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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처럼 하나님은
도널드 밀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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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고르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고르시나요? 광고, 서평, 지인의 추천 그런 것들이겠죠?
  저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끔 그냥 서점에서 이책 저책을 둘러보다 보면 눈에 띄는 책들이 있습니다.
  표지가 예쁘거나 제목이 땡기거나 그런 이유이지요. (그래서 출판사에서는 표지 디자인과 제목선정에 고심을 합니다. 예를 들어 몇년 전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제목의 힘이었습니다.)
  이 책도 사실 제목때문에 집어들었습니다. '재즈처럼 하나님은' 왠지 멋져보였거든요.

  일단 책을 든 다음에는 목차와 서문. 그리고 추천사들을 읽어봅니다. 그리고 살지말지 결정하지요.
  그런데, 이 책을 들고 서문을 보고는 바로 샀습니다. 뭐라고 써 있었냐구요? 그건 마지막에 말씀드릴게요.


  저자는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했지만, 오히려 사람들에게 믿음을 나누는 일은 기독교를 버리고 기독교 영성을 수용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라? '기독교를 버리고 기독교 영성을 수용했다'구요? 그 두개가 다른 겁니까?
사실 다르면 안 되지요.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의 모습, 아니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많이 다릅니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게 기독교는 수학이었다. 그것은 옳고 그름과 정치적 신념체계로 느껴졌을 뿐 신비롭지 않았고, 하나님이 내 삶에 놀라운 일을 하려고 천국에서 다가오시는 게 아니었다. 설령 내가 누군가에게 기독교를 전했다 해도, 그것은 다분히 내가 상대를 하나님과 이어주는 게 아니라 내 입장에 동조시키려는 것처럼 되었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라면 더 이상 아무것도 나눌 수 없지만 예수님에 대해, 그분과의 관계에 따라오는 영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 즐겁다. 기독교 영성은 체험할 수는 있지만 설명은 안되는 비정치적인 신비체제이다.'


  이렇게 말하면, 저자가 굉장히 자유주의적이고, 기존 교리나 전통에 대해 반항적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는 원죄를 믿으며, 삼위일체를 받아들이고,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며, 공동체를 중시하며, 전도를 하고 심지어는 십일조도 합니다. 다만, 기존 교리와 전통을 새로운 각도로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 놓으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실 관계입니다. 복음서와 서신서에는 살짝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원죄, 교회, 세례.. 그런 것들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사랑했고,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각처럼 빨리 오시지 않으면서, 신앙이 이제 비상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 되면서, 특히 이단들이 나타나 교회를 위협하면서 이제 기독교는 설명해야 할 필요와 의무가 생기게 됩니다. 경험을 설명하고, 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고, 체계화를 통해 전달했습니다. 그 당시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그러다가 어쩌면 우리는 처음의 신비를 많이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저자의 말대로 예수님과의 역동적인 관계를 옳고 그름의 체계로 축소시키고,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을 영적인 공식과 교리에 가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겸손히 신비를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신비는 가득차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을 보면 그 생명이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때가 되면 어김없이 피고 지는 꽃들을 바라보아도 얼마나 신기합니까? 더구나, 사랑에 빠지는 일은 얼마나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까? 우리는 늘 사랑 앞에서는 바보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그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합니까?
  그래서 저자는 신비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이것은 '인격적 신비주의'입니다. 목에 힘을 주고 뭔가 있어보이는 허세를 부리는 신비주의가 아닌.

  이 책은 그렇게 새로운 관점과 간결한 필력으로 다양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원죄, 회개, 십일조, 교회, 전도, 사랑.. 그의 고민은 우리모두의 고민이고, 그의 통찰은 우리 모두 함께 생각해볼만 합니다.


  저자의 글은 무겁지 않습니다. 중간중간 슬며시 미소짓게 하는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학적이지도 않습니다. 술술 읽힙니다.
  그렇게 이 책을 즐겁게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나랑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저자의 고민에 공감하기도 하고, 내 안의 문제를 발견하고 슬며시 부끄러워지도 하고, 저자의 통찰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저자와 나딘이라는 친구의 사랑과 인내, 전도로 결국 그리스도인이 된, 아주 똑똑한 페니라는 친구는 저자에게 이렇게 얘기하지요.

 '나딘을 보면서, 그리고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만약 내가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이 나를 좋아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이 얼마나 나를 홀가분하게 했는지 말로 설명 못해요. 어떤 기독교인들을 말을 들을 때면 그런 기분 든적 없거든요.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비누나 진공청소기라도 되는 듯 하나님을 팔아야만 하는 듯 했고 정작 내 말은 듣지 않는 것 같았어요....나는 예수가 자기 주장대로 하나님임을 믿게 되었어요. 어떻게 그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어요.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달랐어요. 전혀 딴 문제였지만 난 그분이 하나님임을 알았어요." 

 아.. 하나님은 이렇게 신비롭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제 제가 이 책을 당장 사게 만들었던 이 책의 서문을 알려드려야겠네요.

  '나는 재즈음악을 좋아한 적이 없다. 재즈 음악은 협화음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밤 포틀랜드의 바그다드 극장 밖에서 나는 색소폰 부는 남자를 보았다. 나는 15분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는 한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재즈음악이 좋아졌다.

  뭔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나서야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때가 있다. 마치 상대가 우리에게 길을 일러 주는 것 같다. 나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하나님도 협화음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건이 터지기 전의 일이었다.'


  어떻습니까? 그 뒤의 내용이 궁금해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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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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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메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 파파 -


우체통에 들어 있었던 이 작은 쪽지 한 장으로 인해 이 소설의 주인공인 메켄지 (줄여서 맥이라고 합니다.)는 신비로운 일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에 이 쪽지를 보았을 때의 그의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왜냐구요? '오두막'이라는 곳은 몇년 전 맥이 사랑하는 막내딸 미시가 미치광이에 의해 납치살해되었던 그 장소였기 때문이지요. 그 이후 그의 삶은 - 당연하게도 -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맥이 분노했던 이유는 한가지 더 있습니다. 그 쪽지를 보낸 사람이 '파파'이기 때문이지요.  '파파'가 누구냐구요? 맥의 아내인 낸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맥에게 오두막으로 오라고 초청한 것이지요!!! 당연히 맥은 믿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질나쁜 장난일 가능성이 제일 크고, 최악의 경우 자기까지 살해하려는 그 연쇄살인범일 수도 있거든요.(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맥은 그곳으로 갑니다. 혹시라도 진짜 하나님이 그 쪽지를 보내셨다면,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동안 마음속에 늘 품고 있었던 질문 - '하나님, 왜 그러셨습니까?' - 을 외치면서 분노의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맥은 드디어 그 끔찍한 기억의 장소인 오두막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나님이 나타나시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흑인 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호감형인 아랍계 남자와 왠지 신비스러운 아시아계 여성이 있습니다. 누군지 아시겠지요? 예수님과 성령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렇게 파격적인 모습으로 처음부터 맥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립니다. '왜 흑인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냐?'는 맥의 질문에 하나님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와 같이 흰 수염을 날리는 백인 할아버지로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당신은 나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테고, 지금부터 우리가 나눌 경험과 이야기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테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 그것도 씩 웃으면서 말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들이라고 해야할까요?^^) 이제 맥과 시간을 보내면서 맥의 질문에 대답하고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알려주면서 식사를 하고 낚시를 하고 정원을 가꿉니다. 그리고 맥은 그 안에서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오해하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관념들을 버리고 새로운 생명,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심판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그 분 안에서 살기로 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며 전능하시지만 인류를 끝없이 존중하시는 분이었고, 그에 따른 댓가를 십자가에서 치루셨으며 인내하시면서 사람들과 다시 처음 창조시에 맺고 있었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에 대한 추천사들을 보면, '아픔에서의 치유','악과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등등의 말들이 많습니다. 어릴 때 경험했던 아버지의 폭력과 딸의 죽음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가지고 있는 맥이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서서히 '거대한 슬픔'에서 벗어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 책에서 이루어진, 더 본질적인 질문과 대답을 두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독립을 추구하면서 결국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경이로운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관계는 한마디로 사랑과 존중의 관계입니다.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관계의 원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서로 존중하며 순종합니다. 성부성자성령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그런 관계인 것이지요.

이런 관계를 잃어버리고 난 후, 인간은 결국 서로에게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살게 되지요. 그래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법과 규칙, 제도와 위계질서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상대를 통제하려고 하지요. 그러다가 결국 그런 통제와 규율로 인해 더욱 진정한 관계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사실조차 모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단어들은 생명을 잃고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책임','기대'이런 말들도 원래는 책임질 수 있는 능력, 기대하는 능력, 움직임, 경험이 내재된 단어였지만 하나님을 떠나 생명을 잃으면서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결국 죄책감, 교만, 심판, 죽음, 두려움에 연결되어 버립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계속 선언하고 스스로를 통제하며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할 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아이러니가 일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나님이 처음에 계획하셨던 그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독립성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사랑받는 법을 배우라고 합니다. 스스로 기준과 규칙을 세워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고, 그냥 우리 안에 있는 작은 것들을 모두 하나님께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이지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쉽고 어떻게 보면 어렵습니다. 여러가지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이니까 너무 쉬워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영역이 되므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안전을 원하거든요. 위험을 피하려고 하지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원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일부를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움켜쥐려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불확실성을 내포합니다. 모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전부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두라고 배웠다고 하는 맥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선권을 가지고 살면 모든 것을 위계질서나 피라미드로 보게 되죠.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둔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가 될까요? 또 그것은 어느 정도나 되어야 충분할까요?.. 나는 당신의 일부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의 전부를 원해요. 나는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아니라 모빌의 한가운데가 되고 싶어요. 내가 당신 안에서 살 때 우리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함께 겪으면서 살 수 있어요. 변화는 당신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고, 우리는 그 일을 꽤 잘해요. 당신은 어떤 의무나 책임도 없이 자유로이 사랑하면 돼요..."


이 소설이 물론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사탄의 존재와 역할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지요. 또한 책임과 훈련 등을 꼭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도 성경의 관점이나 우리의 경험과도 다릅니다. (아마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많이 비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오해하는 것들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고 역동적인 관계는 가지지 못하면서,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규칙들을 지키다가 좌절하거든요. 그래서 자유롭지 못하지요.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독립성을 주장하면서 심판석에 앉아서 스스로를 심판하고 이웃을 심판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심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제 독립성을 포기하고 선하신 아버지품에 안겨서 풍성한 관계로 들어가고 싶은 열망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소설 끝 무렵, 이제 새로운 관계의 여행을 시작한 맥에게 하나님은 과제와 선물을 하나씩 주십니다. 그게 뭐냐구요? 궁금하신 분은 읽어보시길~ (결말을 다 알면 재미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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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언어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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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어?"

"하나님이 만드셨지~"

"에이, 그건 교회에서 하는 소리고, 실제는 어떻게 만들어졌어?"

"......"


  몇년 전,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그 아빠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진화론을 배우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은 과학과 거리가 먼 옛날 이야기 취급을 받습니다. 화가 나는 일이지요. 그런데, 솔직히 아니라고 소리높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학적 증거라는 것을 들고나오는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들이대봐야 웃음거리만 되지요. 

  어느날, 창조과학회라는 곳이 나타났습니다.  기독교인 과학자들이 모여서 성경말씀이 과학적으로도 완벽하게 맞다고 주장하면서 지구의 역사는 6000년 정도이고, 방사선 동위원소니 하는 것도 오류투성이이며, 진화를 입증할 수 있는 화석의 연결고리는 없다고 주장했지요. 책을 쓰고 교회를 다니며 강연을 하고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단체로 관람을 가고 (특히 학생들을 보냈지요.) 설교에서도 많은 목사님들이 창조과학회에서 한 이야기를 인용해서 성경도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면서 목소리를 높이셨지요.

  그런데, 솔직히 저는 창조과학회의 주장들을 보면서 궁금한 점이 더 많았습니다. 아니, 이렇게 주장이 명확하고 과학적 증거가 확실한데 왜 아직도 진화론이 대세인 것일까요? 정말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사탄의 속임수에 놀아난 것일까요?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모두 창조과학회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구과학자나 생물학자 중에는 크리스천이 없다는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확실히 믿지만,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창조를 믿으면서도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창세기의 천지창조에서 말하는 '하루'가 지금의 하루와는 길이가 다르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진화를 이용하셔서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의견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의견을 펼치는 책입니다.

  2003년, 10여년에 걸친 연구 끝에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31억개의 유전자 서열을 모두 밝히는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인간게놈프로젝트>라고 불린 이 프로젝트를 맡아서 지휘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인 프랜시스 S. 콜린스박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독실한 크리스쳔 과학자입니다. 그런데 진화를 거의 다 인정하는 크리스천입니다! (창조과학회의 의견만 옳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보시기에는 가짜 크리스쳔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과 신앙의 가깝고도 먼 관계를 따라가면서 현재 나타나 있는 의견들을 요약하고 반박합니다. 간단하게 분류해보자면 - 1. 무신론  2. 창조론  3. 지적설계론  4. 바이오로고스(유신론적 진화론) 입니다. 저자는 진화론이 바로 무신론으로 연결될 수는 없으며 따지고 보면 무신론이 가장 불합리한 주장이라고 외치고, 창조론은 과학적 증거들을 너무 무시한다고 공박합니다. 지적설계론에 대해서는 몇가지 반론을 제기하지요. 저자는 결국 유신론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인데요, (용어 자체가 신기하지 않습니까? 유신론이면서 진화론을 인정한다구요!)  저자가 지지하는, 지구 및 생물 탄생에 관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1. 우주는 약 140억년 전 무에서 창조되었다.

 2. 우주의 여러 특성은 생명이 존재하기에 정확하게 조율되어 있다.

 3. 지구에 처음 생명이 나타난 메카니즘은 알 수 없지만 일단 생명이 탄생한 후에는 대단히 오랜 세월을 걸쳐 진화와 자연선택으로 생물학적 다양성과 복잡성이 생겨났다.

 4. 일단 진화가 시작되고부터는 초자연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다.

 5. 인간도 이 과정의 일부이며, 유인원과 조상을 공유한다.

 6. 그러나 진화론적 설명을 뛰어넘어 영적 본성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다. 도덕법(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이 존재하고 역사를 통틀어 모든 인간 사회에서 신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그 예가 된다.

  어휴.. 너무 쇼킹하지요? 기독교인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다니요! 결과적으로 이 진화론적 유신론은 창조론과 무신론 양쪽에서 얻어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는 꽤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요.

  그럼, 저자는 어쩌다가 크리스천이 된 것일까요? 모태신앙으로 자랐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지울 수 없어서 과학에 억지로 하나님을 붙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는 대학생때까지는 오히려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그의 논리에 굴복합니다. 그 논리란 도덕법이었습니다. 즉,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 마음 속에는 이상하게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서 비슷한 감각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진화론이나 문화적 관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결국 아마도 우주의 밖에 있는 신이 우리 내부에 심어놓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을 접하고서 저자는 신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덕법으로 추정해 보건대 그 신은 신성하고 정의로운 분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런 생각이 들자 이제 그의 내면에서 두가지 감정이 싸우게 됩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편안함과, 신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절망감이었지요. 그리고 이제 '죄인'이라는 말이 자신에게 들어맞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방황하며 성경, 특히 복음서를 계속 읽어가다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결국 어느날 아침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저자는 신앙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주장과, 과학의 진실을 터무니없이 거부하는 종교인의 주장을 모두 반박합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믿음이 서로 모순되지 않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그리고 마침내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진화(?)하는 영적 여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주 탄생이나 생물진화에 대해 저자의 의견이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실 우주니 생명이니 하는 영역은 너무도 방대하고 심오해서 아직도 밝히지 못한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계속해서 연구하고 입증하는 것이 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은,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과학과 신앙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과학과 신앙을 아예 분리시켜서 생각하거나, 과학을 부정하고 신앙만 인정하면서 살았거든요. (사실,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몇년 전에 어떤 전도사님에게 비슷한 책을 추천했다가 '쓰레기같은 책'이라며 펄펄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있거든요.)

 

  책 말미에서 저자는 과학자들에게는 과학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며 영적 세계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라고 권유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새로운 사실을 잘 이해도 못하면서 과학적 관점을 공격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비웃음을 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리고는 과학과 영적 세계 사이의 전쟁에 휴전을 선포하고 위대한 진리를 지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두루 만족스럽게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찾아보자고 제안합니다.

  이제 조금 더 편안하게 과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학과 신앙을 굳이 배타적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일단 과학적 세계관과 영적 세계관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대답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서로를 보완하는 면이 있다고 인정하면서 두 개의 세계관을 통합하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며, 과학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밝히는 작업이니까요.

 

   이제는 중학생이 되었을 그 아이의 아빠에게 이 책을 권해야겠습니다. 아이와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보라구요. 설마, 또 '쓰레기책'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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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정도 되었나요? 청년부 교사를 하고 있을 때, 학생들에게 어떤 세미나를 권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청년들의 관심사인 이성교제에 관한 세미나였지요. 이미 연애의 기술과 작업의 정석, 밀당의 예술을 넘어 절제되지 않은 성, 일시적인 쾌락이 TV나 영화, 인터넷을 통해 청년들의 눈과 귀와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 때에 하나님을 믿는 청년들은 어떻게 연애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미나였지요.
사실 교회 내에서 연애나 성에 대한 담론은 절제와 금지 일변도였고 그결과 오히려 순진한 청년들이 화려한 바깥세계(?)의 유혹에 준비되지 않은 채로 노출되어 시류에 휩쓸려 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때 만난 것이 저자의 전작, '우리..사랑할까요?'였습니다.
그 책을 읽고는 청년들에게 주저없이 권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교회 집사님 (사실 저의 어머니였지요^^) 의 후원을 받아 (받아냈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만^^) 그 책의 저자가 진행하는 세미나에 보냈던 것입니다. 다녀온 학생들이 실제적이어서 유익했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자가 또 하나의 책을 내놓았더군요. '우리 사랑할까요?'의 후속탄. '우리, 결혼했어요'입니다. (벌써 8년전에 내놓았는데 이제야 보았습니다..)


사실, 부부관계는 영원한 숙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보신 (성경에서 '좋지 못하다'는 단어가 처음 나온 것이 바로 이 부분이지요. 그 전에는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셔서 짝 지워주신 이후, 부부는 가장 친밀한 연합을 누리는 상대이며,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동시에 때로는 야당, 심지어는 웬수가 되기도 하는 존재로 지금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부관계에 대한 책은 이미 수도 없이 나왔고, 각종 세미나와 TV프로그램도 절찬 상영중입니다.

 

그래도 크리스천들이 읽으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물론 결혼에 대해서 신자와 불신자는 많은 부분을 공유하기는 합니다. 신자들도 사회적 인간이며, 문화적 인간이니까요. 별에서 온 그대처럼 지낼 수는 없지요.
하지만 결혼 자체가 하나님의 고안품이며 (가정이 교회보다도 먼저 세워졌습니다!), 부부는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언약관계'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우리들만이 가지고 있는, 또한 마땅히 가져야 하는 관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을 겸비하면서도 동시에 실제적이고, 다른 나라의 경우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심정과 상황을 이해하는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훌륭한 도우미입니다. (감사하게도 요즘은 이런 좋은 도우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저자는 의사입니다.(목회자가 아니어서 오히려 호감이 갑니다. 목사님들의 말씀은 좋긴 하지만.. 왠지 너무 거룩하지 않나요?^^)  가정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고 잘 나가던 병원직을 사임한 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가정을 회복시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요.
또한, 본인이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 때문에 가족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욱 신뢰가 갑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많은 결혼이 힘든 이유는 혼수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혼수라구요? 저자가 말하는 혼수는 '가정설계도'입니다.
'가정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란 어떤 모습인가'를 알고 가정의 모습을 설계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것들을 알려주면서 함께 가정을 세워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설계도는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하나됨'입니다. 서로 다른 두사람이 만나서 한몸을 이루는 것이 가정의 목적인 것입니다.(창 2:24)
그러므로 부부는 온전한 육체적 결합과 더불어 정서적, 영적으로도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부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몇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이혼 위기에 있던 2만쌍을 회복시킨 저자의 상담'이라는 선전문구가 인상적인 책이었지요.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른지, 화성인과 금성인이 지구에 와서 만난 것과 같다고 하면서 남녀의 다른점에 대해 기술한 책이었습니다. 책에 따라 한동안 '나는 화성인이라구','너는 여잔데도 화성인 같네?'등등의 말들이 유행했었지요. 그책의 결론에 뭐라고 써 있는줄 기억하시나요?
'이 책의 내용을 다 잊어버리더라도 이것만 기억하라.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명언입니다. 또한 진리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남녀는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서로 공부해야 하지요.

 

또한 가정설계도는 거룩,비전,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설계하신 가정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 설계도에 따라 건물이 지어진다면, 설사 부유하지 않더라도, 큰 일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으며 또한 그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의 좋은점은, 무지무지 실제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조금만 읽어보시면 금방 아시겠지만, 술술 읽힙니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사례들은 딱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아침마당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게다가 교회에서는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던 부부간의 성에 대한 이야기도 다룹니다.(좀 약하기는 합니다만..^^;;)
또한 저자가 매우 유머러스하게, 직접 강의를 하듯이 글을 썼기 때문에 웃고 공감하며 끄덕이며 읽다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장에 이르게 되지요.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자, 100인분의 재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몫은 1인분입니다. 나머지는 맛있게 끓여서 이웃과 나누십시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이웃과 나누는 99인분이 되겠네요^^

그나저나, 1인분은 제대로 만들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아야 겠습니다. 아무리 요리책이 좋아도 주방장이 형편없으면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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