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미도리의 책장 1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시작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이름을 안 것은 꽤 오래전이다. 일본소설 붐이 일었을 즈음부터니까 꽤 오래되었다. 내가 이 이름을 기억하게 된 이유는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운율을 맞춰놓은 것 같은 이름 때문이다. 아리스=앨리스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여성인 줄 알았지.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이름을 기억하게 된 이유는 이름만 알고 꽤 시간이 지났을 무렵, 아리스가와 아리스 씨의 성별이 남자라는 걸 알았을 때다. 음.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안 읽고 있다가 신본격 미스터리 쪽 책을 읽어보려 했더니 다시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이름이 툭 튀어나와서, 그래 이쯤 됐으면 읽어야지 하고 결심했다.
 
  소문만 무성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씨의 중편집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는 네 편의 중편(단편인가? 내가 보기엔 좀 모호한 분량이다)이 엮여 있다. '부재의 증명', '지하실의 처형'(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난 이 중편의 제목을 자꾸 까먹는다), '비할 데 없이 성스러운 시간',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네 편이다. 각각의 색이 있어서 꽤 재미있다. 부재의 증명은 '알리바이', 지하실의 처형은 '동기', 비할 데 없이 성스러운 시간은 '다잉 메시지',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는 '동기+알리바이+미싱링크'를 다루고 있다.
 
  네 편 다 재미있었다. 굉장히 차근차근 진행되는 게 인상깊었다. 반전이 두둥! 하고 나오는 게 아니다. 차근차근 밝혀진다. 범인보다는 왜 그 사람이 왜 범인인지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느낌이다. 급하게 서두르는 느낌이 아니라 침착하게 차근차근 페이지를 넘기는 맛이 있다. 그러니까, 뭔가 모범생스럽다. 그런 만큼 '이게 왜 이래?'라는 반발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는 게 장점, 때에 따라서는 좀 싱겁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게 단점일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워낙 드라마틱한 추리소설 중심으로 읽어서 그런가.
 
 
1. 부재의 증명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 그 시각, 한 소매치기가 우연히 그 남자의 쌍둥이 형이 건물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 남자의 쌍둥이 형은 도저히 그 시각 그 건물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요약을 하고 나니 뭔가 수수께끼 같다. 하기야 추리소설이 원래 수수께끼 풀기인가? 정답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작품이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반짝! 하는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달까. =ㅂ=
 
2. 지하실의 처형
  굉장~히 커다란 사건의 일부를 쪼개서 본 느낌이다. 그건 이 작품에 샹그릴라 십자군이라는 뭔가 상큼한 음료수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테러집단이 등장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건 자체는 단순하다. 샹그릴라 십자군은 배신자를 처형하려고 했다. 배신자는 음료를 마시고 싶어했다. 신입인 두 사람이 음료를 가지러 갔다. 그리고 배신자는 독살당했다.
  범인을 찾기는 쉽다. 왜냐면 애초에 용의자가 두 명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기가 참 애매모호하다. 이것을 밝히는 게 포인트인데, 밝혀진 동기가 뭐랄까 일반적인 동기와 많이 떨어져 있어서 '읭?'이라고 잠시 생각했다.
 
3. 비할 데 없이 성스러운 순간
  다잉 메시지의 다잉 메시지에 의한 다잉 메시지를 위한 다잉 메시지 추리소설.
  한 여성평론가가 살해당한다. 그녀는 1011이라는 글자를 쓰고 죽는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여성의 살해범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살해당한다. 그 남자는 천엔짜리 지폐를 쥐고 있다. 어떻게 된 걸까?
  첫 번째 메시지는 풀지 못했지만(애초에 일본인도 아닌데 이걸 어떻게 풀어! ㅠㅠ), 두 번째 메시지는 별반 어려움 없이 풀어냈다. 하하하.
  '다잉 메시지 자체보다도 다잉 메시지를 남겨야 하는 당위성, 밀실 자체보다도 밀실로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이 테마가 되었다는 책 속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4.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딱히 굉장한 반전을 의도하고 만든 것 같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상당히 뜻밖의 반전이 되었던 이야기.
  작은 극단에 소속되어 있는 여배우가 웬 남자에게 스토킹을 당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스토커가 살해당한다. 스토커를 살해할 만한 사람이 없다. 범인은 누구일까?
  트릭을 밝혀내는 것은 역시 무리였지만(내가 일본 기차의 시간표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ㅠㅠ), 트릭이 얼마나 공고한지 그리고 그 트릭을 밝혀내기 위해서 얼마나 머리를 썼는지가 보여서, 트릭 자체의 재미보다 트릭을 푸는 탐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상의 네 개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히무라 히데오라는 임상범죄학자(이자 에이토대학 사회학과 조교수)와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추리작가 콤비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씨(등장인물 아니고 책을 쓴 저자 쪽)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번갈아 발표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소위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 하나가 되겠다. 

  여담이지만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에서 나를 제일 놀래켰던 반전은 '작가 아리스'가 탐정이 아니라는 점. 말하자면 탐정의 조수 역할 되시겠다. 아니 보통 **시리즈 하면 **이가 명탐정인 것은 기정사실 아닌가? 그런데 아니었다.
  책 뒤에 붙어있는 작가의 말/역자의 말 등을 보니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학생 아리스도 탐정이 아니라 탐정의 조수가 되는 모양이다. 
  
  어찌되었건 굉장히 재미있게 읽어서 다음에도 또 아리스 시리즈를 읽어야지 하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차근차근, 차근차근, 자 나와 함께 수수께끼를 풉시당, 이런 느낌이 좋다. 무리하지 않는 것 같아서. 상당히 담백한 것이 취향이다. 
   


 
2011.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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