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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처럼 하나님은
도널드 밀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고르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고르시나요? 광고, 서평, 지인의 추천 그런 것들이겠죠?
저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끔 그냥 서점에서 이책 저책을 둘러보다 보면 눈에 띄는 책들이 있습니다.
표지가 예쁘거나 제목이 땡기거나 그런 이유이지요. (그래서 출판사에서는 표지 디자인과 제목선정에 고심을 합니다. 예를 들어 몇년 전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제목의 힘이었습니다.)
이 책도 사실 제목때문에 집어들었습니다. '재즈처럼 하나님은' 왠지 멋져보였거든요.
일단 책을 든 다음에는 목차와 서문. 그리고 추천사들을 읽어봅니다. 그리고 살지말지 결정하지요.
그런데, 이 책을 들고 서문을 보고는 바로 샀습니다. 뭐라고 써 있었냐구요? 그건 마지막에 말씀드릴게요.
저자는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했지만, 오히려 사람들에게 믿음을 나누는 일은 기독교를 버리고 기독교 영성을 수용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라? '기독교를 버리고 기독교 영성을 수용했다'구요? 그 두개가 다른 겁니까?
사실 다르면 안 되지요.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의 모습, 아니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많이 다릅니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게 기독교는 수학이었다. 그것은 옳고 그름과 정치적 신념체계로 느껴졌을 뿐 신비롭지 않았고, 하나님이 내 삶에 놀라운 일을 하려고 천국에서 다가오시는 게 아니었다. 설령 내가 누군가에게 기독교를 전했다 해도, 그것은 다분히 내가 상대를 하나님과 이어주는 게 아니라 내 입장에 동조시키려는 것처럼 되었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라면 더 이상 아무것도 나눌 수 없지만 예수님에 대해, 그분과의 관계에 따라오는 영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 즐겁다. 기독교 영성은 체험할 수는 있지만 설명은 안되는 비정치적인 신비체제이다.'
이렇게 말하면, 저자가 굉장히 자유주의적이고, 기존 교리나 전통에 대해 반항적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는 원죄를 믿으며, 삼위일체를 받아들이고,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며, 공동체를 중시하며, 전도를 하고 심지어는 십일조도 합니다. 다만, 기존 교리와 전통을 새로운 각도로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 놓으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실 관계입니다. 복음서와 서신서에는 살짝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원죄, 교회, 세례.. 그런 것들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사랑했고,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각처럼 빨리 오시지 않으면서, 신앙이 이제 비상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 되면서, 특히 이단들이 나타나 교회를 위협하면서 이제 기독교는 설명해야 할 필요와 의무가 생기게 됩니다. 경험을 설명하고, 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고, 체계화를 통해 전달했습니다. 그 당시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그러다가 어쩌면 우리는 처음의 신비를 많이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저자의 말대로 예수님과의 역동적인 관계를 옳고 그름의 체계로 축소시키고,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을 영적인 공식과 교리에 가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겸손히 신비를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신비는 가득차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을 보면 그 생명이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때가 되면 어김없이 피고 지는 꽃들을 바라보아도 얼마나 신기합니까? 더구나, 사랑에 빠지는 일은 얼마나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까? 우리는 늘 사랑 앞에서는 바보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그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합니까?
그래서 저자는 신비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이것은 '인격적 신비주의'입니다. 목에 힘을 주고 뭔가 있어보이는 허세를 부리는 신비주의가 아닌.
이 책은 그렇게 새로운 관점과 간결한 필력으로 다양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원죄, 회개, 십일조, 교회, 전도, 사랑.. 그의 고민은 우리모두의 고민이고, 그의 통찰은 우리 모두 함께 생각해볼만 합니다.
저자의 글은 무겁지 않습니다. 중간중간 슬며시 미소짓게 하는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학적이지도 않습니다. 술술 읽힙니다.
그렇게 이 책을 즐겁게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나랑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저자의 고민에 공감하기도 하고, 내 안의 문제를 발견하고 슬며시 부끄러워지도 하고, 저자의 통찰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저자와 나딘이라는 친구의 사랑과 인내, 전도로 결국 그리스도인이 된, 아주 똑똑한 페니라는 친구는 저자에게 이렇게 얘기하지요.
'나딘을 보면서, 그리고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만약 내가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이 나를 좋아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이 얼마나 나를 홀가분하게 했는지 말로 설명 못해요. 어떤 기독교인들을 말을 들을 때면 그런 기분 든적 없거든요.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비누나 진공청소기라도 되는 듯 하나님을 팔아야만 하는 듯 했고 정작 내 말은 듣지 않는 것 같았어요....나는 예수가 자기 주장대로 하나님임을 믿게 되었어요. 어떻게 그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어요.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달랐어요. 전혀 딴 문제였지만 난 그분이 하나님임을 알았어요."
아.. 하나님은 이렇게 신비롭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제 제가 이 책을 당장 사게 만들었던 이 책의 서문을 알려드려야겠네요.
'나는 재즈음악을 좋아한 적이 없다. 재즈 음악은 협화음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밤 포틀랜드의 바그다드 극장 밖에서 나는 색소폰 부는 남자를 보았다. 나는 15분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는 한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재즈음악이 좋아졌다.
뭔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나서야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때가 있다. 마치 상대가 우리에게 길을 일러 주는 것 같다. 나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하나님도 협화음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건이 터지기 전의 일이었다.'
어떻습니까? 그 뒤의 내용이 궁금해지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