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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ㅣ Miracle 2
김재한 외 지음, 김봉석 해설 / 시작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2008년 여름에 같은 제목을 가진 단편집 두 권이 나란히 나왔다. 각각 [시작]과 [황금가지]에서 펴낸 책이었는데 당시엔 사지 않았다. 그러다 이 책이 구간이 될 무렵, [시작]에서 나온 단편집의 저자를 보니 익숙한 이름이 꽤 많이 보여서 구입했다. 그리고 다른 책들과 함께 책장에 박아뒀다가, 책장 정리를 하면서 발굴해서 읽기 시작했다. 총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환상문학 1.5세대 즈음 되는 나는 '한국 판타지(환상) 소설 = 초장편'이라는 느낌이 있다. 1권으로 완결되는 책이 없었고 짧아봤자 5권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그래서 단편소설은 어떨까, 좀 두근두근했다. 아무래도 장편의 논리와 단편의 논리는 많이 다르니까.
장편을 잘 쓰는 사람이 있고 단편을 잘 쓰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는 장편을 쓰다가 단편을 쓴 분들이라 좀 페이스를 잃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장르가 좀 어렵기는 했다. 환상문학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잇는 세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를 보여줘야 하니까 세계관을 어느 정도는 설명/묘사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단편이라 페이지수는 정해져 있으니, 설명과 이야기의 비율이 좀 흐트러져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싶다. 같은 이유 때문에, 전체적인 글의 느낌이 너무 딱딱했다. 고심한 흔적이라고 생각하고 좋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힘 안 들이고 쓴 것 같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글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목소리>였다. 일단 다루고 있는 게 확 튀기도 했고(왕년에 열심히 읽었던 <요재지이>의 느낌이었다), 동양풍의 판타지란 뭔가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얘기가 재미있었다. 뱀 혀라니. 두근두근. 괴담은 싫어하지만 기담은 좋다. 글이 흘러가는 것도 부드러워서 책장이 막힘없이 술술 흘러갔다.
그와 거의 비슷하게 좋았던 것이 <사육>이다. 뱀파이어 물인데, 발상의 전환을 통한 유머러스함이 있었다. 심각한 분위기인데 읽는 사람은 재미있는 거라서,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이었다.
<상아처녀>는 판타지라기보다는 SF에 가까웠다. 숨기려고 했던 이야기가 짐작이 쉽게 가서 약간 김이 빠지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가, 감정을 조금이라도 캐릭터에게 실어주면 엄청 씁쓸한 내용이기 때문에 읽고 난 뒤에 머리 속에서 내용이 좀 맴돌았다. 에전에 SF단편집에서 봤던 채소여자 얘기가 떠올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단편에서 하는 중심 이야기는 이것과는 좀 달랐지만...... 아무래도 '사육당하는 인간이 아닌 여자'라는 느낌이라 그런 것 같다.
<카나리아>는 현대를 배경으로 했는데, 묵직한 느낌이었다. 일본 동요 카나리아에서 착안한 것 같다. 으스스하고 약간 미친 것 같은 분위기가 좋기는 했지만 내가 이런 걸 좀 싫어해서 읽으면서 기분이 좀 찜찜했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있기는 한데 나는 그걸 계속 거부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읽고 나서 약간 피곤했다.
<용의 비늘>은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레첸과 일행이 만나는 장면을 서두로 보여줬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너무 크고 중간 부분에 현실로 돌아오면서 "어? 뭐야?"하는 느낌이 잠깐 든다. 잘 따라가던 얘기가 예기치못하게 한 번 끊기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용의 정체가 너무 쉽게 짐작이 가능해서 긴장감이 떨어졌다.
<윈드 드리머>는 설명이 장황한 느낌이었다. 머리가 큰 것에 반해 꼬리에서 팍 무너진 느낌?; 세계관이 신선하고 좋았지만 설명해야 하는 세계관의 장황함을 보자면 단편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야기를 읽은 느낌이 아니라 설정집을 본 것 같았다.
<세계는 도둑맞았다>는 라이트노벨틱한 캐릭터 중심의 톡톡 튀는 느낌이 좋았다.
<과거로부터의 편지>는 괴담인 것 같은데 어디서 무서워해야 하는지 포인트를 못 잡아서 실패.(나로써는 다행한 일이다. 나는 괴담이 싫다.)
<내가 바란 단 하나의 행복>은 아이러니가 좋았지만, 이상하게도 처음 읽었을 때는 잘 이해가 안 갔다.
이러니 저러니 얘기했지만 전체적으로 무난한 느낌이다. 책이 꽤 두꺼운데, 막히는 부분 없이 꽤 재미있게 읽었다. 한 권에 다양한 색이 있어서 말 그대로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이었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왠지 빠져드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아 이건 이렇네. 저건 저렇네."하고 냉정한 눈으로 보게 된다. 이러면 더 재미있을 텐데, 하고 머리 속에서 쨍알쨍알거리는 거;;;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것만 채우면, 하고 아쉬운 느낌이 드는 거다. 아마도 내가 글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2011.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