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이다. 오랜만에 히가시노 게이고를 읽는 것 같다. 유명세를 탄 작가의 글은 굳이 찾아보지 않게 되는데(여기저기서 너무 많이 들어서 이미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 딱히 읽으려 마음먹은 책이 없을 때 꺼내들기 좋다. 단편집은 한번에 몰아 읽지 않아도 흐름에 방해를 받지 않아서 특히 좋다.

 

  내 경우, 책을 고를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래도 제목이다. 이 책은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이라는 아이러니한 제목이 인상깊다. 책을 읽고 난 뒤,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각각 독립적인 단편이지만, 느낌이 대체로 비슷하다. 다루고 있는 것이 '범죄지만 범죄가 아닌' 범죄들이기 때문에 그런 듯 싶다.

 

  범죄지만 범죄가 아니라는 점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등장인물들이 떠올랐다.

 

 

( 미리니름 있습니다 )

 

 

* 작은 고의에 관한 이야기

: 옥상에서 떨어진 친구의 죽음이 자살인가, 사고사인가, 타살인가를 추적하는 고등학생의 이야기. 다쓰야는 왜 옥상에 올라갔을까? 갑자기 휘청거린 이유는 무엇일까?

 

-> 범인과 범행방법은 거의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래서 섬뜩함이라던가 충격, 반전의 묘미 또한 별로 없었다. 하지만 범인이 한 일이 과연 "작은 고의"인가에 대해서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다. 작은 고의는 살인이 아닌가? 어디선가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순간 이미 살인은 일어난" 거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는 오버라고 생각했는데, 그 문장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단편이었다.

 

 

* 어둠 속의 두 사람

:  아이가 살해당했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들어와 아이를 살해한 사람은 누구일까? 범인은 어떻게 그 날 창문이 열려있다는 걸 알았을까?

 

-> 끝까지 읽으면 이 글에서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생각하게 된다. <작은 고의에 관한 이야기>보다 한층 은밀하게 동기와 범인이 숨어있다. 아기를 죽인 범인도 나쁘지만, 범인이 아기를 죽이게끔 하는 동기를 제공한 사람 쪽이 보다 나쁘다. 단편을 읽으며 가만 생각해보면 한층 범인이 가엾게 느껴지는데, 희곡 <오이디푸스 왕>처럼 '범인이 믿었던 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범인의 아이라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명확하지 않으며 범인이 가진 일종의 심증이다. 따라서 아이는 범인의 아기일 수도 있겠지만 범인의 동생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가벼운 마음으로 청소년을 추행한 계모는 나쁜 여자다.

 

 

* 춤추는 아이

: 다카시는 수요일마다 S여고의 체육관에서 리듬체조를 하는 여학생을 발견하고 한눈에 반한다. 다카시는 그녀에게 팬인 척 메모를 남기고 그녀가 자신을 찾아줄 것을 기대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체육관에 나타나지 않는데.......

 

-> 나의 호의가 상대에게 꼭 호의로 인식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단편. 실질적으로 여학생은 자살했지만, 그 배후에는 S여고 리듬체조부가 있고, 또 그 배후에는 다카시가 있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좋아하는 아이가 죽다니 아이러니하다. 그 아이러니함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 끝없는 밤

: 일 때문에 오사카에서 머물던 남편 요이치가 살해당했다. 아쓰코는 남편의 부고를 듣고 오사카로 간다. 형사는 남편의 시체가 반듯하게 쓰러져 있었다며 의문점을 알려주는데......

 

-> <작은 고의에 관한 이야기>, <어둠 속의 두 사람>, <춤추는 아이>에서 '숨겨진 범인'이 객관적으로 존재했다면, <끝없는 밤>에서는 조금 더 심리적인 쪽으로 옮겨간다. 이 경우에는 범인이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까, 과거의 경험이다. 옛일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볼 수 있는 소설......이지만 뜬금없다는 느낌이 좀 강했다. 읽는 내내 미스터리라는 느낌이 약했다.

 

 

* 하얀 흉기

: A식품회사 건물에서 아베 고조가 추락해 사망한다. 자살로 보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상태. 곧이어 같은 부서의 사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경찰은 둘의 공통점을 찾는다.

 

-> <끝없는 밤>에서 진정한 범인이 과거의 경험 혹은 트라우마였다면, <하얀 흉기>에서의 범인은 잘못된 믿음(망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간에 미스터리라기보다는 공포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살짝 들었다. 다만 망상을 가지게 된 이유(과정?)가 설득력이 좀 약한 것 같아서 임팩트가 좀 약했다. 게다가 범인을 대놓고 알려주는 시점의 변화 때문에 긴장감이 빠졌다.

 

 

* 굿바이, 코치

: 양궁선수인 나오미가 죽기 전의 독백을 찍은 비디오를 남긴 채 사망한다. 첫 발견자는 그녀의 코치. 경찰은 그에게서 시신을 발견하게 된 내막을 듣는다.

 

-> 제일 재미있었던 단편. '처벌할 수 없는 숨겨진 범인'이라는 점에서 위의 작품들과 궤를 같이 하지만, 위의 단편들과는 달리 말 그대로 '미스터리'라는 느낌이 확 든다. 읽는 동안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가 계속 떠올랐는데, 피해자가 죽은 수법은 물론이고 동기는 치정사건이라는 점도, 피해자가 죽기 전에 피해자가 쓴 종이 등을 범인이 활용한 점도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 자살(1단계) -> 타살(2단계) -> 제2의 범행(3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 견고하다.

 

 

* 범인 없는 살인의 밤

: 한 여자가 죽고, 그 여자가 죽은 것을 비밀로 하기 위해서 한 가족 + 가정교사 두 명이 합심해 시체를 유기한다. 여자의 오빠가 찾아오고, 시체가 발견되고, 형사가 찾아오면서 거짓말은 위기를 맞는데......

 

-> '밤'과 '현재'를 1인칭 화자 두 명이 번갈아 서술하는 형식. 반전이 제일 인상깊었다.

 

 

  전체적으로 범행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범인(혹은 숨겨진 범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두드러지는 건 범죄의 모호성이다. 읽기는 쉽게 읽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다. 다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을 읽으면 느껴지는 찜찜함이 어김없이 이 글에도 스며 있어서, '좋다'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단점을 꼽자면, 범죄 외의 다른 요소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미스터리가 약하다. 대부분 범인이며 방법을 쉽게 짐작할 수 있어서 작가와의 두뇌싸움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맥이 빠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2012.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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