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메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 파파 -
우체통에 들어 있었던 이 작은 쪽지 한 장으로 인해 이 소설의 주인공인 메켄지 (줄여서 맥이라고 합니다.)는 신비로운 일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에 이 쪽지를 보았을 때의 그의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왜냐구요? '오두막'이라는 곳은 몇년 전 맥이 사랑하는 막내딸 미시가 미치광이에 의해 납치살해되었던 그 장소였기 때문이지요. 그 이후 그의 삶은 - 당연하게도 -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맥이 분노했던 이유는 한가지 더 있습니다. 그 쪽지를 보낸 사람이 '파파'이기 때문이지요. '파파'가 누구냐구요? 맥의 아내인 낸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맥에게 오두막으로 오라고 초청한 것이지요!!! 당연히 맥은 믿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질나쁜 장난일 가능성이 제일 크고, 최악의 경우 자기까지 살해하려는 그 연쇄살인범일 수도 있거든요.(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맥은 그곳으로 갑니다. 혹시라도 진짜 하나님이 그 쪽지를 보내셨다면,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동안 마음속에 늘 품고 있었던 질문 - '하나님, 왜 그러셨습니까?' - 을 외치면서 분노의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맥은 드디어 그 끔찍한 기억의 장소인 오두막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나님이 나타나시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흑인 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호감형인 아랍계 남자와 왠지 신비스러운 아시아계 여성이 있습니다. 누군지 아시겠지요? 예수님과 성령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렇게 파격적인 모습으로 처음부터 맥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립니다. '왜 흑인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냐?'는 맥의 질문에 하나님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와 같이 흰 수염을 날리는 백인 할아버지로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당신은 나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테고, 지금부터 우리가 나눌 경험과 이야기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테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 그것도 씩 웃으면서 말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들이라고 해야할까요?^^) 이제 맥과 시간을 보내면서 맥의 질문에 대답하고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알려주면서 식사를 하고 낚시를 하고 정원을 가꿉니다. 그리고 맥은 그 안에서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오해하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관념들을 버리고 새로운 생명,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심판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그 분 안에서 살기로 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며 전능하시지만 인류를 끝없이 존중하시는 분이었고, 그에 따른 댓가를 십자가에서 치루셨으며 인내하시면서 사람들과 다시 처음 창조시에 맺고 있었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에 대한 추천사들을 보면, '아픔에서의 치유','악과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등등의 말들이 많습니다. 어릴 때 경험했던 아버지의 폭력과 딸의 죽음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가지고 있는 맥이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서서히 '거대한 슬픔'에서 벗어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 책에서 이루어진, 더 본질적인 질문과 대답을 두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독립을 추구하면서 결국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경이로운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관계는 한마디로 사랑과 존중의 관계입니다.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관계의 원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서로 존중하며 순종합니다. 성부성자성령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그런 관계인 것이지요.
이런 관계를 잃어버리고 난 후, 인간은 결국 서로에게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살게 되지요. 그래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법과 규칙, 제도와 위계질서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상대를 통제하려고 하지요. 그러다가 결국 그런 통제와 규율로 인해 더욱 진정한 관계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사실조차 모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단어들은 생명을 잃고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책임','기대'이런 말들도 원래는 책임질 수 있는 능력, 기대하는 능력, 움직임, 경험이 내재된 단어였지만 하나님을 떠나 생명을 잃으면서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결국 죄책감, 교만, 심판, 죽음, 두려움에 연결되어 버립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계속 선언하고 스스로를 통제하며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할 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아이러니가 일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나님이 처음에 계획하셨던 그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독립성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사랑받는 법을 배우라고 합니다. 스스로 기준과 규칙을 세워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고, 그냥 우리 안에 있는 작은 것들을 모두 하나님께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이지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쉽고 어떻게 보면 어렵습니다. 여러가지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이니까 너무 쉬워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영역이 되므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안전을 원하거든요. 위험을 피하려고 하지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원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일부를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움켜쥐려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불확실성을 내포합니다. 모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전부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두라고 배웠다고 하는 맥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선권을 가지고 살면 모든 것을 위계질서나 피라미드로 보게 되죠.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둔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가 될까요? 또 그것은 어느 정도나 되어야 충분할까요?.. 나는 당신의 일부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의 전부를 원해요. 나는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아니라 모빌의 한가운데가 되고 싶어요. 내가 당신 안에서 살 때 우리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함께 겪으면서 살 수 있어요. 변화는 당신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고, 우리는 그 일을 꽤 잘해요. 당신은 어떤 의무나 책임도 없이 자유로이 사랑하면 돼요..."
이 소설이 물론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사탄의 존재와 역할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지요. 또한 책임과 훈련 등을 꼭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도 성경의 관점이나 우리의 경험과도 다릅니다. (아마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많이 비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오해하는 것들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고 역동적인 관계는 가지지 못하면서,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규칙들을 지키다가 좌절하거든요. 그래서 자유롭지 못하지요.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독립성을 주장하면서 심판석에 앉아서 스스로를 심판하고 이웃을 심판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심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제 독립성을 포기하고 선하신 아버지품에 안겨서 풍성한 관계로 들어가고 싶은 열망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소설 끝 무렵, 이제 새로운 관계의 여행을 시작한 맥에게 하나님은 과제와 선물을 하나씩 주십니다. 그게 뭐냐구요? 궁금하신 분은 읽어보시길~ (결말을 다 알면 재미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