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프트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1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어슐러 르귄의 <기프트>는 분명히 판타지인데 판타지같지가 않다. 평범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능력을 가졌지만 실상은 가난하기 그지없는 고원지대의 '주술사'들의 모습이라던가, 그들이 아옹다옹하면서 싸우는 이유는 인류의 멸망이나 위대한 사상 때문이 아니라 소 한 두마리 때문이라는 것도 그렇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부족하고 욕망하고 싸우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보듬고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고. <<서부해안>>은 낭만적인 환상이라기보다 현실적인 환상이라서 괜히 보고 있자면 답답해지고 그만큼 더 몰입하게 되는 그런 세계다.

  이처럼 현실적인 세계에 환상적인 주인공이 나올 리 없다. 서부해안에는 "나의 위대한 힘으로 세상을 구하겠어! 왓핫핫!"이라고 외치는 자신만만하고 능력이 있는 주인공은 없다.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어머니에게서 딸로 물려내려오는 '선물', 자신의 집안에서 선물로 내려오는 '되돌림'의 능력을 쓰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오렉 카스프로가 있을 뿐이다.

  주변에서 쏟아붓는 기대와,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소년. 이것이 비단 오렉만의 이야기일까? TV드라마나 영화나 신문이나 잡지나 소설이나, 그런 곳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길을 가다 슬쩍 옆을 쳐다보면 학원 가방 서너 개를 들고 허덕거리면서 거리를 뛰어다니는 어린이를 솔찬히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아니, 그렇게 갈 필요도 없다.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의 나를 돌아보기만 해도 오렉의 고민은 단순한 이야기 속 주인공의 고민이 아닌 나의 고민이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오렉에게 제어할 수 없을만치 강한 힘이 생긴다. 이야, 이거 해피엔딩이로군. 이야기만 들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선물의 힘을 가지지 못했다고 알려진 오렉에게 선물의 힘이, 그것도 아주 아주 강한 힘이 생겼다. 영지를 지키고 더욱 크게 키울 수 있는 기반이 생긴 셈이다. 멋지다. 그런데 오렉은 기쁘지가 않다. 그는 자신의 힘이 정말 자신의 것인가 의심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힘이 소중한 것을 파괴할까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눈을 천으로 꽁꽁 묶는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오렉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척이나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눈을 가린 오렉을 두려워한다. 오렉이 어둠 속에서 곱씹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삶의 불편함, 바뀐 주변 사람들의 태도, 그런 것이다.

  만약에 오렉에게 저지대출신인 어머니가 없었다면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오렉의 어머니는 아들이 어째서 눈을 가리고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오렉의 눈을 보고 싶어한다. 그녀는 아들이 천을 풀어버리고 세상을 보기를 소망한다. 그녀가 죽어가는 와중에 계속해서 책을 썼던 것은, 그녀가 자신의 빈 자리에 남길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지식을 담은 책 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오렉이 주변의 기대(그러니까, 여기서는 '선물')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찾아서 천을 벗고 세상을 보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는 하나의 선물만 있지 않다. 오렉은 자신이 타고난 선물이 집안에 내려오는 선물과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달았다. 하나의 선물도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다르게 쓸 수 있다. 오렉의 소꿉친구 그라이는 대대로 선택한 선물의 모습(부름)이 아닌, 자신이 발견한 선물의 모습(듣기)을 선택한다. 길은 무한히 뻗어있고, 그 길에는 다른 갈래길이 있다는 것을,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고 더 자유롭다는 것을 오렉과 그라이는 알아냈던 것이다. 그들은 태어나고 자란 고원지대를 떠나서 더 넓은 '저지대'-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그들의 능력은 고원지대에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 뒤에 오렉과 그라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내면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자신이 받은 진정한 선물을 찾고, 그리고 선택한 그들의 삶은 행복했을 것이다. 때로 고원지대가 그립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만족하면서 삶을 살아내겠지. 책을 덮고 숨을 들이키니 즐겁게 웃는 오렉의 모습이 보였다. 책을 읽던 중에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던 오렉의 행복한 모습이다. 읽는 동안에는 답답하고 씁쓸하고 참 오묘한 여러 가지 감정들을 맛보았지만, 책을 덮고 느낀 감정이 즐거움이라서 기쁘다.



  덧붙임.

  제목이 <기프트>가 아닌 <선물>이었다면, 제목의 의미가 더 잘 와 닿았을 것 같다.

 

2009.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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