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2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지혜와 학문의 도시 <<안술>>은 사막의 나라 알드에서 진군해온 병사들에게 지배당한다. 알드 병사의 눈에 띈 모든 책은 바다에 처넣어지고, 안술의 시민들은 노예가 되어 알드의 눈치를 보면서 지낸다. 안술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의 사당은 발견되는 족족 부숴진다. 개중에는 알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한 사람들도 있다. 메메르는 알드의 병사가 안술 시민인 어머니를 강간해서 생긴 아이다. 그녀는 저택에서 수장 어른과 살면서 몰래 글자를 배우고 책을 읽는다.

  <보이스>를 펼치는 순간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있었던 일인데다가 국사 시간에 심도깊게 다룬 적도 없고, 굳이 찾아서 파헤치고 머릿속에 새겨넣을 정도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제강점기가 어땠는지 잘 모른다.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일제강점기!"라고 외치면 치가 떨린다. 오십 여년 이상 지난 뒤의 나도 이런데, 현재진행형으로 알드에게 점령당한 안술 시에서 살고 있는 메메르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알드를 영원히 미워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다 죽여버릴거다'라는 메메르의 맹세는 진심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하늘에서 영웅이 쨘 하고 나타나서 안술 시를 구하고 안술 시를 괜히 침략한 알드 인들을 다 죽여버리고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참 통쾌할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잔인함에는 잔인함. 메메르가 바란 것은 바로 그런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흑과 백으로 딱 나누어져 있지 않고 한없이 두루뭉실한 회색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보이스>는 그것에 충실하다. 저 멀리 사막에 있는 알드의 왕(간드 중의 간드)이 죽은 것과, 시인 오렉 카스프로가 알드의 간드에게 초청받아 온 것과,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그 모든 것이 촘촘히 엮여서 안술의 자유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메메르도 변한다. 순수한 증오는 아이이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정치와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증오에 온전히 몸을 내맡기고 싶었던 메메르는, 안술이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정치와 타협을 알고 그것들이 왜 필요한지를,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안다. 흰 색과 검은 색만이 있는 세계에서 스펙트럼을 보고 자신의 감정을 굽히고 이성의 손을 내밀 수 있을 때 메메르는 한 걸음 성장한다. "부서진 것이 부서진 것을 고치리라." 그리고 메메르는 자신의 혈족 '갈바'가 타고난 힘과 역할을 수긍한다. 메메르가 즐거워했던 책읽기는 '신들이 들려주는 목소리'가 되어 메메르에게 돌아오고, 메메르는 그것을 버거워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것임을 알고 받아들인다.

  <보이스>는 오렉의 이야기에 맞춰져 있던 <기프트>보다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진 것 같다. 주인공인 메메르의 변화보다 안술 시가 자유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닐까 하는 것에 더 시선이 간다. 그러나 책을 덮었을 때, 메메르는 안술의 자유와 함께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꽤나 단시간에 벌어진 이야기이지만, 이야기를 시작할 때의 메메르와 이야기를 끝낼 때의 메메르의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메메르의 변화에는 오렉과 그라이가 있다. <기프트>의 등장인물들이 성장한 뒤의 모습은 참 신기한 느낌이고, 그들이 메메르의 성장과 안술의 자유를 돕는 모습을 볼 때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능력 때문에 괴로워하던 소년이 자라서 다른 소녀의 성장과 도시의 성장을 도와주다니, 굉장하다. 세상은 이렇게 톱니바퀴 맞물리듯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돌려주며 돌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2009. 3. 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