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굴레 - 경성탐정록 두 번째 이야기 경성탐정록 2
한동진 지음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경성탐정록>을 구입한 이유는 그 책이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셜록 홈즈 패스티쉬였기 때문이다. 1930년 경성에서 활약하는 조선 버젼의 셜록 홈즈라니 얼마나 독특한가! 그래서 망설임없이 구입해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이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고, 그래서 2년 뒤 <피의 굴레>가 출간되었을 때 즉시 집어들었다.

 

  제목이 '피의 굴레'라서 혹시 장편인가 두근두근했는데, 중단편 4편이 실려있는 단편집이었다.

 

 

* 외과의

: 이와테 요시토모는 약혼녀에게 우리 관계를 밝히겠다 협박하는 기생 이월향을 모르핀 주사로 살해한다. 그리고 포르말린을 넣어 썩는 걸 방지한 뒤 시체를 해부, 토막내어 '절대로 들키지 않을' 한 곳에 유기한다. 그 때 월향의 행방을 알아본다며 설홍주라는 탐정이 이와테의 주변을 맴도는데......

 

-> 살인자의 일기로 중반까지 서술하는 형식. 제일 재미있었던 단편이다. 타인의 눈에 비친 설홍주의 모습이 무척 재미있다.

  이와테의 일기가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범인이나 수법이 다 드러난 상황이다. 그래서 이 글의 핵심은 "이 녀석이 탐정에게 잡힐까, 잡히지 않을까"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살인범의 속임수가 탐정에게 먹힐까 먹히지 않을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완전범죄가 되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 설홍주가 어디서 단서를 잡을까 조마조마. 듣고보니 단서는 생각보다 여러곳에 있었으나 죄다 정황증거라, 이와테가 잡히고 나서도 조마조마.

  의기양양해서 자기자랑하는 이와테를 볼 때마다 '야 임마 그런 데 발휘할 창의성이 있으면 의학의 발전을 위해 써라'라는 말이 목까지 솟았다. 계속해서 후미코 얘기를 하는 것이 혈압의 상승에 한 몫 보탠다. 그런 점에서 이와테는 참 흔한 타입의 악당이지만 그만큼 잘 만들어진 캐릭터 같다.

  외과 지식이 많아서 보면서 즐거웠다.

p.13. 살인은 저지른 뒤에서 세 가지 증거가 남는다. 하나는 현장, 하나는 흉기, 마지막 하나는 시체다.

p.57. "사람을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건 얼간이들이나 하는 생각이거든. 그리고 이 세상은 그런 얼간이가 언제까지나 활개치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만만치가 않아."

p.58. "감히 내 옷차림을 혼마치의 건달들과 비교하다니....... 그 따위 소릴 한 놈은 죽어도 싸!"

 

 

* 안개 낀 거리

: 신의택(신타로)라는 미두 계의 거성이 종로 골목길에서 뒷머리를 가격당해 살해당한다. 피해자의 평소 평판은 최악이지만 그를 죽일만한 원한을 가진 이들은 모두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다.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설홍주도 누가 범인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 예전에 한 번 읽었던 단편이다.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문학에 올라왔던 것 같다. 수정을 더 했는지 흐름이 더 부드럽다(아니면 웹과 종이의 차이일까?).

  아무도 없는 골목, 새벽, 둔기로 뒤통수 가격이라는 범행은 뭔가 건질 여지가 없어보인다. 어쩐지 무차별 살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단서랄게 없으니 설홍주도 앞뒤가 꽉 막힌 듯 답답해한다. 힌트는 '신타로의 이름 옆에 찍힌 붉은 점'. 이런 사소한 걸 잡아서 사건을 해결하다니 굉장하달까. 다만, 딱히 용의자로 떠오른 사람들이 없어서 제 3의 인물이 범인으로 등장해도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그래서 좀 아쉬웠다. 수사의 기본은 피해자 주변 파악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실 이 단편은 살인사건보다는 1932년 경성의 모습에 더 눈이 간다.

  그나저나 설홍주 이 남자, 대체 인간관계가 어떻게 되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야쿠자에게도 설렁설렁 찾아가다니 orz

 

 

* 피의 굴레

: 극장 명수관의 사장 김명수가 독이 든 라무네를 마시고 죽는다. 자살로 결론지어질 뻔 했으나 설홍주는 의문을 품고 타살 가능성을 추적한다. 그 와중 임마리아라는 배우가 부사장이 공금을 횡령해 극장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었다며 밀고한다. 다들 부사장에게 시선이 쏠린 가운데, 설홍주는 임마리아를 주시하는데.......

 

-> 중편. 용의자는 한정되어 있고 뜻밖의 반전도 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범인인가가 아니라 '범인이 왜 살인했는가'와 '어떻게 살인을 했는가'이다.

  이 중편에서 제일 눈이 가는 것은 김명수가 잡지사에 맞긴 전위시다. 어디를 봐도 암호 냄새가 풀풀 나는 이 시는 참 복잡하다. 암호가 복잡해서 실제로 풀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릴 듯 하다. 3단계를 거쳐야 해독되니까 그런 것 같다. 힌트는 전위시를 쓴 사람이 수학자라는 것 / 그리고 최신 수학논문집 / 가로쓰기.

  나는 이 암호가 이야기에서 조금 더 비중이 있었다면 했는데, 설홍주의 짐작을 확신으로 뒷받침하는 역할 정도에 그쳐서 아쉬웠다. 전위시 암호, 라무네 병 트릭, 알리바이 트릭 등 동원된 트릭이 꽤 많아서 그런 걸까. 그래서인지 조금 산만한 인상도 있다. 장편이었다면 더 깔끔하고 인상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날개 없는 추락

: 한때 독립군이었다가 변절해 동료를 밀고하고 살아남은 백청만(사이고 지로)이 옹벽 밑 길에서 머리가 깨진 시체로 발견된다. 처음에는 옹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진 사고사로 보였으나 검시의 손다익 박사의 의견으로 타살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결과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조선인 청년 현준건이 용의자로 체포되는데......

 

-> 1932년이기 때문에 성립 가능한 사건이다. 독립군, 변절자, 특고 등 그 시절의 퍽퍽한 분위기가 유감없이 배어있다. '경찰은 혐의를 말해주고 때리고 특고는 일단 때린다'는 서술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설홍주가 '죄수의 딜레마'를 사용하는 부분이 재미있었다. =ㅂ= 그런데 일본 유도에 대해 잘 몰랐다면 범인에 대한 단서가 나왔을 때도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듯 하다. ㅎㅎ 힌트는 동명이인.

  이 단편은 언뜻 설홍주의 형에 대해 언급한다. 김구 선생의 비서라고 한다. 경성탐정록 시리즈의 설홍주는 이제 내 안에서 '조선판 셜록 홈즈'가 아니라 그냥 '설홍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이렇게 묘하게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와 겹치는 점을 발견하면 괜히 유쾌해진다. 시리즈가 계속되면 언젠가 모리아티 교수도 나오는 걸까?

 

 

  <경성탐정록>이 나온지도 한참 지나서 설홍주는 한 권으로 끝인가 하고 포기한 참인데, 뒷편이 출간되어 반가웠다.

 

  책을 읽다 걸리는 부분 없이 술술 읽히는 점이 일단 좋다. 1932년의 경성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도 독특한 즐거움이고, 셜록 홈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냥 설홍주가 되어가는 설홍주의 모습도 좋다.

 

  내가 느끼기에 설홍주는 단편이 거듭될 수록 조금씩 셜록 홈즈와 다른 개성을 확립해가는데, 이건 대영제국 시대에 영국에서 태어난 셜록 홈즈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인텔리 청년 설홍주라는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온도차 때문인 것 같다. 사회적 불합리성과 차별, 장벽들과 그것에 대한 설홍주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 관심있는 건 범죄와 나'뿐이라고 주장하는 셜록 홈즈의 이미지와 묘한 괴리가 있다. 일단 설홍주가 셜록 홈즈처럼 100% 행동하면 특고에 잡혀 죽을 듯... ㅠㅠ

 

  다만 아쉬운 것은 살인사건 / 납치사건 / 보물찾기 / 일상 미스터리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 전작과 달리 이번 책은 살인사건으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특히 '안개 낀 거리'와 '날개 없는 추락'은 여러 모로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경성탐정록>이 싹틔운 시리즈에 대한 기대를 <피의 굴레>가 조금 더 키워주었다. 설홍주가 등장하는 세 번째 책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번에는 장편이었으면 하는 사소한 바람이 있다.

 

 

 

201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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