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목소리 - 그림이 들려주는 슬프고 에로틱한 이야기
사이드 지음, 이동준 옮김 / 아트북스 / 2008년 12월
절판


그저 우리가 바라보는 존재일 뿐, 어떤 것을 그렸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그림은 자신이 스스로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 속의 그림들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한 번 들어보는 것은 어떻겠냐며 유혹하고 있었다..

나를 유혹한 첫번째그림은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었다. 어디에서 본듯 한 느낌이지만 처음 보는 이 그림은 어느 어두운 밤, 한쌍의 연인과 쓸쓸해보이는 뒷모습의 남자, 그리고 한 명의 점원이 유난히도 밝은 까페에 앉아있었다..

조금은 쓸쓸해보이는 느낌의 그림이라는 것외에는 별다른 감상이 없던 순간 연인의 대화가 나에게 들리기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때문에 이런 늦은 밤 몰래 만날 수 밖에 없다는 불평, 우연인 척 스킨쉽을 하자는 이야기, 혹시 저 남자가 우리 대화를 엿듣는 것은 아니지 의심하는 이야기 등 그들은 이 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쓸쓸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음 장을 넘기니 한 여인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카라바조가 막달레나를 그리기 위해 선택한 여자!! 길에서 만나 하녀를 시켜 씻겨주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녀에게 옷을 입히곤 열정적으로 그녀를 사랑하며 그녀를 그렸지만 결국 지겨워하며 그녀를 버린 카라바조에 대해, 조금은 회한이 섞인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이렇게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신세한탄을 하기도 하고, 그들만의 비밀이야기를 몰래 들려주고 있었다..

이제껏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상징물을 찾아가며 어떤 신화 속 이야기인지 아니면 어떤 성서이야기인지 고심하며, 아니면 화가의 인생에 대해 읊어주는 책을 통해 그의 인생이 불운했기에 혹은 그를 둘러싼 사회의 분위기에 의해 그림의 분위기가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을 뿐 실제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들려주었던 책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 소녀>가 한 편의 소설이 되었든 이 책속의 그림들도 짧은 단편소설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의 대단함은 등장인물이 있는 그림에 한해서만 그림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 아닌 도대체 못 알아먹을 그림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무제 - 붉은색 바탕위에 파랑, 노라으 초록>이란 옆의 그림을 보며 도대체 이 그림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화려한 말솜씨가 돋보이는 평론가도 없는 마당에 그저 색깔의 집합일 뿐 그 속에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을까 싶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도 나에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당당히 들려주고 있었다. 걷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더러운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던 화가에 대해, 그리고 색채안에서 자유를 찾게된 그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어려운 것이 현대미술이고, 무제라 이름달린 그림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그림들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나는 수많은 어려운 그림들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들이 더 이상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닌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그림이 되었다.

내가 처음 보는 다양한 그림들 속에서 정신없이 수다를 듣다 우연히 만나는 안면있는 그림들도 있었다. 얀 페르메이르라 해서 누군가 싶었더니 <진주귀고리 소녀>를 통해 알게 된 베르메르였다. 그의 그림은 어떤 책을 읽든 꼭 한 장씩은 실려있어서인지 이 책에 실린 <뚜쟁이>도 낯설지 않은 그림이었다. 다만 그 익숙한 그림의 제목이 뚜쟁이래서 열심히 조금은 고약하게 생긴 노파를 찾았을 뿐이다.. 설마 군인 뒤의 능글맞은 표정의 남자가 뚜쟁이일줄이야..

그러고 보면 익숙한 그림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 사이드처럼 그림이 들려주는 비밀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하고 그를 통해서만 듣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한번쯤 미술관의 그림이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준다면 정말 행복할텐데... 계속해서 이런 미술서적을 보다보면 언젠가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몰래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덧붙이자면, 이 그림은 이 책 속의 그림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코루소의 로마식 저택 창가에 서 있는 괴테>였고, 그와 친분이 있던 티슈바인이 자신의 집에서 머물고 있는 괴테를 그린 것이었다. 강연회나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외국작가인 베르메르도 직접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괴테를 알던 사람이 괴테를 그린 그림이라는 것에 반해버렸다..

나는 괴테의 작품을 통해서만 그를 만날 수 있을 뿐인데 그와 같이 살고, 그를 직접 보고, 그와 이야기를 하고, 그의 모습까지 그릴 수 있었던 화가라니.. 괴테의 뒷모습을 본 것에, 그리고 괴테를 알고 지낸 화가를 처음 만났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어서인지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 이 그림이 가장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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