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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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드>의 세계는 기묘하다. 다 타버린 잿빛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문명의 찌꺼기(방수포, 카트, 통조림, 권총)를 이용해서 살아간다. 사람들에게 이름은 없고, 없어진 이름처럼 인간성도 희미해진다. 그들은 왜 살아갈까? 그 이유조차 모른다. 공허하다. 목적지 없이 걸어가는 길처럼. 

 

 '남자'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만큼 착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남자는 모든 사람들을 경계한다. 남자가 취하는 행동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리고 그 이기적인 행동은 현대사회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현명하게 느껴진다. 

 

 '소년'은 마치 남자의 양심 혹은 인간성과도 같다. 팍팍한 세상에서, 소년은 이상할 정도로 선량하다. 

 

  급격한 변화 없이, 남자와 소년이 길을 가는 한 토막을 잘라내서 보여주는 것 같은 <로드> 속에서, 남자와 소년의 대화는 항상 언저리를 맴돈다. 남자는 소년에게 자신의 가치를 강요한다. 소년은 알았어요, 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년은 길을 가면서 계속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남자에게 되묻는다. 소년은 자신들의 행동의 당위성을 의심하고, 남자의 가치를 소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가 죽고, 남겨진 소년은 남자의 당부와는 달리 사람이 다가왔을 때 피하지 않고 그들과 같이 가기로 결심한다. 

 

  <로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별 말을 하지 않는다. 문장은 단순하고, 이야기도 단순하고, 등장인물도 단순하다. 그러나 극도로 말을 아낀 것이 외려 생각을 부추긴다. 파괴된 세계에서 부딪히는 가치들은 <로드> 안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이면 현명하다. 남자의 행동은 현명해보인다. 그러나- 피폐하다. 더 나아지거나 발전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소년의 태도는, 유약하고 세상을 몰라서 순진하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세계가 변화할 일말의 가능성이 보인다(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런 점에서 소년이 남자보다 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로드>에서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장면은, 90세라고 주장하는 노인이다. 노인은 말한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주는 음식으로 연명한다고. 남자가 대체 누가 음식을 주냐고 묻자, 노인은 자네들이 줬잖아. 하고 대답한다. 이 부분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읽었다. 타버린 세계지만, 절망만이 보이지만, 최악의 최악까지 다다르지는 않았다는 증거를 본 것 같아서. 선한 사람들도 살아남았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2010.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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