이다.
‘그럴 수가 잇나, 그럴 수는 없다!’
형용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 치민다. 이성으로는 다스려지지 않는, 왜 그런가조차 알 수 없는 기분이다. 이 팔 놔요, 그것은 결코 유인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유인실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환국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끔찍한 일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 끔찍한 일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인실의 임신과 관계가 있었다. 이 팔 놔요, 비정한 그 목소리는 임신에 얽힌 어떤 사정 때문일 것이라는 추적, 그럼에도 불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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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환국은 궁금증이나 걱정보다 강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인실아주머니의 배가 불러야 했나!’
인실은 결혼을 해도 안 될 사람이요, 아이를 낳아서도 안 될 사람처럼, 그럿은 기정사실이었던 것처럼, 신성불가침의 여인으로 생각했던 것을 환국은 그것이 깨어지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풋사랑이라고나 할까, 청춘의 상흔이라고 해야 할까, 양소림의 모습과 손등의 그 혹은 연민과 혐오감과 자책감으로 환국의 가슴속에 아직 남아 있다. 박외과 의원에 있던 허정윤가 결혼하여 딸인지 아들이닞 아이들 낳았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양소림을 생각할 때마다 환국은 지금도 썩 유쾌한 기분일 수는 없었다. 사랑을 고백한 것도 아니었고 자기 감저어에 확신도 없는 채 소림의 불구를 목격했다는 것은, 그리고 혐오감과 함께 가책과 연민 때문에 갈등했었던 기억이 환국의 청춘을 조그은 병적으로 물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들에게 무관심한 것이 양소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명의 여성, 환국의 의식 밑바닥에는 어머니인 서희와 임명희, 유인실, 이 빼어난 세 명의 여자가 있었다. 서희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혈육으로서 보다 밀착된 감정이었지만 임명희와 유인실은 타인이면서, 타인이기 때문에 거리가 있었고 그 거리 때문에 오히려 수수께끼 같았으며 신기루와 같이, 신비스러운 대상으로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그 비슷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수는 없다!’
배가 부른 모습, 삭막한 얼굴, 차갑게 빛나던 눈동자, 어젯밤에 우동집에서 만난 인실은 쉬르레알리즘의 그림같이 괴이하고 비현실적이며 먼 피안에 서 있는 목각인형 같기도 했다. 만난 그 순간보다 헤엉진 뒤, 그 만남을 상기할 때 도무지 그것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다시 시작해본다. 그러나 시작도 끝도 없는 일이었다. 이팔 놔요, 하던 타인의 목소리와 임산부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환국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재빠르게 이불을 개켜놓고 밖에 나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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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를 하고 들어왔다.
“사이상 식사는 어쩌실래요?”
하녀 오하츠가 와서 물었다. 머리에 빗질을 하다 말고 시계를 본다.
“벌써 이렇게 됐나? 열한시가 지났어.”
“잠꾸러기.”
오하츠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환국의 나이 또래, 낯빛은 검고 동그란 눈에 얼굴도 동글동글했다.
“그런 말 말아요. 새벽녘에 잠이 들었거든.”
“그래요? 난 그때 일어나 있었어요.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에 잠이 깼는데 굉장히 무서웠어요.”
“왜?”
“하늘이 우르르 쾅쾅, 번개가 번쩍번쩍.”
“어떡한다?”
“뭘요?”
“열한시에 아침 먹기도 뭣하고 기다렸따가 점심이나 먹지 뭐.”
“그래요? 그럼 그럭하세요.”
오하츠는 방문을 닫아주고 갔다. 환국은 휴지로 빗을 닦아 서랍속에 넣고 복도로 나온다. 소나무 밑둥 가까운 곳에 함지만한 크기의 앙증스런 연못에 붕어 두 마리가 놀고 있었다. 둘레에 이끼 낀 작은 정원석을 배치하고 곰상스럽게 만들어놓은 연못은 소일거리가 없는 이 집 노인의 손장난이었던 것이다.
‘내 자리는? 이게 무슨 자리지?’
인실과의 만남은 그렇다 치고 요즘 환국의 주변 사정은 어젯밤 일에 못지 않게 우울한 것이었다. 우울한 정도를 지나 어떤 위기의식으로 환국에게 육박해오고 있었다. 가정부의 이름으로 거금을 강탈해간 진주의 사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윤국이와 마찬가지로 환국은 부친이 관련됐을 거을 직감했다. 그러나 환국은 윤국이처럼 피가 끓었다기보다 부친을 연상한 그 의식 자체에 깊은 경계심을 가졌던 것이다. 부친을 연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을 위험 인물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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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했다. 만일의 경우 자신이 경찰관의 취조를 받게 된다면, 아니 급모다 고문을 당한다면? 고문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환국은 견디어낼 용기쯤은 있다고 생각했다. 두려운 것은 자기 심중이 노출되지 ㅇ낳을까 그것이었고 저도 모르게 취조하는 상대가 자기 심중을 포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결국 자기 능력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것과 그 사건이 끝내 미국으로 묻혀지기를 바라는 소망, 지나치게 경계하는 그런 심리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환국의 긴장을 가중하게 했다. 신간회 해산, 예맹 검거, 최근에 있었던 중국인 습격 사건 등, 그러한 일련의 사태를 동경에서 바라보는 환국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의 포위망이 좁혀져가고 있는 것만 같았고, 뭔지 모르지만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게 했던 것이다.
방학이었지만 환국이 동경에 남아 있는 것은 부친 길상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이쪽 사정이 복잡하니까 돌아올 것 없고 대신 송영광을 찾으라는 인편의 전갈이 있었다. 지난 초봄, 그 사건이 있기 직전에 환국은 동경으로 왔다. 떠나올 때 부친은 송영관을 찾으라는 당부를 했다. 분위기를 보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는데도 또다시 전갈을 받고 보니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은 송영광이 송관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환국은 송관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송관수가 진주 집에 드나든 일이 있었고,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형평사운동, 과거 의병으로 산에 들어간 일, 남들이 알고 있는 정도는 다 안다. 그러나 환국은 형평사운동이 관수가 하는 일의 전부가 아닌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하튼 부친이 시키는 대로 환국은 고향으로 가지 않을 외적 구실은 어느 정도 있었다. 그 동안 환국은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지난 봄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갔다. 해서 목적이나 선택의 변경에서 오는 준비라 해도 좋고, 화구를 메고 교외로 나다니며 스케치를 하는 행위, 하고 싶어서 하고,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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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지만 방학을 이용해 한다는 구실도 되는 것이다. 미술학교로 옮기게 된 데는 부친 길상의 도움이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려면 자유업을 가지는 게 유리하지요. 행동도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을 거구, 내 기분은 만일 환국이가 망설이고 있다면 용기를 주고 권하고 싶을 정도요. 소질이 있는 것도 다행이며 마음을 굳힌 모양이라 당신도 응낙하는 게 좋을 거요.”
“하지만 그 아이는 이 집을 이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없는 거요. 조만간, 우리 민족에게 급박한 사태가 밀려올 것이오. 앞으로 세상은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변할 것인즉, 그 점을 명심해야 하오.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환국의 일본 유학, 그것이 마땅치 않소. 환국은 중국에 가서 공부를 했어야, 당신이 그 점만은 양보하지 않을 것은 알지만.”
결국 서희는 길상에게 설득당한 듯했으나, 그러나 서희는 자기마음속에서 납득을 하지 않는 한 굽힐 여자는 아니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자유업이란 말은 다소 효력이 있었고 중국 유학 운운은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런 것보다 서희는 환국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았다. 확고한 것이라면 반대는 모자간 서로 상처를 남기는 결과밖에 되지 못한다. 서희는 자기 고집을 꺾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설득당하기보다 남편에게 설득당했다는 편이 어미로서 위신의 훼손도 없을 것인즉, 길상도 모르지는 않았다. 서희가 남편에게 복종하여 고집을 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상은 서희의 현명함을 믿었고 꺾이지 않는 성품을 사랑했다. 그의 인내를 고맙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환국은 큰 마찰 없이 숙원을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앞날의 방향이 달라졌다 하여 환국의 유학 생활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동안 그는 계속하여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법서 대신 미술에 관한 서적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정도였다. 노부부가 사는 조촐한 하숙집, 그것도 하나래(별채)여서 거처는 늘 조용했고 쓰는 공간도 뒤뜰을 합하여 넓은 편이며 아틀리에는 아닐지라도 불편한 것은 없었다. 먹고 살기에 어려움이 없는 노부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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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출신으로 상당한 교양이 있었으며 가족 관계는 잘 알 수 없었지만 허전하여 한 사람쯤 하숙생을 둔다는 취지였으므로 환국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잘생기고 점잖으며 예의바르고 깔끔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하며 노부부는 졸업할 때까지 있어달라 오히려 부탁을 했다. 동경에서의 환국의 신변은 단순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문제는 진주에 있었고 영광이를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하였다. 영광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경에 오면서부터 부산 P고보 출신의 유학생을 만나 수소문했다. 그들의 소개로 다른 대학, 혹은 전문학교에 있는 P고보 춠힌도 만났다. 그러나 영광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숫제 송영광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시일이 갈수록 환국은 초조했다. 자신이 없어졌다. 동경 넓은 바닥에서 영광을 찾는다는 것은 서울 가 김서방 찾는 것만틈 어려운 일인 것을 깨달았다. 과연 그는 동경에 있는가, 그것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름쯤 됐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름쯤 됐는지 환국은 화구를 메고 다마가와강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 말 좀 묻겠는데.”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다. 조선말이었다.
“혹시 최한국이 아닌지요?”
상고머리에 신색이 그리 좋아 뵈지 않는 중키의 충년이었다.
“그렇소만……”
청년은 갑자기 활기에 넘친 표정이 되어
“나 김수봉이다!”
“……?”
“모르겠나? 보통학교를 오학년까지 같이 댕긴 김수봉, 알겠지?”
“아아, 아!”
“알겠지?”
“그래 그렇구나! 맞아. 김수봉이다!”
“겨우 알아보네.”
활기찼던 표정이 갑자기 시들면서 서운해하는 기색을 나타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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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환국은 반가웠다.
“하기야 뭐, 자네하고 나하고는 처지가 다르니까 쉬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해. 모르고 지나쳐도 할 수 업는 일이지.”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그래 여기는 언제 왔나?”
“아마 자네하고 비슷한 시기에 왔을 거다.”
서운해한 것을 넘어서 김수봉 얼굴에 비애 같은 것이 서린다. 환국은 그것을 느꼈다.
“뭘 하나 지금?”
“……”
“학교에 다니나?”
“학교? 청강생을 학생이라 할 수 있는지, 하기는 저세상 학생이라 하긴 하지. 하하핫핫…… 하하하……”
비애는 무산되고 김수봉은 쾌활하게 웃었다.
“하여간에 반갑다. 어디 가서 쉬면서 얘기하자.”
“그랬으면 좋겠는데 글쎄……”
머뭇거린다.
“일행이 있어서 오늘은 그만, 다음에 만나지 뭐.”
김수봉은 뒤돌아보았다. 환국이도 그의 시선을 따라 수봉의 등뒤를 바라보았으나 일행이라 할 만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아싸. 높은 하늘에 구름만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강기슭에 하얀 물새만 몇 마리 머물고 있었다.
“일행도 함께 가면 될 거 아닌가?”
“아니, 그럴 처지가 못 된다.”
“애인하고 함께 왔어?”
환국은 웃으며 말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라.”
수봉도 픽 웃었다.
“그럼 잠깐 기다리게.”
환국은 수첩을 꺼내어 재빠르게 자기 하숙집 주소를 적는다. 그리고 수첩에서 적은 것을 뿍 찢어 김수봉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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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내 있는 곳 주소야.”
수봉은 그것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그보다 밖에서 한번 만나자. 만날 날짜를 약속해서.”
“그럴까?”
“언제면 좋겠나?”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내일말고…… 수요일이면.”
“나는 언제든지 좋다. 방학이니까.”
“참 방학인데, 왜 안 갔나?”
“볼일이 좀 있어서.”
시간과 만날 장소를 정하고 환국은 김수봉과 헤어졌다. 그와 헤어져서 한참 지난 후 환국은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진작 그 생각을 왜 못했나!’
수봉이 부산 P고보와 관련이 있는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보통학교 오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해간 김수봉은 그 후 P고보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기억이 났던 것이다.
‘수요일에 만날 건데 뭐.’
그러나 불안하고 초조했다. 손안에 든 물고기를 놓친 그런 기분이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지만 약속을 지키리라 믿어도 되는 것인지, 사정에 의해 그가 못 올 경우, 명심코 주소를 들고 그가 만나러 오지 않는 한 환국은 김수봉을 찾아갈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영광이를 찾아야 한다는 문제가 그를 뒤쫓고 있는 만큼 어떤 강박과도 같은 심리, 그러나 설사 김수봉을 만난다 하더라도 수봉이 영광을 알고 있고 영광을 찾을 단서를 갖고 있을 것이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약속된 날 약속된 시간까지 환국은 초조해 있었다. 그런데 김수봉은 송영광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식은 왜 찾으려 하나?”
“그 사람 부친하고 내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한동네서 자랐거던.”
“그거야 뭐 흔히 있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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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광이 그 사람 부친께서 날 찾아오셨다. 꼭 만나서 전해달라 하시면서 돈을 주시더군.”
환국은 신중하게 부친이 개입되지 않는 선에서 말하는 것이었고 수봉은 뭔지 모르지만 심각한 표정이다.
“돈만이라면 자네편에 보내도 되겠으나 그분 말씀이 꼭 만나라, 아주 간곡한 부탁을 하셨기에.”
“하기는, 왜 안 그러겠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엉망이다.”
하면서 수봉은 영광과의 관계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영광이는 내가 어릴 적부터 서로 아는 사이다. 우리가 진주 있을 때 이웃에 살았거든. 그래서 집안 내력도 잘 아는데, 부산으로 이사한 후 다시 영광이를 만난 것은 고보 삼학년 때, 그 자식은 일학년이었고, 영광이네 집은 부산 온 후 수도 없이 이사를 한 모양이고. 옛날의 알음으로 우리집에 세들어서 한 일 년 남짓 살았다. 처음 부산에 왔을 때는 점방도 장만하고 집도 있고 괜찮게 살았다 했는데, 영광이 아부지가 자네도 알겠지만 왜경에게 쫓기는 몸이고 보니…… 영광이하고 나하고 학년 차이는 있으나 나이는 한 살밖에 차이가 없다. 아마 자네하고는 동갑일 게다. 고보에 늦게 들어왔고 또 무슨 일 때문인지 일 년을 구워먹었다 하고, 그나마 제대로 했으면 금년에는 졸업을 했을 텐데…… 온통 망가져버렸다. 사람될까싶지도 않고.”
환국은 여러 가지 생각을 머릿속에 굴리면서 서두르지 않았다. 평소 침착한 상태로 돌아가서 수봉의 얘기만 듣고 있었다.
“나도 집안 형편이 뭐 그렇고 그런 정도라서 대학 간다는 것은 바랄 수 없고 집에서는 졸업한 뒤 금융 조합에 취직해서 장가나 가라, 그러나 무턱대놓고 배를 탔지. 설마 무슨 수가 없을라구, 혈기만 믿었다. 말도 마라. 참말로 말도 마라. 조선서 고보 출신이면 그래도 괜찮다고들 하는데 일본서는 인간 쓰레기다. 조선서는 왜놈 종질한다고 손가락질하던 반도(고참 점원 혹은 책임자)는커녕 고조(심부름꾼) 자리 하나 내주는 줄 아나? 노동밖에는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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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없다. 공사판에서 벽돌 지고 모래 나르고 그나마 풀발선 오야지를 만나야 일거리도 얻어 걸리고 품삯도 제대로 받지. 일본서 조선놈은 사람이 아니다. 쓰레기지. 영국놈이 중국에 와서 저희들 술집에 중국인과 파리는 사양한다 그랬다지만.“
“돌아가지. 돌아가아.”
“오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
“그러면 지금도 공사판에 나간다 그 말인가?”
“지금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 우에키야(화원)에서 있었지.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는데, 하기는 공사판도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지만, 지금은 고물장수다.”
“구즈히로이(쓰레기 줍는 것)란 말인가?”
“아니, 제대로 차리고 다니면서 고맨구다사이(실례합니다), 고맨구사다시이.”
하다가 수봉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사람이 나오면 쓰지 않는 것 팔아라, 그거지.”
“그래, 그 편이 낫던가?”
“났지. 좀 유식하다는 게 밑천이 되고 동정도 받고, 그러나 무엇보다 자유스러우니까. 비굴해질 때도 많지만 누가 하라 마라 그런 소리는 안 듣지. 공사판에 모여드는 인종이라는 게, 그게 별의별 게다 있거던. 걸핏하면 아이쿠치 뽑아들고 생사를 겨루는가 하면 경찰의 끄나풀이 있고 아나키스트 공산당이 잇고 밥만 먹여주고 임금을 몽땅 말아올리는 조직도 있고, 노동이 고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 땜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판에서도 인종 차별, 지역적 감정, 인간이란 참말이지 어디까지 사악하고 악독한지 바닥을 모르겠어. 젊은 날의 꿈이라는 거, 그거 물거품보다 더 허망한 것이더라. 이 세상에 달콤한 것은 없다. 어디로 가나 그것은 없어.”
“그러면 돌아가아. 나 자신도 그래. 부모님 덕분에 유학이랍시고 와 있지만 허송세월이야.”
“안 돌아갈 거다. 청운의 뜻, 그 따위 어리석고 낭만적인 것, 이미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이건 내 싸움의 과정이다. 나, 나는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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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건 자네 개인적인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인 것인가?”
“실은 어느것인지 나도 몰라. 어쩌면 무작정 그걸 거다. 자네는 허송세월이라, 자네다운 말이지. 하지만 여기 와 있는 몇몇 동창들은 그렇지 않아. 판검사, 고등관, 그걸 잡은 듯 안하무인이다. 개새끼들! 왜놈한텐 발발 기면서 동족에게는 거만스럽게, 정말이지 테러라도 하고 싶은 심정 알겠나? 자넨 모를 거다.”
“더러 그런 사람도 있겠지. 자네가 그런 처지라면 어쩌겠나?”
수봉은 말문이 막힌 듯 환국을 쳐다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환국이 묻는 말엔 대답을 않고
“공산주의 한다 하고 사회주의 한다 하고 껍적거리는 놈들, 날 만나면 피해간다. 손 벌릴까 싶어. 그라고 내 해색이 초라하니까 그러는 거지. 참말로 사람 웃기는 거는 가시나들 끼고 댕기면서 천석지기 만석지기 부잣집 아들놈들 떨어진 내복 안 입고 카페 가서 고급술 마시면서 공산주의 한다는 거지. 허참.”
“그러면 나도 할말이 없다. 그는 그렇고 송영광이 그 사람의 근황에 대해서 얘기해주게.”
“그간의 사정은 알고 있나? 그러니까 조선에서 있었던 일.”
“자세히는,”
“그럼 그 일에 대해서는 말 안 하겠다. 그러니까 작년 늦은 여름이던가? 집에서 주소를 얻어 영광이가 날 찾아왔더라. 죽기 아니면 살기라 하면서, 꼴은 말이 아니고. 역전에서 왜놈하고 쌈박질을 했던 모양이라 유치장에서 하룻밤 잤다 하는데 이마에는 피멍이 들고, 원래 그 자식 성질이 과격하거든. 도둑질을 하든 강도질을 하든 조선에는 안 돌아간다 하길래 졸업을 눈앞에 두고 뛰쳐나온 심정을 모르지는 않으나 경솔했다고 나무랐지. 했더니 형이 내 입장이 되어보라. 뛰쳐나온 게 아니고 퇴학을 당했는데 어쩔 것이냐 하며 악을 쓰더라구. 하여간에 골치가 아프게 돼 있다. 머리도 좋고 인물도 훤하게 잘생긴 놈이, 자네가 만나보면 그놈 자식 상태가 어떤지 알게 될 거다. 측은한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때는 지긋지긋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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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에 만나봐야겠네. 지금이라도.”
“지금은 안 돼.”
“왜?”
“여기 없더ㅏ.”
“뭐? 어디 갔는데!”
“관서 지방에 일 나갔다.”
“일 나가다니?”
“노가다지 뭐. 전에 알던 오야지한테 붙여주었는데, 글세 얼마나 갈란지. 나하고 고물장사도 할 수 있고 전에 있던 우에키야에 말해 줄 수도 있지만, 그놈 자식 성질 콱 죽여야, 세상살이가 어떤 건지 알아야 그래야 제 명대로 살 거다.”
환국은 아직 송영광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광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닐 때의 초조함과는 달리 이제는 영광과의 대면을 걱정하고 있었다. 상대가 순순히 이쪽 호의를 받아줄 것인지, 상처투성이의 젊은 그가 어느 면으로 보나 우월해 뵈는 환국은 반발 없이 대해줄 것인지 그것은 매우 의심스러웠다. 사실 환국은 미리부터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환국은 노부부와 함께 식사를 한다. 점심상에 그들과 환국은 마주앉았다. 오하츠가 시중을 들었다.
“사이상 웬일이지?”
“네?”
환국은 아리요시 노인의 노처 오시마의 얼굴을 쳐다본다. 감색에 흰 무늬가 있는 가수리(붓으로 살짝 스친 것 같은 잔 무늬가있는 천)의 기모노를 단정하게 입은 오시마는 미소를 지으며,
“전에 없이 늦잠을 자고, 그것도 아마 열한시까지 잔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어젯밤, 새벽까지 잠을 못 잤습니다.”
“사내자식이 네모 반듯한 것도 좋은 건 아니지. 더러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피고, 사이는 너무 얌전해.”
아리요시 노인이 말했다. 칠십을 바라보는 노부부, 아리요시 노인은 깡마르고 안경을 썼고 오시마는 다소 비대했으나 흉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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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 깨끗하게 늙은 양주였고 건강한 것 같았다.
“여보, 그렇지도 않아요, 사이상은 술도 마시는 눈치예요. 담배도 피고.”
오시마는 영감이 환국을 비판한다 생각했는지 열심히 변호하는 표정이다.
“죄송합니다. 술 마시는 건 비밀이었는데 오하츠가 일러바쳤군요.”
“일러바쳤다기보다,”
오하츠가 변명하려 하자
“오하츠, 걱정할 것 없다. 사이가 술을 마신다니까 한결 맘이 놓이는구나.”
아리요시 노인의 말에 모두 웃는다.
“여보!”
“무슨 항의가 또 남아 있소?”
아리요시 노인은 오싱코(소금에 절인 배추에 왜간장을 친 것)를 사각사각 씹으며 노처를 바라본다.
“그게 아닙니다. 사이상은 우리 다미오를 많이 닮았어요. 당신은 그리 생각지 않으세요?”
“당신 눈에는 사이가 다미오 같은 추남으로 보입니까? 큰일났군.”
“그건 너무 심합니다. 우리 다미오도 그만하면 괜찮지요. 사이상만큼은 아니지만, 저는 성격이 닮았다 싶었습니다.”
“다미오가 누굽니까?”
환국이 물었다. 오시마가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 손자라오.”
“그런데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까요?”
“여기 없으니까.”
입속에 밥이 든 채 아리요시 노인이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환국에게 오시마가 설명해준다.
“지금 그애는 영국에 가 있어요. 유학간 거요. 사이상보다 두세 살위, 스물넷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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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멀리 보냈느냐 그 얘기지? 누구나 그런 얘기 하지만 사정이 있어요. 그애 아버지가 죽은 지 십오 년, 다미오가 아홉 살 때 죽었어요. 아카몬(동대의 별칭) 출신으로 장차 교수나 문사로도 대성할 거라 주위에서들 그랬지. 영문학이 전공인데 그애는 영국으로 유학하고 싶어했으나 외아들이어서 우리도 반대했고 본인도 용기가 없었던 것 같았어. 그러고는 세상을 다 못 살고 갔으니 손자에게나마, 그리 된 거지 뭐.”
오시마는 담담하게 말하다가 끝에 와서 흐지부지 끊었다. 아리요시 노인도 표정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 순간 환국은 노부부의 외로움이 가슴 저리게 전해져왔다. 여태 손자가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도, 자기에게 졸업까지 있어 달라 했던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엽차를 마신 뒤,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환국은 하나래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어쩔가 하고 그는 생각한다. 조찬하를 찾아가볼까 하다가 인실에 관한 것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또 자신이 없다기보다 인실을 위해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망설여졌던 것이다.
“사이상!”
오하츠가 불렀다.
“손님이에요, 사이상!”
“아아.”
환국은 일어섰다. 뒤뜰을 돌아 현관 쪽으로 나갔을 때 오하츠는 환국을 힐끗 쳐다보며,
“어딘지 좀,”
머뭇거리듯 말했다.
“뭐가?”
“이상한 사람 같아요.”
“무서운 사람이야?”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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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 뵌단 말이지?”
오하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라한 것하고 이상한 건 상당한 차이야.”
환국은 수봉이 찾아왔을 거라 생각했다. 과연 수봉이었다. 그는 담벽에 박쥐처럼 붙어 있다가 문을 열고 환국이 내다보자 허겁지겁 다가왔다.
“나하고 가주어야겠다.”
“하여간 잠시 들어와. 나가는 건 어렵잖으니까.”
“그게 아니다. 사정이 바쁘다.”
일상복인 듯 두 번 만났을 때보다 수봉의 차림은 초라했다기보다 남루했다. 낯빛도 나빴고 몹시 긴장해 있었다.
“영광이 때문이다.”
‘사고가 난 게로구나!’
비로소 환국은 깨닫는다.
“잠시만 기다려.”
방으로 돌아온 환국은 책상 서랍 속에서 돈을 꺼내어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서둘러 나왔다.
“가자.”
수봉의 걸음은 빨랐다. 그를 따라 환국이도 걸음을 빨리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다 죽게 됐다!”
“뭐라구?”
“다 죽게 됐다!”
“우선 병원에 떼메다놓고 이리로 달려왔다.”
“다 죽게 되다니, 왜?”
“그런 설명할 새 없다. 어서 가자!”
전차를 타고 또 갈아타고 하는 동안 수봉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어젯밤 열두시가 지난 뒤 송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수봉은 또 사고쳤구나!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데다 입고 있는 옷이 찢기고 얼굴에는 찰상, 꼴을 보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수봉이 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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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사는 다다미 석 장짜리 방으로 들어선 그는 이유 없이 소리 내어 웃다가 하는 말이 술을 사달라고 했다.
“미친놈, 지랄하네. 돈 벌어왔으면 니가 술을 사지, 내가 왜?”
했더니
“일이고 자시고, 끝내기 전에 와버렸으니 품삯이야 그냥 떠내려갔지.”
“왜 또 그랬어!”
“한 놈 때려눕히고 도망왔지 뭐. 그 새끼들 벌떼같이 덤벼들어서 있으면 맞아죽겠더라.”
“구제불능이다. 내가 뭐랬나, 참고 또 참아라, 쇠 귀에 경 읽기다. 이젠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
“그 새끼들 센진 어쩌구, 사람의 오장을 뒤집어놓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나도 후회하고 있어.”
“일본서 센진 어쩌구 한다 해서 시비했다가는 모가지가 열 개 있어도 못 당할 거다. 니가 센진이지 그러면 왜놈이더나? 쪽바리가!” 하다가 수봉은 홧김에 술을 사다 영광과 나누어 마신 뒤 과히 멀지 않은 곳, 빈민굴이나 다름없는 나가야 한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영광의 거처까지 데려다주었다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마신 술탓인지 몸이 찌뿌듯해서 아침 늦게까지 자리에 눈워 있던 수봉은 여자 비명에 놀라 일어났다. 나가보니 영광이와 함께 있는 여자, 수봉은 함께 있는 여자라 했다.
“영광씨가 죽어요! 사, 살려주어, 으 흐흐흣…… 매, 매를 맞고.” 부들부들 떨면서 여자는 울부짖더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뛰었지. 나가야 뒤켠에 있는 공지로 달려갔을 때 영광이는 엎드러져 있었고 이미 놈들은 다 달아나고 없었다. 참말이지 비참해서 두 눈 뜨고 볼 수가…… 얼굴은 묵사발이 되었고 안아 일으키는데 팔과 다리가 부러졌는지 제 마음대로 덜렁거리고, 마치 망치로 때려부순 장난감 같더라니까. 의식도 없었고 혜숙씨 말이 건장한 사내 세 놈이 와서 다짜고짜 공지로 끌고 나가서 팼다는 거라. 아마 영광이가 때려눕혔다는 그놈의 한패거리가 뒤쫓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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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보복을 한 모양이다. 그래가지고는 사람 될까 싶지가 않다. 살아도 병신이 되거나, 미친놈! 그렇게 타일렀는데 세상 무서운 주 ㄹ모르고, 아무래도 그 자식 일본 와서 죽으려고 작심을 한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영광을 메다놨다는 병원은 간다 부근에 있었다. 외과 전문의 개인 병원인데 규모는 꽤 컸다. 수봉과 환국이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복도 옆의 긴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됐습니까?”
수봉이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라기보다 소녀라 해야 할 앳되고(애띠고), 아이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연신 떨면서
“아무말 없어요.”
“내 만나보지, 의살.”
환국은 진찰실 문을 밀고 마치 쳐들어가기라도 하듯, 간호원이 뭐라 하는데 개의ㅏ치 않고 의사 앞에 섰다.
“환자의 보호잡니다.”
처방을 쓰고 있던 의사는 안경 너머 눈을 치뜨고 환국을 보았다. 사십대 중반쯤 깐깐하게 생긴 사내다. 그는 다시 처방을 쓰고 나서 간호원에게 그걸 넘겨주고 다시 환국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요.”
“어느 환자 말입니까.”
“송영광입니다.”
“아아, 그 조선인.”
했다. 그리고 의외란 듯 환국의 차림새를 살핀다.
“어떻습니까 상태가.”
“굉장히 험하더군 말짱 다 망가졌어요. 장출혈도 있고.”
“그, 그럼 살겠습니까!”
“수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수속이나 밟으시오.”
“네. 그,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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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환자하고 어떤 관계요?”
순간적으로
“사촌입니다.”
거짓말을 했다. 어떤 관계냐고 묻는 의사의 목소리는 헌병이나 경찰관의 목소리와 흡사했다.
“사촌, 사촌치고는…… 좋소. 나가서 기다리시오.”
진찰실을 나와 도어를 닫느 ㄴ순간 환국은 좀더 의사에게 매달려 봤어야 했지 않았을까 후회를 했다.
“뭐라 하던가?”
수봉이 물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군.”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하던가?”
“지장이 없으면 수술하려 하겠나. 기다려보자. 그리고 나는 사무실에 가서 수속을 해야겠다.”
수속을 해야 한다는 것은 돈을 낸다는 뜻이었다.
“고맙다.”
수봉은 환국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듯 떨고만 있었다. 수봉이 환국의 하숙으로 달려간 첫째 이유는 수술이든 입원이든 바로 그 수속을 밟기 위해서였고, 수속에 필요한 돈을 생각한 때문이다.
“혜, 혜숙씨”
수봉이 말에 여자는 당황한다.
“내 친구고, 또 영광이 친군데 최환국, 그라고 여기는 강혜숙 씨.” 하고 소개를 했다. 혜숙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최환국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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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장 영호네의 부탁
한복이가 거름을 넣고 반듯하게 다듬어놓은 남새밭에 김장 배추가 제법 손가락 하나 마디만큼 자라 있었다.
콩밭을 매고 고추를 널어 말리고 보리방아 찧고 빨래하고, 영호네는 왼종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짬을 내어 남새밭으로 나왔다.
“식구 한 줄고 보이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리겄네. 인호가 있었이믄 보리방아, 빨래, 집안일은 지가 하고…… 도모지 밭에 나올 새가 없다. 벌써 솎아야 하는 긴데 밭이 얼산 같구나.”
영호네는 중얼중얼 중얼거리며 배추를 솎기 시작한다.
“그 잘나빠진 데 보내느니 차라리 늙히 직이는 편이 나았제. 에미애비 잘못 만나……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카이 아이구 내 가심이야.”
계속 중얼거리는데
“우리는 이제 겨우 움이 트든데 너거들은 일찍 심었고나.”
“야?”
영호네가 얼굴을 든다. 천일어매가 광주리를 이고 밭둑에 서 있었다.
“야, 좀 일찍 심었십니다. 고추 따가아 오십니까?”
영호네는 호미를 든 채 땀에 젖은 머리칼을 팔로 걷어넘기며 말했다. 천일어매는 광주리를 밭둑에 내려놓고
“고추도 긑물인가, 별로 따낼 기이 없네.”
“그새 비가 잦어서, 아직이사 끝물이겄소.”
“하기사 노 비가 질금거렸으니, 날씨가 좋으믄 우떨란고.”
치맛자락을 당겨 땀을 닦다가 억센 삼베치마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일어매는 남새밭으로 내려온다. 천일이는 장가를 들어 아들 딸을 낳았고, 둘째 부일도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며 딸마저 시집을 보내버린 천일어매는 짐을 풀어버린 뒤, 해이해진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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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는지 부쩍 늙었다. 경우 없이 욕심 많고 행실이 개차반이던 마당쇠의 아낙이던 천일어매, 남편 생시 때는 그의 비행으로 남에게 누 끼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몰래 뒷감당을 하던 과묵하고 단정했던 아낙이, 그러나 그는 옛날과 달리 말씨며 옷맵시도 느슨했다. 밭고랑에 쭈그리고 앉은 천일어매는 영호네랑 함께 배추를 솎는다.
“그만두이소.”
“가만 있이믄 머하노.”
“왼종일 꿈제기고, 좀 쉬시야제요.”
“일이 보배라는 말도 못 들었나? 가만 있이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나서 병난다.”
“무신 걱정이 있어 병이 날 깁니까. 성자할무이는 할 일 다 하시고 자식들은 모두 자리를 잡았고 병날 일이 머 있겄십니까?”
“이 사람아, 그런 말 마라. 살고 보니 세상만사가 다 덧없고 허망하다.”
“무신 일이라도 있었십니까?”
“무신 일이 있기는, 그렇다느 ㄴ기지. 고추를 따고 있인께 불각처 눈물이 펑펑 쏟아지데.”
“자식들이 섭섭키 했는가배요.”
“그런 것도 아니다.”
“……”
“천일아배가 야속하더마.”
“참. 성자할무이도.”
“넘들한테는 못할 짓도 많이 했제. 하지마는 이녁 살았일 직에 제집이라고 욕 한마디 했이까 볼때기 한분 쥐어박았이까.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나를 그리 섬기겄노. 날 두고 먼저 간 기이 야속하고 괘씸타.”
“언제 일인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합니까?”
영호네는 웃는다.
“모리는 소리. 그기이 그렇지가 않다. 자식들 데리고 살아볼 기라고 동동거릴 때는 아무 생각이 없더마는,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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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이 옳다. 만가지가 다 논이 난다. 해지는 산을 보아도 그렇고 흐르는 강물을 보아도 그렇고 비감한 생각만 자꾸 든다. 나도 젊었을 직에는 참사하다는 말을 들었고 말 많은 노인네를 보믄 늙어도 나는 군담 같은 거 안할 기다 생각했다마는 어디 장담할 일이 있더나.”
“남 보기사 성자할무이겉이 만고에 걱정 없는 사람이 없다 카는데, 천일이는 집을 샀다문서요.”
“집이사 샀제. 가아는 이자 심이 피었네라.”
하는데 주름진 얼굴에 쓸쓸함이 감돈다.
“그라믄 진주로 가시지요. 도방이니께 이놈의 엉걸나는 농삿일도 안 하고 편하실 긴데.”
“그란해도 지가 맏이라꼬 어무이 모시야 한다 카지마는…… 내사 싫구나. 낯선 곳에 가고 접지 않다. 가보이 까깝해서 못 살겄더라. 여기서는 부애가 나믄 호미자리 들고 밭에라도 나오지마는, 그래 인호가 시집가고 나이 일손이 딸리제?”
“야.”
움질하다가 영호네는 힘 없는 대답을 했다.
“나도 제집아아 시집보내고 나서 우찌 그리 허전튼고, 밤에 잠이 안 오데. 그래 너거 집 인호는 시집가서 잘산다 카더나.”
“잘살기야 하겄소. 시부모가 안 기시니 좀 우떨란가, 하기사 머 손위 시누도 시모 맞재비니께 맘 고생이야 하겄지요.”
“살림 내준다 카든데, 안 그랬나?”
“말이 쉽지, 아직이사.”
영호네는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며 손등으로 땀을 닦느느데 그의 얼굴은 한순간 시들어버린 듯 해쓱해 보였다. 집안 내력 때문에 딸의 혼처를 찾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던 한복이 내외는 지난 늦봄, 중매장이 말을 믿고 인호를 통영에다 여의었는데, 설령 중매장이의 말을 믿지 못했다 하더라도 여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지만 총각은 조실부모하여 누이 집에서 자랐다 했고 인호의 곱절인 서른을 넘긴 나이에 매형이 저잣거리에서 크게 어물전을 하기 때문에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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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까지 함께 장사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혼인만 하게 되면 총각이 벌어놓은 돈이 있어 누이가 제금을 내어줄 것이라는, 대강 그런 얘기였다. 영호네가 나이 많다, 나이 그쯤 되도록 장가를 못 갔으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지 않겠는가 했을 때
“잘살고 못사는 것은 지 복이고, 우리 형편에 찬밥 더운밥 가릴수도 없으니 그렇다고 해서 여식아아를 집에 두고 늙힐 수도 없는 일 아니겄소.”
곰방대를 물고 앉아서 한복은 절망적으로 말했다. 결국 인호는 시집을 갔다. 그러나 인편에 들려오는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제금 내어준다는 것은 빈말이었다. 신랑된 위인도 불출인 데다 매형 가게의 일꾼에 불과했으며 인호 역시 바쁜 집안의 일손을 채우기 위해 데려갔을 뿐, 초혼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누이가 혹사하고 학대하여 견디지 못하고 여자가 달아났다는 얘기였다. 한복이 내외는 속았다는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쪽의 험이 아무리 큰들 살인 죄인의 손녀요, 거렁뱅이의 딸이고 보면 입 벌리고 말하기도 민망하였던 것이다. 이미 쏟아져버린 물,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거니와 주워담은들 별 뾰족한 수도 없는 터에 그런 처지나마 끝까지 살아주어 일부종사, 팔자치레나 해주었으면, 바라는 것 외 달리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도 영호네는 딸을 생각하며 울었다.
“이까짓 땅떼기 팔아부리고 고만 아이들 큰아부지한테 가서 사입시다. 만주로 가잔 말입니다.”
“무슨 소리!”
모깃불을 피다 말고 한복이는 화를 내었다.
“기대볼 곳 없는 사람들도 거산해서 만주로 떠나던데 우리는 그래도 시아주버니가 기시고 오라, 오라 하시는데 와 그캅니까.”
“실데없는 소리 마소.”
“제집아아도 그렇기 내던지부리고 다음의 우리 영호는 우짤 깁니까. 우리 강호 성호는 또 우찌 되는 깁니까. 근본 모리는 곳에 가서 자식들 사람 맨들어주어야 안 하겄소.”
“짚신도 제 짝이 있는데 대대로 만내믄 될 거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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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사하자는 사램이 없으니 하는 말 아니겄소. 영호를 저리 내비리둘라 캅니까?”
“넓은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많소. 우리가 가문 찾고 인물 찾을처지요? 어디 맘씨 착하고 불상한 아이 있이믄 데리오는 기지.”
“참 태펭이네요. 나도 머 낯선 대국땅에 가고 저버서 이러는 줄 압니까.”
“형님 있는 곳에 갈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기구마. 나는 고향에 뿌리박고 살 기요. 남이야 뭐라 하든말든 두 귀 막고 살기요.”
한복은 대못으로 쾅쾅 박아버리듯 완강하게 말했다.
“영호는 우짤 기고?”
천일어매는 배추를 솎다 말고 눈부시게 흰 나래를 부챗살같이 펴고 나는 백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슬에는 장개보내야 안 하겄나.”
“보내야 할 긴데.”
“매가리 없이 와 그라노. 말하는 데도 없나?”
“아무도…… 우리집 일이 늘 안 그렇십니까. 혼삿길 열기가 어럽지요.”
“우리도 혼삿말 있을 때마다 천일아배 성질 때문에 말이 많았네라. 그러이 부모란 자식 혼인길 막는 짓은 하지 말아야, 우떤 때는 양잿물 묵고 콱 죽고 저버도 자신들 앞길 생각해서……”
“성자할무이가 그러시믄 세상에 살고 저븐 사람이 있겄십니까?”
“남이 남의 사정 속속들이 우찌 알 기고.”
“그거는 그렇제요. 실은 영호아배가 탐내던 처니가 하나 있기는 있었는데.”
“그래?”
“내는 보지도 못했지마는.”
“근동 처니가 아닌가배.”
“야. 그랬는데 영호아배가 말을 끄내기도 전에 그만 시집을 가부린 기라요. 처니가 보통핵교도 나오고 집안이사 우리 청혼 거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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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지도 아니고 영호가 경찰에 붙잽혀가는 바람에 서둘지 않았더마는 낙심천만이제요.”
“그런 일이 있었고나.”
두 사람은 밭고랑을 옮겨 앉는다.
“이자 그만두이소.”
“아니다.”
“가서 쉬이소.”
“아지 rgo가 남았는데.”
천일어매는 웬일인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광주리 들고 고추밭에 나올 때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저기이 귀남애비 아니가?”
천일어매 말에 영호는 얼굴을 들어본다.
“새신랑같이 옷 갈아입고 어디로 가는고?”
“그렇네요. 밤낮 불머시마겉이 해가지고 댕기더마는 우짠 일이까요.”
“옷이 날개라 카더마는 채리고 나서니 제법 사람 같고나.”
올발이야 굵겠지만 명색이 모시라, 모시 중의 적삼을 입고 대님을 치고 흰 고무신에다 생고사 조기까지 입은 귀남애비는 어디로 가는지 두 활개를 치며 걸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천일어매가 말했다.
“죽은 우리 천일아배도 그런 말을 들었다마는 귀남애비 저 사람도 소다 소. 이마에 소 우 짜 붙이고 사는 사람이다.”
“글대ㅗ 성자할무이가 잘했이니 동네서 인심은 안 잃었제요.”
“내가 머 잘한 것도 없다마는 하도 남정네가 말썽을 피고 댕긴께 감당은 내가 해야지 우짤 기고. 밖에서 미련하믄 안에서 사지역지해야, 자식 키우는 사람이 남의 입질에 오리내리는 것도 좋지 않제.”
역지사지를 반대로 말한 것이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즉 이해한다는 뜻인데 위에 오르고 아래로 내려왔다 해서 뜻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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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남네 가아는 안 되겄더마. 소나아 제집이 똑같다. 며칠 전에 야단난 거 니도 알제?”
“머가요?”
“모리는 모앵이구나. 야무어매 기가 넘어서 까무라친 일이 있었다.”
“와 그랬던고요?”
“성환할매가 여러 날 꼼짝도 않고 있어서 야무어매가 가봤던 갑더라. 갔더니 복동이댁네가 와서 귀남네랑 함께 장독가에서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더란다.”
“두 사람이 친한갑십디다. 음식이 오고가고 하더마요.”
“짝짜꿍이 맞아서 요새 그러는 갑더라. 그래 야무어매가 들어갔는데 젊은것들이 오느냐는 말도 없고 씻죽하니 쳐다만 보는데 야무어매 심사가 뒤틀리더라는 거지. 성환할매는 마루 뒷문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고, 와 요새는 꼼짝 안 하느냐 함서 야무어매가 마루로 올라갔더니 성환할매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더라는 기지. 아이들은 강가에 갔는지 안 보이고. 했더니 자식들 해주는 밥이나 묵고 가만히 있일 일이지 늙어감서 와 설치고 댕기는지 모르겄다. 들으란 듯 복동이댁네가 말하더라는 기라. 그리고 또 하는 말이 남도 아닌 고몬데 설마 조카 밥 굶기직이겄느냐 하더란다.”
천일어매는 그날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설명을 했다. 괘씸하여, 또 입이 바른 야무어매는 마루긑으로 나앉으며
“군은 군대로 모인다 카더마는 자알 논다.”
하고 비아냥거렸는데
“오복이할매, 군은 군대로 모인다. 무신 말입니까?”
복동이댁네가 눈을 희뜨고 따졌던 것이다.
“몰라서 묻나? 가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다듬던 김칫거리를 획 팽개치고 발딱 일어선 복동이댁네는
“귀남네 나 간다.”
하고서는 삽짝을 쐥! 하니 소리를 내듯 나가버리더라는 것이다.
“남으 일에 와 챙견일꼬? 그런 챙견 할라 카믄 이녁들 집에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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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지.”
입이 툭사리같이 된 귀남네는 뇌까렸던 것이다.
“그 제집은 와 남으 집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 본 바 없는 것은 할 수 없다. 지가 성환할매 밥 한 끼 먹있다고 그런 소리 하나? 사람이 그라믄 못씬다. 듣자 카이 복동이 집하고는 서로 모리는 임석이 없다 카든데 어째 지 피붙이한테는 그리 야박하노. 내가 오믄 눈의 까시겉이 한께 안 오겄다 생각함서도 할매 불쌍해서 와봤더니 그 제집까지 장구 치고 북 치네.”
“그리 불쌍하믄 오복이할매가 돌보지 그러요.”
“그러라믄 못 그럴까봐? 돌보고말고, 너거들만 없이믄 집하고 땅하고 나 아니라도 동네서 돌봐줄 사람 얼매든지 있다.”
귀남네는 한풀 꺾이는데
“야무어매 그만 하소,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소.”
성환할매의 목멘 소리에 풀이 꺾였던 귀남네는
“누가 머라 캤나! 사람만 오믄 금세 우는 소리라 카이. 니 내노라고.”
쌀 속의 뉘같이 나타나게 한다는 뜻인데 귀남네는 중얼거리며 성환할매 쪽을 향해 눈을 흘긴다.
“세상에 니 겉으믄 누가 자식 낳을라 카겄노. 해도 너무한다.”
“누가 우쨌십니까. 자식 헌해하고 댕기는 어매도 잘한 거 없십니다.”
“너거들 헌해한다꼬? 니 어매 너거들 감싸노라 열두 폭 치마도 모잘랄 지경이다. 벌받을 소리 하지도 마라. 옛말에 공 안 든 자식덕보고 많이 묵은 놈이 악문은 더 한다 카더마는, 끼리끼리 자알 논다. 까마귀가 백로하고 놀겄나. 핏덩이 주워다가 금이야 옥이야 키워가지고 집 주고 땅 주고 장개들있더니 악독한 며누리 따문에 복동어매 명대로 못 살았고, 그 며누리년과 어울리서 어무이를 면박해?”
“억설하지 마소. 복동어매가 더러분 소문 때문에 죽었지 며누리 땜에 죽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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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헛소문을 누가 퍼뜨맀제? 시어무니한테 오굼 건 거는 누고? 동네에 놔두는 것만도 고맙게 여기 조신하기는커냥 넘우 집에 와서 노인네보고 머 어쩌고 어째? 니가 어무이를 대수로 안 여긴께. 입이 열 개 있이도 말 못할 제집까지 와서 머 해주는 밥이나 묵고 가만히 있이라꼬?”
“얼매나 동네방네 댕기믄서 자식 헌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맞다. 그래서 니가 노인네 가두워놓고 덩신 만들었나.”
“머 어째요!”
귀남네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리 풀세기 날뛰다가 뜨거운 일 볼까 무섭네. 죄는 지은 대로, 부모 눈에 눈물나게 해서 니가 복받을 것 같나? 어디 시상에 그런법이 어디 있노. 저거 집에 얻어묵으로 가도 안 그럴 긴데.”
야무네의 말도 과하기는 과했다. 말이란 내치고 보면 거둬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야아, 그라믄 오복이할매는 지은 죄가 많아서 소싯적에 남편 잡아묵고 딸자식 잡아묵고 지금도 방안에 산송장이 앉아 있십니까?”
귀남네는 눈이 시퍼래져서 악을 썼다.
“머라 캤노? 머, 머, 머라 캤제? 이 몹쓸 년, 니, 니는 다 살았……” 야무네는 픽 쓰러져서 까무라쳤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구마요. 오복이할무이도 뼈아픈 말을 하싰지마는 귀남네가 심했네요. 가심에 피가 지는 일을…… 둘째딸은 어마니나 조카한테 다시 없이 한다 카더마는.”
“그러이 한배에서 나와도 자식이란 오랭이 조랭이라. 세상에 머니 머니 해도 자식 일만큼은 부모 뜻대로 안 되네라. 자식을 낳아 부 노릇을 해도 부모 맘을 모리니, 성환할매가 얼매나 저거들을 감쌌기에? 그것들 여기서 나가믄 머 묵고 살겄는가. 내가 에미 애비없는 손주를 너무 감싼게 그러는 거 아니겄는가. 딸자식도 자식이다. 그러건만 귀남네는 자식들 헌해한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 해도 곧이듣나. 하니 성환할매 속이 내고 내도 말 안 하는 거 아니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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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할매 아니라도 그렇지. 자식을 우찌 내어쫓노. 부모는 그리 못한다. 에미 애비 없는 그 불쌍한 조카들, 남정네가 곰이믄 귀남네가 알아 해야지. 소나아 제집이 똑같다 카이, 그래가지고 나중에 오래비 얼굴 우찌 볼 긴고.”
“성질이 그러믄 할 수 없는갑십디다. 동생은 안 그런데…… 지난 설에도 어마니 옷 한 벌, 조카들 옷에 버선까지 지어서 인편에 보내왔다 카데요. 농사가 많아 일도 지천이고 시부모 모시고 삼서 그거 해보내노라고 밤에 잠이나 잤겄십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지가 못하믄 그만이지. 그것도 새를 내더란다. 하기사 사람이란 천층만층 구만층이라 카이 별의별 사램이 다있제. 옛적 얘기다마는, 그해는 가물었네라. 우리 천일아배, 니도 알다시피 무경우한 사람 아니더나. 그래 밤이 되믄 남의 논이사 우째되든지 물고를 트러 나가는 기라. 날이 새믄 보나마나 동네가 시끄러블 긴데 우짤 기고, 살재기 따라나가서 트놓은 물고를 막았네라. 아무리 가장이 하늘겉다 하지마는 옳지 못할 때는 여자가 막아주어야 하는 기라. 그기이 남정네 욕을 덜 먹이는 기고 자식들 앞길도 열어주는 기고.”
“그 말심은 맞십니다. 성자할무이가 그러이 혼삿길도 수울했지요.”
“아닌게아니라 그렇기는 했다. 시어무이 보고 딸 주겄다 딸 데리가겄다 하기는 했제.”
“이자 대강 됐십니다. 나가입시다.”
두 사람은 일어섰다. 그리고 논도랑으로 가서 세수를 하고 발을 담근다.
“영호네.”
“야.”
“요조숙녀가 하나 있는데,”
“야?”
천일어매는 깔깔 웃는다.
“그거는 내 말이 아니고 주막집 영산댁 말이다. 시영딸로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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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처니를 두고 그 할매 말이 우리 요조숙녀,”
“야……”
대답은 시원찮았지만 영호네 얼굴에 반응이 나타났다.
“조맨치라도 생각이 있이믄 야무어매를 찾아가보아라.”
“오복이할무이를요?”
“내가 들은 말이 있어서 그런다.”
“무슨 말을?”
“가보믄 알 기다. 나도 그 처니를 참하다 생각했지.”
“야……, 오복이할무이 큰아들 때문에 그럴 겨를이 있이까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당장 우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괜찮을 기다.”
“차도는 없다 캅니까?”
“골벵이 들었는데 하루 이틀에 낫지도 않겄지만, 야무어매도 자식 때문에 풍파 많이 겪는다. 영호네, 저기 또 최참판댁에 형사가 간다.”
“야?”
겁에 질린 영호네가 뒤돌아본다. 오르막길을, 최참판댁을 향해 낯선 양복쟁이 한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형사가 아니었다. 오가다였다.
“왜놈들 참말로 질기네.”
“아직 못 잡아서 그런 모앵이지요?”
“몇 달이 지났노. 잡기는 우찌 잡아. 버얼서 돈도 사람도 대국에 가 있일 기라 하드마. 왜놈이 철랑개비 재주를 지니도 이자는 못 잡을 기라 하는데.”
“진주에는 가지도 않고 여기 있었다 카는데 와 저럴꼬요.”
“까막소에 갔다왔다고 해서 그런단다. 애국자라꼬 그런다 안 카나.”
“야아……”
“직일 놈들, 저거가 안 망하고 우짤 기고. 죄 없는 사람 총 노아 직이고, 우리 머시마들도 똑똑했이믄 애국자 돼서 아배 원수를 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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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긴데, 그날 생각을 하믄 지금도 눈앞이 캄캄하다. 자식이라는 것도 저거 살 생각만 하고 부모 생각 조맨치라도 해야 말이제. 아배 기일에도 사라지게 걱정만 했지, 제상 차리는 것 보믄 눈물이 난다. 눈가림으로 시늉만 하고, 운전대를 잡고 있이니 할 수는 없지마는 천일이도 아배 제사에 참니하는 일도 드물다. 지도 미안해서 그러는지 진주로 모시가겄다 하지마는, 없이(일없다). 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러고 접지도 않고…… 내 눈 하나 감고 나믄 천일아배산소는 우묵장성, 풀이나 베줄란가.”
굿마당에서 왜병에게 총맞아 죽은, 남편 마당쇠의 죽음은 세월이 갈수록 천일어매 마음속에서 새로워지는 모양이다. 비극의 현장에 한사코 남아 있고자 하는 한복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이들은 슬픔을 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려 하는 것인지 모른다. 살구나무에 목을 매 죽은 어머니를, 굿마당에서 총맞아 죽은 남편을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튿날 해거름이었다. 영호네는 아침나절에 쪄놨던 쑥버무리를 작은 소쿠리에 담고 삼베수건을 덮어 들고 집을 나섰다. 꾸불꾸불한 내리막길을 지나 돌담 옆에까지 왔을 때 엽이네가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었다.
“여기 와 이라고 있노.”
“음?”
엽이네는 멀거니 영호네를 쳐다본다. 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듯
“내사 못 살겄다, 그만.”
하고 머리를 절절 흔든다.
“와?”
“무신 액운인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동네서 이러고 살겄나.”
“……”
“그란해도 우서방이 꿈에 뵈믄 하루 종일 맴이 산란하고 우서방 생각만 하믄 무서바서 밤길도 못 걷는데, 참말로 미치겄네. 본 대로 이야기한 기이 머가 잘못인고. 징언 잘못해서 성구아배(오서방) 징역이 사 년으로 떨어졌다. 사형이 되어도 분이 안 풀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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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째 징역이 사 년이고, 귀에 못이 박히게 우서방 집 식구들 원성아니가. 그거는 마 그렇다 하고 있는 심술 없는 심술, 사사건건 사람을 감아오고 참말로 못할 짓이다. 그 악종들을 갈바서 싸워봤자 이길 사램이 누가 있겄노.”
그간의 사정은 영호네도 알고 있었기에
“참아라.”
“아, 오늘도 우쨌는지 아나! 우서방 아들이 우리 콩밭에 소를 몰아넣고 콩밭을 낭태질했단 말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참말 못 살겄네.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누가 그 식구들을 갈겄노. 막나가는데.”
“해악할까봐 모두 겁내제. 하이 용천지랄하는 거 아니가. 질기 이라믄 우리가 떠든지 해야지. 벼락맞는 거사 죄져서 그렇다 카지마는 이런 액운도 또 어디 있겄노.”
“살자 카믄 우짜겄노. 참아라. 이거나 좀 묵어봐라.”
영호네는 소쿠리 속의 쑥버무리를 조금 떼어서 엽이네 손에 쥐어주고
“집에 가서 맘 가라앉히라. 질에 퍼질러 앉아 있이믄 머할 기고.”
영호네는 야무네 삽짝까지 왔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듯 걸음을 멈추고 콧물을 들이마신 뒤 마당으로 들어간다. 자기 깐에는 이야기의 성질상 구정물 냄새 나는 옷을 벗고 빨아놓은 옷으로 갈아입기는 했는데 삼베치마의 기장이 짧은데 풀발이 세어서, 허리를 끈으로 질끈 동여매기는 했으나 가늘은 종아리 하며 흡사 암탉 같은 모습이었다. 야무네 초가지붕 너머 느티나무의 짙은 그늘 사이로 두 마리의 까치가 날고 있었다. 해는 아직 남았더란 말인가. 까치의 몸짓은 느긋하기만 하다.
“아무도 없나?”
영호네는 기침을 해본다.
“와 이리 집안이 쥐죽은 듯할꼬?”
아래채, 야무가 누워 있는 방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야무네, 야무어매 하지마는 야무의 나이는 사십을 넘었다. 영호네는 그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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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구경도 못한 터에 아무리 병자라고는 하나 남녀가 유별이라 내외법이 엄존하니, 말을 걸어 물어볼 수도 없거니와 왠지 모르게 거북하고 으스스했다. 가버릴까 하다가 부엌을 들여다본다. 부엌바닥은 싹 쓸려져 있었다. 선반에는 투박한 사발이 가지런히 엎어져 있었고 솥전은 걸레질을 했는가 반들반들했다.
“집을 비워놓고 모두 어디로 갔일꼬?”
돌아나오는데 큰방 앞 신돌 위에 짚세기 한 켤레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복이할무이요, 안 기십니까?”
허행이구나 싶었지만, 어렵게 결심하고 왔는데 일이 잘못될 건가 불안을 느꼈지만 불러본다.
“누고?”
큰방 문이 열렸다.
“누가 왔나?”
부승부승 얼굴이 부은 야무어매가 내다본다.
“나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십니다.”
영호네는 반가워서 말했다.
“잠시 깜박했던가배.”
“할무이 혼자 기시는가배요.”
그 말 대답은 없이
“몸이 짚동겉이 무겁네. 비가 올라 카나?”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루로 나온다.
“모두 어디 갔십니까?”
“응 안사돈 환갑이라고 해서 식구들 모두 구례 외갓집에 갔다. 병자가 있이니 나는 참니도 못한다.”
“야……”
“무슨 일고?”
좀체 마을다니는 일이 없는 영호네였기에 야무어매는 의아해한다. 소쿠리 속에 뭐가 들어는지 알 수 없지만 음식을 나누어먹으려고 온 것만은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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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할 이야기도 있고, 아아들이 묵고 접다고 해서 조맨 해봤는데 오는 길에 가지왔십니다.”
야무어매는 소쿠리를 받아 삼베 수건을 들쳐본다.
“쑥버무리네. 너거들도 식구가 많은데 남 주 ㄹ기이 어디 있어서.”
부엌에서 접시하고 작은 함지를 가져온 야무어매는 접시에 쑥버무리를 옮기면서 조금 뜯어 먹어본다.
“간이 맞네.”
나머지 것은 함지에 올겨 살강에다 간수하고 접시에 담은 것은 아랫방 야무 있는 곳으로 가져간다. 방문을 열고 접시를 넣어주면서
“좀 묵어봐라. 꼽꼽해서 마치 묵기 좋다. 물 떠다주까?”
“괜찮습니다.”
낮은 야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꼭 씹어 묵으라. 체할라.”
마루로 돌아와 걸터앉는 야무어매를 보고 영호네는 물었다.
“요새는 좀 우떻십니까?”
“저분때 개소주를 내서 믹있더마는 요새는 좀 묵는다.”
했으나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얼굴이 부은 것 같은데.”
“이래저래 심장이 상해서 안 그렇나. 한분씩 속을 끓이고 나믄 이렇네라. 가심이 뛰고 밤에는 잠도 못 잔다. 그러다가 괜찮아지네라.”
영호네는 천일어매한테서 들은 얘기가 있어 왜 속을 끓였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귀남네하고 무슨 일이 있었다 하데요 하고 말하지 않았고 야무어매 역시 가슴에 맺히는 그 말, 서방 잡아먹고 딸자식 잡아먹고 지금도 방에 산송장이 있다는 기막힌 그 말을 입밖에 내기조차 끔찍스러운 듯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실은 그 말대로 심장이 상하여 얼굴이 부은 것도 사실이지만, 식구들 없는 새방안에서 야무네는 울었고 울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것이다.
“방에 들어가자. 뒷문을 열어놔서 씨원타.”
뒤늦게 아들 방에 신경을 쓰며 야무네는 당황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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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영호네 역시 야무에게 신경을 써가며 마루에 걸터앉아 말할 성질의 일도 아니어서 얼른 야무네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아닌게아니라 뒷문이 열려진 채였고 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 뒤란이 내다보였으며 방안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야무어매는 습관처럼 방에 걸레질을 하며
“너거들은 옛말하고 산다. 영호네, 나는 와 이렇겠노. 갈수록 태산이다.”
걸레를 구석에 밀어붙여 놓고 티라도 들어간 것처럼 눈을 비빈다. “사람 사는 기이 다 안 그렇십니까. 병자만 좋아지믄 오복이할무이도 무신 걱정이 있십니까?”
“말해 머하겄노. 아랫방의 자아만 나으믄 내사 내일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겄다. 불쌍한 우리 야무, 따따스리 밥 한 끼 못 무고 십여년을 객지 생활 함시로 에미하고 동생은 살게 해놨는데 지 몸이 저지경 되었으니 참말로 내가 죄 많은 에미다.”
“너무 심로 마이소. 설마 좋아지겄지요.”
“그러씨…… 조금 기동은 한다마는.”
야무네의 얼굴으 ㄴ여전히 어두웠다. 그 어둠은 다만 야무의 신병탓만은 아닌 듯싶었다.
“그래 할 얘기란 멋꼬?”
“맘도 안 편하신데 지가 이런 말을 해야 좋을지.”
“마음 편할 날이 어디 있나. 그날이 그날이지. 말해봐라.”
“어젯밤에 영호아배하고 의논을 해지마는, 우리 영호 때문에…… 핵교도 중도지폐하고 집에 있이니 맘을 못 잡는 모앵이라요.”
“그럴 기다. 와 안 그렇겄노.”
“지 맴이사 서울이나 일본에 가서 하든 공부를 더 하고 싶겄지요. 그럴 성시도 안 되지마는 또 붙잽히가믄 우짜꼬, 부모 맘에 안 그렇십니까. 그래서 장개라도 보내믄 우떨까, 맘 붙이고, 나이도 그럴 나이 아닙니까. 아니 늦었이믄 늦었지.”
영호네는 말하기 난감해하는 표정이었고 야무어매는 담박 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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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찾아온 뜻을 알아차린다.
“실은 어제 성자할무이 말심도 있고 해서 밤에 영호아배하고 의논도 했십니다.”
“주막집 숙이한테 중신들어달라 그 말 아니가? 그렇제?”
야무어매는 처음으로 웃었다.
“아, 아닙니다. 중신을 들어달라기보다 오복할무이 생각은 우쩐고 싶기도 하고 의논 삼아서.”
난감해하면서도 영호네는 매우 신중하다.
“의논하고 자시고 있나. 아아가 그만하믄 잘 컸지. 참하고 심성 곱고, 처지가 그래 그렇지 이 근동에서 그만한 아이는 없다.”
“야, 지도 그 처니는 보아서 압니다. 조신하고, 그런데 영호가 우찌 생각할까 싶기도 하고.”
하다가는 영호네는 당황한다. 너희들 처지에? 비난을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모가 하라 카믄 하는 기지. 무슨 소리고.”
“요새 아아들은, 신식이 머리에 들어가서 주장을 하는 갑데요. 우리 처지에 푼수없는 말이지마는 자식도 머리가 커져놓은께.”
“실은 영산댁이 나보고 한 말이 있었네라.”
“주막집 할무이가요?”
“응, 한복이 집에서 우리 숙이를 우찌 생가하는지 말 좀 건네보라 하더마. 그런 참에 우리 큰아이가 저리 돼가지고 돌아왔이니 무슨 경황이 있었겄나. 잊어부리고 정신이 없었제.”
“야. 그래서 성자할무이가.”
“음, 천일어매한테 말한 일이 있었다. 영산댁 말로는 죽은 남정네, 와 그 팔난봉 겉은 남정네가 어디서 낳았는지 아들이라 캄씨로 찾아왔는데 그놈이 숙이를 채고 들앉을 심산이라, 몽둥이를 드록 쫓아내기는 했으나 늘 맴이 안 놓인다 하믄서 서둘러 숙이를 치웠으믄 하는 기라.”
“그 소문은 지도 들었십니다.”
“전생에 무슨 인연인지 피도 살도 안 닿은 남의 자식을,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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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도 숙이한테는 공자라. 일구월심 숙이를 앉힐 자리 앉히겄다 그 생각뿐인 기라. 남한테 빠지지 않게 혼수도 장만할 기다 카고. 우리끼리니께 까놓고 얘기하자믄 너거들도 혼처 구하기 심든 처지 아니가.”
“그거는 그렇지요.”
“내 말 섭섭히 듣지 마라. 아이가 혼자 떠돌아댕긴 것도 아니고 아비가 영산댁한테 맽기고 갔으니, 또 주막에 있다 캐도 영산댁이 술심부름 시킨 것도 아니고 우리 요조숙녀 요조숙녀 함서 얼매나 떠받들었노.”
혼자 떠돌아다닌 것도 아니라는 것은 영호네에겐 가슴 아픈 말이었다. 그러나 야무어매가 가슴 아프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닌 것도 안다. 혼자 떠돈 너도 이렇게 자식 낳고 잘살지 않는가, 그런 뜻인 것도 안다.
“그라믄 그 아아 시집보내고 나믄 주막집 할무이는 우째 살 긴고요.”
“절에나 가서 있일 모앵이더만. 영호네 딴 생각 말고 내 말 들어라. 이 일은 너거들을 위해서도 성사해야 한다. 내 말 알아듣겄제?”
“야.”
“서로가 다 사람 하나 보고 하는 것이니 영 딴 생각 마라.”
“그런데 맘에 끼는 일이 하나 있어서.”
“맘에 끼는 일이라니?”
“소문을 믿어서가 아니라 저기 그런께 말해도 되겄는지.”
“니새 나새 말 못할 기 머 있노.”
“최참판댁 둘째도련님하고 어쩌고.”
하자 야무어매는 웃었다.
“그 얘기라 카믄 나도 안다. 그 기이 까닭이 있제. 최참판댁 작은 도련님이 바람을 잡아 댕기다가 강가에 스러진 거를 숙이가 본 기라. 해서 영산댁하고 함께 주막까지 데리온 긴데.”
“그기이 그런데,”
“빨래터 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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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여간에 말 많은 기이 탈이라. 생각을 해봐라. 쓰러졌을 직에 도움을 받았으니 만나믄 인사하는 기이 정한 이치고, 또 그 댁의 작은도련님은 예사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 모두 공펴키 살아야 한께 또 높고 낮은 기이 없인께 함시로 도련님이라 불러도 질색을 한다는 기라. 그렇기 차별을 아니 둔게 숙이한테도 말을 건 거 아니겄나. 그라고 또 숙이가 엄전한께 그 댁 도련님이 만의 일이라도 마음을 두었다 치자. 그기이 너거한테 못할 기이 머 있노. 최참판댁 도련님이 마음을 둔 처자를 며누리로 데리온다믄 그야말로 영광아니가. 숙이가 지 처지를 아는데 빨래터에서 말 몇 마디 걸었다고, 그거는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소리고오. 그러이 내 생각에는 빠르믄 빠를수록 혼사 성사시키는 기이 좋다.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지만 최참판댁에서도 좋아할 일이 아니가. 소문이 그렇다믄 그 소문 지우는 것이 된께.”
“말을 듣고 보이 그렇소.”
영호네는 비로소 얼굴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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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장 수유리에서
푹푹 찌는 날씨였다. 흐르는 땀도 땀이지만 습기찬 공기가 치덕치덕 몸을 휘감았다. 붉귀신 물귀신이 한꺼번에 달겨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칠 지경으로 더운 날이었다. 춥다든가 덥다든가 시원하다든가, 혹은 경치가 좋다 나쁘다, 용모가 어떻고 따위의 감각적 표현에 절제가 강하 유인성은 음식에 관해서도 누가 맛이 있네 없네, 짜네 싱겁네, 그런 말을 할라치면
“맛이 있으면 맛나게 먹어. 맛이 없으면 수저를 놓고. 사내자식이 채신머리없이 그러는 게 아니야.”
따금하게 일침을 놓아 상대를 무색하게 하였다. 그런 유인성도 오늘 같은 날시는 견디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람의 방문을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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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열어놓고 안동포 적삼의 고름을 풀어헤친 채 연신 땀을 닦다가 부채질을 하다가, 그러고 있는데 선우 형제가 찾아왔다.
“이런 날 방구석에서 체력 소모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경제라는 거다.”
쪽문을 열고 좁은 사랑 마당으로 들어서며 선우일이 큰소리로 말했다.
“불경제라……”
옷고름을 여미고 일어서며 유인성이 중얼거렸다. 회색 바지에 반소매 흰 셔츠를 입은 선우신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광대뼈가 솟고 양볼이 꺼져서 여우상 같은 그의 인상, 그러나 날카로움은 많이 마모된 듯했으나 달콤하고 깨끗해 뵈는 웃음은 전과 다르지 않앗다. 선우일은 마지의 양복 차림이었고 나비 넥타이에 파나마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올라오게. 왜 그리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가.”
“아닐세, 나가자구.”
선우일이 말했다.
“어디로?”
“물 찾아가는 게지. 옷 갈아입고 나오게나.”
“가시지요, 형님.”
선우신도 거들었다.
“물 찾아간다구? 그렇담 옷 갈아입을 것도 없네.”
안동포 홑바지의 걷어올린 가랑이를 풀어내리고 다시 한 번만 접어올린 유인성은 밀짚 모자를 머리에 올렸다.
“친구 따라 강남 가더라고, 그럼 나서볼까?”
대절하여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에 올라탄 세 사람은 우이동 골짜기를 찾았다. 물소리만 들어도 땀이 식는 것 같았다. 골짜기마다 수박·참외·복숭아, 싱그러운 여름 과일을 물에 담가놓고 여인네 아이들이 물맞이를 하고 있었다. 영계백숙을 뜯으며 소줏잔을 기울이는 남정네들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뜸해졌고 물소리만 줄기차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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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지?”
선우일이 말했다.
“그런 것 같네.”
“자넨 표현에 인색해. 언제나 그렇거든.”
“반풍수 안 되려고 그런다.”
“비트는군.”
“아니 다행이다. 이것저것 반풍수 아닌 게 없지.”
“흠 이것저것이라…… 이것저것 다 대신해줄 놈이 있어야 물러날 것 아닌가. 빌어먹을 놈의 세상, 나 같은 놈을 세상이 만들었지. 모두 명분만 찾고 원칙만 고집하고 허니 어쩌겠나.”
선우신은 개울 한켠에 돌을 쌓아 흐르는 물을 막아서 수박, 참외를 담가놓고 그늘 밑의 평평한 바위에다 술병과 술안주 따위를 펴놓는다. 오늘 도중 매점에서 꾸려온 것들이다.
“사방에서 욕은 바가지로 먹으면서, 그래도 어쩌겠나. 급하면 날 찾는걸.”
“……”
“이 선우일은 머슴이냐 피에로냐, 허허헛헛……”
유인성도 싱긋이 웃는다. 선우일은 양복 윗도리와 바지를 벗는다. 무릎까지 오는 인조견 속바지 밑에 종아리는 가늘고 희다. 노리끼한 털이 물결같이 밀려 있다. 유인성도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린다.
“적삼 벗고 은가락지 낀다더니 그 꼴이 뭔고?”
유인성 말에
“아아.”
하다가 선우일은 나비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의 단추도 끄르고 소매를 걷어올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으며 물속에 발을 담근다.
“시원하구나. 어이 시원타!”
선우일은 탄성을 질렀다. 선우신은 술자리를 펴놓은 바위 옆에서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은 뒤 유인성과 형을 바라본다. 이윽고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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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술자리에 와서 앉았다. 묘한 침묵이 한순간 흘렀다. 술을 마시고 수박을 베먹고 씨를 뱉으며 선우일이 먼저 입을 떼었다.
“인실의 소식은 들었는가?”
“……”
“아직 소식을 모르고 있어?”
“……”
“형님한테 오가다가 찾아가지 않앗던가요?”
이번에는 선우신이 물었다.
“왔더군.”
“그러면 인실이 소식은 들었겠군.”
선우일 말에 선우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형님!”
“왜?”
“오가다가 인실씨 소식을 어찌 알겠어요. 그도 궁금해서 방학을 이용하여 나왔을 뿐인데.”
하자 인성이
“그애는,”
하다가 술을 마신다.
“죽은 거나 다름없어.”
“그게 무슨 뜻인가?”
“자네 말 뜻 나는 모르겠네. 형무소 출입을 했기로 그건 조선의 딸로서 영광 아닌가.”
선우신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영광이라…… 영광, 하하핫핫…… 영광?”
유인성의 웃음 속에는 분노와 비애가 있었다. 잊을 만하면 어디선가, 누군가가 끌고 나와서 인성의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큰누이 인숙이 찾아왔다. 병석에 누워 있던 모친이 큰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가엾은 것, 가엾은 것 하며 흐느꼈던 것이다. 모친의 울음 속에는 아들 인성에 대한 원항오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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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인실이 집 나간 것은 지난봄이었다.
“오빠, 인실이 죽어서 장사지내는 비용쯤 생각하시고 돈 좀 주세요.”
느닷없이 그런 말을 인실은 했다.
“무슨 말버릇이 그러냐?”
“절 믿으시지요.”
“너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냐.”
유인성은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막내 인실을 사랑했다. 꺾이지 않는 그의 기상을 사랑했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신념대로 살 거예요. 강하게 살 거예요. 빈손으로 나가느니보다 얼마간의 돈 쥐고 나가야 오빠 마음도 덜 아플 거예요. 물론 전 지금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실이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인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긴 세월 인실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벌리고 돈 달라는 그 자체의 의미, 인실은 긴 세월이거나 아니면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서는 그같은 행동을 취할 성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성은 가족들 몰래 오백 원을 마련하여 인실에게 주었다. 오백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좀더 넉넉하게 주지 못했던 것이 한탄스러웠다. 인성은 그때 암울하고 오뇌에 젖어 있던 인실의 눈을 가끔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고 알지 못할 노여우을 느끼는데 오가다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실이 오가다의 아이를 배태했다는 사실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가다는 초라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밖에서 인실의 소식이라도 들었더라면 그는 결코 인성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성은 오가다를 보면서 일종의 안도감을 가졌다. 인실은 오가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갔을 거라고, 그러나 오가다의 진실에 연민을 느꼈다. 말없이 술을 마시다가 그는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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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인실씨를 잡아먹은 거지요. 배신에 대한 분노가 정당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지만 대중이란 쉽사리 등을 돌리더군요. 사회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 아닙니까.”
선우신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 말에 선우일은 찔금했다.
“다행이네. 신이가 몽상에서 깨어난 건.”
유인성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선우일이 물었다.
“자넨 관에다 못질할 때까지 의문으로 끝날 거야.”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누.”
그 말 대꾸는 없이 인성은
“사회 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라는 말은 맞는 말이네. 전폭적인 긍정으로 감상주의에 흐르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더더구나 민족주의를 휘두르고 나가는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민중에게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나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어리석어. 실체를 뚫어보지 않고 하는 일은 결국 붕괴된다.”
인성은 말을 계속할 듯했으나 그만둔다.
“그래 어떤 뜻에선 사회가 인실을 배신했지. 그러나 인실이도 피해망상이었어. 친일파나 할 일 없는 한량들의 입방아쯤 무시해도 좋았던 게야. 누가 뭐래도 인실은 조선의 딸이고 조선의 잔다르크야.”
“형님은 늘 그렇게 순진하시지요.”
선우신이 비꼬듯 말했다.
“뭐라구?”
“친일파 한량들이 뭐라 했습니까? 그들은 관심도 없어요. 소위 일한다는 것들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것들, 그것들이 계집같이 종알대는 주둥이를 몰라 그러십니까?”
평소 성격을 봐서 선우신의 어세는 매우 강했다.
“주둥이 하나 가지고 다해먹는 놈들, 검거 선푸이 불면 이상하게도 빠져나가는 놈들, 개의할 것 없어. 나보고도 회색분자니 기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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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니 하며 매도하는데 정작 그들이야말로 정체가 뭔지 모르겠더군.”
“그들 주둥이에 난도질 당할까봐 고분거리는 무리는 어떻고요.”
“그만들 두게. 인실을 배신한 것은 없어. 뭐 그애가 거물이야?”
인성은 쓰게 웃다가
“차가운 눈길이나 노골적인 비난에 좌절할 인실은 아니야. 그애는 지 자신이 선택한 대로 갔을 뿐이다.”
유인성 말에 선우 형제는 입을 다물었다.
“자아 술이나 붓게.”
선우신이 유인성 술잔에 술을 붓는다.
“여름이 가고 나면 의돈형님이 나올 텐데. 나와도 세상이 뒤숭숭하니 걱정이야.”
선우일이 말했다.
“가족들한테도 충분히 못해 서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소.”
계명회사건 때문에 잡혀간 사람 중에서 선우신, 유인성, 유인실 그리고 오가다 그 밖의 몇 사람은 비교적 일찍 풀려났고 작년에는 최길상(김길상)이 출소를 했으며 마지막 서의돈이 올 가을에는 형기를 마치고 나올 것이다. 그런데 선우일의 걱정과 자책 비슷한 말에 유인성은 왠지 냉담했다.
“권오송이 나왔다며?”
서의돈에 관한 말을 묵살하고 인성은 말머리를 돌렸다.
“나오기는 나왔는데 말들이 많아.”
권오송은 지난 늦봄 예맹 검거 때 잡혀갔다. 그러나 권오송은 예맹과는 깊은 관계가 없었고 오히려 약간의 알력도 있었던 터이어서 주위 사람들은 권오송의 검거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예맹검거 사건에 앞선 정월, 사무실 아래층 다실에서 저녁 늦은 시간, 극단 산호주는 실험 비슷하게 연극 동호인만 모아놓고 고리키의「밑바닥」을 공연한 바 있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니겠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취한 강선혜 때문에 더 말이 많은 모양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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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서 일체 외부와 연락을 끊은 것도 오해에 부채질을 한 것 같습니다.”
선우신이 덧붙여서 말했다.
“늘 있어온 일 아닌가.”
유인성은 가볍게 말했다.
“그런 정도의 얘기가 아니네. 아주 흉측스러워. 사전에 양해가 되어 잡혀갔다는 말도 있고 극단 산호주에 정체 모를 전주가 붙었다는 말도 있고.”
“권오송이가 이 모와 비교적 가까운 사이라 그런 말 듣는 거 아닐까?”
“그 점도 있지. 과거 이 아무개가 총독부에 의해 회유되었던 것은 사실이고 지금 민족주의라는 미명 하에 매문 행위, 괴상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권오송에 관한 흉측한 소문이 사실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말치고는, 현실성이 없구먼. 이 모같이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도 아니고, 희곡 몇 편 썼기로 거의 대중에게는 알려진 사람도 아닌데.”
“잡지하고 극단이 있거든.”
“……”
“만일 총독부의 손이 권오송에게 갔다면, 그건 이 아무개가 미치는 대중에의 영향을 꺾어버리려는 의도하고는 내용이 다를 게야. 이 아무개의 작업은 혼자 하는 것이지만 잡지 언저리에 모여드는 사람, 극단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 결국 예술인들 속을 파고 들어온다, 그렇게 봐야 하고 잡지나 극단의 방향도 일본 정책에 따라 조정할 수 있고, 한발 더 나아가서 친일의 선전장일 수도 있고 이건 어디까지나 가상이지만.”
“그건 일본을 과소평가하여 하는 얘기다. 치밀하고 교활하며 황당하고 대담한 일본이 문화 정책을 내세웠다 하여 예술을 육성할 의사는 물론 없지만 예술인들을 이용하여 친일의 선전장으로 만들만큼 자신 없는 놈들도 아니라구. 이 모의 경우는 그가 지녔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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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비중 때문이지, 그의 문학에 있었던 건 아니야. 하기야 이 모에게 있어서 정치와 문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뭐, 권오송의 손을 빌릴 것도 없이 그들은 개인을 상대하며 회유하거나 위협할 수 있고, 극단쯤 몇 개 만드는 게 뭐 그리 대수겠나. 현재로선 조선의 예술 따위는 그들 안중에도 없어. 독립운동가, 수상한 사상을 가졌다 하면은 집어내는, 다만 그것뿐인 게야. 권오송이를 어쩌구저쩌구 하는 발상부터 황당하기 짝이 없다.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나?”
“말의 진원지는 대강 짐작이 가네만 하여간.”
“권오송이가 수완이 좋아서 잡지도 하고 극단도 있고, 그러나 사재를 털어넣을 만큼 자기 나르므이 사명감은 잇을 것이며 섣불리 돈에 넘어갈 그 따위로 우둔한 사람도 아니야.”
“시기심이지요. 강선혜 씨가 적도 만들었구요. 결혼 전에 강여사는 좌충우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좌충우돌하게끔 몇몇 주변의 시선이 잔인했습니다.”
유인성은 술을 마시려다 말고 선우신을 쳐다본다.
“동경 유학했다는 걸로 강여사 콧대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별재주도 없는, 그 남녀평등을 주장한 글 때문에 조롱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시를 쓰네 연극을 합네 하고 『청조』주변에 모여드는 사라들이 주로 그랬었지요. 인간이란 무리를 지으면 바닥 없이 잔인해지고 무책임해지고, 그건 마치 무대를 보는 관객과도 같이 신랄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철부지에다 돈푼깨나 있는 집 딸, 낭비를 일삼는 골, 보기에 아니꼬운 것은 사람의 상정이지만,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그런 자들도 까불어보아야 지가 마포강 강서방 딸이지 누구겠는가, 그런 주제에 동경 유학이라니,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언사로 내뱉는 겁니다. 상대가 모질고 표독스러웠으면 면대하여 그랬겠습니까? 심지가 약하고 보면 계속 짓밟는 겁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게 아니고 약점을 꺼내어 계속 망가뜨리는 거지요. 건드려도 별 해가 없을 것이다 하면 계속 건드리게 되는 속성, 주변에서 가세하게 되고, 여자가 뭐, 하는 것도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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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닌 특성보다 약자라는 전제 하에 감정이 자행되는 것 아닙니까. 무리란 상향과 하향, 양면을 지닌 것 같습니다. 무리가 사명으로 뭉쳐지면 지고선으로, 협동과 사랑으로 가지만, 힘으로 뭉쳐지면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공격의 대상을 찾게 되고 가장 취약한 것을 골라잡아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며, 크게는 다른 민족을 침해하고, 작게는 골목 대장식의 잔학성을 나타내는데…… 생각해보면 역사란 늘 그래왔다, 언제나 강자 편에서 있었다. 조그마한 그룹에서도 그런 것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뭔지 사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지요.”
선우신은 흥분하고 있었다. 강선혜르 ㄹ비호하는 말이라기보다 그는 오가다라는 일본 남자로 인해 취약점을 ㄹ안고 있다고 보는 인실의 처지를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인간 본성으로 확대되어 선우신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을 테지만.
“막상 강여사가 오송형님하고 결혼을 하고 보니, 또 잡지나 극단에 강여사 쪽에서 출자를 하는 형편이고 보니 일이 묘하게 됐어요. 오송형님 주변에서 심히 강여사를 괄시했던 사람들 입장이 곤란해졌지요. 청조사 최기자도 사표를 내고 나갈 수밖에 없었지요. 이번에 검거 사건이 터지니까 그들은 은근히 좋아했을 겁니다. 어디 골탕 좀 먹어봐라, 『청조』도 망하고 산호주도 해산할 것이다. 한데 그 감정이란 게 줄기를 찾아보면 참으로 하찮은 것에서 출발했거던요. 그런데 그들의 뜻한 바와는 달리 오송형님이 나오게 되니 또 곤란해졌다 그 말입니다. 내친 걸음 되돌릴 수도 없는 고약한 루머가 퍼진 거지요. 한마디로 추악합니다. 아무 원수진 것도 없고 이해 상관도 없이 어는 서슬엔가 출발을 해서 험악한 관계로 치닫는 그런상황을 도처에서 보게 되면 정말 견딜 수가 없지요. 머리 박박 깎고 절에 가든지 동해물에 빠져죽고 싶어집니다. 독립이고 해방이고 뭐 되는 것 있겠습니까! 기아로부터 해방! 인간 소외로부터 해방! 빛 좋은 개살굽니다. 서로 유리 조각 들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서로의 살갗에 상처를 내는.”
선우신은 자신의 흥분을 깨달았는지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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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어디서나 있어왔던 일인 게야.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쓰레기는 나게 마련 아닌가. 지엽 때문에 근본을 망각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게야.”
선우신은 약간 무안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자네 같은 사람도 있으니 모든 것에는 다 양면이 있는 게야. 그는 그렇고 그놈의 잡지는 뭣하러 해.”
“나쁠 거야 없지 않나. 좁은 우리들 지면을 생각하면.”
선우일이 말했다.
“민적민적 민적거리고 있는 그가짓 것.”
“폐간당하지 ㅇ낳으려면 할 수 없다. 없는 것보다 나아.”
“없는 것보다 낫지가 않아.”
“어째서?”
“연극이란 사람을 모아야 되는 일이고 잡지가 있으면 사람 모으기 편리하긴 하지. 이론의 뒷받침도 되고 연극에 대한 계몽·관심도 확산되고, 우리 처지에선 미미한 거지만. 그러나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칫 잡지 하는 쪽의 추종자가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그런 면에서 오송이가 계산을 하는 모양인데, 그러나 잡지를 존속시키기 위해 미온적으로 계속하다 보면 알맹이는 빠져나가고 이해관계에 민감한 껍데기들만 난아서, 지금 오송이가 치르는 곤욕도 그런 선에서 비록된 거야. 세상 돌아가는 것은 물론 미흡하지만 신문이 있으니 내 생각에는 잡지보다 시집이나 창작집, 정선한 번역물 혹은 학술 논문 같은 것을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편이 낫겠어. 그건 우리들의 작업이라 할 수 있지만 총독부 눈치 보아가며 독자들 취향을 살려가며, 또 자기 측근에다 지면을 안배하려 하고, 죽도 밥도 아닌 꼴이 되지 뭐. 게다가 일본을 거쳐서 온, 그나마 일본서 선택되고 해석한 것을 재탕하자니 그것도 단편적으로 말씀이야. 궁색하기 짝이 없지. 한구석만 보고 사물의 전부라 생각하는 반풍수 만들기 십상이고 겉멋 든 속물들이 단편적인 것 치켜들고 지식인 행세나 하고, 그놈의 계몽주읜가 뭔가 하는 것을 보라고 와장창 부숴버리는 게 그들의 능사 아닌가. 엽전이 어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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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비하 자기 부정은 일본인과 궤도를 같이 하고 있거던. 마치 우리것을 부정하는 일이 독립에의 첩경이요 민족을 구제하는 거로 착각을 하고 있어. 그런 망상의 도배들을 나는 반역자라 규정하겠네. 문화란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것도 아닌게야. 독립이란 국토와 문화를 되찾고 지키는 것, 국토가 육신이라면 문화는 영혼인 게야. 뭐 그렇다고 해서 남의 것 무조건 배격하자, 그런 얘기는 아니네. 묵묵히 종전대로 사는 백성들 꼭대기에 서서 미치광이처럼 남의 것의 찬송가를 불러대는 소위 그 지식층, 산호주니,『청조』니 하는 따위의 극단이나 잡지 이름은 또 뭔고? 사이죠 야소풍인가? 사소한 일이지만 그런 경박함은 언젠가는 아래로 흘러 백성들의, 민족 전체의 경박성으로 화하는 게야.”
사이죠 야소는 사픈사픈 달작지근한 시를 쓰는 일본의 삼류 시인이다.
“불과 십 년 전인 삼일운동 때도 아직은 우리의 뿌리가 남아 있었어. 십여 년 동안 무섭게 변했다. 더욱더 무섭게 변하겠지. 내가 걱정하는 거는, 악용당할 수도 있다……”
“잡지 말인가?”
“아까 소문이 어쩌구 했는데 사실 무근인 것은 알지만, 앞으로 오송이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지.”
“내 생각에도.”
“소문도 그러하니 쾅 때리고 폐간해버리는 게, 이용당하는 고통보다 덜 할 건데 나 같으면 그러겠다.”
“그건 아까 얘기하고 다르지 않나?”
“앞으로 달라질 거라는 예상이지. 만보산사건으로 전쟁이 된다면…… 일본의 야심이 도중하차는 아니할 게야.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양상이 나타나겠지. 안중에도 없는 조선의 예술인에게도 메가폰을 들릴 수도 있을 게고. 『청조』같은 것 폐간시켜버리면 그건 다행이지만 인원 동원의 도구로 쓰일 수도 있고 일본 찬송의 글 나부랭이 실어라 할 수 있고 악용당할 소지는 있지. 그와는 경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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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지만 『조선일보』의 경우, 아주 교묘하게 악용당하지 않앗나.”
“그 일은 참 고약하게 됐지.”
“이제 와서? 되놈들 다 때려잡자 하고서 입에 거품을 물던 작자가 누구였나. 그게 엊그제 일이야.”
“그, 그때야 누구나 다 그랬었지. 신문의 요란한 기사 보고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선우일은 쩔쩔매며 얘기한다.
“경거망동, 그게 민족주의가 가진 취약점이다. 민족주의만 내세우면 어떤 범죄도 합리화하는, 나는 오늘날 식민지 정책을 강행하는 나라에 대해 민족주의보다 국가주의, 그러니까 그건 제국주의지만 그들 스스로는 모두 민족주의자지. 생각해보게. 만보산에서 농민들의 충돌이 있었다 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을 습격하고 살상하고, 입맛 쓴 얘기야.”
유인성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물었다. 선우일은 술을 마시고 술에 약한 선우신은 안주로 사온 콩을 집어먹고 있었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 숲에서 찢어지게 우는 매미 소리, 물 마시러 왔을가 작은 새한 마리가 바위 사이를 건너뛰고 있었다. 오랫동안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자는 청맹과니더란 말인가.”
술잔을 내려다보며 유인성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누구 말인가?”
“누구긴…… 기사를 넘긴 그자 말일세.”
“하긴, 태수형도 비난을 하더군. 경거망동이었다구. 공산당 했던 김아무개 아닌가.”
“그거 다 사회주의 낭인이 우굴거리는 동경서 보고 들은 때문이야.”
“자네는 안 그런 것 같네구려.”
유인성은 쓴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물었다.
“자네라면 어찌 했겠나?”
선우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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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에.”
“되놈들 모조리 때리잡아라, 기살 넘겼을 테지.”
“너무들 그러지 말게. 자네같이 이성에 투철한 사람이 흔하겠나.”
비꼬아놓고 다시
“너무 그러는 것도 나는 불만이네. 동경진재 때 조선인 학살하고 뭐가 다르냐 하면서 지나치게 비난하는 것, 난 불만이야. 어째서 그 일하고 이 일이같으냐 말이야. 이번 사건은 역사적으로 쌓이고 쌓였던 우리 민족의 원한이 폭발한 거야. 물론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가 왜놈 계략에 놀아난 꼴이자만.”
하자 선우신이 말했다.
“신문사에서는 전에도 특종을 보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장춘 주재기자의 통신을 그대로 받았다 하더군요.”
“만보산사건의 진상은 몰랐다 하더라도 그곳에 있던 놈이면 그곳 실정쯤 파악하고 있어야지. 일본 기관에서 고의적으로 홀린 오보를 판단 없이 송고해? 의도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조선일보』는 어용지『경성일보』와 함께 일본의 계략을 도운 셈이야. 함정에 빠진거라 해도 좋고.”
“하지만 우리 농민이 핍박받는 것은 사실 아닌가. 다지고 보면 그땅이 누구 땅인데? 태고적부터 우리 땅이었다구.”
“꿈 같은 소리 하는군.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땅은 우리 땅이야?”
철없는 아우 바라보듯 유인성은 선우일을 본다.
“지금 중국인들, 속속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있는데, 대체 일본은 어쩔 요량일까요?”
선우신이 물었다.
“돌아가서 통곡하고 길길이 뛰고 외치라는 거지 뭐겠나. 중국을 싸움판으로 끌어내자는 일본의 수작이야. 중국이 총칼 들고 달려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본은 여러 가지 이득을 본 것이고, 그러지 않아도 재만 독립군이 발붙일 곳이 없고 독립운동도 날로 하기 어려워져가는 상황인데,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게야.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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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조선인들에게 핍박이 가중되면 될수록 일본에라도 의지하려들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형편없는 민족, 잔악하고 분열을 일삼는 조선 민족, 일본이 계속 목탁 두드리는 듯 해온 소리 아니었나. 국제적으로 실증이 되었으니 일본으로선 매우 만족스러웠을 게야. 게다가 중국인이 빠져나간 뒤 그들의 상권도 일본인이 차지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결과만을 따지는 건 역시 난 불만이야. 간도 땅은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 있는 우리 땅이라구. 우리 민족이 가서 살 권리가 있는 땅이야.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면 요동이 고구려 땅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고 말갈병을 일끌고 고구려는 요하를 넘어 요서까지 나간 일이 있어. 요서가 어디야? 몽고로 가는 곳 아닌가. 고구려의 광개토왕 때 동부여를 치고 예순네 개의 성을 공략했다 하니, 또 영류왕 때는 동북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의 장성을 쌓았다, 그러고 보면 그 영토의 넓이를 상상할 수 잇는 일 아닌가. 삼국이 통일됨녀서 당에 빼앗겼던 땅도 고구려인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으로 실지가 회복되었다 할 수 있고, 누가 알어? 우리 조상들이 우수리강, 흑룡강도 넘어을는지. 『동이전』이었던가? 어디서 보았는데, 하여간 우리 민족이 큰 활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그만큼 사정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가 되지. 십육세기에 와서 몽고 지배 하에 있던 러시아가 겨우 국가를 형성하였고 시베리아는 그보다 훨씬 후에 모피를 얻기 위하여 러시아가 개척했으니,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이 그곳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구.”
“그럴 것 없이 이보게 동생, 하는 게 어떨고? 에스키모에게 말이야.”
유인성의 놀려대는 말은 들은 척하지 않고 선우일은
“그런 저런, 옛날 옛적, 고릿적 얘기는 다 그만두고라도 두만강 압록강으로 국경을 정한 것이 어디 우리였나? 우리였느냐고! 왜놈들이 저희 마음대로 조약을 맺은 거 아닌가. 나라 안이 쑥밭이던 이조 말엽에도 조선은 결코 간도를 포기 안 했어. 이중하는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선을 좁힐 수 없다 했어. 간도는 우리 땅인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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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백성이 되놈한테 구걸하고 살아야 하나.”
“태평성세에 풍월 읊는 그 따위 소리 하면 뭘 해. 그러면 한반도는 조선인이 일본에 갖다바쳤단 말인가? 왜놈 마음대로 한 짓이 아니란 말인가? 집안이 불바단데 들판의 볏가리 챙기러 뛰어나가는 꼴이군.”
유인성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선우일의 말이나 분노를 잘못이라 할 수는 없었다. 흑룡강을 넘고 우수리강을 넘고 어쩌고하는 말은 당소 황당했을지 모르지만, 간도가 우리 민족의 원한이 사무쳐 있는 곳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지난날, 용정촌 상의학교의 젊은 교사였던 송장환은 생도들에게 말하기를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쓰러뜨려 삼국을 통일하여 팔백 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는 통일의 대가로 요동 일대의 우리 영토와 영토 내의 수많은 우리 백성을 잃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청인들 속에 우리가 잃은 조상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 간도도 옛날에는 우리 땅이었고 가시덤불과 울창한 수림을 낫으로 헤치고 도끼로 찍어내어 용정촌을 만든 것도 우리들의 부모님이 아니었던가―사라져간 민족의 영광을 강조하고 물거품이 된 개척 정신을 애통해했던 송장환, 그의 비분은 나라를 빼앗긴 약자의 부질없는 감상이라 할 수 있겠고, 선우일 여깃 약자의 허세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본연의 어쩔 수 없는 감정이며 자신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도덕이기도 하다. 한말, 일본이 조선을 먹어들어올 무렵, 의병 봉기에 이어 오늘 현재까지 과히 민족의 대이동이라 할 만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으 ㄹ버리고 남부여대, 이주해갔고 항쟁의 터전으로 부상된 곳, 조선 민족에게는 서사시적 무대이며 아득한 옛적부터 민족의 혈흔이 점철된 그곳 간도의 땅을 선우일이 말한 대로 중국에게 결정적으로 넘겨준 것은 일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사살했던 그해, 1909년 청일간에 간도협약을 맺음으로써 그 땅은 청국으로 넘어갔다. 말하자면 일본은 두 걸음 전진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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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간도를 중국 땅으로 확정지으면서 일본이 얻어낸 것은 일본 영사관 내지 영사관 분관을 설치하는 일이었고 장차 청국의 길장철도를 연길 남쪽까지 연장하여 회령의 조선 철도와 연락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영사관 설치는 조선 독립군을 색출 탄압하는 합법적 본거지가 될 것이며 철도의 연결은 병력과 군수품의 신속한 이송을 위한 장차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요동 일대가 한민족의 코토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밀리고 밀어붙이는 끊임없는 판도의 변화 속에서도 여진족은 금과 후금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기까지 대체로 한민족의 지배, 혹은 영향권 속에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주변 국가에 둘러싸여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던 만주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충지였으며, 어쩌면 반만년 역사에 단일 민족으로,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여 존속해왔던 조선은 만주라는 완충 지대의 덕분인지 모른다. 한민족과 중국, 몽고의 각축장이기도 했던, 그러나 대청제국이 성립되고 만주는 중국을 정복한 대제국으로 부상함으로써 완충 지대는 간도 지방으로 좁혀지고 고정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사정 또한 매우 복잡하게 되었던 것이다. 간도 지방에 할거했던 오란가이족과 충돌이 있어 사십여 호의 부족을 이끌고 돈화 방면으로 도주한 건주여직의 간타리족에서 청의 시조 누루하치가 나왔다 하여 그들 발생의 영지를 보존한다는 의지와 그밖에 정복한 타부족이 월경하여 도피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것을 방지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고 해서 1628년 청의 태종은 간도를 비원호고 피차 사월하는 것을 엄단한다, 그것을 제시하여 조선의 인조와의 사이에 협약을 맺은 것인데 소위 간광 지대로서 봉금한 것이다. 강약이 부동하여 조선은 불평등 협약에 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조선에서도 권리는 있었다. 이쪽에서 그 땅으로 넘어가면 아니 될 일이나 그쪽 역시 농부들이 넘어와 주거를 마련할 때 조선은 청에 통보하여 그들을 철수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옥한 땅, 국법이 아무리 엄하다 하여도 굶주린 쌍방의 백성들이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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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청이 쇠퇴기에 들면서 간도 지방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 그 틈을 타서, 또 흉년을 맞이하여 많은 유민들이 그곳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런데 1881년 청은 도문강 동북의 간광지를 개간할 계획을 세워 미리 조선에게 통고하고 시찰을 한 바, 많은 조선 백성이 거주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해서 청은 변발하고 그들 복색에 따를 것이며 그들 정교에 복종 아니 하는 조선 백성은 간광지에서 나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선 백성은 그들 요구에 불응했고, 많은 유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그것은 심히 난감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의 동북경략사였던 어윤중이 종성의 사람, 김우식으로 하여금 백두산을 답사하게 하고 정계비와 토문강의 원류를 규명하게 한 것이 이 무렵이다. 그리하여 토문과 도문은 별개의 것으로서, 정계비에 씌어진 토문강은 북류하여 송화강에 이르는 것이므로 철수해야 할 조선 유민은 토문강 밖에 있는 사람에 한할 것이며 도문강 밖의 유민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은 청에다 제기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국경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1885년 두 나라는, 청의 가원계·진영, 조선의 이중하·조창식이 마주앉아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은 정계비에 씌어진 강 이름의 차이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아니하다가 실지를 답사하고 산천의 형세를 살핀 뒤 당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결판을 내리지 못하고 그들은 물러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차 삼차로, 담판은 속개되어 청은 협박으로 밀고 나왔으나 이중하는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을 좁힐 수는 없다 하여 강경히 맞섰던 것이다. 간도 내에 거주하는 유민 중 조선인이 십만이요 청인이 삼만, 십 대 삼이었지만 그간 대국의 세를 믿고 청인의 핍박을 조선 백성은 겪어야 했고 그 고초는 오죽했겠는가. 끊임없이 변발과 복색의 변경을 강요당하며 그러지 아니할 때 땅을 몰수당하는 등, 군과 경찰이 그들 수중에 있는 만큼 소수 청인들의 횡포는 격심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빗발 같은 간도 유민들의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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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청을 받은 조선 정부는 이범윤을 시찰원으로 파견하였고 이범윤은 동포들의 참상을 보고 정부의 허가를 무시한 채 사포대를 조직하여 청에 대항했다. 이범윤은 노일전쟁 때 러시아에 가담했는데 그것은 북청사변 때, 러시아가 진주했을 때 청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곳 백성들 경향에 따라 한 짓이며 그 역시 러시아의 힘을 빌어 청을 밀어내려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패전하게 되자 이범윤은 노령으로 잠적했던 것이다.
간도의 사정은 대강 이상으로 설명이 되었는데 그러면 만보산사건은 어떤 것이었는가. 동북 지방, 길림성의 장춘에서 서북방 삼십 킬로 지점에 있는 맘보산 부근에서 중국 농미노가 조선 농민의 충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일 관헌의 무력 충돌이라 해야 옳고, 더 정확하게는 무력 충돌이기보다 쌍방간의 시위로 보아야 옳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측 농민 한 사람이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 쌍방간에 사상자는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사건은 그렇게 엄청난 것으로 반전했고 국내 중국인 학살로 격화되었는가. 그러면 간도협약 이후의 간도 사정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말하여 간도의 백만을 헤아린다는 조선인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쿠션 같은 존재였다. 중국은 조선인을 때림으로써 일본을 때리는 효과를 얻으려 했고 일본은 조선인을 방패 삼아 밀고 나간다 할 수 있었으니까. 조선인의 대부분이 소작농과 고용의 입장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데 오 할의 소작료, 전수입의 일할 오부가 공과금, 팔부의 비싼 이자, 게다가 일본 경찰의 지배하에 있는 우리 백성들, 착취는 중국이, 탄압은 일본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간도 주민 자체가 완강한 저항 세력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찰권은 강화되고 일본 경찰권의 강화에 불안을 느끼는 중국은 조선독립운동을 저지하려 들었고 일본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는 만큼 조선인을 앞세워 토지 매수를 공작하고 중국은 또 불안하여 토지매매는커녕 토지상조궈에 대해서조차 창구를 닫아버리는 현상, 일본은 조선인의 국적 이탈을 절대로 승인 아니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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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중국은 귀화해야 땅을 준다, 해서 이중 국적자는 늘어났고 따라서 조선인은 이중의 탄압에 신음해야 했다. 그리고 배일 민족운동은 조선인 배척운도으로 나타났는데 물론 일본의 앞잡이가 조선인에게 없지 않았으나 동북 정권의 일본을 업으려던 지난날의 행적이 있고 팽배해오는 배일 민족운동은 그들에게 일말의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켜 그 칼끝을 조선인 배척운동으로 돌려왔다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단순한 민족 배외운동으로 흐르기 쉬운 존재였기에 결과적으로 관민 모두가 합세하여 쫓기는, 상처입은 짐승 한 마리를 일본과 함께 몰아붙였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은 중국인이 조선인을 몰아붙이며 그럴수록 좋다. 독립운동의 지반이 없어지는 것이 우선 좋고 중국이 가혹해지면 그럴수록 조선인이 이롭네 기대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중국은 분쟁의 씨로 보기 때문에 조선인을 내몰려 하고 이런 사정에서 중국인 장롱도전공사 지배인이 만보산 부근의 토지 삼백 헥타르를 지주 열두 명으로부터 십 년 계약으로 빌려 그것을 아홉 사람의 조선인에게 빌려주었고 이들 빌린 사람은 이백여 명의 조선인을 동원하고 개간에 착수했는데 개간 비용의 삼천 원은 일본 영사관 감독하에 있는 조선인민회 금융부에서 조달하였고 수전의 설계, 씨앗 구십 석은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니까 애당초 문제가 있었던 공작으로 보아야 옳고 지주와 중각에 땅을 빌린 자와 또다시 조선인이 빌리는 이 과정에서 계약상의 하자도 있었으며, 그러나 무엇보다 수로 개설로 인근의 다른 농토에 침수 위험이 있다는 것이 분쟁 발단의 가장 큰 이유였다. 중국 농민들은 일을 막으려 했고 조선 농민은 강행하려 했고 중국 공안국에서 사람이 나오게 되고 일본 영사관에서 압력을 넣고 아홉 명의 조선인 개간 당사자가 체포되는가 하면 다시 영사관 경찰에서 충돌하고, 일은 확대일로로 치달아 무장한 쌍방 경찰, 보안대가 대치하고 이쪽저쪽농민들이 대치하고, 위기촉발의 상태로까지 갔던 것이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러나 쌍방간에 중국인 농부가 약간의 부상을 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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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 사상자는 없었고, 결국 일본의 압도적 무력 하에 공사는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여러 가지 면에서 억울했던 것은 중국 농민측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7원 2일『조선일보』호외로 만보산사건은 조선 국내로 비화되었다. 일본 기관에서 흘린 허위 자료를 받은 장춘 주재의 기자가 본사에 타전했던 것이다. 남의 땅에서 가난한 내 동포가 생명에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강조한 그 보도는 순식간에 민족 감정을 자극했던 것이다. 7월 3일에 벌써 인천에서는 중국인 습격이 시작되었고 서울, 가장 격렬했던 곳은 평야이었다. 연이어 부산·신의주·원산, 학살된 중국인 백이십칠 명, 부상자 삼백구십삼 명, 물적 손해는 이백오십만 원에 이른다 했다. 이러는 동안 일본 경찰은 방관했고 또는 극히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물론 만보산사건이 파급되어 국내에서 일어났던 폭풍은 일본이 면밀하게 짜낸 각본 때문이었다. 칠월을 넘기고 팔월을 넘기고 구월 만주사변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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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장 만주사변
송관수가 만주로 떠난 것은 중국인이 속속 본국으로 철수하던 그 무렵의 일이었다.
마주사변은 만보산사건 후 두 달을 넘긴 구월에 발발했는데 정확하게 구월십팔일 유조구의 만철 폭파로써 일본은 만주 침략의 각본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오랜 세월 그들은 얼마나 이 시기를 꿈꾸며 고대해왔는가. 얼마나 초조했으며 또 주저해왔는가. 만주의 군벌 장작림이 북평의 국민군을 내몰고 대원수가 되었으나 결국 북벌군 장개석에게 패하여 봉천으로 가던 열차에서 한때는 동업자였던 관동군에 의해 폭사했는데, 패전한 장작림을 뒤쫓아 국민군이 만주로 진격해올 경우 일본은 매우 불리한 입장이므로 관동군의 고급 참모 가와모토 다이사쿠의 공작에 의해 장작림을 폭살하고 동북 삼성을 혼란에 빠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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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그들은 민주를 장악한다는,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1927년의 일이거니와 역시 만보산사건을 이용하여 던진 미끼를 중국은 물지 않아 일본의 희망은 또 한 번 무너졌다. 무저항방침을 견지하는 중국은 국토가 넓고 세월이 길어 그랬는가. 발버둥치는 일본은 섬나라, 시간이 짧았다고나 할까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정이 급박하게 되긴 했다.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국민정부와 합류한 것은 일본에게는 청천벽력이었을 터이고 중국 전토에 팽배한 반일·항일운동의 격화, 간도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조선인의 무장 봉기가 있었고, 수차 만주 땅에 침입한 바 있는 소련 또한 호시탐탐 남진을 노리고 있었다. 만주를 먹어치우겠다는 불타는 야망의 성취는커녕 자칫 잘못되면 일본은 기득권마저 잃게 될 형편이었던 것이다. 동지철도의 회수를 중국이 강행한 것을 보더라도.
일본의 국내 사정 역시 심각했다. 금융 공황은 경제계를 휩쓸었고 급속한 공업화에 과도한 군비 확장으로 농촌은 피폐해졌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주의 물결은 드세게 일렁였다. 불경기는 수많은 실업자를 거리로 내몰았으며 노동 쟁의는 격화일로, 사회 풍조는 퇴폐와 환락에 흠씬 젖어가고 있었다. 정계 또한 혼란의 연속이었다. 불발이었지만 삼월사건, 런던 군축조약을 들러싸고 천황의 통수권을 간범했다 하여 벌어진 소동, 하마구치 수상의 저격사건, 빈번한 내각의 경질, 일본으로선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만주로 향한 진격,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군부의 관동군 스스로 봉천역 북방 팔 키로 지점에 있는 유조구의 철도를 폭파한 뒤 장학량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면서 공격을 개시한 각본은 관동군의 고급 참모 이다가키 세이시로와 이시하라 간지의 작품이다. 공격을 개시한 십팔일에서 이십일일까지 관동군은 봉천·장춘·길림을 장악했고, 이듬해 이월까지 찌찌하루·금주·하얼빈 등, 사건이 발발한 후 불과 반년 만에 만리장성으로부터 노령인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중요 도시, 전략 거점을 점령했으며 이시하라하고 쌍벽인 모사꾼 도이하라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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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공작으로 천진 폭동을 유도하면서 교묘히 끌어낸 청의 마지막 항제 부의를 내걸고 1932년 3월 1일 드디어 일본은 대망의 만주국 괴뢰 정권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 동안 일본 정부는 세계의 여론을 두려워하여 사변의 불확대를 성명했으나 그것은 구두선에 불과했다. 신속하기가 질풍과도 같은 관동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고 일본 국민은 열렬히 만주 침략을 지지하고 나섰다. 만몽은 일본의 생명선이라 외치면서. 만몽이 일본의 생명선이라 한 것은 정우회 대의원이자 만철의 부총재를 역임한 바 있는 마쓰오카 요소케가 최초다. 그러나 오늘날 이본의 생명선이라고 누구나 말한다. 만몽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책은 그것을 우리 영토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시하라의 호언이었다. 일본 거리 거리에는 애조 띤 군가가 물결치고 퇴폐풍조는 하루아침에 군국주의로 결속이 되었다. 그리고 살찐 암소 같은 만주를 어떻게 요리해 먹을 것인지 군침을 삼키면서 상하 국민 모두가 대륙으로 나는 꿈에 부풀어 애국심은 고양되고 신국, 황도는 한층 공고해졌으며 군병은 신병으로 장엄시되었다. 이 모두가 세계의 주시 속에서 백주에 일어난 범죄였다. 국제간이 정의는 없다. 오직 잇속이 있을 뿐, 모두 어슷비슷한 약탈자이던 열강은 살찐 암송아지를 일본이 독식한다 싶었겠지만 세계적인 경제 공황에 국내 사정이 복잡하였고 실력을 행사할 처지도 아니었으니 입으로나마 떠들듯했으나 막상 소리나마 높인 것은 미국뿐이었다. 하니 중국이 태산같이 믿었던 국제연맹은 공기 빠진 고무풍선이었고, 조사단인가 뭔가 구성하기는 했지만 질풍을 막는 막대기 하나의 역할이라고나 할까. 걸작인 것은 연맹의 사무총장이라는 사람의 말이었는데 와, 일본은 수치를 모르느냐, 일본의 무사도는 어디 있느냐. 과연 일본의 무사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일본 무사도의 본질을 알고서 한 말이었을까.
여하튼 부의를 깃발로 세우고 일본이 만주국 수립을 선포하였는데 이에 앞서 중국의 항일 운동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대되어 특히 상해에선 십만 학생이 수업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왔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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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부두 노동자수만 명이 반일 파업에 돌입하였고 상해 중국은행가협회까지 일본인과 관계를 끊음으로써 경제적 보복을 가하고 시민은 모두 항일 대열에 합류하여 격렬한 배척 운동이 전개되었다. 운동은 나약한 정부에 대한 응징으로도 흘러 외교부장 왕정정의 구타, 국민당사에 난입하여 요인들을 구타, 그 밖에도 항의행동은 속출하였다. 이때 일본은 상해에서 또다시 사악한 음모를 실행하였다. 소위 일본 승려 살상 사건이다. 세계의 이목을 만주에서 돌려놓기 위해 만주 건국의 주모자인 관동군 이다가키의 의뢰를 받은 상해 주재 육군 무관 다나카 류키치가 중국인을 매수하여 승려를 죽이게 했고 범인이 달아난 공장을 습격한 것은 다나카의 지시를 받은 일본의 우익 단체 청년동지회의 회원들이었다. 물론 일본은 즉각 병력을 증강했다. 그리고 일본 영사는 상해 시장에게 시장의 사과, 범인의 체포·처벌, 배일 단체의 즉각 해산 등 네 가지 항목을 시한부로 내밀었다. 수락되지 않기를 바란 일본은 그러나 의외로 시장이 요구를 수락한 것에 당황하면서 수락을 무시하고 육전대로써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이것이 상해사변이다. 무사통과를 예상했던 일본은 분노에 불탄 십구로군의 격렬한 반격과 항쟁의 강한 의지 앞에, 또 중국 민중의 열렬한 군의지지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3월3일, 만주에서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일본은 정전을 성명했다.
송관수가 들어간 만주의 급변한 사정은 대강 이상으로 설명이 되었고, 자아 그러면 지리산의 우리 해도사와 소지감 선생의 동향은 어떠했는가.
해도사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소지감은 돌 위에 엉덩이를 박고 앉아서 해도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작년 음력으로 삼월 삼짇날 밤 김두만의 집을 습격한 두 사내 중 한 사람은 물론 송관수였고 서울 말씨에 젊은 남자는 소지감의 외사촌, 형평사운동에 가담했던 최범준이었다. 그리고 이도영의 집으로 간 손태산을 담위로 밀어올려주고 담 밑에서 기다린 사내는 양필구다. 석이의 전처, 그러니까 성환과 남희의 생모 양을례의 배다른 오라비로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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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손태산에게도 변성명을 하여 정체를 감추었고 일부러 강한 사투리를 쓰기도 했다. 필구는 과거 석이와는 처남 매부지간이었지만 친구이기도 했다. 최범준과 함께 일을 해왔으며 식자층인 그는 다소 냉소적인 일면이 없지 않았으나 을례와는 딴판으로 심지가 굳고 능력 있는 일꾼이었다. 그날의 돈은 소지감과 해도사가 양편에 갈라져서 릴레이식으로 옮겼으며 도솔암 일진이 보관했고, 최범준과 양필구는 구례로 갔는데 양필구와 동명인 윤필구집에 피신해 있다가 서울로 갔다. 송관수는 강쇠를 따라 광주리장수로 떠돌면서 더러는 통영 조병수 집에 묵기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일진과 함께 만주로 간 것이다.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떠나시오.”
연장 망태에 연장을 챙겨 넣으며 해도사가 말했다.
“어느 누가 날 잡아.”
소지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나 약간 난처해하는 빛도 있었다. 수일 전에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 끝에 일이 우습게 되어버렸다. 해도사는 살던 산막의 일체를 소지감에게 떠넘기고 떠나게 된 것이다. 말이 산막이지 구석구석 손질이 잘 되어 조촐했고 필요한 세간은 모두 구비된 데다 장무새며 뒤꼍에 묻어놓은 머루주, 십 년이 넘는 더덕으로 담근 술이며, 술이 소지감을 유혹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밥도 짓고 심부름도 곧잘하며 이제는 철이 든 몽치를 두고 간다는 것이다. 상당한 거리이긴 했지만 아래쪽엔 도솔암이 있었고 왼편으로 곧장 가면 강쇠의 산막이 있어서 오고 가고 반나절 거리, 왔다갔다 할 수도 있었다. 해도사는 연장 망태와 갈청같이 얇은 이불 하나, 옷 몇 벌, 당장에 끓여먹을 기구들을 꾸리면서 피아골 쪽에 쓸 만한 목기막 하나를 봐두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떠났다가 오고 싶으면 또 오는 거구, 새도 둥지가 있는 법인데.”
홀가분해진 해도사는 히쭉히쭉 웃었다.
“누구 말이오?”
“누구긴 소선생이지요. 나야 뭐 옮겨봤자 산속이지.”
사실 해도사는 홀가분했다. 진작부터 털고 일어날 심산으로 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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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보고 와서 살라는 말도 했었다. 그때만 해도 강쇠 곁이 아니면 죽는 줄 알았던지 안서방은 도통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후론 팔자에 없는 훈장질 하느라 매여버린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어째 일이 재미없게 된 것 같구먼.”
햇볕 따라 돌에서 축담으로 옮겨앉으며 소지감이 말했다.
“지금 와서 그래봐야 소용없소이다.”
“내가 자주 와서 귀찮아진 거요? 내빼는 거 아니오?”
“내뺀다…… 그런 점도 있겠지요. 산은 원래 인내를 싫어하고 산짐승도 인내를 싫어하고 산사람도 그러니,”
“흥, 산놈은 사람 아닌가?”
“사람이로되,”
하다가
“역마살 든 소선생도 인내야 반쯤 빠진 사람이지. 하니 이 산막의 주인으론 자격이 없지도 않고.”
“거 징그러운 소리 마시오. 주인이라니.”
“왜요? 천년만년 묶어둘까봐 겁이 나는 거요?”
“도사께서 왜 이러시오.”
“산사람하고 역마살 든 사람하고는 골육간이라, 말뚝 박아놓고 베리줄에 묶여서는 못 사는 사람, 집이 있으되 산에서는 그게 집이던가. 내가 있으되 그게 어디 나이던가. 내가 있으므로 남이 있는 것, 남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 남이 없는데 어찌 내가 있을꼬. 소선생께서는 오십 평생을 해인으로 왔건만 그거 말장 허행이었었소. 아직 자신으로부터 풀려나지 못하니 눈먼 말이 은령 소리만 듣고왔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하다가
“은령 소리 듣기론 눈먼 말이나 눈뜬 말이나 매일반이지.”
그 말대꾸는 하지 않고 해도사는
“산에는 갈구리질하는 관속도 없고요, 채찍 들고 호령하는 상전도 없고 다락같은 소작료, 못 내면 딸년이라도 내놔라 할 지주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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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래저ㅐ 해서 죄지은 사람 억울한 사람 잡아가두는 감옥도 없고 누가 하라마라 할 사람이 있소? 불질러 화전 부쳐먹다가 땅심 덜어지면 옮겨가고 임자 없는 열매, 임자 없는 산채,”
“허니 무정부주의다,”
“아암 암요.”
“그러니까 선남선녀들이다,”
“무도한 인사가 없다 할 수는 없으나 빼앗아갈 재화가 산속에 있어야지. 하여도 명줄은 이어갈 수 있는 곳,”
“지상천국이구려.”
“산에 맛을 딜이고 한번 인이 박혀버리면 산을 더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시쳇말로 자유라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것이다, 그 말인데 신선이 무어이겠소? 소위 자유인, 풀려난 사람 아니겠소이까? 어디 사람뿐이겠소? 천지만물 생명 있는 것, 그 모두가 남에게서 풀려나면 나로부터도 풀려나는 게요. 수십 년 기나긴 성상 소지감선생께서 헤매고 다닌 것은 무슨 까닭이요? 골육에서 풀려나고자, 윤리 도덕에서 풀려나고자 한 몸부림 아니외까?”
“도사 말씀대로 하자면 독립운동하는 놈들 모두 시러배자식들이군.”
“원칙으로는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이오. 독립이다, 침략이다, 그것다 없느니 못한 것 아니겠소?”
“침략이 없었으면 독립운동도 없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
소지감은 소리내어 웃었다. 웃거나 말거나 해도사는
“무리를 짓고 당을 만들고 그게 민족이요, 국가요, 법이오. 그야아 인간이란 똑똑하고도 영악한 조물이니 어쩌겠소. 그러나 생명을 만들고 운행하게 한 조물의 법보다 신기할 수는 없는 것,”
“그럴싸하게 늘어놓기는 하오만 말같이 쉬운 것이라면 해도사와 소지감이 이렇게 앉아서, 한 사람은 짐을 꾸리고, 그렇게는 안 되었을 것이오.”
“말이 쉬운 것이 아니지요. 이치가 쉬운 것이요 명료한 것인데 사람들이 어렵게, 어렵게 사는 탓으로 쉬운 것을 알질 못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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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두 사람은 죽이 맞는다. 내용이야 있건 없건 말은 이들에게서 장단인 것이다. 짊어지기에 알맞게 짐을 꾸린 해도사는 손을 털고 일어섰다. 먼산을 한번 바라보고 집터 주변을 돌아보고 나서 해도사는 마당에 멍석을 깔았다.
“몽치야? 술상 내오너라.”
족제비를 보고 마당 앞뒤를 쏘다니던 몽치는 예상하고 있었소, 하듯
“예애……”
늘어져빠진 대답을 했다.
진다래철은 갔다. 골짜기마다, 개울가 바위틈에 철쭉은 터질 듯 봉오리를 물고 있었다. 궐련을 붙여문 소지감의 망연한 눈이 구름을 보고 있다. 산새 소리는 왜 그리 요란한지 알 자리를 찾는가, 수컷을 부르는가, 산, 산, 끝이 없이 연이어진 산, 눈으로 생각으로도 가늠해볼 수 없고 침묵도 언어로서도 아무 소용이 없는 산, 말이건 생각이건 다람쥐가 가먹고 버린 도토리 껍질만큼 쓸모도 없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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