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가형사시리즈 7번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내가 그를 죽였다>와는 다소 다른 궤적을 그리는 글이다. 전의 두 글이 본격에 가까웠다면 <붉은 손가락>은 사회 현상을 지적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가깝다. 처음부터 범인, 범행과정, 은폐과정이 다 밝혀져 있다. 따라서 범인&추리보다는 다른 쪽(사람들의 발언, 분위기, 행동 등)에 신경이 더 쓰인다. 치매노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 부부 사이의 관계 등.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려내는 인물은 진짜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이라서, 뭐라 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을 일으킨다. 47세의 중년가장 아키오, 아내 야에코, 중학생 아들 나오미, 그리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 넷이 살고 있는 집은 일견 평범해보인다. 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들의 관계는 어그러져 있다. 잔뜩 꼬인 실뭉치처럼, 어디서 잘못됐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글자일 뿐인데 읽는 사람 숨이 막혀올 정도다.
 
  아키오는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의 갈등에서 도망치기 위해 밖으로 나돈다. 아내는 시어머니를 경멸하고 싫어하며 아들을 싸고돈다. 아들인 나오미는 뭐든지 부모탓을 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부모에게 화를 낸다. 데면데면한 일상을 유지하던 어느 날, 나오미가 7세 여아를 유괴하여 살해한다. 1. 아키오는 아내와 함께 시체를 공원에 유기하기로 하고, 2,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치매 걸린 어머니를 범인으로 몰려고 한다.
 
  <붉은 손가락>을 읽는 내내 기분이 나빴다.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합리화가 쩔고, 상황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남탓만 하고, 그런 사람들만 뭉쳐있는 글에서 풍겨나는 건 일종의 독기다. 마치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상처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생물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이 글의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각도 하지 않고 배려도 하지 않는다. 피해자인 아키오의 어머니도 잘 생각해보면 대처 방식이 아키오 가족과 똑같다. 치매인 줄 알았던 어머니가 사실 치매가 아니고, 자신의 혐의를 벗으려고 일부러 루주를 손에 칠했다는 부분 때문이다.
 
  아키오의 어머니는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신고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고하지 않았다. 자신이 범인이라고 밝힐 수도 있었다. 루주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주장할 뿐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키오의 어머니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하나다. 아키오의 어머니는 치매 노릇을 하면서 얻어낸 평화를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던 거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회피했던 아키오, 야에코, 나오미와 똑같다. 아키오의 어머니는 회피하고 있다. "네 스스로 잘못을 알기 바랬어."라니 그게 말이냐 소냐. 가가형사가 없었다면, 대충 넘어갔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니 소름이 돋는다.
 
  애초에 이 가족 중에서 누구 한 명이 용기를 가졌다면 어땠을까? 아키오의 어머니가 "이런 되먹지 못한 것들. 난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더 좋다. 늬들은 나가라."라고 말했다면? 아키오가 "당신 좀 그만해. 적당히라는 걸 몰라? 이게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 나오미 너도 정신 차려!"라고 말했다면? 야에코가 "나오미, 아닌 건 아닌 거야. 너 언제까지 남 탓만 할래? 그리고 당신도 집안에 관심 좀 가졌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면? (나오미의 경우에는 각이 안 잡히기는 한다.)
 
  맞는 걸 맞는다고 하고 아닌 걸 아니라고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맞는 걸 맞는다고 하고 아닌 걸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다. 하지만 인간은 되게 이상해서, 모든 사람들이 두 개의 선 중에서 짧은 쪽을 가리키며 "이게 더 길다"라고 말하면, 그 선이 짧다는 걸 명백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 이게 더 길어."라고 동조해 버린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는 순간 져야 하는 책임이 무겁기 때문이다. 미움받기 싫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래서 점점 더 비뚤어지는 게 아닐까.
 
  추리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추리소설을 읽는 것보다는 폭력고발르포를 한 편 본 기분이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고 눈 감는 불의. 책임져야 할 것에 책임을 미뤄버리는 불의.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불편했다. 책의 마지막까지 아키오 가족에게서 변하는 것이 없어서 더 그렇다. 책을 중간에 놓을 수는 없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머릿속이 한참 어지러웠다. 나는 이래서 사회파 추리소설이 싫다. 
  
  
  
   


201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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