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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ㅣ 패러독스 10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피에르 바야르의 글은 언제나 즐거움을 준다.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는데, 추리비평 3부작이 완간된 후 한동안 소식이 없어 좀 걱정했었다. 더 이상 번역되어 들어오지 않는 건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 나왔을 때 기뻤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 책 자체에는 별로 흥미가 가지 않았는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과 비슷한 논리로 흘러갈 것 같은 느낌이라 별로 신선한 느낌은 아니겠다 하는 생각에서였다.
내 생각처럼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과 논리적으로 비슷하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비독서를 독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독서담론을 논했다면,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은 꼭 여행을 떠나야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르코폴로 등의 '방콕 여행자'의 예시를 들어 말해준다.
피에르 바야르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과연 여행이란 무엇인가?"이다.
p.39.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험가들 중 한 사람의 고난이 있은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중세 전문가들이 그가 실제로 극동지방에 방문을 했는지 아니면 그냥 집에 얌전히 머물러 있었는지에 대해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행과 비여행을 구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한 여행 개념을 좀 더 엄밀하게 파악해보려고 할 경우 그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은 일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피에르 바야르는 여행과 여행하지 않음의 경계가 모호함을 지적하면서, 여행이 몰랐던 장소를 알기 위한 최선의 방법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여행이 매우 어리석은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전제한다.
p14.
일부 공상가들이 꿈꾸는 것과는 달리 이 세계는 결코 예전보다 더 안전하지 않으며, 비교적 안전한 장소에서 살 수 있는 행운을 지녔는데 무엇때문에 내가 그런 장소를 떠나 적대적인 땅에서 생고생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피에르 바야르는 '방콕 여행'이 어쩌면 진짜 여행보다 현명할 수 있다고 말하며 수많은 '방콕 여행자'들을 글 속으로 데려오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마르코 폴로,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 에두아르 글리상, 샤토 브리앙, 마가렛 미드, 제이슨 블레어, 로시 루이스, 장 클로드 로망, 조지 살마나자르, 카를 마이, 블레르 상들라르...... 이 풍부한 예시들은 피에르 바야르의 어쩌면 엉뚱하기까지 한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예시들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과는 다른 매력을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 부여한다. 목적지(결과, 논리)가 같더라도 가는 길이 여러 갈래임을 보여준다고 할까.
여행을 간다고 해도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장소의 일면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어쩌면 진짜 여행이 방콕 여행보다 그 장소에 대해 모를 수 있다고 말한다. 하기야 그 장소를 제대로 보았다고 하기 위해서는 어디를, 얼마나, 어떻게 돌아다녀야 하는가? 피에르 바야르는 '방콕 여행'에 대해 말하면서, 사실은 '진짜로 여행을 즐기는' 팁을 알려주고 있는 듯 하다.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은 '방콕 여행'을 여행의 한 종류로 편입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여행'의 영역을 무한히 늘려놓는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고 있지만 경시했던 비여행(이 책을 통해 여행의 한 종류로 편입된)의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에서, 피에르 바야르는 '여행하지 않은 곳을 여행하기' 위해서 방콕 여행자들이 가져야 한다고 알려준 미덕들은 다음과 같다.
1. 풍부한 상상력을 갖는 것
2. 쓸데없이 도중에 멈추지 않을 줄 아는 것
3. 믿을 만한 정보원을 옆에 두는 것
이번 책에서 피에르 바야르 글의 번역자가 다시 바뀌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과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를 번역했던 김병욱 씨다. 그 후의 세 권, <예상표절>, <셜록홈즈가 틀렸다>, <햄릿을 수사한다>는 백선희 씨가 번역했는데, 백선희 씨의 번역은 읽기가 까다로웠던지라(직역투라 자꾸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문장이 꼬였다) 번역자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차에, 이번에 번역자가 바뀐 것을 알고 반가웠다. 이번 책은 확실히 번역자가 달랐던 책보다 잘 읽힌다.
마지막으로, 메모해놓은 문장 하나 더.
p.149.
한데 이 '알리바이'라는 말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 책에서 연구하는 문제 전체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어떻든 모든 방콕 여행자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실제로 체류한 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상정함으로써 살인자들의 그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니 말이다.
2012. 7.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