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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살인
보리스 아쿠닌 지음, 이형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명한 책이 다 좋은 책인 건 아니지만, 유명하다고 하면 꼭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더구나 러시아의 추리소설작가, 몇백만부를 팔았고, 역사에 기반을 두었고, 고전추리소설을 생각나게 하고, 이런 짤막한 정보들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 지는 것이다.
<아자젤의 음모>가 1편이기는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하여 2편부터 읽게 되었다. 1편을 안 읽고 그 뒤부터 읽기 시작하면 살짝 떨린다. 전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봐, 그래서 재미를 느끼지 못할까봐. 결과적으로 보면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리바이어던 살인>은 완전히 독립적인 이야기여서 전편을 읽지 않았어도 흥미롭게 즐길 수 있었다.
1878년 파리, 유명한 수집가인 리틀비 경의 집에서 10명의 사람들이 기묘한 모습으로 살해당한다. 하인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담소를 나누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편안한 표정과 앉은 자세로 죽어 있었다. 그리고 리틀비 경은 2층에서 머리가 깨진채 죽어있고 도난당한 것이라고는 황금시바상과 스카프 한 장 뿐이다. 현장 수색 중에 초호화 유람선 리바이어던 호의 일등실 승객만이 소유할 수 있는 황금뱃지가 발견되었다. 프랑스의 형사 고슈 경감은 범인을 밝히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리바이어던 호에 탑승한다.
<리바이어던 살인>은 처음부터 흥미를 확 잡아끈다. '리틀비 경 살해사건'의 현장과 상황은 신문기사와 고슈 경감의 사건보고일지(?)를 통해서 술회된다. 기본 정보를 가지고 나면 고슈 경감의 시선으로 사건이 시작된다. 고슈 경감 뒤에는 바톤터치를 한 듯이 밀포드스톡스 자작의 시선으로, 르네 클레버의 시선으로, 또 클라리사 스탬프의 시선으로, 긴타로 아오노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차례차례 말해진다. 고슈 경감을 제외한 넷은 리틀비경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들이며, 서술하는 방법도 성격도 틀려서 처음에는 꽤 혼란스러웠지만 익숙해지면 외려 한 사람의 시선만 고집하는 것보다 재미가 있다. 말하는 사람들이 용의자이기 때문에 누가 진짜 범인인지 추측하기가 쉽지 않고, 다들 수상쩍은 구석을 한두 개 씩 가지고 있다.
시리즈에 떡하니 이름이 붙은 '에라스트 판도린'은 외려 조연으로 등장한다. 리바이어던 호에서 수사를 진행하는 탐정은 고슈 경감이다. 에라스트 판도린은 말도 더듬고 소심한 구석이 있는 러시아인 외교관이라는 설정에 맞게 한 쪽 구석에서 흐릿하게 존재할 뿐이다. 판도린은 앞에 나서서 자신의 추리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뒤에 있다가 수사가 영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것 같으면 살짝 궤도를 수정하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 잊을 만 하면 톡톡 튀어나오는 명석한 감초랄까. 이렇게 존재감이 약한 탐정은 본 적이 없어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초반과 중반은 읽으면서 굉장히 신이 났다. 그러나 A가 범인으로 몰려 위기를 맞았지만 판도린의 논리정연한 이야기로 풀려난 뒤에는 긴장감이나 몰입도가 확 낮아져버렸다. 게다가 범인의 정체라던가 범행의 수법은 상당히 평이해서(그나마도 파트 2가 끝나면 거의 밝혀진다) 뒷부분은 지루한 감마저 있었다. 범인이 밝혀진 뒤에도 자잘한 반전이 터지는데 속도감이 없어서 없어도 되는 이야기가 덧붙은 느낌이었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는 보통 탐정과 범인의 두뇌싸움에 초점을 두는데, <리바이어던 살인>은 초점을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국적이나 문화에 따라 일어나는 갈등이나 인물의 성격, 인물들이 숨기고 있는 사연들, 인물들 사이의 묘한 심리전에 시선을 두는 편이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 것 같다.
<리바이어던 살인>은 신선하다. 추리소설이긴 한데, 추리소설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 진짜 탐정의 비중이 작고, 등장인물 모두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범인과 탐정의 두뇌싸움을 표현에 내세워서 다른 것을 캐보고 싶었던 것 같다. 재물에 대한 욕망, 물질의 소유권, 문화의 차이, 인물의 성격, 관계의 변화에 따른 시선의 변화, 그런 것 말이다. 그래서일까, 범인은 잡혔고 일은 끝났는데 뒷맛이 깔끔하지 않다. 마치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2009. 3. 2.