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소설만 줄기차게 읽다가 모처럼 다른 종류의 소설을 읽었다. 제목 때문에 집어들었는데(처음에는 글쓰기 방법이 적힌 인문교양책인 줄 알았다) 뜻밖에도 소설이었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에 이런 얘기가 나왔다. 

  그때 인상깊은 발표를 햇던 한 여자가 있었다. 검은 치마를 입고 검은 스웨터를 입은 광고회사직원 L. 그녀는 늘 수업 중간의 쉬는 시간이면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내가 일주일 동안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답이 될 만한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 다시 글쓰기 워크숍에 갔을 때, 그녀는 산뜻하고 가볍게 '복수심'이란 단어를 제시했다. "나를 버린 애인에게 복수, 그 이전에 우리 엄마를 버린 아버지에게 복수. 그리고 세상에게 복수." 그녀는 두 눈을 내리깔고 앞에서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치 선언문을 읽듯, 큰 소리로 읽었다. (p.149)

  
  이 부분이 너무 인상깊어서 <라이팅 클럽>을 읽기로 했다.
 
  주인공인 화자는 영인, 작가가 되고 싶은 소녀다. 그녀의 엄마는 김작가, 역시 작가지망생이다. 라이팅 클럽이라고는 하지만 도무지 작가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고(아 참, J작가가 있구나)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 혹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만 줄기차게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일으며 좀 사기당했다고 생각했다. 글쓰는 이야기, 글 쓰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만 나왔으니까. 그것도 좀 잘 살지, 보기만 해도 씁쓸한 느낌이 드는 사는 모습만.
 
  읽으면서, 사람들은 왜 가슴에 구멍을 하나씩 가지고 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부자든 가난하든 예쁘든 못생겼든 글을 쓰든 쓰지 않든 간에 어딘가가 비어 있다. 스쳐지나가듯 나오는 사람마저도(예를들어 저 위에 적어놓은 문구 속 L이라던가).
 
  영인이 17세일 때부터 거의 40이 다 되었을 때까지의 긴 이야기인데도 무척 짧게 느껴진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글을 쓰는 영인'에 대해 주구장창 씌여있었는데 어느 기점으로 점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17세나 20대 초반의 영인이라면, 김작가의 등단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짐작컨대 영인은 사람들 눈이 썩거나 미쳤다고 생각하며 애써 질시를 감췄을 것이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에서 영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김작가의 등단 사실을 서술할 뿐이다. 그리고 금방 글쓰기모임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영인은 서서히, 크고 넓어진 것 같다.
 
  <라이팅 클럽>에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 "왜 글을 쓰는가?"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글에는 남부럽잖게 사는 사람들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습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게 이 글의 독특한 면이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건 안채 알머니가 준 편지와 꼬깃꼬깃하게 접은 만원짜리 세 장이었다. 할머니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영인아, 나는 1924년 갑자생. 우리 어머니 최씨는 나를 낳고 일년만에 돌아가셨다. 우리 어머니가 지금 살아있다면 102세. 아버지는 105세다.
  할머니의 돈에서는 찝찔한 막걸리 냄새가 났고, 아들딸 셋만 낳고 잘 살라는 게 결론인 편지에서는 더 이상한 냄새가 났다. (p.207)

  
  <라이팅 클럽>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 전에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는 글을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나온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도 글을 쓰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라이팅 클럽>은 별반 대단한 얘기를 하고 있지 않다. 사는 얘기를 한다. 그런데 그 별것 아닌 사는 얘기, 호화찬란하지도 않은 사는 얘기가 재미있고 따듯하다.
 
  이 말을 들으면 영인이 나를 때릴지도 모르겠지만, 17세나 20세 즈음의 영인의 글은 전혀 읽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쓴 글의 내용을 그렇게 열심히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기만 했다). 하지만 핵켄섹의 라이팅클럽에 올 즈음부터 영인이 쓴 글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글을 썼다는 사실만 알려줄 뿐, 어떤 글을 썼는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어휴.
 
  나를 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담는 것, 그게 성공한 글쓰기인지도 모르겠다. 
  
   


2011.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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